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요녕성 현지 인터뷰

골수 노동당원 김영철 교수의 金正日 타도 전략

  • : 김동현  d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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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주민은 굶어죽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학살자 金正日과 黨이 동포 3백만을굶겨죽이고 있는 것이다』
김영철씨(48)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만한 말은 극구 삼갔다. 녹음기를 꺼내자 그는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중국 요녕성의 한 가옥에서 만난 그에게 녹음 내용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녹음을 시작했다. 그의 신분에 대해서도 일체 사실대로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金日成大를 졸업했고 교원이었으며 당 간부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대학 동창, 군대 동창들을 통해 북한 고위급의 동정, 일반 주민들의 생활실태를 잘 알 수 있던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밝히기로 했다. 또 그의 고향, 가족 사항도 일체 공개하지 않는다.
 
  우선 그의 글을 읽은 소감을 말하자 그는 『착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며 입을 열었다.
 
  『어진 사람, 융통성 없는 사람, 노약자들이 먼저 갔어요. 그들은 黨(당)이 어떻게든 살려주겠지 하고 믿었던 겁니다. 굶는다는 게 정말 참을 수 없는 겁니다. 제 체험에 의하면 세상에 배고픔보다 더 악독하고 징그러운 살인귀는 없습니다. 밥은 한 그릇인데 먹어야 할 사람이 열 명이라면 한 명만 살고 아홉 명은 죽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도 나눠 먹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나눠먹는 일도 파탄됩니다. 양보할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것은 필연코 피비린내 나는 殺人(살인) 경기가 되고 맙니다』
 
  金씨에게 눈앞에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을 직접 보았느냐고 물었다.
 
  『숱하게 봤어요. 대부분 얼굴이 검어지지요. 마지막 죽을 무렵엔 두어 번씩 짐승소리같이 「아~ 아!」 하는 고함을 지르고 쓰러집니다. 굶어 죽는 사람은 누군가 치워주길 바라는 것인지 사람이 몰리는 역전·장마당에 가 최후를 맞습니다』
 
  金씨는 手記(수기)에서 북에 남은 자신의 딸이 이 겨울에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평생 이산가족으로 살아도 좋다는 글을 썼다.
 
  『꿈에도 그애 생각뿐입니다. 저만 살자고 이렇게 나왔는데…. 북에서 제가 산나물을 뜯으면서 힘이 들 때마다 그 애가 저를 부르는 안타까운 소리를 듣고 힘을 내곤 했습니다. 그래도 家長(가장)이라 저 혼자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 해볼 일은 다 했습니다. 실제 굶주림이 극에 달하면 가족이 짐이 됩니다. 한 남자는 아내가 죽자 새 여자를 맞았지요. 그런데 늘 자기 친자식이 구박받고 짐이 됐어요. 여섯 살 아이를 끈으로 묶고 입에 재갈을 채운 뒤 집에 있던 통 속에 넣어두고 굶어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모질어 그 아이의 울음을 옆집 사람이 듣고 꺼내주었습니다. 이런 얘기들이 온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면서 눈에 핏발이 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20세기 말의 이 세상 文明人(문명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얘기를 제가 꺼내는 것은 수백만의 굶어죽은 혼령들이 제 입을 열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행복 중 가장 큰 행복이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란 얘기를…. 중국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이들에게 속으로 말합니다. 「북조선 생활 한 달만 해보라」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참대(竹) 같은 자존심이든, 의젓한 인격이든, 뽐낼 만한 지식이든 다 꺼내 바칠 테니 제발 죽 한 그릇만 달라고 울어버릴 겁니다. 세상 설움 중 가장 큰 설움이 배고픈 설움입니다』
 
 
  노동당과 場마당
 
  그는 굶주림의 끝에는 절망이 오고 그 다음에 증오가 오더라는 얘기도 했다. 그의 경우 증오의 대상은 金正日로 대표되는 黨이었다. 그는 『배급경제 체제에서 배급을 끊은 것은 곧 백성에 대한 金正日 당의 학살행위』라고 규정했다.
 
  『1996년부터 배급이 줄어들었고 1997년부터는 완전히 중단됐습니다. 처음 1년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혼란이 오더군요. 「장군님은 우리가 쓰러지는 걸 보시면서 더 큰 복수(남조선·미국에 대한)를 계획하고 있다」는 식의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배고픔은 뒷전에 두고 前線(전선) 시찰만 다니는 金正日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金正日이가 전쟁을 결심하지도 못하면서 백성들만 죽어나가게 되니 오히려 金正日이 敵(적)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어요. 일터에 나가도 배급이 없으니 북조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당에서는 「당은 인민을 버리지 않는다. 일시적 난관이니 조금만 참으라, 인차(곧) 쌀이 온다」고 주민들을 속였습니다』
 
  그는 그런 말에 순진한 인민들이 넘어가 결국 허기져 죽고 말았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黨은 계속 거짓말을 했다는 것.
 
  『집집마다 黨이 배급을 곧 주리라 믿고 家藏什物(가장집물)을 팔기 시작했고 곧 거덜이 났습니다. 그때쯤에서야 黨에서 하는 소리가 「이제부터는 식량공급이 없다. 自力更生(자력갱생)만이 살 길이다」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날고 뛰는 장수라도, 요술장이라도 제 돈이 없으면 꼼짝못하고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공공연한… 노골적인 대학살 만행이었습니다』
 
  ─배급 중단을 알려준 그때 주민들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정말 당황했습니다. 이 나라 실태를 미리 말할 것이지 손도 쓸 수 없이 만들어놓고 스스로 살라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인민들은 뭐든지 내다 팔려고 장마당을 나갔지만 당에서는 안전부를 내몰아 장사를 못하게 했고 밥도 안주면서 직장 출근을 强迫(강박)했습니까. 정말 이런 기막히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때 어질고 고지식한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다가 숱하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더 많은 이들이 장마당에 나갔고 그들은 안전원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동당은 쌀을 주지 않지만 場마당은 죽이라도 주었습니다. 장마당은 노동당보다 더 위대한 黨이 된 것입니다』
 
 
  北조선은 자본주의와 강도주의의 합작
 
  金씨는 노동당원이다. 스스로 1996년 이전까지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인민이 단결하면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다. 그는 노동당의 실책을 이렇게 말한다.
 
  『金正日과 노동당은 1996년도를 놓치지 말았어야 합니다. 이 무렵만 해도 사람들의 정신사상 상태가 좋았고 각 가정마다 밑천도 있었고 원기도 있었습니다. 이때라도 당에서 말했어야 합니다. 「현재 나라의 쌀 창고가 비었다. 우리 당에서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오직 시간뿐이다. 조국의 大地(대지)와 바다로 나가 자력으로 살아라. 한 사람도 낙오자가 없으리라 굳게 믿는다」 이런 귀띔을 해주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외국 쌀을 받지 않고도 굶어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배급이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각자 자기 가족 살리기 운동을 벌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가족은 사회의 세포입니다. 세포를 살리는 운동은 누가 교양을 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金正日에겐 2천3백만의 생명보다 유령 같은 농업 지도체계가 몇천 배 귀중했던 것입니다. 저도 自力으로 살아보니 제 스스로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합니다. 북조선에서 쥐라도 잡는 날은 큰 잔치하는 날처럼 여겨집니다. 부끄러운 얘깁니다만 저는 밤마다 변소에 앉아 쥐낚시를 했습니다. 고양이가 보면 놀랄 모습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사회주의자로서 48년의 삶을 살아온 그에게 黨의 배신은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뼈를 깎아서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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