『여보세요』
『여기, LA입니다. 최영섭 선생님 되십니까?』
『예, 그래요』
『저는, 한상억씨 아들입니다』
『아이, 그렇습니까. 반가워요. 한선생님, 건강 괜찮으시죠?』
『…. 저, 저의 아버님이 지난밤에 돌아가셨습니다』
최영섭은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쥔 손아귀가 스르르 풀어져 나갔다. 아니 불과 열흘 전, 함께 서울 여의도 뷔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던 그가 죽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상억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자. 최영섭의 단짝이자 세상살이의 길동무가 스러진 것이다.
40년 전, 작사자 한상억과 작곡자 최영섭은 「그리운 금강산」을 만들면서 「남북통일에의 염원」을 가득히 담았다. 그러나 40년이 흐른 지금도 남북통일은 한갖 신기루일 뿐이다.
이 가곡의 작곡 당시 서른 안팎이었던 최영섭은 이제 일흔 둘이 됐다. 작사가 한상억은 이 세상에 없다. 무심한 세월만 흘렀을 뿐이다.
『「그리운 금강산」이 오랫동안 우리 국민들의, 애창가곡 1위여서 물론 기쁘다. 그러나 정작, 작곡자인 나는 실상 이 노래가 하루라도 빨리 「흘러간 옛 노래」가 되길 바랐다. 통일이 돼 동강난 조국의 산하가 하나로 이어져, 「아, 옛날, 이런 슬픈 노래도 있었구나」하는, 과거형이 됐으면 했다』
작곡가 최영섭과 詩人 한상억과의 인연은 1953년께, 인천에서 시작됐다. 그때까지도 6·25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절절했다. 그때 최영섭은 스물 넷, 한상억은 서른 여덟이었다.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여기다 한국음악협회 인천지부장, 인천교향악단 지휘자, 인천시 합창단 지휘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문화계 인사 모임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한상억이 대뜸 최영섭에게 물었다.
『고향이 어디죠?』
『강화 화도면입니다만…』
『역시…, 아까 얘길 하는 걸 들으니, 꼭 내 고향 말씨 같아 물었는데, 맞구만요. 반가워요. 난, 바로 그 이웃 동네 양도면에서 태어났소. 아~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한상억은 부자였다. 인천상업학교 출신으로 은행원도 하고 정미소도 가지고 있었다. 교사로 어렵게 사는 최영섭을 物心양면으로 도왔다.
최영섭이 음악회 개최 등으로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얼마간 보탰다. 한상억은 기독교인으로 장로였다. 그런데도 최영섭이 『선생님, 술이나 한 잔 하시죠』하면 두말없이 응했다.
술은 안 마셔도, 반가운 사람과 한잔 술을 놓고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당구장에도 이따금씩 갔다. 한상억의 당구실력은 초보였다. 도사급인 최영섭과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는 데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내비치고 당구를 쳤다.
두 사람은, 1962년 나란히 경기도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한상억 선생은, 전자회사에 다니는 아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정이 안 드는지 툭하면 서울에 왔다. 서울보다는 시골, 우리의 산과 강, 바다를 실컷 둘러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한상억은 서울에 오면 어김없이, 최영섭을 불렀다. 나이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단짝이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 때, 북한에서의 공연에서 테너 안형일이 부른 가곡 「그리워라 두고온 그 사람들」도 한상억의 詩를 최영섭이 작곡한 것이다.
그런 한상억의 죽음은, 두고두고 최영섭을 우울하게 만든다. 한상억의 마지막 고국 나들이도 따지고 보면, 고국의 산과 강, 바다 때문이었다.
심장판막증에 시달리던 한상억이 아들의 지극 정성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 90% 완치가 됐었다. 그러자 고국을 무척 가고 싶어 했다. 담당 의사는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국 나들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담당 의사의 충고는 무색했다. 한상억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았는지, 다시 못 올 모국 산천임을 알았는지, 고국의 산과 강, 바다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닌 것이다. 미국에 되돌아간 지 열흘 만에, 76세로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1961년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그때도 이미 작곡 실력을 인정받아 여기저기 작곡 의뢰가 많았다. 이때 KBS의 동요작곡가 겸 PD인 한용희에게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민족이 함께 부를, 「아름다운 강산」을 주제로 한 가곡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곧 바로 한상억을 찾았다.
『선생님, 뭐, 강산을 주제로 한 좋은 詩가 없습니까?』
『왜 없겠어. 밤낮 강과 산, 바다에 관한 詩만 써온 내가…. 염려 마. 그렇잖아도, 당신이 가곡에 써 먹을 詩를 부탁할 때가 됐지 싶었어. 준비해 놓은 게 있어. 1주일 이내로 줄게』
약속대로 그 1주일 후 詩를 받았다. 詩 「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의 가슴을 진하게 두들겼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러면서 선율이, 막힘 없이 떠올랐다.
하룻밤 만에 곡을 끝냈다. 그뿐인가 피아노 반주곡, 관현악 반주까지 작곡을 끝냈다. 최영섭으로선 「하룻밤에」 작곡을 끝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난, 엄청나게 꼼꼼하게 작곡을 하는 스타일이다.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그런데 「그리운 금강산」 만큼은 단 한번의 가필도 없었다. 신들린 듯 긁었다』
「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이 작곡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11곡 중 하나였다. 당시 작사료는 2000원, 요즘돈 35만원 정도였다.
한상억은 광복 전 이미 금강산은 너더댓 번이나 다녀 와서 금강산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詩人 한상억의 관심사는 평생 산과 강, 바다였다. 그리고 「눈내리는 밤의 초가」, 「대숲에 이는 바람」, 「봄날, 산등성이에 피는 꽃들」을 미치게 사랑했다. 갈데 없는 서정시인이었다.
『내가 이제껏 작곡한 600여 곡 중 한상억 선생의 가사가 60곡쯤 된다. 특히 「그리운 금강산」은 나의 오늘을 있게 한 1등 공신이다. 한상억 선생은 내게 친구이자 형이었다』
2000년 5월15일 오후 6시30분. 최영섭은 동해항에서 금강호를 타고 금강산을 찾아 나섰다. 「그리운 금강산」을 가장 많이 부른 메조 소프라노 김학남이 동행했다.
금강호 선상에서 김학남이 「그리운 금강산」을, 열정을 다해 불렀다. 김학남은 6·25 한국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된 뒤 석 달 만에 태어나, 「금강산」에 유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5월16일 오전 7시 북한 온정리 항에 도착. 그러나 난생 처음 본 북한의 山河는 짙은 안개와 억수 같은 비 때문에 10m 앞도 안 보였다. 구룡폭포에도 갔지만 마찬가지였다. 하릴없이 배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17일에는 더없이 화창했다. 北의 안내원이 한 마디했다.
『어제는, 날씨가 엉망이었댔지만, 오늘은 몇 년 만에 보는 쾌청한 날씨입네다. 이번에 오신 분들은 복 받은 거이디요』
다시 구룡폭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려인으로 태어나 금강산을 못 보고 죽다니, 한이 된다』고 한 소동파의 말이 실감이 났다.
첫날의 찜찜하던 마음이 어느새 달아 나고 없었다.
18일엔 만물상을 봤다. 너무 깨끗했다. 속세가 아니었다.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휴지조각, 담배꽁초가 나뒹구는 서울 남산을 떠올렸다. 금강산이 너무 깨끗하니까, 「사람사는 냄새」가 안 났다. 그게 되레, 내 마음을 썰렁하게 했다』
북한 안내원들은 아주 친절했다.
최영섭은 북한의 금지곡인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라는 게 지레 맘에 걸렸다.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래 「최영섭」이라 쓴 명찰을 북한 안내원이 금방 알아 볼 수 없도록 거꾸로 달고 다녔다.
그걸 잽싸게 본 북한 안내원이 불쑥 한마디 내질렀다.
『아니, 선생님은 왜 명찰을 거꾸로 달고 다니시는 겁네까?』
『이보시오, 노인네가 명찰을 거꾸로 달든 바로 달든 그게 무슨 대수요?』라며 슬쩍 눙쳤다. 그러자 북한 안내원도 머쓱했던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은 봤지만, 정작 금강산에선 「그리운 금강산」은 부를 수가 없었다. 김학남은 물론 최영섭도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인천중 3학년 때, 수학여행 예정지가 금강산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 어수선한 政局 때문에 수학여행은 취소됐다. 그러니, 금강산을 보는 감개는 정말 무량했다. 금강산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했다는 게 늘상 맘에 걸렸다. 금강산에 빚진 기분이었다. 그 빚을 갚는다는 생각에서 「그리운 금강산」의 후속곡을 작곡하리라 맘먹었다』
그 두 달 후 「금강산 사계연가곡」인 「아 금강산아」의 작곡을 마무리했다.
연가곡은 「봄이 오는 소리(봄)」 「놀라운 손길(여름)」 「천년의 그리움(가을)」 「고난의 숨결 그리고 우리 그날그날에(겨울)」 등 4곡. 모두 홍일중 작사다.
「봄」엔 웅대무비하고 준험한 금강산을 담았다. 「여름」엔 구룡폭포와 해금강의 장관을 그렸다. 「가을」엔 끝없는 그리움을 담았다. 「겨울」은 얼어 붙은 금강산을 표현했다. 그러나 사계연가곡의 메시지는 「통일에의 열망」이다.
『난, 「금강산」 때문에 먹고 살고, 또한 유명 작곡가가 된 것 같다. 사계연가곡 중 「천년의 그리움」의 반응은 엄청나다. 「그리운 금강산」이 히트하는 데 10년이 걸린데 비해 「천년의 그리움」은 3~4년 안에 히트할 것 같은 조짐이다. 여러 사람들이 「천년의 그리움」이 「그리운 금강산」보다 더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다고 한다』
「천년의 그리움」은 메조 소프라노 김학남과 테너 박세원이 불렀다.
그는 금강산 사계연가곡인 「아 금강산아」의 CD 표지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 금강산처럼, 내 인생은 너무 굴곡이 심했다. 그러나, 그게 다 내 팔자인 걸』
최영섭은 그동안 가곡을 위한 詩作(시작)에도 손대 詩 「촛불」로 詩人 박목월의 추천까지 받기도 했다. 가곡 「망향」은 그가 「고운산」이란 필명으로 작시, 곡을 붙인 것이다.
비엔나 국립대 지휘과 칼, 웨스트라이히 교수에게서 지휘법을 사사하기도 했다. 음악교직에 30년, 이와 함께 음악 방송에 30년을 보냈다.
MBC 방송대상(1987년), MBC 가곡공로대상(1994년), 대한민국 방송대상 수상(1992년), 세종문화상 수상(1998년) 등 굵직굵직한 상도 받았다.
1995년에는, 임진왜란에서 6·25에 이르는 영욕의 민족사와 통일의 염원을 담아 낸 交聲曲(교성곡)-「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을 작곡했다. 1~2부 全 24장 구성으로 연주시간만 1시40분짜리 대작이다.
『강과 산, 바다를 주제로 작곡한 작품이 30여 편 된다. 대강의 줄거리를 연결해 24장의 교성곡으로 정리해 보니 353페이지의 방대한 악보가 됐다. 우리나라 산과 강을 노래한 한상억-석용원-김윤기-주영하-노향림의 詩를 주요 대본으로 했다. 아리랑을 4중창과 풀 코러스로 편곡해 환상곡으로 처리하고, 이별가, 만가 등 전래민요도 새롭게 편곡했다』
한상억이 죽은 뒤 詩人 조병화는 언젠가, 최영섭을 만나 한 마디 했다.
『이보게, 한상억 단짝이 죽었으니, 이젠 나하고 단짝이 돼야 하네』
조병화와는 그전에도 인연이 적지 않았다. 조병화의 詩에다 곡을 붙인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도 수입은 적지 않다. 물론 대부분이 작곡료다. 교가, 사가 등의 작곡의뢰가 심심찮게 날아 든다. 한 곡당 작곡료는 우리나라 최고 수준인 500만원 정도. 여기다 「그리운 금강산」 등의 작곡인세가 매달 200만원 정도 된다.
국내 인세보다 되레 외국 인세가 더 많다. 「그리운 금강산」은 국내외 정상급 성악가 50여 명의 CD에 담겨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소프라노 홍혜경이 같이 취입한 CD와 LD, 그리고 세계적 음반회사 데카에서 낸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의 레이블 「My World」에도 「그리운 금강산」이 끼여 있다.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독주곡에도 끼여 있다.
여기에 아들 셋다 모두 제 갈길을 잘 가고 있다. 큰 아들 성원(46)이 음반기획자, 둘째 성종(44)도 음반회사에 관계하고 있고 막내 성인은 SBS 방송의 PD다.
최영섭은 가곡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의 詩)과 「추억」(조병화의 詩) 등에도 진한 애정을 가진다. 「그리운 금강산」보다 덜 유명하지만, 「진한 서정」과 「젊은 날의 초상화」가 담겨 있는 이 가곡들을 엄청 아끼는 것이다.
『앞으론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만들려고 한다. 어차피 산다는 게, 영욕과 영광, 음지와 양지의 연속이겠지만, 음악이 있어 내 인생은 참 아름다웠다. 앞으로도 음악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게 내 인생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끔씩, 일상이 너무 답답하면 어딘가로 탈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