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류태영 - 이스라엘 군대·농촌에서 국민정신을 수입해야 한다는 柳泰永 교수

『이스라엘 군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니까 강하다. 우리 軍隊도 軍大가 되어야』

  • : 우종창  woojc@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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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야간부에 다니던 그는 백과사전을 뒤져 덴마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프레드릭 9세 국왕인 것을 알고, 일면식도 없는 국왕에게 장학금 요청 편지를 보냈다. 덴마크에서 더 배울 것이 없자 그는 다시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건국대 柳泰永(류태영·64) 교수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이스라엘 전문가다. 그는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벤구리온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건국대 부총장직을 맡기 전인 5, 6년 전만 해도 그는 1년에 두 번,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 한국 학생들을 인솔해 이스라엘로 갔다.
 
  한국 학생들이 이스라엘 정부나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하고, 이스라엘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의 인생 상담에도 응하며, 이스라엘의 친구들과 제자들을 만났다. 1976년부터 15년간 그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고 이스라엘에서 공부한 학생이 250명에 이르며, 석·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20여 명이 된다.
 
  1990년 이후 한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그가 이미 뚫어놓은 길을 따라 이스라엘로 유학을 가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한국 유학생들은 柳교수를 자기들의 代父(대부)라고 부른다. 柳교수는 「이스라엘 민족정신의 뿌리」 「이스라엘 국민정신과 교육」 「이스라엘, 그 시련과 도전」 「이스라엘 농촌사회 구조와 한국 농촌사회」 「이스라엘 민족의 지혜」 등 이스라엘 관련 책도 많이 냈다.
 
  지난 10년간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農學(농학)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연구비를 주고, 賞(상)도 주고, 농업 종사자들이 외국에 가서 기술을 배워오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陸軍(육군)에서 실시 중인 「忠孝禮(충효예) 교육」 강사로 나가고 있다.
 
  「忠孝禮 교육」은 구타, 탈영, 자살 등 軍內(군내)의 惡習(악습)을 막기 위해 중사 이상의 하사관에서부터 중령에 이르는 간부들에게 실시하고 있는 정신교육이다. 「조국을 위해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忠), 부모가 원하는 軍 생활을 하며(孝), 장병 상호 간에 예절을 지키도록(禮)」 하는 교육이다.
 
  1999년 800여 명, 2000년 8월까지 1300여명이 이 교육을 받았다. 육군사관학교에서 3박4일간 숙식을 하며 「忠孝禮 교육」을 받은 간부들은 소속 부대로 돌아가 병사들의 정신교육 교관으로 활동한다. 「忠孝禮 교육」 강사인 柳교수는 「이스라엘의 정신과 국민교육」을 가르친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을 때, 열에 여덟 명은 군대 갔다와서 결정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軍에 입대해 2년 반을 복무합니다. 제대 후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軍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軍隊(군대)를 「인간을 다듬는 용광로」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인간을 다듬는 용광로
 
 
  ▲ 이스라엘 대통령 관저에서 제5대 대통령 에트라임 카치르 박사(왼쪽)와 인사를 나누는 柳泰永 교수(가운데).
 
 
  柳교수는 『이스라엘의 강한 국민정신은 軍에서부터 길러진다』고 말했다.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있어 군대는 「軍隊가 아니라 軍大(군대)」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남녀가 고교를 졸업할나이인 18세가 되면 누구나 軍에 입대한다. 예외라면 결혼한 여성과 군대를 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통파 유대인뿐이다. 여성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軍 복무 의무에서 벗어나지만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여성은 없다고 한다.
 
  복무기간은 남성은 2년 반, 여성은 2년이다. 입대 후 兵科(병과)는 본인 희망에 따라 정해지는데 최전방 근무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한다. 軍 복무를 마치면 45세까지 예비군에 편입돼 근무한다. 예비군은 1년에 45일간 一線(일선)에 復歸(복귀)해 근무한다. 교수들도 방학이 되면 자신이 근무하던 곳으로 돌아가 병역 의무를 수행한다. 이들 예비군이 이스라엘 국방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73년 10월전쟁이 일어났을 때, 柳교수는 전쟁 현장에서 이스라엘人의 무서운 정신력을 보았다고 한다.
 
  『10월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저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 귀청을 찢는 사이렌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공부하던 학생들이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무더기로 모여 있는데, 全面戰(전면전)이 터졌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입을 막으며 조용히 하라는 거예요. 방송에서 5, 15, 25라는 숫자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그게 바로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거였어요. 방송에서 숫자로 소집지를 불러주는 거예요. 소집 해당자는 휴대 중인 무기를 들고 집에도 안 들르고, 그 자리에서 소집지로 떠났어요. 그날로 1만여 명의 학생이 있던 기숙사가 텅 비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왔다』
 
 
  全軍(전군)이 어떻게 하루 만에 소집지까지 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예비군 소집령이 발동되면 버스, 트럭, 자가용 등 모든 교통수단이 군인 수송에 총동원됩니다. 소집지로 가는 장병이 엄지손가락을 들면 다들 태워줍니다. 이스라엘은 4面(면)이 모두 戰場(전장)입니다. 시장도 撤市(철시)하고 모두 전쟁터로 가는 겁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소집에 응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柳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료 대학생들에게 「전쟁터에서 죽으면 어떻게 할래」라고 물어봤어요.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까 좋고, 안 죽으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좋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싸우지 않으면 옛날 유태인들이 나치한테 당했던 것과 같은 일들이 자기 아내와 딸한테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싸워야 한다는 거지요.
 
  그때 미국 TV방송에서 포로들한테 왜 전쟁에 참전했는지를 물은 적이 있었어요. 이집트 포로들은 「조국을 위해서 참전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포로들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왔다」는 겁니다. 實戰(실전)을 해보면 알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훨씬 강합니다』
 
  戰爭(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이스라엘 사람들의 生死(생사)를 초월한 정신력은 柳교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軍은 이스라엘 국민의 인격양성 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군대에서는 전술전략 교육과 아울러 인격교육을 하는데, 이 인격교육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필요로 하는 민족정신을 창출하는 겁니다. 교육은 매일 그룹토론으로 이루어집니다. 정부에서 소신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교관을 양성하는데 교관들이 아주 훌륭해요. 이스라엘의 강한 국민정신은 軍隊에서 길러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교육 방식에 대해 柳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8명에서 12명 정도로 그룹을 만들어서 교육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分隊(분대) 단위지요. 분대장 역할을 하는 교관이 있지만 교관이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아요. 교관은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서 조언을 구하면 답을 해주는 정도이고, 교관도 교육생과 똑같은 입장에서 함께 토론을 해요. 모두가 참석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니 상호교육이 되는 거지요.
 
  주제는 국가, 軍, 개인, 시민의 역할 등 다양합니다. 예컨대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토론한다면 「너는 성격이 외향적이니 무역업을 해봐라」, 「너는 머리가 좋으니 교사를 해라」 하는 식으로 조언해 주는 겁니다. 툭 털어놓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교육하는 것인데 우리나라가 새마을 운동을 할 때 만들었던 분임 토의가 이스라엘 군인 교육에서 따온 것입니다』
 
 
  戰場에서 읽는 文學서적
 
 
  이스라엘 軍의 정신교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터를 가더라도 작은 문고판 책을 배낭 속에 넣어가도록 한다. 톨스토이의 작품, 셰익스피어의 작품 같은 세계의 名作(명작)들이 압축, 요약되어 손바닥만한 문고판으로 만들어져 軍에 보급된다. 압축하다 보니 문학적 표현은 다소 손상되는 경우가 있지만, 내용과 교훈은 훼손되지 않도록 잘 정리되어 있다고 柳교수는 말했다.
 
  이러한 작품들을 읽고 다시 그룹토론을 한다. 분대장이 토론을 이끌면서 「오늘의 현실에서 古典(고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어떻게 썼겠는가」 등의 질문을 통해 창의적인 발상을 이끌어 낸다. 아무리 독서를 안 하는 젊은이라도 이런 방식으로 軍 복무 기간 동안 30~40권의 명작을 소화하게 된다.
 
  이스라엘 軍은 대개 大隊(대대) 규모마다 교육담당 전문 장교가 배치되어 있다. 이 전문 장교를 양성하는 곳이 「중앙 교관 훈련학교」라는 교육기관이다. 그중에서도 非군사 분야, 즉 정신교육을 위한 교관 양성소가 「중앙 교관 훈련학교」 안에 별도 설치돼 있어 전문 교관을 양성한다. 이곳에서는 길게는 1년, 짧게는 2週(주)부터 수개월에 걸쳐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교관요원 교육훈련과 再교육 등을 실시한다.
 
  이 훈련을 받은 교관들이 사병들의 교육을 전담한다. 사병들은 3개월간의 기초 군사훈련에 이어 특수병과 훈련을 마친 후 정신교육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그룹토론과 세계명작 읽기 외에도 민족성지 순례, 激戰地(격전지) 방문 등의 현장 교육과 다양한 분야의 特講(특강)을 듣도록 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國論統一(국론통일)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정신교육이 중요 문제로 부각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녀가 모두 의무적으로 軍에 입대하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軍을 통해 민족성을 형성하는 것이 이스라엘 軍교육의 중요한 이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軍교육 방식을 우리나라에도 적용시켜야 한다고 柳교수는 강조한다.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다 군대를 가잖아요. 軍에서 교육을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軍도 전략전술 교육뿐만 아니라 反共(반공) 교육 같은 정신교육을 당연히 실시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처럼 民族精神(민족정신), 民族史觀(민족사관)을 심어주는 교육을 할 필요가 있어요. 軍이 인격을 교육하는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柳교수는 현재 육군에서 실시 중인 「忠孝禮 교육」이 이런 맥락이기는 하지만 육군사관학교에 몇 명씩 모아 가르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이스라엘처럼 「정신교육 전담 교육원」을 軍에 설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스라엘에서는 軍 정신교육 전담 교육원에서 전문 교관을 양성해 소대마다 배치합니다. 소대 단위에서부터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관들은 병사들의 인생상담부터 모든 것을 전담합니다. 교관들의 位相(위상)도 매우 높아요. 우리나라도 「忠孝禮 교육」을 제도적으로 흡수해 정신교육 학교로 만들어야 합니다.
 
  군대는 젊은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우리의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世代(세대)가 가는 곳이지요. 軍의 정신교육이 시스템化(화)되어 있으면, 젊은 세대에서 국민운동이 가능합니다. 매년 30만명의 제대자를 배출하는 軍은 거대한 조직이면서 학교이기도 합니다. 軍에서부터 새로운 국민운동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民族의 얼을 키우기 위해 軍을 이용하듯이, 우리나라도 軍을 「국민운동의 場(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柳교수는 말한다. 그의 伏案(복안)은 이렇다.
 
  『우리 사회는 이혼율 증가에 따라 缺損(결손) 가정이 매년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덕적 해이와 가치관 혼돈 환경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軍에 입대하면서 軍 기강 훼손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또 남북교류 활성화에 따라 主敵(주적) 개념도 혼돈되고 있습니다. 병사들의 가치관 해이를 막고, 병사들에게 건전한 민주시민 정신을 함양시키는 정신교육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총력 안보태세를 확립할 수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內의 遊休(유휴) 시설을 수리, 활용하면 됩니다. 한 번에 150명을 교육하는 교육원을 화랑대 안에 만들면 됩니다.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중심의 지휘관班(반)과 참모班, 중대장班, 하사관班, 전문교관班 등 5개 班으로 나눠 한 班에 30명씩 선발, 3박4일 내지 4박5일간 합숙하며 그룹 토론 교육을 실시합니다. 한 번에 150명씩, 한 달에 세 번을 교육시키면 연간 교육생이 5400명쯤 되고 이들이 소속부대로 돌아가 병사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육하면 적은 인원으로도 정신교육의 극대화를 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소대급 부대에서 정신교육 교관으로 근무할 전문교관 요원들에 한해서는 3주간 집중 교육을 실시합니다』
 
  柳교수는 이런 내용을 담은 「육군 정신교육의 필요성과 운영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했다. 「21세기 국정자문위원회」 顧問(고문)이기도 한 그는 이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쑥물로 떼운 가난
 
 
  柳泰永 교수의 평생 관심은 「국민운동」이다. 가난한 우리 농촌을 일으키기 위해 홀홀단신 덴마크로 건너가 그 나라의 「국민운동」을 배우고, 「새마을 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생애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1936년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5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형과 누나들이 초등학교를 못 가, 그도 학교에 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섯째만은 까막눈이 되지 않도록 해주라는 동네 어른들 덕분에 나이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벽에 붙은 종이를 뜯어 글을 쓰고, 청소시간에 주운 몽당연필로 공부를 했으나 그가 겪었던 가난은 좀더 모질었다.
 
  柳교수는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써오고 있다는 일기를 책장에서 끄집어 내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누렇게 바랜 일기장은 빛바랜 종이표지로 手製本(수제본)되어 있었다. 이런 일기장이 모두 30권 가량 된다고 그는 말했다. 柳교수는 일기장의 한 부분을 펼쳐보였다.
 
  <어제 아침, 점심을 송피로써 죽을 끓여 먹고 저녁은 그나마 차지가 없어 굶은 채 일찍이 잠을 잤으나 아침에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다른 때도 이런 때가 적지 않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 용하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는 쑥만 삶은 쑥국을 먹다시피 하였다>
 
  흘려 쓴 글씨를 읽어주고 난 뒤, 柳교수는 「쑥국」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쑥만 넣고 삶아서 우려낸 푸른색 물이라고 했다. 된장을 풀어넣은 향긋한 쑥국과는 거리가 한참 먼 「쑥물」로 배를 채웠던 幼年(유년)시절이었다. 그렇게 굶주리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남의 집살이를 시작했다.
 
  『그땐 월급이란 게 없어요. 먹여주고 재워주면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일하는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땐 다 그랬어요』
 
  이 가난이 싫어서 그는 「농촌을 잘살게 하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해야겠다고 일기장에 썼어요. 그런데 일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돼요. 그 나이에 혼자서 생각했어요. 「돈이 많으면 힘이다. 정치권력도 힘이다. 하지만 밥도 못 먹는 내가 무슨 재벌이 되겠으며, 농촌 출신인 내가 언제 정치권력을 잡겠나. 내 형편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이라면 筆力(필력), 분석력, 정보력, 언변력, 설득력, 이런 것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하려면 학교 다니는 것이 제일 좋지만, 안 되면 혼자서라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獨學이 아닌 毒學
 
 
  자신이 겪는 지독한 가난을 이 민족이 더 이상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힘을 기르겠다는 결심, 자신이 힘을 기를 수 있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판단이 학교 갈 형편이 안 되는 그로 하여금 「獨學(독학)」을 하도록 했다.
 
  「중학교 강의록」을 지게에 넣어다니며 시작한 그의 獨學은 3년 동안 이어졌다. 책을 보고 다니다 논두렁에서 굴러 떨어지고, 남들이 땀을 씻으며 한숨 돌릴 때 책을 보는 그의 공부는 獨學을 넘어선 「毒學(독학)」이었다. 그의 열성적인 공부는 금세 마을에 소문이 났다.
 
  獨學 3년째에 기회가 왔다. 동리에 자자한 그의 소문을 들은 邑內(읍내) 유지가 그를 가정교사로 고용했다. 초등학생인 유지 아들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邑內 중학교에 입학한 게 그의 나이 18세 때. 邑內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어머니가 마련해 준 차비만 들고 친지 하나, 친구 한 명 없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영등포 역에서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동양공고를 야간으로 다녔다.
 
  ―농촌 출신이 왜 工高(공고)를 지망했습니까.
 
  『구두닦이 하며 들었던 학교 이름이 그것이었으니까요』
 
  ―학비는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교장선생님께 사정사정해서 입학금은 면제받았어요. 당시엔 月謝金(월사금)을 냈는데 저는 구두닦이 한 돈을 일주일간 모아서 週謝金(주사금)으로 냈어요. 구두닦이 틈틈이 신문배달도 3년 동안 했지만,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덴마크 국왕에 편지 보내다
 
 
  이 구두닦이 생활에서 그는 유학이란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
 
  『영등포 역에서 구두를 닦다가 대방동 미군부대 근처로 구역을 옮겼더니 그곳 구두닦이들이 유학 이야기를 해요. 유학이란 말은 그때 처음 들었어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도 몰랐죠. 「유학이 뭐냐」고 했더니 「세계적인 선진국에 가서 공부하는 거다」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나도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유학 얘기를 들은 지 13년 후, 그는 덴마크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는 유학이 흔치도 않았을뿐더러 대개 미국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대개 그랬지요. 하지만 저는 유학 가서 배우고 싶은 게 우리나라 농촌을 잘살게 하는 것이었거든요. 미국은 몇백 에이커씩 대규모 농장을 하잖아요.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우리 농촌을 잘살게 하는 법을 배우겠어요. 조그맣고,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가 이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선진국가가 된, 그런 곳에 가서 그 경험을 배우겠다고 생각했어요.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같은 나라를 염두에 두었는데, 덴마크로 마음을 굳힌 것은 柳達永(유달영) 박사가 쓴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덴마크에 관한 책을 읽고서였어요』
 
  東洋工高를 겨우 마치고 신문배달과 구두닦이를 해가며 건국대 前身(전신)인 정치대학 야간부에 입학한 그는 덴마크 유학에 따른 준비에 나선다. 그는 두 가지를 준비했다. 우선 우리나라 농촌에 관한 長文(장문)의 논문을 썼다. 비참한 당시 농촌의 현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썼다. 그리고는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난 자신의 소개서를 썼다.
 
  『오직 내가 바라는 건 한국 농촌이 잘사는 것이다. 당신네 나라처럼 훌륭한 나라에 가서 배워 가지고 우리 농촌을 잘살게 하는 데 내 인생을 바치겠다. 그것을 위해서 장학금 좀 줄 수 없겠느냐고 썼어요. 엉성한 영어였지만 나로선 최선을 다했어요』
 
  쓰고 나니 보낼 데가 없었다. 오직 책 한 권을 읽고 감명받아서 행선지는 덴마크로 정했지만 덴마크에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 제일 높은 사람에게 보내기로 결심했지요.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덴마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프레드릭 9세 국왕이었어요. 그런데 백과사전에 왕궁 주소가 나와 있지 않아요. 그렇더라도 덴마크 우편배달원이 설마 국왕의 집이 어딘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편지 겉봉에 「덴마크, 코펜하겐, 프레드릭 9세 국왕폐하」라고 써서 보냈지요』
 
 
  덴마크 정부 초청 장학생
 
 
  40일 뒤 답장이 왔다. 동양에서 온 편지에 감동한 국왕이 이 件(건)을 행정부에 넘겼다는 국왕 보좌관의 편지였다. 그로부터 2週 뒤에는 덴마크 외무성에서 「당신이 원하는 기간,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당신이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는 편지가 왔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들어주겠다는 파격적인 지원 약속이었다. 왕복 비행기표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덴마크 정부 초청의 한국 장학생이 된 것이다. 여권을 내러 간 날, 외무부 직원이 『덴마크의 누구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혼잣말로 『임금님을 조금 압니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했다.
 
  柳교수가 덴마크에 도착한 것은 1967년. 덴마크 말을 배우기 위해 어학 코스에 들어간 柳교수는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덴마크하고 우리나라는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전부 학비를 면제해 주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지우개부터 수학여행까지 정부에서 다 지원해 주는 나라가 당시 덴마크였어요. 농촌에 자가용이 보급돼 있고요. 감탄만 나오지 배울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는 자신이 덴마크에서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토록 잘사는 덴마크도 100년 전에는 우리나라보다도 형편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100년 전 덴마크에서 일어났던 국민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했다. 전쟁에 진 덴마크는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沃土(옥토)를 넘겼다. 덴마크 국민들은 失意에 빠졌다. 국가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돈도 기술도 의욕도 없었던 덴마크가 어떻게 선진국이 되었는가 하는 것에 柳교수는 관심을 가졌다. 그 비결만 배우면 우리 민족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柳교수는 교육가이자 철학자인 그룬트비 목사가 국민운동을 일으켜 덴마크가 오늘날의 선진 복지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덴마크 국민운동을 공부하는 데 온 시간을 보냈다. 2년간 공부하고 나니 우리나라 실정에 적용시킬 것은 더 이상 덴마크에서 배울 것이 없었다.
 
 
  이스라엘로 가다
 
 
  『덴마크에 학위 받으려고 유학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 농촌이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 우리 국민이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그 방법을 배우러 덴마크에 간 것인데 덴마크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답답하더라고요』
 
  그는 「현재 잘살기 위해 일어나고 있는 나라가 없을까」하고 찾았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사막을 개척하면서 일어나고 있다는 이스라엘 이야기가 그를 흥분케 했다.
 
  『그래, 사막에서 전쟁을 해가며 일어나는 이스라엘에 가서 배우자』
 
  그는 이스라엘 정부로 편지를 띄웠다. 잊을 만할 때쯤 덴마크 코펜하겐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이스라엘行(행) 비행기표가 준비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지원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스라엘 정부에 아는 분이 있었습니까.
 
  『대통령한테 보냈지요. 제가 뭐 아는 사람이 있나요』
 
  「제일 높은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다시 한번 들어맞았다. 뜨거운 열정 하나로 직접 부딪치는 그의 자세가 다시 한번 통한 것이다.
 
  ―덴마크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공부하다가 이스라엘로 옮긴다고 했을 때 덴마크 정부에서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왜 가냐고 물었죠. 제가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이렇게 잘사는 나라 말고 지금 일어나는 나라에 가서 배워야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하니까 이해합디다. 이스라엘에 가면 정말 당신이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오히려 격려해 줬어요』
 
  1969년 12월 그는 2년간의 덴마크 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로 갔다. 그는 이스라엘 정부에서 저개발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아시아ㆍ아프리카 지역 농촌지도자 연구소」에 들어갔다. 그에 앞서 前(전) 農協(농협) 회장 韓灝鮮(한호선), 前 農協 부회장 鄭埼秀(정기수), 前 한남대 총장 金世烈(김세열)씨 등이 이 연구소를 거쳐간 한국인이다. 이 연구소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협동농장 운영, 농촌개발, 농촌 사회구조 변동 등에 관한 공부를 6개월 동안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마을 운동 담당
 
 
  ―어렵게 이스라엘로 가서 왜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까.
 
  『덴마크를 떠나기 전에 덴마크 외무부 차관에게 한국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인천에 韓獨(한독) 실업학교라고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만든 기능공 양성학교가 있었는데, 그것과 같은 성격의 韓·덴마크 농업실업학교를 세워달라고 덴마크 정부에 부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스라엘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덴마크 정부의 답변이 왔습니다.
 
  덴마크 정부에서 발전도상국가인 한국에 그때 돈으로 6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돈이면 충분히 학교를 세울 수 있었죠. 덴마크 정부에서는 우리나라의 농촌 출신 학생들을 덴마크로 데려가 공부도 시켜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민간인이니까 한국 정부의 공식 승인을 얻어오라고 하더라고요. 정부 대리인 자격을 얻든지, 아니면 정부 쪽과 공식 라인을 터달라고 했어요. 저는 이스라엘에 학위 공부하러 간 게 아니니까 우리 농촌을 잘살게 하는 일이 더 급했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덴마크 정부의 지원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우리 정부의 느릿한 行政(행정)으로 5~6개월간 질질 끌다가 덴마크 정부에서 그해 안에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 까닭에 60만 달러가 탄자니아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 급히 돌아온 보람이 없게 되었다. 농촌을 살리자는 것이 애초 그의 유학 목적이었던 만큼 그는 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배운 것을 알리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 무렵 그는 그의 母校(모교)인 건국대의 설립자 常虛(상허) 劉錫昶(유석창) 선생을 만났다. 常虛는 서른셋인 그에게 건국대 축산대학 학생들의 생활교육관인 誠館(성관) 관장을 맡게 했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방과 후엔 경기도 일원의 농촌을 다니며 계몽운동을 벌였다. 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찍은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우리도 이렇게 잘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朴正熙 대통령이 추진하던 새마을 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그의 말이다.
 
  『1971년 우리나라에 큰 旱魃(한발)이 닥쳤어요. 온 논의 벼가 다 말라 타죽었지요. 그때 강원도 영월군 기계면 문성동이란 마을에서 폭 5m, 깊이 3m의 냇물을 파서 농작물에 물을 댔어요. 이 바람에 그 마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부락이 됐어요. 방송에도 나오고 대통령도 방문하고 그랬어요. 그걸 본 朴대통령은 「우리 농촌도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洪性澈(홍성철)씨에게 농촌 문제 해결안을 만들라고 지시했어요.
 
  그런데 정무수석이 농촌에 대해 잘 모르니까, 경기도 지사한테 지시하고 도지사는 이천 군수를 부르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천 군수가 자기 郡(군)의 몇몇 부락에서 잘살아 보겠다며 마을 회관을 짓고, 길을 낸다 하며 난리가 났다고 보고했어요. 그래서 정무수석팀이 그 부락에 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제 이름이 나온 거예요. 제가 하루에 4시간씩 3일간 「우리도 이스라엘이나 덴마크처럼 할 수 있다. 잘살 수 있다」고 농촌부흥회를 했던 부락이었지요. 말하자면 농민들이 저를 추천한 거지요. 그렇게 해서 청와대로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洪性澈 수석을 비롯한 정무수석실 비서관들에게 농촌을 살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배 곯고 자란 어린 시절에서부터 덴마크, 이스라엘에서 보고 배운 것을 쭉 이야기했다. 오후 5시에 시작된 회의가 밤 11시 30분에 끝났다. 그가 설명한 내용은 그날 밤 朴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당장 내일부터 청와대에 와서 농촌운동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1972년 3월이었다.
 
  이에 따라 정무수석실 산하에 새마을 담당관실이 생겼다. 그에게 농촌운동에 관한 재량권이 주어졌고, 함께 일할 사람을 추천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제가 아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선 두 사람만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농촌 일을 하는 데는 郡守가 제일이므로 똑똑한 군수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고등고시 兩科(양과)를 수석으로 합격한 젊은 군수가 전남 장흥에 있다고 해요. 그 사람이 훗날 전남지사와 체신부 장관을 지낸 宋彦鍾(송언종)씨입니다. 그 다음에 농민들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이는 農協 중앙회 지도과장이므로 그 사람도 불러달라고 했지요. 그 지도과장이 農協 중앙회장을 역임한 韓灝鮮씨였어요』
 
 
  국민의 생각을 바꾸자
 
 
  그는 덴마크의 국민운동 사례를 100% 활용했다.
 
  『패전한 덴마크는 황무지만 남고 돈도 없고 의욕도 상실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고치기」를 통해 세계적인 복지 국가가 되었거든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막에서 전쟁해 가며 버틸 수 있는 것은 잘살아 보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생각을 바꾸고, 이 바꾼 마음을 한데 모으면 나라가 달라지는데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을 하려면 교육전담 요원 양성이 시급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연부락이 5만개, 행정부락이 3만개였다. 한 부락에 교육요원 한 명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3만명이 필요했고, 面(면) 단위로 따지면 3000명이 필요했다. 그는 덴마크 사례를 본따 중앙에 교육원을 만들어 그곳에서 교육받은 사람을 市道(시도)로 보내 교육하고, 다시 市道에서 농촌으로 사람을 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정신교육을 위해 슬라이드나 영화제작에도 힘을 기울여 일본의 16mm 영사기가 동이 나도록 사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새마을 운동이 시작 2년 만에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뒤 그는 한계를 느꼈다. 아무 연줄 없이 농민들의 추천으로 얼떨결에 청와대에 들어와 국민 정신운동을 일으키고, 이것이 성공을 거두어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되자 嫉視(질시)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이다.
 
  이런 분위기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결정적으로 굳히게 된 것은 그에 대한 호칭 때문이었다.
 
  『교육계 새마을 전진대회에 강사로 초빙돼 갔는데 閔寬植(민관식) 당시 문교부장관이 저를 「柳泰永 박사」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저는 석사학위도 없었습니다. 저는 박사가 아니라고 했더니 이걸 겸손하다고 도리어 칭찬하는 거예요. 참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朴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에서 애칭으로 「柳박사」라고 부른 일이 있는데 이를 진짜로 알고 있는 거예요』
 
 
  벤구리온 대학 교수
 
 
  이 박사라는 호칭에 그는 坐不安席(좌불안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정말로 박사가 되기 위해 1973년 5월, 두 번째로 이스라엘에 간다. 이스라엘을 6개월 만에 떠날 때 이스라엘 외무성으로부터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놓고 있었다.
 
  그는 5년 半(반) 만에 석·박사학위를 首席(수석)으로 받았다. 柳교수는 『다들 박사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고생해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박사학위 땄다는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기장을 펼쳐보였다. 거기에는 「어느 날, 도서관 창 밖을 내다 보니 노란 꽃이 피더니 사나흘 지나 밖을 보니 눈이 내렸다. 세 철이 지나가는 것이 사흘 같았다」 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저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학위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수업을 듣는 코스를 마치고 나서 학위 논문 연구계획서를 내고, 그 계획서가 통과되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논문을 쓰는데 저는 석사 코스에 들어갔을 때부터 박사 논문을 생각했어요. 석사 논문을 박사 논문의 일부로 생각하고 썼죠. 그런 식으로 해나가니까 논문계획서 내기 전에 이미 논문의 半이 완성되었고, 계획서가 통과되었을 땐 이미 80%를 완성했죠』
 
  박사학위를 받을 때쯤, 그는 벤구리온 대학의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2년간 벤구리온 대학에서 농촌사회학과 韓國學(한국학)을 강의하였다. 농촌사회학은 그의 전공이었고, 韓國學은 대학 요청에 따른 것이다.
 
  『벤구리온 대학 총장이 한국의 역사, 사회, 정치, 문화 등을 강의해 보라고 요청했어요. 총장은 韓國學이 새로 개설된 강좌이므로 학생이 열댓 명 정도밖에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했어요. 교재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런데 매 시간마다 학생수가 늘어나 세 번째 강의 때는 큰 강당으로 강의실을 옮겼어요. 네 번째 강의 때는 학생들이 추천하더라며 백발이 성성한 다른 科(과) 교수들도 들으러 왔습니다』
 
 
  한국인과 유태인의 공통점
 
 
  柳교수는 이스라엘人들에게 한국인의 가치관에 관해 강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강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인류에게는 사회질서라는 것이 있다. 질서의 원류는 모럴(moral), 즉 윤리다. 이 모럴의 원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계약이 있는데 이것이 夫婦(부부)의 윤리다. 그 남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여기에서 父子(부자)윤리가 생긴다. 이 아이들이 많이 생겨나면 그들 사이에 朋友(붕우) 윤리가 생긴다. 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속에서는 지도자, 즉 임금이 나온다. 그러면 君臣(군신) 간의 윤리가 생긴다. 이러한 원리로 그 약속과 윤리를 정리한 것이 三綱五倫(삼강오륜)이다. 모든 질서의 기본이 바로 이 三綱五倫인데 三綱五倫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忠孝(충효)다. 忠孝란 君臣 간의 관계, 父子 간의 관계다 하는 식의 강의였어요』
 
  우리 민족을 잘살게 할 「정신」을 배우러 처음 갔던 이스라엘에서 그는 우리의 三綱五倫을 가르쳤다. 처음 듣는 얘기여서 그런지 아주 호응이 좋았다고 柳교수는 말했다.
 
  『이스라엘 대학생들은 강의실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애정 표현을 합니다. 저는 이들에게 「나는 동양인 교수고, 우리나라에서는 강의시간에 애정 표현하는 것은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후부터 제 강의시간만큼은 학생들이 조용하게 강단만 바라보았어요』
 
  ―우리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간에 공통점이 많다고 하는데요.
 
  『부모를 공경하는 점이 같아요. 核가족 사회이지만 이스라엘에는 양로원이 거의 없어요. 키부츠나 모샤브 같은 집단농촌에서도 병든 부모는 반드시 자식들이 모셔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족들 간의 情이 우리처럼 끈끈해요. 가족과 인척이 수시로 만나요. 덴마크에서도 이런 점은 없어요. 미국에 사는 유태인 교수는 「한국인과 유태인은 자기 개발정신이 강하고 기질적으로 같거나 오히려 한국인이 유태인보다 더 강한 민족」이라는 이야기도 했어요. 남자들이 월급봉투를 집에 통째 갖다주는 점도 같아요. 우리의 미음(ㅁ)이란 글자를 이스라엘에서는 「멤」으로 부르는데 발음과 글자 모양이 우리와 똑같아요. 추석 쇠는 것도 비슷하고요. 우리와 이스라엘 민족 간에 같은 점이 70가지나 된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보체제 특강
 
 
  ―교육열도 우리와 유태인이 비슷하다면서요.
 
  『교육열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세고, 그 다음이 이스라엘일 거예요. 교육열은 똑같이 강하지만 교육방법은 우리와 달라요. 이스라엘 가정에서는 1등을 강요하지 않아요. 자녀들에게 개척정신, 自立정신을 강조해요. 대학생의 80%가 아르바이트해서 학비를 버는 게 우리와 달라요. 제가 교수 시절에 이스라엘 재벌 딸이 제자였는데 1주일에 두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왜 하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아르바이트할 생각이 없지만 안 하면 왕따를 당한다고 했어요』
 
  柳교수는 197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이스라엘人의 강한 정신과 국민교육을 여러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合參에서 그에게 이스라엘 안보체제에 대한 특강을 요청했다. 그는 대령급 이상 80여 명을 상대로 2시간 동안 이스라엘人의 안보의식, 軍 동원 문제, 예비군 운영 등에 관해 강의했다. 이 강의를 계기로 당시 3군 사령관이었던 黃永時(황영시) 장군의 특강 요청을 받았고, 여름방학 두 달 동안 3軍 예하부대를 돌아다니며 정신교육 차원의 특강을 했다.
 
  이렇게 되자 3軍에서는 그에게 이스라엘 안보체제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에서 경험했던 단편적인 사례와 제자들로부터 귀동냥한 것으로는 책을 만들기 어려워 그는 1980년 이스라엘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軍의 교육제도를 연구했다. 그는 이스라엘 국방부의 협조 아래 軍 정신교육 시설을 견학하고, 관계자를 인터뷰하며, 관련 자료도 제공받았다.
 
  이를 토대로 만든 것이 「이스라엘 軍의 정신교육」이란 책이다. 이 책은 1981년에 출간됐다. 이스라엘의 안보체제를 수록한 이 책은 軍 지휘관들의 정신교육 자료로 활용되었다.
 
  柳교수는 지금도 자신의 본분은 국민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는 새마을 운동이 농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경제환란을 겪고 난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운동이 필요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이 정부가 출범한 후 새로운 국민운동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때, 柳교수는 새마을 운동의 기존 조직을 활성화함으로써 새로운 국민운동을 전개한다는 案을 내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柳교수는 이스라엘의 軍교육을 거울삼아 새로운 국민운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가 「새마을 운동」을 잇는 「제2국민운동」의 시발점으로 軍을 꼽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주인공들이 그곳을 거쳐 가기 때문이다.
 
  평생을 농촌과 우리 민족을 위해 살겠다고 일기장에 꾹꾹 눌러 쓴 가난한 시골 소년의 꿈이 내년이면 정년을 맞는 老교수의 눈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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