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 - 李浚慶과 中和

평생 흑백논리를 거부한 포용의 정치인

  • 글 : 최진홍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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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경에게 두드러진 점은 수많은 정치적 박해를 받았음에도 정작 자신은 모든 것을 품어 버렸다는 점이다. 한 번도 남을 공격하지 않았다. 평생을 묵묵히 뒤치다꺼리만 하다 간 실로 한 시대의 거인이었다.

崔鎭弘
⊙ 48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現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있는 이준경의 묘. 경기도기념물 제96호다.
올 여름 우리 사회는 무상급식이라는 주제를 주민투표라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9월 개강(開講) 후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오세훈(吳世勳) 서울시장이 옳은가? 아니면 곽노현(郭魯炫) 서울시교육감이 옳은가?
 
  사실 이 질문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오 시장의 주장과 곽 교육감의 주장은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二分法)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라는 사실을 학생들과 공유하고자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이번 무상급식이라는 주제에 주목해 보면서 조선조 지식인들의 고민을 상상해 보았다. 조선조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고민 역시, 대립되는 사안들을 반드시 한쪽은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르다는 흑백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해결해야 할 주제는 무엇보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와 정몽주(鄭夢周)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여기서 태조가 옳고 정몽주가 틀렸다고 주장을 해 버리면 유학을 기본 국시로 정한 조선의 정신을 주장할 근거를 상실해 버린다. 반대로 정몽주가 옳고 태조가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의 태생을 부정해 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고민은 계속된다. 세조가 옳으냐? 아니면 사육신이 옳으냐? 조선조의 지식인들은 이 양자 모두가 옳다는 입장을 정립했다. 정몽주를 문묘에 모시고 그의 후손들을 우대했다. 사육신을 복권시켰다. 대화합의 역사관을 확립한 것이다. 이 대화합의 역사관이 오늘날 절실한 것은 현대사가 아직도 좌(左)와 우(右), 보수(保守)와 혁신(革新), 산업화와 민주화 등등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들이다. 그리고 가장 큰 수혜자는 아마도 이분법을 표를 얻고 세(勢)를 불리는 데 활용하는 일부 정치인일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승만(李承晩) 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김구(金九)와 함께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정희(朴正熙)라는 인물과 전태일이라는 인물이 함께 만들어 낸 것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함께 기술할 때 진정한 우리의 역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힘들다.
 
  그 한쪽의 입장만을 기술하기는 수월하다. 그러나 역사 서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 안에 살기가 아닐까.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삶을 살기는 진정 어렵다. 무엇보다 양쪽으로부터 모두 회색인으로 비난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필요하다. 그러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 있다. 바로 조선조 중기의 인물 이준경(李浚慶. 1499년 연산군5∼1572년 선조5)이다.
 
 
  격동의 시대
 
  그는 정치적으로는 격동기였고 사상적으로는 한국철학의 선구적 성취를 이룩한 16세기를 살다 갔다. 연산군(1494~1506), 중종(1506~1544), 인종(1544~1545), 명종(1545~1567), 선조(1567~1608)에 걸친 격랑의 시기를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중종반정(1506), 기묘사화(1519), 정미사화(1547)의 소용돌이 시기를 살았다. 학문적으로는 우리나라 철학계의 한 획을 그은 대학자들이 살다 간 때로서, 화담 서경덕(1489~1546), 퇴계 이황(1501~1570), 남명 조식(1501~1572), 고봉 기대승(1526~1572), 율곡 이이(1536~1584) 등과 시대를 함께했다.
 
  이준경의 시대에 가장 주목해야 할 사건으로 필자는 1567년에 있었던 명종의 승하와 선조의 등극을 꼽는다. 이때는 자칫하면 피로 얼룩질 뻔했던 긴박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기가 막히게 잘 헤쳐 나간 인물이 바로 당시 영의정으로 활동했던 이준경이다. 역사가 피로 물드는 것도, 무난하게 진행하는 것도 결국은 모두 당시 담당자들의 몫이다. 잔인했던 역사의 순간들은 기억하기 쉽지만, 아슬아슬했던,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역사의 순간들은 흔히 놓치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는 눈에 두드러진 특별한 사건뿐만 아니라 아슬아슬했던 순간에서 아이디어를 또한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역사에서 가정(假定)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불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지나갔기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한다. 여기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나온 단어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아닐까.
 
  흔히 옛것을 배워 새것을 안다고 해석하는 이 온고지신을 필자는 ‘그 까닭, 그 연유를 꼼꼼하게 따져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다’고 해석한다. 우리는 모두 현재를 살아간다. 그 현재는 늘 새롭다. 반복하는 동일한 사건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같은 강물에 우리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일이다. 조금 전에 내 발을 적셨던 강물은 이미 흘러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물줄기는 그대로이다. 같은 물은 아니지만 그 물줄기는 그대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역사인식이고 온고지신의 원래 의미라고 생각한다.
 
 
  勳舊에서 士林으로
 
  이 세상을 살다 간 사람치고 사연 없이 살다 간 사람은 있을 수 없겠지만, 이준경이란 인물을 보면 그의 삶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이준경은 훈구(勳舊)출신이면서도 사림파(士林派)와 연결된다. 말하자면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다.
 
  고려 말의 이집(李集)이 6대조로서 그 아들과 손자 대에 5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등 당대 최고 명문거족이 되었고 이들이 특히 공신이 되면서 대표적인 훈구 가문이 되었다.
 
  이준경의 부친 이수정(李守貞)은 한림원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을 지냈는데,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우고 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는 등 훈구 가문에서 사림 쪽으로 선회를 하고 있었다. 쟁쟁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준경이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이세좌·李世佐)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형 윤경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여섯 살이었다. 이준경의 조부인 이세좌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연산군에게 알려지면서 사사되었다.
 
  이준경은 유배생활 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이후 이준경은 사촌 형인 이연경(李延慶)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이연경은 현량과에 천거되어 조광조와 함께 활약하던 당시 대표적인 사림이었다. 이후 이준경은 153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는데, 그해 말에 경연에 나아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士類)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아 파직 당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다음에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 직제학, 부제학으로 승진하고 승정원 승지를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48년 다시 중앙으로 올라가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에 함경도 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다시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순찰사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하다가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명종의 승하
 
  이제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등극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서술한다. 이하의 내용은 이광수의 《새 시대를 이끌어간 정치인·동고 이준경선생 일대기》에 정리된 것을 활용한 것이다. 이준경이 69세이던 명종 22년 6월, 왕은 돌이킬 수 없는 큰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이준경은 왕의 환후가 심해 이 당시 정부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삼경에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약방제도 심통원 등은 즉시 입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전갈을 받고 이준경 등이 도착해 보니 왕은 말을 못하는 상태로 이준경을 알아보고 손짓으로 가까이 오게 한 뒤 눈물을 흘리며 이준경의 손을 잡았다. 이준경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지만 슬퍼할 수만은 없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명종은 후사가 없었다. 하나 있던 순회세자가 몇 년 전에 죽고 나서 더 이상 왕자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통을 이을 준비가 미비한 상태였다.
 
  만일 왕이 후계를 누구로 한다는 명확한 말이 없이 눈을 감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야심 있는 종친들이 저마다 권신들과 결탁하여 왕위를 노리지 않는다고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고는 생명의 불씨가 꺼져 가는 임금에게 그 불이 꺼지기 전에 대계를 정해야 한다고 울면서 말씀을 드렸다. 다행히 왕은 이준경의 말을 알아듣고 힘없이 팔을 들어 안쪽의 병풍을 두드렸는데, 이것은 그 뒤에 있는 중전에게 물어보라는 뜻이었다.
 
  이준경은 주상께서 안쪽을 가리키셨으니 반드시 후사에 대해 미리 들으신 것이 있지 않느냐고 중전에게 물었고, 중전은 이에 병풍 뒤에서 이르기를 2년 전에 임금의 환후가 몹시 중하실 때 덕흥군의 몇째 아들로 정하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명에 이준경은 즉시 다른 대신들과 삼사(三司)의 장관을 불러 이를 함께 듣도록 청을 드렸다. 그리고 사관으로 하여금 ‘덕흥군제3자입승대통가야(德興君第三子入承大統可也.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는 것이 가하다는 의미)’란 12글자를 쓰게 한 뒤 친히 무릎을 꿇은 채 왕께 품하였다. 왕은 두 눈 가득히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대권이 이제 결정된 것이다. 이어서 명종은 승하하였다.
 
  대권의 계승자로 지명된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은 이때 나이 16세로 위에 형이 둘이나 있었으나 이를 제치고 평소 명종 임금이 점 찍어 둔 대로 이제 왕으로 나아갈 천명을 맞게 되었다. 명종의 승하와 함께 이준경은 곧 도승지 이양원 등을 불러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을 새 왕으로 봉영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하성군은 생모인 하동부부인의 상을 당해 형제들과 함께 사직동의 덕흥군가(덕흥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음)에서 상례를 치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새 왕을 봉영할 시기에 딱한 것은 그 당사자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몇몇 환관이 알고 있기는 하나, 그들의 말에 따라 새 왕에 될 사람을 모셔 온다는 것은 대체에도 맞지 않고, 또 엉뚱한 잘못이 일어날 것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하성군이 아닌 다름 사람을 잘못 알고 모셔 온다면 이는 참으로 큰일이 아닌가.
 
 
  공을 내세우지 않다
 
  이준경은 이양원에게 일렀다. “밖의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이 불의에 가서 지키고자 하면 그 집에서는 반드시 무슨 까닭으로 그러는지를 모를 것이오. 그러나 공은 의당 먼저 안에 들어가 전교할 일이 있다고 이르시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뜰로 내려 보내 부복케 한 뒤 그 중 세 번째로 엎드린 분을 모셔 오시오.” 동고의 이와 같은 주도면밀한 지휘하에 마침내 하성군이 들어와 즉위를 하니 이분이 바로 조선조 제14대 임금인 선조이다.
 
  그런데 사직동으로 하성군을 맞으러 갈 때 일부 몰지각한 무리들이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고 따르는 것)을 한 사람들은 공신이 된다 하여 다투어 이름을 기록하여 궁궐에서 일하는 노비에게 주었고, 결국 이것이 승지를 통해 승정원에까지 올라왔다. 이준경이 이를 알고 몹시 노하여 불태우니 사람들이 모두 심복하였다.
 
  그 후에도 영중추부사로 있던 심통원이 이익을 탐하여 지금의 임금께서 대통을 이어받는데 어찌 우리의 공이 없다고 할 수 있겠냐고 하였으나, 이준경은 전혀 이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아 심통원은 머쓱해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선조 등극의 일등 공신은 누가 보더라도 이준경일 수밖에 없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동고는 공신이 되고도 남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준경이 공신이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너도 나도 그 공신 자리에 끼고 싶어하면서 빚어지는 문제를 이준경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문제이다. 내년에 우리는 총선과 대선이라는 두 번의 큰 선거를 치르게 되어 있다. 선거 이후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볼 필요도 있겠다. 선거가 끝나고 난 뒤 벌어지는 논공행상, 또한 그 공신으로 인해 발목을 잡히고 휘둘리는 사례 등.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대권 이양기라는 긴박한 순간에 이준경이 보여준 확실한 책임감이었다. 선조를 모시러 가게 된 도승지 이양원은 떠나기에 앞서 이번 일의 지휘에 있어 삼사의 장관을 함께 참여시키도록 영의정 이준경에게 건의하였다.
 
  이준경은 그를 엄하게 꾸짖는다. 내가 수상으로 고명을 받들어 일을 지휘하는데 삼사가 꼭 참여할 필요가 없다. 자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이양원은 문제가 될 때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어 놓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준경이 보기에 이 문제는 앞뒤를 계산하여 진행할 사안이 아니었다. 이양원은 이준경의 단호한 태도에 기가 꺾였고, 후에 조정에서는 그를 탄핵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준경은 관대한 태도로 이를 말렸다. 이양원은 일을 좀 더 잘하려고 한 것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었겠냐면서.
 
  만일 윤원형이 그대로 영의정에 있었거나 욕심 많고 지조가 없는 심통원이 그 자리에 있어 이 일을 지휘하게 되었다면 과연 무사하게 큰일이 마무리되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겠으나,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불행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예상은 명종 즉위 시에 일어났던 을사사화를 기억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일에 대해 율곡은 이준경의 탁월한 마무리를 다행스러워하였다.
 
 
  中和
 
  이준경은 지나간 물길에서 얻은 교훈을 살려냈다.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얻은 교훈을 통해 후계구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온고지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마치 같은 물을 먹어도 뱀이 먹으면 독을 만들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동일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내용은 제각각이다. 윤원형, 심통원, 이양원 등의 행태와 비교할 때 이준경의 큰 그림 그리기는 돋보인다.
 
  이준경은 성리학적 논의를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현장의 실무형 관리였기 때문이겠지만, 그것보다도 그가 정치에서 성리학이라는 관념적인 요소를 우선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그런 이준경이 성리학 용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는 중화(中和)라는 용어를 가지고 임금에게 상소를 했다. 그것도 봉사(封事·왕 이외의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도록 밀봉해 올리는 상소)의 형식으로.
 
  명종 21년. 겨울에 천둥이 치는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홍문관에서는 차자(箚子·간단한 상소문)를 올렸는데, 이에 대해 명종은 예(例)의 비답(批答)을 내린다. “위아래가 함께 닦아 인심을 화평케 하고 일을 처리함에 중도를 얻을 뿐이다”라며, 이로써 중(中)을 이루면 치우치고 기울어져 잃는 경우가 없을 것이며, 이로써 화(和)를 이루면 만물이 모두 마땅함을 이룰 것이라는 중화의 의미로 비답을 내렸다. 이럴 경우 보통 신하들은 임금의 성학(聖學)이 고매하다고 응수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준경은 달랐다. 성리학적 시각에서 정치를 이해하고 있던 명종에게 이준경은 정치의 관점에서 성리학을 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준경은 말한다. “사람들이 중화(中和)의 말씀을 몹시 즐기면서도 중화의 내실은 터득하지 못한 채, 구차하게 남에게 영합하여 순조함을 화(和)라고 생각하고, 말없이 시속에 따라 가부가 없이 행도하여 어긋남이 없음을 중(中)이라 생각하여, 드디어는 퇴폐적이고 문란하며 고식적이고 나태한 버릇을 이루어 인심은 마침내 중을 잃게 되고 국세는 결국 떨쳐지지 못하게 될까 진실로 두렵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유폐(流弊)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준경에게 중요한 것은 중화라는 용어가 아니었다. 정치현장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중화라는 용어가 힌트가 되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흔히 중화라는 말에 매몰되어 그 용어만 찬양하고 있는 작태를 이미 이준경은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리학과 정치가 만나는 순간 정치는 사라지고 성리학만 남게 되는 사례를 실록에 있는 수많은 경연의 내용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현실문제를 우선시
 
  중화란 용어는 <중용>의 ‘희로애락의 미발(未發)을 중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는 글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미발은 미처 표현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절도에 맞는 것’은 중절(中節)을 말한다. 중절은 곧바로 화(和)의 개념과 일치되는 것이지만,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의 달도(達道)이다’라고 정의함으로써 중은 천하가 존재할 수 있는 근본이고, 화는 그 존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이론보다 이준경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문제였다. 이 시기에 기상이변이 계속되었고 이에 명종은 신하들에게 구언(求言·나라에 재앙 등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신하들의 직언을 구하는 일)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중화에 대한 이준경의 입장은 이 구언에 대해 이준경이 명종에게 올린 봉사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이 상소에서 이준경이 중화를 말하면서 요구한 내용은 바로 후계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을사사화와 같은 비극의 재발방지를 위해 활용한 것이었다. 명종의 경학적 자세를 이준경은 경세론적 방식으로 이끌고 있다. 말하자면 명종은 성리학적으로 정치를 이해한 반면 이준경은 정치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보고 있었다. 이러한 이준경의 입장은 이 상소를 올리기 1년 전에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명종 20년에 명종의 생모인 유명한 문정왕후가 죽었다.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변변히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임금 자리에 있던 명종은 이제 좋은 사람을 얻어서 훌륭한 정치를 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관찰사들로 하여금 각 해당 지역에서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 등의 6덕을 갖춘 사람을 뽑아, 타고 올라갈 말을 주어서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토록 완벽하게 6덕을 갖춘 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평생 한번도 남을 공격하지 않아
 
  막 영의정에 오른 이준경은 차자를 올렸다. 너무 완전하게 모든 덕이 구비된 사람을 구하지 말라고. 한두 가지 모자라고 전체적으로 그에 가깝다면 족하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완벽함을 추구하고 급격한 변화를 이루려 한다면 목표한 일을 이루기도 어렵고 예기치 못한 반발로 오히려 일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이준경은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이준경에게 두드러진 점은 수많은 정치적 박해를 받았음에도 정작 자신은 모든 것을 품어 버렸다는 점이다. 한 번도 남을 공격하지 않았다. 평생을 묵묵히 뒤치다꺼리만 하다 간 실로 한 시대의 거인이었다. 윤원형 처리도 조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먼저 나서기보다는 이미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조율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행동했던 이준경의 삶 자체가 대화합의 드라마였다.
 
  한편 편협된 이분법을 지양하고 대화합의 정신을 우리 역사 안에서 발굴, 계승해 내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바로 우리 민족의 숙원 사업인 통일의 논의를 보다 풍부하고 생산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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