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 선교사, 가뭄과 기아로 고통받는 케냐 렌들레族 학생들 위한 캠프 열어
⊙ 에티오피아의 시골 학교 교장, “한 달에 3달러면 됩니다”
⊙ 400일간 東아프리카 縱斷, 유럽 거쳐 다시 西아프리카로 들어갈 것
文鐘星
⊙ 30세.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6년간 약 80여 개국을 자전거로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2007년 5월
미국 뉴욕에서부터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 북미와 중남미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 중.
⊙ 저서 : 《비전청년의 세계일주 - 자전거 타고 쿠바여행》 《라이딩 in 아메리카》
《일생에 꼭 한 번 가 봐야 할 곳, 멕시코》.
⊙ 에티오피아의 시골 학교 교장, “한 달에 3달러면 됩니다”
⊙ 400일간 東아프리카 縱斷, 유럽 거쳐 다시 西아프리카로 들어갈 것
文鐘星
⊙ 30세.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6년간 약 80여 개국을 자전거로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2007년 5월
미국 뉴욕에서부터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 북미와 중남미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 중.
⊙ 저서 : 《비전청년의 세계일주 - 자전거 타고 쿠바여행》 《라이딩 in 아메리카》
《일생에 꼭 한 번 가 봐야 할 곳, 멕시코》.

- 야생 하이에나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하라르.
몇 년 전 수년에 걸친 대가뭄이 들어 가축의 절반 이상이 떼죽음을 당하고 물 한 모금 구할 길 없는 기아에 허덕이는 모습으로 지구촌을 슬프게 했던 케냐 북부 코어(Korr) 마을. 지금까지도 생활에 필요한 제반 시설은 물론 물과 음식의 태부족으로 인간답게 살아야 할 최소한의 조건마저 충족하지 못한 채 고단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렌들레 부족 마을에 비전을 붙잡은 한 선교사 부부가 들어왔다. 30대의 젊은 최인호 선교사의 초청으로 나는 이 낯선 땅의 방문자가 되었다. 마침 마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일주일가량 캠프를 연단다. 문화생활을 누리기는커녕 차로 서너 시간 떨어진 도시조차 가본 적 없는 아이들로선 실로 엄청난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소문을 듣고 약 80명의 아이가 모였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에 이르는 이들은 모두 아이처럼 천진하기만 하다. 초롱초롱 맑은 눈망울이 되레 슬퍼 보일 정도다. 이 지역은 유목 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교육에 대해 무관심하다. 학교가 하나 있지만 기본적인 교육을 하는 데도 한참 못 미친다. 최인호 선교사는 이런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위해 쉽지 않은 걸음을 떼려 하고 있다.
“일주일만 더…”
처음 만남인데도 렌들레족 아이들은 얼마나 살가운지 모른다. 곰살궂게 다가와선 손을 잡고, 포옹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마음의 벽 없이 이토록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까닭은 그만큼 서로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줄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서로의 문화를 가르쳐주었다. 녀석들은 가위, 바위, 보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만국(萬國) 공통 관심사인 축구로 대화하면 속이 다 후련하다는 표정이다. 내게 보여줄 게 있다며 세 명이서 무동을 타고 헬리콥터를 만드는 장면에선 폭소가 터지다가도 비슷한 우리네 기마 자세를 가르쳐주면 금방 배워 또 한 번 자지러지게 웃는다. 어느새 난 과분하게도 그들의 특별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음악을 통해 영어와 율동을 배우고, 게임을 통해 공동체 속에서 배려와 협동심을 이해한다. 밤에 상영되는 영화를 보며 놀라는 모습이 꽤 귀엽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 토의 시간에는 개구쟁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저마다 개성 넘치는 창의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가장 기뻐하는 시간은 역시 식사 시간. 하루 한 끼 옥수수 죽으로 때우던 것이 세 끼를 푸짐하게 먹으니 이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할 순 없다.
“브라더 문, 나 있잖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뭔데, 윌리엄?”
“어휴,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는 게 아쉬워. 딱 일주일만 더했으면 좋겠다. 안 될까?”
말끝을 흐리며 검지를 꼼지락거리더니 일주일만 더하자는 윌리엄. 녀석은 아침 율동 시간에 코믹 막춤으로 친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개구쟁이 녀석이다. 처음에는 활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흩어져 있는 아이들이 만나 서먹했지만 캠프 기간 동안 모두가 그를 포용하고 진심으로 대하자 그렇지 않아도 활달하던 녀석이 더욱 감동받은 것이다.
“내년에도 캠프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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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프 마지막 날 렌들레족 아이와 함께. |
그러는 사이 어김없이 또 밤이 내린다. 유난히 까만 하늘에서 별들이 명멸하고, 절대고요와 거센 침묵은 아쉽기 그지없는 헤어짐을 재촉한다. 아이들을 뒤로한 채 마당에 텐트를 치고, 하늘을 이불 삼아 드러눕다 문득 남은 시간을 세어보니 그만 콧등이 시리다.
매일 행복 바이러스가 퍼지는 가운데 손 틈새로 스쳐지나는 바람처럼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캠프 마지막 날 밤, 다들 정신없이 염소고기 파티를 즐기는데 어여쁜 아하도(Ahado)가 슬쩍 다가오더니 수줍게 선물을 내민다. 자신이 차고 있던 팔찌다. 케나는 직접 만든 목걸이를 내게 주며 자신을 기억해 달란다. 오랜 시간 여행해도 헤어짐은 언제나 막막하고 서툴기만 하다. 윌리엄 녀석이 내가 떠난다는 사실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숨긴 창피한 얘기만은 비밀로 해두기로 했다.
“문,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지내면 안 돼?”
“여길 떠나도 우릴 잊지 말아줘. 다음에 다시 오는 거지? 내년에도 캠프 있는 거지?”
유목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내가 그들을 떠나는 슬픈 아이러니에 그저 미안함뿐이다. 사막에도 새벽이슬은 맺힌다. 모두가 캠프의 여운이 남아 곤히 잠들어 있는 시각, 나는 밤새 전갈에 물려 긴급치료가 필요한 현지 여학생과 함께 사막을 빠져나가는 트럭에 올라탔다.
몰래 지켜보던 표범과 자칼도 아쉬웠는지 기척을 내며 트럭 뒤를 순식간에 지나쳐 풀숲으로 숨는다. 낙타는 얼굴을 빠끔히 내밀며 우리가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다시 오기엔 너무 먼 곳, 동이 트지 않아 인사도 제대로 못해 더욱 미련을 놓지 못하는 곳, 그러기에 꿈을 가져본다. 반갑게, 또 만날 수 있기를, 꼭….
에티오피아行 비행기표를 끊은 이유
케냐와 에티오피아의 사이는 썩 좋지 않다. 케냐는 자신들이 아프리카의 진정한 리더라고 생각하고, 에티오피아는 자신들은 블랙 아프리카와는 거리가 먼 커피색 피부를 가진 우월한 종족임을 자부한다. 두 나라 사이의 국경 출입은 베테랑 여행자들마저 쉬이 간파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불복에 따라 향방이 갈린다.
나이로비의 에티오피아 대사관에 들렀지만 이전에 비자를 발급받았다는 한 여행자의 블로그 글과는 달리 나는 거절을 당했다. 케냐에서 에티오피아로의 육로(陸路) 입국(入國)을 불허(不許)한단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확인하고 왔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다. 행정처리가 멋대로다. “항공을 이용하면 갈 수 있다”고 냉연한 태도를 취해 별 수 없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야 했다. 바로 다른 나라로 가버릴까 순간 생각했지만 꼭 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었기에 나는 묵묵히 비싼 항공료를 지불해야 했다.
TV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보는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선 맹수의 왕 사자도 뒷걸음치게 만드는 동물 무리가 등장한다. 가만 보니 보츠와나 오카방고 삼각주(三角洲)에서는 빠르기로 소문난 치타마저도 1대1 싸움에서 처참하게 패해 다리가 부러진다. 상대를 압도하는 눈빛, 기분 나쁜 탁한 숨소리, 지옥의 사자라고 불리는 하이에나다.
<하이에나 떼와 조우하며 먹이를 줄 수 있는 곳, 격한 아드레날린 분비를 원한다면 하라르(Harar)로!>
가이드북을 보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대관절 하이에나처럼 성질 사납기로 소문난 맹수에게 직접 먹이를 주다니! 한 번 물리면 정말로 뼈도 못 추리는 악력(顎力) 대마왕에게 말이다!
소말리 반도를 가까이 두고 에티오피아 동부에 위치한 유적 도시 하라르는 이슬람 문화로 유명하다. 특히 도시 구석구석에 세워진 조그만 이슬람 사원은 앙증맞은 건축미를 자랑한다. 나는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불편한 좌석의 미니버스로 14시간 이상 가야 하는 것을 기꺼이 감내했다. 그렇다. 내가 비자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이유, 바로 이 하이에나를 보기 위해서다.
도시의 하이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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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 부상을 입은 하이에나지만 사람들에겐 여전히 위협적이다. 때문에 포클레인으로 안전하게 하이에나를 옮길 수밖에 없다. |
나라 자체가 워낙 먹을 것이 궁해 근 한 달 동안 수도 없이 먹은 에티오피아 전통 음식 인제라도 물리고, 일주일간 버스를 타며 지긋지긋한 고생 끝에 남부 지방의 특이한 종족들도 보고 오고, 한 달 3달러만 있으면 받을 수 있는 학교 수업에 소외되는 아이들도 만나고, 최악의 위생 상태에 노출되어 온몸을 벼룩에 물리고 나니 더 이상 여행의 낙(樂)이 사라지고 목적이 없어졌다. 이때 잠들어 있던 모험 본능을 일깨운 것이 바로 달밤에 하이에나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라르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하이에나가 도심 한복판에 출몰한 것이다. 부상을 입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지만 거친 숨을 몰아쉬다 포효라도 하면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친다.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어 부상 입은 하이에나를 구경하다가 녀석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혼비백산해 도망가는 꼴이란 정말 우스운 일이다. 다들 ‘설마 이 수백 명 중에 내가 공격당하겠어?’라는 안이한 표정들이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포클레인이 한동안 하이에나와 씨름을 한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온 것이다. 부상당해 걸음조차 불편한 하이에나가 굴복하여 포클레인 속으로 거두어질 때 사람들은 환호했고 나는 왠지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거대한 문명 앞에 힘없이 고꾸라지는 한 생명의 어찌해 볼 수 없는 무력감 때문이리라.
저녁에는 성문 밖으로 가이드를 고용해서 나갔다. 사실 혼자서도 갈 수 있는 거리와 위치지만 초행인데다 투어비용이 저렴해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다. 성문 밖의 밤은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산하고, 샛노랗게 물든 달은 교교하기만 하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멀리서 부산을 떨며 킁킁대는 무리의 그림자가 비쳤으니 그들이 바로 하이에나다!
하이에나와의 만남
가이드 안내에 따라 나무 아래에 앉아 있자니 10마리의 하이에나가 하나 둘 나에게 접근한다. 슬금슬금 다가오다 별안간 눈이 딱 마주치는데 오금이 저려 오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내가 보쌈이나 치킨으로 보일까’ ‘까딱하다 이제 병풍 뒤에서 가족을 만나는 건 아닌가’ 싶다.
“괜찮아요, 물진 않아요. 여기 고기가 있으니 한번 줘보세요. 웬 겁이 그리 많아요?”
하이에나를 애완견 다루듯 하는 하이에나 맨(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의 명칭)은 이런 내가 우스꽝스러운지 연방 놀려댄다. 데면데면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덜덜 떨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이에나의 별명은 ‘지옥의 숨소리’다. 생김새도 지옥에까지 따라올 것 같은 포스(force)가 느껴져 공포감을 주는데 숨소리까지 굉장히 거칠고 음산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시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하이에나들은 고기에만 신경을 쓸 뿐 고기를 내민 내 팔은 물지 않았다. 잘못 물리면 팔은 그대로 잘려나간다. 하이에나는 고양잇과(科) 맹수보다 악력이 5배 이상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그 과정에서 거대한 덩치와 무엇이든 잘게 부수어버리는 날카로운 이빨과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의 눈매에 압도당해 나는 생애 가장 머리털 쭈뼛 서는 경험을 해야 했다.
“하이에나야말로 야생 본능을 가장 제어하기 힘든 동물이지요.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우리는 하이에나와 관계를 맺고 공존(共存)하고 있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의 적(敵)이 아니지요.”
상식과 통념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이다. 진리로 믿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진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뒤늦게 도착한 일부 여행자 중 몇몇이 용기를 내어 먹이 주기에 도전한다. 나의 시선은 그들에게 멈춰 있다. 이지러진 조각달이 교태를 부리며 머리 위에 앉을 때도 나는 여전히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나 하이에나 맨의 조언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여기서나 안전하지, 다른 곳에서도 이러면 당신은 하이에나의 멋진 만찬이 될 뿐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야생에서 동물과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지금처럼 생과 사를 머릿속으로 그려본 적은 없었다. 혹시 다음번 다시 기회가 된다면 그땐 전문 사육사에게 길든 사자에게도 또한 다가가고 싶다. 아프리카에서만 그려볼 수 있는 그림이다. 그럴 배짱이 생길까 자못 궁금해지지만 말이다.
인구의 40%가 하루 1달러로 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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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냐 북부부터 흔히 볼 수 있는 낙타. 사막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자원이다. |
반면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참전 국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를 담당하던 10개 대대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제대로 훈련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영국군 교관의 훈련 아래 전투전술을 익혀 1951년 5월 6일 파견사령관 게브레(Kebbede Guebre) 대령 인솔로 부산에 도착한 에티오피아군은 이후 춘천 일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참전한 용사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는 곳이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위치한 한국촌(Korea Village)이다. 최근에는 한인교회와 구호 단체 등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과거 기독교 국가로 융성한 문화를 가졌던 에티오피아는 그 후 대가뭄에 이은 극심한 식량난을 타개하지 못했다. 지금은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의 독재 정치 아래서 약 40% 인구가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최빈국(最貧國)이 되었다.
그럼에도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최근 제법 규모 있는 메트로폴리탄으로 성장했다. 수많은 강대국의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덕분이다. 여기에 석유, 천연가스, 다이아몬드, 우라늄, 구리 등이 발견되어 에티오피아는 이제 ‘절망의 땅’에서 ‘지구상 마지막 성장엔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강대국들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한편으로는 구호활동으로 이미지를 쇄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알짜배기 사업에 진출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동쪽의 디레다와(Dire Dawa)로 향했다. 수도에서는 아무래도 에티오피아의 참모습을 쉽게 보기 힘들 것이란 생각에 지방 소도시를 통해 에티오피아의 현실을 보고 싶었다. 마침 디레다와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원이 있어 탐방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디레다와는 소말리 반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소도시다. 잿빛 하늘과 마른 바람은 이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위는 옅은 갈색으로 피로감을 더하고 ‘타는 목마름’이 밀려온다.
“우리 얘기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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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 디레다와 정교회 부속학교에서 수업받는 학생들. 한 달 3달러면 수업을 받을 수 있지만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다. |
방향을 돌려 외곽으로 향했다. 오전 시간인데 아이들이 하릴없이 놀고 있거나 부모 일손을 거드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주중(週中) 오전이면 학교에 갈 시간인데 이들이 최소한의 공교육이라도 받는 건지 궁금하다.
에티오피아 국교(國敎)인 정교회 교회 건물을 구경하고 있는데, 마침 나무 아래서 수업 중인 학급을 발견했다. 교실이 없어 나무 아래 의자만 두고 선생님이 흑판과 책을 이용해 산수를 가르치고 있었다. 말이 좋아서 야외수업이지 한눈에 봐도 교실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해놓은 티가 난다.
교회 건물을 돌아 안쪽으로 들어가니 교회 부속학교가 보인다. 서너 칸 되는 작은 교실에서는 유치원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지나치려던 중에 한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에티오피아산(産) 커피를 대접했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라며 권유한 것이다. 곧 교장 선생님과 다른 직원들도 교무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외부인이 이렇게 학교를 방문하는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우리 얘기를 알려주세요. 한 달 3달러만 있으면 아이들이 수업을 받을 수 있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오면서 보셨겠지만 많은 아이가 수업도 받지 못한 채 길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정교회에서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방정부도 방법이 없어 팔짱만 끼고 있습니다.”
원래 콥트교회(이집트의 기독교 교회)의 일원이었던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1959년 콥트교파로부터 독립, 국교는 아니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광범위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최근 무슬림 세력이 거세지면서 이들에게 상당한 타격이 되고 있다. 자신들을 구약(舊約)의 자손이라 믿는 교인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교장의 호소
실제로 에티오피아 주요 도시에는 거대한 모스크가 세워지고 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정교회 건물은 전 세계에서 가장 구걸하는 거지가 많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정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자연스레 정교회 부설학교의 재정자립도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나는 이 학교의 책임자로서 아이들이 교육을 받길 희망합니다. 그래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이 도시를 떠나 더 많은 것을 배워 다시 디레다와를 발전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학교가 좋진 않지만 이렇게 교실도 있고, 선생님들도 열심히 가르치고 있어요. 한 달에 3달러면 됩니다. 교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입니다.”
교장은 계속 ‘아이들, 3달러, 교육’이란 말을 반복했다. 사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심상찮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오죽 안타까웠으면 교장 선생님이 직접 나서서 나 같은 여행객에게 이렇게 호소할까? “에티오피아의 상황에 대해 기회가 될 때마다 가감 없이 알리겠다”고 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커피 맛이 쓴 건 원액이 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현실에 마음이 편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끝났다. 그나마 선택된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수업을 받는다. 밖으로 나가면 다시 먼지 풀풀 이는 마른 땅을 일터 삼아 노동하는 아이, 축구 하는 아이, 멍하니 누워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무엇이 이들의 경계를 나눴을까.
‘내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3달러가 아프리카 한 마을에선 한 아이의 한 달 수업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순간 낯이 뜨거워진다. 강바닥을 지나자 노란 모래바람이 일고 시야는 다시 뿌옇게 바래왔다. 뭐라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는 순간이 지나간다.
에티오피아 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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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 시골 마을에서 만난 한 소녀.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부피의 짐을 메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
에티오피아 국민은 주로 오모로족과 암하라족, 티글니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오지(奧地)로 들어가면 80여 개 이상 부족과 120여 개 이상의 부족어가 존재한다. 특히 남서부의 오모강(江) 지역을 기점(起點)으로 독특한 문화를 가진 소수(少數) 부족들이 살고 있어 호기심과 모험심을 가진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그중 대부분의 여행자는 여인들이 접시를 아랫입술에 끼고 다녀 ‘접시족’으로 알려진 무르시(Mursi)족을 가장 먼저 찾는다. 접시의 크기가 클수록 후에 신랑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을 수 있단다.
남부 여행은 최소 일주일을 잡아야 한다. 날짜마다 돌아가면서 장이 서는데 일정을 잘 맞추면 일주일간 여러 부족의 시장을 방문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곳은 일전에 일본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이후로 일본 여행자가 급증했다. 게스트 하우스나 식당에도 자신들의 여행지를 소개한 일본판 DVD가 있을 정도다.
오모밸리로 가는 버스는 주로 새벽에 있다. 하루 한 대뿐인 일정이라 예약을 못 하거나 자칫 놓치기라도 하면 꼬박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한다. 사전 정보 없이 무작정 나선 까닭에 이틀을 그렇게 허비했지만 중간 기착지 마을에 머물면서 오히려 평범한 에티오피아 문화를 볼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빵과 함께 늘 마시는 에티오피아 커피는 아라비카 커피의 원조(元祖)다. 때문에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세계적으로도 질이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향이 강한 것이 특징인데 현지인 중엔 간혹 차(茶)에다 하는 것처럼 설탕을 듬뿍 넣는 사람도 있다. 질 좋은 생산품은 대부분 수출되고 등급이 낮은 원두들을 주로 갈아 마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남부 곳곳에서는 이르가체페(Yirgacheffa)나 시다모(Sidamo)와 같은 최상품을 저렴하게 맛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커피 열풍이 불면서 공정(公正)무역이 점차 화두(話頭)가 되고 있다.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현지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지만, 여전히 현지인들의 노동환경이 개선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익은 농장주나 고용주가 고스란히 차지한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래도 커피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대단해 현지인들은 만국 공통인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늘 아래 낡아빠진 간이 식탁에 앉아 한 잔에 우리 돈으로 200원짜리 서민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농부의 땀으로 알알이 여문 에티오피아 커피타임을 갖는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실 줄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히 느낀다. 진한 향이 참 좋다는 거. 이 작은 잔을 서빙해 주는 주인도 내 맘을 아는지 생긋 웃어보인다. 서두르지 않는 넉넉한 분위기가 더 좋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큰 물건을 옮기는 소녀를 보며 저절로 입술이 깨물어진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분투 장면이 눈앞으로 지나가니 나의 여유가 사치로 느껴진다. 그러니 커피에 대한 낭만적인 찬양은 그만 접어야 할 때다.
오모밸리로 가는 길
아프리카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마지막은 항상 묘한 감정을 남긴다. 끝냈다는 시원함과 끝났다는 섭섭함. 나는 오모밸리로 들어가는 최후 관문인 아르바민치의 3달러짜리 숙소에서 밤새 모기로 뒤척거렸다. 그렇게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드디어 오모밸리 여행의 출발점인 진카(Jinka)에 도착했다. 이곳을 거쳐 투르미로 갈 예정이다.
진카에 들어가는 차는 하루에 한 대다. 첫 번째 차를 놓친 나는 트럭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공짜로 타는 것은 아니다. 합당한 삯을 치러야만 탈 수 있다. 되레 외국 여행자들은 차를 놓쳐 선택권이 없다는 핸디캡 때문에 배 이상의 돈을 주고 타기도 한다. 운 좋게 마음 착한 운전사를 만나지 않는 한 대개는 지역 사정에 밝은 트럭 운전사들이 이 호기를 놓칠 리 없다.
가까스로 차를 타고 진카에 도착했다. 버스로 내려오면서 제대로 먹지 못한 까닭에 도착 후 바로 에티오피아 전통 음식인 뜹스로 허기를 면했다. 보통 이들의 주식은 에티오피아식 밀병인 넓적한 인제라에 잘 구운 고기 뜹스를 싸서 야채와 소스를 얹어먹는 것이다. 형편에 따라 고기가 아닌 콩을 넣어 먹기도 하고, 소스 역시 입맛에 맞게 구성해 먹는다. 여기에 염소젖을 함께 먹으면 한 끼 든든히 챙길 수 있다. 물론 위생 상태에 따라 지독한 설사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여행자 본인 몫이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시장에 나왔다. 시장은 상인들로 무척 붐빈다. 좌판에 과일, 야채, 고기 등 식품과 생필품을 내다 파는 게 대부분이다.
접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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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 진카에서 만난 접시족 여인. 접시 크기가 클수록 결혼할 때 신랑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
시장 구경 중 드디어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접시족’ 여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따로 시장에 볼 일 있어 온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여행자들을 향해 몰려다닌다.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단다. 한 번에 1달러다.
몸에 문신을 수놓은 남자들 역시 사진 모델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은 서로 자신을 찍으라며 달려든다. 나는 두 여인을 찍고, 1달러를 건네주었다. 인간적인 정감을 나누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찍는 나나 찍히는 그들이나 뭔가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거래했다는 느낌만 강하게 든다. 사진 찍는 감흥이 묽어진다.
이후 여정에는 곳곳에 들러 특이 부족 사진을 찍는 걸로 소일 삼았다. 도무지 부족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그들과 대화하기가 불가능한 까닭도 있었지만, 오랜 아프리카 여정으로 많이 지쳐 있어서 열정적인 여행보다 쉼이 더 필요했는지 모른다.
이후 다시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와 정교회를 한 번 더 방문하고, 시내 구경 후 곤다르(Gondar)로 향해 성을 보는 것으로 에티오피아 여정을 마무리했다.
수단을 거쳐 이집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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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일강에서 낚시를 하는 수단 청년. |
수단에서는 수도에 사흘 이상 묵기 위해 외국인 거주 등록이 필요할 시 현지인을 보증인으로 내세워야 한다. 다행히 숙소 주인이 직접 차를 몰고 수고스러운 모든 절차를 무료로 마무리해 주었다. 느려터지고 비싸기만 한 비자 및 체류 등록 시스템에 불만이 터지려 했지만 천성이 워낙 선한 수단인들 때문에 참고 넘어가기로 한다.
눈부시게 청명한 사하라 사막의 하늘 아래 모래바람을 가르며 동굴라를 잠시 거쳐 와디할파(Wadi Halfa) 국경에 가니 지류로 흐르던 나일강이 합쳐지면서 광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철저한 이슬람법을 따르는 수단에서의 짧은 체류를 마치고 나일강을 건너 이집트에 들어갔을 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냈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싱싱한 과일들과 풍부한 먹거리, 게다가 훨씬 쾌적하면서도 오히려 저렴한 숙소 비용에 나는 한껏 마음이 들떠 버렸다. 그런데 하루에 족히 열 명 이상 사기꾼과 만나니 다시 긴장하게 되었다. 아스완에 이어 룩소르, 카이로까지 이어오면서 나는 나름 베테랑 여행자라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며칠 동안 두 눈 뜨고 당한 횟수가 수 번이었으니 말 다했다.
다행히 금전피해가 소소한 것이라 웃어넘길 수 있었다. 능청스러우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으로 노련하게 사람을 대하는 그들을 보자니 헛헛한 웃음이 나오면서도 순박한 아프리카 사람들과 대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시 서부 아프리카로
길고 긴 아프리카 여행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 많이 서툴렀지만 여행뿐 아니라 말라리아 예방 차원으로 모기장 설치 봉사도 병행했던 1년 남짓한 시간이다.
나와 함께 아프리카 대륙을 달리던 자전거는 케냐 북부에서 멈췄다. 사막에서 구호활동에 자전거를 필요로 하는 선교사에게 기증한 것이다. 다시 운 좋게 비슷한 성능의 자전거를 협찬받은 필자는 아프리카 말라리아 예방을 위한 모기장 구호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유럽 여행이 끝나면 다시 아프리카로 들어갈 계획이다. 이번엔 서부 아프리카다. 아프리카 종단(終斷) 여행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더 가슴 뛰는 추억을 만들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여행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가장 진솔한 방법이다. 아프리카의 뜨거웠던 태양 아래 도로를 질주한 400일간의 시간은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