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피와 눈물로 쓰게 하옵소서, 그리고 피와 눈물로 읽게 하옵소서. 죄 많은 生을 살아온 내 민족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3백여만 명은 굶어죽어 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령님에게 자기 도리를 다했습니다. 이제는 장군님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편집자 注> 이 글은 북한 평안남도 쬎쬎시에 사는 40대 북한 남자가 지난 4월 말에 쓴 글로 밝힐 수 없는 경로를 통해 月刊朝鮮에 전달됐다. 月刊朝鮮은 그의 手記(수기)에서 신변보호를 위해 이름과 고향을 밝히지 않았고 地名도 지웠다. 여기 실린 글은 그가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기되 일부 표현은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한글 맞춤법에 따라 수정했고 漢字를 倂記했다.
한 많은 人生<편집자 注> 이 글은 북한 평안남도 쬎쬎시에 사는 40대 북한 남자가 지난 4월 말에 쓴 글로 밝힐 수 없는 경로를 통해 月刊朝鮮에 전달됐다. 月刊朝鮮은 그의 手記(수기)에서 신변보호를 위해 이름과 고향을 밝히지 않았고 地名도 지웠다. 여기 실린 글은 그가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기되 일부 표현은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한글 맞춤법에 따라 수정했고 漢字를 倂記했다.
<아침은 참자! 점심은 건너뛰어라! 저녁은 그냥 자자! 그럼 내일은? 두고 보아야 안다의 교차 속에서 흘러간 세월─그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죄 많은 生(생)을 살아온 내 민족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쓰는 이 글을 눈물로 쓰게 하옵소서. 피로 쓰게 하옵소서. 눈물로 읽게 하옵소서. 피로 읽게 하옵소서. 내 형제 자매들 더는 죽지 않게 붙들어 주옵소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평안남도 쬎쬎시 쬎쬎동 쬎쬎쬎>
나는 1952년 평양시 ○○구역 ○○동에서 아버지 ○○○과 어머니 ○○○의 둘째아들로 조국이 시련을 겪던 준엄한 시기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총포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성장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의 북새통에 시달리며 총포 소리에 놀란 불행아의 운명 탓인지 모르게 길지 않은 인생을 남보다 몇 갑절 더 힘겨운 가시밭길을 헤쳐왔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사십 소리를 하던 때 벌써 어머니와 동생, 아내와 아들 딸 세 남매를 굶겨 죽이며 한 많은 세상을 살아왔다.
구사일생으로 오늘까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앞날에 대한 운명의 담보가 없고 이 땅에서 굶어 죽는 문제는 시간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나는 遺言(유언)이라도 남겨두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내가 걸어온 위험천만한 길을 우리 형제 자매들이 지금 이 시각도 부지런히 걷고 있으며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의 노예가 돼야 기아사태가 끝나려는지 막막하기만 하기에 나는 유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솟구치는 분노를 누를 길 없다. 그러나 내가 이제 와서 소리친다고 하여 골수에 사무친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요, 재난의 원흉들에게 주먹질을 한다고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내와 아들 딸들이 살아서 나의 품에 돌아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자그마한 한 가정도 먹여 살리기 어려웠던 나의 지난날을 감안할 때 2천3백만이라는 대가정을 그런대로 먹여 살려온 우리 수령님과 친애하는 장군님의 노고가 다소 이해되기도 한다.
다만 나라의 대문에 빗장을 지르지 않고 軍費(군비)경쟁과 우상화 놀음에 그 귀중한 외화를 탕진하지만 않았더라면 나의 혈육들 중에서 다만 한 명이라도 혹시 살아남아 나와 함께 나름대로 사는 날까지 살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저의 소원은 우리 북조선 인민들이 굶주림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럼 너의 두 번째 소원은 무엇이냐?』 하시면 『두 번째 소원은 우리 북조선 인민들이 굶주림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 『그럼 너의 세 번째 소원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의 세 번째 소원도 역시 우리 북조선 인민들이 굶주림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먹는 문제로 이야기꽃 피워 위안받기도
「굶주림!」, 이 세 글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끌어갔을까? 얼마나 많은 이 나라 아이들의 웃음을 빼앗아 갔을까? 「굶주림!」 얼마나 많은 이 나라 어머니들의 피눈물을 뽑아냈을까? 얼마나 많은 이 나라 백성들을 범죄자로 만들었을까?
인간들에게 있어서 먹는 문제는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大事(대사) 중에서 가장 큰 대사를 천하지대본이라 일컬었으니 먹는 문제를 소외시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우리나라에서 가정과 일터에서 때없이 일어나 논하는 괴이한 논쟁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살기 위하여 먹느냐? 먹기 위하여 사느냐?』하는 것이다. 이런 논쟁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벌어지는데 나는 이 논쟁의 마당에서 언제나 「살기 위하여 먹는다」고 대답을 하였다.
동물과 달리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순수 먹는 멋으로 산다는 것은 어쩐지 유치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쟁론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주요 원인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제한된 식생활을 해오기 때문에 체력의 저하로 항상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그리워하고 그런 것을 한 번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도 육류와 기름을 자주 먹을 수 없고 소금과 간장으로 남새(채소)만 삶아 먹으니 『아마 내 밸을 꺼내서 햇빛에 비쳐보면 저 앞집이 내다보일 거요!』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셨기 때문이다.
넉넉지 못한 식량사정과 주요 부식문제에서 비롯된 사람들의 먹는 소리는 일터와 가정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육류, 기름, 달걀, 두부, 콩나물 같은 것은 1년에 다섯 번 정도 맛보는 형편에서 살아온 체력이고 보면 먹는 소리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위안을 스스로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 하나의 훌륭한 방책이다.
일터에서는 휴식참이면 누구든지 먹는 문제를 기본으로 이야기 꼭지를 떼는데 어디 갔다가 누구네 집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얻어먹고 왔다는 자랑을 하는 것이 하나의 추세이다.
아이들도 키워보면 소꿉놀이를 놀아도 먹는 놀이를 놀고 이야기를 주고 받아도 오직 먹는 소리로 생활을 이어간다. 아이들의 끝없는 童心(동심)의 세계를 따라가노라면 마음이 서글퍼지고 어떻게 하면 저 애들을 소원대로 실컷 먹여보나 하고 생각을 해 보지만 나는 일생에 크게 내 소원을 성취해 보지 못하였다.
나는 이 글을 정말 괴롭기 그지없는 상태에서 쓰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사연들과 이제는 잊고 있어서 가슴속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 갈 때 속속들이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지난 날을 거슬러 돌아가야 하니 은근히 두려워진다.
먹는 환상을 펴다 지치면 잠들고…
간장, 된장, 소금마저도 넉넉지 못해 아우성치고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과 못 먹는 음식이 없는 세상을 나의 무딘 붓끝으로 옮겨 놓는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열심히 써야 한다는 숭고한 의무감만은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나의 이 글이 미혹한 점이 있다 해도 읽는 이들은 널리 이해하여 주시길 믿는다.
나의 유년시절은 배고픔 속에서 흘러갔다. 배고픔으로 시작되고 배고픔으로 끝난 내 일생은 우리 가정의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공화국의 역사와 따로 볼 수 없는 역사다.
내가 열 살 나던 1960년대는 배급을 수수쌀로 받았다. 가공업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수수죽을 먹자면 깔깔한 껍질이 목에 걸려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것마저 양이 모자라 어머니는 물을 더 붓는 방법으로 식구들의 식사를 조절하였다. 해 저물도록 동네 아이들과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희멀건 수수죽 한 그릇에 무김치 접시를 얹어주었다.
해는 짧고 밤이 무척이나 길던 겨울밤에 수수죽 한 사발을 게눈 감추듯 먹어버리고 밤을 보내기는 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