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1978년부터 편찬 사업에 들어가, 1991년 총 27권이 완간된 「民百」(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88 서울올림픽과 더불어 광복 후 2大 문화적 성과로 꼽힌다. 단위 민족대백과사전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내용이 풍부한 「民百」은 연인원 3만5천명의 집필자, 6만5천여 항목에 원고매수 42만 매, 도판자료 40만 종 등 1백73억원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무엇보다도 「民百」 사업의 성공은 國力을 기울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李成茂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37년 충북 괴산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국민대 교수 역임. 1981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 역임.
광복 이후 2大 문화사업李成茂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37년 충북 괴산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국민대 교수 역임. 1981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 역임.
정신문화연구원에 의한 「民百」(민백·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출간은 88 서울올림픽과 함께 광복 이후 2大 문화사업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불행히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문화를 현대의 관점에서 총정리하지 못했다. 광복 이후에도 국가가 多事多難(다사다난)하여 민족적인 역량을 기울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편찬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경이적인 발전에 힘입어 1980년대에 이르러 민족적인 숙원사업을 국가의 주도하에 이룩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항목의 누락이나 내용의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계속적으로 수정 보완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정문연(精文硏) 편찬부장으로 있을 때만 해도 이러한 방대한 문화사업을 벌이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말들이 많았고 서술 내용의 부실을 트집 잡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첫술에 배부른 법이 없으며, 잘못된 점은 계속 찾아내어 수정해 나가면 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한 자체 내에서도 자주 세밀하게 검토하여 2002년(발간 10년 후)에 새로운 사전을 낼 때 모두 수정·보완할 작정이라고 했다.
「民百」의 자랑거리는 단위 민족대백과사전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백과사전이라는 점이다. 세계대백과사전은 선진국의 것이 앞서지만 단위 민족대백과사전으로는 「民百」이 제일 크고 내용이 풍부하다. 이는 국력을 기울여 야심적으로 이 사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民百」은 故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편찬하게 되었다. 朴대통령은 자유당·민주당 정권을 조선시대 文治主義(문치주의)의 부작용으로 만연한 黨派(당파)와 같은 존재로 규정했다. 따라서 5·16 군사혁명으로 수립된 제3공화국은 武治主義(무치주의)에 바탕을 둔 보다 강력하고 주체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대두된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다.
한글 창제에 버금가는 사업
民族的 民主主義(민족적 민주주의)는 농본주의의 결과인 가난과 문치주의의 결과인 文弱(문약)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국가와 사회를 이룩하자는 슬로건이었다. 만성적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 대신 상공업을 바탕으로 한 고도성장을, 文弱(문약)을 극복하고 자주국방을 성취하기 위해 중공업을 일으켰다. 朴대통령은 성장과정에서 찌들 대로 찌든 가난과 힘이 없어 남의 식민지가 된 한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껴 이를 타개하는 데 전력을 경주했다. 새마을운동과 민족문화의 중흥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민족중흥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문화의 창달을 꾀하였다. 대학에 국사과목을 교양필수로 정하는가 하면 국사학과, 국사교육학과, 한문학과를 증설하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우리 고전을 국역하게 했다. 그리고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설하여 민족문화의 정수를 발굴하여 국민교육에 활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민족문화의 유산과 업적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문화창조의 기반으로 삼고, 우리 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顯揚(현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朴대통령은 開院(개원) 직후인 1978년 12월15일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을 精文硏(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명했다. 이 사업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버금가는 대사업으로서 1770년(영조 46년) 「동국문헌비고」 편찬 이후 2백여년 만에 편찬되는 우리의 백과사전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지식인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항목 선정의 문제
곧 한국대백과사전(가칭)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겸임토록 했으며, 실무는 정문연(精文硏)에서 맡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9년 2월14일에는 朴대통령이 문교부 연두순시에서 백과사전 편찬계획 수립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재차 강조했다.
精文硏에서는 3월12일에 학자 및 전문가들과 의논하여 백과사전 편찬계획안을 수립했고, 4월12일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칭) 편찬발간사업 추진계획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民百」 편찬을 위해 1980년 3월18일에 精文硏 산하에 사전편찬부를 설치했다. 사전편찬부에는 편찬 원고를 다루는 편수실, 자료 수집을 담당하는 조사실, 행정업무를 지원하는 운영과를 두었다. 그리고 초대 편찬부장에는 李箕永(이기영) 박사가 임명되었다. 역대 편찬부장에는 이기영·이명구·송병기·손인수·이기원·박성수·조동일·이성무·이서행·백태남 등이 임명되었다.
「民百」 편찬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1년 4월28일에는 精文硏 부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편찬위원회와 편찬부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분과별 편집위원회를 두었다. 이 중 분과별 편집위원회는 36개 분야로 나누어 항목 선정, 집필자 선정, 원고 교열을 담당했다. 실로 이 사전을 편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문역할을 한 셈이다. 3백78명의 편집위원들은 斯界(사계)의 대가들로 구성되었다.
사전 편찬에는 무엇보다 항목 선정이 중요하다. 많은 항목 중에서 어떤 항목을 「民百」의 항목으로 선정할 것인가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특히 외래문화와 민족문화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예컨대 4書5經은 중국책이기는 하지만 前近代(전근대) 시대의 한국 지식인들이 널리 읽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문화활동을 했으니 항목에서 제외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4書5經 항목은 간단히 서술하고 4書5經에 대한 한국인의 해설이나 새로운 견해를 더 비중 있는 항목으로 다루었다. 민주주의와 같은 항목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舞踊(무용)과 춤 중에서 어느 것을 항목으로 채택하느냐는 문제도 대두되었다. 「무용은 일본 용어이고 춤은 전통 용어이지만 일본 용어를 다 빼면 무엇이 남겠느냐」는 견해와 「舞는 너울너울 추는 춤이요, 踊은 깡충깡충 뛰는 춤인데 그냥 춤으로 통일하면 자세한 분류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일합방은 일제의 의도가 배어 있는 용어이니 일제의 한국병탄이라고 해야 된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리고 인물은 어느 시기까지 수록해야 하느냐도 문제였다.
항목의 분류도 다양했다. 특대 항목에는 한국민족문화의 한 분야를 통관하는 개관항목, 한국민족문화의 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획항목, 지방문화의 특성을 부각하기 위한 향토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항목은 특대·대·중·소 항목으로 나누어 각각 원고매수를 지정하여 주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집위원들의 항목선정이 있은 후에도 몇년 동안 계속적으로 전문가와 편찬요원들이 회의를 거듭했다.
항목마다 집필자 이름 명기
다음은 원고집필 문제다. 집필은 많은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전용을 원칙으로 했다. 단 어려운 용어나 특수용어는 괄호 안에 漢字(한자)나 외국어를 넣어 주기로 했다. 학설상의 차이는 되도록 객관적으로 서술하되 조정이 잘 되지 않는 것은 두 학설을 아울러 소개하기로 했다. 집필의 편의를 위하여 관련 자료를 적시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원고가 잘 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