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는 포르노보다 정서적 교감 담은 로맨스 소설이나 야오이 좋아해
⊙ 포르노의 환상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前戱를 위해 존재
이은정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철학박사.
⊙ 동국대 철학 강사.
⊙ 논문: <정신분석학의 현상학적 비판-앙리, 프로이트, 라캉> 등.
⊙ 포르노의 환상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前戱를 위해 존재
이은정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철학박사.
⊙ 동국대 철학 강사.
⊙ 논문: <정신분석학의 현상학적 비판-앙리, 프로이트, 라캉> 등.
그러한 남자의 판타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포르노이다. 거기에는 사랑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제거되었다. 상호교감이라든가, 감정의 유대라든가 하는 것들은 섹스에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성가신 요소이다. 거기에는 반대로 남자의 성적(性的)쾌락을 극대화하는 요소로 가득하다. 그러한 요소를 우리는 ‘환상’이라 한다. 포르노를 통해 남자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거기 있다.
포르노하고 싶은 여자? 여자의 ‘성적쾌락 향유권(享有權)’에 대한 남자의 이중적 태도는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남자는 한쪽으로 여자의 성해방을 부르짖으며 “즐기라!”고 권고를 넘어 명령하지만, 다른 한쪽으로 여자의 성적쾌락 향유권을 거부하고 자녀를 돌보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어머니이자 남편을 살뜰히 내조하는 아내로 여자가 구실을 해 주기를 요구한다. 여자의 성해방뿐 아니라 아내의 모성애(母性愛)와 내조는 남자의 성적쾌락에 이중으로 이바지하게 된다.
여자의 성적쾌락 추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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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미남 남성들의 동성애를 다루는 일본의 야오이는 여성들에 의해 소비되는 ‘여성 포르노’이다. |
많은 남자는 여자의 성적쾌락 향유권과 성폭력을 혼동한다. 이는 ‘여자는 즐길 권리가 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의 권리를 실천으로 옮겨 주겠다’는 논리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여자의 성적쾌락 향유권에 포함된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선두에 있으면서, 여자의 성적쾌락 향유권을 주장하는 데 앞장선 사드는 이 둘을 모두 명시한다. 사드는 말한다.
“네 몸은 네게 속해, 너 혼자한테. 그것을 즐길 권리를 갖는 이는 세상에 너 혼자뿐이야. 그리고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그것을 즐기게 할 권리를 갖는 이 또한.”
성적쾌락 향유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은 함께 가며, 이 둘을 따로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요구해 온 자애로운 어머니, 얌전한 아내 상(像)에 맞게,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의 성적쾌락 향유권을 박탈당해 왔다. 그와 함께 여자의 성은 베일에 감춰지고 부정되었다.
포르노하고 싶은 여자? 나는 상식에 반해서 얘기하고 싶다. 여자도 포르노하고 싶다면? 단지 성적으로 즐기고 싶다면? 단지 자신의 몸을 누리고 싶다면? 자신의 몸이 주는 모든 쾌락을? 로맨틱한 장밋빛 사랑이 아닌, 포르노를? 쾌락을 위한 쾌락을?
여자는 이제 좀 더 당당하게 자신의 몸을 즐기고 싶어한다. 그와 함께 여자의 쾌락이 점차 수면으로 떠오른다. 여자는 어떻게 즐기는가? 왜 많은 포르노는 여자한테 실패할까?
슬래시와 야오이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적잖은 수의 여성이 또한 남자의 포르노를 자신의 방식대로 즐기기도 한다. 또는 ‘슬래시’나 ‘야오이’ 같은 자신의 포르노를 직접 만들기도 한다.
‘여성들의 포르노그래피’로 알려진 ‘슬래시(slash)’나 ‘야오이(やおい)’는 모두 남자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여자가 쓰고 여자가 주요 소비자라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슬래시’는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기존 드라마나 소설 속 남자 캐릭터를 커플로 등장시키며,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성적 묘사가 진하다. ‘슬래시’라는 말은 ‘커크/스포크(Kirk/Spock)’ 또는 ‘K/S’ 하는 식으로 이름 사이에 사선을 그어 두 남자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유래한 ‘야오이’는 ‘남성 사이의 동성(同性) 연애물’을 말하는데, 혹은 이러한 것들을 창작하고 즐기는 문화를 일컫기도 한다. ‘야오이’라는 말은 ‘야마나시(やまなし·주제 없음)’‘오치나시(おちなし·소재 없음)’‘이미나시(いみなし·의미없음)’라는 세 단어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꽃미남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야오이’는 한국에도 적지 않은 여성 팬이 있다고 한다.
남성의 전유물에서 여성의 소유물로. 포르노의 이러한 진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재 지속해서 늘어나는 독신 가구의 수는 그러한 현상을 어느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아직도 성보수주의 사회이다. 겉으로는 성보수주의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음성적 성문화가 판을 치는 이중적 사회이기도 하다.
그 둘은 어찌 보면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많은 젊은 독신 남녀가 외국처럼 잦은 사교적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적극 없앨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들의 만남은 매우 제한되어 있거나, 그러한 만남이 설혹 있더라도 성적 성격이 배제될 때가 잦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여성이 성에 대해 그 앞 세대보다는 더 개방적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도 고려해 볼 점이다. 현대 여성은 자신의 몸을 은밀한 방식으로 즐기는 일에 도덕적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덜 느낀다.
남자 친구가 있든 없든, 남자 친구와 함께 또는 홀로, 여자는 자신의 공간에서 포르노를 즐길 수 있다. 게다가 포르노 잡지나 비디오테이프를 구하러 예전처럼 청계천 뒷골목을 서성거리거나 기웃거릴 까닭이 없다. ‘정보의 바다’라고 말해지는 인터넷 세계는 포르노에서도 그러하다. 인터넷에는 모든 종류의 포르노로 넘쳐 난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함 없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입맛에 맞는 포르노를 클릭 몇 번으로 내려 받을 수 있다.
여성, “포르노가 지루해”
점점 더 많은 여성이 포르노를 즐기는 현실에도, 포르노를 본 많은 여자는 그렇지만 포르노가 징그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것에 대한 포르노가 존재한다”(‘인터넷 세계의 법칙 #34’라 불리는 이 법칙은 블로그, 유튜브 동영상, 트위터 피드, 소셜네트워크 사이트에서 절대불변의 신성한 진리로 통한다고 전해진다.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온갖 종류의 성적 환상을 재현하고, ‘포르노토피아’로까지 말해지는 포르노가 정작 많은 여자한테 외면당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또는 그러한 현실의 한 모습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포르노중독’이란 심각한 사회현상을 만들어 낼 정도로, 남자를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포르노의 마력이 여자한테 이르러 그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그 많은 포르노가 여자한테 실패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포르노를 재미없어하고 포르노를 보는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는 로맨스 소설이나 그러한 것을 주제로 한 TV 드라마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꽃미남이라 불리는 어린 남자들이 안방 TV를 메우고, 거기서 펼쳐지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여자의 영원한 로망처럼 얘기된다.
여자의 시각을 사로잡는 예쁜 남자는 포르노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 소비자에 호소하는 야오이에는 그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남자가 나온다. 야오이는 미소년(美少年)들의 사랑을 정서적 교감, 감정적 유대라는 바탕에서 풀어 낸다. 그들의 사랑은 우정에서 출발하였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고 결국 서로의 화합을 이루어 낸다. 그 화합은 무엇보다 정신적이며, 그들의 육체적 결합은 그렇기에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야오이는 성교(性交)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거기서 성교는 사랑을 전제로 하였기에 조금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우리는 포르노가 남자의 에로티시즘이라면, 로맨스는 여자의 에로티시즘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노는 “여자의 에로티시즘과 전혀 관계가 없는 다만 매춘부의 일거리일 뿐”(프란체스코 알베르니, 《여자는 로맨스하고 싶고 남자는 포르노하고 싶다》)이라고.
여자의 에로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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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나 젊은 여성들이 즐겨 읽는 로맨스 소설도 일종의 여성을 위한 포르노 대용물이다. |
남자의 에로티시즘, 여자의 에로티시즘을 우리는 다르게 논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여자는 ‘낭만적 존재’, 남자는 ‘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그러한 구분을 더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성적 존재로서 여자의 에로티시즘을, 여자의 낭만적 에로티시즘이 아닌 전적으로 성적인 에로티시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사랑을 전제로 한 섹스가 아닌, 섹스를 위한 섹스를, 쾌락을 위한 쾌락을. 사랑과 섹스의 이분법(二分法)을 나는 사실 더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랑’에,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에 관념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념을 ‘사랑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자.
우연히 만난 익명의 한 사람을 욕망하고 기쁨을 나누었다면, 그 관계가 지속하지 않더라도, 단 하룻밤으로 그쳤더라도, 욕망하고 기뻐하는 동안 사랑하였다고 말하는 일이 우리의 관념 속에서 ‘잘못’일지 몰라도, 거짓인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 성격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러한 기쁨에 바탕을 둔다. 그러한 기쁨 속에서 스스로 피어난다. 스스로 피어난 사랑이 대상을 향하든, 그렇지 않고 제 안에 머무르든, 대상은 사랑에, 사랑하는 일에 늘 부차적이다. 대상은 사랑의 계기일 수는 있어도, 사랑의 원인도 그 실제적 내용도 되지 못한다. 사랑의 원인은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할 줄 아는 능력, 사랑하는 힘을 사랑은 그 안에 이미 지닌다. 그처럼 힘으로서 이해한 사랑을 숭배하고 노래하던 옛 시인들과 달리 대상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잘못된 대중문화에 젖어든 현재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남자의 에로티시즘과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러한 다름에도 남자의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포르노를 즐기는 여자를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두 가지에 답하는 것으로 우리한테 허용된 짤막한 지면을 다하도록 하겠다.
포르노는 남자의 성적 쾌락을 위해 존재한다. 남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고 거기서 쾌락을 얻도록 해 주는 데 그 목적을 둔다. 그러한 쾌락에 중요한 것이 전희(前戱)이다. 전희에서 남자의 에로티시즘과 여자의 에로티시즘이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다.
포르노에서 전희는 주로 시각(視覺), 촉각(觸覺), 청각(聽覺)에 작용한다. 보는 것에서, 듣는 것에서, 만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데 전희는 근거한다. 거기서 시각적 즐거움과 청각적 즐거움이 직접적이라면, 촉각적 즐거움은 간접적이다. 우리는 실제로 만지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즐거움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
여자의 전희와 남자의 전희를 설명할 때, 여자는 좀 더 촉각과 청각에 예민하고, 남자는 시각에 좀 더 민감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둘의 전희를 단순화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시각적으로 즐기지만, 여자의 신음을 듣는 데서 또한 흥분한다. 거기서 남자의 즐거움이 청각적이라기보다 좀 더 시각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즐거움은 동등하고 동등한 강도에서 나타난다. 반면에 여자의 전희가 주로 애무를 즐기는 것으로 얘기된다면, 그래서 여자의 즐거움이 좀 더 촉각적이라고 얘기된다면, 남자의 전희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다.
포르노를 보는 여자의 심리
남자는 자신의 신체에서 한 부분, 성기(性器)에서 그러한 촉각적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하고 요구한다. 자위행위나 성교(性交)에서 자신의 손을 통한 또는 여성 질의 점막을 통한 성기의 마찰은 여지없이 남자의 전희에 해당한다. 여자의 입 또한 그러한 남자의 전희에 봉사한다. 남자한테 촉각적 즐거움은 결코 덜하지도, 덜 중요하지도 않다.
여자는 어떠한가? 여자 또한 여자의 몸을 관능의 관점에서 즐길 수 있다. 여자의 몸은 남자의 몸보다 더 관능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곧 남자한테뿐 아니라 여자한테도 관능을 좀 더 자극한다.
같은 맥락에서, 꽃미남을 좋아하는 여자의 즐거움이 또한 덜 시각적이라고 우리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의 신음은 여자를 또한 흥분시킨다. 그런데 여자이기에 여자의 쾌락과 또는 여자의 쾌락처럼 여겨지는 것과 여자는 동일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애무를 받는 여자의 쾌락을 여자는 동일시를 통해 공유할 수 있게 된다. 포르노에서 촉각적 즐거움은 결국 동일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여자가 남자의 포르노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데서다. 포르노 속 여자의 쾌락과 동일시함으로써 여자는 남자의 포르노를 남자와 다른 방식으로 즐긴다. 그러나 그러한 동일시가 또한 남자의 쾌락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포르노 속 남자의 쾌락과 동일시할 수 있다. 동일시를 통하지 않더라도, 여자는 또한 다른 방식으로 남자처럼 포르노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여자의 몸을 대상으로 한 여자의 즐거움은 좀 더 복잡하다. 여자는 다른 여자의 벗은 몸을 보는 데서, 자신의 벗은 몸 앞에서만큼이나 수치심을 느끼고 숨거나 감추려 한다. 그러한 수치심 속에 모순된 감정처럼 쾌락이 자리한다. 여자의 몸을 대상으로 한 남자의 즐거움을 받아들일 수 없는 데는 그러한 수치심과 불쾌함이 자리한다. 그 대상이 여자의 몸이 아닌 남자의 몸이라도 여자의 수치심은 남자의 수치심보다 더 크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의 수치심이 좀 더 큰 데는 여자의 관능이 남자의 관능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포르노의 환상은 남성을 위해 존재
이제껏 우리는 여자가 어떻게 남자의 포르노를 즐길 수 있는가를 보았다. 그러나 그 포르노는 남자의 포르노이다. 포르노가 여자한테 지루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 나는 포르노에서 전희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포르노는 여자의 전희보다 남자의 전희를 위해 더 존재한다. 남자의 전희가 성기 중심적이라면, 여자의 전희는 여자의 온몸이 성감대라고 말해질 정도로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이뤄진다.
포르노는 여자의 전희를 남자의 전희를 위해 보여주는 데 그친다. 이는 포르노의 환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포르노의 환상은 남자의 전희를 위해 존재하지 여자의 전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결정적으로 포르노가 여자한테 실패하는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