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5月 (1950 ~ 2000年)

  • : 서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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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조선일보 DB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제헌(制憲)국회에서 통과시킨 ‘국회의원선거법’에 의해 실시된 이 선거는 우리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의해 실시된 첫 선거라는 데 의미가 있다. 투표율은 91%였으며 개표결과 210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우익(右翼)세력과 중도(中道)세력이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여당인 대한국민당과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유효투표의 10%도 얻지 못한 데 비해, 무소속의 득표율은 63%에 달했다. 6월에 개원한 2대 국회에서는 의장에 신익희(申翼熙), 부의장에 장택상(張澤相)과 조봉암(曺奉岩)이 선출됐다.
 
 
  [1960년 5월 29일]
 
  이승만 하와이로 망명
 

  1960년 5월 29일 4ㆍ19로 하야(下野)했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하와이 망명(亡命)길에 올랐다. 그는 “잠시 다녀오겠다”며 비행기 트랩에 올랐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하와이에서 동포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면서 귀국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1965년 7월 19일 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1970년 5월 1일]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 영왕 이은(李垠) 사망
 

  1970년 5월 1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英王ㆍ英親王)이 서울에서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異腹) 동생인 그는 1907년 황태자로 책립됐다. 1907년 12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 명목으로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 간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후 중장(中將)까지 진급했다. 그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1963년 11월 56년만에 환국(還國)했다.
 
 
  [1980년 5월 18일]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 5ㆍ17계엄확대조치와 군부(軍部)의 권력장악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계엄군과 전남대 학생들과의 충돌로 시작된 사태는 20, 21일 계엄군의 발포(發砲)로 이어졌다. 이후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시민군’을 자처, 무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격화됐다. 사태는 일시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던 계엄군이 27일 새벽 광주로 다시 진입하면서 진압됐다. 5공(共) 시절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2000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나, 1995년 12ㆍ12 및 5ㆍ17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사태로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1990년 5월 9일]
 
  민자당 첫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총재 선출
  반민자당 대규모 시위 발생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김영삼(金泳三)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金鍾泌)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청와대에서 3당 통합을 선언했다. 같은 해 5월 9일 세 당을 통합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은 첫 전당대회를 열고 총재에 노태우 대통령, 대표최고위원에 김영삼을 선출했다. 이날 오후 서울 도심에서는 민자당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000년 5월 29일]
 
  김정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
 

  2000년 5월 29~31일 김정일(金正日)이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김정일은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와 만나 상호친선협조관계 증진에 합의했다. 이로써 1992년 한중(韓中)수교 이후 소원해졌던 중국과 북한 관계가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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