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는 벗 사귐을 사적 영역의 일로 이해… 사마천은 인간의 의리 중시
⊙ 붕우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일에 관한 뜻을 함께하는 벗
⊙ 친구 관중을 늘 이해하고 천거했던 포숙아(管鮑之交)
⊙ 나라를 위해 장군 염파의 질시를 감수했던 인상여(刎頸之交)
⊙ 빗나간 우정, 친구 손빈의 재능을 질시해 해를 가했다가 비참하게 죽은 방연
⊙ 자기를 알아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던진 예양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붕우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일에 관한 뜻을 함께하는 벗
⊙ 친구 관중을 늘 이해하고 천거했던 포숙아(管鮑之交)
⊙ 나라를 위해 장군 염파의 질시를 감수했던 인상여(刎頸之交)
⊙ 빗나간 우정, 친구 손빈의 재능을 질시해 해를 가했다가 비참하게 죽은 방연
⊙ 자기를 알아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던진 예양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조양자의 옷을 베는 예양. 19세기 말 일본인의 그림이다.
사실 붕우유신은 친친현현(親親賢賢)이라는 공자(孔子)의 핵심 가치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는 것이다. 친친(親親)은 부부자자(父父子子)의 사사로운 영역이고 현현(賢賢)은 군군신신(君君臣臣)의 공적(公的)인 영역이다. 반면에 붕우는 사적(私的)이면서도 공적인 관계이다. 붕우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일에 관한 뜻을 함께하는 벗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信]이라는 의리이다.
《논어》 속 ‘벗 사귐’
우선 《논어(論語)》에 등장하는 벗 사귐과 관련된 구절 몇 가지를 짚어 보자.
‘학이편’에서 증자(曾子)가 말했다.
“벗과 사귐에 있어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증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하루를 점검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자하(子夏)의 말이다.
“뜻이 같은 벗과 사귀기를, 일단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하여 믿음을 주는 식으로 해야 한다.”
‘공야장편’에서 공자가 말했다.
“늙은이는 편안하게 해 주고, 벗은 믿어 주고, 젊은이는 (사랑으로) 품어 안아 주는 것이다.”
이는 평소 공자가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한 것인데 공적 공간보다는 사적 영역에서의 태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안연편’에서 다시 증자가 말했다.
“군자는 문(文)으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어짊을 보충한다.”
군자의 벗 사귐과 소인의 벗 사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군자는 의(義)로써 사귀지만 소인은 이(利)로써 사귄다. 그래서 군자의 벗 사귐은 오래가지만 소인의 벗 사귐은 일정함이 없다. 이 점을 공자는 ‘계씨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움을) 더해 주는 세 가지 벗 삼음이 있고 (다움을) 덜어 내는 세 가지 벗 삼음이 있다. 곧음[直]을 벗 삼고 신실함[諒]을 벗 삼고 견문이 넓음[多聞]을 벗 삼는 것이 더해 주는 세 가지이고, 지나치게 공손함[偏辟]을 벗 삼고 좋은 말만 하는 아첨[善柔]을 벗 삼고 말만 번드레하게 함[便佞]을 벗 삼는 것이 덜어 내는 세 가지이다.”
전자(前者)가 군자의 벗 사귐이라면 후자(後者)는 소인의 벗 사귐이다. 실은 공자의 이 말은 군신 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벗과 같은 우신(友臣)을 고를 때 임금이 군자다운 신하를 좋아하는지 소인 같은 신하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공자의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관중 이오(夷吾)는 영상(潁上·영수 주변) 사람이다. 어릴 때 늘 포숙아와 놀았는데 포숙은 그의 뛰어남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관중은 가난하고 힘들어 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에게 잘 대해 주고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포숙이 제(齊)나라 공자(公子·공의 아들) 소백(小白)을 섬겼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섬겼다. 소백이 세워져 환공(桓公)이 되자 공자 규는 (환공에게) 죽었다. 관중은 옥에 갇혔다. 포숙은 드디어 관중을 (벼슬길에) 나아오게 하였다. 관중이 이미 쓰이게 되자 제나라에서 정치를 맡았고 제나라 환공은 패자(覇者)로서 제후들을 규합하여 단번에 천하를 바로잡았는데 (이는) 관중의 모책(謀策) 덕분이었다.
관중이 말했다.
“나는 애초에 곤궁할 때 일찍이 포숙과 장사를 하면서 재물과 이익을 나눌 때 내가 차지하는 것이 많았는데도 포숙이 그것을 갖고서 나를 탐욕스럽다[貪]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포숙아를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하였다가 또 한 번 곤란해졌는데도 포숙이 그것을 갖고서 나를 어리석다[愚]고 여기지 않은 것은 때에는 이로울 때와 불리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차례 벼슬에 나아갔다가 세 번 모두 임금에게 쫓겨났는데도 포숙이 그것을 갖고서 나를 모자란 사람[不肖]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하였음[不遇]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는데도 포숙이 그것을 갖고서 나를 겁쟁이[怯]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는 노모(老母)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싸움에 져 (나와 함께 규를 도왔던) 소홀(召忽)이 (스스로) 죽었을 때 나는 옥에 갇혀 굴욕을 당하였는데도 포숙이 그것을 갖고서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無恥]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사소한 절의(를 꺾는 것)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공로와 이름[功名]을 드날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할 줄 앎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知我者]은 포자(鮑子)이다.”
포숙은 이미 관중을 (재상에) 나아오게 하고서 자신은 그의 아래에 있었다. 관중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에서 녹(祿)을 누렸고 봉읍을 소유한 자가 10여 대(代)였으며 (그중 많은 자손들은) 늘 이름있는 대부(大夫)가 되었다.〉
이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그런데도) 천하에서는 관중의 뛰어남[賢]을 아름답게 여기기보다는 포숙이 능히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것[能知人]을 더 아름답게 여겼다.”
이는 《논어》 ‘학이편’의 공자 말을 떠오르게 한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문경지교(刎頸之交)
염파염파는 조(趙)나라의 훌륭한 장수이다. 조나라 혜문왕(惠文王) 16년에 염파는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쳐서[伐] 크게 깨트리고 양진(陽晉)을 차지하여 (그 공로로) 제배(除拜)되어 상경(上卿)이 되니 그 용맹스러운 기백이 제후들 사이에 알려졌다. 인상여는 조나라 환자령(宦者令·환관 책임자) 무현(繆賢)의 사인(舍人·비서실장)이었다. 즉 처음에는 염파가 위에 있었고 인상여는 낮은 관리였다.
그런데 뒤에 조나라 혜문왕 때 진 소왕(秦昭王)이 유명한 구슬인 화씨벽(和氏璧)을 진나라의 성 15개와 바꾸자고 요구해 왔다. 이때 인상여는 무현의 천거로 왕명을 받들고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지를 발휘하여 구슬과 함께 무사하게 돌아왔다.
이때 염파와 인상여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염파 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이다.
인상여“나는 조나라 장수로서 성을 공격하고 들판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인상여는 한갓 입과 혀를 놀렸건만 자리가 나보다 위에 있고 또 상여는 본래 천한 사람이니 내가 부끄러워 차마 그의 아래에 있을 수 없다.”
선언하여 말했다.
“내가 상여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욕을 보일 것이다.”
상여는 이 말을 듣고서 가능한 한 부딪치지 않으려 하였다. 상여는 입조(入朝)할 때마다 늘 병을 핑계 댔고 염파와 서열을 다투려 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상여가 외출을 하였다가 멀리서 염파를 보자 상여는 마차를 끌고 피하여 숨었다. 이에 그의 사인들이 서로 간언하여 말했다.
“신들이 친척을 떠나 군을 모시는 것은 오로지 군의 높은 의리를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염파와 같은 반열인데 염군은 대놓고 나쁜 말을 하고 군께서는 그를 두려워하며 숨으시니 두려워하시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이런 것은 보통 사람도 부끄러워하거늘 하물며 장상(將相)이겠습니까? 신들은 못났으니 물러갈 것을 청합니다.”
인상여는 그들을 굳게 말리며 말했다.
“그대들이 볼 때 염 장군과 진나라 왕 중 누가 더 대단하다고 보는가?”
“(염 장군이) 못하지요.”
“저 진나라 왕의 위세 앞에서 이 상여는 그 조정에서 호통을 쳤고 그 신하들을 욕보였으니 상여가 아무리 못났어도 염 장군을 겁내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대해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네.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려 싸우면 그 형세 상 둘 다 살아남지 못하지. 내가 그렇게 한 까닭은 나라의 급한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원한은 뒤로하였기 때문이라네.”
염파가 이를 듣고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등에 진 채[肉袒負荊] 빈객을 통하여 인상여의 집 문에 이르러 사죄하여 말했다.
“이 비루하고 천박한 자는 장군께서 이렇게까지 너그러우신 줄 몰랐소이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게 되어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교분[刎頸之交]을 나누었다.〉
인상여는 실로 포숙아에 못지않았다 할 것이고 염파는 그나마 뒤늦게라도 개과천선(改過遷善)하였다.
애초 염파가 보여 준 그릇된 모습은 공자가 지적한 바 있다. 《논어》 ‘헌문편’이다.
공숙문자(公叔文子)의 가신(家臣) 대부 선(僎)이 문자와 함께 공조(公朝·조정)에 올랐다. 공자가 이를 듣고서 말했다.
“(그의 시호를) 문(文)이라고 할 만하다.”
자기가 데리고 있던 대부가 뛰어남을 보고서 천거하여 조정에 나란히 서게 한 공숙문자를 칭송하는 말이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실천을 평가하여 시호를 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의 염파는 범인(凡人)의 그것이었으나 그 후 그가 달라져 보여 준 모습은 결국 공숙문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손빈과 방연의 빗나간 우정
손빈손무(孫武)가 이미 죽고 100여 년이 지나서 손빈(孫矉)이 나타났다. 손빈은 아(阿)와 견(甄)읍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손빈은 또한 손무의 후손이다. 손빈은 일찍이 방연(龐涓·‘방견’이라고도 읽음·?~기원전 342년)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일찍이 위(魏)나라를 섬겨 혜왕(惠王)의 장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손빈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몰래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렀다. 손빈이 오자 방연은 그가 자신보다 뛰어난 것이 두려워 그를 질투하다가 형벌에 처해 두 다리를 자르고 또 경형(黥刑·묵형)을 가하여 숨도록 만들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제나라 사신이 양(梁·위나라 수도)에 가자 손빈은 죄수의 몸으로 몰래 만나 제나라 사신에게 유세하였다. 제나라 사신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몰래 그를 수레에 태워 함께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 장수 전기(田忌)가 그를 좋게 여겨 빈객으로 대우하였다. 손빈은 절치부심, 방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손자 오기 열전(孫子吳起列傳)〉이다.
〈그로부터 15년 후에 위나라와 조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제나라가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가게 하니 곧장 대량(大梁)으로 달려갔다. 위나라 장수 방연은 이를 듣고는 한나라를 떠나 돌아왔다. 제나라 군대는 이미 (방연보다 먼저) 위나라 국경을 지나 서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손빈이 전기에게 말했다.
“저들 삼진(三晉·한 위 조)의 위나라 병사는 원래 사납고 용맹하여 제나라를 깔보면서 제나라를 겁쟁이라 부릅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그 형세를 잘 살펴 유리하게 이끕니다. 병법에 100리를 달려가 승리를 구하려는 자는 상장(上將)을 잃고, 50리를 달려가 승리를 구하려는 자는 겨우 절반만 목적지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 땅에 들어서면 취사용 아궁이 10만 개를 만들게 하고 다음 날에는 5만 개를 만들게 하며 또 그다음 날에 3만 개를 만들게 하십시오.”
방연이 사흘 동안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제나라 군대가 비겁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 땅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도망간 병졸이 절반을 넘는구나.”
그리고는 보병을 남겨 둔 채 날랜 정예병만 데리고 이틀 거리를 하루 만에 추격하였다. 손빈이 방연의 추격 속도를 헤아려 보니 날이 저물 무렵이면 (위나라) 마릉(馬陵)에 도착할 것 같았다. 마릉은 길이 좁고 양옆으로 험준한 곳이 많아 복병 전술이 가능하였다. 이에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 내고는 흰 부분에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고 쓰게 하였다.
이에 석궁을 잘 쏘는 제나라 군사 1만 명을 좁은 길 양옆으로 매복시켜 놓고는 기약하여 말했다.
“저녁에 불빛이 비치거든 (그곳을 향해) 일제히 발사하라!”
방연이 과연 밤중에 껍질을 벗겨 놓은 나무에 이르러 글씨를 보고는 바로 불을 밝혀 비추었다. 그 글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쇠뇌 1만 개가 일제히 날아왔다. 위나라 군대는 큰 혼란에 빠져 서로 어쩔 줄 몰랐다.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바닥이 나서 패한 것을 자인하고는 마침내 자기 목을 찔러 죽으며 말했다.
“결국 애숭이놈의 명성을 이루어 주는구나!”〉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사마천은 지기(知己)를 위한 헌신을 매우 중요한 가치관으로 여겼다. 그가 임협(任俠)을 좋아하여 〈유협 열전(游俠列傳)〉이나 〈자객 열전(刺客列傳)〉을 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중 〈자객 열전〉에 유명한 예양(豫讓)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예양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그래서 일찍이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겼으나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들을 떠나 지백(智伯)을 섬겼는데 지백은 예양을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였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치자 조양자는 한씨(韓氏)·위씨(魏氏)와 공모하여 지백을 멸망시키고 그 후손까지 다 죽이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조양자는 지백에 대한 원한이 너무 커서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하였다. 예양은 산속으로 몸을 숨기며 말했다.
“아아!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여 주는 사람을 위해서 용모를 단장한다고 하였다. 이제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가 반드시 원수를 갚고 죽어 지백에게 보답한다면 내 혼백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성명을 바꾸고 죄수가 되어 조양자 궁에 들어가 뒷간의 벽을 바르는 일을 하였는데 몸속에 비수를 품고 있다가 기회를 엿보아 양자를 찔러 죽이려는 심산이었다.
양자가 뒷간에 가는데 뭔가 가슴이 두근거려 뒷간의 벽을 바르는 죄수를 붙잡아다 신문해 보니 그가 바로 예양이었고 몸속에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예양이 말했다.
“지백을 위해서 원수를 갚으려 하였소!”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양자가 말했다.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니 내가 조심해서 피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지백이 죽고 뒤를 이을 자식조차 없는데 그의 가신이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뛰어난 사람이다.”
결국 그를 풀어 주어 떠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예양은 또 몸에 옻칠을 해서[漆身] 나병 환자처럼 꾸미고 숯을 삼켜[呑炭] 목소리를 바꾸어 아무도 자기를 알아볼 수 없게 한 뒤에 시장에서 구걸을 하였다. 그의 아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가서 그의 벗을 만나 보니 그의 벗은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자네는 예양이 아닌가?”
예양이 말했다.
“날세.”
벗이 울면서 말했다.
“자네의 재능으로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어 양자를 섬긴다면 양자는 반드시 자네를 가까이하고 총애할 것일세. 가까이하고 총애받는 신하가 되어 그때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오히려 쉽지 않겠는가? 자기 몸을 해치고 모습을 추하게 하면서까지 양자에게 보복하려고 하니 이는 실로 어렵지 않겠는가!”
예양이 말했다.
“기왕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 주군을 죽이려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서 주군을 섬기는 짓이네. 또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바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네. 그러나 이를 하는 까닭은 장차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것일세.”
이미 떠났고 얼마 뒤에 양자가 외출할 때 예양은 양자가 지나가려는 다리 밑에 숨어 있었다. 양자가 다리에 이르렀을 때 말이 놀라니 양자가 말했다.
“이는 분명 그 예양 때문이다.”
사람을 시켜 찾도록 하니 과연 예양이었다. 이에 양자가 마침내 예양을 꾸짖어 말했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백이 그들을 모두 없앴는데도 그대는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예물을 바쳐 지백의 신하가 되었다. 지백 또한 이미 죽었는데 그대는 홀로 어째서 그를 위해서 악착같이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예양이 말했다.
“신이 범씨와 중항씨를 섬겼으나 범씨와 중항씨는 모두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하였기에 저 또한 그래서 보통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의 경우에는 저를 국사(國士)로 대우하였기에 저 또한 그래서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양자가 크게 탄식하고 울면서 말했다.
“아, 예자(豫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하는 명성은 이미 이루어졌고 과인(寡人)이 그대를 용서한 것 또한 이미 충분하였다.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 보라. 과인은 다시는 그대를 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병사들을 시켜 그를 에워쌌다. 예양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눈 밝은 군주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명예를 위해 죽을 의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 당신께서 이미 신을 너그럽게 용서하신 일로 인하여 천하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뛰어남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오늘 일로 신은 엎어져 죽어 마땅합니다만 바라건대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 하였던 뜻이라도 이루게 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는 신이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감히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일 뿐입니다.”
이에 양자는 그가 크게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어 자기 옷을 예양에게 가져다 주도록 하였다. 예양은 칼을 뽑아들고 세 번을 뛰어올라 그 옷을 내리치면서 말했다.
“내가 지백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었구나!”
드디어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던 날 조나라의 뜻있는 선비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