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 / 링컨의 리더십과 남북전쟁 ②

링컨, 노예제 갈등 속에서 신생 공화당의 기수가 되다

  • 글 : 한우성 재미 언론인·전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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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野人 시절 순회법원 변호사 활동… 기하학 공부 통해 연설 실력 다져
⊙ 미국, 새 영토 획득할 때마다 서북지방법→미주리 타협→1850년의 타협→캔자스-네브래스카법으로 노예제 문제 미봉
⊙ 링컨, 상원의원 선거에서 노예제 폐지론자에게 양보… 공화당 당심 얻어
⊙ 수어드, ‘구아노섬법’ 만들어 미국의 태평양 진출 이끌어
⊙ 링컨, 1858년 연방상원의원 선거 당시 스티븐 더글러스와의 토론으로 유명해져

韓佑成
1956년생.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나이트 펠로(Knight Fellow) / 《미주한국일보》 기자, (사)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 (사)김영옥평화센터 이사장, 육군 정책발전자문위원, 공군 정책발전자문위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역임 / 저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1958년에 나온 링컨-더글러스 토론 100주년 기념 우표.
링컨, 정계를 떠나다

  링컨은 연방하원의원 첫 임기를 마치고 워싱턴을 떠났다.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스티븐 로건(Stephen T. Logan)과 2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둘은 같은 연방하원의원 지역구에서 돌아가면서 출마하기로 합의했었다. 링컨이 재선에 나섰어도 미-멕시코 전쟁 비판으로 세평이 워낙 나빠 당선이 어려웠을 것이다. 링컨의 지역구는 휘그당이 연달아 당선된 곳이었으나, 링컨의 미-멕시코 전쟁 비판 때문에 같은 지역구를 물려받은 로건도 낙선했고 의석은 민주당에 넘어갔다.
 
  그런데 지난해[1848년-편집자] 대선(大選)에서 링컨이 열심히 밀었던 휘그당의 재커리 테일러 후보가 승리해 링컨의 하원의원 임기가 끝난 다음 날 대통령에 취임했다.
 
 
  야인으로 돌아가다
 
 
재커리 테일러
당시 미국은 직업공무원 제도가 없고 엽관(獵官) 제도가 관례화돼 있었다. 대선 공헌도가 높은 링컨은 연방 토지청장을 원했다. 토지청장은 막강한 권한이 있고, 더구나 영토가 서쪽으로 확장되던 때라 서부 변방 일리노이 출신인 링컨은 토지청장이 되면 많은 사람을 직접 도와주고 이들을 정치적 지지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이제는 부인과 자식들을 위해 돈도 벌고 싶은데, 토지청장은 연봉도 3000 달러나 됐다. 당시 연방의원 소득의 2배쯤 됐다. 연방의원은 연봉이 아예 없고 의회가 열릴 때 워싱턴에 있으면 일급(日給) 8달러에 지역구와 워싱턴을 오가는 출장비로 8마일(약 13km)당 8달러 받는 게 전부였다. 일리노이 변호사로 돌아가면 연수(年收) 1500~2000달러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토지청장 자리는 링컨보다 훨씬 인맥도 좋고 일찍 밥그릇 챙기기에 나선 다른 사람에게 갔다.
 
  링컨에게 미안했던 테일러 대통령은 3년 전 영국과 협상으로 영토 분쟁을 마무리하고 지난해 미국 속주(屬州)가 된 오리건의 지사(知事) 자리를 제안했다. 오리건 지사는 기본 연봉 3000달러에 복잡한 원주민 업무로 주어지는 보너스 1500달러가 추가돼 연봉 자체는 토지청장의 1.5배였다. 그러나 링컨은 고사(固辭)했다. 오리건 정계가 민주당 일색이라 아무리 지사라도 휘그당의 정치적 무덤이 될 것이며, 오리건이 워싱턴과 너무 멀어 중앙 정계로 돌아오기 어렵다고 링컨은 생각했다. 부인도 오리건이 너무 외지다며 “오리건에 갈 테면 혼자 가라”며 반대했다. 대륙횡단철도가 없던 시절이라 워싱턴에서 오리건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포장마차로 가려면 6개월이나 걸렸다.
 
  링컨 스스로는 정치 인생이 정점(頂點)을 찍었다고 생각하고 일리노이로 돌아가 변호사로 복귀했다. 그렇지만 삶은 새옹지마(塞翁之馬)였다. 이때부터 5년은 링컨을 그전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링컨이 토지청장이나 오리건 지사 대신 야인(野人)이 된 것은 본인에게도 미국에도 행운이었다.
 
 
  ‘링컨 순회법원’
 
  변호사로 복귀한 링컨은 다른 변호사들처럼 매년 2회 열리는 일리노이주 8지구 순회법원(巡廻法院)을 따라 다녔다. 당시 일리노이는 여기저기 법원을 만들 수도 없었고 송사(訟事)에 얽힌 주민들이 멀리 법원을 찾아오기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주(州)정부는 판사 1명이 변호사 10여 명과 함께 주민을 찾아 순회하는 1심 법정을 열어 민·형사사건을 모두 다루게 했다. 8지구 순회법원은 14개 카운티나 되는 넓은 지역을-경상도의 약 90%-관장했고, 철도도 없어 링컨은 말이나 1~2인승 마차를 타고 험한 길이나 초원을 지나 도시 시골을 가리지 않고 다녀야 했다. 길이 워낙 험하고 여정도 힘들어 순회법원마다 줄기차게 따라다닌 변호사는 링컨이 유일해, 나중에 이 법원은 ‘링컨 순회법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링컨은 순회법원이 다루는 온갖 사건을 맡아 여러 분야 서민들과 부대끼며 이들의 애환을 훨씬 잘 알게 됐다. 워싱턴의 성공한 기성 정치인은 갖기 힘든 소중한 경험이었다. 법원을 찾은 사람들은 매일 저녁 허름한 숙소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쏟아 내는 링컨 주위로 몰렸다. 순회법원이 거듭될수록 주민 사이에 링컨이라는 이름도 퍼져 나갔다.
 
  봄, 가을 한 번씩 열리는 순회법원은 한번 나서면 3개월 정도 걸려 링컨은 1년의 반을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링컨은 이 시간을 보물로 만들었다. 독서광 링컨은 순회법원을 따라나설 때면 반드시 책을 챙겼고, 일과 후 다른 변호사들이 술과 잡담으로 소일할 때 혼자 촛불을 켜 놓고 책을 읽었다. 여행 짐이 가볍기로 유명했던 링컨은 책도 몇 권만 갖고 다녀 같은 책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었다.
 
 
  문학과 기하학에 빠지다
 
  이 시기 링컨은 성경,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햄릿〉 〈리처드 3세〉, 바이런의 장편 서사시 〈차일드 해롤드의 편력〉,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시(詩) 등에 깊이 빠졌다. 셰익스피어 팬이었던 링컨은 대통령 시절 연극배우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기하며 대사를 인용할 때 오류가 있으면 고쳐 줄 정도였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된 일을 하며 틈틈이 시를 쓴 번스에게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석별의 정(올드 랭 사인)’이 번스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다.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어디를 가든 신문은 꼭 챙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항상 머리에 넣고 있었다.
 
  이 시절 링컨은 특히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 공부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그의 말안장 주머니에는 《기하학 원론》으로도 불리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13권 가운데 최소 1권이 항상 들어 있었다. 자기 말이나 글이 훨씬 더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는 훗날 “순회법원 일을 관뒀을 때는 《원론》의 첫 6권에 있는 명제(命題)는 어떤 것이든 막힘 없이 증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연설로 남게 되는 게티즈버그 연설의 정연한 논리 전개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링컨은 1년의 나머지 반을 스프링필드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일했다. 스프링필드는 주도(州都)여서 주 대법원도 있었다. 변호사로 이름도 나고 사무실도 주도에 있어 링컨은 큰 사건도 맡게 됐다.
 
  철교 회사를 대리한 소송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때 벌어들인 5000달러는 정계 복귀에 요긴하게 쓰였다. 기선 한 척이 미시시피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철교와 충돌하자 기선 회사가 철교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철교 회사를 대리했다. 철도는 당시 대표적 첨단 사업으로 링컨은 이런 사건들을 맡으며 첨단 기술과 철도를 이해하고 거시적으로 경제를 보는 안목을 배웠고, 연방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깊어졌다. 철도를 연방을 잇는 ‘철(鐵)의 접착제’로 받아들인 링컨의 인식은 훗날 대통령으로서 북미 최초의 대륙횡단철도 건설법 제정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는 링컨이 일선 정치와 거리를 둔 채 내면을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시기였지만 직계 가족의 죽음과 삶이 교차하기도 했다.
 
  링컨이 일리노이로 돌아온 이듬해 세 살 난 둘째 아들이 결핵으로 죽었다. 아들의 죽음은 링컨 부부를 바닥 모르는 심연(深淵)으로 끌어내리면서 이혼 직전까지 몰아갔다.
 
  몇 달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나면서 슬픔에서 벗어나는가 싶었지만, 이번에는 링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링컨은 부인이 산후조리 중이고 일이 너무 바빠 장례식에 갈 수 없다는 편지만 보내고 장례식에 가지는 않았다. 링컨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인 것은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법(Kansas-Nebraska Act)’이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노예 관련법

  미국은 건국 후 영토가 급팽창하면서 새 영토를 얻을 때마다 노예 허용 여부를 정해야 했고, 시대에 따라 네 번 중요한 법을 제정했다. 서북지방법→미주리 타협→1850년의 타협→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었다.
 
 
  서북지방법(1787년)
 
  요지는 “새 영토에서 오하이오강 북쪽은 노예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이 법의 쌍둥이 법에 해당하는 1790년 서남지방법의 요지는 “새 영토에서 오하이오강 남쪽은 노예를 허용한다”는 것이다.(3월호 참조)
 
  이 상황에서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 영토는 두 배가 됐다. 이 무렵 미국은 북미에 식민지가 있는 영국·스페인과 국경 분쟁이 잦았다. 2차 미영(美英) 전쟁 후인 1818년 미국은 영국과 조약을 맺어 국경 분쟁을 대부분 해소했다. 이 조약으로 북위 49도가 미국-영국(오늘날 캐나다) 국경선이 됐고, 오리건은 향후 10년 공동점령지가 됐다. 1819년 미국은 스페인과 조약을 맺어 플로리다를 얻었다. 약 10년 걸린 이 과정에서 미국은 주민 반란, 합병, 점령, 협상, 보상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새 영토의 특정 지역 주민이 6만 명을 넘으면 심사 후 준주(準州)를 거쳐 주로 만들어 연방에 가입시켰는데, 새 주의 연방 가입에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가 걸려 있었다. 주가 되면 연방상·하원의원과 대통령선거인단이 배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상원의원은 주의 크기와 상관없이 1주에 2명씩, 하원의원은 인구 비례로 배정됐다. 같은 면적에 주를 몇 개 만들든 하원의원 수는 같으나 상원의원 수는 달라졌다. 대통령선거인단은 연방상원의원 수와 연방하원의원 수의 합계만큼 배정되므로 상원보다는 영향을 덜 받았다. 같은 면적에 주를 몇 개 만드느냐는 상원의 권력 균형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노예 정책으로 직결됐다. 인구가 많아 의석도 많고 이들 가운데 노예 반대자도 많은 북부가 하원을 지배했기 때문에, 남부로서는 상원이 훨씬 중요했다. 북부가 상원까지 지배하고 상·하원이 공모해 노예제에 불리한 법을 제정하는 시나리오를 남부는 항상 경계했다.
 
  이로 인해 새 주의 연방 가입 때는 상원에서 자유주와 노예주 균형이 유지되도록 했다. 자유주인 인디애나를 19번째로 연방에 가입시키면(1816년), 다음에는 노예주인 미시시피를 20번째로 가입시키고(1817년), 그다음에는 자유주인 일리노이를 21번째로 가입시키고(1818년), 또 그다음에는 노예주인 앨라배마를 22번째로 가입시켰다(1819년). 이로써 미국은 22개 주가 됐고, 상원은 자유주와 노예주가 각각 11개로 균형을 유지했다.
 
 
  미주리 타협(1820년)
 
 
토머스 제퍼슨
이때 미주리가 노예주로 연방에 가입하려 했다. 그러면 상원에서 노예주가 많게 되자 의회는 상원의 균형을 위해 ‘1820년의 타협’ 또는 ‘미주리 타협’으로 불리는 타협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사실상 동시에 한 쌍의 법을 제정했다. 두 법의 요지는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얻은 영토 중 북위 36.5도 북쪽에서는 노예를 금지, 남쪽에서는 노예를 허용한다. 미주리는 36.5도 북쪽에 있으나 예외로 노예를 인정해 노예주로 연방에 가입시킨다. (상원의 균형을 위해, 자유주인) 매사추세츠주의 일부로 메인주를 만들어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시킨다”는 것이다. 북위 36.5도는 미주리주의 남쪽 경계선으로, 한국에서는 세종시를 지난다.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얻은 땅은 북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부채꼴 모양이다. 이 때문에 노예 반대자들은 36.5도 북쪽이 남쪽보다 넓어 여기에서 노예를 금지하는 것만으로도 수확이라 여겼다. 노예제 지지자들은 36.5도 북쪽은 기후가 면화 재배에 맞지 않아 노예를 금지해도 상관없다고 계산했다. 이 타협에 따라 매사추세츠주 일부가 메인주로 만들어져 1820년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했고, 1821년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가입했다. 상원의 자유주 대 노예주 비율은 12 대 12로 균형을 유지했다.
 
  정계에서 물러나 버지니아 대학 설립에 여생을 바치고 있던 토머스 제퍼슨은 미주리 타협을 전해 듣자마자 존 홈스(John Holmes) 연방하원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타협은 한밤의 화재경보이며 미국에 울리는 조종(弔鐘)”이라고 경고했다. 미주리 타협은 해결책이 아니라 연장책에 불과했으며, ‘북부인’ ‘남부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퍼뜨렸다. 제퍼슨의 경고는 정확히 41년 후 현실이 됐다.
 
 
  1850년의 타협
 
 
해리엇 비처 스토의 《엉클 톰스 캐빈》.
미주리 타협 후에도 미국은 텍사스 병합, 영국과 협상, 미-멕시코 전쟁 승리를 묶어 또다시 광활한 영토를 얻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얻은 영토의 약 1.5배였다. 전쟁 직후 미국에는 30개 주가 있었고, 연방상원 분포는 자유주 15, 노예주 15였다.
 
  이 무렵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금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종전 직전인 1848년 초였다. 이른바 ‘캘리포니아 골드러시(California gold rush)’의 시작이었다. 그해 12월 제임스 포크(James Polk·11대) 대통령은 의회 연례보고에서 이를 공식 확인했다.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 캘리포니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 인구(원주민 제외)는 1만5000명이었으나 1년 만에 10만 명으로 늘었다. 그해 금을 좇아 캘리포니아를 찾은 사람들을 1849년의 ‘49’를 따서 ‘포티나이너스(forty-niners)’로 불렀다. 캘리포니아 인구는 1853년 30만 명을 넘어섰고, 그곳의 금은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예상보다 빨리 연방 가입 자격을 갖춘 캘리포니아는 가입을 원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주 헌법은 노예제를 금지했다. 금을 찾아 이곳에 온 주민들이 노예를 동원한 대토지 소유주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이유였다. 이에 따라 연방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가입시켜야 했으나 여기에 맞춰 새로 가입시킬 노예주가 없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1850년의 타협’이었다. 요지는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시키되 노예제 보호법도 강화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는 준주 과정도 건너뛰고 1850년 연방에 가입했다. 서진(西進) 정책의 목표였던 태평양을 끼고 금까지 쏟아 내는 캘리포니아는 그만큼 소중했다. 그러나 이로써 수십 년 이어진 상원의 균형이 깨졌다.
 
  1850년의 타협에서 상원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받아들인 대가로 노예제 지지자들이 얻어 낸 반대급부 하나가 도망노예법이었다. 이 법은 1793년의 도망노예법을 강화한, 더 부당하고 가혹한 악법(惡法)이었다.
 
  새 법은 모든 미국 영토의 연방사법관이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줄 것을 의무화했다. 어떤 흑인이 도망 중인 노예라는 선서 증언이 있는데도 체포하지 않는 연방 공무원은 1000달러 벌금형에 처할 수 있었다. 도망 노예를 위한 음식이나 피신처 제공은 전국에서 범죄가 됐고 1000달러 벌금형과 6개월 징역형이 병과(竝科)됐다. 도망 노예를 체포하는 사법관은 연방 예산으로 보상금을 받았다. 자유인이라도 도망 노예라고 주장되면 노예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판사가 도망 노예로 기소된 흑인을 자유인으로 판결하면 수당으로 5달러를 받지만, 노예로 판결하면 10달러를 받았다.
 
  이 법 때문에 자유인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문제도 악화됐다. 일반 시민도 노예 추적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 조항을 북부 주민은 특히 혐오했고 노예를 남부로 돌려보내는 과정의 폭력성에 분개했다. 이 법으로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이 타협 직후인 1852년 출간된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의 소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은 국내외적 반향을 일으키며 미국 노예 제도의 참상을 고발했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1854년)
 
 
스티븐 더글러스
19세기 전반 미국은 오늘날 캐나다와 알래스카를 제외한 북미 대륙 전체를 영토화하면서 대륙횡단철도 건설이 국가적 과제가 됐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일리노이 연방상원의원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A. Douglas)도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려 했다. 그는 대륙횡단철도 1호가 일리노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시카고를 통과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행정, 사법, 건설 자금 유치 등 여러 이유로 법에 따라 주 또는 준주에만 철도를 건설할 수 있었고, 1853년 말까지 아이오와와 미주리 서쪽 영토(오늘날 캔자스와 네브래스카)는 아직 준주조차 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자 상원 준주위원장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더글러스는 이곳에 준주를 설치하려 했다.
 
  준주는 언젠가 주로 승격될 수 있어 새 준주를 설치할 때마다 노예 허용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다. 대륙횡단철도에 욕심을 내기는 남부 출신 의원들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1호가 남부를 통과하기 원했다. 남부에는 이미 주 또는 준주가 다 설치돼 있어 새 준주를 만들지 않아도 철도를 가설할 수 있었다. 북부에 대륙횡단철도 1호 노선을 깔려는 더글러스와 철도보다는 노예 확산이 더 중요한 남부 출신 의원들의 거래 결과, ▲캔자스준주와 네브래스카준주를 설치하고 ▲36.5도 북쪽에서 노예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을 폐기하며 ▲특정 지역에서 노예를 허용 또는 금지할지는 연방의회가 아니라 ‘국민주권’ 원칙에 따라 현지 주민이 정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그대로 ‘캔자스-네브래스카법(Kansas-Nebraska Act)’의 요지가 됐다. 이 법안은 1854년 1월 초 더글러스가 제안하고 몇 가지 수정을 거쳐 5월 말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이 서명해 신속히 법제화됐다. 민주당이 백악관과 연방상·하원을 장악해 휘그당의 반대는 문제가 아니었다.
 
  피어스 대통령과 더글러스 의원은 국민주권이 노예에 관해 오랫동안 지속된 노예제 반대자와 지지자의 대립을 끝낼 것이라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양측의 갈등만 더 키웠다. 이 법이 노예 허용 또는 폐지를 주민이 결정하도록 했기 때문에 양측은 캔자스로 몰려들어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져 ‘피 흘리는 캔자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민주당의 횡포를 지켜보면서 좌절에 빠진 휘그당은 정치적 수명이 다했음을 드러냈고, 노예 반대자들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했다.
 
 
공화당 창당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은 결국 휘그당을 죽이면서 공화당을 출범시켰다. 첫 법안이 국민주권을 넌지시 언급하면서 미주리 타협의 요지인 36.5도선을 폐기해 30년 이상 노예가 금지됐던 곳으로도 노예제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노예 반대자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1854년 5월, 소수의 휘그당원들, 프리소일러당원들과 노예제에 반대하는 민주당원들이 위스콘신주에서 모였다. 이들은 7월 6일 미시간주 잭슨(Jackson)에서 제1차 미시간주 공화당 전당대회를 열었다. 공식적으로 공화당이라는 이름 아래 열린 첫 전당대회였다.
 
  이들은 남부가 노예 소유주들 소수의 이익을 위해 민주당을 납치했다면서, 자기들이야말로 독립혁명의 진정한 계승자이고 이제는 건국 이념인 공화정으로 돌아갈 때라며 새 정당 이름을 공화당이라고 내걸었다. 공화당은 급속히 세를 불려 불과 2년 후인 1856년 대선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냈다. 휘그당은 이 대선에 후보도 내지 못한 채 다른 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 발표를 끝으로 소멸했다.
 
  민주당은 1828년 대선에서 2차 미영 전쟁의 영웅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며 창당됐다. 이 민주당과 공화당이 오늘날까지 미국 정치를 양분하고 있다.
 
  ‘윌모트 단서 조항’이 진앙이었던 정계 개편은 ‘1850년의 타협’과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거치며 대지진으로 변해 미국 정계를 강타했다.(윌모트 단서 조항에 대해서는 3월호 참조)
 
 
  “링컨이 선거를 넘겨주고 당을 얻었다”
 
 
라이먼 트럼벌
1855년 링컨의 연방상원의원 선거는 정치가가 국가를 위해 어떻게 자신을 희생시키는지와 함께 링컨의 인간적 됨됨이와 정치적 그릇도 잘 보여 준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에 분노해 정계 복귀를 결심한 링컨은 이해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미국은 지금과 달리 주의회가 연방상원의원을 선출했기에 일리노이는 주상·하원의원 100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문을 잠그고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표결했다. 이해는 휘그당의 링컨, 민주당의 노예제 반대자 라이먼 트럼벌(Lyman Trumbull), 민주당의 노예제 찬성자 조엘 매티슨(Joel Matteson)의 3파전이었다. 1차 표결 결과는 링컨 45, 매티슨 41, 트럼벌 5였다. 그러나 9차 표결까지 과반 득표자가 없었고, 민주당 노예제 찬성자들이 결집해 매티슨 표가 47표까지 올라갔다.
 
  링컨은 트럼벌을 지지하는 민주당 노예제 반대자들의 5표가 절대로 휘그당인 자기에게 오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링컨이 몸을 낮춰 선거 참모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를 지지하는 45표를 트럼벌에게 몰아 주시오.”
 
  가장 유력했던 후보가 대의(大義) 앞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었다. 링컨 지지자들 몇몇은 눈물까지 흘리며 반대했으나, 링컨은 노예제 찬성자를 연방의회로 보내는 것보다는 낫다며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10차 표결에서 트럼벌이 51표로 연방상원의원이 됐다. 트럼벌의 당선이 확정되자 링컨은 누구보다 먼저 다가가 축하를 건넸다.
 
  노예제 반대자들은 링컨이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이 선거는 일리노이 휘그당의 사망신고서이자 일리노이 공화당의 출생신고서였다. 이듬해 공화당에 가입한 링컨은 자연스럽게 일리노이 공화당의 깃발이 됐다. 이를 두고 “링컨이 선거를 넘겨주고 당을 얻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링컨은 트럼벌을 포함해 민주당 노예 반대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이것도 선거에서 이길 때마다 적을 양산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링컨이 다른 점이었다. 이 선거 후 링컨의 부인은 트럼벌의 부인과 평생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러나 링컨의 결단으로 드디어 연방상원의원이 된 트럼벌은 2년 후 당적까지 공화당으로 바꾸고 링컨의 강력한 정치적 우군이 됐다.
 
  트럼벌의 연방상원 입성은 단순히 상원의원 한 명의 교체를 뛰어넘는 의미가 있었다. 당시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었고, 노예 반대자인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노예제 지지자인 동료 민주당 의원들과 굳이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벌은 달랐다. 그가 상원에 들어가자 민주당 노예 반대파들도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 시작했다. 실로 커다란 변화였고, 그 변화는 링컨이 내린 결단의 산물이었다.
 
  트럼벌은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부터 12년 동안 연방상원 법사위원장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링컨 행정부가 원하는 모든 개혁입법이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자신도 노예 반대자였을 뿐 아니라 링컨의 선공후사(先公後私) 덕에 상원의원이 된 트럼벌은 링컨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북군에 사실상 남부 노예 해방권을 주는 ‘징발법’ 제정과 링컨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인 ‘수정헌법 13조’ 채택에도 앞장섰다.
 
 
미 해군, 세계의 바다로 나가다

  미국은 제퍼슨 대통령 주도로 1807년 노예수입금지법을 제정했다. 세계적으로 노예무역금지법을 처음 제정한 나라는 1792년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었다. 2년 후 프랑스가 같은 법을 제정했으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폐지했다. 미국이 노예수입금지법을 제정하고 약 3주 후 영국이 노예무역금지법을 제정했다. 영국의 노예무역금지법은 노예를 없애려는 조치였으나, 미국의 노예수입금지법은 노예를 없애려는 북부의 의지와 노예 수입을 막아 이미 남부에 있는 노예의 재산 가치를 높이려는 남부의 이해관계가 타협한 결과였다.
 
  미국은 이듬해 노예수입금지법이 발효되자 노예무역선 색출 임무를 해군에 맡겼다. 이로써 세계 10위에도 끼지 못하던 미국 해군이 세계의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19세기 전반 세계의 바다를 향한 미국의 관심은 일본 개항으로 유명한 매슈 페리 제독의 이력만으로도 잘 볼 수 있다.
 
 
  ‘기선 해군의 아버지’ 매슈 페리
 
 
매슈 페리
페리는 링컨이 태어난 1809년 14세에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페리의 아버지도 페리의 다른 형제 4명도 모두 해군 장교였다. 페리는 2차 미영 전쟁과 미-알제리 전쟁 참전 후 1819~25년 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에서 노예무역선 색출과 해적 퇴치 임무를 수행했다. 1820년에는 미국에서 해방된 노예 88명을 태운 민간 선박 엘리자베스호를 아프리카까지 호위했다. 목적지는 대서양 연안 서아프리카 지역으로, 해방 노예들이 함께 살도록 미국 노예해방운동가들이 준비한 곳이었다. 1822~61년 미국의 해방 노예 최소 1만5000명과 카리브해 연안의 해방 노예 3198명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라이베리아다.
 
  군함 빈센스(Vincennes)가 미국 해군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1830년, 페리는 러시아로 부임하는 미국 대사를 태우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1837년 자신이 건조를 감독한 미국 최초 기선 군함의 함장, 1843년 아프리카전단장으로 다시 노예무역선을 색출하다가, 미-멕시코 전쟁에 참전했다. 페리는 미국 군함을 기선으로 대체해야 한다며 해군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기선 해군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1853년 일본 개항으로 세계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페리의 이력은 독립한 지 불과 50년 안팎인 신생 국가 미국의 보잘것없던 해군이 이미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카리브해, 지중해, 발트해, 남중국해, 동중국해 등 세계의 모든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수어드의 구아노섬법
 
 
윌리엄 수어드
이 시기 바다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보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어드의 ‘구아노섬법(Guano Islands Act)’이다. 링컨이 1855년 연방상원의원 당선 기회를 타인에게 양보하는 통 큰 정치를 선보였을 때 윌리엄 수어드 전 뉴욕주지사는 재선 연방상원의원이 돼 있었다.
 
  이듬해 수어드의 주도로 제정된 구아노섬법은 한 정치인의 비전과 입법행위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증하는 모범 사례다.
 
  미국은 급속한 영토 확장으로 농업용 비료 수요가 급증했다. 당시 최고의 자연산 비료는 바다새 등의 똥이 쌓인 퇴적물인 구아노였다. 구아노는 합성 암모니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초산(硝酸)을 얻는 주요 자원이기도 했다. 그때는 최상품 구아노를 페루가 독점하다시피 해 미국은 농업적 군사적 수요를 위해 안정적 공급원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자 수어드가 앞장서 구아노섬법을 제정했다. “미국인이 타국 영토가 아닌 무인도 구아노섬을 발견하면 점령할 수 있다. 대통령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다.
 
  미국인들은 적극적으로 태평양과 카리브해 탐험에 나서 미드웨이섬(Midway Atoll), 존스턴섬(Johnston Atoll), 웨이크섬(Wake Island) 등 구아노섬 100여 개를 발견했다. 미국은 이들을 영토화했다. 미국 광산 회사들은 여기서 수백만 톤의 구아노를 채취했고, 가격이 비쌀 때는 톤당 약 50달러까지에 팔아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
 
  구아노섬법은 비료나 초석 공급이라는 국내적 영향보다 국제적 영향이 훨씬 크다. 미드웨이섬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 6개월 만에 미국 해군이 전력(戰力)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을 패퇴시켜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뒤집기 시작한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진 곳이다. 웨이크섬은 한국전쟁 중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만나 한국전쟁 진행을 놓고 담판을 벌인 곳이다. 존스턴섬은 냉전 시대 미국의 고고도(高高度)핵미사일 실험이나 화학무기 폐기 장소로 쓰였다. 미국은 이 세 섬을 포함한 약 10개를 도서(島嶼) 영토로 분류해 영유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나머지 약 90개는 다른 나라에 양도하거나 미국의 주에 포함시켰다.
 
  이 섬들은 드넓은 배타적경제수역(EEZ)도 제공한다. 구아노섬법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현재 340만 평방해리에 달하는 세계 최대 EEZ 보유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섬들은 19세기에는 구아노를, 20세기 중반에는 군사기지와 태평양 횡단 민항기의 중간기착지를, 20세기 후반부터는 섬을 중심으로 200해리라는 엄청난 EEZ를 미국에 선사했다. 미국은 이 섬들을 미중(美中) 패권 경쟁을 포함해 태평양에서 영향력 유지와 환경 보호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다가오는 내전, 떠오르는 링컨

  1856년 5월 일리노이주 블루밍턴(Bloomington) 시청에서 일리노이주 공화당의 첫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제는 공화당원으로 연단에 오른 링컨은 휘그당 출신 공화당원들, 노예제에 반대하는 민주당원들, 다른 군소 정당 당원들이 모두 힘을 합치자면서, 노예제를 당장 철폐하자는 급진파와 우선은 노예제 확산 방지에 주력하자는 온건파가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링컨은 며칠 전 노예제 지지자들이 캔자스주에 있는 노예 반대자들의 마을 로런스(Lawrence)를 불태우고, 남부 출신 연방하원의원 프레스턴 브룩스(Preston Brooks)가 상원까지 들어가 노예제 비판 연설을 한 찰스 섬너 연방상원의원을 금붙이가 붙은 지팡이로 때려 중상을 입힌 사건과 관련, 폭력 사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립선언서 정신인 만인평등이 공화당의 북극성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설이 끝나자 물을 끼얹은 듯 한동안 미동도 없이 침묵하던 청중은 갑자기 우레 같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시는 정치 집회가 있으면 현장 기자들이 속기(速記)로 연설 내용을 낱낱이 기록해 소속 신문사로 타전했다. 그런데 이날 집회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워낙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링컨의 연설에 빠져들어 누구도 속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링컨이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록 없이 구전(口傳)으로 보도돼 이날 링컨의 연설은 미국사에서 ‘잃어버린 연설’로 불린다.
 
 
  부통령 후보가 될 뻔하다
 
 
존 앨리슨
링컨은 1856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도 모르게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될 뻔했다. 공화당은 창당 후 첫 정·부통령 후보를 내기 위해 이해 6월 필라델피아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지금은 대통령 후보가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지만, 그때는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를 먼저 뽑은 후 부통령 후보를 별도로 뽑았다.
 
  공화당은 ‘서부 개척자(Pathfinder to the West)’라는 별명까지 있는 유명한 개척자 존 프리몬트(John C. Frémont)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는 군인일 때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특명으로 캘리포니아로 파견돼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확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렇게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33세에 캘리포니아주 군정(軍政)장관이 됐고 초대 캘리포니아주지사, 초대 캘리포니아주 연방상원의원을 거쳐 43세로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는 유럽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유명 인사였다.
 
  부통령 후보 선출을 앞두고 존 앨리슨(John Allison) 연방하원의원이 링컨과 사전 협의 없이 그를 후보로 추천했다. 표결 결과는 윌리엄 데이턴(William L. Dayton) 전 연방상원의원이 253표로 1위, 링컨이 110표로 2위였다. 나머지 6명의 득표는 무의미했다.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후보를 뽑기 위한 형식적 표결에 들어가 데이턴을 부통령 후보로 확정했다.
 
  그때 링컨은 전당대회가 열리던 필라델피아가 아니라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당대회에서 자신이 부통령 후보로 추천돼 2위를 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 말을 들은 링컨은 “그 링컨은 내가 아니라 리바이 링컨(Levi Lincoln)일 것”이라고 무덤덤하게 답했다. 링컨의 먼 친척인 리바이 링컨은 매사추세츠주지사와 연방하원의원을 지냈고 휘그당 시절부터 거물이라 당시에는 링컨보다 훨씬 유명했다.
 
  동부의 주요 언론이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무명 정치인이 110표나 받은 부통령 후보 2위였다고 충격적 뉴스로 보도하면서 링컨은 지방 정치에나 먹히는 시골 변호사에서 일약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 한 해 전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던 링컨은 이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당대회 결과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링컨의 목소리가 일리노이 너머까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였고 링컨도 이것을 알게 됐다. 이 같은 링컨의 자각은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링컨이 이때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됐다면, 11월 대선에서 공화당이 졌으므로 4년 후 대선에서는 참신성 등 여러 이유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대통령이 되지도 못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이들은 링컨의 부통령 후보 낙선 후 대통령 당선을 미국 정치사에서 ‘전투에 지고 전쟁에 이긴’ 전형적 사례로 꼽는다.
 
 
  ‘드레드 스콧 vs 샌드퍼드’ 판결
 
드레드 스콧 부부

  1857년 3월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이 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6번째 민주당 대통령 뷰캐넌의 취임으로 앤드루 잭슨(7대)부터 링컨 직전까지 32년 가운데 28년을 민주당이 집권하는 민주당 전성시대가 계속됐다. 이 민주당 전성시대는 미국을 태평양 국가로까지 발전시키고 아시아와도 인연을 맺게 했으나, 노예제로 대표되는 기득권을 지키려다 국민을 가르고 내전(內戰)까지 잉태했다. 한마디로 빛과 그림자가 뚜렷이 교차하는 보수의 전성시대였다.
 
  뷰캐넌 취임 이틀 후 연방대법원은 지금까지 미국 대법 최악의 판결이라는 ‘드레드 스콧 vs 샌드퍼드(Dred Scott vs Sandford)’ 판결을 내놨다. 이 판결은 흑인 드레드 스콧 부부가 자신들이 자유인임을 인정하라며 미주리주 법원에 첫 소송을 제기한 지 11년 만에 나온 것이었다. 판결 요지는 “흑인은 시민권자인 적이 없고 시민권자가 될 수도 없으므로, 연방헌법이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없다.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며, 연방의회는 미국 영토에서 노예를 금지할 권한이 없다. 연방의회나 현지 주민이 무엇을 원하든 서부의 새 영토에서 노예는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7 대 2로 내릴 만큼 보수적이었다. 대법관 9명 중 7명이 민주당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고, 5명이 노예소유주였다.
 
  이 판결 전까지 흑인이 시민권자가 될 수 있느냐는-“만인(萬人)은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독립선언서의 ‘만인’에 흑인도 포함되느냐는-문제에 대한 답은 애매한 상태로 일부 주는 제한적 권리를 인정했으나, 이 판결로 모든 흑인은 시민권자가 아니게 됐다. 이 판결에 따라 새 영토에서 노예를 인정하느냐에 대한 정치적 타협도 불가능해졌다.
 
  로저 테이니(Roger B. Taney) 대법원장은 이 판결이 건국 이래 수십 년 동안 근본적 해결책이 없던 노예 문제에 대해 최종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와 대법원의 교만이었다.
 
  재판에서 소수의견을 낸 벤저민 커티스(Benjamin Robbins Curtis) 대법관은 판결이 위헌이라고 분노하며 대법관직을 던졌다. 연방판사는 종신직이고 당시 그는 47세였다. 그는 대법원이 원칙을 버렸다는 이유로 사임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법관이다.
 
 
  링컨의 대법원 판결 비판
 
  이미 미국은 노예 문제로 나라가 찢어지고 전쟁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나중에 북군 총사령관으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대통령까지 되는 율리시즈 그랜트(Ulysses S. Grant)는 노예제 반대자였지만 “1856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이기면 남북이 분리되고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회고록에 썼을 정도다. 그는 미-멕시코 전쟁 참전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었다.
 
  대법원 판결은 노예 반대자와 지지자 사이의 갈등만 증폭시켰다. 백악관·의회·대법원을 전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이 판결에 노예 반대자들은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3개월 후 링컨이 일리노이주 의사당에 섰다. 논리적 설득력을 키우기 위해 몇 년 동안 유클리드 기하학을 끼고 살았던 링컨의 연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링컨은 ‘증명’이라는 말에 강박관념을 가질 정도로 어떤 주장이든 근거에 입각한 수학적 증명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링컨의 이날 연설 역시 논리정연하고 법적으로도 빈틈이 없었다.
 
  링컨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상 드레드 스콧은 노예라고 인정해, 법치(法治)를 부정한다는 인상을 피하면서도 대법원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링컨은 “흑인이 시민인 적이 없었다는 대법원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다”고 비판하면서, “대법원 판결은 잘못이다. 대법원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스스로 판례를 뒤집었다. 우리는 대법원이 이 판결을 뒤집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권을 잡아 새 대법원을 구성하고 그 대법원이 다른 판결을 내려 이번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특히 링컨은 “대법원 판결이 개별 재판 하나를 확정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필연적으로 국가의 미래를 영원히 지배하는 최종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만장일치도 아닌 대법원 판결은 다른 정부기관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원칙이 아니라고 했다. 링컨은 대법원 결정이 법적 판결이라는 가면을 썼을 뿐 실체는 정치적 의견이라 보고, “연방의회가 새 영토에서 노예를 금지할 수 없다는 판결도 시간을 두고 현실 속에서 반복적 검증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법으로 정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링컨-더글러스 7차 연쇄 토론
 
  치밀한 전략가이자 과감한 승부사였던 링컨은 1858년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다시 나섰다. 상대는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한 민주당의 거물 스티븐 더글러스였다. 그는 현직 재선 연방상원의원으로 이미 1852년과 1856년 대선 때도 후보로 출마했었다. 실제로 그는 2년 후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백악관을 놓고 링컨과 승부를 겨루게 되니, 이해 연방상원의원 선거는 다가올 대선의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더글러스는 1850년의 타협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고,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은 그의 작품이었다.
 
  링컨은 이런 상황을 모두 감안해 더글러스에게 공개토론이라는 도전장을 던졌다. 풍부한 자금력과 높은 지명도를 자랑하던 더글러스는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나중에 수락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노예제가 핵심 쟁점인데, 북부 일리노이는 노예 반대가 우세하고 남부 일리노이는 찬성이 우세해 중부의 선택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새 주의원 가운데 노예 반대자와 찬성자 어느 쪽이 많으냐에 따라 연방상원의원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0년 케네디-닉슨 TV 토론과 함께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거 토론으로 꼽히는 링컨-더글러스 7차 연쇄 토론이 결정됐다. 9~10월 계속된 토론이 벌어질 때마다 합동유세장에서는 수많은 깃발과 배너가 펄럭이고 요란한 밴드 연주, 퍼레이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청중들은 혼자 걷거나 말을 타고 오기도 하고 여럿이 마차를 타고 오거나 단체로 줄지어 모여들었다. 토론 방식은 한 사람이 먼저 60분 연설하고, 상대가 90분 자기유세를 하면서 비판하면, 다시 첫 연사가 나서 30분 연설하면서 반박하는 순서였다. 3시간 내내 청중들은 숨죽여 듣기도 하고 지지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링컨의 절묘한 질문
 
  토론 내내 링컨은 드레드 스콧 판결을 염두에 두고, “대법원 판결은 헌법이 아니다.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정부 정책이 대법원 판결로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고정된다면, 국민은 더는 자신의 주인이 아니게 된다”며 대법원 판결의 무조건적 최종성을 부인했다.
 
  더글러스는 “독립선언서는 흑인이나 원주민 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은 백인과 그 후손을 위해 건국됐다”고 주장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백인들도 정치적·사회적 평등은 안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링컨을 모든 흑백 차별을 없애려는 과격파로 몰려는 시도였다.
 
  링컨은 항상 독립선언서 구절을 적은 메모를 들고 연단에 올라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독립선언서의 만인은 백인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독립선언서에 쓰인 여러 천부적 권리를 흑인이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흑백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까지 말하는 게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노예제는 반대하나 흑인 투표권까지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링컨은 절묘한 질문을 던졌다.
 
  “준주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노예제를 배제할 수 있느냐?”
 
  대법원 판결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계산된 질문이었다. 더글러스가 “노”라고 하면 자기 신념인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주권을 선호하는 북부 주민의 지지를 잃게 된다. “예스”라고 하면 드레드 스콧 재판에서 주민주권을 부정한 대법원 판결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판결에서 대법원이 노예를 재산이라고 정의해 남부 노예소유주가 노예를 데리고 북부 아무 곳이나 들락거릴 수 있도록 허용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더글러스는 “대법원이 준주에서 노예가 허용된다고 판결했지만, 현지 주민이 (노예소유주들의 권리를 보호해 줄) 경찰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노예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답했다. 더글러스는 국민주권론도 지키고 대법 판결도 존중하는 현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답을 내놓은 순간 그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답변을 들은 노예제 지지자들은 더글러스가 배신자라며 격노했다.
 
  노예 처리 방법을 놓고 더글러스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뷰캐넌 대통령은 차라리 링컨을 당선시키는 한이 있어도 꼴 보기 싫은 더글러스를 낙선시키라며 전국민주당을 급조해 독자적 후보들을 세웠다. 이로 인해 선거는 갑자기 공화당·민주당·전국민주당의 3파전이 됐다. 집계 결과 공화당 12만5000표, 민주당 12만1000표, 전국민주당 5000표였다. 전체 득표는 공화당이 많았으나 선거구 문제로 주의원 당선자는 민주당이 많아 더글러스는 연방상원의원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민주당은 분열했고 공화당은 차기 대선에서 백악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유력한 대선 잠룡들이 나선 링컨-더글러스 연쇄 토론은 많은 기자를 몰고 다녔고, 기자들은 속기로 발언 내용을 낱낱이 적어 전국으로 타전했다. 링컨은 낙선하고도 단번에 전국적 정치인으로 이름이 굳어졌다. 2년 전 대선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통령 후보가 될 뻔한 데 이은 연타석 홈런이고, 그때가 솔로 홈런이었다면 이번에는 만루 홈런이었다. 많은 사람이 링컨에게 차기 대선에 나가라고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하퍼스페리의 총성
 
 
존 브라운
1859년 10월 16일 밤 급진파 노예 반대자인 백인 존 브라운이 21명을 데리고 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Harper’s Ferry)에 있는 연방군 무기고를 습격했다. 무기고에는 소총 약 10만 정이 보관돼 있었다. 브라운은 이 무기를 탈취해 인근 산악지대로 들어가 노예 수천 명이 모이면 무장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독실한 캘빈주의자였으며 스스로 ‘신(神)의 종’이라 믿은 브라운은 “노예제는 하느님에 거스르는 죄이며, 힘과 피를 통해서만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뷰캐넌 행정부는 해병대를 보내 이틀 만에 사태를 진압하고 브라운 등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했다.
 
  노예 무장반란은 남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이었다. 게다가 사건 주모자, 나머지 가담자 21명 가운데 17명, 훗날 ‘비밀의 6인’으로 불리는 군자금 제공자가 전원 백인이라는 사실에 남부는 경악했다. 남부인들에게 이제 북부인들은 자기들과 같은 백인이 아니었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남부에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는 인종 배신자였다.
 
  하퍼스페리의 총성은 그나마 타협과 입법으로 해결책을 찾던 수십 년 냉전의 시대는 갔고 총과 대포가 말하는 열전(熱戰)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이해 12월 뷰캐넌 정부의 강경파 노예제 지지자 존 플로이드(John B. Floyd) 전쟁장관은 북부에 있는 소총 11만5000정을 남부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버지니아는 민병대 훈련과 무기 구매를 위한 긴급예산 50만 달러를 편성했고, 조지아는 유능한 장교 양성을 위해 조지아 군사학교 예산을 서둘러 증액했다. 윌리엄 기스트(William Gist) 사우스캐롤라이나주지사는 “내년 대선에서 링컨이 당선될 경우 연방으로부터 분리할 의사가 있는가?”라고 묻는 비밀 편지를 남부 주지사들에게 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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