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軍部, YS 단식에 관심 보이는 美에 당황, 전방위 언론플레이
⊙ 金德龍 체포는 YS에 대한 보복 아닌 정치인의 활동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
취재지원 : 劉旿相 月刊朝鮮 인턴기자
⊙ 金德龍 체포는 YS에 대한 보복 아닌 정치인의 활동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
취재지원 : 劉旿相 月刊朝鮮 인턴기자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4선 의원을 지낸 이경재(李敬在) 전 방송통신위원장은 “(신군부 때는)김영삼 신민당 전 총재의 단식투쟁을 1단으로 ‘모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식으로 기사를 써야 했다”고 했다.
신군부가 YS 단식과 관련한 미 언론의 기사, 미 의회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을 봤을 때, 전두환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5공화국에 대한 대외적(對外的) 이미지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 신군부는 YS의 단식이 ‘민주주의 열망’으로 비쳐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경우 당장은 대외군사판매(FMS) 심의와 국제의원연맹(IPU) 총회 서울 유치에 영향을 미치고 멀게는 미·일의 압력이 거세질 것을 우려했다.
1980년 YS 정계 은퇴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5·17 계엄확대조치’를 발표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20일 성명을 통해 ‘5·17 계엄확대조치’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에 신군부는 곧장 가택연금 조치를 했다. 두 달여가 지난 7월 25일 이희성(李熺性) 계엄사령관은 서울주재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김영삼씨는 연금 상태인가?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런 건 사소한 문제다. 훌륭한 지도자는 사리사욕, 돈, 권력, 미녀 등이 없어야 한다. 정치지도자는 사리사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나는 묻고 싶다. 김영삼씨가 진정 사리사욕이 없었는지. 후세가 나에 대해서 민주발전을 저해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사령관의 회견 이후 YS는 8월 13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YS는 당시 박권흠(朴權欽) 대변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나는 오늘의 정치적 상황에 처하여 야당 총재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겠습니다. 나는 지난 30년간 민주당과 신민당에 참여, 이 나라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정열을 쏟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이 사람과 뜻을 같이해 온 당원 동지들과 그동안 끊임없이 성원해 준 국민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앞날에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당시 YS의 정계 은퇴 계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신군부 측은 자신들의 의도였다고 설명한다. 신군부 핵심 관계자는 1993년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김 총재의 정계 은퇴는 신군부 쪽 의도와 직접 관련돼 있다. 당시 실무 주역은 이학봉(李鶴捧)씨였다. 이씨는 김 총재의 고교(경남고) 후배인데 직접 자기가 찾아가지 못하고 대신 어떤 민간인을 시켜 정계 은퇴를 종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훗날 YS는 ▲8월 14일 김대중씨의 내란음모 등 혐의에 대한 군법회의 첫 공판이 열리고 ▲최형우 김동영 등 동료의원 10여 명이 구속 중이고 ▲신민당 해산이 임박해 있고 ▲8월 16일 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로 돼 있었던 상황에서 야당 총재였던 자신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워 스스로 내린 결단이라고 했다.
YS 斷食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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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군부의 정치 규제 조치에 항의, 단식투쟁에 들어간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단식 23일 만인 1983년 5월 18일 탈진상태로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됐다. |
연금해제 40일 만인 6월 9일 YS는 민주산악회를 결성했는데 이는 신군부와 YS가 본격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계기가 됐다. 이 산악회에 YS 지지자들이 몰려들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정치공작팀이 와해 공작을 벌인 것이다.
YS가 정국 현안에 대해 성명을 내놓는 등 본격적으로 입을 열면서 그와 신군부의 관계는 신경전을 넘어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YS는 1982년 6월 1일 다시 가택연금됐다. 직접적인 계기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YS와 함께 산행을 한 《뉴욕타임스》 기자는 정치활동이 금지된 한국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고, 당국은 이를 정치활동으로 규정하며 YS에 대해 다시 가택연금 조치를 취했다.
1년여의 연금생활을 하던 YS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꼭 3년째 되는 날인 1983년 5월 18일 단식을 선언하면서 비장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나의 단식은 5·17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되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백 수천 명의 민주시민이 광주에서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한 자책과 참회의 뜻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반민주적인 독재권력의 강화와 인권유린 및 정치적인 탄압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표시입니다. (중략) 나는 이번 단식투쟁에서 나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나 하나의 생명을 바쳐 이 나라의 민주화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최후의 봉사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감수하고자 합니다.>
YS의 단식이 당시 재야는 물론 제도정치권에 미치는 영향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신군부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994년 3월 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1983년 5월 22일 YS 단식과 관련, 안기부는 긴급 당정대책회의를 열고 YS 측근들에 대해 1 대 1로 달라붙어 단식의 여파가 더는 확대되지 않도록 하고 김씨 측근 중 김동영씨를 연행키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YS는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키로 했다.
그러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단식에 동참하는 재야인사들의 수가 증가했다. 5월 24일에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김대중(金大中)씨가 연대 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정부는 김씨의 단식을 한국민의 소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 김씨의 단식을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라. 미국은 이 기회에 전 대통령의 독재체제에 대하여 눈을 감아 주지 말고 한국에서의 민주회복 없이는 안전보장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신군부, 美 보도에 민감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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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정권은 해외 언론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관련 보도를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
이날 주 LA 총영사는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에게 전보(電報)를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LA TIMES 지는 5월 25일 단신란에 김영삼 부인 말을 인용, 일주 전 민주개혁을 요구하면서 단식에 들어간 김영삼은 약 20명의 형사에 의해 병원으로 강제 이송됐다고 보도했음.〉
같은 날 주 시카고 총영사도 <5월 25일 자 《CHICAGO TRIBUNE》 지는 11면 1단에 김영삼씨가 자택에서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20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와서 김씨를 강제로 병원으로 압송해 갔다고 김씨 부인의 말을 인용 보도함>, 주 시애틀 총영사도 <5월 25일 자 《TACOMA NEWS TRIBUNE》 지는 김영삼의 입원조치와 동조자들의 동정, 단식에 관한 기사를 서울발 AP 인용, 각 1단으로 보도하였음>이라고 보고했다.
다음 날인 26일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도 <5월 26일 자 《S.F. CHRONICLE》 지는 서울 AP 통신을 인용, 김영삼씨의 단식투쟁을 강제로 중지시켰다는 내용을 21페이지 1단 3행 기사로 보도함>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미국의 해외정보국(USIA)이 전 세계의 청취자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인 ‘VOA(Voice of America·미국의 소리)’도 5월 28·29일, 양일에 걸쳐 YS 관련 보도를 했다.
이에 외무부(현 외교부) 북미(北美)과장은 5월 31일 주한 미국대사관 이턴(Eaton) 1등 서기관과의 면담에서 VOA의 YS 관련 보도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당시 면담 내용이다.
<북미과장: 지난 5월 28, 29일 VOA는 김영삼 문제에 관하여 보도하였다는 바, VOA의 한국 국내정치 문제 보도 사실에 대한 아측의 수차에 걸친 우려 표명에도 VOA가 또다시 아국 국내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보도한 데 대해 우려를 표명치 않을 수 없다.
이턴 서기관: VOA의 방송내용에 잘못된 점이 있었는가?
북미과장: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반대중이 미국정부의 견해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VOA가 국내정치적으로 민감한 성격의 문제를 보도하는 자체가 한·미 관계 발전에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이턴 서기관: 이 문제에 관하여 본인은 논평할 입장에 있지 않으며 귀하의 우려를 상부에 보고하겠다. 귀하의 우려 표명은 개인적인 견해인가 아니면 외무부의 공식견해인가?
북미과장: 금일 본인의 발언은 VOA의 김영삼 문제 보도 소식을 듣고 느낀 개인적 우려를 전달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 VOA의 김대중 문제 보도 시 미주국장 등이 귀측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고, 그 당시 아측의 입장이 국내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에 대한 VOA의 보도행위가 굳건한 한・미 관계에 플러스 요소가 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음에 비춰 봤을 때 금번 본인이 귀하와 만난 기회를 이용해 VOA의 김영삼 문제 보도 사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데 대해 상부로부터 이견이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신군부가 미 언론의 단신기사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YS 단식 문제가 불거지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까지 5공화국의 이미지 훼손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신군부는 이미지가 손상될 경우 국내의 경우 억눌려 있던 국민의 ‘민주화 욕구’가 터져 나올 것을 가장 우려했다. 시선을 국외로 돌린다면 당장 FMS 심의와 IPU 총회 서울 유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컸다. 당시 서울은 제70차 IPU 총회와 제133차 이사회 개최(1983년 10월 4~12일)를 앞두고 있었다. IPU는 각국 국회의원들의 연맹으로, 세계평화와 협력, 의회제도의 확고한 정착을 위해 각국 의회 및 의원들 간의 공동노력을 추구하는 국제기구다.
실제 외무부가 1983년 6월 만든 ‘김영삼 단식을 계기로 한 불법 정치활동 규제를 위한 정부 입장’ 문건을 보면 YS 단식 문제가 서방 언론에 비판적으로 보도될 경우 ▲미 의회 내 대한민국 비판 증대로 인한 FMS 심의, IPU 유치에 악영향 ▲미·일의 압력 증대 ▲김대중의 대정부 비판 및 동조세력의 확대 구실 제공(실제 DJ는 6월 9일 《뉴욕타임스》에 ‘김영삼의 단식투쟁’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썼다) ▲일부 재미교포 언론의 왜곡 과장 보도 ▲교민사회 내 소요사태 발생 가능성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일정 수준까지는 불관여 태도를 보이다가도, 비판이 거세지면 김영삼 문제는 소위 인권문제와 무관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安企部, ABC TV 취재 필름 압수했다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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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무부가 미국ㆍ캐나다ㆍ영국ㆍ독일ㆍ프랑스 등 해외 대사에게 보낸 ‘김영삼 근황’이라는 제목의 電文. |
<북미과장: 아측이 파악한 바로는 6월 1일 18시 현재 수차례에 걸쳐 AFKN 방송에서 김영삼 관계 보도가 있었다는바, 그간 수차례 우려 표시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와 같은 문제를 보도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바이다.
이턴 서기관: 상부에 보고하겠다. 다만 (그전에 제기된)VOA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개인적 견해를 말한다면 VOA가 독자성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미과장: VOA가 미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미 정부 견해를 대변하는 방송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 않나.
이턴 서기관: 그것은 사실이다. 다만 VOA가 독립된 보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이야기이다.>
YS 단식 보도를 둘러싼 한·미 갈등은 안기부가 YS의 단식 모습을 촬영한 ABC TV의 취재 필름을 압수하면서 고조됐다. ABC TV는 6월 2일 서울대 병원에서 단식 중인 YS(5월 18일 단식을 시작한 YS는 일주일 뒤인 5월 25일부터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단식투쟁을 펼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취재를 마친 ABC TV팀은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공항세관은 그들의 필름을 압수했다.
이에 주한 미국대사관 블레이크모어(Blakemore) 참사관은 외무부 미주국장에게 ABC TV의 필름을 압수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고, 외무부 미주국장은 문공부(현 문화부) 해외공보관 외신과장에게 까닭을 물었다.
외신과장은 미주국장에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측 조치와 관련해 대외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구체적 논리는 없으며, 이 문제와 관련한 명확한 입장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외국 언론기관으로부터 취재필름 압수조치의 이유에 관한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바 문공부 측으로서도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했다.
미주국장은 안기부 제2국장에게 이런 사실을 전했고, 안기부 2국장은 “취재필름을 내주겠다”고 했다. 미주국장은 블레이크모어 참사관에게 이러한 입장을 전달했다. 블레이크모어 참사관은 “신속한 조처에 감사하다. 사실 우리로서는 이번 문제로 한국정부가 미 언론과 새롭게 맞서게 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고 했다.
외교문서, YS 단식 사실상 16일 만에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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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을 지지한 에드워드 M. 케네디 상원의원을 설득하라는 지시를 직접 내렸다. 이와 관련한 안기부 자료. |
미 언론은 물론 해외 언론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외무부 장관은 6월 8일 미국·캐나다·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스웨덴·네덜란드·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일본·호주·뉴질랜드 대사에게 ‘김영삼 근황’이라는 제목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위 민주개혁을 요구, 5·18부터 단식 상태에 있었던 김영삼은 담당의사의 권유에 따라 6월 3일부터 영양제 투여를 받고 있는바, 동인(同人)의 근황을 다음과 같이 알리니 참고하고 귀지(貴地)에서 이와 관련한 문의가 있을 시 답변에 활용 바람.
1. 김영삼은 6월 3일부터 서울대학병원 의료진에 의하여 영양제를 정맥주사로 맞으면서 영양(일일 1000칼로리)을 섭취하고 있음. 또 동인은 냉수 대신에 보리차를 마시고 있는데 여기에는 냉수에 없는 소량의 당질, 칼슘과 광물질이 포함돼 있음. 따라서 현재 의학적으로 단식 상태가 아니며 건강 상태도 양호하고 현재의 영양투여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건강에 이상이 생길 염려는 없는 상태임. 동인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일부 허위 주장은 김영삼의 현재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임.
2. 김영삼에 대한 영양제 공급은 본인의 자유의사로 담당의사가 의학상의 소견을 전달하면서 치료를 권고하자 이에 응했던 것임. 누구도 단식을 중단토록 강요하거나 강제력을 행사한 바 없음.
3. 이상에 대해서는 서울 주재 외신기자들도 김의 용태를 직접 관찰하고 의료진으로부터 설명을 들어 확인한 바 있음.>
6월 4일 미주국장도 이턴 서기관에게 “참고로, 어제(6월 3일) 저녁으로 김영삼의 단식이 실질적으로 종식됐다. 동인은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 작일 18시 20분부터 영양주사를 맞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YS가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하여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으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그 고통과 고난의 대열의 맨 앞에 설 것입니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라며 단식 종료를 정식으로 선언한 날은 22일째인 6월 9일이다.
全斗煥 前 대통령, 케네디 상원의원 설득 직접 지시
YS가 단식 중단을 선언했지만, 신군부의 대미(對美) 언론플레이는 계속됐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막내 동생이었던 에드워드 M. 케네디 상원의원(2009년 작고)과 짐 리치(Jim Leach) 하원의원이 YS의 단식을 “숭고한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평가하며 YS 지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실제 에드워드 M. 케네디 상원의원은 YS가 단식 중단을 선언한 6월 9일 <김영삼 총재님의 위대한 헌신과 숭고한 투쟁에서, 총재님의 위대한 지도력에 무한한 찬사를 보냅니다. 저는 총재님을 계속 지원할 것을 재확인합니다. 투쟁 중 악화한 건강이 빠른 시일 내에 완전히 회복되길 기원합니다>라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YS에게 보냈다. 그는 다음 날인 10일 미국 상원 의회 연설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그보다 앞서 짐 리치 하원의원은 6월 6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YS 단식 관련 서신을 보냈다. 대략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나라의 국민이 이같이 다른 나라 사람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언제나 외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대한민국 정부가 언론통제의 조속한 철폐, 자유민주 선거의 완전한 허용 및 수용 중인 정치범 석방을 하지 않음으로써 양국 국민 간에 존재하는 긴밀한 역사적 유대가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의회에서 한국 문제를 면밀히 관찰하는 우리로서는 귀국의 훌륭한 시민의 단식투쟁에 대하여 가능한 최대한의 동정이 베풀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에 외무부 장관은 6월 14일 주미 대사와 총영사에게 짐 리치 하원 의원이 각각 YS, 전 전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낸 배경과 이들에게 국내 실정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고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날 주미대사는 짐 리치 하원 의원에 대한 보고서를 외무부 장관에게 올렸다. 보고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겼다.
<하원 인권소위 SPRUNGER 전문위원에 의하면 김영삼 김대중 지지자들과 인권단체들로부터 김영삼이 사경을 헤맨다면서 인권위에서 이 문제에 관한 청문회 개최를 요구해 왔다 함. 인권소위에 속한 짐 리치 의원은 이 문제에 관한 공개 청문회 개최는 한·미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서한을 발송한 것임. 짐 리치 의원은 공화당 소속이긴 하나 직책이 하원 인권소위 간사이기 때문에 외국의 인권 문제에 다른 의원보다 관심을 자주 표명할 수밖에 없다고 함.>
에드워드 M. 케네디 상원의원과 관련해서는 안기부가 나섰다. 안기부는 6월 29일 외무부 장관에게 “이 사안은 윗분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지시된 사항”이라며 “주미대사가 케네디 상원의원을 접촉해 자연스럽게 ‘서한이 국내에 대량 복사, 유포되어 김영삼 및 추종세력들의 활동이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용되고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했다.
외무부가 6월에 작성한 ‘김영삼 언동에 관한 정부 입장’이라는 문건을 보면 <북한은 김영삼 단식과 관련해 각종 유언비어, 조작 등 모략 선동 공세를 전개하여 사회불안 조성과 한·미 이간을 획책하고 해외 친북단체 및 불순 교포를 동원한 반한 활동과 아국의 정치사회적 불안정성 및 인권 문제를 국제사회에 집중 부각시키는 등 아국비방 책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고 나와 있다.
보복성 짙은 金德龍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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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10일 김영삼 민주당총재(왼쪽에서 두번째)와 박용만 부총재(왼쪽에서 세번째), 김덕룡 총재비서실장(맨왼쪽)등이 ‘영구집권음모 규탄대회’ 후 민추협 사무실 밖으로 나오는 모습. |
신군부가 1980년 11월 3일 통과시킨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1968년 이후 정치적 사회적 부패와 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다고 판정되는 사람들의 정치활동을 1988년 6월 30일까지 규제하는 것이 골자이다. 특별조치법이 제정 공포되고 나서 이 법이 적용돼 구속된 것은 당시 김 전 의원이 처음이었다. 이 법안은 1988년 7월 28일 폐지됐다.
이 내용은 6월 18일 자 프랑스의 《LE MONDE(르 몽드)》지에 실렸다. 미국은 김 전 의원의 체포를 YS에 대한 신군부의 보복으로 판단했다. 6월 20일 주한 미국대사관 블레이크모어 참사관은 외무부 미주국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시 대화록 내용이다.
“귀 정부의 김영삼 문제 처리는 매우 원만하고 능숙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김덕룡 체포 소식은 김영삼 사건과 관련한 최후 순간의 괴롭힘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김영삼씨에 대해서는 유화적 태도를 취하는 대신 그의 측근을 압박함으로써 김영삼씨에 대한 경고를 발하고 있다고 봅니다.”
블레이크모어 참사관의 견해에 미주국장은 이같이 밝혔다.
“그러한 해석은 그릇된 것입니다. 금번 조치는 정치인의 활동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부는 제5공화국 출범 후 정국 안정과 국민적 화합의 차원에서 김대중 및 광주사태 관련자 등에 대한 특사, 정치활동 피규제자 1차 해금 등 자유화 조치는 물론,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5공화국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부정하는 언동으로 행정법을 위반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관계법규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게 우리의 입장입니다.”
83년 11월 레이건 방문과 관련한 YS의 기고문 대응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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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1983년 11월 12일 오후 1차 정상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나란히 앉아 포즈를 취했다. |
<한국 민주화에 대해 미국이 도의적 지원을 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민주회복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가 정의의 실현을 위해 미국을 쳐다보지 않으면 어디를 향해야 한단 말인가. 한국 야당의 대표로서 본인은 레이건 대통령과의 면담을 원한다>는 게 골자였다. 정부는 YS의 기고문에 대한 대응방안을 적은 전보를 주미대사에게 보냈다. 전보 내용이다.
<1. 북괴에 대한 전 세계적 제재를 촉구하는 논조의 성명을 현지 친한 단체로 하여금 뉴욕타임스에 게재하도록 조치.
2. Heritage 재단의 교수로 하여금 “레이건 방한의 의의 및 방한에 거는 한국민의 기대”를 주제로 기고문 게재 유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1월 12일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했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인 1981년부터 이미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1년 9월 백악관에 보낸 친서를 보면 전두환은 <본인과 내자(당시 영부인 이순자)가 내년 서울에서 각하를 영접할 수 있는 기쁨을 갖게 되길 바란다>며 레이건의 방한을 간절히 부탁한 사실이 나온다. 2년여 만에 미국이 대통령의 방한에 응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