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北 북한 軍官(대위)의 흡수통일을 위한 발상

1家口 1풍선 보내기 운동으로 북녘 하늘을 뒤덮을 때…

  • : 김동현  d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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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脫北(탈북) 軍官(군관)이다. 작가였고 연출가였다. 歸順(귀순) 직후 나는 국군 心理戰(심리전) 부대에 찾아가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에게 남한을 알게 해준 곳이 바로 그곳이고, 나의 또다른 인생의 출발점이 남한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없고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들, 투박한데다가 인정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직업 군인들.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풍선을 타고 열여덟 살 어린 兵士(병사)였던 나에게 날아든 삐라들은 참으로 예쁘고 현란하며 자극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南(남)에서 보낸 삐라를 손에 든 것은 1979년 3월, 군 입대 후 6개월 만의 일이다. 황해남도 청단군 엽구도리라는 곳에 갱도를 뚫기 위해 동원되었던 나는 宿營(숙영) 첫날부터 이른바「敵(적)들의 모략책동」의 일환이라는 삐라 수거작업에 투입되었다. 戰士(전사)들에게는 하루 3천 장의 삐라 수거가 밥 먹기 전의 과제로 떨어졌다.
 
  자고 나면 부대 주변에 꽃눈처럼 날리던 천연색의 삐라는 내용은 그만두고라도, 색상과 모양만으로도 흑백사진에 익숙한 병사들을 현혹시키는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절대로」 「누구도」 「어떤 일이 있어도」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 적들의 삐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남발하였다.
 
  『敵들의 삐라 내용은 새빨간 거짓말인데 거짓말도 자꾸 들으면 속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머리에 병이 들고 나아가 『조국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삐라 한 장 보는 것에 대하여 그토록 어마어마한 사유를 갖다 붙이는 이유를 당시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삐라 한 장 본다고 해서 조국을 배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나를 포함한 戰士(전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이 기를 쓰고 못 보게 하니, 못 보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기를 쓰고 보고 싶어지는 게 삐라였다. 하지만 그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을 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소대장의 제의로 우리들에게 자전거 살로 만든 기다란 송곳이 주어졌는데, 끝을 뾰족하게 갈아서 그것으로 삐라를 꿰면 수거작업이 간편해지고 내용을 볼 수 없을 것이란다. 등 뒤에 붙어다니는 지휘관들의 시선 때문에 손에 들고서도 볼 수 없는 삐라, 제 손으로 꿰면서도 눈길만큼은 딴 곳에 두어야 하니 때없이 손바닥에 박히는 송곳과 그 끝에 묻어나는 아픈 핏자국, 그보다도 조국을 배반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삐라를 속 시원히 보고 싶은 욕망과의 처절한 싸움 속에 며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로 가는 길목에 수거되지 않은 삐라 몇 장이 널려 있는 것을 먼발치에서 발견한 나는 분대장에게 변소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한 후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곧바로 그 몇 장의 삐라를 누가 볼세라 손에 넣었다.
 
  그리고는 문을 닫아 걸고 쭈그리고 앉아서 그토록 내 마음을 버겁게 하던 삐라라는 물건을 펼쳐 들었다. 40대의 청년이 웃고 있었다. 그 곁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남한으로 귀순한 모 군단의 군관이란다. 그가 남한에서 새 가정을 이루고 행복을 누리고 있으며 북한의 군인들에게 귀순을 호소한단다.
 
  『반동 놈의 새끼!』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들고 있던 삐라를 변기 속에 던져버렸다. 또 다른 것을 펼쳐드니 비행기를 몰고 귀순하면 상금이 얼마, 자동보총을 가지고 넘어오면 또 얼마, 그리고 이 삐라는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무슨 증명서라는, 참으로 읽어볼 가치도 없는 敵들의 모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잘난 삐라를 보지 못해 속썩었던 나 자신을 비웃었고, 이튿날 생활총화 때는 그러했던 나 자신의 사상적 방황을 社勞靑(사로청) 조직 앞에 털어놓았다. 나의 자체 비판을 듣고 있던 중대 정치지도원의 발언은 심각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우리들 속에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敵들의 삐라가 뿌려지고 있다. 누구든 주워 보겠지,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보다 보면 분별력을 잃게 되고 거짓도 사실로 받아들이겠지, 그래서 사상을 흔들고 의식을 마비시키자는 것이 敵들의 노림인데 오늘의 교훈은 누가 삐라 한 장 보고 안 보고가 아니라, 적어도 敵들의 사상에 동조할 수 있다는 증거가 우리 내부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敵들은 남조선으로 넘어간 변절자들에게서 비밀을 다 뽑아낸 후에는 살려두지 않는다. 누구를 속여보려고 사진까지 위조해서 우리들 쪽으로 날려보낸다는 점, 모두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국가보위부에 끌려가다
 
 
  정치지도원의 이야기는 참으로 실감이 났다. 나도 다시는 敵들의 삐라 쪽으로는 눈길을 팔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랬음에도 정치지도원의 말대로 「敵들의 삐라」는 참으로 「교활한 물건」이어서 며칠 후 나의 마음은 또다시 삐라로 쏠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제의 삐라, 여자들의 반나체 사진이 붙어 있다는 삐라만큼은 나도 어떻게 하든 보고 싶었다. 그것 한 장만 보고는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나약한 의지」와의 나름대로의 싸움, 그 처절한 싸움 끝에 또다시 기회가 닿았다.
 
  중대 식당의 땔나무를 줍기 위하여 야산에 오른 나는 혼자인 기회를 이용하여 산중턱까지 단숨에 뛰어올라 닥치는 대로 삐라를 주웠다. 산 頂上(정상)까지 올라 3백장도 더 되는 삐라를 살펴보았지만 「팬티 바람의 처녀」는 나타나지를 않았다. 맥없이 산을 내려오는데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삐라 몇 장이 가랑잎 사이에서 나풀거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주운 삐라에는 金日成(김일성)의 사진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는 위대한 수령님이 삐라 속에서는 천 조각을 오려붙인 넝마 같은 옷을 입고 계신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나는 『개새끼들!』이라고 욕했다. 장난을 쳐도 너무 한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는 삐라 따위를 주워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혔다.
 
  1991년은 내가 평양 김형직 사범대학에서 공부하던 때이다. 하루는 방학차 고향으로 떠나는 친구들을 바래다주려 송신역에 나갔다가 막 돌아오는 길에 먼발치에서도 알아볼 수 있던 「敵들의 삐라」가 풀숲에 떨어져 있었다. 평양시에서, 그것도 백주에 삐라를 본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틀림없는 삐라였다. 북한주민들에게 현 체제 반대운동을 호소하는 선전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
 
  라이터를 꺼내들고 그 자리에서 태워 버릴까 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시내 한복판이라는 생각에 일단은 학교 기숙사에 가서 처리하려고 삐라를 바지 호주머니에 넣는 참인데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내 곁으로 다가온 40대 초반의 사나이가 증명서를 좀 보자는 것이었다. 학생증을 꺼내 보이며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국가보위부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일단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선교구역 107호 연구소」라는 간판을 걸어놓은, 밝고 깨끗해 보이는 건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이 국가안전보위부 선교구역 출장소였다. 내가 속해 있던 대학의 黨(당) 위원회로 전화가 날아갔고 30분 만에 달려온 대학 초급 黨지도원의 손에 나의 개인자료가 들려 있었다.
 
  압수한 삐라 한 장을 무슨 전시품처럼 펼쳐들고 대단한 반동분자를 현행범으로 적발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선교구역 국가안전보위부 지도원과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는 대학의 黨 지도원 앞에서 결백을 증명해야만 했던 나는 가정환경에서부터 아침에 송신역에 나오게 된 동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 시간 동안을 중언부언하고서야 어깨를 떨어뜨리고 보위부 출장소의 철문을 나서게 되었다.
 
  나는 그때, 병사 시절부터 대학 시절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괴롭히고 피곤하게 만드는 삐라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보거나 말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고, 따지고 보면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한 삐라에 당국이 그처럼 촉수를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의 기만선전에 속아 살던 당시로서는 「敵들의 모략」과 「심리전」의 일환으로 막연하게 다가오던 몇 장의 삐라,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종이 몇 조각이 아니라 아둔하고 무지하게 살아오던 나에게 희망을, 새 삶을, 그리고 노예적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던 자유세계의 외침이고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 민족의 분단 역사와 맞먹는 장장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국군의 정예 심리전단이 치켜든 전투적 깃발이 아니었을까.
 
  삐라 한 장 줍기가 겁나던 시절은 이제 북한에선 멀리 가버렸다.
 
 
  敵地 물자
 
 
  1992년은 식량위기라는 용어가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지 않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2년 초부터 평양시를 제외한 북한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배급소들은 문을 닫았다. 함흥 경공업대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칡뿌리 채취에 동원했다. 대학 기숙사에서는 옥수수 가루에 칡뿌리 가루를 섞은 국수를 공급했다.
 
  그러한 시절에 나는 다시 군복을 입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병사로서가 아니라 군관의 신분으로 배치받았다. 여기서 나와 나의 戰士들은 또다시 「敵들의 심리전」과 맞서야 했다. 이번에는 삐라나 對北(대북) 확성기 방송처럼 듣고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컵라면이나 담배, 과자, 라이터와 같은 보기에도 탐스럽고 군침이 도는, 이름하여 「敵地(적지) 물자」와 부딪치게 됐다. 나는 새로 부임한 지휘관답게 戰士들 앞에서 위엄스럽게 이야기했다.
 
  『특히 「敵地 물자」 대처를 잘해야 한다. 敵들이 뿌린 음식을 먹으면 내장이 썩고, 옷가지나 물품 같은 것을 사용하면 피부가 잘못된다. 1군단 8師(사)에서 또 어느 사단에서, 그러한 실례는 얼마든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敵의 선전용 물자인 줄 알면서도 급식,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곧 敵과 내통한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물건을 주우면 가져다 바치고 삐라는 보는 족족 소대장 이상 군관의 입회하에 불태워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직속 보위부에 출장증명서 승인번호를 받으러 갔던 나는 담당 보위 지도원(중좌)이 언뜻 보아도 분별이 가능한 敵地 물자인 「불티나」표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도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에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주었다. 제기랄! 담배까지 한국산 아리랑이 아닌가! 내가 戰士들을 시켜 주어다 바친 그 라이터며 담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괘씸했다. 배신감 같은 것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랫사람들에게는 내장이 썩고 어쩌고한다면서 특별강연회까지 하고 다니는 녀석이, 戰士들이 눈판을 헤매며 주워다 바친 물건을 따뜻한 사무실에 앉아서 공것으로 향유한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며칠 후,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戰士들이 보는 데서 불티나표 라이터로 아리랑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놀랐다.
 
  戰士들은 벌써부터 내장이 썩고 손이 문드러진다던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이들이 남한의 담배를 피우고 라이터를 사용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제대를 앞둔 일부 병사들은 南에서 보낸 속옷이며 볼펜 같은 생활용품들을 따로 건사하거나 소포로 고향에 보내는 일도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중대에 갑자기 들이닥친 「검열조」가 중대원 전부를 모아놓고 소지품 및 배낭검사를 실시했다. 중대원들의 배낭에서 「敵地 물자」인 반도체 라디오와 볼펜들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라디오였다. 라디오는 敵과의 정신적 내통을 전제로 하는 물건으로서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이튿날로 全(전) 군단에 소문이 퍼지고 중대 군인 4명이 강직당했다. 戰士들 통제를 잘하지 못하고 부대 안에 유포되는 敵들의 사상을 묵인했다는 죄명으로 나에게도 엄중경고(黨 처벌) 조치가 취해졌다.
 
  한번 맛을 들인 남조선 담배를 끊을 수가 없었던 나는 군관이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한국산 담배를 피웠다. 戰士들은 戰士들대로 양말이며 볼펜들을 몰래 사용했으며 일단 발견되면 처벌을 면치 못한다는 전제하에서 敵地 물자를 대했다.
 
  좋은 물건이든 나쁜 물건이든 남한 것이라면 무조건 사용 금지령을 내린 북한은 남한 물품을 사용하는 사람에 한해서 최고의 정치 처벌을 적용했다.
 
 
  평성 이과대 학생들의 의식화
 
 
  1995년 4월에 적발된 평성 이과대학 학생들의 의식화 운동은 북한 최대의 반체제 학생운동으로 번질 뻔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이과대학 생화학부 社勞靑 위원장을 주축으로 「해바라기회」라는 의식화 단체를 결성했던 이들은 舊(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물먹은 솜처럼 무너져 버린 동구라파 사회주의 나라들의 反(반)역사성을 분석하고, 결국 북한의 사회주의도 역사의 반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이 내용을 전국의 대학에 전파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 사회의 모순을 들추어보자는 혁명의 깃발을 치켜들었던 이들의 움직임은 애석하게도 국가안전보위부에 적발됐다.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으로 이 사건을 처리했던 나의 옛 지휘관으로부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舊소련의 붕괴 이후 북한 지식층들의 변화에 특별히 신경을 쏟고 있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평성 이과대학 생화학부 학생들의 잦은 모임과 이상한 발언들이 포착된 것은 1994년 말이었다. 이때부터 평성시 보위부는 모든 사업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대학가의 움직임을 감시, 추적했다고 한다. 보위부는 생화학부 社勞靑 위원장 이모의 애인(같은 학부 학생)을 협박, 매수하여 모임이 열리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냈다.「해바라기회」 회원들은 전원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체포 즉시 정치범으로 구분된 이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실 한올 몸에 걸치지 않은 채 얻어맞는다고 생각해 보라. 맞는 사람은 수치에 몸을 떨고, 보는 사람은 숨이 막혀 쓰러지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골반이 깨져 四肢(사지)가 너덜거리는 자식을 보다 못한 어느 어머니는 『내 자식은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겠다』며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자식의 코를 물어뜯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그 학생만은 숨이 어찌나 질긴지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공개처형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장에 선 그 청년에 대해 사형 집행자는 『어머니도 용서할 수 없어 저렇게 코까지 물어뜯은 놈을 어떻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며 거품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처형당했지만 평성의 대학생들이 죽어가면서 남겼다는 말은 북한의 대학가에 널리 퍼졌다.
 
  『소련이 망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우리가 틀린 말을 했는가? 사회주의란 증명된 역사의 汚物(오물)이다. 우리는 우리가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가지 않기를 원했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열혈의 그 청년들을 간첩으로 몰아붙였던 것은 생화학부 社勞靑 위원장이 갖고 있던 라디오였다. 그 라디오는 위원장이 군 복무 시절부터 가지고 다니며 듣던 「敵地 물자」였다는 것이다. 그 한 개의 라디오가 이름 없는 청년을 투사로 만들고 주변의 학생들을 동지로 만들었다. 그후부터 대학생들의 라디오 청취는 엄중히 단속되었으며 軍을 포함한 북한 전역에서 라디오 주파수 고정 작업이 再(재)실시되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질문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험이 있었다. 1994년 가을경이었는데 戰士들이 주워다 바친 삐라들 속에서 특이한 내용의 삐라를 보게 되었다. 하고많은 삐라 중에서 문제의 삐라가 특이하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색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圖錄(도록)이나 혁명 역사 교과서에서 너무도 자주 보아온 빨치산 시절의 金日成과 金貞淑(김정숙) 사진이 거기에 있었다.
 
  『뭐 이런 사진도 다 삐라에 내나』 싶어서 뒷면을 보니, 옛 북한군 장령으로서 현재는 소련에 망명, 거주하고 있다는 한 노인의 사진과 글이 실려 있었다. 그 사람에 의하면, 金日成은 해방 직전까지 소련군 여단에서 대위로 있었기 때문에 백두산 밀영에서의 생활은 당치가 않으며 金正日이 태어난 곳도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근방이지 백두산 정일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사진을 똑똑히 보라는 말이 적혀 있어 앞면을 다시 보았더니 분명히 소련 군복을 입은 金日成과 金貞淑, 그리고 어린 金正日이 여러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예의 증인도 그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너무도 크게 속아 살아온 게 아닌가. 억만 금을 들여 건설한 金正日의 저 백두산 生家(생가)는 존재부터가 없는 협잡에 근거한 것이란 말인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뇌리를 쳤다. 그때부터 말수가 적어진 나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나 개인의 思惟(사유)정신에 무기징역의 자물쇠를 채워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나는, 그때 가졌던 사상의 허무가 결국은 脫北(탈북)을 결심하게 하고 오늘의 자유를 찾아주었다고 믿고 있다.
 
  제 아무리 북한 당국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역사적 사실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역사적 사실이며, 그러한 사실의 전파야말로 金正日 체제를 변화시키는 길이며 통일의 길이라고 소리쳐 외쳐 본다.
 
  1962년생이니까 나는 남한의 386세대 또래다. 나에게는 북에서 경험한 통일에 관한 몇 가지 추억이 있다. 오늘까지의 성장 속에 추억이란 자리매김을 하며 그림처럼 새겨져 있는 것, 그것은 金正日 체제하에서 강령이나 노선으로 발표되었던 통일 관련 사안들이 아니다. 사건과 사람들로 연결된 내 기억 속의 아름다운 통일의 꿈나무라 이름하고 싶다.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1970년대 당시 남한의 중앙정보부장이던 李厚洛(이후락)씨의 평양 방문이다. 남한은 북한의 敵이라고 배웠던 열 살짜리 어린 마음에도 남한 당국자의 평양 방문은 놀라움이었다. 그가 타고 다니던 까만 승용차를 향하여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던 그 아련한 추억은 통일을 염원하는 이 민족 모두의 순수함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추억은 1980년대 초, 북한 중앙 TV 방송에서 보았던 남조선 대학생들의 反美(반미) 자주화 운동과 光州(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신출내기 병사 생활을 경험하고 있던 우리 세대는 그 무렵 북한 당국자들의 폭풍 같은 「남조선 혁명」 노선의 새로운 제기와 對南(대남) 적화통일론에 휘말려 남녘 해방을 다짐하는 대회와 집회를 자주 가졌다. 그 집회장에서 어디선가로부터 흘러나온 다음과 같은 말들을 나는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헐벗고 굶주린다는 남조선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이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항쟁의 거리에서 불타고 있는 버스와 승용차들이 아깝다. 너무도 고급스럽다. 게다가 택시 운전사들의 시위라니?』(당시 북한 주민들은 택시라는 말조차 모르고 살았다)
 
  『남한에는 자유가 없다고 하는데 정부를 향하여 돌을 뿌리고 화염병을 던지는 것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을까?』
 
  이러한 의문들을 어느 정도나마 풀어준 사람이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와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 노인이라 할 수 있다. 남한과 달리 북의 입장에서 통일의 꽃이며 사도며 영웅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訪北(방북)과 송환은 북에서 떠들어대던 선전의 의미와 의도를 떠나 우리 세대에게는 『만일 내가 임수경이라면』,『만일 내가 문익환 목사이고 이인모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했고, 나름대로의 답을 찾게 해주었다.
 
 
  임수경이 징역 7년이라니?
 
 
  통일의 꽃으로 불린 남한의 여린 여대생 임수경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즈음부터 북한 사람들은 북한의 국가보위부를 떠올리며 『남한에 돌아가면 임수경은 죽을 것이다. 본인은 물론, 가족과 일가 친척도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라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태웠다. 그래서 임수경이 더욱 더 장해 보였고 눈물겹도록 용감해 보였으며, 세대와 성별을 떠나 북한의 온 국민이 사랑하는 인간적 스타가 되었다.
 
  그러한 북한 주민의 감정을 헤아려 북한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서울로 돌아간 임수경의 소식을 자주 들려주곤 했는데, 그녀의 죄는 남조선 반동들이 뒤집어씌운 북한 찬양과 밀입북 등 억지 주장으로 일관한 것이어서 재판은 계속 투쟁으로 이어지다가 드디어 7년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임수경은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
 
  『우리로 말하면 정치범인데 본인이 7년 징역이라면 가족은 어떻게 된다는 소리인가?』
 
  『정치범이라면 무작정 죽이는 것이 세상의 법도인 줄 알았는데 정치범을 향하여 재판이라니? 북에서라면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소리인가?』
 
  이번에는 세상의 법을 조금이나마 알게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정치범이라는 말만 들어도 죽음을 연상해 왔는데 그런 법은 북한에만 있는 것이지 인간 생지옥이라는 남한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꼴이 되었다.
 
  문익환 목사의 訪北, 성용승 학생과 같은 全大協(전대협)의 또다른 대표들도 이제는 죽음을 각오한 통일의 투사일 수 없었다. 왜? 기껏해야 그들은 감옥살이를 좀 하다가 나오게 될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미 확인된 상태였으니까.
 
  여기까지가 통일과 관련된, 더 구체적으로는 남한을 알게 된 나의 개인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 또래 북한 청년들이 갖고 있는 남한에 대한 공통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장난 비행기가 아니라 달구지
 
 
  선전선동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북한에서 절대 다수의 주민들은 당국의 선전에 의하지 않고는 세상 이치에 정통할 수 없으며, 알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산다. 全(전) 세계를 상대로 구걸행각을 하면서도 주민을 향해서는 딴 소리 하고 있는 북한 金正日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95년에 있었던 쌀 15만t 지원과 현재의 비료지원, 對北(대북) 경수로 지원 등에 대해 그 실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오늘날의 북한 주민이다.
 
  서울에 와서 『그런 것도 몰랐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얼굴이 달아오를 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필자는, 필자의 현재 위치에서가 아니라 脫北 이전의 위치에서 북한 주민들이 아는 남한에 대한 이해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북한의 金正日 체제를 고장난 비행기로 묘사하고 연착륙을 유도해 낸다는 이른바 연착륙설의 설정부터가 잘못된 발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고장났다던 비행기가 아직까지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미사일까지 발사해대는 이 마당에서 이제는 視覺(시각)을 확실히 하고,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통일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갈 데까지 간 북한, 마지막 숨결을 모으는 金正日 체제를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두 바퀴를 힘겹게 굴리는 달구지라 할 수 있다. 그놈의 달구지는 속도가 느리고 역사적 퇴화물인데도 고삐를 틀어쥔 달구지꾼의 의지에 확실히 복종하고 특별한 고장 없이 갈 길을 간다는 것이 특징이며 장점이다.
 
  그놈의 달구지 고삐를 틀어쥔 것이 金正日이다. 고삐를 조금만 늦추면 달구지의 가장 큰 약점인 방향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金正日이다. 金正日은 자기의 달구지에 제동장치가 없다는 치명적 결함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간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고삐를 늦추었다가는, 그래서 주민들이,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산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알게되는 날이면 루마니아에서처럼 군인, 주민 할 것 없이 당장에 자기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눈다는 것을 너무도 똑똑히 알고있다.
 
  그러한 金正日에게 개방과 개혁을 위한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계적인 발전의 추세가 뭐든 간에 자기만의 독재 공간에서 주어진 운명만큼은 독재자로 군림하겠다는 것이 역사의 반동인 金正日이 추구하는 세계이며 본질이다.
 
  북한은 법치국가가 아니라 수령의 개인 명령에 따라 통치되는 개인 독재국가다. 金日成과 金正日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불손한 말을 하였다던가 그 정치체제를 비난하였을 경우에는 법에 의한 재판이라는 것이 없다. 주동자는 총살되고 그 가족 친척들은 통제구역에 끌려간다.
 
  가장 최근의 실례로 金正日은 함경북도 회령의 탈북자 김현주 가족(중국 공안에 의하여 가족 전원이 북으로 끌려감) 6명 외에 관련자 4명 등 도합 10명에 대해 공개총살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10명에 대한 처형이 혜산 운동장에서 1999년 4월 거행되었다. 1999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에 새로 설치된 철조망(차단물)에 걸려든 脫北者들은 2년 전인, 1997년 10월에 하달된 「渡江(도강) 자들의 현지 총살에 대한 국방위원회 명령」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처형되고 있다.
 
  따라서 金正日이 죽기 전에는 북한 체제의 변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 체제를 변하게 하기 위한 현실적인 접근은 북한 주민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북한 체제의 허위를 깨닫고 金正日을 반대하는 사람이 만명이 되고 백만명이 된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잡아넣고 죽여버릴 교수대가 어디에 있으며 감옥은 또 어디에 있을 텐가. 그때 金正日 체제는 누가 지켜 줄 것인가? 북한 주민의 변화야말로 金正日 체제를 망하게 하는 결정적 열쇠이며 도탄에 빠진 북녘의 형제들을 하루빨리 역사의 반동에서 구원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金正日의 맹목적 아첨쟁이며 정신적 노예들인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세상을 알게 하고 속아 살아온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고 하지만, 참말로 金正日 체제하 북한 주민들의 사상과 의식은 남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답이 안나오는 미궁의 세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수령이라 일컫는 金日成과 金正日을 아버지가 되어서도 아버지라 부르는 이상한 관습에 물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경애하는 장군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장군님의 권위와 위신을 헐뜯는 현상에 대해서는 추호의 동요도 없이 투쟁하는 「절대성 무조건성」의 신봉자들이며 그에 위배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대상이 설사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더라도 무자비하게 투쟁하는 불굴의 혁명정신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서부터 金日成과 金正日을 신격화하는 이른바 정치사상에 길들어져 있으며 충성경쟁 속에서 자신을 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왔다.
 
 
  우리가 북한 주민을 옆에서 거들자
 
 
  다행히도 순박성만큼은 간직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다. 나서부터 거짓말만 들어온 탓에 분별력은 상실한 상태이지만 착하고 부지런한 우리 민족의 고유정신만은 지금이라도 원상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내 고향 북녘 사람들이다.
 
  빈곤의 극치를 헤매고 있는 까닭에 사랑에 주려있으며 요즘은 돈에 대한 가치관도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신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金正日 체제의 非(비)인간성에 대해 오늘까지 盲從(맹종) 盲動(맹동) 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 자체가 노예적 근성이라 이름할 수 있을 정도의 체질화된 충성심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치가 뻔한데 본인들 스스로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곁에서 좀 거들어 주는 것이 옳은 처사일 것이다. 저들에게 잃어버린 자신들을 찾아주고 새 여(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들어올리는 지렛대와 지지점을 찾아준다면 그보다 신명나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필자가 제기하는 것은 새로운 것도 아니며 그 무슨 방법론도 아니다. 체험을 들먹이며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릇된 이데올로기와 主體(주체)사상이라는 마술에 현혹된 북한 주민들에게 자기의 정신을 찾아주고 독재자 金正日의 狂氣(광기)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남한의 현실을 알려주어 그들이 잘못된 교과서와 역사책 속에 묻혀 있었음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반의 칼을 들게 하자
 
 
  배 한번 불러보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남녘 땅 형제들을 위하여 평생을 뼈빠지게 일했다는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이 잘살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지면 백 마디 말이 소용없고 천 마디 주장이 빛을 잃는다. 그것은 전체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속아온 과거에 침뱉게 하고 金正日의 충신들로 하여금 배반의 칼을 들게 한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는 북한의 金正日 체제가 겉으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오늘 이 순간까지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결을 저들의 總的(총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사정과 관련된다.
 
  북한이 떠들어대는 사회주의의 완전 승리란 말은 자본주의와의 대결, 가깝게는 남한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全 黨과 全軍이 투쟁해야 하며 金日成과 金正日의 영도 하에 「우리는 승리해 왔다」는 것인 바 이것은 곧 북한 정권의 취약점이며 공격의 돌파구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TV를 통해 남한의 시위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이후, 북한 주민들 사이에 「이상한 의문들」이 나돌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북한의 선전 모략가들은 그 이후 편집작업을 거치지 않은 남쪽 관련 화면은 내보내지 않았다. 남한 사회에 대해 갖고 있던 한때의 의문을 의문으로 묻어버린 북한 주민들은 그래서 지금도 남한을 美帝(미제)의 식민지로 알고 있으며 병 나도 돈이 없어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일부 주민들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라디오를 가지고 남한 방송을 몰래 청취하고 남한의 노래가 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대부분도 방송 내용이 그 어떤 목적을 위한 정략적 차원의 산물로 믿고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북한 주민의 대다수가 남한의 현실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끝끝내 한국 방송을 청취하고 북한의 현실을 깨달아 한국행을 택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한국의 사정을 알게 된 사람은 북한에 그냥 남아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다시 말해 남한 사람들이 북한 주민들보다 잘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북한에 알려져도 金正日 체제는 무너져 버린다. GNP의 차이가 어떻고, 한국의 승용차 생산이 세계 몇 번째라는 요란한 문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밥 세 끼만큼은 이밥을 먹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의 가장 큰 소원인 TV나 냉장고쯤은 한 달 생활비로도 넉넉히 구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알게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당장 북한은 무너지고 말 것이며, 저들을 그토록 철저히 속인 金正日과 그 하수인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脫北者들은 이를 북한 주민들의 「감정의 속성」, 「의식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이 북한체제 전복을 위한 국민운동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脫北이라는 현실 도피로 나타나는 것은 金正日의 통치체제가 잔인하기 때문이며 또한 북한 주민들 가운데 남한의 실상을 아는 사람이 너무도 적은 까닭이다.
 
 
  복수가 두려워서라도 金正日은 변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변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북한의 일부 지역과 제한된 계층의 사람들이 심적변화를 일으켰을 뿐 체제만큼은 그 반동성과 악랄성을 보강하고 보충하는 쪽으로 더욱 발전되고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이 변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나진·선봉 지역을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하고 금강산 관광을 허용한 것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북한은 나진·선봉 지역과 금강산 온정리 일대를 말 그대로 자유무역지역과 관광지역으로 개방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한해서 또 하나의 철책으로 봉쇄해 놓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금강산 온정리 지역은 오래 전부터 아무나 갈 수 없는 봉쇄지역이었으며, 나진·선봉은 그런 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있던 곳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철조망이 쳐지고 특별 통행증을 필요로 하는 특수지역으로 변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외부 사람들을 대하고 경험하는 북한 주민들이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는데 옳은 말이면서도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해당 지역 주민들의 통제와 이른바 교양을 강화하는 북한의 체제를 이해 못하는 사정과 관련된다.
 
  변화의 두 번째 조짐으로 꼽는 게 脫北者 수의 급증인데, 脫北者들은 거의가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출신의 국경지역 주민들이거나 舊 소련의 벌목공 출신들로서 중국 혹은 소련을 통하여 세상을 알고 세상의 풍요로움을 맛본, 예외적 경우임을 알아야 한다.
 
  북한의 金正日 체제가 변화했다면 脫北者들의 출신 道(도)는 보다 다양해져야 하지 않을까.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평양에서도 뛰쳐나오고 남포에서도 뛰쳐나오며 원산과 해주, 양덕에서도 뛰쳐나와야 하지 않을까.
 
  중국이 변했고 소련이 변했기 때문에 脫北者들이 북한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며 중국과 소련이 있기 때문에 천명에 달하는 귀순자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합리적일 것이다. 북한의 변화 조건으로 脫北者들의 머리 수를 헤아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중국과 소련을 경유하지 않고 옛날처럼 철책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사람들이 최근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볼 것』을 권유한다.
 
  북한 변화와 관련된 또다른 시각이 증언하는 문제는 굶주림과 病魔(병마)에 시달리다 죽어간 북한 주민이 3백만에 달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때문에 북한은 망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나가다가는 얼마 못가서 북한 주민들 속에서 金正日 체제에 결사 항거하는 인민적 봉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 스스로가 북한의 실상을 잊었거나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어느새 외부인의 시각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증명할 뿐, 현실이 요구하는 통일의 대책 마련에는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
 
  3백만이나 되는 주민들이 굶어 죽었지만 북한 주민들이 이를 참아내고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북한에서 反인민적 통제와 反역사적 체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북한이라는 그 역사의 오물통 속에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半生(반생)을 살아본 나의 경험에 의하면 金正日은 민중의 복수와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체제 변화만큼은 꿈도 꾸지 않는 인간이고, 변할 수도 없는 인간이다.
 
  1997년 10월 국방위원회 명령이라는 것에서 밝힌 대로, 金正日은 중국을 비롯한 국경지역에서 渡江(도강)하는 자는 예고 없이 사격하며, 국경지역에서 사상이 변한 자들은 백만이고 이백만이고 용서 없이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다.
 
  오늘도 자기가 한번 나서면 신들린 사람들처럼 환호하고 박수를 쳐대는 軍 장령들과 군관, 병사들, 수백만의 당원들과 사로청원들의 모습을 발끝 아래로 바라보는 金正日에게 개방과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의 지시 한 마디에 수백만의 평양시 주민들이 떨쳐나서서 무슨 육상대회의 선수권을 따 가지고 돌아온 이십대의 처녀를 목청껏 환영해주는 북한이 아닌가?
 
  남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이해는 全 국민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제한적인 것으로 철저히 구별된다. 필자를 포함한 북한의 주민들이 그나마 남한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 당국이 전략적 목적 달성만 생각한 나머지 光州 시위와 임수경, 문익환 목사 訪北 등을 있는 그대로 북한 주민에게 보여 주는 실수 아닌 실수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보아서 알게 되고, 잘못된 것은 들어서 알게 된다. 임수경이 다녀간 후로 평양에서는 임수경이 입었던 T셔츠을 따라 입는 바람이 불었다. 남조선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린다는 것을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光州 시위 때 시위자들이 입고 있는 옷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민인 북한 주민들이 입고 있는 옷보다도 고급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의심의 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남조선 사람들이 자유가 없는 인간 생지옥에서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사는 날이 없다는 소리를 귀아프게 들어왔어도 정부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나면 『대단하다』는 소리를 하고, 그후에는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남과 북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對北 경수로 문제에서 북한이 제국주의를 향한 공화국의 승리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 현장인 신포 지역 주민들은 경수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남한 노동자들의 작업복만을 보고도 무엇인가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객의 쓰레기
 
 
  금광산 관광 준비과정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은 관광구역 일대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광객과 북한 주민들을 격리했다. 관광객들이 쓰다 버린 일체의 쓰레기를 전부 현지에서 태워버리도록 조처했다. 국가안전보위부 제4과가 마련한 쓰레기 처리 대책 안에 의하여, 금강산 온정리 휴게소 뒤 산에, 수입한 오물소각기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엉뚱한 문제가 발생했다.
 
  오물처리반의 몇몇 간부들이 관광객이 먹다 버린 음료수며 맥주 깡통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 예쁘기 그지없는 모양의 양철통을 두드려 펴서 약간의 가위질을 하면 쓰레받기도 되고 등잔도 되는 등 조금만 품을 들여 장마당에 내다 팔면 그 수입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오물처리반이「오물주이반」으로 변신했다. 격리를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남한 사회의 경제적 우위가 북한 사회로 흘러드는 꼴이 되었다.
 
  오물처리반 사람들이 수시로 바뀌고 또 다른 사람들이 배치되었지만 돈이 되는 남한의 빈 깡통 하나하나가 발산하는 유혹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금강산 관광객들이 북한 주민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말보다는 빈 깡통 한 개라도 더 버리고 오라고 권하고 싶다.
 
  북한으로서는 휴지조각 하나에서도 자본주의 반동사상이 묻어 들어올 수 있다고 최대한의 경계심을 강구하는 처지이다. 그러면서도 남북경협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북한의 태도와 가능한 한 단시일 내에 상대가 남한이든 미국이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끌어들이려는 金正日 체제의 새로운 대외경제 논리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머리는 혼돈스러워지고 통일 민족사의 새로운 페이지 작성에 착오를 범하고 있다. 착오란 한마디로, 북한의 실상과 본질을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면서 나름의 잣대를 휘두르는 데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정 민족의 통일을 원하고 우리 민족의 장래가 더 이상 구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바로 지금을 통일의 출발점이라 생각하고 미루지 말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쌀 대신 옥수수, 공산당 돕기 대신 주민 돕기
 
 
  우선, 굶주림에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돕는 일을 시작하자. 우리 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북에 보낸 쌀은 거의 전량 군량미로 충당되었다. 내 눈으로 목격도 했다. 국제기구에서 배급실태를 조사하러 나온다는 연락을 받고 부대에 보관중인 쌀을 배급소로 일시 보냈다가 다시 회수한 일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몇가마가 없어져 난리가 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북한에 대해 쌀도 주고 비료도 주고 있지만, 필자의 개인적 판단으로는 쌀 대신에 북한 주민들이 가장 원하는 옥수수를 주기를 기대한다. 쌀이 생기면 그 쌀을 옥수수로 바꿔서 먹는 것이 북한 주민의 실생활이다. 쌀은 金正日 체제수호의 돌격대 역할을 하는 黨, 軍, 政(정) 등 특권층 몫이다. 북한 당국이 쌀을 남용한다는 의심의 여지를 남기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옥수수를 보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옥수수 한 줌이나 라면 한 개라도 북한 주민들의 손에 직접 닿게 해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필자는 이른바 「敵地 물자」를 적극 활용하자고 주장한다. 남쪽에서 풍선에 띄워 북으로 보내는 「敵地 물자」는 軍官이었던 필자로 하여금 脫北의 動因(동인)을 제공했다. 찬물에서도 풀리는 컵라면의 맛은 꿀맛이었다. 북한 체제 수호의 精髓(정수) 분자라는 戰士들이 배가 고파서 남한에서 날려보낸 풍선에서 떨어지는 과자 봉지를 일일 천추 기다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음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한국의 각 가정에서 예전에 국군 장병에게 위문품을 보냈듯이 라면, 초콜렛, 스낵과자, 라디오, 볼펜, 옷 등을 실은 풍선 수천 개, 수만 개를 북으로 띄워 보낸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남에서 보낸 「敵地 물자」는 내 경험에 의하면 황해도에서부터 평안북도까지 광범위하게 떨어졌다. 북한의 하늘이 南에서 보낸 식량 실은 풍선으로 가득찬다면, 북한 당국이 설령 그 속에 毒(독)이 들어 있다고 악선전을 하더라도 외면하는 북한 주민들은 없을 것이다. 동화같은 이야기라 말할지 모르지만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사랑과 정성을 깨닫게 되리라고 믿는다.
 
  남한을 안다는 것, 그리고 남한 국민들의 사랑을 북한의 주민들이 깨닫는다는 것, 이것이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껏 인민들을 속여온 金正日이 북한의 이천만 동포들로부터 고립되는 길이며 金正日 체제가 멸망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태어날 때부터 남한에 대해 악선전만을 들어온 북한 주민들이 南에서 풍선을 통해 보낸 물건들을 받았다고 해서 남한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의식을 무턱대고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한 물건을 좋아하면서도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이게 북한의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주민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세뇌작전의 영향도 있지만, 굶주림에 처한 북한 주민과 북한 군인들이 한국 물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 무관심해 온 남한의 실수(?)도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軍官 시절, 나는 戰士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보라, 옷가지에도 녹음기에도 심지어는 사탕봉지에도 영어로 된 상표가 붙어있다. 남조선이 美帝(미제)의 식민지라는 여실한 증거가 이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물건 치고 외국상표를 붙이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속옷까지 미국에서 만든 물건을 수입해다 쓰는 남조선은 철저한 예속국가며 식민지 국가다』
 
  남한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웃을 사람들이 많겠지만, 남한은 美帝의 식민지이고 사람 못살 세상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북한 사람들의 입장으로는 충분히 설명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군관이었던 나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북한의 모든 언론과 정치기관들, 사회 각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강연과 모임 때마다 대표적 실례로 들고 나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미개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판단력이 단순한 북한 주민들을 상대하려면 보다 세심한 배려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의무와 양심의 문제
 
 
  두 번째, 우리 정부는 중국에 있는 脫北者들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중국의 脫北者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시사토론에 연연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脫北者들이 난민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그들이 우리의 형제이고 자식이라는 주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우는 자식에게 젖 한 모금 먼저 물리고 철없는 자식의 응석이나 투정질에 무모할 만큼 어리석어지는 것이 우리들 어머니의 자세가 아닌가?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 죽어 가는 자식들이 대한민국을 어머니라 부르며 어머니의 품을 열애하는데 누구의 눈치를 보고, 누구의 법을 따질 만큼 우리의 어머니는 냉정한 분이었던가?
 
  脫北者들을 하루빨리, 한 명이라도 더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북한 주민들에게는 희망이고 金正日에게는 아픔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脫北者들을 한 명이라도 더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이 늘어나며 그것은 북한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 1980년대 대학가에 주체 사상을 확산시킨 「강철 서신」의 저자 김영환씨와 前 「말」지 기자 조유식씨가 썼다는(조선일보 10월9일자) 사상 전향서를 펼쳐들고 남한의 대학가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한때의 남한 학생운동은 그 존립 자체가 對南적화 통일론을 고집하는 북한체제에 힘을 실어주고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는 꼴이 되었다.
 
  남한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북한은 보란 듯이 자유 없는 남한, 민주 없는 남한을 들먹이면서 겨레의 해방을 부르짖었고 군사력 강화와 힘의 배양을 국민에게 호소했었다. 저들에게서 직접 임무를 받았고 저들에게서 공작금을 받아 저들의 입장을 옹호하던 지난날 투사들의 의식변화 앞에서 북한의 정치반동들이 취할 행동은 불을 보듯이 뻔하기만 하다.
 
  남한 국가정보원의 조작, 내지는 날조,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남한의 운동권 중심 학생들을 對南 적화통일의 동지적 자리에서 변절자의 위치로 추방하고 또다른 동지를 노동운동이나 시민단체들 속에서 모색할 수밖에 없는 북한을 향하여 대학가는, 남한의 청년학도는 진정한 통일운동의 기수가 되라! 그것은 잘못된 과거와 두려움 없이 갈라서는 길이며 북한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는 길이며 겨레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길로서 국민의 지지와 역사의 박수를 받는 길일 것이다.
 
  남한의 10대가 각성하는 것 또한 주목하고 지켜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통일을 먼 날의 일로 생각하고 북한을 강 건너 나라로 바라보는 10대의 안이한 시각은, 저들이 통일한국의 주인공들이며 저들이야말로 통일 한국을 떠메고 나가야 할 역사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망각한 잘못된 처사이고 형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반쪽이 된 이 나라를 하나로 하고, 굶어죽는 북한 주민들을 구원하는 일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의 10대가 자라 國政(국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이끄는 그날, 불쑥 다가온 통일이라는 민족의 사변 앞에서 할 말을 못 찾게 되는 10대가 되지 말고 지금부터 꿈과 희망을 안은 통일한국의 싱싱한 기수들이기를 원한다.
 
  그것은 또 다른 말로 이 나라의 절반 땅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고, 당신들이 마시는 콜라 한 병 값으로 북한 주민 한 가정의 하루 식량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속은 자의 권리로 속인 자를 용서 못한다
 
 
  무슨 운동을 향하여서는 침묵하기 잘하는 예술인들, 아니면 극장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고서는 나서기를 꺼리는 남한의 가수들, 지난 세월 당신들의 정열에 찬 노래가 북한의 全지역에 남한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는 폭풍이 되고 불길이 되어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는 바뀌어도 노래는 남고 진리는 산다는 사실 앞에서 당신들이 할 바를 스스로 찾자. 사랑과 인생, 인생과 사랑을 논하는 노래가 많은데 반하여 통일에 대한 노래, 민족의 숙원을 노래하는 노래는 너무도 적은 오늘의 현실 앞에서 예술가들이야말로 역사의 유형과 유행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북한 주민들을 불행과 고통에서 구출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한다는 마음가짐이 남한의 거리와 마을에 넘쳐흐르고 어머니들이 준비하는 가정의 밥상마다 통일의 소원이 국그릇처럼 얹혀진다면 통일은 올 것이며 이 나라의 부모들이 유산처럼 물려주는 민족분단의 고통은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살자. 그렇게 살기를 누구나 희망하자. 분단 반세기 동안 통일을 위해 일했다는 정치가들과 이론가들의 허다한 말들이 사실상 이론과 바람으로만 남은 꼴이 되어 버린 이 마당에서 다시 일어나는 우리가 되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자.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기저에 궁핍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담겨지도록 의무와 양심을 다하는 우리가 되자.
 
  대통령과 정부가 도맡아 할 일도 아니거니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도 않은 이 일은 남한의 전체 국민이 일치 단합해야 성사 가능한 일이다.
 
  3백만의 주민이 굶어 죽어가는 오늘의 현실이야말로 북한 주민 전체를 운동가로 만들고 사상가로 만들기에 적중한 시기라고 생각해 본다.
 
  몰라서 미개하지만 일단 깨달은 사람이 되면 전체가 항거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의식, 너무도 철저하고 크게 속은 탓에 저마다 바보같지만 일단 사실을 깨닫게 되면 속아온 과거가 너무도 분하여, 속은 자의 권리로 속인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북녘땅 내 고향 백성들의 순수함, 그리고 마지막 희망인 그들의 정의감에 상응하는 남한 정부의 전략적 대책과 전체 국민의 단합된 마음에 내 고향 사람들의 구원을! 민족의 통일을 엎드려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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