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할 줄 아는 합리성, 남에게 도덕성을 강요 않는 성격, 자기 목소리 낮다는 게 한계
8월30일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가장 주목을 받는 사람은 韓和甲(한화갑·61) 의원이다. 1967년 정치에 입문한 이래 요즘처럼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 가운데 權魯甲(권노갑) 고문과의 불화說은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어 韓의원을 불편케 하고 있다. 언론계 일부에선 8월30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사실상 「韓和甲 1인을 위한 전당대회」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있다. 韓의원이 最多(최다) 득표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계기로 사실상 대표 자리에 앉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韓의원의 출마가 사실상 金大中 정부의 주체세력인 동교동系를 대표하는 것과 같아 동교동系 의원들뿐만 아니라 非주류 의원들까지 속속 韓의원 진영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 선출은 4인 連記名制(연기명제)로 되어 있다. 4인 연기명제란 출마자들 중 자신이 좋아하는 한 사람만을 찍을 경우 무효 처리가 되고 각기 다른 4명의 이름을 전부 써야만 유효표로 인정한다는 제도이다. 韓의원은 지난 8월 초 「4인 연기명제」가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 4인 연기명제는 權魯甲 고문측이 주장해서 관철된 것이다.
韓의원은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을 앞둔 지난 8월 초 『(차기 후보는) 호남 출신이라고 안 된다는 법은 없다』고 말했다. 1998년 韓의원이 언급한 여권의 「非호남 후보론」을 뒤집은 것이다. 「非호남 후보론」은 15대 大選 前 당시 金潤煥 의원이 언급한 「非영남 후보론」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韓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는 확실히 신망이 있고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국민들은 韓의원에 대해 거의 모른다. 기껏해야 동교동 家臣(가신) 중의 한 사람, 전남 신안 출신, 「리틀 DJ」라는 별명 정도가 일반에서 아는 범위일 것이다. 전국적인 지명도에서 그는 최고위원 경쟁자인 李仁濟(이인제) 고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그에 대한 평가를 종합하면 物慾(물욕)이 없고 인간성이 좋아 당내는 물론 야당에도 敵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원만한 성품과 합리적인 정치력으로 쌓아온 資産(자산)이다. 하지만 韓의원이 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한 순간부터 당내에 이상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韓의원에 대한 「險談(험담)」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을 만든 동교동 3人 하면, 權魯甲 고문, 金玉斗(김옥두)·韓和甲 의원을 꼽는다. 세 사람이 동교동에 들어온 순서도 權魯甲, 金玉斗, 韓和甲 順이다. 이들은 과거 야당 시절 金大中 총재를 중심으로 「형제애」로 뭉쳤다. 동교동 사정에 밝은 인사들은 형제애로 뭉친 3인 사이에서도 權魯甲 金玉斗는 동교동의 主流에 머문 반면 韓和甲은 언제나 非주류로 대접받았다고 말한다.
權魯甲 고문이 DJ 곁에서 40년 가까이 자금을 관리하고, 金玉斗 의원이 조직 관리를 맡아오는 동안 韓和甲 의원은 공보·정책 등을 맡아오면서 소외감을 맛보았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역할상의 차이뿐 아니라 韓和甲 의원은 사고 방식에 있어서 동교동계 主流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자민련의 모 의원은 『동교동 사람들은 보통 자기 주장만 펴고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단정하는데 韓총무는 衆智(중지)를 모을 줄 안다』고 말했다.
동교동 사정에 밝은 민주당 출입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무조건적 일방통행식이 아니다. DJ에게 직언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적절한 선에서 양보를 할 줄 아는 합리적인 정치력을 가졌다. 鄭均桓(정균환) 총무·金玉斗 총장이 全勝(전승) 아니면 全敗(전패) 식으로 밀어붙여 나온 결과가 국회 파행이 아닌가? 韓의원은 야당의 총무 파트너와 관계가 좋았다. 한나라당 총무였던 李富榮(이부영) 의원은 공개석상에서 「저 양반 얘기는 믿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동교동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金大中 대통령이 야당 시절부터 좋아하는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이라고 한다. 즉,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유한 성격, 합리적인 사고와 논리적 설명을 잘 하는 사람,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韓和甲 의원은 동교동 출신 중에서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의원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에겐 「리틀 DJ」라는 별명이 있다. 본인이 DJ를 닮으려고 노력하고 또 실제로 동교동계 의원 중 DJ를 가장 많이 닮았다. 그가 말하는 것을 눈을 감고 들으면 지금 金대통령이 앞에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다. 목소리와 화법도 비슷하다.
『다 좋은데 전라도 출신이라서…』
韓의원은 동교동 비서 출신 중에서 가장 학력이 좋고 영어도 가장 잘한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인 그가 안정적인 직장을 마다하고 핍박과 감시의 대명사이던 동교동과 인연을 맺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의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里에서 났다. 우이도 섬은 金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보다 더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즉 흑산도 쪽과 더 가까운 외딴섬이 우이도다.
섬 소년인 그가 뭍 내음을 처음으로 맡은 것은 목포 유달중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악착스럽게 공부를 해 전교 2등을 차지했다. 당시 전교 1등은 현재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있는 田允喆(전윤철)이었다. 목포高 시절 그는 잡지에서 영국 외교관 이야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서울대 외교학과를 지망했다.
그가 서울대 외교학과에 합격하자 우이도 섬 전체가 경사가 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이도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없었다. 1959년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에 입학한 동기생으로 鄭男(정남ㆍ前 의원), 李敏燮(이민섭ㆍ前 의원)씨 등이 있다.
그는 섬 출신치고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우이도에 제법 큰 밭이 있었고 땔깜을 목포에 내다파는 父親(부친)의 생업이 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2학년 때까지는 학비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家勢(가세)가 기울어진 것은 대학 3학년이었다. 구공탄(연탄)의 등장으로 더 이상 목포 사람들이 땔깜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였다. 그는 부친에게 생활비를 기댈 수 없게 되었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밑으로 줄줄이 있는 동생들이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대학 4학년 때였다. 신문에서 과외 교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읽고 찾아갔다. 그를 면접하던 주인 아주머니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학생이 전라도 출신이라서 받아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 부인은 경상도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 경험은 대학생 韓和甲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사회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분노와 모멸감에 치를 떨며 며칠간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추악한 현실적 부조리를 뜯어고치는 것이 지성인의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지역차별을 없앨 것인가를 생각해 보니 역시 정치를 통하는 길밖에 없었다』(대통령과 함께 한 사람들)
대학 4년 때 DJ 만나
1967년 7代 총선 때 목포에서 출마한 金大中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일한 게 인연이 되어 그가 30년 동교동 사람이 되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서울대 나와가지고 기껏 선거운동원이나 한다』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DJ와 처음 만난 것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치인 金大中의 이름은 중앙 정계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특히 목포 출신들에게 「정치인 金大中」은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1962년 대학 4학년 때였다. 목포 동광고교 교감으로 재직하던 제갈현용 선생이 그를 만나자고 전갈을 보내왔다. 그 자리에 갔더니 제갈 선생이 『金大中 의원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고 했다. 그가 제갈선생을 따라 간 자리에서 金大中 의원과 딱 두 마디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정확한 대화를 기억한다.
『젊은이는 뭘 공부했나요?』(김대중)
『외교학을 전공했습니다』(한화갑)
『젊은이들은 본시 뚜렷한 목표와 소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소신을 펴나가는 것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목표와 소신이 뚜렷하지 못하면 인생을 헛되이 살 수도 있습니다』(김대중)
『명심하겠습니다』(한화갑)
그가 金大中씨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였다. 金大中씨와 金泳三씨가 맞붙은 경선에서 그는 金大中씨의 경상남도 조직책임자를 맡았다. 金大中씨는 후보 경선에 대비해 1968년부터 그에게 경남 지역을 맡겼다. 그는 金泳三씨의 텃밭이었던 경남 지역에서 대의원의 60%를 金大中씨 지지로 돌리는 능력을 보였고, 그 결과 金大中씨는 金泳三씨에 역전승, 대통령 후보로 나서 朴正熙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그는 그 비결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의원들에게 겸손하게 대했고 책임 못질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특히 정책 홍보에 주력, 지방 대의원들을 찾아갈 때마다 金大中씨의 국회발언록 등 읽을거리를 가져가 나누어 주었던 점이 큰 효과를 본 것 같다』
1997년 12월19일 오전 1시경, 15대 大選에서 金大中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경남 창원 경남도청 개표소에 있었다. 동교동 핵심 인사들이 일산의 金大中 후보 자택이나 중앙당사에서 개표 방송을 지켜볼 때 그는 동교동 동지들과 그 기쁨을 맞보지 못했다. 그가 이때 경남지역 책임자가 되어 내려온 것은 27년 前 맺은 동지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미술교사 鄭順愛와의 만남
1971년 金大中씨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자 그는 기약 없는 浪人(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이때 먼저 동교동에 들어와 비서로 있던 고향 친구 鄭哲基(16代 의원·민주당 광양-구례)의 소개로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鄭씨의 사촌여동생인 중학교 미술교사 鄭順愛(정순애·51)씨였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1972년 11월8일 서울 태평로 신문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하지만 維新(유신)이 선포되는 바람에 그는 경찰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다음해에 식을 올리게 되었다. 신혼 살림은 김포공항 근처 마곡동의 무허가 전셋집에 차렸다. 살림은 부인이 도맡아 했다.
韓의원이 동교동에 몸담으면서 가장 힘겨워했던 시기는 유신 이후였다. 金大中씨가 사실상 망명객의 신세로 외국을 돌며 反유신 활동을 하고 다닐 때 그는 동교동을 드나들긴 했지만 主流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결혼 이후 DJ는 외국에 계셨고 저는 길가의 돌멩이 신세였습니다. 그래도 나를 남편으로 섬겨준 게 우리 안사람입니다』
그는 동교동 비서들 중 특이하게 유학 경력이 있다. 그것도 영어권이 아닌 독일이다. 지금은 작고한 한신대 安炳茂(안병무) 박사가 주선했다.
1967년 이후 DJ 곁을 지키면서 그는 1978년, 1979년, 1980년 세 차례에 걸쳐 모두 37개월의 受刑(수형)생활을 했다.
첫번째 옥살이는 1978년 1월1일 당시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이던 金大中씨에게 신년인사를 하러 갔다가 교도관의 허락 없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업무 방해죄로 8개월을 살았다.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金玉斗(현 민주당 사무총장), 金鍾完(前 의원)씨와 함께 병원을 찾은 그는 金玉斗씨가 교도관들의 저지선을 뚫고 앞서갔다. 그는 그뒤를 따라들어갔다는 것이다.
金玉斗 총장은 이와 관련 『당시 韓총무는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나와의 의리를 생각해 경찰 조사에서 「나도 들어갔다」고 말해 옥살이를 자청했다』고 증언했다. 1988년 그가 13代 총선에 입후보했을 때 서울대병원 사건이 사면복권되지 않은 것으로 판정이 나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는 좌절을 맛보았다.
두 번째는 8개월20일간의 징역생활을 마친 뒤인 1978년 12월27일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이 유신2기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갖던 날 그는 金大中씨가 발표한 성명서를 외신기자들과 각계에 배포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세 번째 옥살이는 1980년 5·17 계엄확대조치로 시작되었다. 韓씨는 연행된 뒤 55일간 조사를 받았고 7월12일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으며 곧 계엄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1년 8월15일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불교계 신망 두터운 가톨릭 신자
韓의원은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1999년 10월 장남(우진)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韓의원은 결혼 사실을 金대통령과 權魯甲 고문, 金玉斗 의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동교동 식구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채 식을 치렀다. 처음엔 성당에서 치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일주일 전에 부랴부랴 국회 안 동산으로 식장을 옮겨 야외 결혼식으로 치렀다. 물론 축의금도 받지 않았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안 崔在昇(최재승), 薛勳(설훈) 의원은 그에게 『韓선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불평을 터뜨렸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동교동 식구들에게 청첩을 했을 경우 외부에 알려져 식장 주변이 혼잡해져 괜히 언론에 「호화 결혼식」 운운하며 거론되는 것을 피하자는 심사였다.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사례들은 이것말고도 많다.
최근 金大中 대통령도 韓의원의 최고위원 출마와 관련, 『한화갑이는 결점이 없잖아』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韓의원의 장점은 자신의 이런 가치관과 도덕관을 자랑하거나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初選 의원은 『어설픈 재야 출신보다도 훨씬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의 교제 범위가 폭넓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불교계의 신망이 두텁다는 점이다. 4·13 총선 당시 전남 신안까지 내려와 찬조연설을 한 사람 중에는 경남 지역의 유력 불교 인사가 있었다. 가톨릭 신자 후보의 연설원으로 불교계 인사가 나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영남 불교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경상남도는 韓의원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다. 1968년부터 인연을 맺어와 知人(지인)도 많고 애정도 각별하다. 그는 사무총장 시절 경남 쪽의 요구와 주문은 거의 다 들어주었다고 한다. 측근들은 이번 최고위원 경선에서도 경남에서 표가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이 창당될 당시 각계 인사들이 추진위원으로 들어왔다. 이들 중 영남 출신의 강병중 부산상의 회장, 유삼남 前 해군참모총장, 李淳牧 우방그룹 회장, 崔一鴻 前 경남지사 등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의 영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韓和甲 의원이었다.
IMF 관리체제에서 한국 경제가 신음하던 1998년, 韓의원은 영남 지역의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지역 경제인, 정치인, 언론계, 시민단체 등이 참석한 이 간담회의 핵심 주제는 지역 경제의 마지막 보루인 우방주택(대구)과 대동주택(마산, 창원)을 회생시키는 방도를 찾자는 것이었다. 두 기업을 살리는 쪽으로 정책적 건의를 하는 데 총대를 멘 사람이 바로 韓의원이었다. 결국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두 건설기업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최근 대동주택은 부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李淳牧 우방그룹 회장이 민주당 창당 당시 추진위원으로 영입된 데는 이와같은 배경이 있었다.
정권 교체 후 서울 및 수도권의 한나라당 의원들과 영남지방의 현역인 張永喆(장영철), 權正達(권정달) 의원 등이 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6代 總選 당시 경북 칠곡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후보를 사퇴한 바 있는 張永喆 勞使政위원장은 공개 석상에서 『내가 누굴 보고 여당에 들어왔느냐? 韓총장 인간성 하나 보고 들어왔지』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宋錫勳(송석훈ㆍ강원 속초-고성-양양-인제) 의원은 민주당 입당을 결심한 것은 韓의원과 만나고 나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틀 DJ」를 벗어날 수 있나?
韓의원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정치적 장래와 관련된 질문에는 언제나 묵묵부답이다. 다만 그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가 大權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모든 당내 분란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최근 행보는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韓의원은 16代 국회 들어 「아태지역정책연구회」라는 국회등록 연구단체를 만들었다. 韓의원은 민국당 韓昇洙(한승수), 민주당 金台植(김태식)과 함께 이 연구회의 고문직에 있다. 민주당 의원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연구회 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한나라당 崔燉雄(최돈웅) 金文洙(김문수) 鄭義和, 자민련 鄭宇澤, 민국당 韓昇洙 姜淑子 의원 등이다.
민주당 의원으로는 郭治榮 金杞載 金明燮 金榮煥 金聖順 金成鎬 金德培 金德圭 金宅起 金希宣 文錫鎬 朴炳錫 朴尙奎 朴仁相 裵基善 裵奇雲 宋永吉 薛勳 李在禎 李鍾杰 李浩雄 趙漢天 張正彦 劉容泰 張誠民 鄭範九 丁世均 趙誠俊 秋美愛 千容宅 李根鎭 咸承熙 등 35명이다.
민주당 내에서는 회원 중 趙誠俊 劉容泰 丁世均 秋美愛 鄭哲基 裵奇雲 趙漢川 金德圭 金明燮 張正彦 郭治榮 金泰弘 李浩雄 의원 등을 확실한 「韓和甲 사람」으로 분류하고 있다. 나머지 회원들도 親韓和甲 의원들이라고 봐도 무난하다고 말한다.
16代 총선 이후 韓의원은 행동 반경이 부쩍 넓어졌고 돈이 드는 갖가지 행사를 무리 없이 치르고 있으며 「아태지역정책연구회」 같은 연구 모임도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다. 15대 大選 전 신한국당의 후보 지망생들이 대규모 연구 모임을 만들어 勢(세)를 키웠던 전례가 있어 이 모임을 예사롭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정권 교체 후 달라진 韓和甲 의원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적어도 정치자금 면에선 DJ로부터 완전 독립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영남쪽에서도 정치자금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다』
기자는 韓의원 주변을 취재하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풀리지 않아 답답함을 느꼈다. 그것은 정치인 韓和甲의 비전과 리더십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측근 의원들도 이를 인정한다. 그동안 韓의원의 정치적 목표가 오로지 「金大中 대통령 만들기」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색채를 선보일 기회가 없었다는 얘기다. 최측근인 文喜相 의원의 말처럼 그는 평생을 「DJ 福音(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에 충실해 온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목소리가 실종되고 말았다.
薛勳 의원은 『韓선배가 결점이 없다는 게 오히려 약점』이라고 했다. 이 말은 맞다. 그러나 기자가 보기에 韓의원의 최대 약점은 「리틀 DJ」라는 별명 속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작고한 李壽仁(이수인) 前 의원은 생전에 『그를 가리켜 「리틀 DJ」라고 하는 것은 韓의원을 음해하려는 것』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과연 韓의원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DJ色」을 탈색시키며 DJ를 뛰어넘는 새로운 리더십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지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金大中이라는 巨木의 後光(후광)이 사라진 뒤에도 그가 우뚝 서 있으려면 DJ를 능가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