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전용 讀書記 … 사막의 미로를 헤매다

李文烈의 「아가」는「雅歌」였다!

  • : 박경범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Society believes that women are supposed to be skinny and frail to feel good about themselves. I consider it a challenge to help shake off that stereotype with my physique. Muscularity and feminity can coexist.」
 
  위의 글은 인터넷에 자기의 사진을 올려놓고 판매하는 한 여성 보디빌더의 글이다. 때로는 정말로 실오라기 하나만을 걸친 채로 포즈를 취하기도 하며 중요한 사진마다 「Sample Only」라는 글자를 박아놓아 반드시 돈을 내고 주문하라고 하는, 쉽게 말해 「몸으로 때우는」 여자이다.
 
  문제는 위의 글이 단순히 영어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번역해 놓고 보면,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어떤 철학자의 글로 생각되는 것이다.
 
  『社會的인 通念은 女性들이 自己를 好感있게 보이려고 날씬하고 나약해지려 한다지만, 나는 그 常套를 몸으로 打破하려 挑戰한다. 筋肉質과 女性性은 共存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이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의사소통의 水準인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사람들간 정보의 효과적인 전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文字는 예나 지금이나 인류에게 있어 가장 의미 깊고 중요한 정보전달 매체이다. 文字에 의한 정확하고 효율적인 정보전달 환경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토록 요란한 정보화 사회 운운도 한낱 空念佛일 것이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우리 한국인은 文字통신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필자는 학술, 문학 그리고 종교서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았다.
 
 
  추측의 학문
 
 
  지식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서는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전달이 생명이다. 그러한 절대적 필요성 때문에 학술서는 우리 사회에 한글전용이 맹위를 떨친 뒤에도 상당기간 동안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글전용 이데올로기가 거의 모든 사회규범에 于先하여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근래에 들어서는, 거의 대부분의 인문학 학술서적도 한글전용을 따르고 있으며 또한 혼동의 우려가 있어 부득이한 경우에는 괄호 안에 英文을 倂記하고 있다.
 
 
  ▲「사회학 - 인간사회의 구조와 변동」 (Stephen K. Sanderson 著, 김정선 外12人 譯, 그린)
 
  <최초의 농업사회들은 진정한 농업이 아닌 단순원예농(simple horticultural societies)에 기반을 두었다>
 
  여기서 「원예농」이 뜻하는 것은 초기 농업사회의 형태로서, 텃밭을 가꾸는 수준의 소규모적인 농업을 말하는 것이었다. 園藝農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꽃나무, 과일나무, 정원수 등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기보다는 보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을 위한 「예술적」 식물의 재배를 하는 농업이다. 따라서 원시 농업사회를 뜻하는 「원예농」과 오늘날의 園藝農은 다른 것이다. 물론 原語 「horticultural」은 영어사전에서는 곧바로 「園藝의」라고 나타나 있으니 전혀 어긋났다고는 볼 수가 없으나, 만약에 「園藝」의 漢字를 의식하고 번역이 되었다면 원시 표본채집에 의한 농업을 쉬이 「예술적」 농업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사용을 위한 생산 대 교환을 위한 생산>
 
  여기서 「사용」은 使用, 私用, 社用, 事用 등의 여러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꼭 문맥을 파악해 「使用」이라고 限定할 수가 있을까. 또 여기서 물품의 교환가치에 대응되는 가치로서 꼭 「使」해서 「用」하는 것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利用」도 있고 「適用」도 있고 「活用」도 있으며 「愛用」도 있다. 오히려 이 경우에는 「쓰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대형(big men)이라 불리는 지나치게 야심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大兄을 말하는가 본데 우리가 「대형」 하면 大形의 뜻으로 너무도 많이 쓰여왔으므로 그 의미의 파악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 괄호 안의 英文토가 그나마 의미를 추측하게 한다.
 
  다음은 이 책에 있는, 혼인 후 주거규칙의 여러 형태에 대한 것이다.
 
  <● 부거제(patrilocality) 남편의 아버지 집에 살기
 
  ● 모거제(matrilocality) 아내의 어머니 집에 살기
 
  ● 외거제(avunculocality) 남편 어머니의 형제의 집에서 살기
 
  ● 쌍거제(bilocality) 양쪽 친족집단에서 주거를 번갈아 옮기면서 살기
 
  ● 양거제(ambilocality) 양쪽의 친족집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그곳에서 살기
 
  ● 본거제(natolocality) 부부가 동거를 않고 각자 자기가 태어난 집에 거주
 
  ● 신거제(neolocality) 혼인한 부부가 독자적으로 정한다>
 
  괄호 안의 영어 단어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 단어에 포함된 의미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학습자는 한글용어의 의미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이 어려운 영어 단어들을 외우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父居制, 母居制, 外居制, 雙居制, 兩居制, 本居制, 新居制로 표기한다면 굳이 어려운 영어 단어를 병기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각각의 뜻도 굳이 일부러 暗記하지 않아도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위문화와 마찬가지로, 반문화들도 더 큰 문화 안에 존재하는 변별적인 문화유형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하위문화와는 달리, 반문화의 구성원들은 지배적인 문화유형을 공유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신 반문화는 이러한 지배적 유형에 대한 적대감과 거부감에 기초하는 것 같다>
 
  「반문화」는 「反文化」일 가능성이 많지만 「盤文化」일 수도 있고 「半文化」일 수도 있다. 세 번째 문장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反文化」이겠구나 하고 짐작이 가능하다. 「변별적인」은 아마도 「various」 즉 다양한 변형적인 것을 뜻하는 것 같은데 「辨別的인」도 아주 틀리지는 않겠지만 「辨別」이란 단어는 보통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을 구분할 때 쓰는 말이라 어색하다. 「變形的인」과 같은 「변」자가 있으니까 대충 쓴 것 같다. 물론 「변형적」과 「변별적」 어느 것이 옳은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어느 말을 쓰든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농경사회의 대부분의 성원들은 소농(peasants)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매일매일 토지를 경작하는 일차 생산자들이다>
 
  「小作農」이란 말에서 「小農」이라 할 수 있지만 기본생산계층이라는 점에서 「素農」이라는 다소 개념 있는 말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이 일어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품이나 재화의 가격은 추상적인 수요공급의 상대적인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들은 상점에 가서 각 제품에 이미 부착된 고정가격들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격은 이러한 방식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값을 깎기 위한 흥정(haggling)을 통해 결정되어진다>
 
  「전자본주의」가 「前資本主義」인지 「全資本主義」인지(혹은 「轉資本主義」인지 「專資本主義」인지)는 문장을 한참 다 본 다음에 짐작할 수 있다. 용어가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내용을 먼저 짐작해야 용어의 뜻을 추측할 수 있다.
 
  <봉건제하에서의 경제적 생산을 위한 기본단위는 장원(manor)이었다. 영주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직접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영지(demense)라고 불렀다>
 
  독자가 「莊園」, 「領地」의 뜻을 알 기회는 없다. 괄호 안의 단어가 용어의 뜻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려면 상당히 깊은 영어 지식을 요구한다.
 
  <하부구조의 논리적 우선성>
 
  「우선」이 단지 그냥 앞선다는 뜻이지 「于先」과 「優先」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사회과학도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윌러스타인은 세계체계의 두 가지 기본형태로 세계제국과 세계경제를 구분한다>
 
  「세계제국」이 「世界諸國」인지 「世界帝國」인지 아직은 모른다.
 
 
  병신처분, 화성경영, 오회연교
 
 
  ▲「조선시대 당쟁사 2」(이성무, 동방미디어)
 
  국사 관련서이니만큼 너무도 혼란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특히 모든 소제목을 한글로만 쓴 탓에 그 혼란은 기가 막힐 정도이다. 저자는 그 역사용어들을 알고 있기에 한글로 써도 뜻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책이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있는 책이 아닌가 한다. 또한 여기에는 노년세대의 체념의식이 한몫을 한다고 본다. 「한자를 써야 뜻이 통한다」고 주장해 봐야 노년층의 취향으로 일축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것은 모르는 말씀이고 요즘 젊은 세대는 한글로 써도 뜻이 통한다」고 하는 이들의 힘에 밀려 따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일일이 토를 탈기도 번거로워 눈에 띄는 부분을 여기 나열하기로 한다.
 
  <남인과 도체찰사부
 
  병신처분
 
  전랑통청권
 
  한림회천권
 
  시파와 벽파
 
  화성경영
 
  영남만인소
 
  산림무용론
 
  초계문신제
 
  오회연교>
 
  이 책의 편집기준은 제목은 한글로 쓰고 初出은 한자를 병기하고 再出은 한글로 쓰고 색인에서 한자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용어의 뜻을 알려면 일일이 색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겉보기에 한자가 없어야 한다」는 요즘의 출판원칙을 지켰을 뿐이었다.
 
 
  ▲「한국표준산업분류」 (통계청, 행법사)
 
  <● 임업
 
  「영림, 산림용 종자 및 묘목생산, 벌목활동과 야생임산물 채취 및 임업관련 서비스 활동을 말한다」
 
  ● 우라늄 및 토륨 광업
 
  「역청 우라늄광을 포함하여 우라늄 또는 토륨을 주로 함유한 광물을 채굴 및 정광하는 산업활동을 말한다」
 
  ● 직물 및 편조원단 염색 가공업
 
  ● 날염가공업
 
  ● 산업플랜트 공사업
 
  「예시:오븐, 노 및 유사설비 설치공사」
 
  ● 산동물 도매업
 
  「제외:산수산동물도매」
 
  ● 가사 서비스업
 
  「예시:요리사, 가정부, 세탁부, 보모, 유모, 참모, 개인비서, 집사, 운전사…」>
 
  각 분야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를 위한 책에서 정광이니 편조원단이니 하는 용어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전문용어이니 만큼 국어사전에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국가배상의 법률지식」 (이상석, 청림출판)
 
  <영조물의 하자
 
  경찰서 대용감방내 폭력
 
  일석점호시에 위 망인이 번호를 잘못 불렀기 때문에
 
  수하를 듣지 못하고 사람을 사살하면 과실
 
  구상책임을 인정한 사례
 
  전심절차의 요부
 
  신청인이 그러한 취지에서 위 동의 및 청구서를 작성하여 배상심의회에 제출한 것이라면 개호비 부분에 대한 배상심의회의 기각 결정이 본안에 대한 심사를 한 것이 아니어서 기판력을 갖지 않게 된 여부에 불구하고
 
  이 판결선고시까지는 연 5푼, 그 다음날부터 완제일까지는 연 2할5푼의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원고는 사망한 소외 ○○○의 처이고>
 
  개호비, 기판력 등 법률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너무나 많다.
 
 
  과학기술 용어의 어림짐작
 
 
  이러한 문제는 理工學 분야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정확성과 엄밀성이 더욱 요구되는 분야에서 漢字의 말살은 오히려 더 먼저 試行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알고리즘」 (공성곤 외, 그린)
 
  <등반, 시뮬레이티드어닐링, 그리고 유전자 알고리즘
 
  다 회원 진화 전략은 두 회원 진화전략과 개체집단의 크기에서 다르다
 
  교대에지 교배는 첫번째 부모로부터 랜덤하게 하나의 에지를 선택하고
 
  서수적 표현 방법은 하나의 여행을 n개 도시의 리스트로 나타내며,
 
  이 표현방법을 해석할 때는 그리디 휴리스틱(greedy heuristic)을 사용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디 해독(greedy decoding)」 방법은 그룹-수자나 구별자가 있는 순서 조합과 같은 다른 해독방법에 기반을 둔 진화 프로그램들보다 월등한 성능을 보인다>
 
  해독은 解讀이지, 害毒이나 무협지에서 많이 나오는 解毒 등이 아님을 알려줘야 한다.
 
 
  ▲「컴파일러 입문」 (오세만, 정익사)
 
  <회문언어 (palindrome language)
 
  구문분석이란 주어진 입력이 올바른 프로그램인가를 검사하고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정보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컴파일러의 단계는 구문분석기(syntax analyzer)이다>
 
  구문은 句文 아닌 構文으로 아는 학생이 얼마나 있을까. 영어의 「syntax」는 그 말이 「구조적」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무조건 소리를 따라하는 우리 학생들은 그 뜻을 모른다.
 
  <「제산법(division method)은 심벌을 수로 표현하여 버켓을 크기로 나누고 그 나머지를 해시 값으로 취하는 방법이다」
 
  「컴파일러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을 연쇄법(chaining)을 사용하여 해결한다」
 
  「시맨틱 에러(semantic error)란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의미적으로 틀린 에러이다」
 
  「왜냐하면 Pascal 언어에서는 연산에 앞서 피연산자의 형검사(type checking)를 수행하여 형이 일치하지 않으면 모두 에러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선언되지 않은 명칭의 경우, 제일 처음 만났을 때 간단히 심벌 테이블에 적당한 속성(attribute)과 그 이름을 기입한다」>
 
  屬性을 알지 못하면서 「attribute」로써 알 수 있을까
 
 
  ▲「韓國音響學會誌」
 
  <빔 탐색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후보의 우도의 정도이다. 정도가 낮은 경우, 정해로 얻어진 후보가 프루닝에 의해 제외되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즉, 어떤 시점(처리 프레임)에서 그 노드까지의 누적우도가 크지 않을 경우 정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색에서 제외되어 최적성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므로, 빔폭의 제한과 프루닝 조건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최적해를 잃을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인식 정도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빔 폭과 프루닝 조건을 완화시키면서 탐색공간을 감소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우도의 정도」는 비슷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遇度의 程度」 같은데 사실은 그냥 遇度만으로도 충분한 것인데 한글로 쓰다 보니 중복해서 쓴 것이었다. 「정해」는 正解인지 精解인지 불확실하다. 그 외에도 불확실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것에 대해 「해당 전문인들 사이는 다 뜻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니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술문서는 이미 익숙한 전문인들 이외의 인접분야의 사람들도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써야 인접분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나아가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본 인식 시스템에서부터 소음처리 기법을 하나씩 추가하여 마지막 스펙트럴 차감법까지 모든 소음처리기법이 결합된 인식 시스템의 인식 성능을 나타내었다>
 
  「차감법」은 아마도 「差減」일 것이다. 이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학생이 「차감」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뜻을 알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음」은 물론 흔히 쓰이는 말이므로 「騷音」이란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소음」은 「noise」의 뜻으로 쓰고자 한 말인데 「noise」는 반드시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映像정보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불순한 정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漢字를 안 쓴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그 의미를소리에 한정시켜서는 안 될 말이다.
 
  <평균을 취하는 스냅샷의 개수 K를 20으로 고정시켜 놓고 신호대 잡음비를 -14로부터 4dB까지 2dB씩 변화시켜 가면서 ETAM기법과 제안된 기법의 신호대 잡음비에 따른 입사각 추정오차를 비교한 것이다>
 
  여기서의 「잡음」은 앞의 「소음」과 같은 뜻으로 쓰인 말이다. 물론 다른 저자의 논문이다. 漢字를 안 쓴다고 해서 「소음」이나 「잡음」이나 그것이 그것인 줄 생각할지 모르지만 「雜音」과 「騷音」은 다른 말이다. 여기서도 역시 소리정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므로 「雜號」 등의 다른 용어(없으면 만들어서라도)를 써야 할 것이나 모두들 「잡음」으로 대충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大家 李文烈의 「아가」
 
 
  작가 李文烈씨의 최신작 「雅歌」는 약간의 논란을 일으키며 화제가 되었다. 필자는 그전부터 여러 번 李文烈씨의 작품을 접한 바 있었지만, 이제까지는 그저 「남들이 인정하는 만큼의 정도」에서 머물렀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작품을 읽으며 과연 李文烈씨는 文章의 達人이라는 獨自的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 본래의 주제와 배경의 흥미로움을 떠나, 이야기의 전개와 문장의 진행은 이미 다른 후배작가에 의해 말해진 그대로, 大家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문학적 성취임을 실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감상하는 李文烈은 과연 본래 작가 李文烈의 역량이 그대로 발휘된 것일까.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이미 어떤 非文學的 검열에 의해 一次 걸러진 李文烈을 놓고 우리는 국민작가, 大作家, 大家 운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선 그 제목부터 작가의 뜻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懷疑的이다. 지난번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에서 열린 李文烈씨의 사인회에는 많은 초등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 있어 제목 「아가」는 당연히 「baby」가 먼저 연상되었을 것이다.
 
  물론 「雅歌」가 초등학생을 독자로 씌어진 작품은 아니지만 제목의 난해함(?)으로 인해 李文烈씨는 「차세대 독자」의 倍加에 불리함을 안았고, 어린 학생들은 단지 작가의 기존 名聲만을 보고 관심을 두었을 뿐 새 작품에 대한 적극적인 동경과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는 회의적인 것이었다.
 
  설령 어린이들이 모를 漢字일지라도 그대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제어를 내세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읽나요?」하는 어린이의 질문을 위하여 귀퉁이에 작게 「아가」라고 써도 과히 賣國的인 일은 아닐 듯싶었다.
 
  제목을 굳이 그렇게 정한 것이 과연 적절했는가에 의문을 갖는 출판인의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볼 때 제목의 設定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출판사를 통한, 작가와 독자와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여진다. 작가는 「雅歌」란 말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생각하며 그것을 합당한 제목으로 인정했으나, 정작 책으로 나올 때에는 「雅歌」의 이미지보다는 애매모호한 「아가」라는 단어가 책의 표지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것이다.
 
  작품의 서두에서도 그렇고 또 (독자인 필자의 주관으로는 다소 어색한 蛇足인 것 같기도 한) 末尾의 「번역시」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작가는 우리의 공동체에 어엿이 편입되어 나름대로의 역할을 부여받고 살았던 장애인의 삶이 (비록 외형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할지라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디지털化하고 규격화된 현대사회에서는 (특별히 적극적으로 봉사활동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 그러한 삶을 자연스럽게 지켜볼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는 것에서, 한 장애인 여성에 얽힌 이야기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고까지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처음 접하는 제목 「아가」는 當惑感은 줄지 몰라도 그렇게 아름다운 이미지를 주지는 못한다(물론 「baby」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天眞하고 귀여운 어린 아기가 재롱 피우는 모습 혹은 갓 시집 온 젊은 며느리를 시어머니가 다정하게 부르는 장면이 연상되겠지만) 그래서 漢字를 倂記하였다 하더라도, 한글제목보다 훨씬 눈에 안 띄게 씌어진 작은 제목은 그다지 본래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효과를 주지 않는다.
 
  그나마 표지의 붉은 바탕과 속표지에는 「雅歌」를 크게 쓴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희미한 옛사랑의 雅歌란 뜻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이지 漢字제목을 쓰는 것이 무슨 罪라도 되길래 그렇게도 당당히 쓰지 못하는지 寒心(썰렁)한 생각마저 든다. 漢字로 표지를 한 책도 팔릴 책은 얼마든지 팔리는 사례(예: 太白山脈)가 있는데 도대체 어떤 이데올로기가 漢字 쓰기를 그렇게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제목부터 이 책은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작가의 마음속에 떠도는 雅歌의 이미지로부터 그것의 音讀인 「아가」가 파생되었는데, 독자는 작가의 마음속 雅歌의 이미지는 전혀 거치지 않고 그 이미지와 거의 무관한 소리인 「아가」를 처음 접하게 되어 작가의 본래 생각과는 相異한 느낌으로 이 책을 접하는 것이다.
 
 
  신열, 결기, 조당수
 
 
  제목에 대한 시비는 이만하고 작품 「雅歌」의 본문을 보자. 우리의 문화사회에서 쓰이는 文章 중에서도 소설의 문장이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론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쑥스러운 것이지만 이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소설의 문장은 가벼운 내용이든 심각한 내용이든 간에 독자로 하여금 막힘 없이 흘러가며 읽어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시대 그의 존재가 참으로 다행이라 할 大家의 작품에서도 군데군데 막히고 다시 훑어보아야만 뜻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심심찮게 있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그중 기억에 남는 일부만을 여기에 소개한다.
 
  ▲11面, 「그 영문 모를 결기가 옮았던지」
 
  여기서 「결기」는 「결氣」로서 /결끼/로 발음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한글은 音으로 모든 단어를 구분할 수 있는 소리글자라는 것이 한글 찬양론의 핵심인데 그렇지 못했다. 「氣」로 써 있었더라면 뜻과 함께 음도 알아보기 좋았을 것이다. 結氣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20面, 「신열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기의 「열」은 아마도 「熱」이고 「列」이나 「烈」은 아닐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저 단순히 「열이 났다」고 하지 않고 「신열」이 났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기대했다. 그러나 身熱인지 辛熱인지 腎熱인지 新熱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수식적 의미가 첨가된 辛熱이 아닌가 했지만, 사전을 찾아보고 身熱만 나와 있는 것을 본 다음에는 身熱이라는 平易한 뜻임을 짐작했다.
 
  ▲25面, 「조당수 한 그릇을 마시고부터」
 
  처음엔 粗糖水인 것 같았지만 확실치 않았다. 사전을 보니 조(곡식이름)로 만든 당수(음식이름)인데, 이러한 말들의 본뜻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려면, 독자는 時도 때도 없이 솟아오르는 漢字음역의 유혹을 떨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려면 한글로 쓰여진 낱말은 우선 漢字語가 아닌 고유어로서 풀이를 하고, 그 다음에 정 안 되면 漢字語로서의 풀이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하지만 한글로 쓰여진 생소한 낱말도 대개는 漢字음역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사리 그 버릇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101面, 「좌익들이 지서 공터에서 피탈이 나도록 얻어맞고」
 
  「피탈」은 피가 나도록 탈이 났다는 뜻 같은데 역시 漢字語 풀이의 유혹은 어김없이 일어나 피부가 벗겨지도록 맞았다는 皮脫인지, 아니면 그냥 사전에 나오는 被奪이나 避脫인지(이 낱말들의 뜻으로는 문장의 의미가 잘 연결되지 않았음) 여러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독자의 상상력을 증대시킨다고 해야 할까.
 
 
  신산함과 신선함
 
 
  ▲122面, 「딸만 넷이나 내리 낳은 산판 인부의 젊은 아낙 하나가」
 
  사전에 같은 「산판」으로 표기되는 다른 한글낱말이 없어서 漢字가 빠졌나 본데 山坂이 표기되어 있다면 안 찾아도 될 사전을 굳이 찾아야 했다. 算板인지 酸販인지 産板인지 産販인지 여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그 뜻을 어림잡기가 쉽지 않았다.
 
  ▲250面, 「손꼽히는 공공시설로서의 성가를 누렸다」
 
  「성가」는 아마도 盛價 같았는데 成價일 수도 있고 또 盛歌, 成歌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전을 확인하고 나서는 聲價인 것 같기도 하고 成家인 것 같기도 했는데 어쨌든 우리는 그저 「성가를 누렸다」라는 말의 뜻을 그저 「잘 나간다」는 뜻으로 서로들 공통되게 짐작하며 그런 대로 쓰고 있는 것 같다.
 
  ▲268面 「유별났던 삶의 신산함과 외로움이었던 것 같다」
 
  「신산함」 바로 다음에 다행히 비슷한 느낌의 낱말인 「외로움」이 있었기에 혼동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금 생소한 낱말을 원고에 쓰면 쉬이 그와 비슷한 한글표기의 다른 보편적인 낱말로 「교정」해 버리고 마는 일을 숱하게 겪어본 바 있는 필자로서는 「그녀의 삶은 신산하였다」라고 단순히 서술되었다면 필경 오타로 취급되어 「신선하였다」로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한글전용에 의한 우리 낱말의 소리 글자화를 수십 년간 추진하였고 또 근래 우리의 식자층에는 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정확히」 아는 경우가 많아, 발음이 비슷한 낱말은 뜻도 비슷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비판」과 「비난」을 비슷하게 여기는 것 등). 그러므로 「辛酸함」은 母音만 조금 다를 뿐 「신선함」과 발음이 비슷하고 오히려 더 산뜻한 양성모음이므로, 한글전용세대의 독자에게는 「신선함」보다 더 新鮮하고 상큼한 느낌을 주는 낱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以上과 같이, 현시대 우리의 글쓰기의 모범이 되어 손색이 없을 大家의 작품에서 일부 눈에 띄는 「문제점」을 나열하여 보았지만, 실상 만약 「觀察者」가 「職業的인 惡意」를 가지고 파헤쳐 들어갔다면 더욱 많은 「문제점」이 나타날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시대 한국어가 얼마나 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있는지를 말하여 준다. 다만 우리는 그 「불확실성」을 관대하게 대강 넘어가며 확실하게 바로잡고 싶은 어떤 의욕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문학의 한글전용론자들(실제로는 따로 구분할 것도 없이, 거의가 한글전용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의 큰 착각의 하나는 문학의 낱말표기를 그저 다른 낱말과 구분되기만 하면 충분한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생소한 漢字語라도 같은 한글표기의 다른 낱말이 辭典에 없으면 漢字를 병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신속한 처리를 요하는 실용문에서는 혼동의 우려만 없다면 되도록 간단하고 쉽게 표기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의 용어는 그 낱말의 區分(identifying)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독자는 그 낱말의 의미를 마음속에 吟味(feeling)하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를 보다 잘 받아들이고, 「鑑賞」을 하는 데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한때 「雅歌」를 둘러싼 페미니즘 논쟁에 부쳐, 현재 우리의 비평계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작품에 담으라고 강요」할 뿐이고 「미학적 아름다움은 외면」한다는 소설가 하일지씨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그런데 작가들 스스로가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安住하고 있는 限에는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어차피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한자어를 쓰지 말라는, 표현의 제약 풍토 아래서는 작가의 나타내고자하는 미학적 아름다움 역시 제약받을 수밖에 없고 소설의 문장은 「이야기 전달」의 기능에 그칠 것이며, 설사 사상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어떤 下向的인 것」밖에는 나타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大家라 칭하는데 주저 않는 이 시대의 국민작가 李文烈. 그러나 우리는 한글전용이라는 화분 안에서 앙증스럽게 盆栽(분재)된 소나무를 보며 그 樹勢(수세)를 칭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들판에 우뚝선 落落長松의 雄姿를 바라볼 기회는 주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읽는 李文烈은 한낱 「우리들의 일그러진 大家」일 뿐이다.
 
 
  한글전용 성경의 문제:구속은 拘束인가?
 
 
  얼핏 보편적인 주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적이 기독교 성경이다. 그러면 성경의 한글전용은 어떤 혼동을 주는가 알아보기로 한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創世記 1:2)
 
  필자는 某處에서 어떤 사람이 그 구절을 읽고 『하나님의 신발짝이…』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는 제외하고, 우리가 「신」이 「神」을 뜻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우리는 神의 뜻을 통상 「God」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神」 하면 「하나님에게 또 무슨 神이 있나?」 하며 의아해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마음을 뜻할 때 쓰는 「精神」에서 精은 妖精, 精靈 등에서와 같이 작은 마음을 뜻하는 것이고 神은 어떤 統一性이 있는 「큰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神」이라는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적절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神」이라는 漢字의 뜻을 평소에 정확히 새기고 있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영(靈)은…」으로 번역한 성경이 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번역자가 「국어운동가」가 아닌 성직자라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무책임한 처사라고 보겠다. 한글로만 쓸 때 불편하다고 해서 굳이 동물에도 쓰이는 보편적인 의미의 「靈」으로 바꿔 써야만 했는가. 성경구절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열심히 가르쳐 그들의 정신을 향상시켜 줄 생각은 안 하고 그 의미를 임의로 바꾸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福音 1:1)
 
  여기서 「세계」가 무슨 뜻인가 물어보면 열이면 아홉은 「世界」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족보의 나열을 보면 일부 눈치 있고 논리적인 사람은 「世系」라는 의미임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은 다소 無理가 있다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世界」라고 간주하고 넘어간다.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요한啓示錄 14:14)
 
  「이한」이 어떤 뜻인지 여기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利한」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현대의 우리는 쉽게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지금은 쓰이지 않는 古語인 양 오해를 당하게 되는데,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인 「예리하다」의 漢字를 안다면 이 말의 뜻도 알 수 있다. 「예리하다」는 결국 비슷한 의미의 「銳」와 「利」가 합쳐진 말이다. 利子, 利益 등에서 보듯이 본래의 것에서 삐져나온 날카로운 것을 말하니 「利한 낫」 하면 날카로운 낫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리하다」라고 한글로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무생물인 낫을 말할 때 굳이 「銳」를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날카로운」과도 조금 다른 어감이 있다.
 
  이외에도 사회에서 많이 쓰이는 「구속(拘束)」과 교회에서 많이 쓰이는 「구속(救贖)」을 혼동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나님이 나를 그릇된 길로 빠져나가지못하도록 拘束하셨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물론 우리의 전통 관습에도, 呪文은 꼭 그 의미를 알아야만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나무아미타불을 수만 번 외우면서도 꼭 그 뜻을 알고 해야만 道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노력하고 지혜를 키우는 것이 또한 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돈의 단위)를 받은 자가 그것을 두 배로 남겨 갖다 바치니 칭찬을 받고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그것에 불만을 품어 땅에 묻으니 징벌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가 태어나서부터 능력을 많이 받았건 적게 받았건 간에, 힘써 노력하여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역할을 발휘하여 자기 생의 의미를 찾으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왕에 달란트를 적게 받았다면 몰라도, 충분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노력을 안하고 자기의 재능 즉 달란트를 묻어버린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정신력 후퇴이고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그러니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거나, 두어 달란트만 갚는 자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는 자보다 더한 「징벌」을 받을 것이다.
 
  漢字의 효율적인 학습에 國漢文 성경은 좋은 교재이다. 거의 모든 漢字語가 漢字로 적혀 있고 읽다가 막히면 곧바로 한글본을 대조하여 알 수가 있으니 「가르침」과 漢字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하려 해도 漢字를 익히지 못할 만큼, 본래 능력을 적게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다 해도, 국한문 성경은 성경을 보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약간의 노력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100명 중의 한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부여받은 잠재능력을 헛되이 死藏시키고 있는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도록 방치한 지도자들 또한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노력을 안 하고 살도록 유혹하며,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지혜를 향상시키기에 필요한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사고력을 저하시키려는 일이고 그것은 곧 인간 영혼의 퇴보이다. 또한 영혼의 퇴보는 영혼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핵심은 비껴가는 人文學 퇴조 진단
 
 
  지난 4월6일 서울대 교수실에서는 한글전용에 의한 우리 학문의 퇴보를 걱정하는 자연과학 분야와 인문학 분야의 두 前·現職 교수의 대화가 있었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언어문제에 대한 두 교수의 지적을 傾聽할 수 있었다.
 
  安秀桔 서울대 명예교수(전자공학)는 『언어의 가장 큰 목적은 정보의 分解能(resolution)으로서 우리의 경우 많은 語彙가 있었던 것도 오히려 사라지고, 선진국의 어휘에서는 한 낱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도 문장에 의해서 풀어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그 나라 어휘의 감소는 곧 그 나라 문화의 後進化를 의미한다』고 했다.
 
  宋基中 서울대 교수(국어학)는 『어문의 체계는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을 따라 세워야 하는 것인데 우리의 경우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모두에게 정책적으로 강요하기를 즐겨하는 데서 불합리가 생겨난다』 고 말하고 그로 인한 우리 어문 정책의 혼란은 물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벌써 몇 번째 바꾸자는 말이 나오는 것도 소수에 의한 언어권력욕 표출의 예』라고 하였다. 또한 『몽골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문자개혁이 단행된 후 오십여 년이 흘렀는데, 민주화 이후 그들의 세로쓰기형 전통문자를 복원하려 하지만 이제까지의 교육의 영향이 남아서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宋교수는 서울대 교양과정에서 필수 漢字語를 지정하여 『이것만은 반드시 履修하도록 한다』고 했다. 교육자료를 보니 그것은 대학의 과정에서 배워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 즉 대학생이 배워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대학생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일 뿐이었다. 宋교수는 『제대로라면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이라며 이러한 부담을 대학에서 져야 하는 현실과 학생들의 漢字無識을 극복시키기 위해 대학에서 들이고 있는 노력의 고충을 설명했다.
 
  필자는 결국 面前에서 單刀直入的으로 아픈 질문을 해야 했다.
 
  『入試에 漢字를 조금만 출제하면 이런 엄청난 수고를 안 해도 되지 않는가』였다.
 
  결국 漢字를 출제하려 하면 학내외의 많은 반대에 부닥친다는 답을 들었다(만약 어떤 교수가 漢字를 입시에 출제하려 한다면, 「반대」보다 더한, 아마도 상상을 초월하는 직간접의 불이익이 가해질 것이라고 보여진다).
 
  漢字문제는 수십 년간 많은 논의가 있었고 이제는 그 합리성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하는 것이 食傷할 정도로 충분히 다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들 주변에서 맴돌며 「걱정」만 할 뿐이지 정작 핵심적인 것에 맞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난해 3월 말경 국내 인문학의 퇴조현상에 대하여 서울대 인문대 교수들은 합동으로 「우리 탓이오」 하는 「비판서」를 내놓았다고 한다. 「시대의 변화를 적절히 따르지 못했다」는 등 여러 이유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학자들이 「선비정신」을 강조한 나머지 폐쇄적 자기 울타리에 갇혀 인문학을 현실과 직결된 살아 있는 학문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하는데 선비정신이라도 제대로 강조하고 지켰는지는 의문이다. 군부 독재의 유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된 시대의 문화환경에 대응하지 못하였다고 스스로를 비판했는데, 군부 독재 시절 밀어붙여졌던 한글전용의 잔재는 아직도 금과옥조처럼 지켜지고 있으며,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지만 「젊은 세대들이 갈수록 漢字를 모르고 안 써가는」 시대문화의 변화는 민감하게 따라간 것으로 思料된다.
 
  어느 신문에 인용된 것을 보아도, 더 「진보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한탄할 뿐, 정작 인문학의 퇴조원인의 핵심인, 漢字를 쓰지 않는 학문풍조에 대해서는 모두들 聖域을 다루듯이 언급을 꺼리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한글전용의 풍조 아래서, 규격적인 논리와 공식의 전개로서 표현될 수 있는 자연과학은 영어에 의한 학문 전수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서술문이 위주가 되는 인문학은 문장의 퇴조가 곧 학문의 퇴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漢字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이른바 보수언론도, 정작 문장의 모범이며 精髓인 순수문학으로서는 한글전용의 작품만을 인정하고 있다. 한글전용에 앞장섰던 과거를 「후회하며」 漢字혼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人士가 경영하는 文藝誌일지라도, 정작 게재하는 문학작품은 한글전용의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지도층의 대다수가 漢字혼용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우리 문화의 퇴보를 걱정한다 하더라도 정작 핵심적인 事案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避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제까지의 「漢字운동」은 「현상유지」에 그칠 뿐, 어떤 개혁적인 힘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漢字使用 논의는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적잖이 食傷한 주제다. 지금은 컴퓨터 通信網上에서 어문 정책에 대한 논쟁이 붙다가도, 결국은 「漢字를 조금은 가르치며 주된 표기는 한글로 하고 꼭 필요한 漢字는 괄호 안에 넣도록 하는」 현행의 우리 어문정책 이대로가 좋으니 그냥 이대로 문자생활을 하며 살아가자는 것으로 歸着되곤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漢字문제에 대한 조바심에 탄 우려를 떨쳐버리고, 아예 관점을 달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의 어문 정책이 불합리하여 많은 비능률을 초래하고 나라가 발전 못하고 있다는 말에는 반론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해방 후 이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 중진국에 이르렀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사실이 우리의 語文生活도 세계 전체로 보면 그렇게 불합리한 편은 아닐 것이다. 우리보다 형편이 나을 것이 없는 나라에서 얼마든지 우리보다 더 불합리한 어문생활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우리는 주변 선진국의 예를 보아 그들보다 못한 우리의 어문생활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진국에로의 진입을 포기한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지금보다 더 내려갈 수는 있어도,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앞서나가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우리의 실정이 우리의 본래 한계이며 또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본분임을 받아들이고, 보다 平穩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문 정책, 이제는 솔직해져야
 
 
  우리가 그냥 이대로 살기를 바라고 또 만족한다면, 우리는 굳이 어렵고 힘든 어문 정책의 개혁을 추구할 이유는 없고 그냥 이대로 머물러도 된다. 다만 이 경우 「정보화에 앞서가서 선진국이 되자」는 허황된 구호는 좀 그만 들었으면 한다. 使用文字의 정보표현력이 우리보다 우수한 다른 나라들이라고 해서 정보화에 멀거니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보화는 예정대로 열심히 추구하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제는 모두가 어문 정책에 대해 솔직해져야 하겠다. 사회 구성원 각자의 最多 努力에 의한 경쟁적인 향상추구의 사회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우리 모두 삶의 긴장을 풀고 평등히 더불어 사는 사회로 나아가느냐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떳떳이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어문 정책은 미래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면서도, 현재 우리사회가 가치를 두고 추구하는 이념의 반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