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다산의 단간잔묵(斷簡殘墨) ②

“천 리 밖 구구한 저의 말 못 하는 情”

  • 글 :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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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하는 다산, 강진의 지인들에게 小室과 사이에서 난 딸 부탁
⊙ 상경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돌아간 소실의 ‘개가’ 운운에 속 태우고
⊙ 장흥으로 옮겨 간 딸 아프다는 소식에 급히 사람 보내

정민
1961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문학박사 /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문헌과해석사 사장 역임 / 저서 《다산선생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강진백운동 별서정원》 《다산증언첩》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강진 용혈》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다산의 일기장》 등. 지훈국학상(2012년), 월봉학술상(2015년), 백남석학상(2020년), 한국가톨릭번역상(2021년), 롯데출판문화대상(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의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2025년)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사진=조선DB
4. 다산이 강진을 떠나던 때의 정황
  우연히 만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편지 한 통
 
  하루는 네이버에서 ‘정약용 간찰’을 검색어로 입력하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다산(茶山)의 친필 편지 한 통이 뜬다. 내용이 뜻밖에 흥미롭다.
 
  세로 32.7cm, 가로 46.2cm의 크기로 다산 글씨 중에서도 잘 쓴 글씨에 속한다. 편지는 1818년 9월 4일에 썼다. 쓴 날짜를 보고 먼저 놀랐다. 다산이 18년간의 긴 유배를 마치고 강진을 출발한 것이 1818년 9월 2일이니 강진 출발 이틀 뒤, 아직 상경(上京) 도중에 배웅차 따라온 제자들을 돌려보내고 다른 인편에 귤동으로 보낸 편지였다.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아이들은 다들 뒷기약을 남기지만 늙은이가 홀로 이별의 눈물을 떨구니, 비록 정(情)을 갈라 작별하고 물러났어도 어찌 슬프고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길이 용강(龍岡)에 이르러 또 따님 손으로 진귀한 식사 대접을 받으매, 다시금 돌이켜 주렴을 걷고 맞아 주던 은혜를 더욱 생각하였습니다. 며칠 사이에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저의 이런저런 마음은 글로 다 쓸 수가 없습니다. 원(元)이는 이미 팔을 붙잡고 부춘산(富春山) 앞에서 서로 작별하였습니다. 어떤 아이인들 서글프지 않겠습니까만, 유독 이 아이에 있어서는 심회가 좋지 않아서 끝내 눈물이 떨어지려 하더군요.
 
  진실로 자식을 사랑하는 정이 붕우(朋友)의 우호보다 나은 것은 알지만, 다만 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선택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며, 정도(正道)와 권도(權道)가 있고, 굽히고 폄이 있는 법입니다. 제가 비록 고루하고 들은 것이 없다 해도 어찌 이에 있어 혹 짐작하고 헤아림이 적겠습니까? 여러분의 논의가 하나로 귀결되면 이치상 마땅히 중의(衆議)에 따르겠습니다.
 
  다시금 성통(聖通), 배연(拜延) 등과 더불어 깊이 상의해서 시원스럽게 처리해 주신다면 진심으로 감동하여 힘써 여러 사람의 의론에 따르렵니다. 이러한 천 리 밖 구구한 저의 말 못 하는 정에 부응해 주심이 어떠한지요? 천만번 생각하여 주십시오. 이만 줄이옵고 삼가 드립니다. 무인년(1818)년 9월 초4일, 하생 정용(丁鏞) 드림.
 
  童穉皆留後期, 老人獨垂別淚. 雖割情辭退, 安得不悽然耿然. 行到龍岡, 復得珍異之餉於令愛之手, 益復回戀捲簾之恩也. 數日來氣體如何? 區區下懷不可書. 旣元也把臂相別於富春山前. 何兒之不怊悵, 而獨於此人, 心懷作惡, 終欲淚落.
 
  固知止慈之情勝於朋友之好, 而第念事有大小, 擇有輕重, 有經有權, 有屈有伸. 下生雖孤陋無聞, 豈於此或少斟量耶? 群議歸一, 理當從衆.
 
  更與聖通拜延之等爛加相議, 廓然恢弘, 惻然感動, 勉循群議. 以副此千里外區區之默默之情, 如何如何. 千萬下念焉. 不備, 伏惟下照. 戊寅九月初四日, 下生丁鏞拜手.〉

 
 
  한 가족 같았던 윤종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약용의 1818년 9월 4일 자 편지.

  편지의 수신자는 문맥으로 보아 다산초당의 주인이었던 윤규로(尹奎魯·1769~1837년)로 보인다. 다산은 18년 강진 유배 기간 중 11년을 초당에 살았다. 10년 넘게 피붙이처럼 깊은 정이 든 제자들이니 갑작스런 작별에 어찌 흔들림이 없었겠는가. 귤동을 떠나는 스승을 전별(餞別)하려 제자 몇이 함께 길을 나섰던 모양이다. 한참을 함께 따라오던 제자들은 길이 갈리는 지점에서 스승과 작별하였다.
 
  “서울로 올라가서 다시 인사 여쭙겠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허망한 인사 앞에 다산이 먼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다시 발걸음이 용강에 닿자 그곳에 시집와 있던 윤규로의 딸이 다산을 맞이하여 푸짐한 상을 내왔다. 용강은 어디였을까? 12년 뒤인 1830년에 다산이 용강 진사(進仕) 집안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남은 것을 보면 이후로도 지속적인 왕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족보상으로 보아 이기풍(李基澧)에게 시집간 첫째 딸인가 싶은데 특정하기는 어렵다. 편지 속의 ‘용강’과 ‘부춘산’은 강진에서 상경 길을 따라 이틀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속명(俗名)인 듯 문헌에서 잘 잡히지 않는다.
 
  편지 속의 ‘원이’는 윤규로의 막내아들 윤종진(尹鍾軫·1803~1879년)이다. 그의 아명(兒名)인 원례(元禮)를 줄여 말한 것이다. 다산은 초당의 막둥이였던 윤종진을 특별히 아껴 그를 위해 친필로 〈순암호설(淳菴號說)〉도 지어 준 바 있었으므로, 작별에 임해 더욱 애틋한 마음을 표시했다. 당시 15살이었던 윤종진은 이후 죽을 때까지 다산 집안과 우의를 지켜, 다산의 큰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년)이 마치 한 가족과 같다고 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두고 온 소실 딸에 대한 당부
 
  편지 중간에 ‘지자지정(止慈之情)’을 말한 단락 이하의 내용이 조금 묘해 유독 눈길을 끈다. 이 말은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3장에 “아비가 되어서는 인자함에 그친다(爲人父止於慈)”라 한 데서 나온,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일컫는 표현이어서다. 일부러 말꼬리를 흐려 맥락이 선명하게 잡히지 않지만, 다산이 강진에 두고 온 소실(小室)에게서 낳은 딸에 대한 당부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자식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실로 애틋하나, 일의 대소와 경중, 정도와 권도, 굴신(屈伸)의 도리로 살펴야 하겠기에 결정을 중의에 따르겠노라고 위임했다. 편지 끝에 “천 리 밖 구구한 저의 말 못 하는 정(千里外區區之默默之情)”을 말한 것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당시 다산의 난처하고 난감한 심정이 느껴진다.
 
  이 편지로 보아, 알려진 것과 달리 다산은 해배(解配)되어 상경할 때 소실 모녀를 대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남 보기에 민망하고, 무엇보다 집에 도착해서 벌어질 소동이 감당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끝에 성통과 배연이란 이름이 보인다. 성통은 다산의 편지에 여러 번 나오는데, 그의 이름은 아직 못 찾았다. 편지에 자주 보이는 김인권(金仁權)이나 해남 쪽 윤씨였던 듯하다. 그는 다산의 강진 쪽 여러 일 처리를 대신하고 비용을 도왔던 제자다. 배연은 제자 윤종영(尹鍾英·1792~1849년)이다. 다산은 귤동 윤규로에게 소실에게서 얻은 딸 문제를 이 두 제자와 상의해서 자신의 말 못 해 애타는 마음을 헤아려 줄 것을 당부했다.
 
  편지에서 보듯 18년 만에 이루어진 다산의 해배 길이 마냥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집안의 경제는 거덜이 났고, 강진에서 들고 온 무거운 돌 하나가 그의 가슴 위에 얹혀 있었다.
 
  우연한 검색으로 찾은 편지 한 통에 참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결국 이 편지로 인해 나는 오래 묵혀 둔, 강진에 두고 온 다산의 소실 딸의 행적에 대한 추적을 시작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어린 딸로 인해 생긴 마음의 병
  “수중에 한 푼 돈조차 없고 보니…”
 
정약용의 1820년 8월 3일 자 편지(개인 소장).

  해배 후 다산은 강진 귤동으로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중 개인 소장의 편지 한 통은 위 편지를 쓴 11개월 뒤인 1820년 8월 3일에 쓴 것이다. 처음 편지는 귤동의 윤종삼(종진의 형 종익)에게 보낸 듯하고, 뒤쪽에 쓴 추기(追記)는 그의 부친인 윤규로에게 썼다. 따로 편지를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나중에 따로 편지를 쓰겠노라 한 내용이다.
 
  〈기묘년(1819) 8월의 편지가 지난달에 비로소 도착했으니 딱 1년이 걸렸구나. 부쳐 준 떡차와 찻잎, 비자와 연실(蓮實)은 모두 정스런 선물로 잘 받았다. 다만 듣자니 두 집이 한꺼번에 빌 염려가 있다 하니 너무도 개탄스럽다. 가을 기운이 이미 맑은데, 그사이 조부모님과 부모님 모시고 평안하다니 다른 근심이 없어서겠지. 종형제 중에 이번 과거 길에 혹 움직이려는 사람이 있는가? 쉽지 않을 거라고 보네.
 
  나는 대개 병이 없어 밥이 오면 밥 먹고, 옷이 오면 옷을 입으며 지내네만, 수중에 한 푼의 돈조차 없고 보니 이 때문에 빠트리는 일이 많아 진실로 탄식할 만하다네. 이번 봄에는 과연 좋은 방도가 있을 듯하여 이 일 저 일 모두 묵묵히 지나보내고 있는 중이라네.
 
  이처럼 미적대며 기필함이 없는지라, 어린 딸의 일로 마음에 병이 하나 생겼지만, 어찌 결말이 날지는 모르겠네. 내 나이가 이처럼 많아 남에게 억지로 절개를 지키라 할 수도 없고 보니 여러 사람의 의론은 어떤지 모르겠네. 비록 주객(主客)의 사이라도 어찌 이처럼 맹랑하게 서로 잊은 사람처럼 할 수 있단 말인가? 첫째는 구애되어서이고, 둘째는 기다리는 것이며, 셋째는 인편이 없어서일 걸세. 이런 본뜻을 헤아리면서 장차 결과를 지켜볼 뿐이네. 번잡한 것은 모두 줄이고 갖추지 않네. 1820년 8월 3일, 척기(戚記) 무명(無名) 돈(頓).
 
  己卯八月之書, 前月始來, 歲適一周矣. 所寄茶餠茶葉棐肉蓮子, 並領情貺矣. 但聞兩齋有一空之慮, 極用慨歎. 秋氣已淸, 比來重侍平安, 無他憂故耶. 從兄弟中, 今番科行, 或有能動者耶? 恐未易也.
 
  吾大抵無病, 而飯來則飯, 衣到則衣, 手中無復一文錢, 以是之故, 事多庨缺, 誠可歎耳. 今春果有好道理, 故此事彼事, 並含默以過矣.
 
  荏苒如此, 無以期必, 以穉女事, 作一心恙. 未知作何結局耶. 吾年此高, 不可强人之守紅, 未知僉議如何. 雖於主客之間, 豈有如是孟浪若付之相忘者耶? 一則拘也, 二則待也, 三則無便也. 恕此本情, 且觀畢竟而已. 絮雜並除之, 不具. 庚辰八月三日, 戚記無名頓.
 
[추신] 이 편지를 성래(聖來)가 돌아가는 편에 부치려 했는데, 바로 7월 26일의 편지를 받고 보니 크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제 막 배연을 보았고 또 원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런저런 사정은 모두 줄입니다. 나는 별일 없이 여전합니다. 어린 딸의 목에 난 종기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시니 이미 나은 모양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8월 9일, 척기 드림.
 
  모두 원례가 돌아갈 때로 미루기로 하고, 오지 않으면 배연이 돌아갈 때 쓰지요.
 
  此書將付之於聖來回便, 卽又承七月卄六日書, 審慰多少. 方對拜延, 又企元禮, 多少並略之. 弟狀姑如昨耳. 穉女項癰, 無所示, 似已平矣. 姑不宣. 八月九日, 戚記頓.
 
  都留元禮歸時, 不來則拜延歸時耳.〉

 
앞 편지의 추신 부분.

  지난해인 1819년 8월에 윤종삼이 보낸 편지가 근 1년 만에 두릉에 도착했다. 답장을 쓰려는데 7월 26일에 새 편지가 제자 윤종영의 상경 시 여러 선물과 함께 도착했으므로 고쳐서 답장을 썼다. 비자 열매와 연실은 모두 귀한 약재였다. 특히 비자 열매는 구충제로 요긴하게 쓰였다. 다산이 아껴 마시던 떡차와 잎차도 함께 올라왔다.
 
 
  “동암과 서암이 모두 비게 되었다니”
 
  이 1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다산초당의 양재(兩齋) 즉 동암과 서암이 모두 사는 이 없이 텅 비게 생겼다는 소식에 다산은 크게 낙담했다. 그 1년 사이에 소실 모녀는 상경하여 두릉 집으로 다산을 찾았다가 홍씨 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그대로 쫓겨나 다시 내려왔다. 친정이 남당포였던 그녀는 친정으로 가지 않고 다산초당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이때의 자세한 정황은 별도로 전하는 〈남당사(南塘詞)〉 16수에 자세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따로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정민, 《삶을 바꾼 만남》, 문학동네, 2011, 359~373면 참조)
 
  소실 남당댁은 이곳에서 오매불망 다산의 연락을 기다리며 지냈다. 하지만 1년이 다 가도록 아무 소식이 없고 딸도 데려가지 않자, 그녀는 다산을 원망하며 개가 운운하면서 초당을 떠나겠다고 소동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다산은 수중에 동전 한 닢조차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토로하는 한편, 새봄에는 뭔가 방법이 생길 희망이 보인다고도 했다. 자신은 딸 문제로 마음에 병이 생긴 상태인데, 막상 두릉으로 올라오게 하기는 어렵고, 남당댁은 딸을 버려두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이런 맹랑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다산도 그녀가 직접 올 수는 없고, 기다리기는 막막하고, 인편조차 구할 수 없다 보니 분이 나서 그런 것이지 본심이야 오죽하겠느냐고 이해했다. 추기에서는 지난번 딸의 목에 종기가 나서 애를 태웠는데,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이미 나은 모양이라며 안타까운 아비의 정을 드러냈다.
 
  이렇게 두 통의 편지를 엮어서 읽자 강진에 두고 온 딸 걱정으로 타들어 가던 다산의 다급한 속이 읽힌다. 당시 다산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6. 딸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눈에 쑥 들어온 ‘정녀병보(丁女病報)’ 네 글자
 
강진 다산박물관 기탁, 윤종진의 〈순암여좌〉 간찰.

  2025년 5월 9일 강진 다산박물관에 들렀을 때, 최기린아 학예사의 안내로 수장고로 들어가 그사이에 새로 수집한 다산 친필과 기탁 자료를 잠깐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시간이 없어 휙휙 건너뛰며 보는데 〈순암여좌(淳庵旅座)〉란 제목이 붙은 간찰 하나에 눈길이 가서 멎었다. 편지 중간에 ‘정녀병보(丁女病報)’란 네 글자가 눈에 쑥 들어왔기 때문이다. 얼른 사진을 찍고 올라와서 크게 출력해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무언가 묘하게 짚이는 데가 있었다. 전문이 이랬다.
 
  〈가형(家兄)께 드린 편지에 병영(兵營)에서 들은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라 할 만합니다. 문임(門任) 한 사람은 이미 마음을 정하였고, 이를 형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 뇌종(雷從)이 그 정녀(丁女)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도당(陶塘)에 갔습니다. 봉곡(捧穀·환곡 바치는 것)과 세조(稅租)를 내어주는 일은 마땅히 빨리 획급(劃給)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윤주기(尹柱麒) 그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리라 여겼건만 오랫동안 아무 소식도 없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형께서는 또 남당실(南唐室)의 상(喪)을 당하시고 장례를 치르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무슨 정력(精力)으로 생각이 미치겠습니까? 답장에서 하신 말씀은 또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즉일, 족말(族末) 윤종민(尹鍾敏) 돈수.
 
  審抵家兄書, 兵營所聞無慮之說, 可謂好消息也. 門任一人, 已有心定, 稟于家兄. 而玆雷從, 聞其丁女病報, 急往陶塘. 捧谷與稅租出給事, 當從速已劃, 勿慮如何.
 
  尹柱麒一人, 亦當爲所當爲矣, 今寂然無聞, 怪矣哉. 家兄又喪南唐室, 出喪屬耳. 有何精力, 念到乎? 答書云云, 亦是未準之言也. 卽日, 族末鍾敏頓.〉

 
  이것만으로는 앞뒤 사정을 가늠하기가 충분치 않다. 첫줄에 ‘순암여좌(淳庵旅座)’라 한 것은 순암 윤종진이 당시 고향 귤동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고, 그곳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뜻이다. 짐작건대 윤종진은 두릉에 올라와 있던 상태였다.
 
  편지 앞쪽에 강진 병영 쪽에서 들은 ‘염려할 것 없다’는 이야기와 윤씨 문중의 일에 관한 언급이 잠깐 나온다. 편지에 나오는 윤종민의 ‘가형’은 족보상 무관직을 지낸 윤종직(尹鍾直·1795~1878년)일 것이다. 문맥상 윤종직의 ‘남당실’은 다산의 ‘남당댁’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그러고 나서 뇌종이란 사람이 ‘정녀병보’, 즉 다산 소실 딸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도당으로 찾아가 어린 딸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고, 그 밖에 봉곡과 세조 등의 다급한 문제 처리를 도와주고 왔다고 했다.
 
 
  장흥 도당리에 살던 딸
 
  이 편지를 통해 소실 딸이 앞선 편지 이후 1820년 겨울 초당을 떠나 도당리(陶塘里)에 머물던 정황이 포착된다. 이때 소실도 같이 그곳에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도당은 김희태 선생의 도움을 받아 인근 지명을 샅샅이 뒤져 보니, 장흥군 회령면(會寧面)에 도당리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회령면은 지금의 회진면(會津面)으로 갯가 마을이다. 이후 신영호 선생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행정구역의 일부 변경으로 보성군 회천면(會泉面) 회령2리에도 ‘도당(陶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글자가 ‘당(塘)’이 아닌 ‘당(唐)’이지만 두 글자가 예전 문헌에서 흔히 섞여 쓰인 것을 감안하면 이 어디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산은 초당을 떠나 도당리로 옮겨 가 지내고 있던 딸이 아프다는 소식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들었던 듯하고, 두릉에 와 있던 윤종진을 통해 해남 살던 제자 윤종민에게 딸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윤종민이 전후 상황을 윤종진을 통해 다산에게 보고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간 다산이 강진 시절 소실에게서 얻은 딸에 관한 풍문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막상 실물 자료를 통해 입증되지는 않았다. 다산이 쓴 〈남당사〉 16수도 정말 다산의 작품인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계속된다. 필자는 〈남당사〉는 다산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작품으로 본다. 어쨌거나 다산이 강진 시절 소실에게서 딸 하나를 얻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강진에서 다산은 동문 밖 주막집에서 근 7년을 보내고, 제자 이정의 남당포 집에서 1년을 지낸 뒤, 1808년 봄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계속된 작업으로 몸에 무리가 왔다. 1811년경부터 가벼운 마비 증세가 오더니 손발을 움직이기가 불편하고 입가로 침이 흘러내렸다. 당시 다산의 처지에서 병구완을 위해 유배 11년 만에 어쩔 수 없이 소실을 들인 것은 비난 받을 일이라 할 수 없다. 앞으로 더 살펴보겠지만, 다산은 끝까지 딸을 보살피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그 딸의 후일담은 오늘에 남은 것이 거의 없다. 그렇더라도 이 사실 자체를 덮거나 외면하려 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떨어져 있던 사연들이 맥락을 만들어 내고
 
  이번 호에서는 세 통의 편지를 읽었다. 이 또한 맥락 없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들이다. 인터넷 검색과 강진 다산박물관 수장고에서 눈에 띈 윤종진의 편지, 그리고 다산이 귤동에 보낸 또 다른 편지 등 각각의 장소에 따로 떨어져 있던 사연들이 하나의 맥락을 만들어 내서 글 속에 결이 생기고 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대단히 놀랍다. 이러한 우연의 연속에서 가끔 알지 못하는 어떤 섭리의 손길을 느끼기도 한다. 특별히 세 번째 편지의 탈초(脫草)와 해석은 박철상, 김영복, 권오영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감사의 뜻을 따로 표한다.
 
  다음 호에서는 다산이 초당에서 소실을 들이기까지의 과정과, 1821년 봄 제자를 시켜 어린 딸을 업고 상경시키려 한 내용이 실린 또 다른 편지 몇 통을 더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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