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기행 (마지막회) 등소평의 고향 광안

‘혁명 종결자’가 된 대지주의 아들

  • 글 : 공원국 중국전문 역사저술가ㆍ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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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소평의 생가는 자수성가한 가문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저택
⊙ 중국인민해방군 10대 元帥 중 4명이 사천 출신
⊙ 항일전쟁·내전 거치면서 군부에 발판 구축, 1949년 중국 건국 당시 사실상 군부의 1인자로 성장
이제 1949년이 다가온다. 여행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왜 이 순간에 접어야 하는지 설명을 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한 이후 벌어진 일들을 판단하는 것은 아마도 역사학도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대개 지난 일들에 대해서는 원인과 결과를 다 아는 체하는 것이 역사학도들의 오랜 습성이지만, 최소한 중국에서 1949년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이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범상한 역사학도들은 물론 노련한 이들도 이 시점부터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물러난다. 그 일은 어쩌면 정치학도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수많은 추측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그러나 정치학도들도 곧 질리게 될 것이다. 인간사회의 복잡함을 사고하는 데 충분히 단련이 된 사람들이라도 인간의 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과 말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붉은 장강(長江)의 본류에 푸른 지류들이 모여들지만, 겨우 수백 미터를 못 가서 모두 붉은 색으로 바뀌는 것 같은 당혹감이랄까. 그래서 범상한 논평자에 불과한 필자는 1949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다룰 사람은 등소평(鄧小平)이다.
 
  경망스러운 표현이지만 그를 ‘불멸의 지도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도덕적인 의미를 없앤다면 오직 생존을 위해 살아온 노회한 정치꾼도 살아생전에는 불멸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최소한 현재까지는 그 불멸이라는 말이 생명을 가진 듯하다. 현대사에서 그의 그림자는 너무나 크다. 북경과 상해 마천루들의 그림자는 모두 그의 그림자다.
 
  그는 공산주의자인가? 공산주의 혁명의 마지막을 서술하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어색하다. 그러나 그가 혁명의 종결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등소평의 생가. 자수성가한 대지주였던 아버지 등문명의 재력을 보여준다.
 
  중국인 장모의 사위사랑
 
  내가 탈 배는 밤 아홉 시 중경(重慶) 제2항구를 출발한다. 배는 삼협(三峽)을 빠져나가 이틀 후에는 삼협댐에 도착할 것이다. 울퉁불퉁한 중경의 지형들이 오색의 불빛에 뒤덮여 있다. 십 년 새 이 조천문(朝天門)의 풍경이 변하는 모양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상해 포동에 마천루들이 들어서던 속도를 앞질러 서고 있다. 겨우 한 해 전에 ‘양광(陽光) 100’이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개발되고 있던 아파트들은 이미 단장을 마치고, 강가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다. 언덕마다 우뚝 서 있는 우악스럽게 큰 건물들이 뿜어내는 빛은 강에 비쳐서 다시 언덕으로 올라온다.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요란스럽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화려함만은 어디에도 견줄 수가 없다.
 
  사위가 삼협을 여행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처가에서 마중을 나왔다. 나의 아내도 가릉강(嘉陵江) 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중경 사람이다. 가릉강 가 언덕의 홍애동(洪崖洞) 주위는 불야성을 이뤄 24시간 꺼지지 않을 불이 깎아지른 듯한 언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충분히 밤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끝없이 모여든다. 사천식 신선로인 훠궈(火鍋)의 알싸하게 매운 맛을 맥주로 중화시키며 배를 기다린다. 이제는 어른이 다 된 처사촌이 호기를 부리며 맥주를 사겠단다. 청소년이 커서 어른이 되는구나. 그도 더 크면 저 강물을 따라 내려간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한때 내 아내도 청운의 꿈을 안고 저 강물을 따라 상해까지 내려갔다. 동쪽으로 가는 것은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숨길 수 없는 꿈인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배는 떠난다. 장년이 되어 가는 사위가 아직도 못 미더운 듯 장모는 신신당부를 한다.
 
  “배에서 짐 챙기는 것 조심하고, 먹는 것 꼭 가려서 먹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전화하고….”
 
  몰래 밖으로 부르더니 여비에 보태라고 봉투에 지폐를 가득 넣어서 가방에 찔러 준다. 몇 달을 모은 것이겠지. 그러나 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동쪽으로 자식을 떠나보낼 때의 마음도 그랬겠지. 동쪽으로 가서 성공하라고. 배에 올라갈 때까지 손을 흔든다.
 
 
  밤의 장강
 
가릉강과 장강이 합쳐지는 곳. 가릉강의 푸른 물이 장강의 탁류에 휘말리고 있다.

  배는 잠시 파란 가릉강 왼편을 거슬러 올라가다 크게 원을 그리며 물을 따라 내려온다. 그리고 곧장 밤에 보아도 시뻘건 장강의 본류에 몸을 올린다. 이제부터는 수천 톤짜리 배도 울렁거린다. 장강엔 파도가 있다. 깊고도 빠른 탁류가 배를 동쪽으로 밀어낸다. 강 북안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올라가는 화물선들이 고동을 울린다. 중경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다.
 
  반면 내려가는 배들은 묵묵하다. 날렵하고 길쭉한 몸체 위에 부부로 보이는 남녀만 타고 있는 작은 배도 있다. 도시를 떠나면서 서서히 검은 어둠에 물드는 저 거대한 강이 저들은 무섭지 않은가 보다.
 
  고물 위로 거세게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부딪쳐 튀어 오르건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큰 것 작은 것들이 뒤섞여 어두운 밤에 수많은 구멍을 만들어 낸다.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건만 나는 강바람을 맞으러 갑판 위로 나갔다. 끊어지지 않고 강의 양편으로 이어진 붉은 빛의 띠는 정말 거대한 용 두 마리가 마주보며 지나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밤의 장강이구나. 밤새도록 그 불빛의 띠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름만 남은 삼협
 
삼협을 운항하는 배. 등소평도 이 물길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

  1920년 9월 프랑스로 떠나는 기선에 일단의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이른바 ‘열심히 일하고 아껴서 공부한다’는 ‘근공검학(勤工儉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사천성의 학생들이었다.
 
  프랑스 쪽에서 이들을 받을 사람들이야 1차 세계대전 직후 본국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할 심사였겠지만 떠나는 학생들의 마음은 그와 달랐다. 당시에 외국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대단한 책임을 져야 할 일로 여겨졌다. 그 청년들 속에 5척 단구의 사천(四川) 사나이 한 명도 있었다. 그가 등소평이다.
 
  2010년 삼협을 지날 때 삼협은 이미 그 명성만 남아 있었다. 한때 거센 물살로 뱃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협곡들은 하류의 삼협댐으로 인해 깊고 거대한 호수로 바뀌어 있었다. 기세를 잃은 물은 황토빛을 잃어 검푸르렀고, 여기저기 떠 있는 쓰레기 더미들이 이 물의 속도를 알려주고 있었다. 차라리 중경 조천문을 떠나 흐르던 붉은 물줄기의 기세가 이보다는 거셌던 것 같다. 다만 좌우를 완전히 막아선 석회암 벽들만은 여전히 위압적으로 다가와, 갑자기 저 벽이 닫히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협곡을 빠져나가는 바람도 차가워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등소평이 이곳을 지날 때 삼협은 훨씬 무시무시했을 것이다. 9월은 장강의 물이 아직 많은 때다. 배는 쏜살같이 동쪽을 향하고, 으르렁거리는 협곡 양쪽에서는 원숭이 울음이 요동쳤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상해로 나가고, 또 프랑스로 떠났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는 단지 부유한 집안의 촉망 받는 아들이었을 뿐,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등소평의 사람들
 
  그리고 역시 삼협을 빠져가나 프랑스로 간 사나이 중에 진의(陳毅)라는 이도 있었다. 이 담담한 군인 역시 군대에서 등소평의 출세를 단단하게 밀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섭영진(聶榮臻) 역시 삼협을 지나 프랑스로 떠났고 돌아와서 결국 홍군의 장성이 된다. 그 또한 등소평의 조력자였다. 혁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 주덕(朱德)처럼 삼협을 빠져나갔지만 프랑스가 아닌 독일로 떠난 이도 있었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으나 역시 등소평의 동향 선배이자 평생 후견인이었다. 삼협을 빠져나가 바로 공산주의 무력투쟁에 돌입했다가 소련으로 가서 공부한 유백승(劉伯承)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후 유백승은 등소평의 군사적인 업적 거의 모두를 책임지는 장군이 된다. 그는 등소평이 위로 올라가는 데 가장 단단한 디딤돌이 되었던 사람이다.
 
  이렇게 등소평의 주위를 삼협을 나선 사천성 출신의 장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등소평처럼 정치를 즐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하나같이 등소평보다 나이가 많았고 혁명의 까마득한 선배들이었으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군인이었고 최소한 정치 방면에서는 등소평이 선배격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른바 ‘인민해방군 10대 원수(元帥)’ 중 네 명이 동향인이었고, 그들의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등소평이 2인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자산이었다.
 
  또한 그 옆에는 프랑스 공산당 서클 시절의 선배 주은래(周恩來)가 있었다. 그는 등소평보다 먼저 프랑스로 떠났고 이후 평생 등소평의 정치적인 후견인이 된다. 등이 그를 멀리했을 때조차도 말이다.
 
  모택동(毛澤東)의 동향 호남성 출신의 팽덕회(彭德懷), 하룡(賀龍), 유소기(劉少奇), 그리고 호북 사람 임표(林彪)의 운명은 이들 사천 출신들의 운명과 묘하게 대비된다. 그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그러나 등소평의 동향 사람들은 험한 꼴은 봤을지언정 모두 살아남았다. 그들은 모두 국내에서 혁명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등소평의 동향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나갔다 온 사람들이다.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교묘하다.
 
 
  장비와 진수의 고장
 
남충의 진수기념관에 있는 진수의 동상.

  등소평의 고향은 광안(廣安)이다. ‘촉의 개는 해를 보고 짖는다’는 말도 있듯이 사천 평원 촉(蜀)의 중심인 성도(成都)에서 볕 좋은 날을 보기란 쉽지 않다. 장강 가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 중경은 성도보다 한술 더 떠서 항상 물안개인지 매연인지 모른 뿌연 공기층에 에워싸여 있다. 특히 여름 낮에는 언제나 우중충한 안개가 도시를 뒤덮고 있다가 밤이 되면 열대성 소나기가 느닷없이 내린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적응하는 통에 이 지역에는 중원과는 판이하게 느긋한 문화가 형성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릉강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자그마한 언덕들이 나타나고 볕도 한결 좋아진다. 지독하게 무더운 건 마찬가지지만 남쪽보다는 덜 습해서 한결 견딜 만하다. 중경 일대를 흔히 파(巴)라고 부른다.
 
낭중에 있는 장비의 동상.
  파 지역은 삼국시대 촉나라 장군 장비(張飛)의 주둔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낭중(中)에 들어서면 장비의 동상이 시 중심에 서 있고, 장비묘네 사당이네 하는 후대에 만든 유적들이 널려 있다. 상인들은 잽싸게 장비육포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에 유통시키고 있다. 형의 복수를 위해 동진하려다 어처구니없이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던 장비의 이야기는 동쪽으로 나가지 못한 서쪽 인물의 회한으로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강을 따라 조금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의 고향 남충(南充)이 나온다. 시내 한편의 높다란 언덕에 오르면 이 위대한 고대 역사가의 업적을 기리는 누각과 전시관이 나와 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삼국연의》의 판본이 전시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발간된 것도 보여서 반갑다. 마치 장비와 진수가 문무의 쌍벽을 이루며 가릉강의 역사적인 상징이 된 듯하다.
 
 
  등소평의 생가
 
등소평의 생가 전면에 있는 작은 호수.

  조금 더 동남으로 내려오면 가릉강의 지류 거강(渠江)에 예쁘게 둘러싸인 고즈넉한 동네가 하나 나온다. 등소평의 고향 광안이다. 시 중심에서 약간 북쪽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마치 언덕들의 품에 안긴 듯한 집에서 등소평은 태어났다.
 
  햇살은 뜨거웠고 대낮에는 돌아다니는 것이 무서울 정도의 날씨였다. 광안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니 물어보지 않아도 곧장 오토바이 운전사들이 등장한다.
 
  “등소평 생가 가요?”
 
  “네.”
 
  그러고는 흥정할 것도 없이 오토바이를 탄다. 기사 아저씨는 등소평 생가로 가는 오토바이들은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고 열변을 토한다. 넓게 뚫린 길을 따라 얼마간 달리면 도로 좌측에 표지판이 보인다. 등소평의 집은 길에서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한다. 사천 특유의 빽빽한 대나무 숲이 길 옆으로 이어지고, 높고 낮은 행정단위나 간부들이 기념으로 심어 놓은 온갖 나무들을 감상하면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우거져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자그마한 분지에 집 한 채가 나타난다.
 
  “먹을 것을 쥔 자가 승리한다”고 전쟁 승리의 요건을 한마디로 정리했던 이 전략가의 집은 중농(中農)의 집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크다. 좌우후(左右後) 삼면을 야트막한 언덕과 울창한 대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고, 커다란 남방의 나무들이 막아서 있는 전면에는 소담스런 연못이 펼쳐진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높다란 삼합원(三合院) 본채는 자수성가한 가문이 도달할 수 있는 거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방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소년 등소평은 그 시절에 이미 자기만의 공부방을 가지고 있었다. 얼핏 보면 오늘날 전원생활을 꿈꾸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싶은 정원이며, 호사가들이 명당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지, 농촌 생활의 신고(辛苦)가 느껴지는 곳은 절대 아니다.
 
 
  대지주의 아들
 
  사실 등의 집안은 부농(富農)이었다. 벤자민 양이 엄격한 태도로 꼼꼼하게 써내려간 그의 전기에 의하면 아버지 등문명(鄧文明)은 대지주였다. 그는 2만4000평이 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3분의 2 이상의 땅을 소작농들에게 맡겼고, 나머지 땅은 농민들을 고용해서 직접 경작했다. 문화대혁명 시절 등소평이 찍힌 지주 출신이라는 낙인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택동보다 훨씬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것 외에는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우두머리들은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었다. 일부 프롤레타리아트 출신의 군인이 있었지만 정치가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학교를 나오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난해한 공산주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거의 2500년은 이어온 사대부 중심의 사회관을 그 짧은 시간에 뒤집어엎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늑한 곳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옹골차게 들어서 있는 생가와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단어의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는 앞으로 펼쳐질 등소평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묵묵히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그 사나이가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그 사나이가 현실과 이론의 간극에서 헤매다가 쓰러질 약골이 아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집 뒤로 펼쳐진 웬만한 초가의 기둥만한 줄기를 자랑하며 바람이 일 때마다 일렁거리는 대나무들의 숲은 이 남방의 자그마한 사내의 강단을 웅변하는 듯하다.
 
  저녁에 광안 시내로 돌아와 보니 꼭 등소평처럼 머리를 바투 깎은 어르신들이 말끔하게 정리한 거강 둑에서 낚시를 한다. 한낮의 열기가 가라앉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강으로 뛰어들어 자맥질을 한다. 나도 강에 몸을 담근다. 따뜻하다. 고기 잡는 이들 누구 하나도 물질하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여유롭다. 오늘날 중국에서 만만디를 찾기는 어려워졌지만, 최소한 여기는 아직 만만디다. 혁명의 기운은 더더욱 느껴지지 않는 예쁜 지방이다.
 
 
  내전 종결자
 
  등소평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엔 약간 오류가 있다. 특히 잘못된 것은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설계자로서 모택동 사후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주은래가 2인자였다는 생각이다. 1960년대는 임표가 등소평보다 더 비중이 있었다는 생각도 사실은 틀린 것이다. 중국정치에서 공식적인 서열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다.
 
  1949년 이미 등소평이 2인자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는 당과 군대에 모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전에 그처럼 군과 당 양쪽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은 정치인은 없었다. 주은래는 노련한 정치가였지만 실제로 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지는 않았다. 팽덕회나 주덕은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야망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유소기나 임표가 등소평의 반열에 있었던 듯하지만, 한 사람은 명석하기는 했지만 인격적으로 다수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고, 한쪽은 눈치가 너무 빨라서 스스로 함정으로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중국의 공산혁명은 내전을 통한 거의 순도 100%의 폭력혁명이었다. 폭력혁명의 와중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폭력성을 충분히 과시해야 한다. 등소평은 모택동이 벌인 내전(內戰)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한 사람이다.
 
  그가 내전 종결자로서의 확고한 권위를 가지지 못했다면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뚫고 2인자로 도약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급기야 자신의 정치적인 아버지인 모택동을 부정해야 했던 1970~80년대의 격변기를 감당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항일전쟁 시기의 끄트머리에 ‘군인정치가’로 부상한 이 사나이는 내전의 말미에 이르면 현장의 장군들 모두 심복하는 장년의 전략가가 되어 있었다.
 
  장개석은 외국인 참모 스틸웰에게 “중국의 군대를 이끌려면 정치를 잘해야 해”라고 강조했지만, 정치와 군사를 섭렵하는 것은 서구인 장성이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택동에게는, 강조하지 않아도 그 두 가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일급 부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등소평이다.
 
  프랑스에서 주은래를 만난 것이 그의 정치경력 시작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기대와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앞잡이들과 십장들의 굴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의식이 더 깨인 사람들의 선전과 나 자신의 고초를 통해 나는 사회주의, 특히 공산주의 지식을 받아들였던 것이다”라고 술회한다. “의식이 더 깨인 사람”이란 물론 주은래 같은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았으나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에는 공장에서 하층계급의 신고를 맛보며 밤에는 선전용 소책자나 찍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혁명의 본고장 러시아로 건너간 것은 금의환향하지 못하는 현실의 제약과 혁명에 대한 열정이 반반씩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1920년대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은 혁명을 수출하겠다는 열정이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후 “혁명에 대해 결코 회의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국내에서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처음부터 직업혁명가의 길을 가고 있던 모택동에 비해 등소평의 초기 이력은 왠지 신선한 것이 없다. 말수가 극히 적고 이론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 이 왜소한 사나이는 감정의 진폭도 체격만큼이나 작았던 것 같다.
 
 
  등소평-유백승의 콤비플레이
 
등소평(왼쪽)은 유백승(오른쪽)과 콤비를 이루어 내전에서 수많은 승리를 이루어냈다.

  1920년대에 도시를 중심으로 무장폭동을 전개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작전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등소평도 이런 저런 역할들을 맡고 있다가 그 격랑에 참여했다. 1931년 그가 속한 제58연대가 패배했을 때 그는 패주하는 군대를 떠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보존했다. 이 탈영사건은 두고두고 그의 꼬리를 잡게 되는데, 정작 자신은 태연했던 것 같다. 마치 자신은 제 환공(齊 桓公)을 최후의 승리자로 만들 관중(管仲)인데 쉽사리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심사였을까. 실제로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20세기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전국시대적이다. 그는 서금(瑞金)으로 모택동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후 그와 고락을 같이했다.
 
  그는 집단에서 진정한 강자가 누군지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모택동이 향후 권력을 잡을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모택동의 마음을 얻는 것이 일을 성취하는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후 철저히 모택동 노선에 협조함으로써 그는 기대 이상의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매우 느린 속도지만 꾸준히 승진을 거듭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삶의 태도는 아마도 격렬한 정치의 장에서 스스로 터득한 인생관이었던 것 같다.
 
  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8로군으로 이름을 바꾼 홍군의 주력은 세 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임표의 115사단, 하룡의 120사단, 그리고 유백승의 129사단이다.
 
  유백승이 사령관이 된 지 얼마 후 8로군 전체의 정치부 부주임인 등소평이 129사단의 정치위원으로 부임한다. 유백승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129사단을 당 중앙에 묶어 놓는 역할을 등소평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리하여 등소평은 야전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유백승은 국민혁명기부터 혁명의 대오에 참여한 등소평의 까마득한 고향 선배였다.
 
  ‘유장(儒將)’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부드러운 성품의 유백승과 정치적인 감각이 물이 오른 등소평의 조합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보였다. 중앙당과의 문제는 등이 처리하고 야전은 유가 처리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들의 129사단은 8로군 내에서도 승률이 가장 좋은 팀이었다. 가장 좋은 점은 유가 대단히 정력적인 군인이었지만 정치적인 야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등소평과 유백승은 팀을 이루어 자신들의 129사단을 계속 키워 나갔다. 모택동이 보기에 등소평과 유백승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가장 적은 사람들의 조합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등소평은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당내의 권력투쟁 와중에도 소환되지 않고 계속 전선에 머무를 수 있었다. 항일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29사단은 이미 20만 대군으로 성장하여, 8로군의 근간이 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등소평의 시절이 오고 있었다.
 
  1945년 국공내전기에 유백승-등소평 부대는 129사단이 아니라 제2야전군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사실 20만 대군을 하나의 사단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들은 상당(上黨) 전투, 한단(邯鄲) 전투, 대별산(大別山) 점령 등 전국시대 진(秦)의 군대가 조(趙)와 초(楚)를 차례로 허물었던 것과 비슷한 경로로 국민당 군대를 격파해 나갔다. 유백승이 뺏으면 등소평이 지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동쪽으로 국민당 군의 근거지를 향해 나가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군부의 1인자가 되다
 
  1948년 11월 이른바 회해(淮海)의 전투에서 두율명(杜聿明)이 이끄는 80만 국민당군은 유백승-등소평의 2야전군과 진의의 3야전군에 포위되어 공황상태에 빠졌다. 수 주간 계속된 전투에서 유백승의 부대는 야금야금 포위를 좁히며 적을 사살해 나갔다. 현재 중국 공산당 측이 제시하는 국민당군 측 사망자는 55만명이다. 마치 일본군의 공세에 속절없이 당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당 측 대군은 더 적은 수의 적에게 궤멸당했던 것이다.이 끔찍한 섬멸전은 국민당의 최후를 암시하는 동시에 등소평이 이제는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군사적인 업적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등소평이 4개의 주력 군단 중 한 개를 장악하고, 한 개는 영향권 아래 두게 되었다는 점이다. 장개석이 대륙에서 쫓겨날 때 제2야전군은 무려 10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령관은 유백승이었지만 군대를 좌지우지할 위치에 있은 사람은 등소평이었다.
 
  제1야전군 사령관 팽덕회는 임표를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부(軍部)에서 등소평의 위상은 사실상 1인자였다. 임표가 나중에 무리수를 두다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단서는 이미 1949년에 보였다. 등소평 주위로 그를 비호하는 장군들이 몰려 있었고, 그는 정치적인 지시를 내리는 위치에 있었다.
 
  1949년 11월, 등소평과 유백승의 부대는 다시 국민당 정부의 마지막 수도 중경을 점령하는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11월 30일 중경을 함락시켰을 때 등소평은 점령자로 이 서부의 고도로 진입했다. 스물이 안된 어린 시절에 이 도시를 떠나 삼협을 빠져나갔던 그가 30년이 지난 지금 점령자이자 군부의 제1실력자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초기에 그는 모택동을 꽉 끌어안고 대들지 않았다. 그래서 팽덕회, 유소기, 임표 등 2인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은 다 쓰러졌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택동도 틀린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다. 그가 속으로 모택동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글자 그대로 틀린 점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전자를 믿지만 1989년 천안문의 학살은 그런 생각이 지나치게 순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내전의 종식자였으며, 또한 개혁개방을 통해 혁명을 최종적으로 갈무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연재를 마치며-1949년 이후 중국 현대사 총평
 
1949년 등소평(맨왼쪽)은 사실상 군부의 1인자가 되어 있었다. 맨오른쪽은 진의.

  등소평은 반우파 투쟁이라는 회오리, 수천만의 아사자를 낸 대약진, 심지어 문화대혁명까지 그는 정치적인 아버지 모택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영원히 오류가 없는 것, 영원히 이타적인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히 생존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모택동에게 그런 것을 요구했고, 모택동 스스로도 그런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은 결국 극복될 수밖에 없다. 등소평은 그것을 극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등소평이 평생 동안 두려워했던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민주라고 본다. 중국 현대사의 극심한 혼란은 통제만이 분열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강유위(康有爲)나 양계초(梁啓超)는 물론이고, 원세개(袁世凱)나 손문(孫文)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중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심지어 노신(魯迅)과 같은 문화운동가도 중국 인민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몽되어야 할 존재였다.
 
  등소평도 마찬가지다. 그가 말하는 중국식 민주주의란 ‘대중에 대한 불신’과 동의어다. 어쩌면 공산주의자는 몰라도 민주주의자가 되기에 그의 이력은 너무나 굴곡이 컸다.
 
  14억 인민이 사는 땅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할 것인가. 너무 공상적인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1900년 막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1949년 공산당이라는 정치체(政治體)가 대륙을 장악하리라고 예견한 이가 있었던가.
 
  지금 2011년 이 시점에서 2050년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심지어 2025년의 일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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