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北회담 전문가 李東馥의 秘錄 (2)

南北對話의 全部를 말한다

  • : 이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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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床異夢의 大長征

1970년 가을부터 南의 對北 정보 레이더에 北의 미묘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도쿄를 무대로 한 北측 공작원이 한국일보 社主이며 경제기획원 장관이던 張基榮씨의 訪北을 추진했다. 張씨는 北의 이같은 움직임을 정보부에 알렸고 정보부는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北은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진적인 통일론을 피력한 金大中씨가 善戰하자 그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을 대상으로 「통일전선」 전술을 전개하려 했던 것이다
29년간의 南北對話
 
  이야기를 다시 앞으로 돌려본다. 北과南 사이에 처음 대화가 시작된 것은 1971년이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南과 北 사이에는 1971년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1971~)이 시작된 이래 그동안 29년의 세월에 걸쳐서 여러 가지 형태의 「對話(대화)」가 간헐적으로 명멸해 왔다. 적십자회담과 함께 「남북 조절위원회」(1972~1973) 「남북 변칙대좌」(1979) 「남북 총리간 대화를 위한 실무대표 접촉」(1980) 「남북 경제회담」(1984~1985) 각종 「남북 스포츠회담」(1979;1984;1985~1986;1989~1990;1991) 「남북 국회회담 준비접촉」(1985~1990) 「남북 고위급회담」 (1990~1992)이 그것들이다. 그밖에 남북한 외에 미국과 중국이 참가한 「4者회담」(1997~)이 있다. 이들 「대화」를 통하여 南과 北은 몇 건의 중요한 「합의문건」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예컨대, 1972년의 7·4 「남북 공동성명」과 「남북 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 그리고 1992년의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약칭 「비핵화 선언」)이 그것들이다.
 
  특히, 1992년에 생산된 이 2건의 역사적 합의문건에 의거하여 남북간에는 합의사항들의 실천을 위한 「이행기구」들이 마련되기도 했다.
 
  南과 北은 「남북 기본합의서」의 실천과 이행을 위하여 「화해」 「군사」 「교류협력」 분야로 세분된 3건의 「부속합의서」들을 만들어 냈고 이에 의거하여 「정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 등 4개 「공동위원회」가 구성·발족되었다.
 
  이에 더하여, 南과 北은 「비핵화 선언」의 실천·이행 주관기구로 「핵통제 공동위원회」도 가동시켰다.
 
  보다 낮은 차원에서는 보다 많은 「합의」가 생산되어 그 가운데 일부는 실천·이행되기도 했다. 예컨대, 1985년에 한 차례 실시되었던 南北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방문 교환, 세계탁구경기와 청소년축구경기 南北 단일팀 구성·출전 등이 그것들이었고 1984년에는 이례적으로 북한이 水害 구호물자를 남한에 제공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와서는 對北 식량과 비료 지원을 위한 南北회담이 심심찮게 열려 왔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들이 갖는 공통점은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대화」들은 모두 일정 기간 계속되다가 중단된 채 재개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런 합의사항도 생산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중단되었고 「조절위원회」나 「고위급회담」의 경우처럼 일부 생산된 합의사항들은 생산은 되었지만 이행되지 못하고 사실상 死文化(사문화)되는 「합의 따로, 이행 따로」의 운명에 직면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남북 고위급회담」이 産母(산모)가 되어 「남북 기본합의서」에 의거하여 발족시킨 「정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 등 4개 「공동위원회」는 「개업」도 못한 채 「휴업」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핵화 선언」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핵통제 공동위원회」는 13회의 알맹이 없는 「회의」 끝에 장기 冬眠(동면)중에 있다.
 
 
  南北관계의 본질은 제로섬 게임
 
 
  그렇다면, 남북간에 이같이 「대화」가 부진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짚어 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더구나 남북대화는 지금 새로운 轉機(전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와 있다. 지난 6월13일부터 15일까지 2박3일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방문하여 北에 존재하는 정치실체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최고실력자인 金正日(김정일) 「국방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와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북 頂上회담」을 개최하고 돌아왔다. 이 「頂上회담」에서 남북 쌍방은 「남북 공동선언서」라는 이름의 또하나의 「선언적 합의문」을 생산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같이 새로이 불이 지펴진 「남북대화」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쏠려 있다.
 
  이번의 「공동선언서」는 과연 차질 없이 실천·이행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북간에는 앞으로 어떠한 형태와 내용의 「남북대화」가 전개될 것인가?
 
  이같은 의문에 우리의 궁금증이 쏠리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의 차원에서 그동안의 「남북대화」의 경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서 이를 「反面敎師(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바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 같은 필요를 충족시켜 보려 하는 데 있다.
 
  그동안의 「남북대화」가 부진한 이유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관계가 갖는 특수한 성격에서 발견해야 한다.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누가 어떠한 美辭麗句(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달리 분식을 시도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南의 「하나의 韓國觀(한국관)」과 北의 「하나의 朝鮮觀(조선관)」이 상호 충돌하는 데서 형성되는 하나의 「제로 섬 게임」의 관계이다.
 
  南의 「하나의 한국관」은 「收復統一論(수복통일론)」의 母胎(모태)이다. 1948년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UN의 결의에 따른 UN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하여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탄생했다. 이때 북한이 UN감시하의 총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분단이 초래되었으니만큼 『통일은 北을 「수복」하여 대한민국에 편입시킴으로써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 5·30 총선거를 통하여 제헌국회를 구성할 때 장차 北에서 선출될 국회의원 몫으로 100석을 할애한 것은 바로 그같은 「수복통일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반면, 北의 「하나의 조선관」은 「解放統一論(해방통일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北의 「하나의 조선관」에 의한다면,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北은 「외세의 식민통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나 南은 「外勢(외세)」가 「日帝(일제)」에서 「美帝(미제)」로 치환되었을 뿐 여전히 외세의 식민통치하에 있다.
 
  따라서 통일은 우선 남한을 대상으로 「해방」의 과제를 제기한다. 南을 「외세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렇게 새로이 「해방」되는 南과 이미 「해방」되어 있는 北을 「합작」시키는 것이 통일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남한을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공산화」 내지 「용공화」시킨 뒤 이미 「공산화」되어 있는 북한과의 「聯共合作(연공합작)」을 통해 「공산화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 된다.
 
  「남북대화」는 이렇게 「해방통일」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北과 「수복통일」을 꿈꾸는 南 사이 「同床異夢(동상이몽)」의 무대였다.
 
  北이 견지하고 있는 「하나의 조선관」은 하나의 「대등한 주권국가」로서 대한민국이 南에 존재하는 것을 수용할 여지가 없다. 「하나의 조선관」은 이론적으로 소위 「反帝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北의 「해방통일론」은 北 특유의 왜곡된 「分斷觀(분단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한반도의 「통일」은 한반도 全域에 걸쳐 「反帝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北의 「분단관」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北에서는 「反帝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된 반면 南에서는 「일제」를 대체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방해 때문에 이 혁명이 미완으로 남겨져 있다.
 
 
  下層 통일전선 돕기 위한 上層 통일전선 전략
 
 
  따라서 北의 입장에서 「평화통일」은 2단계의 解法(해법)을 제시한다. 우선 1단계는 南에서 이 혁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北이 말하는 「南朝鮮革命(남조선혁명)」이다. 「反帝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의 「공산화 혁명」을 말한다. 2단계로는 南에서 그같은 「혁명」이 수행되면, 새로이 「공산화」 내지 「용공화」된 南과 이미 「공산화」되어 있는 北이 「합작」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이같은 「해방통일론」에 의하면, 南에서 먼저 「남조선혁명」이 수행되는 것이 「평화통일」의 필수적 절대 조건이다. 「남조선혁명」이 先行되지 않을 때는 「평화통일」은 불가능해진다. 이때는 「非평화적 방도」에 의한 통일이 불가피하다. 곧 「무력 적화통일」인 것이다. 이같은 혁명이론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오직 「打倒(타도)」의 대상일 뿐이지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특히 北의 경우, 남한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남조선혁명」 수행의 기본전술은 소위 「統一戰線(통일전선)」 전술이다. 北이 채택한 「통일전선」 전술은 「上層(상층)」과 「下層(하층)」의 2개 층으로 구성된 2단계 전술이다. 이 가운데 「基層(기층) 통일전선」은 南의 「기층 민중」, 즉 노동자·농민·병사·근로인텔리를 제휴 대상으로 하는 「하층 통일전선」이다. 이를 통하여 「타도」의 대상인 南의 지배세력, 즉 대한민국 정부와 그 동조세력을 고립시켜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南의 「반공체제」로 인하여 이같은 「기층 통일전선」의 형성은 용이하지 않다. 南의 「반공체제」가 北으로 하여금 南의 「기층 민중」에 접근하는 길을 차단·봉쇄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의 전술적 융통성의 차원에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상층 통일전선」 전술이다.
 
  즉, 「하층 통일전선」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로 南의 집권·지배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상층 통일전선」을 수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상층 통일전선」의 임무는 제한적이다. 즉, 그 임무는 南에서 「하층 통일전선」 형성을 가로막는 법률적·제도적·사회적·문화적 조건을 제거하고 「하층 통일전선」을 추진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국한되는 것이다.
 
  北이 수용하는 「남북대화」는 바로 「상층 통일전선」 전술의 일환이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대화」를 통하여 北의 노림수는 일관성을 유지해 왔다. 즉, 이들 「대화」의 임무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것처럼 南의 「反共체제」를 와해시키고 이를 최소한 「용공체제」로 대체시키며 駐韓미군의 철수를 통하여 한·미 안보유대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데로 집중되고 또 거기에 국한되어 온 것이다.
 
  「적십자회담」 과정에서 제기된 北의 「법률적 조건 및 사회적 환경 조성」 주장과 「적십자 了解(요해) 해설위원 교환 파견」 주장, 「조절위원회」에서 제기된 「조절위원회 확대·개편」 주장 및 「군사문제 우선 해결」 주장, 「고위급회담」에서의 『남북한이 단일회원국으로 UN에 가입하자』는 주장과 「한·미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중지」 주장, 그리고 남북대화가 「당국간 회담」의 형태를 취하는 것을 극력 거부하고 오직 「정치협상회의」의 형태로 가져가려는 북측의 집요한 시도는 바로 그같은 北의 노림수를 웅변해 주는 것이었다.
 
  이같은 북측 전략의 일관성과는 달리, 南의 「수복통일론」은 특히 1970년대 이후 국제정세의 흐름에 호응·편승하여 일정한 변질의 과정을 보여주어 왔다. 1973년6월23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 이전의 南의 對北정책은 본래의 「수복통일론」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즉, 「주권을 갖는 정치실체」로서 북한의 존재를 철두철미 부정, 북한과의 공식 관계를 갖는 제3국과는 외교관계를 스스로 단절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對北 통일정책은 1970년 8월15일 남북간 「선의의 체제 경쟁」을 제의한 朴대통령의 「8·15 선언」을 고비로 일대 전환이 시작되었다. 이같은 변화의 와중에서 남북간에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즉, 1971년에 시작된 「적십자회담」과 1972년에 시작된 「조절위원회」가 그것이다.
 
  이때 남북간에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1972년 7월4일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 공동성명」이 동시에 발표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의 對北 통일정책의 「현실화」는 급류를 타고 진행되었다. 1973년 6월23일 朴대통령의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은 사실상 「할슈타인 원칙」의 공식적 포기와 같은 것이었다.
 
  南의 통일정책은 이제 하나의 「과도적 단계」로 「하나의 한국」과 「하나의 조선」간에 「공존관계」를 제도화하는 「2개의 주권국가」 간의 「분단관리 단계」를 상정하는 방향으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南이 추진하기 시작한 「남북한 동시 개별 UN가입 정책」은 바로 그같은 정책수정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南에서는 1979년 10월26일 발생한 朴正熙 대통령의 시해 사건을 효시로 해서 같은 해 12월12일의 이른바 「12·12 사태」 그리고 1980년 5월18일을 기점으로 하는 「光州 민주화운동」 등으로 엄청난 정치적 갈등을 겪어야 했지만 경제개발 정책의 지속적 성공을 등에 업은 對北 통일정책의 「현실화」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北은 당연히 이에 대한 제동을 시도했고 이에 따라 남북관계 또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1983년10월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버마) 방문을 노린 비극적인 양곤(前 지명, 랑군) 폭파사건은 이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났다.
 
  1980년대 이후 南의 수출주도형 開放經濟(개방경제)와 北의 자급자족형 閉鎖經濟(폐쇄경제) 사이에는 발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남북관계의 세력균형에는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남북관계의 결정적인 분수령은 1988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하계 올림픽 경기였다. 北은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 과정에서 1987년 11월에는 미얀마 근해 인도양 상공에서 대한항공 여객기가 北의 2인조 테러범들에 의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115명 사망).
 
  그러나 北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1988년의 하계 서울 올림픽은, 비록 북한은 끝내 참가하지 않았지만, 각기 미국과 소련의 불참으로 반쪼가리 행사가 되어야 했던 1980년의 모스크바 올림픽(제22회)과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제23회) 경기의 잇달았던 跛行(파행)에 종지부를 찍고 성공적인 인류화합의 웅장한 마당으로 성공하는 기록을 남겼다.
 
  北은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초래된 劣勢(열세)를 만회하겠다는 일념으로 1989년 7월 평양에서 40억 달러라는 막대한 경비를 들여 소위 「세계청소년 축제」를 개최한다. 그러나 그 결과 北은 열세를 만회하기는커녕 이때의 과소비가 1990년대 북한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로 각인되었다.
 
 
  北의 울며 겨자 먹기式 합의-남북 기본합의서
 
 
  이같이 역전되는 남북간의 역학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南의 對北정책 수정 노력에는 날이 갈수록 탄력성이 배가된다. 이번에 등장한 것은 「北方政策(북방정책)」이었다. 1987년 「6·29 민주화선언」을 통해 1988년 직선제 대통령으로 취임한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은 「모스크바와 北京을 거쳐 평양으로」를 슬로건으로 하여 공산권국가에 대한 맹렬한 수교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南은 1990년 9월에는 舊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기 국교를 정상화했고 그 사이 1991년 9월에는 남북한 개별 동시 UN가입을 실현시켰다. 이제 북한을 제외하고 南의 유일한 미수교 국가로는 쿠바만이 남게 되었다.
 
  그동안 南이 확보한 정신적·물질적 여유는 南으로 하여금 분단사상 처음으로 포괄적인 「통일방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82년 全斗煥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과 1989년 盧泰愚 대통령이 제시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그것이다. 야당에서는 지금의 여당인 「새천년 민주당」의 전신으로 제1야당인 「평민당」의 金大中 총재가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1990년 北은 南이 추진하는 남북한 개별 동시 UN가입을 저지·봉쇄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남북 고위급회담」이라는 이름의 「총리회담」 개최에 호응했다. 그러나 北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舊소련이 와해되고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가운데 北의 유일한 배후세력으로 남게 된 중국이 北의 남북한 개별 동시 UN가입 저지 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국제적 탈냉전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립이 심화될 대로 심화되어 있는 北의 입장은 이미 守勢(수세)로 변해 있었고 그 결과 울며 겨자 먹기로 2건의 역사적 합의문서를 南과 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이다.
 
  그러나, 내외정세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타결하기는 했지만 北에게는 이들 합의문서의 내용들을 실천·이행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왜냐하면, 특히 「남북 기본합의서」의 경우, 이의 내용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北에게 「하나의 조선관」과 이에 근거한 「해방통일론」의 포기를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북 기본합의서」는 그 이전의 다른 남북간의 합의사항의 운명이 그랬던 것처럼 「합의 따로, 이행 따로」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北은 이의 실천·이행을 보이콧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北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둘러싼 국제적 의혹이 北에게 또 하나의 「기회」를 제공했다. 「通美封南(통미봉남)」 전술에 의거하여 南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쌍무적으로 거래를 트는 계기를 포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이라고 하는 「예측 불가능한 무법자 국가(Rogue State)」가 탈냉전 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에 핵공격 능력을 보유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데 대한 심리적 공황은 미국으로 하여금 당연히 UN과 북한 간의 문제인 北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미국과 북한 간의 쌍무적 문제로 끌어안는 실책을 범하게 만들었다. 北은 「국제핵확산 금지조약」(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탈퇴 위협을 「무기화」하여 미국을 「벼랑끝 외교」(Brinksmanship)로 밀어붙임으로써 미국으로부터 1994년 10월21일의 「제네바 합의」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제네바 합의」의 골자는 北이 가지고 있는 일체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동결」이라는 이름의 수면제를 먹여 일단 잠을 재우는 대신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반대급부」를 주는 것이다.
 
 
  北, 미국과 상대, 한국 배제하려고 안간힘
 
 
  이 「반대급부」 가운데는 北에게 40억 달러 이상의 거액이 소요되는 100mw 용량의 「경수형 원자로」 2기를 건설해 주는 것과 매년 5000만 달러 상당의 「산업용 중유」를 제공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에 담겨져 있는 보다 중요한 알맹이는 이에 의거하여 미국과 북한이 한반도 안보문제에 관하여 한국을 배제하고 쌍무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北은 이를 이용하여 전통적인 한·미 안보유대에 쐐기를 박으려 끈덕지게 시도하고 있다. 한·미 양국은 北의 이같은 기도를 견제하기 위하여 1997년부터 남북한 외에 미국과 중국이 참가하는 「4者회담」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北은 「4者회담」에 소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역으로 여기에 자물쇠를 걸어 이를 견제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의 「의제」 채택을 조건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일방으로, 北은 미·북 쌍무회담을, 한국을 배제한 가운데 한반도 안보문제를 실질적으로 논의하는 무대로 변질시키려는 노력을 끈덕지게 전개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北은 1953년의 한국전 휴전협정을 실질적으로 死文化시키는 조치를 일방적으로 취해 왔다. 공산군측 중립국감독위원국인 폴란드와 체코를 철수시켜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북측 대표를 군사정전위원회로부터 철수시켜 이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한편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라는 일방적 기구를 판문점에 설치하고 군사정전위원회의 테두리 밖에서 북측의 이 「대표부」와 UN군측 대표 간에 「변칙대좌」를 강요하고 있다.
 
  北은 미국과의 「쌍무회담」에서 미·북간에 南을 배제한 채 쌍무적으로 「조선반도 평화보장 體系(체계)」를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北의 주장은 한반도의 「평화」와 「전쟁」의 당사자를 북한과 미국으로 규정하고 양자간에 「적대관계」와 「교전상태」를 해소시키는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다.
 
  北은 이를 위하여 미·북간에 쌍무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이것으로 現군사정전협정을 대체하고 이를 통하여 駐韓미군의 철수, 「작전계획 5027」을 포함한한·미 연합작전 체제의 와해, 일체의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지,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폐기 등을 관철하려 하고 있다. 이것들이 北이 추구하는 「적대관계」 및 「교전상태」 해소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바탕 위에서 미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北의 通美封南에 농락당한 金泳三
 
 
  그러나, 한·미 안보유대가 확고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북한판 「평화보장 체계」는 過慾(과욕)이 아닐 수 없다. 北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 결과 1994년부터 北은 이 문제에 관하여 전술적 융통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평화보장 체계」 이전의 「과도적 단계」로 「평화보장 措置(조치)」라는 것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보장 조치」란 당분간 미·북 평화협정 체결과 이에 의한 군사정전협정 폐기 문제는 옆으로 제쳐두는 가운데 우선 판문점에 북한군과 미군의 「군사대표부」를 설치하고 군사정전위원회가 아니라 두 군사대표부 간의 쌍무적 군사회담을 통하여 「군사정전협정의 필요한 부분에 한하여 계속 이를 이행하면서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예방하고 조선반도에서의 전쟁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北이 1994년 4월 북측 군사정전위원회 대표들을 철수시키고 5월 소위 「조선인민군 대표부」를 판문점에 설치한 것은 바로 이같은 「평화보장 조치」의 테두리 안에서 취한 일방적 조치들이었다.
 
  그동안 南의 對北정책은 盧泰愚 정권의 북방정책이 모스크바와 北京에 도달한 상태에서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평양으로 이르는 다리가 놓이지 않은 것이다. 北은 1993년 초 「남북 고위급회담」을 중단시키고 北의 핵무기 개발 의혹에 대한 국제적 의혹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여 본격적인 「通美封南」의 길로 나섰다.
 
  이로 인한 최대의 희생자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5년간에 걸친 金泳三(김영삼) 정권의 對北정책이었다. 北의 「通美封南」 전술에 철저히 농락된 金泳三 정권의 對北정책은 强·溫(강·온)의 두 극단 사이를 오간 끝에 「冷湯(냉탕)·溫湯(온탕)」이라는 해학적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4년 金泳三 대통령에게는 뜻하지 않았던 하나의 기회가 다가왔다. 이해 6월 北의 핵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평양을 방문하여 金日成(김일성) 주석과 만난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남북 頂上회담」의 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남북 쌍방간에는 이해 7월25일부터 27일까지 金泳三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金日成 주석과 「頂上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처럼의 이 「기회」는 7월8일 金日成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그 이후의 남북관계는 「弔問(조문)」 시비까지 겹쳐 硬化一路(경화일로)를 걸어야만 했다.
 
 
  남한의 歷代 통일정책은 모두 수복통일론
 
 
  남북관계는 1997년 12월17일의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의 「球團主(구단주)」인 金鍾泌(김종필)씨와의 제휴를 통해 그동안 그의 雄飛(웅비)를 가로막아 온 부정적 요소였던 「지역성」과 「사상성」 및 「신뢰성」의 세 가지 장애요인 가운데 「지역성」과 「사상성」 문제를 극복한 「새정치국민회의」 金大中 후보가 승리하여 50년 만에 처음으로 與野(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金大中 대통령은 IMF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취임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對北정책에 주력할 여력이 없었다. 당장 경제난국의 극복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인 金大中씨의 파란만장했던 그동안의 歷程(역정)에 비추어 볼 때 金大中 정권은 이미 태생적으로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도록 점지되어 있었다.
 
  야당 정치인 金大中씨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朴正熙 대통령에 대항하여 출마했을 때 「4대국 보장론」을 들고 나와 그동안 朴正熙 정권하에서 하나의 절대적 정치적 「禁忌(금기)」였던 통일논의의 불을 당긴 이래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통일논의를 주도해 왔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그는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뒤에 「3단계 통일방안」으로 호칭)을 주창했고 이어서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對北정책을 역설해 왔다. 金大中씨의 대통령 취임으로 「햇볕정책」은 그가 이끄는 「국민의 정부」의 공식적인 對北정책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북한지역에서 UN감시하의 자유선거 실시」를 통해 대한민국에 편입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南의 당초 「수복통일론」은 1973년 6월23일자 朴正熙 대통령의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해서 좁은 의미에서는 깃발을 내렸다.
 
  그 뒤의 對北정책은 盧泰愚 정권의 「북방외교」, 金泳三 정권의 소위 「냉·온탕」, 그리고 金大中 정권의 「햇볕정책」으로 變身(변신)을 거듭해 왔다. 그런데 對北정책의 이같은 「변신」 속에서 우리는 「수복통일론」의 「변신」을 또한 읽고 있다. 새로운 對北정책은 朴正熙 대통령의 「6·23 선언」이나, 全斗煥 대통령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나, 盧泰愚 대통령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나, 金大中씨의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이나 모두 예외 없이, 통일 이전의 「과도적 분단관리 단계」로 남북간 「2개 주권국가 간의 관계정상화와 평화공존」을 상정하는 것이다. 즉, 「국가연합」(Confederation) 안이다.
 
  그러나 「과도적 분단관리 단계」 이후의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金大中씨의 「공화국 연합제 통일방안」을 포함하여 모든 역대 정권의 對北정책들이, 내용면에서는 사실상의 「수복통일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즉, 더 이상 「북한지역에서 UN감시하의 자유총선거 실시」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북측이 남측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收斂(수렴)」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햇볕정책도 결국 흡수통일 지향
 
 
  현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햇볕정책은 「북한체제는 이미 실패했고 따라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視角(시각)에 입각하여 북한에게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방」과 「체제변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줌으로써 북한을 변화시켜 보자는 것』(1999년 9월17일 민족통일중앙협의회에서 林東源 당시 통일부 장관의 초청연설 내용중에서 인용)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남북간에 金大中 대통령의 평양방문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자 현 정부는 이를 가리켜 『마침내 북한이 우리의 「햇볕정책」의 진의를 이해한 결과』(4월11일 국무회의에서의 金대통령의 발언)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극히 최근까지도 우리의 「햇볕정책」에 대한 北의 시각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고 매우 비판적인 것이었다.
 
  즉, 南의 「햇볕정책」은 『우리 공화국을 얼려 넘기려는 기만정책』(1999년 2월4일 金正日이 노동당 책임일꾼들과 가진 담화 「인민군대를 강화하며 군사를 중시하는 사회적 기풍을 세울 데 대하여」에서)이며 『화해·협력의 미명 아래 우리의 사회주의 제도를 이질화시켜 저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흡수·통일시키자는 악랄한 反北 대결모략 책동』(1999년 9월27일 뉴욕에서의 백남순 북측 외무상의 「미국의 소리」와의 회견발언에서)이고 『가짜 대화와 독 묻힌 교류를 통해 공화국 북반부를 사상적으로 와해시키고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북침통일 야망을 이루어보려는 총포성 없는 북침전략』(2000년 3월15일자 노동신문 논평)이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北은 「햇볕정책」을 과거 미국이 舊소련의 붕괴를 목적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평화적 이행전략」과 같은 것, 즉 北의 「체제붕괴」를 노린 「공작성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거듭 분명히 해왔다.
 
  과연 金대통령의 평양방문이 南의 「햇볕정책」에 대한 北의 「긍정적 평가」의 결과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북관계 전개과정을 통해 검증될 문제이다. 문제는 그동안 일관된 기조가 유지되어 온 北의 「해방통일」 노선에 변화가 생겼는가의 여부이다. 이에 대한 실증적 판단의 근거가 아직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그동안 남북간에 명멸했던 여러 형태의 「남북대화」 전개 과정을 各論의 차원에서 훑어 볼 필요가 있다.
 
 
  3장 : 北의 전략-대화를 통해 反共태세 해체 企圖
 
  對話의 발단
 
 
  표면상으로, 「남북대화」의 발단은 1971년 8월12일자 대한적십자사(韓赤) 崔斗善(최두선) 총재의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 제의였다. 북측은 이같은 韓赤의 제의에 대해 이틀 뒤 완전 수락과는 거리가 있는 엇비슷한 반응으로 대응해 왔다. 韓赤이 「이산가족」의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하여 北赤은 이산 「가족」뿐 아니라 「이산」(?) 「친척」과 「친우」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 차이는 적십자회담에 임하는 남북 쌍방의 입장이 「非대칭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南은 「순수한 인도주의」를 염두에 둔 반면 北은 「적십자회담의 정치회담화」를 노리고 있음을 처음부터 보여준 것이다.
 
  남북 적십자회담은 이같은 쌍방 입장간의 「非대칭성」을 바닥에 깐 채 일단 예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같이 하여 남북 적십자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南과 北은 각기 서로 다른 계산과 노림수를 가지고 있었다. 「同床異夢」의 大長征(대장정)이 막을 올린 것이다.
 
  당연히, 南이 北에 대해 먼저 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고려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저변에는 주변 국제정세의 전개에 따른 안보에 대한 심각한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이 때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동·서 냉전은 하나의 고비를 넘고 있었다. 그 무대는 월남전이 격화되고 있는 인도차이나였었고 미국의 세계전략 가운데 對아시아 전략이 일대 시련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국력을 고갈시켜 온 월남전의 양상이 패색이 짙어지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對월남 정책은 戰場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는 외교협상을 통해 크게 체면을 잃지 않는 선에서 월남전을 종결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1969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괌 독트린」이다. 世論(세론)은 미국이 비단 월남전에서 손을 뗄 뿐 아니라 아시아로부터 철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1971년에 와서는 키신저 당시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이 두 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이 계획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일련의 상황 전개는 당연히 관계 당사국들에게 엇갈린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南의 경우 이같은 사태 전개로 인한 충격은 심각한 것이었다. 특히 1960년대 말은 종국으로 치닫는 월남전의 양상과 보조를 맞추어 北의 對南 군사도발이 격화되고 이로 인하여 한반도 안보상황은 긴장 국면이 심화되고 있었다.
 
  1968년 1월21일에는 「1·21 사태」로 통칭되는, 남파 무장 게릴라들에 의한 대담하기 짝이 없는 청와대 습격 시도가 발생했고 1월23일에는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전자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고, 이듬해엔 잇달아 미국 전자첩보기 EC-121기를 격추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8년 11월에는 동해안 울진·삼척 일대에 대규모의 북측 무장 게릴라가 침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張基榮의 訪北을 추진한 북한의 진의는?
 
 
  이같이 악화되는 안보상황에 대한 南의 반응은 1차적으로 자주국방 태세의 강화로 나타났다. 예비군을 창설하고 「국방과학원」(ADD)을 발족시켰으며 방위산업에 대한 투자가 강화되었다.
 
  뒤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朴正熙 대통령은 아시아로부터의 미군 철수에 대비하기 위하여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들은 그 효과가 매우 부분적이거나 結實(결실)까지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것들이었다.
 
  보다 단기적이고 즉각적인 대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남북관계의 차원에서 무언가 외교적 「카드」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외교적 카드의 용도는 2원적인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남북간 「직접 대화」의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남북간 합의를 통해 긴장완화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간의 「대화 관계」 형성을 통해 혹시라도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포함하여 한반도 안보문제에 관하여 한국의 머리 너머로 비밀 흥정을 시도할 가능성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南의 對北정보 레이더에 미묘한 北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1970년 가을부터 일본 도쿄를 무대로 하는 북측 고위 공작원의 흥미로운 움직임이 알려진 것이다. 北은 이 공작원을 통해 한국의 유력한 일간신문 「한국일보」의 社主(사주)이면서 정부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개발경제」의 산파역을 맡았던 張基榮(장기영)씨의 訪北을 추진했다.
 
  張씨는 이같은 北의 움직임을 중앙정보부에 알렸고 李厚洛(이후락) 부장이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이같은 北의 움직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문제는 北의 이 움직임이 뿌리를 가진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1971년 8월6일 평양으로부터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평양에서는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친왕 환영 군중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환영연설에서 金日成은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 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민주공화당」은 1961년의 5·16 「군사혁명」 이후 朴正熙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혁명주체들이 계속 집권을 위하여 조직한 南의 「여당」이었다. 따라서 南의 「민주공화당」은, 北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타도」의 대상일 뿐 대화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북한의 최고 책임자가 공개 연설에서 「민주공화당」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면서 이 정당을 포함하여 南의 모든 정당, 단체, 개인들을 상대할 용의를 표명한 것이다. 北의 진의는 무엇인가? 확인이 필요했다.
 
  南은 중앙정보부를 주축으로 北의 의도 분석에 열중했다. 그리고 北의 진의를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국민적 차원에서 가장 충격이 없이, 그리고 위험 부담이 없는 방법으로 北의 진의를 파악하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온 결론이 「적십자회담」이었다. 「이산가족」이라는 인도적 문제를 가지고 北을 시험하는 것이 가장 덜 부담스럽겠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이같은 판단에 의거하여 南은 8월14일 최두선 韓赤 총재를 통하여 적십자회담을 제의하게 된다.
 
 
  金日成 연설의 의미
 
 
  그렇다면, 北의 의중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1971년 8월6일 평양에서 열린 시아누크 캄보디아 친왕 환영군중대회에서의 金日成의 환영연설 내용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날 金日成의 연설의 주된 테마는 다음해 2월에 있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을 앞두고 미·중 관계를 중심으로 급변하는 국제관계에 대해 그 나름의 一家見(일가견)을 피력하는 데 있었다. 참고로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이 날 있었던 金日成 연설의 핵심적 대목 한 토막이다.
 
  『요즘에 와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인민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그와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세계적 조류로 되었으며 「미제」의 중국 봉쇄정책은 수치스런 종말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美帝(미제)」가 국내외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빠져 들어간 역사적 환경에서 얼마 전 닉슨은 자기의 중국방문 계획을 발표했다.
 
  이것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에서의 위대한 혁명적 변혁과정을 힘으로 저지시켜 보려고 스무 해 이상이나 무모하게 추구해 온 「미제」의 중국 적대정책이 마침내 완전히 파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미제」가 세계의 강대한 「反帝(반제)」 혁명역량의 압력 앞에 드디어 굴복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결국 닉슨은 지난날 조선전쟁에서 패배한 「미제」 침략자들이 판문점에서 백기를 들고 나왔듯이 北京으로 백기를 들고 찾아오게 된 것이다. 닉슨의 중국방문은 승리자의 행진이 아니라 패배자의 행각이며 美 제국주의의 西山落日(서산낙일)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김일성 연설의 요지는, 요컨대 미국이 월남전에서 실패한 나머지 이제는 중국에 구걸하여 중국의 축복 아래 한반도를 포함하여 아시아로부터 군사적 철수를 단행하려 하고 있다고 보는 정세관을 도도하게 피력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金日成의 정세관은 같은 연설의 다음 토막에서도 읽혀진다.
 
  『만일 남조선 위정자들이 정말로 나라의 평화통일을 바란다면 우선 미군의 장기주둔을 애걸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남조선에서 나가게 하고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그들을 남조선에 끌어들이는 것을 그만두며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남조선의 정당·사회단체 및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그만두고 그들이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북간의 협상에 나설 수 있도록 하며, 조선 문제는 조선 사람 자신의 손에 의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인민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다그치며 남조선 인민들을 지원하여 남조선혁명을 완수하고 조선 사람끼리 조국의 평화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계속 완강히 투쟁해야 한다』
 
 
  金大中의 善戰에 주목한 북한
 
 
  결국, 이 같은 金日成의 어록은 北이 1971년 8월 南의 「적십자회담」 제의에 호응했을 때 그 이유가 「적십자회담」 본연의 문제인 「이산가족」의 인도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한지역에서 소위 「남조선혁명」이라는 이름의 「반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조건을 제거하고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이를 이용하는 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北의 1차적 관심사는 주한미군의 철수였다. 北은 1960년대가 70년代로 바뀌는 시점에서 월남전에서 미국의 몰리는 입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미국 朝野(조야)의 厭戰思潮(염전사조)에 편승하여 종래처럼 「때려서 내쫓는」 방식이 아니라 「달래서 내보내는」 방식으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1971년에 적십자회담의 형태로 시작된 남북대화는 다음해 7·4 「남북 공동성명」을 거쳐 「조절위원회」로 판을 키워 갔거니와 여기에 담겨진 北의 메시지는 『남북간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터이니 미국은 안심하고 한반도에서 군대를 걷어 가라』는 것이었다.
 
  北으로 하여금 남북대화에 호응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의 남쪽 정세에 대한 北 나름의 「情勢觀(정세관)」에 있었다. 南에서는 1971년 제7代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때까지 朴正熙 대통령이 이끄는 南의 「민주공화당」 정권은 「先건설·後통일」의 슬로건 아래 경제개발 일변도의 국정을 운영, 국력분산 방지를 명분으로 사회적으로 일체의 통일논의를 금지하는 정책을 강행해 왔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야당 후보로 朴대통령의 3選에 도전한 金大中씨는 「4대국 보장론」을 앞세워 그동안의 「타부」를 과감히 깨고 통일논의를 핵심 선거 이슈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고 선거에서는 불과 100만 미만의 표차로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北은 여기서 희망의 불빛을 보았다. 통일을 이슈로 삼아 南의 국민들, 특히 제7代 대통령선거에서 金大中 후보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을 대상으로 「통일전선」 전술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었다고 본 것이다.
 
  물론 선거에서 승리하여 再집권에 성공한 朴正熙 대통령이 건재하는 한 「하층 통일전선」 구축을 방해하는 南의 「반공체제」에는 아직 漏水(누수)의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대통령선거 결과는 北에게 南을 상대로 대화 형태의 「상층 통일전선」 전술을 시험해 보도록 유혹하는 유인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같은 北의 의도는 적십자회담과 이에 이은 조절위원회 회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본색을 드러낸다.
 
  특히, 1970년대 초부터 北의 對南정책에는 金日成의 세습 후계자로 지위를 굳히기 시작한 金正日(김정일)의 입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모든 가용 정보들에 의하면, 1964년 김일성 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金正日은 졸업과 더불어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971년 인민군 소좌로 민족보위성 소속 金日成의 호위군관이 되며 1972년에는 당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 문화예술부 부부장이 되고 1973년 9월에는 당중앙위 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가 되면서 당의 「3大혁명 소조」 활동을 총지휘한다.
 
  1974년 2월에는 당중앙위 정치위원으로서 金日成의 후계자로 지명되며 3월부터는 「黨중앙」으로 호칭된다.
 
 
  金正日의 모험 노선
 
 
  1959년 12월 김일성 종합대학교 총장 시절 金正日을 처음 만난 黃長燁(황장엽) 前 노동당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金正日은 아직 학생 신분인 이때부터 이미 아버지인 金日成의 후광과 金日成의 만주 빨치산 시절 동지들의 비호 아래 당간부들을 임의로 조종하고 있었다. 黃長燁씨의 기억에 의하면, 金正日은 1972년부터 사실상 北의 국정을 총괄하여 지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970년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北의 內政外治(내정외치)는 전례 없이 과격해지기 시작한다. 휴전선 비무장지대 지하에서는 남침용 땅굴들(南의 추정에 의하면 155마일 휴전선 全域에 걸쳐 20개 이상)이 굴착되기 시작하고 對南 무력도발이 빈번해지며 「3대혁명 소조」 활동이 격화되고 평양 시내에 주요한 토목·건설공사가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아직도 미완성 摩天樓(마천루)인 105층짜리 「柳京(유경) 빌딩」 건설도 이 무렵 시작되었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발생한 미루나무 절제를 둘러싼 도끼만행 사건으로 한반도의 긴장은 一觸卽發(일촉즉발)의 위기를 기록한다.
 
  1976년 1월1일 신년사 낭독을 제외하고는 1975년 12월부터 일체 對外활동을 보여주지 않던 金日成이 1976년 8월21일 스틸웰 주한 UN군 사령관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파국을 모면했다.
 
  공교롭게도 北의 노동당 이론기관지 월간 「근로자」에서는, 이 해 9월호부터 1980년 10월 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金正日이 당 중앙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국 비서, 당 군사위원으로 추대되어 金日成과 吳振宇(오진우) 인민무력부장에 이어 당 서열 3위를 공개적으로 확보할 때까지 「당중앙」 호칭이 사라진다.
 
  이것은 1976년의 8·18 사건을 계기로 「膽大(담대)」와 「豪放(호방)」으로 미화되던 金正日의 스타일에 일단 제동이 걸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했었다.
 
  남북 적십자회담과 남북 조절위원회로 구성되는 남북대화 1단계는 1973년 8월28일 北이 「남북 조절위원회 평양측 공동위원장」 金英柱(김영주) 명의의 일방적인 「대화중단」 선언으로 그 막을 내린다.
 
  이 「대화중단」 선언은 그보다 앞서 8월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金大中 납치 사건」을 그 구실로 삼았다.
 
  「金大中 납치 사건」은 납치되었던 金大中씨가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생환하는 순간부터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것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영주와 함께 7·4 남북공동성명의 공동 서명자이고 「남북 조절위원회 서울측 공동위원장」으로 남측에서 모든 「남북대화」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던 李厚洛씨였다.
 
  北은 이같은 상황에 편승하여 「돌을 던지는 好機(호기)」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北이 이때 「남북대화」를 중단시킨 참 된 이유는 물론 다른 곳에 있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 이유는 일정기간 「대화」라는 이름의 「상층 통일전선」을 시도해 본 결과 北이 당초 대화에 호응할 때 가지고 있었던 환상이 깨어지고 기대가 빗나갔을 뿐 아니라 北의 체제안보에 부담이 되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첫째로, 월남전 개입의 참담한 실패와 이를 계기로 한 對중국 정책의 180도 방향전환 등 對아시아 정책의 전면적 再조정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는 고사하고 아시아로부터의 미군 철수에 대한 北의 성급한 「기대」는 안이한 환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간단하게 「어름어름 달래서 물러나갈 미군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둘째로는, 南의 반공체제 또한 北의 어설픈 상층 통일전선 전술에 의하여 간단하게 무너질 만큼 취약한 것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에도 눈뜨게 되었다.
 
  더구나 北은 적십자회담과 조절위원회라는 대화통로를 이용하여 전개한 상층 통일전선 전술의 무리한 강공 드라이브가 역으로 오히려 南의 반공체제를 더욱 굳혀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北은 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남북간의 인적 왕래를 통하여 분단 초기만 하더라도 北에 유리했던 남북의 경제력 격차가 이미 南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역전되었을 뿐 아니라 그 격차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 나아가 北은 이 같은 「현실에의 開眼(개안)」이 거꾸로 北의 주민들에게 파급시킬 부정적·파괴적 효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北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숨고르기」, 즉 재정비를 위한 「휴식기」가 필요해졌다. 대화의 중단은 필연적 선택이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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