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콜, 잉그릿 버그만이나 패트리샤 닐을 능가하는 오만함과 도도함
⊙ 바콜의 재산목록 1호인 ‘눈초리(the Look)’… “환상적인 40년대(Fabulous Forties)”를 상징
⊙ 스탠윅, 서부의 무법자이자 여장부로 대중에게 각인돼
⊙ 스탠윅, “어떤 영화든 내 얼굴이 15분만 비치면 다른 배우를 압도할 자신 있다”
安正孝
⊙ 71세.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코리아헤럴드》 기자, 《코리아타임즈》 기자·문화체육부장,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 주요 작품으로 소설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은마는 오지 않는다》(후에 《銀馬》) 《악부전》 《솔섬》 등이 있다.
번역서로 《백년동안의 고독》을 비롯해 150여 권이 있다.
⊙ 바콜의 재산목록 1호인 ‘눈초리(the Look)’… “환상적인 40년대(Fabulous Forties)”를 상징
⊙ 스탠윅, 서부의 무법자이자 여장부로 대중에게 각인돼
⊙ 스탠윅, “어떤 영화든 내 얼굴이 15분만 비치면 다른 배우를 압도할 자신 있다”
安正孝
⊙ 71세.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코리아헤럴드》 기자, 《코리아타임즈》 기자·문화체육부장,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 주요 작품으로 소설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은마는 오지 않는다》(후에 《銀馬》) 《악부전》 《솔섬》 등이 있다.
번역서로 《백년동안의 고독》을 비롯해 150여 권이 있다.
프랑스에 비시 정부가 들어설 무렵 미국을 떠나 여섯 달 동안 에스파냐와 브라질을 떠돌며 악마의 섬까지 거쳐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까지 흘러온 뜨내기 바콜은 호텔을 전전하며 소매치기로 먹고사는 젊은 아가씨다. 그녀는 (<파국>에서 닐이 그러듯이) 허락도 없이 남자들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담배와 불을 마음대로 챙기는가 하면, 낚싯배의 선장 험프리 보가트를 처음 만날 때부터 치뜨거나 흘기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영화가 40분 이상 진행될 때까지 계속되는 차갑고 표독스러운 그녀의 ‘눈초리(the Look)’는 이후 ‘환상적인 40년대(Fabulous Forties)’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정착돼 바콜에게는 재산목록 1호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위기를 만나도 절대로 긴장하지 않고 자신만만한 성깔을 드러내는 바콜의 눈초리는 버그만과 닐의 도도함처럼 자신의 개성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 스벵갈리(Svengali)의 작품이었다.
‘스벵갈리’는 삽화가로도 유명한 영국 작가 조지 뒤 모리에(George du Maurier·1834~96)의 소설 《트릴비(Trilby)》에서 최면술의 힘으로 평범한 모델을 위대한 성악가로 만든 흉악한 헝가리 음악가로서, 예술계에서는 어떤 평범한 사람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탄생시키는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인다. 바콜의 경우에는 하워드 혹스(Howard Hawks·1896~1977) 부부가 스벵갈리였다.
연극학교에 다닌 다음 극장 안내원과 모델로 일하던 19살 바콜의 얼굴 사진이 실린 여성 잡지(《Harper's Bazaar》)의 표지를 부인이 먼저 보고 혹스에게 그녀를 배우로 키워 보도록 제안했다고 한다. 혹스는 바콜을 원자재로 삼아 철저한 인간개조 작업에 착수하여, 경험이 전무한 풋내기의 이름을 새롭게 바꿔 주고, 목소리는 낮춰 중성의 저음으로 다듬어 놓는 따위의 미세한 부분까지 표정과 동작의 연기를 그녀에게 지도했다. 혹스 부인은 개인적으로 바콜의 의상과 교양교육을 분담했다.
바콜, 새로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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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명탐정 필립 말로우>에서 바콜과 험프리 보가트. ‘말라깽이 여자의 눈초리’가 인상적이다. |
거기에다가 <탈출>은 삐딱한 성격의 보가트 인물구성, 월터 브레난의 술중독자 명연기, 짧고 뼈가 박힌 대사의 좌충우돌 찔러대기가 대단한 속도감을 자아내고, 레지스탕스 부부를 탈출시키기 위해 좀비 술집을 나서면서 바콜이 두 박자 춤(two-step)을 추듯 엉덩이를 까불어대며 화면 밖으로 퇴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전 세계 남성 관객을 열광시켰다.
이렇게 단 한 편의 영화로 정상에 도달한 바콜에게 극작가 모스 하트(Moss Hart·1906~61)는 “꼭대기에 올라가면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유명한 충고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바콜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첩보원(The Confidential Agent)>에서 샤를 부아이에, 완다 헨드릭스, 피터 로리, 카티나 팍시누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과 공연했다가 참패를 맛보았다. 허만 슘린(Herman Shumlin) 감독은 스벵갈리가 아니었다.
바콜은 이때의 충격을 오랫동안 이겨내지 못해서, 혹시 그녀의 앞날에 해가 될까 봐 작품 선정에 극도로 세심해졌고, 그로 인해 계약 파기에 이를 정도로 워너 브라더스와 충돌이 잦았다. 바콜이 다시 스벵갈리 혹스 감독의 손으로 넘어가 험프리 보가트와 한 번 더 호흡(chemistry)을 맞춰서 만든 <명탐정 필립 말로우(The Big Sleep·1946)>는 대단한 속도감을 내는 대사가 불꽃을 일으키며 날카롭게 충돌하여 극도로 긴장을 연출한다.
<명탐정>에서는 탐정 보가트에게 협박사건의 처리를 의뢰하며 백만장자 퇴역 장성이 그의 딸 바콜을 ‘냉정하고 영리하고 무자비한’ 여자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비꼬는 말투와 무례함을 무기로 삼는 무뚝뚝한 보가트 또한 바콜에게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약점을 노리며 서로 견제하는 초반부의 탐색전에서는 상대방에게 ‘평가의 대상이 되기(rated)’를 싫어하는 두 주인공의 절묘한 치고받기 대사가 상황을 전개하는 줄거리 자체보다 훨씬 맛깔스럽다.
혹스-바콜의 두 영화 <탈출>과 <명탐정>은 대사의 활성도가 누가 뭐라고 해도 원작에서 가장 큰 힘을 얻었다. <탈출>은 단답형 스타카토(staccato) 문체로 유명한 헤밍웨이의 소설이 원작이요, <명탐정>은 당대 최고의 추리작가 레이몬드 챈들러(Raymond Chandler·1888~1959)가 원작자였기 때문이다. 앨런 래드와 베로니카 레이크의 <비정도시(非情都市·The Blue Dahlia·1946)>, 그리고 바바라 스탠윅의 출세작 <심야의 고백(Double Indemnity・1944)>의 각본을 맡기도 했었던 챈들러가 탄생시킨 ‘명탐정 필립 말로우’는 오른쪽 귓밥을 자꾸 만지는 버릇으로 유명하며, 챈들러의 다른 장편소설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탈출>과 <명탐정>은 두 영화 모두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가 각색에 참여해서인지 분위기가 두드러진 일관성을 보인다. 예를 들면, <탈출>에서는 바콜이 먼저 덤벼들어 키스하니까 보가트가 “왜 그랬냐”고 묻는다. 바콜은 “키스하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서 그랬다”고 말하고는 다시 키스를 하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댁에서 협조를 해 주니까 훨씬 더 좋군요.”
그리고 <명탐정>에서 바콜은 키스를 한 번 한 다음 보가트에게 “해 보니까 좋네요. 더 하고 싶어요(I like that. I like more.)”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다시 키스를 한 다음에 바콜이 하는 말이다. “이번이 훨씬 더 좋군요.”
네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든 바콜과 보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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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콜과 보가트의 세 번째 영화 <어둠의 길>. |
세 번째 바콜-보가트 영화 <어둠의 길(Dark Passage·1947)>은 아내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복역 중에 탈옥한 보가트가 성형수술을 하고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과정을 담은 조금쯤 황당한 내용이다. 그리고 바콜은 여기에서 그를 숨겨 주고 사랑하는 착한 아가씨 역을 맡았다. 이때쯤에는 바콜이 보가트와 결혼한 다음이어서인지 ‘눈초리’가 훨씬 부드러워진다.
두 사람을 다시 묶어 존 휴스턴이 만든 <키 라르고(Key Largo·1948)>는 언론인 출신의 퓰리처상 극작가 맥스웰 앤더슨(Maxwell Anderson)이 쓴 희곡이 원작이다. 우기를 맞아 한가한 산호섬(key)의 호텔로 위조지폐를 조폭들에게 팔아먹으려고 쿠바로부터 잠입한 에드워드 G. 로빈슨 일당, 특히 술 중독에 걸린 몰락한 여가수 클레어 트레버가 태풍이 몰아닥치는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상황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보가트와 바콜에게서는 더 이상 마법이 보이지 않는다. ‘바콜 눈초리’는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네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든 그들은 첫 영화 촬영을 시작한 지 몇 주일 만에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고, 두 번째 영화 <명탐정>이 완성되었을 때쯤에는 20세와 45세라는 나이 차이에도 부부가 되었다. <명탐정>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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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밍웨이의 소설 《가진자와 안 가진자》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탈출>의 포스터. 바콜은 예비 요부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
“Nothing you can't fix.”(당신만 있으면 다 해결돼요.)
이렇게 척척 맞아떨어지는 그들의 금실을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믿고 섬기며 입에 올리고는 한다. 그러나 보가트가 죽어 그녀가 재혼한 다음까지도 마치 그들이 2인3각의 상징처럼 하나로 여기던 사람들의 인식이 바콜에게는 퍽 불편했던 듯싶다. 자신의 독립된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오랫동안 안간힘을 썼던 그녀는 1970년 《라이프》 특집을 통해 이렇게 밝히기까지 했다.
“보가트는 13년 전에 죽었고 난 아직 살아 있어요.”
일단 정상에 오르면 필연적으로 내려가야 한다던 모스 하트의 경고도 그녀에게 평생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작품 선택에 무척 많은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한동안 그녀에게 돌아오던 배역은 <정열의 광상곡(Young Man With a Horn·1950)>에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커크 더글라스와 결혼하여 남자를 파멸로 몰고 가는 나쁜 여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제작한 통속적인 지방색 활극 <위기 대탈출 작전(또는 ‘인도의 정열’ Flame Over India 또는 North West Frontier·1959)>에서 그녀는 ‘반란군’(다른 시각으로 보면 ‘인도의 독립투사들’)의 암살 음모를 피해, 영국군 장교 케네드 모어 대위의 도움을 받아 가며, 6살 난 인도 왕자를 델리로 호송하는 활달한 가정교사 역을 맡았다. “내가 필요하면 휘파람을 불라”고 했던 요염한 바콜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역이었다.
캐더린 헵번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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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름다운 질투>에서 바콜과 그레고리 펙. |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경쾌한 희극 <아름다운 질투(Designing Woman ·1957)>에서는 본디 그레이스 켈리가 주연을 맡기로 했었지만, 1955년에 켈리가 레이니에 3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는 바람에 로렌 바콜에게로 (나중에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게 될) 대본이 넘어갔다. 바콜은 이 무렵 (1957년에 사망하는) 남편 보가트의 병간호를 하느라고 집에서 음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던 터여서, 기분전환을 위해 이 영화의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뉴욕신문의 민완 체육기자 그레고리 펙은 캘리포니아로 골프경기 취재를 가서 내기를 걸었다가 1200달러를 따는 횡재를 하고, 이 돈으로 다른 기자들과 어울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진탕 술을 마신다. 이튿날 아침 수영장에서 “옷을 짓는다”고 신분을 밝히면서 바콜이 그에게 인사를 하지만, 펙에게는 그녀가 누구인지 통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젯밤 술판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서, 잔뜩 취한 펙은 그녀와 함께 승부조작을 일삼는 권투 흥행주에 대한 폭로기사를 써서 뉴욕으로 송고했고, 펙은 그녀에게 ‘공동 집필’을 한 수고비로 700달러까지 준 사이였다. 바콜은 술김에 준 돈을 돌려주려 하고, 펙은 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 두 사람은 그 돈을 함께 다 써버리기로 합의를 본다. 그들은 이곳저곳 발이 닿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놀러다니다가 벼락 사랑에 빠져 내친김에 애리조나에서 결혼식까지 올린다.
뉴욕으로 함께 돌아온 그들은 현실을 점검하기 시작하면서 난감한 갈등에 빠진다. 가난뱅이 기자 펙이 살던 비좁고 지저분한 집과는 달리 백만장자 의상 전문가인 바콜은 상류사회를 주름잡는 인물이다. 문지기까지 따로 있는 고급 주택에서 하녀를 두고, 하루에 옷을 아홉 번씩 갈아입으면서 ‘압구정동’처럼 으리으리하게 살아가는 여자다. 큰일이 난 것이다.
자존심에 깊은 금이 간 펙은 두 사람이 상대방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장벽에도 부딪힌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의 세계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우선 바콜은 피가 튀는 권투시합을 난생처음 견학하며 졸도하기 직전에 이렇게 묻는다.
“저렇게 두꺼운 장갑을 끼고 때리니까 아프지는 않겠죠?”
그런가 하면 펙은 갑작스러운 사랑에 너무 신이 나서 정신없이 결혼을 서두르다가 깜박 잊고 애인에게 미안하다는 전화 한 통 못했다. 그래서 아직 교통정리가 끝나지 않은 뮤지컬 가수 돌로레스 그레이의 뒤늦은 허락과 용서를 받는 일은 물론이요, 찢어버린 사진 조각을 보고 우연히 과거의 비밀을 알아낸 아내 바콜이 질투심에 사로잡혀 “과거가 혹시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른다”고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오자 더욱 난감해진다.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에서 술김에 바콜과 함께 신문에 용감무쌍하게 폭로한 조폭 흥행주의 졸개 척 코너스에게 펙은 코를 비틀리는 수모까지 당하면서 안팎으로 위기가 몰아닥친다.
눈을 뜨고 자는 몰락한 권투선수 미키 쇼네시, 그리고 조폭들과 격투를 벌이는 ‘미치광이’ 안무가의 맹활약까지 곁들인 <질투>는, 딘 마틴과 제리 루이스의 발작적인 희극 <화가와 모델(Artists and Models·1955)>과 더불어, 할리우드 키드가 극장에 가서 배꼽 터지게 가장 많이 웃었던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아름다운 질투>에서 바콜은 콧대가 하늘처럼 높은 사교계의 도도한 여왕이면서도 사랑에 빠지면 식욕이 왕성해져서 갑자기 체중이 늘어나는 ‘말라깽이’, 그리고 조금만 흥분하면 남자의 귓밥을 깨물어 주는 ‘귀여운 여인(요부)’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요란하게 과시하여 남성 관객을 홀렸고, 영화가 극장에 내걸린 다음에 《뉴욕 타임스》는 <질투>의 두 주인공을 “캐더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의 부활”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표독스럽고 백만장자 사냥을 꿈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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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에 함께 출연한 여우들. 오른쪽부터 마릴린 몬로와 바콜, 베티 그레이블. |
머리가 좀 모자라고 사납고 단순한 변덕쟁이 바콜은 고지식하고 늙은 남편을 무척 사랑하면서도 걸핏하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잡아먹을 듯 덤벼들며 날마다 싸움질을 벌인다. 그래서 폰다는 하루가 멀다고 짐을 싸서 커티스가 사는 옆집으로 가출한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는 파티에서도 두 사람은 행복에 겨워 감격해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뻗정다리 트위스트를 말뚝 인형처럼 추다가, 잠시 후 그가 생산하는 스타킹으로 “포장할 상품을 연구한다”면서 폰다가 다른 여자의 다리를 지나치게 열심히 ‘관찰’하는 현장이 발각되어 대판 싸움을 벌인다.
결국 폰다는 ‘바가지만 긁어대는 마귀할멈’으로부터 탈출한다면서 (사실은 다른 젊은 여자와 몰래 동행하여) 남태평양으로 도망가는 비행기를 타러 간다. 그리고 가출한 폰다를 전속력으로 추적하는 바콜과 더불어, 여러 주인공이 모두 고속도로로 몰려나와 한꺼번에 공항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면서 <매드 매드 대소동>을 방불케 하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들을 몽땅 단속하려던 교통경찰관은 결국 교통지옥에 빠져 미쳐버려서, 가로등을 포함한 공항 전체를 체포하려고 날뛰다가 정신병원으로 실려 간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How to Marry a Millionaire·1953)>에서는 모델로 일하는 뉴욕의 무일푼 세 여자 로렌 바콜, 베티 그레이블, 마릴린 몬로가 한 방에 대박을 잡기 위해 호화 아파트먼트를 세내어 집주인의 가구를 팔아 집세를 내면서, 부유층 여성 행세를 해 가며 백만장자와 결혼해 팔자를 고치겠다며 남자 사냥에 나선다.
그렇게 해서 그레이블은 석유 재벌들의 모임에 참석, 프렛 클락을 만나 시골 산장으로 함께 놀러 가지만, 클락이 바람둥이 기혼자임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는 백만장자와 결혼하려는 꿈을 버리고 가난한 산림 감시원과 결혼하여 뉴욕으로 돌아온다. 눈이 워낙 나빠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문을 못 찾아 벽을 들이받고 사람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던 몬로는 엉뚱한 남자를 쫓아가고는 하다가 역시 백만장자가 아니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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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효가 그린 로렌 바콜 캐리커처. |
넥타이를 매지 않고 양복저고리 팔꿈치에는 가죽 조각을 덧댄 수수한 옷차림의 밋첼은 자기가 진짜 백만장자라고 계속 주장하지만, 처음부터 그를 주유소 직원쯤 되리라고 생각한 바콜은 그의 주장을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밋첼은 성실하게 진실을 말한다.
“석유장사도 좀 하고, 항공사 주식에 제강업, 그리고 텍사스에 내려가면 소도 좀 있고, 앨라배마의 탄광하고, 아파트먼트 한 동에, 여기저기 부동산도 좀 있고, 자동차 주식과, 그리고 물론 펜실베이니아의 브루클린 마을도 몽땅 내 소유죠.”
너무나 황당한 소리여서 세 여자가 “아무렴” 해 가며 더 이상 듣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사이에, 밋첼은 술값 계산을 하려고 호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둘둘 묶은 1000달러짜리 지폐 한 뭉치를 꺼낸다. 얼핏 보기에 200만 달러쯤 되겠다. 생맥주를 마시고 1000달러를 낸 다음 밋첼이 주인에게 “Keep the change, Mac”(잔돈은 자네 가져)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 여자가 놀라서 마룻바닥으로 동시에 꽈당 자빠지면서 영화가 끝난다.
스탠윅의 기구한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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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바라 스탠윅 캐리커처. |
“누가 날 총으로 쏴 죽이기 전에는 절대로 연기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스탠윅은 “어떤 영화에서이건 내 얼굴이 15분만 비치면 다른 모든 배우를 압도할 자신이 있다”라는 당당한 주장까지 했다. 이런 강인함은 잉그릿 버그만이나 패트리샤 닐, 그리고 로렌 바콜의 도도함과는 크게 다른 현실적인 행동지표였다. 아마도 그것은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빚어낸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 스탠윅이 네 살 때 그녀의 어머니는 브루클린에서 술 취한 사람이 전차에서 밀어 떨어트리는 바람에 사망했고, 어머니의 장례식 두 주일 후 파나마 운하 공사장으로 떠난 아버지는 영영 소식이 두절되어 스탠윅 3남매는 이리저리 입양을 받아 줄 부모를 찾아 전전하며 성장했다.
스탠윅은 그 후 온갖 궂은일을 하다가 16살에 뉴욕 타임스 광장에서 야간업소의 무희(舞姬)로 취직했다. 몇 달 후에는 ‘굶어 죽지 않고 좋은 외투 한 벌 마련하려고’ 유명한 지그펠드 가무단(Ziegfeld Follies)으로 옮겨가 몇 년 동안 활동하면서, 비밀 주점(speakeasy)에서 동성애자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교사노릇까지 했다. 열등감에서 빚어지는 자존심처럼, 아마도 스탠윅은 이런 모진 인생을 살아야 했던 생존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필요성에 따라 심리적인 방어기제(防禦機制·defense mechanism)를 갖추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이런 불우한 정서적인 배경 속에서 다듬어진 미모로 스탠윅은 1926년에 연예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도전적인 적개심이 불타는 반항적인 얼굴로 그녀가 ‘악독한 요부’ 역을 맡아 크게 성공한 작품은 <심야의 고백>이었다. 잡지에 연재했던 제임스 M. 케인(James M. Cain)의 중편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AFI가 선정한 20세기 명작 100편 가운데 38위로 꼽히는 고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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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귀부인 이브>에서 스탠윅과 헨리 폰다. 스탠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
빈틈없는 계획에서 완벽한 실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거치며 침착하게 도와주던 스탠윅에게는 그러나 숨겨 둔 애인이 따로 있었고, 맥머리는 그들 두 사람에게 단순히 이용당했음이 곧 밝혀진다. 뿐만 아니라 스탠윅의 의붓딸이 맥머리를 찾아와서 하는, 그녀의 친아버지를 계모 스탠윅이 살해했고 이제는 딸까지 죽이려고 한다는 놀라운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다리를 다친 가입자가 기차에서 떨어져 자살한다는 수학적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은 보험회사 조정관 에드워드 G. 로빈슨의 뒷조사가 압박을 가해 오자, 맥머리는 점점 더 궁지로 몰린다. 뿐만 아니라 스탠윅은 “모든 계획을 당신이 세웠으니까 우린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운명”이라고 죄를 몽땅 뒤집어씌우려고 맥머리를 협박한다.
패트리샤 닐처럼 감칠맛이 나는 ‘요부’가 아니요 로렌 바콜처럼 정감을 함께 주는 ‘요부’도 아니며, 그냥 한 남자의 인생을 망쳐 놓는 사악하고 범죄적인 여자일 따름이었던 스탠윅은 결국 맥머리의 총을 맞고 죽는다.
여자에 관한 두 시각, <위대한 여인>과 <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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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심야의 고백>에서 스탠윅은 ‘악독한 요부’ 역을 맡았다. |
별로 즐겁거나 유쾌하지 않은 희극 <귀부인 이브>에서의 차갑고 예쁜 스탠윅은 아무리 정신없이 교태를 부리고 매달려도 정말로 고약한 여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군중(Meet John Doe·1941)에서 해고 위기를 맞은 여기자 바바라 스탠윅은 ‘민중의 소리’를 조작하여 미국판 ‘나꼼수’ 사기극을 벌이려고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녀는 개리 쿠퍼를 그 각본에 맞춰 꼭두각시로 훈련시키는 음모를 주도한다. 하지만 건전한 집단 중심의 이상적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프랭크 캐프라 특유의 우화적 화법을 고려하면, 여기에서는 야심만만한 스탠윅을 나쁜 여자라고 간단히 몰아붙이기에는 무리가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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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군중>에 출연한 스탠윅과 개리 쿠퍼. 스탠윅은 해고 위기를 맞은 여기자로 분했다. |
두 사람은 포장마차 개척단 행렬과 함께 서부로 줄행랑을 놓고, 천둥번개 속에서 폭우를 맞으며 대충 결혼식을 올린 다음 허허벌판에 지어 놓은 판잣집에서 원시적인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스탠윅은 총을 들고 나가 토끼를 잡아 씩씩하게 칼로 배를 가르고, 야바위 도박사 브라이언 돈레비에게 남편이 돈을 빼앗기면 권총을 들고 달려가서 되찾아오기도 한다. 도시를 건설할 자금을 마련하려고 매크레이가 금광을 찾아 헤매는 동안 독수공방을 하면서도 그녀는 남편을 열렬히 응원한다. 그리고 몇 달에 한 번 찾아오는 남편의 신발에 묻은 흙을 보고 은광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사람도 바바라 스탠윅이다.
하지만 사소한 오해로 매크레이는 그녀를 버리고 떠나 버지니아 시티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둘이나 두게 된다. 우연히 소식을 듣고서 몰래 찾아간 스탠윅은 부패한 정치인이 된 그에게 젊은 시절의 꿈을 되찾으라고 충고하고는, 남자의 출세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새크라멘토로 돌아가 100살이 다 되도록 혼자서 살아간다. 그리고 1년 전에 다시 홀몸이 된 위대한 정치인 매크레이는 백발의 스탠윅을 찾아와 그녀의 침대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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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윅이 ‘서부의 여장부’로 출연한 <몬태나의 여걸> 포스터. |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1985)>를 보면, 마이클 J. 폭스가 딜로리안(DeLorean·DMC~12)을 타고 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가서 마을 광장으로 들어갈 때, 극장 앞에 세워 놓은 <몬태나의 여걸(Cattle Queen of Montana·1954)>의 포스터가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비밀 요원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스탠윅은 나쁜 인디언들과 결탁한 백인 악당들을 무찌르느라 맹활약을 벌이는데, 포스터에는 권총을 찬 스탠윅이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될 레이건보다 훨씬 앞쪽에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다. 이것은 할리우드 키드 세대가 가장 잘 기억하는 바바라 스탠윅의 모습이다.
스탠윅은 ABC에서 제작한 TV 연속 서부극 <대계곡(The Big Valley ·1965~9)>에서 네 아들과 딸을 이끌고 거대한 목장을 지켜 나가는 여장부의 역을 맡아 <보난자(Bonanza)>의 남성 목장주 론 그린과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