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起인생 - 조지 W 부시가 걸어온 길

3代 政治名門의 長者… C 학점의 성공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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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에서 배우는 자세, 꾸준한 成長과 人脈·金脈 동원력
〔편집자 注〕 할아버지는 연방 上院의원, 아버지는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인간됨은 이런 後光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USA 투데이의 질 로렌스 기자가 추적한 부시대통령 당선자의 一生은 텍사스의 大地를 배경으로 펼쳐진 대야망의 인간 드라마이기도 하다.
조지 워커 부시에게는 그 황량한 서부 텍사스 유전지대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가장 귀여워하던 누이동생이 죽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일을 꾸려 가는 방법을 배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마치 달 표면처럼 지형이 험하고 굴곡이 심하며, 먼지가 많은 곳이다. 여기저기 마치 유령처럼 생긴 거대한 펌프는 단조롭게 상하운동을 하면서 지하 깊은 곳에서 原油를 뽑아 올린다. 수십 년 동안 일확천금을 꿈꾸는 투기꾼들과 모험가, 기업가, 奇人(기인), 그리고 독립심이 강한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조지 부시는 서른 살 때 이곳에서 유전을 탐사하고, 투자가를 찾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팀을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현재의 인맥을 구성하고, 사람들을 운영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경쟁자를 미래의 파트너로 만들고, 계약을 체결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는 또 비판을 받을 때 인내하는 법과, 역경 속에서 살아남아 마치 승자처럼 당당하게 등장하는 방법도 배웠다.
 
  석유탐사 사업은 유전발견 실패와 1980년대의 油價하락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업에서 얻은 독특한 행동양식과 문화는 나중에 그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 능력을 활용해서 야구팀을 매입하고, 知事선거에서 승리했으며, 의회와 협력해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가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능력 덕택이었다.
 
  부시는 자신의 인생역정은 계산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2000년 7월 초, 비행기를 타고 유세에 나서면서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의 다음 장을 한번도 걱정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기회가 왔다고 생각되면, 즉시 그것을 잡았을 뿐입니다』
 
  미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에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는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 프레스콧 부시는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미국의 41代 대통령이었다.
 
  조지 워커 부시의 인생은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버지와 거의 흡사하다. 그가 다닌 학교나, 가입했던 클럽, 야구에 미친 것이나, 공군조종사로 입대한 것, 그리고 석유사업에 종사하다가 政界에 뛰어든 것 등은 아버지와 똑 같다.
 
  부시의 매너가 때로는 경망스럽고, 실언이 코믹하게 느껴질 때도 없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대중 앞에서 반성을 하는 일을 혐오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아내 로라는 1998년 유에스에이 투데이紙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시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보다는 웃어버리고, 사람들을 자극해서 농담으로 풀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부시는 백악관을 향한 선거운동에서 자신의 취향과 家門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의 권위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워싱턴의 문화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는 공화당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특히 교육을 강조하면서, 한 어린이도 소흘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부시는 모든 선택은 자신이 스스로 내리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기가 아버지의 길을 마치 자동조종장치처럼 따르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 가장 큰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버지와의 차이는 선거운동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우선 조지 워커는 사람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좋아하는, 인정과 애정이 가득 찬 스타일이다. 그는 취재기자들조차 자기 대가족의 일부라고 농담을 할 정도다.
 
 
  석유의 땅에서
 
 
  부시가 텍사스人이 된 것은 코네티컷州 출신인 아버지가 미들랜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1950년대의 미들랜드는 모래와 조그만 집밖에 없는 미개발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끈끈한 애향심으로 단결되어 있었고, 석유 붐 속에서 언젠가는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느닷없이 사막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도로에서 놀았다. 부시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거나, 캐치볼을 하고, 물주머니를 던지고, 공기총으로 개구리와 고양이를 사격했다. 그는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농구카드를 엄청나게 수집했고, 마치 스포츠중계 아나운서나 된 것처럼 농구에 관한 퀴즈를 친구들에게 냈다.
 
  부시는 운동장에서는 항상 리더가 되었고, 교실에서는 장난꾼으로 소문이 났다. 4학년 때, 그는 자기 얼굴에 수염을 붙여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분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 교장선생님이었던 존 비질로는 부시에게 학교는 장난하러 오는 곳이 아니라고 야단을 치고, 책상 속에 들어 있던 매를 꺼내들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녀석을 세 번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나보고 살인자라고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런 녀석이 대통령후보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부시의 어머니 바바라는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지(하사관)」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油井(유정)굴착회사를 운영하면서, 리틀야구 코치를 했고, 정치단체나 시민단체에서 열심히 봉사를 했다.
 
  부시의 가족에게 비극이 닥친 것은 그가 일곱 살 때였다. 세 아이 중 둘째인 세 살 된 여동생 로빈이 백혈병 진단을 받고, 황급히 뉴욕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부시의 부모는 로빈의 증세가 어떤 상태였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오자 부시는 차로 달려나가서 동생을 찾았으나, 차에 없었다. 동생은 병원에서 죽었던 것이다.
 
  그날 밤, 부시 소년은 로빈에 대한 악몽을 꾸었다. 그 다음날, 부시는 하루종일 농담과 장난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웃기려고 애를 썼다.
 
  부시와 어머니의 관계는 한번도 틀어진 적이 없었다. 그의 어렸을 때 친구 랜달 로든은 부시와 부모 간의 관계가 무척 원만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만큼 부시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는 컸다. 부시는 아래 동생인 젭보다 일곱 살이 위였다.
 
  격한 성격과 폭음, 공격적인 행동 때문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가족들의 그에 대한 기대는 변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들은 그에게 가끔 아버지가 CIA국장에 취임하는 문제 같은 것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 부모는 또 부시에게 텔레비전 토론에 대한 논평을 구하기도 하고, 소문을 해명하거나 선거운동 중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도록 청하기도 했다.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첫날, 공식 기도를 한 사람은 바로 부시였다.
 
 
  미들랜드를 떠나고
 
 
  1959년, 부시가 미들랜드에 있는 산하신토 중학교에서 1학년을 마쳤을 때, 아버지의 해안유전개발사업이 커졌기 때문에 온 가족은 휴스턴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부시에게는 남자 동생 둘과 여자 동생 하나가 있었다. 부시는 1978년 미들랜드 리포터-텔레그램紙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시골 소년이었습니다. 휴스턴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된 다우 하나는 이렇게 회상했다.
 
  『부시는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를 합친 것 같은 소년이었습니다. 한번 만나면, 곧 친해지고 싶어지는 그런 소년이었습니다』
 
  부시는 2년 동안 휴스턴에 있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가 10학년(高1)이 되자, 부모들은 전학시킬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다녔던 매사추세츠州 앤도버에 있는 명문사립학교 필립스 아카데미로 보내려고 한 것이다. 부시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앤도버에는 텍사스에서 온 아이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 학교는 東部 기성세력층에 진입하기 위한 첫 단계였다. 그리고 첫 며칠 동안의 경험은 충격적이었다. 대학예비과정은 텍사스 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혹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올A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시는 성적이 C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앤도버로 간 친구 렌덜의 말에 의하면 그래도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부시는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실제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그는 회상하고 있다.
 
  부시는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校友활동에서는 뛰어났다. 그의 클라스메이트였던 존 키든은 부시가 1000명 정도나 되는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역시 클라스메이트였던 빌 셈플은 부시가 항상 우수한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부시에게는 각종 스포츠팀에서 생긴 운동선수 친구가 있었고, 학교의 그룹활동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었다. 그는 또 교회에서 집사로서 봉사를 했고, 기숙사에서는 사감으로서 어린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밖에도 그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치어리더 책임자였고, 토크라고 부르는 학교 밴드의 「스크리머」이기도 했다. 스크리머의 主역할은 청중들에게 고함을 질러 환성을 지르거나 박수를 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또 길버트와 설리번이란 연극에서 유래된 「스틱볼 고등판무관」이란 별명도 얻었는데, 선수들에게 유머가 있는 외설적인 이름을 붙여주면서 팀을 감독하는 역할이었다.
 
 
  뜻밖의 예일대학 입학
 
 
  부시는 학과성적이 신통치 않았고, 1,600 만점인 대학수능 점수도 1,206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일대학교는 어림도 없었다. 부시는 예일에 입학신청서를 내놓고도 사람들에게는 텍사스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부시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가능성이 높은 代案(대안)을 마치 자기가 원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버지의 출신교인 예일은 부시의 입학을 허가했다. 1964년 가을, 이 텍사스의 재치 있는 시골소년은 뉴헤븐으로 옮겨가서 고딕 스타일의 기숙사 학교인 데이븐포트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부시는 나중에 미국의 엘리트가 된 학우들과 여자, 섹스, 友情 등에 관해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래니 데이비스는 나중에 변호사가 되었고, 열렬한 민주당원으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탄핵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위해 일을 했다. 그는 비록 앨 고어를 지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학시절부터 부시의 大예찬자였다.
 
  부시는 그 시절 심야토론이 대단히 솔직하고, 유익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어느 고독한 미국인 학생에 관한 토론이 있었을 때, 부시가 그 학생을 돕기 위해서 무척 신경을 쓰고 있던 일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데이비스는 또 토론에서 게이(동성연애자)로 추정되는 학생의 이야기가 주제가 되었을 때, 어느 토론자가 조롱을 하자, 부시가 나서서 반박을 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민주당의 거물이 된 그의 친구들이 모두 부시 예찬자가 된 것은 아니다. 부시와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고, 부시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예일을 다닌 후,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이 된 리드 헌트는 이렇게 말했다.
 
  『부시는 사람들을 무척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재산이나, 학급內의 위치, 교우관계 등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속을 받은 것이었으니까요』
 
  부시의 급우였던 재크 레슬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1968년도 졸업반은 예일 역사상 처음으로 공립학교 출신이 사립학교 출신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는 또 그들의 졸업반은 마리화나를 피우지 않는 마지막 세대였다고 말했다. 그 해는 또 로버트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고, 대학원생에 대한 베트남戰 징집연기가 폐지된 해이기도 했다.
 
 
  대학생 때 폭력 행사 입건돼
 
 
  부시는 전통적인 관습을 따라서, 스포츠와 파티를 위한 학생클럽인 델타 카파 입실런에 가입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1970년대의 영화 「불안」보다는 1950년대의 영화 「애니멀 하우스」적인 것이었다.
 
  그는 1966년 아버지가 하원의원에 당선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때려 부쉈다. 경찰은 소란행위 혐의로 그를 입건했다가 석방했다. 그는 또 원정경기에서 예일대학팀이 승리하자, 프린스턴대학교 풋볼장의 골 포스트를 파괴하는 데 참가하기도 했다. 프린스턴 대학 경찰은 그를 체포했다가 추방했다.
 
  부시의 학교성적은 여전히 C가 주류였고, 어쩌다가 역사나 철학 같은 인문과학에서 B를 받았다. 그는 1978년 미들랜드신문 인터뷰에서 자기가 예일에서 『뛰어난 천재』는 못 되었다고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대학생활에서 얻고,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시는 연좌시위나 항의운동, 히피생활 같은 것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로라 부시는 말했다.
 
  『조지에게는 그런 사치를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부시가 속한 그룹도 베트남 전쟁의 시기와 그 긴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룸메이트이고, 평생 친구인 클레이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그 전쟁의 도덕성에 관해서는 그렇게 많이 토론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전쟁이 우리들에게 미칠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징집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에 대처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약혼, 파혼, 입대
 
 
  부시의 베트남 징병 대책 중에는 인생의 반려자가 될 여성과의 결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여성은 라이스 대학교에서 스포츠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캐시 울프맨이었다. 캐시는 예술과 문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의 정치적 항의운동에도 동정적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자기들이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방학 때 가까워져서, 장거리 전화로 많은 돈을 썼다고 한다. 그들은 부시가 20세가 된 1966년, 3학년 때 약혼을 했다. 지금은 캐시 울프맨 영이 된 그녀의 말에 의하면, 4학년 때 헤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그것이 먼 거리와 젊음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별로 가슴 아픈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관계는 그저 서서히 식어갔을 뿐이니까요. 그리고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친구들에 의하면, 조지는 자기 감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실 그대로, 부시에게 캐시에 관해서 물어보면,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만 말할 뿐 더 이상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관한 부시의 계획은 2차대전 때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추락했던 아버지의 경우와 흡사하다. 그는 텍사스州방위군에 입대해서 F-102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베트남戰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부시는 베트남전쟁을 지지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미들랜드紙 인터뷰에서는 베트남戰에 보병 일등병으로 참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조종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베트남에 갈 수 없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보도에 의하면 당시 州방위군의 조종사로 입대하려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시는 부인하고 있다. 州방위군 쪽에서 조종사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시 같은 의원의 아들을 州방위군의 좋은 자리에 입대시켜주는 비밀루트가 있었다. 부시와 같이 입대한 사람 중에는 텍사스 주지사를 지낸 존 코널리의 아들과, 얼마 뒤 상원의원이 된 백만장자 로이드 벤첸의 아들도 있었다. 부시는 州방위군에 입대할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부시는 자기가 시대의 요구와 의무를 다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72년에 앨라배마로 이동했을 때, 부시가 가족의 친구인 윈턴 브라운트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규정된 근무 의무시간을 지키지 않았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되었다. 그러나 부시는 부인한다.
 
  『나는 주말에 의무시간을 전부 근무했습니다. 몇 번 빠트린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모두 보충근무를 해서 의무를 완수했습니다』
 
  브라운트 의원의 선거운동은 부시에게 전혀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1966년과 1968년에는 아버지의 하원의원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1970년에는 아버지의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도와주었다. 부시의 아버지는 이 선거전에서는 실패했다.
 
  1972년의 크리스마스 날, 부시는 술에 취한 채 차를 몰고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워싱턴市의 부모님 집 동네로 갔다. 아버지가 만나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저하고 1대 1로 한판 붙어볼까요?』
 
  하지만 그것은 그저 짓궂은 아들의 장난이었다. 그 무렵 부시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입학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입학하기까지는 9개월이란 시간이 있었으므로, 도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인턴으로 일을 했다.
 
  부시는 1999년에 1970년대 초의 「젊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집중적인 질문을 받았다. 당시의 그는 폭음을 하고, 정력적인 사교생활을 한 일이 있다고 시인했다. 약물사용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그는 197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검사를 해도 통과를 할 것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유에스에이 투데이지가 좀더 자세한 대답을 할 수 없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는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했다고 대답했다.
 
  부시의 부모는 이 기사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거절했다. 부시는 부모가 자신의 졸업 후 방랑생활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깜짝 놀랄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도 않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부모님은 저를 지지하셨습니다』
 
  결국 부시는 부모들이 원했던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2년 동안 「자본주의 도구론」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졸업하고 월스트리트로 가는 대신, 미들랜드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독신 오일맨 시절 만난 로라
 
 
  1975년 웨스트 텍사스로 돌아온 부시는 자기를 「부시보이」 또는 조니 카슨 시리즈에 나오는 「봄바스틱 부시킨」이라고 불렀던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녔다. 이들은 예일과 하버드 기숙사 생활에서 있었던 일을 놀리기도 했다. 부시의 절친한 친구인 정형외과의사 찰리 영거는 부시가 아주 편안한 생활을 즐겼다고 말했다.
 
  이 초보 석유사업가는 우아한 생활이나 사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구두쇠였고, 돈을 쓰지 않았다. 그가 1년 동안 산 집은 몇 평 안 되는 車庫였는데, 길 쪽으로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바닥에는 카펫 대신 신문지를 깔아놓았고, 침대 스프링이 고장이 나서 넥타이로 매놓고 있었다. 친구 영거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영락없는 판잣집이었고, 석유탐사회사 사장 조 오닐의 표현으로는 유독 물질로 가득 찬 쓰레기장이었다.
 
  오닐의 말에 의하면, 부시는 씹는 담배를 즐기고, 컨트리 뮤직을 좋아하고, 소형차인 청색 1970년식 올즈모빌 커틀래스를 타고 다녔다. 그는 항상 청바지와 티셔츠차림이었고, 값싼 기성복을 입었다. 구두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사다 준 슬리퍼를 좋아했는데, 집 안은 물론, 밖에 나갈 때도 신었다. 그는 또 삼촌이 세인트 루이스에서 사다준, 잘 맞지 않는 상어가죽 구두도 신고 다녔다.
 
  당시 부시의 친구는 대부분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부시는 다른 사람의 아이들과 컨트리 클럽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일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마당에서 공 던지기를 했다.
 
  부시는 사교모임에 참석을 해도 항상 오후 9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 30분 후에는 잠자리에 들었다. 깊이 사귀던 여자 친구도 없었다. 영거는 이렇게 회상했다.
 
  『부시는 누가 약혼을 하자거나, 지속전인 관계를 갖자고 해도, 오래 붙어 있지 못하는 성미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오닐과 그의 아내 잰은 부시가 로라 웰치와 만나게 된 야외요리파티를 마련했다. 로라는 오스틴에서 도서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주말에는 부모를 자주 찾아가곤 했던 무남독녀였다. 오닐 부부는 친구 중에서 마지막까지 독신으로 남아 있던 이들을 맺어 주기 위해서 몇 달 동안이나 노력을 했는데, 결국 로라가 수락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부부가 된 이들은 자기들이 7학년(중1) 때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로라, 부시의 결함 메워줘
 
 
  그 날 저녁은 오닐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부시는 자정까지 남아 있다가, 로라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6주일 후, 이들은 약혼을 했다. 로라의 31번째 생일 다음 날인 1977년 11월5일,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만난 지 넉 달도 안 된 때였다. 오닐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조지의 전형적인 결정 스타일이었다. 그는 절대로 머뭇거리지 않았다.
 
  부시가 끌린 것은 로라의 정반대 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여자였다. 책을 좋아했고, 스포츠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대로 옷을 입을 줄 알았고, 절대로 몰취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닐의 말에 의하면, 부시에게는 그녀가 일종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로라는 부시의 결함을 모두 메워서 원만한 인격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몇 년 후, 로라는 부시가 술을 끊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는 부시의 생활태도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주어, 골프를 줄이고, 가정에 좀더 시간을 돌리게 만들었다. 복장도 눈에 띄게 달라지고, 거실도 완전히 변했다. 최근 부시는 자기 아내가 가정 살림꾼이고, 훌륭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로라는 알코올 때문에 생기는 남편의 사회적 일탈행동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로라의 말에 의하면, 남편을 옛날 생활로 이끌어내는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말로 그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나 모습으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영거는 부시가 절대로 천박한 사람은 아니지만, 약간 말이 많고, 시끄러울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
 
 
  부시가 1978년,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의 家門을 잘 알고 있던 친구들은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부시는 미들랜드紙 인터뷰에서 오데사市 시장을 지낸 주식브로커 짐 리즈에 대항해서 「정중하고 예의바른」 예선전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상대방 후보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리즈는 부시가 록펠러식 공화당원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리버럴한 북동부 공화당원들이 제공하는 자금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부시는 그 예선전에서 승리했고, 오늘 날 그의 주장과 같은 공약을 내세우고 있던 민주당의 州상원의원 켄트 핸스에 대항해서 선거전을 벌이게 되었다. 핸스는 잭 켐프와 윌리엄 로스가 추진하고 있는 33.3% 감세정책을 지지했고, 사회보장제도는 10년 안에 바닥이 날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투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거전에서 부시는 자금동원력을 과시했다. 이번 후보지명전에서도 자금동원기록을 세운 그는 1978년의 그 텍사스州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기록을 세웠다. 그는 핸스의 31만4,110달러를 능가하는 43만4,909달러를 모금했다. 그 대부분은 텍사스州 밖의 명사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금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경험이 더 많은 핸스에게 6% 포인트 차로 패배했다. 그는 다시 사업과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시는 1975년, 석유경기가 한창 달아오고 있던 무렵, 그의 미들랜드 인생에서 두 번째 중요한 시기를 시작했다. 그는 하버드 MBA와 아버지의 명성, 그리고 5만 달러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 베테랑 석유사업가 아래서 도제처럼 일을 하면서, 서부 텍사스와 동부 뉴멕시코州의 재판소에서 토지기록을 찾아내는 방법을 배웠다. 1977년, 그는 스페인어로 숲이란 뜻인 아르버스토社를 처음으로 설립했다.
 
  부시는 보수적이고,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미 생산능력이 확인된 유전 근처에서 소규모의 油井을 파기 시작했고,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면세혜택을 활용했다. 하지만 대박의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1981년 말, 그는 회사 이름을 부시시추회사로 바꾸고, 일련의 과감한 탐사계획을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은 석유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무렵, 회사를 上場했을 때 생겼다. 부시는 목표액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130만 달러밖에 모을 수 없었고, 동업자는 시추공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아 투자금의 75%를 손해보았다. 부시는 나중에 댈러스 모닝뉴스紙 인터뷰에서 당시 최악의 실수를 했다고 고백했다.
 
  부시의 회사는 1983년 말까지 버틸 수 있었는데, 바로 그 무렵 그는 스펙트럼 7이라고 부르는 석유투자펀드를 운영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1984년 초, 부시는 이 펀드에 자기 회사를 합병하고, 회장이 되었다. 이 거래에서 부시의 인맥이 眞價(진가)를 발휘했다. 이 거래를 주선한 사람은 부시 가족의 친구인 마틴 올데이와 신시내티 레즈의 구단주이며, 스펙트럼 7의 이사인 빌 데이비드 주니어의 아버지 빌 데이비드 시니어와 가까운 폴 리였다.
 
  2년 후, 석유 값은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시 회사에서 오랫동안 회계사로 일했던 로버트 매클리스키의 말에 의하면, 이 때 많은 사람들이 파산했다고 한다. 당시 스펙트럼도 그럴 운명이었는데, 부시는 황급히 하켄 에너지에 매각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부시는 60만 달러의 주식과 1년에 최소한 5만 달러가 보장된 이사직을 받았고, 직원들에 대한 대우도 잘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미들랜드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부시에게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투자자는 그의 친구와 가족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한번도 큰돈을 벌지 못했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했다. 친구 엔시넷은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은 사업을 그런 대로 유지했고,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주면서 버티다가 다른 회사에 합병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술을 끊다
 
 
  석유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는 1980년대 중엽, 부시는 밤마다 마시던 맥주와 위스키의 양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음주가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가 교만해지고,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래 전, 휴스턴의 사교 파티에서 부시가 나이 많은 여자에게 50세 이후에는 성생활이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로라 부시는 자기 남편이 술에 취하면 재미없는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남편은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합니다. 그러면 난 중지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자신의 과음에 대해서는 좀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1986년 여름, 그들은 4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여행을 가서 브로드무어 호텔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부시는 다음 날 일어나더니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호소했다. 그는 아침에 고통스럽게 조깅을 끝내고 돌아오더니, 당장 술을 끊었다.
 
  로라는 그것이 「성숙」이라고 설명했다. 그 시기는 그가 종교적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그는 미들랜드에서 친구들이 시작한 성서그룹에 가입한 일이 있었고, 그 전해 여름에는 부시가족의 휴양지인 워커스 포인트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조지 부시가 브로드무어에서 파티를 열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를 1988년 대통령선거에 출마시키려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난처한 입장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987년 말, 부시와 아내, 그리고 1981년에 출생한 쌍둥이 딸 바바라와 제나는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대통령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시는 아무런 공식 직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非공식 직위는 충성집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제언을 하고, 스태프들의 활동을 조정했다.
 
  그는 신속하게 판단을 내리고, 부모와 대화통로를 열어놓았다. 그는 아버지와 기독교 보수파나 선거운동 보조유세자들 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아버지에게 여자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나서서 그 소문을 진정시킨 것도 그였다. 그는 뉴스위크紙 인터뷰에서 단호하게 『노』라고 부인했다.
 
  친구들은 그 1988년 선거가 부시의 야심을 바꾸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닐의 말에 의하면, 부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미국 정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1991년 말, 또 하나의 전환점이 있었다.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말썽꾼인 대통령 비서실장 존 수누누를 사임시키기로 결정했다. 부시는 자기 아버지(부시 대통령)와 의논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뜻은 알고 있었으므로, 수누누에게 사임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를 했다. 며칠 후, 수누누는 다른 보좌관으로부터 명령에 가까운 이야기를 듣고는 사임하고 말았다.
 
  당시 부시는 이 문제를 예일대학교 친구이고, 캘리포니아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던 돈 에트라와 의논했다. 에트라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사건으로 부시는 정계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정국운영에 참여한 사건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이런 일을 할 수 있어. 그리고 능력이 있어. 직접 뛰어들어 일을 하고 싶단 말이야」』
 
 
  야구의 꿈
 
 
  1988년,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부시는 댈러스로 가서 1990년에 텍사스 州지사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가족들은 반대했다. 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인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시는 출마를 포기했다. 20년 전 텍사스 州의회에 출마하려다 포기했던 때와 똑같은 이유였다. 미들랜드紙 보도에 의하면, 그는 예일대학 친구 롤랜드 베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미디어 생산품이야. 그런데 지금까지 사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거든』
 
  그리고 나서 부시가 한 일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고 있던 사업이었다. 그는 자금을 모아서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단을 미들랜드의 친구인 球團主(구단주) 에디 차일즈로부터 매입했다. 다시 한번 부시는 돈을 제외하고, 자기 이름, 가족 친구, 사람들의 기술, 거래 경험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했다.
 
  부시는 구입가격 3,500만 달러 중에서 겨우 60만6,000달러밖에 끌어대지 못했지만, 이 구단의 공동 매니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매일 매일의 구단운영과 대변인의 일을 맡았다.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 야구 커미셔너를 지냈던 피터 위버로스와, 경쟁관계에 있다가 부시의 파트너가 된 억만장자 리처드 레인워터가 이 구단매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구단의 회장이었던 톰 시퍼의 말에 의하면, 그들을 모두 모아서 거래를 형성시킨 것은 부시였다는 것이다.
 
  당시 레인저스는 새로운 球場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알링턴市는 판매稅를 임시 인상해서 1억3,500만 달러를 내기로 동의했다. 이 자금은 티켓에 1달러의 부가세를 붙여서 조성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주민투표는 65%의 지지를 얻었다.
 
  1994년, 이 스타디움이 완성되자, 부시는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기업의 자유와 빈곤층 복지에 대한 규제를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비판자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들은 야구팬과 납세자가 부시와 같은 부자 투자가들의 복지를 위해서 희생을 당해야 하느냐고 공격했다.
 
  부시는 그 경기장이 지역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도 그 혜택을 받고 싶어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 球場이 1998년 매각되었을 때, 부시는 1,490만 달러를 받았다. 스타디움이 성공하고, 스포츠관계 프랜차이즈 값이 치솟았을 뿐만 아니라 球場을 잘 운영한데 대한 보너스였다. 세금보조 때문에 그런 돈을 번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부시는 주민들이 투표로 그들의 의사를 표시한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부시는 돈을 꾸어서 레인저스에 투자를 했다. 1990년 중반, 그는 그 융자금을 갚기 위해 하켄의 주식 84만8,560달러 어치를 팔았다. 며칠 후 이 회사의 형편 없는 수익이 기록된 분기매출보고서가 발표되고, 株價는 4달러에서 2.38달러로 폭락했다. 당시 부시는 이 회사의 재정문제를 검토하는 임무를 맡은 이사였다. SEC(증권거래위원회)는 내부자거래혐의와 부시의 매각보고지연 혐의를 조사했지만,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부시는 야구 관계 일 때문에 1992년의 대통령 선거전 기간 동안에는 대부분 텍사스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스태프들의 충성심이 문제가 되고, 신문보도가 편파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멀리서 분통만 터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1992년의 실패를 털어 버리고, 마라톤 연습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 키드의 말에 의하면, 1년이 지난 후에도 부시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것 같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패배하자 그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습니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 같았습니다. 무척 감정도 상했기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나 있었습니다. 1년이 지난 다음까지도 말입니다』
 
 
  기회가 오다
 
 
  그 무렵 부시는 텍사스 州지사 선거전에 출마하기로 결심을 했다. 친구와 가족들은 시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부시가 인기가 있던 현직 민주당 출신 지사 앤 리처즈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거전에 뛰어들어 마을을 하나씩 찾아다니면서, 텍사스에는 또 하나의 조지 부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방자치단체를 더 규제하고, 교육의 수준을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복지와 세금제도, 소송제도 같은 것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시의 명성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아는 리처즈 지사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이용해서 공격하면서,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깎아 내렸다. 부시의 친구와 가족은 그가 그런 공격을 얼마나 버티어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을 했다. 영거의 말에 의하면, 『부시는 약간 충동적이고,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는 이미 단련된 후보였다. 그는 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주로 자기 아버지를 공격할 때뿐이라고 해명했다. 이점은 그의 친구들도 동의하고 있다. 영거의 말에 의하면, 부시는 공격을 받으면 끈질기게 대항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부지사와 잘 지내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자 부시가 처음 한 일은 의회 兩黨 지도자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후원자가 된 것은 보수적인 민주당원이면서 부지사인 봅 불록이었다. 그는 실무에서는 지사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불록은 1999년 6월 죽기 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부시는 머리가 좋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고, 맡은 일은 몸을 돌보지 않고 해내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텍사스 주지사의 주무기는 설득과 웅장한 연단, 그리고 거부권이었다. 그런 일은 부시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1995년의 의회 회기 중 대부분의 공약을 어떻든 실현했다.
 
  1997년, 부시는 대폭적인 稅制개혁으로 자신의 인기를 시험했다. 그것은 1년에 재산세를 30억 달러 가량 줄이고, 의사와 변호사, 서비스업에 대한 판매세를 확대하며, 공립학교에 대한 재정지원을 개혁하도록 되어 있었다.
 
  부시의 동료 공화당원들은 이 稅制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의회는 10억 달러의 세금감축을 승인했다. 자동차 딜러와 판매상, 식당을 대표했던 로비스트 빌 밀러의 말에 의하면, 부시가 강력한 友人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더라면 세금개혁 때문에 매장되고 말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稅制개혁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살려 두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승리를 한 겁니다』
 
  오스틴의 주민 모두가 부시를 칭찬하거나, 그가 주장하는 「온정 있는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ve)」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게이 입양반대나 게이보호법 반대, 사형제도 지지, 어린이를 위한 건강보험제도 축소, 의사 선택권 보장법안 거부 시도, 그리고 법인세 감면이나 자발적 오염배출감소계획 등에 나타난 그의 편견을 공격하고 있다.
 
  부시는 1998년 11월 선거에서 65% 대 34%의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가 얻은 흑인 및 히스패닉계 표는 기록적인 것이다.
 
  이제 부시는 54세 생일인 지난 7월5일 전날 저녁, 그의 선거운동 전용기에 서서 행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부시는 10여 년 후, 로라와 함께 건설한 목장으로 은퇴할 때, 이렇게 말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제 더 만날 사람은 없어. 충족한 삶을 살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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