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철학·군사, 문예, 기타 영역을 망라한 중국혁명의 여러 면에서 창조적으로 응용했고 창조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문화대혁명」 중 커다란 착오를 범하여 우리 당과 나라와 인민에게 많은 불행을 안겨다 주었다』(등소평)
毛澤東은 남방 출신답게 北京에 오래 머물기보다는 남방 여행을 즐겨 했다. 연고가 있는 광주를 비롯하여 杭州(항주), 무한, 上海 등지로 지방 나들이를 좋아했다. 한번 北京을 떠나면 몇 달씩 여행을 했다. 그 사이 사이 노동절 등 국경절과 北京에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에만 北京에 갔다. 1956년 6월에도 毛澤東은 광동을 찾았다. 毛澤東은 광주의 珠江(주강)에서 수영을 했다. 수질 오염이 심하다고 해서 주변에서 말렸으나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영을 배워 물 위에서 지내는 데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또 그는 그나름의 泳法(영법)을 통해 처세와 철학에 응용하기도 했다. 온몸의 힘을 빼고 물의 흐름에 몸을 맡겨 천천히 물살에 따라 수영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가 강폭이 넓고 물살이 센 揚子江(양자강)에서 세인의 주목을 받으며 세 번씩이나 수영을 했던 것도 이런 영법을 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광주 주강 수영을 끝내고 모택동은 호남 제1사범학교를 다녔던 長沙(장사)로 가서 湘江(상강)에서 다시 수영을 할 계획을 세웠다. 모택동의 詩 「심원춘 장사」에 나오는 그 상강이다. 그 다음은 武昌(무창)에서의 양자강 수영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상강은 주강보다는 물살이 셌다. 그러나 모택동은 자기의 영법 그대로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다니다시피하며 상강 강심에 있는 귤자주섬에 닿았다.
무창에서 예정대로, 또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의 우려 속에서 모택동은 수영을 즐겼다. 무창에서 강을 가로 질러 헤엄쳐 나갔다. 모택동은 이때 「遊泳」이라는 詩를 썼다.
방금 장사의 물을 마셨는데
또 무창어를 맛보누나
만리 장강 건너며 쳐다보니
초나라 하늘 가없이 넓구나
바람 세차고 파도 사나워도
아늑한 정원의 산보보다 낫거니
오늘 내 마음 후련하여라
공자 냇가에서 이르되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느니라」
바람에 돛대 움직이고
구산, 사산 고요한데
웅대한 구상이 펼쳐졌네
큰 다리 나는 듯 남북으로 놓이나니
천험이 대통로되리
그뿐이랴 서강에 석벽을 쌓아
무산의 구름이 가로막으면
높은 산 골짜기에 호수 나타나리
무산의 신녀는 무사하리니
이 세상의 변천에 정녕 놀라리라
속마음 나타내기 위한 수단-詩
모택동은 여행을 다니면서 때 맞추어 자기의 속마음을 詩로써, 詩를 통한 隱喩(은유)로써 곧잘 나타내곤 했다. 「큰 다리 나는 듯 남북으로 놓이나니」는 앞으로 건설될 武漢大橋(무한대교)에 대한 기대였고, 「높은 산 골짜기에 호수 나타나리」는 孫中山(손중산) 이래 중국인의 꿈이었던 三峽(삼협)댐을 말한다. 이 詩 작품도 시기적으로 묘한 餘韻(여운)과 암시를 준다.
필자가 모택동의 고향 韶山(소산)을 둘러보고 인근의 滴水洞(적수동)을 찾은 것이 1998년 1월17일, 장사에서의 둘째날이었다. 적수동이라 해서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무슨 동굴 같은 것으로 알고 갔는데, 거기 모택동의 별장이 있었고 그 이름이 바로 적수동이었다. 그를 위해 마련된 침실과 침대가 공개되고 있었다.
1959년 6월25일, 모택동은 고향 韶山을 찾았었다. 그때 그가 쓴 「到韶山」이란 詩를 보면, 「이별은 꿈 같구나 저주로운 지난 세월/ 서른두 해 전의 고향이여」로 시작하여 「물결치는 벼이삭 즐겁게 보나니/ 전지의 영웅들 저녁 연기 속에 돌아오고 있구나(別夢依稀 逝川/ 故園三十二年前… 喜看稻菽千重浪/ 遍地英雄下夕煙)」로 맺고 있다. 32년 만의 금의환향이었다. 그러나 그 歸鄕(귀향)은 사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기적과 승리의 歸鄕이었다.
1936년 에드거 스노와 함께 연안 지방을 찾아 홍군의 혁명사업을 직접 목격하였던 미국인 의사 조지 하템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1984년 어느 기자로부터, 당시부터 등소평을 알고 있었느냐, 또 등소평이 장래의 중국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 적이 있었다.
『등소평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모택동이 중국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당시 그들의 혁명이 우리 세대에서 성취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 가서나 혁명이 성취되리라고 보았다. 모택동이 죽고 나서 말이다』
毛는 경치가 빼어나고 아늑한 골짜기인 이곳 적수동의, 현재의 별장 입구에 있는 작은 저수지에서 호남성 성장과 함께 수영을 했다고 한다. 모택동이, 늘그막에 고향을 찾아 조용하고 아늑한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뒤에 나오지만, 여산을 바라보며 陶淵明(도연명)의 경지를 부러워 했던, 그런 마음에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후 중공 中南局(중남국)의 제1서기 陶鑄(도주)가 적수동 별장을 완성했다.
「9」를 좋아한 모택동
이곳은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된, 아주 외딴 골짜기인데, 모택동 자신은 이곳 지리를 잘 알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곳 숲속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줍기도 하고, 언덕 꼭대기에 있는 「할머니 바위」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어린 꿈과 소망을 빌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곳에 北京 中南海(중남해)의 모택동 거처를 본딴 별장이 들어선 것이다. 모택동을 위해 만든 침대가 특이했다. 평소 모택동이 사용하고 있는 침대와 규격이 같다고 했는데, 안내하는 사람의 말로는 가로 세로 길이가 1.9m와 2.9m라는 것이다.
9는 가장 높은 자리이며, 역대 중국 황제들이 좋아했던 吉數(길수)이다. 모택동이 추수봉기를 일으켰던 날이 1927년 9월9일이며, 여기서 실패하고 그는 정강산으로 갔다. 모택동은 1976년 9월9일 새벽 0시 10분에 殞命(운명)했다.
지척에 있는 모택동과 유소기의 기념관
필자는 1998년 1월, 소산과 적수동을 찾아 가는 길에 화명루에 있는 유소기의 고거와 기념관을 찾았다. 유소기가 중남해에서 살던 때의 침대와 가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이곳에 옮겨져 있었고, 타고 다니던 지프와 비 올 때 신었던 長靴(장화)까지도 전시실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花明樓 劉小奇記念館」이란 이름의 글씨는 등소평이 썼고, 1988년11월24일에 개관식을 가졌다. 3년 뒤인 1991년 3월11일 현재 중국의 최고 지도자 江澤民(강택민)이 기념관을 참관했다.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유소기의 고향에 거대한 동상과 기념관이 서 있다고 하면 한국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란히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런 중국을 보는 필자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
유소기가 태어난 곳은 炭子沖(탄자충)이란 이름의, 호수가 있는 매우 아름다운 시골이다. 이곳은 호남성 성도인 장사와는 50km, 모택동의 고향 소산과는 불과 38km. 한때는 더없는 동지였다가 나중에 가해자와 피해자로 운명을 바꾼, 모택동과 유소기 두 사람의 동상과 기념관, 고거들이 咫尺(지척)의 거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것도 모택동이 즐겨 말하는 「대립물의 통일」일까?
하나가 있으면 그와 대립되는 모든 존재는 말살되어야 하고, 다시 세상이 바뀌어 그 대립적 존재가 긍정되면 어제의 긍정이 하루 아침에 否定(부정)되고 마는 한국의 정치현실이 문득 떠올랐다. 기념관도 동상도 상상할 수 없다. 설령 세워진다 해도 어느 순간의 비바람에 허물어질지 모른다. 대립하는 것은 영원히 대립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그러한 한국에서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모택동의 논리는 영원히 발붙일 수 없을 것이다.
등소평의 毛 평가
오늘의 중국 憲法(헌법)은 「모택동 사상」과 「등소평 이론」을 함께 명시하고 있다.
등소평은 모택동을 확실한 중국의 최고 영도자로 모셨으나, 모택동을 인식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조금 특이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을 神格化(신격화)하지 않고 집단 영도의 대표격으로 존중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단호했고, 그래서 고난도 많이 겪었다.
그는 1960년 3월, 「모택동 사상을 정확하게 선전하자」라는 보고에서 『우리 당은 집단 영도체제이고, 모택동 동지는 이 집단 영도체제의 대표자이고, 우리 당의 수령이기 때문에 그의 지위와 작용은 일반적인 영도 집단의 성원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모택동 동지와 당 중앙을 갈라놓을 수는 없으며, 모택동 동지 역시 당의 집단 영도 가운데 하나의 성원으로 간주해야 하며, 우리 당 內에서 그이의 작용을 실제에 맞게 평가해야 한다. 모택동 동지는 집단 영도를 존중해 왔다』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등소평은 모택동의 업적과 과오에 대해 시기별, 분야별로 확실하게 짚어서 평가한다.
『長征(장정)의 前 단계에 모택동 동지의 지휘가 없었기에 착오를 범하여 홍군 제1방면군으로 하여금 8만명으로부터 3만명으로 줄어들게 하였다. 준의에 이르러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즉 준의회의를 열어서야 비로소 모택동 동지의 영도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당내 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모택동 동지의 정책은 당내의 단합을 이룩하여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기게 하였고 장정을 완수했다. 장정이 끝날 때까지도 모택동 동지는 당의 총서기가 아니었지만, 준의회의 이후 모택동 동지는 우리 당의 핵심영도로 자리잡았다』
『毛는 말년에 左로 기울어 실패』
『총체적으로 볼 때, 1957년 이전의 모택동 동지의 영도는 정확하였고, 1957년 反右派(반우파)투쟁 이후부터 착오가 점점 많아졌다』(1980. 4. 1)
등소평은 1980년 8월21일에서 23일 사이 이탈리아 여기자 올리아나 팔라치와 만나서 많은 애기를 나누었다. 「鄧小平文選」 제2권에 나와 있는, 등소평의 모택동에 관한 언급 부분만을 골라 보자.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철학, 군사, 문예, 기타 영역을 망라한 중국 혁명의 여러 면에서 창조적으로 응용했고 창조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그는 晩年(만년)에, 특히 「문화대혁명」 중에 커다란 착오를 범하여 우리 당과 나라와 인민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당은 延安(연안) 시기에 여러 면에서의 그의 사상을 「모택동 사상」으로 개괄하여 우리 당의 指導思想(지도사상)으로 삼았다. 우리가 모택동 사상을 따랐기에 위대한 혁명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모택동 사상은 모택동 동지 개인의 창조물은 아니다. 1世代(세대) 노혁명가들 모두가 모택동 사상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에 그는 신중하지 못하였고, 만년에 일부 「左」적인 사상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만년에 그는 원래의 사상, 원래의 아주 훌륭하고도 정확했던 주장과 사업 作風(작풍)들을 포기하였다. 이때 그는 실제와 접촉하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생전의 그는 이전의 양호한 작풍, 이를테면 民主集中制(민주집중제), 群衆路線(군중노선)을 제대로 관철하지 못했고 양호한 제도를 제정하지도 못했다.
이것은 모택동 동지 개인의 결점일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일세대 노혁명가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시 우리 당의 정치상황, 나라의 정치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 家父長的(가부장적) 작풍이 번져나가고 개인을 노래하는 일이 많아지는 등 전반 정치상황이 건전하지 못하여 나중에 「문화대혁명」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毛의 고향 방문을 끝내고 모택동은 양자강과 陽湖(파양호)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경관이 수려한 휴양지 廬山(여산)으로 간다. 긴장과 파란이 기다리고 있는 그 여산에서 그는 또 한 편의 詩를 짓는다.
여산에 올라 (登 廬山)
장강 가에 날아갈듯 우뚝 솟은 여산
사백 굽이 수풀길 단숨에 올랐노라
냉정한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나니
열풍은 비를 몰아 강천에 뿌리누나
구름 비낀 구파에 황학이 떠있고
파도 치는 삼오에 흰 연기 피어나네
도연명은 어디로 갔는가 알 수 없는데
도화원에서 씨 뿌리고 밭 갈 수 있을까
(1959년 7월1일)
지도를 보면 廬山風景勝區(여산풍경승구) 인근에 「陶然明紀念館」이 들어서 있다.
도연명은 술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몇 편의 輓歌(만가)를 썼다. 그 중의 한 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천추 만세 후에
누가 인간의 영욕을 알겠는가
이승에서 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실컷 술을 마셔보지 못한 것뿐
(千秋萬歲後/ 誰知榮與辱/ 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
필자 같은 사람이 도연명의 술의 경지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중국 천지를 바쁘게, 오로지 기차와 자동차만 타고 돌아다니던 무렵의 필자 역시 때때로 술을 벗삼았다. 기차나 배 안에서 한두 잔의 白酒(백주)를 음미하는 것을, 그 자체가 仙(선)의 경지에 가까운 것으로 스스로 느끼며 즐거워했다. 최소한 그런 自慰(자위)라도 없었더라면 2만5000리가 넘는 필자의 고행 길은 고행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었다.
도연명에 화답한 모택동 詩
32년 만에 고향을 찾은 모택동의 心中(심중)도 기실은 尋常(심상)치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構想(구상) 속에 여산회의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詩의 마지막을 「도연명은 어디로 갔는가 알 수 없는데/ 도화원에서 씨 뿌리고 밭 갈 수 있을까」로 끝맺고 있다.
이 구절은 도연명의 그 유명한 「歸去來辭」에 대한 일종의 화답이라 할 수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 돌아가리라/ 전원엔 곧 잡초가 무성하리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로 시작된다. 이미 여산의 태풍을 예견하고 있던 모택동에게 있어 도연명의 귀거래는 아직도 먼 훗날의 일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정강산 이래의 옛 동지를 버리며 새로 숙청 바람을 일으키는 非情(비정)에 대한 염증과, 그런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불현듯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는 도연명을 찾았고, 과연 내가 무릉도원에서 씨 뿌리고 밭갈이나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스스로 번뇌와 회의에 빠져보기도 했던 것은 아닐까. 이 詩의 중간에 나오는 다음 詩句(시구)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냉정한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나니
열풍은 비를 몰아 강천에 뿌리누나
(冷眼向洋看世界/ 熱風吹雨酒江天)
그가 바로 그 열풍의 연출자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모택동은 대장정과 抗日전, 國共내전을 지휘하고, 준의회의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고,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그의 옛 동지들을 曠野(광야)로 팽개치는, 그 모든 어려운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냉정했다.
모택동의 승리는 20세기가 창출한 하나의 奇蹟(기적)에 속한다. 또한 그의 失敗(실패)는 지나친 精神主義(정신주의)의 坐礁(좌초)와 비극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산, 주은래는 물, 등소평은 길
필자는 모택동이 산이라면 주은래는 물이고, 등소평은 길이라는 생각을 한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을 만든 것이 오늘의 중국 혁명이었다. 그들은 각자 시대의 召命(소명)을 「有功有過」의 경지에서 나름으로 수행하여 오늘의 중국을 일구어 냈다. 출생지만 해도, 모택동은 호남성 소산 출신이고, 주은래는 물이 많은 강소성 淮安(회안) 출신이다. 등소평은 「蜀道」로 일컬어지는 사천성의 廣安(광안) 출신으로, 사방으로 막힌 길을 뚫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산은 남 앞에 우뚝 서기를 좋아하고, 하늘 가까이에서 남을 아래로 내려다 본다. 산은 實體(실체)가 분명하고 항상 비 바람과 맞선다. 물은 언제나 公平無私(공평무사)하다. 산의 獨尊(독존)과 我執(아집)도 물 속에 삼켜버리고, 自淨(자정)과 順理(순리), 忍辱(인욕)과 獻身(헌신)으로 일관한다. 산에서 바로 길이 나지 않고 물을 건너서 길이 생겨난 것이 등소평 길의 강점이다. 혁명의 理念性(이념성)을 원천으로 하되 현대화와 세계화라는 濾過(여과)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고속도로를 닦은 사람이 등소평이었다. 중국은 이 道程(도정)을 「제2의 長征」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택동을 산에 비유할 때마다 생각나는 모택동의 詩가 있다. 1934년에서 1935년 사이, 대장정 행군 길에 자신이 지나온 험준한 산들을 노래한 詩다. 어쩌면 그 산들이 모택동 자신의 인생 역정과 自畵像(자화상)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많다.
十六字令 三首
其一
산!
닫는 말에 채찍질하며 안장에서 안 내렸네
돌아보니 놀랍구나
하늘과 사이 석자 세치로다
其二
산!
강과 바다 뒤집히는 듯 세찬 파도 출렁이네
네 굽 안고 내달리며
만마가 싸움에 한창이네
其三
산!
푸른 하늘 찌르고도 서슬이 퍼렇구나
하늘이 무너지려는데
그 사이를 버티어 섰네
혁명 1세대와 文革派의 대립
장정에 참가했고 건국 초에 정부 요직에도 있다가 문화대혁명 때 수난을 겪은 한 사람이 모택동을 평하여 『모택동은 사람들을 改造(개조)하는 데 있어 매우 탁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洛甫(낙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진 張聞天(장문천)이 한 말이다. 그는 駐(주)소련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모택동과 함께 장정에 참가했거나 고난을 같이 나누었던 혁명 1세대 중에서 임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문화대혁명 때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그 고초는 「개조」를 위한, 그런 수준의 고초가 아니었다. 「개조」의 수준을 훨씬 넘어 어떤 파괴력에 의해 인생 자체가 망가지는, 황당하기까지 한 수난이었다.
1967년 2월에 있었던, 이른바 「2월 逆流」 사건만 해도, 일방적으로 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척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월14일과 16일 이틀에 걸쳐 중남해에 있는 懷仁堂(회인당)에서 주은래가 주관하는 당 중앙연락회의가 열렸다.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할 문제에 대해 토의하는 모임이였다. 첫날에 이어 16일에도 文革派(문혁파)와 노간부들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부총리 潭震林(담진림)이 張春橋(장춘교)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
『군중이란 게 도대체 무어요? 말끝마다 군중, 군중 하는데 그래 당의 영도는 어디 갔단 말이오? 당신들은 사실상 당의 영도를 부정하고 있소…. 당신들의 목적은 老간부들을 몽땅 타도하려는 것이오. 40년간이나 혁명한 老혁명가들이 하나하나씩 당신들에게 타도되어 온 집안이 피신을 가고 妻子(처자)들이 흩어졌소….
이번 투쟁은 우리 당의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투쟁이오. 그 동안의 그 어떤 투쟁보다 더 심한 투쟁이란 말이오. 江靑(강청)은 대놓고 나를 反革命(반혁명)이라고 말했소. 난 그의 보호가 필요없소. 나는 그를 위해 사업하는 것이 아니라 당을 위해 사업하는 거요』
담진림은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고 서류를 챙겨들고 휑 하니 밖으로 나가면서 『당신들이 다 하시오. 난 안하겠소. 머리가 날아가고 감옥에 갇히고 당에서 제명된다 해도 끝까지 투쟁할 테요』라고 외쳤다.
주은래가 돌아오라고 엄하게 나무랐다. 그러자 진의가 거들었다.
『가긴 어디를 가는 거요? 여기 남아 투쟁을 견지해야지. 이런 자들이 올라 앉으면 수정주의를 실시할 거요』
그러면서 진의는 연안 시절, 그와 주은래가 整風(정풍)운동 당시 비판을 받았었던 일에 대해 언급했다. 이어 全軍(전군)문화혁명소조의 조장직을 맡고 있던 徐向前(서향전)까지도 책상을 두드리며 문혁파를 공격했다.
블랙리스트 1호 왕명
이 자리에서만은 장춘교, 姚文元(요문원)들 문혁파들은 피고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곧 반격이 개시되었다. 이들은 낮에 있었던 사실을 강청에게 보고하고 밤늦게 모택동에게까지 찾아 가서 보고했다. 보고를 듣고 있던 모택동은 처음에는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듣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장춘교가, 진의가 연안 정풍 때의 일을 거론했었다고 보고하자 모택동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그래 연안 정풍이 틀렸단 말이오? 王明(왕명)네 패거리를 모셔 와야 한단 말이오?』
모택동의 입에서 왕명의 이름이 거론되자 장춘교와 요문원은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택동의 블랙리스트 제1호가 왕명이고, 2호는 張國燾(장국도)였다. 왕명은 소련 유학파로 소련이 중공당에 파견한 인물이었다. 소련의 힘을 배경으로 중공당의 주도권을 쥐고 소련의 혁명노선을 대변하고 있었다.
모택동이 정강산과 瑞金(서금) 일대에 소비에트 지구를 만들고 농촌에서 토지혁명과 군사작전을 병행하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소련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모택동이 장정 초기까지 당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모택동의 激怒(격노)가 회의장 분위기를 압도해 버렸다. 1967년 2월18일 밤중에 갑자기 회의가 소집되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려는 짓은 어림도 없는 일이오. 회인당에서 소란을 피워댄 것은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것이오. 유소기와 등소평이 집권을 하고, 나는 임표와 함께 南下(남하)하여 다시 정강산에 올라 유격전을 벌여야겠소.
陳伯達(진백달)과 강청은 총살하고, 康生(강생)은 유배를 보내야 할 거요. 중앙문화혁명 소조를 再조직하여 진의가 조장을 맡고 담진림이 부조장을 맡으며 여추리가 조원 일을 맡아 하시오. 그래도 모자라면 왕명과 장국도를 청해 오고, 또 미국과 소련도 청해 오시오』
2월25일부터 3월18일까지 이른바 「정치생활회의」가 회인당에서 7차례나 열렸다. 강청 등은, 『毛주석의 혁명노선에 반대한다』 『일부 한줌의 走資派(주자파)를 옹호한다』 『연안 정풍을 반대한다』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며 老간부들을 몰아붙이면서, 老혁명가들의 불만과 激情(격정) 토로를 「2월 逆流」라고 이름붙여 매도하였다. 3월18일, 진의, 담진림과 서향전이 비판을 받고 집에서 휴식하며 반성문을 쓰기로 결정되었다. 그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 두 달 뒤인 1967년 4월30일에 모택동은 느닷없이 주은래 등 옛 동지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무마와 화해를 위한 자리였다. 주은래와 이부춘, 진의, 엽검영, 서향전, 섭영진, 담진림, 이선념 등이 참석했다. 오래간만에 동지들 간의 친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모택동은 몇몇 부총리와 군사위원회 부주석들의 개인 정황들을 일일이 물어보고 말을 건넸다.
『오늘은 단결 모임입니다. 우리는 어쨌든 단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택동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 나는 「회인당을 소란시켰다」는 일이 어찌된 판국인지 몰랐습니다. 그후 나는 몇 번 회보를 보고받고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회의에서 말한 것은 모두 元帥(원수)들이 운동에 대해 의견이 있어서 푸념을 한 데 불과한 것이고, 그런 말들을 당의 회의에서 했으니 그건 陰謀(음모)가 아니라 陽謀(양모)입니다. 앞으로 무슨 의견이 있으면 나에게 직접 제기하십시오』
모택동은 다시 담진림을 향하여 웃으며 말했다.
『담老板(로반), 그래 성이 내려 갔습니까? 나는 성이 다 내려 갔습니다…. 우리 서로 욕설을 퍼붓지 않을 君子協定(군자협정)을 맺는 게 어떻겠습니까?』
哄笑(홍소)가 터졌다. 모처럼 청량제를 마신 것 같은 시원함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날 이후 실제로 바뀌어진 것은 없었다. 1967년 봄철이면 문화대혁명의 黎明期(여명기)라 할 수 있다. 이제 막, 이른바 모택동의 새로운 「계급투쟁」과 「혁명투쟁」이 불꽃을 피워대고 있었고, 그 어딘가에 숨겨진 큰 그림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시기였다.
모택동 一家 6명의 橫死
모택동의 一家(일가)로 혁명에 참가했다가 희생된 사람이 6명이나 된다고 알려져 있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양개혜이다. 연인이었고 아내였던 양개혜는 모택동과 헤어져 지하활동을 하다가 국민당에 잡혀서 처형되었다. 그 밖의 다섯 사람은 모두 毛씨 성을 가진 가까운 일가이다. 모택동의 누나뻘이 되는 毛澤健이 1929년 강서성에서 희생되었고, 모택동의 조카로 알려진 毛楚雄이 그보다 앞서 1928년 8월20일에 국민당군에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동생 毛澤民과 毛澤潭, 그리고 아들 毛岸英의 희생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96년生으로 모택동보다 세 살 아래인 모택민은 1943년 중국 新疆(신강)에서 군벌 成世才(성세재)에게 처형당했다. 그 밑의 동생 모택담은 그보다 앞서 1935년 4월25일, 강서성 서금 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희생되었다.
아들 모안영은 자원해서 한국전에 참전하여 팽덕회 사령관의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있었다. 당시 평안북도 어느 산골에 있던 지원군 사령부 집 어귀에서 때마침 날아든 美軍機(미군기)의 폭격을 맞고 희생되었다.
모택동의 統一戰線 전략
흔히 공산당의 統一戰線(통일전선) 전략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있다. 모택동의 통일전선 전략이 특히 유명하다. 중공 중앙은 1935년 12월27일에 섬서성 북부 와요보에서 중공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를 열었다. 그동안 당내에는 항일 전선을 펴는 데 있어서 중국의 민족자산계급과, 노동자, 농민 계급은 연합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모택동에 의해 전술상의 수정이 이루어졌다. 민족자산계급과 노동자, 농민이 연합해서 항일전의 連帶(연대)를 더욱 굳건히 다지고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라는 보고서를 통해 항일 연대를 설득하고 강조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통일전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는데, 특히 그는 혁명의 장기적 성격을 내세워 혁명에 대한 躁急症(조급증)과 속좁은 閉鎖主義(폐쇄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먼저 홍군과 장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하늘이 우물만큼 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왜냐 하면 하늘은 우물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늘의 어느 한 부분이 우물만큼 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다. 왜냐 하면 이것은 사실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홍군은 한 면(본래의 진지를 보전하는 면)에 있어서는 실패하였으나, 다른 한면(장정계획을 완수한 면)에 있어서는 승리하였고, 적들은 한 면(아군의 본래의 진지를 점령한 면)에 있어서는 승리하였으나 다른 한 면(포위 토벌, 추격 토벌의 계획을 실현하는 면)에 있어서는 실패하였다고 우리는 말한다. 이렇게 말하여야만 적절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장정을 완수하였기 때문이다』
이어 모택동은 장정에 대해 말하는데, 그 유명한 播種論(파종론)도 여기서 유래한다.
『장정은 有史(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며, 장정은 宣言書(선언서)이며, 장정은 宣傳隊(선전대)이며, 장정은 播種期(파종기)이다…. 장정은 11개 성에 수많은 종자를 뿌려 놓았다. 그 종자가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어 앞으로 수확이 있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장정은 우리의 승리로, 적의 패배로 끝마쳤다』
『지금은 대변동의 前夜(전야)이다. 당의 과업은 홍군의 활동과 전국의 노동자, 농민, 학생, 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의 일체 활동을 합류시켜 통일적인 민족혁명전선을 형성하는 데 있다』
혁명의 길은 屈曲的
모택동은 통일론에 반대하는 것을 小兒病(소아병)에 비유하여 공격하였다.
『사람 가운데는 세 살 먹은 어린 아이가 있다. 세 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도 옳은 생각이 많겠지만 아직 天下大事(천하대사)를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천하대사를 맡길 수는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대열 內에 있어서 소아병을 반대한다. 폐쇄주의 전술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바로 소아병이다.
혁명의 길도 세상의 모든 사물이 활동하고 있는 길과 마찬가지로 곧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屈曲的(굴곡적)이다. 혁명과 反혁명의 戰線(전선)도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변동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동될 수 있다』
점과 점을 잇는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다. 이것은 數學的(수학적) 논리이다. 그러나 사회 현상은 수학적 직선을 용인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변화와 走行(주행)에 직선이란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둘러서, 길을 따라, 길을 만들어 가는 굴곡적인 주행이 사실은 최단 거리인 것이다. 대체로 혁명이라고 하면 직선을 연상하기 쉬운데 모택동은 혁명의 길이 굴곡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굴곡은 이미 있는 굴곡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만들어 가는 굴곡이었다. 대장정이 그랬다.
현실주의에 기초한 모택동의 전술
모택동의 여러 저술과 논문 중에서 역시 특출한 것은 군사 분야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 1936년 12월」, 「持久戰(지구전)을 논함: 1938년 5월」을 꼽을 수 있는데, 모택동 전술의 기초는 현실주의와 역사 인식이였다. 그는 모든 사물에서 경험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대신 일반적인 공식이나 敎條的(교조적)인 것을 배척하였다. 그는 그가 경험했던 특수성을 보편적인 일반논리로 끌어 올리려고 하였다.
『지금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다. 우리의 전쟁은 혁명전쟁이다. 우리의 혁명전쟁은 중국이라는 이 反식민지-反봉건적인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 전쟁의 법칙도 연구해야 하며 또한 특수한 중국혁명전쟁의 법칙도 연구해야만 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 일의 定型(정형), 그 일의 성격, 그 일과 다른 일과의 연관성을 모르면 그 일의 법칙을 알 수 없고, 어떻게 그 일을 할 것인가를 알 수 없으며 그 일을 잘 할 수 없다』
모택동은 이와 같이 일반적인 전쟁법칙과 혁명전쟁의 법칙, 중국혁명전쟁의 법칙을 고루 궤뚫어야만 중국의 혁명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옛날 식의, 「반동적 중국정부」나 「반동적 중국군사학교」에서 출판한 군사교범을 그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 교범들은 일반적인 전쟁의 법칙이나 외국의 것을 베껴 쓴 것이므로 그대로 옮겨다 쓴다는 것은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는 격』이라고 했다. 모택동은 『과거에 피를 흘려 얻은 경험을 존중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겠지만 자기 자신이 피를 흘려 얻은 경험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승리한 소련의 혁명전쟁을 중국혁명전쟁의 典範(전범)으로 삼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 아무리 승리한 혁명전쟁이라 하더라도 소련의 혁명은 소련의 국내전쟁과 붉은 군대의 특수성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것대로 참고하되, 『중국혁명과 중국 홍군은 또 자기의 허다한 특수사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혁명 전쟁의 경험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의 지도법칙은 전쟁의 유영술』
또한 모택동은 전체 국면과 부분적인 것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한 수만 잘못 두어도 지게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부분적인 성격을 띤 한 수, 즉 전반 국면에 대하여 결정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 한 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 국면성을 띤 한 수, 즉 전반 국면에 대하여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 한 수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바둑을 두는 데에 있어서 이러할 뿐 아니라 전쟁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쟁의 역사에서는 連戰連勝(연전연승)하다가도 한 차례의 패배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여러 번 패전하다가 한 차례의 승리로 새로운 국면을 여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연전연승」이나 「여러번 패전」은 모두 부분적인 것이며, 전체국면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 차례의 패배」나 「한 차례의 승리」는 모두 결정적인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전체 국면을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모택동의 戰略論(전략론)은 매우 평이하게 서술되고 있다. 모택동은 군사 지휘관들의 자질과 조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군사가는 물질적인 조건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전쟁의 승리를 꾀할 수 없지만 물질적인 조건이 허용되는 범위 內에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군사가가 활동하는 무대는 객관적 물질적 조건 위에 설치되어 있지만 군사가는 이러한 무대를 이용하여 다채롭고 웅장한 활극들을 상연할 수 있다.
전쟁의 큰 바다 가운데서 헤엄치고 있는 지휘관은 자신을 가라앉히지 않고 결정적으로 절차를 따라 對岸(대안)에 이르게 하여야 한다. 전쟁의 지도 법칙은 전쟁의 유영술이다』
마지막 제5장의 제3절에서 모택동은 전략적 퇴각을 논하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권투 선수, 「수호전」, 춘추시대의 예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 아는 바이지만 두 권투 선수가 대전할 때 영리한 선수는 왕왕 한 걸음 물러서지만 미련한 선수는 기세가 등등하여 처음부터 있는 재주를 다 부린다. 그 결과 왕왕 한 걸음 물러섰던 자에게 지고 만다』
「수호전」에 나오는 洪敎頭(홍교두)는 시진의 집에서 林沖(임충)에게 달려들면서 「덤벼라」 「덤벼라」 하고 연거푸 소리쳤다. 그러나 결국은 한 걸음 물러섰던 임충이 홍교두의 약점을 타서 단번에 홍교두를 차 엎어뜨렸다』
그러면 여기서 모택동의 입을 빌어 홍군의 내력과 유명한 유격전술이 나온 유래를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의 전쟁은 1927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우리에게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남창봉기, 광주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추수봉기에서도 호남-호북-강서 접경지대에 있던 부대는 몇차례 패전하여 호남-강서 접경지대의 정강산 지구로 이동하였다. 이듬해 4월에는 남창봉기 실패 후에 보존된 부대도 호남성 남부를 거쳐 역시 정강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1928년 5월부터 당시의 정황에 적응되는 소박한 성격을 띤 유격전쟁의 기본원칙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곧, 「적이 진공하면 우리는 퇴각하고(敵進我退), 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교란하고(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退我追)」는 16자의 要訣(요결)이다』
모택동에게 중국을 안겨준 사건-대장정
그러면 모택동이 「승리」라고 강조했던 대장정의 實體(실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헤리슨 E. 솔즈베리의 기록에 의하면 『제1방면군의 주력 행군에서는 약 8만6000명의 남녀 병사가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년 뒤인 1935년 10월19일에 모택동과 함께 섬서성에 도착한 것은 불과 4000명뿐이었다』는 것이 장정의 실상이었다. 이것은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패배이자 퇴각이었다. 그러나 솔즈베리는 장정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행군」도 아니었고, 군사 작전도 아니었으며, 하나의 승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생존의 대승리였으며, 장개석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결정적이고도 끝없는 퇴각이었다. 패배와 全滅(전멸)의 위험이 숨 돌릴 틈도 없이 거듭된 싸움이었다. 그것은 아무런 계획 없이 진행되었다.
모택동은 그 준비 과정에서 제외되었으며 마지막 순간에 가서 통고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모택동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을 안겨준 것은 바로 이 대장정이다』
솔즈베리는 역시 西歐(서구)의 지식인답게 비유 또한 서양 역사에서 따오고 있다.
『이것은 유태인의 出埃及記(출애급기)와 어느 정도 비슷하며,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횡단,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진격과도 유사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서부의 험산과 얼어 붙은 초원을 횡단해 간 미국인들의 거대한 마차 행렬과도 어떤 면에서는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비교도 적합지 않다. 대장정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인 것이다. 그 영웅적 사건은 11억이나 되는 인구를 가진 국가의 꿈에 불을 당겼고, 어느 누구도 감히 예언할 수 없는 운명을 향해서 거국적인 달음질을 시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솔즈베리는 1934년 대장정이 시작되려는 무렵의 모택동의 모습과 정황도 잔잔하게 전하고 있다.
『1934년 가을, 모택동은 당시 40세였다. 움푹 패인 볼, 수척한 몸, 거의 어깨까지 늘어진 뻣뻣한 검은 머리카락, 힘 없는 모습, 불타는 듯한 두 눈, 튀어나온 광대뼈 등은 고통의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희귀한 말라리아로 벌써 몇 달째 앓고 있었으며, 선교사 교육을 받은 주치의 넬슨 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쾌되지 않아 맥을 못추고 있었다』
병을 앓으면서 모택동의 장정 길은 시작되었다. 앓는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당 중앙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있었다. 주은래로부터 장정 계획을 통고받기는 했으나 단 한번 그 누구로부터도 의견이나 助言(조언)을 부탁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10월18일 오후 늦게 위두 북문 가까이에 있는 그의 집에서 퇴각하는 홍군과 뒤늦게 합류했다.
『모택동은 책 상자 한 개와 부러진 우산, 담요 두 장, 낡은 외투, 그리고 油布(유포)를 휴대하고 있었다. 아홉 개의 주머니가 달린 배낭은 그냥 남겨 두었다』고 솔즈베리는 적고 있다. 그렇게 초라하게 장정에 참여한 모택동이었다.
1959년 남경 부근의 유명한 여름 휴양지 여산에서 팽덕회를 내몰고 10년 뒤에 모택동은 에드거 스노와 情談(정담)을 나누었다.
모택동의 우주론적 세계관
『지구에 사는 우리 인류의 처지는 갈수록 빨리 변화되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하자면 500년이나 1000년이 지난다면 그때 사람들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을 포함한 우리와, 우리들이 해놓은 일을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볼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이 말을 했을 때의 그의 나이는 70이 넘어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불꽃이 한참 달아 있을 때였다. 천하에 변화무쌍한 것이 문화대혁명이였다. 2년 뒤 임표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공중에서 사라졌다. 그 1년 뒤엔 상상을 초월하는, 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다시 2년 뒤엔 北京과 부근 당산에 미증유의 대지진이 발생하고 동북지방에 유례없이 큰 流星(유성)이 무더기로 쏟아지더니 주은래, 주덕, 모택동이 차례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가소롭기 짝이 없을 것」으로 예측했던 상황이 너무도 빨리 현실화되고 말았다. 우주론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계의 변화 현상을 眺望(조망)하려 했던 모택동이었지만 바로 눈앞의 변화는 놓치고 만 것일까, 못 본 체한 것일까.
『우주는 넓고 넓어 도대체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이것은 진정 인생을 움직이는 비통함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바다에 큰 바람이 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종횡으로 몰아쳐도 배에 탄 사람들은 이를 한낱 壯觀(장관)으로 여기는데, 生死(생사)의 파도만은 어찌 장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이 글은 모택동의 「윤리학원리 논평」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장사의 제1사범학교 시절, 은사 양창제로부터 파울젠의 「윤리학원리」를 배우고 심취하여 스스로 1만여 자의 「윤리학원리 논평」을 썼다. 그의 나이 스물대여섯 무렵이다. <끝>
※필자 注 : 모택동을 큰 산이라 한다면, 이 「수필식 모택동 기행」은 그 산자락의 일부를 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독자들에게, 모택동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필자로서는 대만족이다.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양면을 함께 보는 지혜와, 균형잡힌 감각이 요즘처럼 절실할 때가 없다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