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정치라는 실질적인 측면을 수행하는 지혜를 선물해 준 관리형 선비
⊙ 두 차례에 걸쳐 11년간이나 영의정 자리에 있었지만 한 번도 실권을 갖지 않았다
崔鎭弘
⊙ 48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現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 두 차례에 걸쳐 11년간이나 영의정 자리에 있었지만 한 번도 실권을 갖지 않았다
崔鎭弘
⊙ 48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現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 서울시 중구 회현동1가 203-2(우리은행 정문 좌측)의 정광필 집터.
율곡 이이를 시작으로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그리고 중봉 조헌 등의 인물들은 주로 지사(志士)형 선비였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 신념이 현실과 충돌할 때는 미련 없이 벼슬길을 떠나거나 장렬하게 산화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장렬함만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역사적 현장을 굳건하게 겪어 낸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한민국은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것을 풀어 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지혜는 지사형 선비와 관료형 선비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이제 필자는 ‘지사형 선비’와 비교되는 ‘관료형 선비’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사형 선비들이 우리에게 현실을 살아가는 가치, 즉 정신적인 측면을 선물해 주었다면 이들 관리형 선비는 바로 현장정치라는 실질적인 측면을 수행하는 지혜를 선물해 주었다.
조광조가 목숨을 걸고서 지키려 했던 도학이라는 가치가 이 나라 역사 위에 한 획을 그을 때, 정치의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이 있었다. 조광조가 죽음을 당하는 역사의 순간에 영의정으로 있었던 정광필(鄭光弼·1462·세조 8∼1538·중종 33)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다. 처음에 정광필은 전래의 규범을 그대로 지키려 하였고, 조광조는 삼대(三代)의 고도(古道)를 복귀시키려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광필은 사력을 다해 조광조를 구원하였다.
조광조와 정광필이 현실문제의 해결 방안을 두고 첨예한 마찰을 빚은 것과 조광조가 처형당할 때 끝까지 그를 구원했다는 사실. 우리는 이 두 가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 사건들이 가진 정치적 의미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현 이명박 정부는 집권 후반기 핵심 목표를 공정사회 만들기로 정하고 추진해 왔다. 하지만 공정사회란 정형화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趙光祖와 鄭光弼
공정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적 공간’에서 공정하지 못한 요인들을 세심하게 가려내어 개선해 나가는 길밖에 별다른 거창한 노선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필자는 ‘공적 공간’이란 용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사적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들이 혼자서는 그 삶을 영위할 수 없기에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이 바로 공적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공(公)이란 용어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공이라는 용어를 우리의 공적 공간이 위기를 느낄 때까지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오염이 심각하게 진행된 뒤에나 공기와 물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학을 공부하는 필자 역시 공이란 용어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었다. 정광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광필이 조광조와 마찰을 빚은 것도, 그리고 마찰을 빚었던 조광조를 끝까지 살리려 했던 것도 사실은 공(公)이란 글자 속에 숨어 있었다. 바로 이 ‘공(公)’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정광필의 정치적 사고를 추적하면서 이를 오늘날 ‘공정사회’와 ‘인사청문회’라는 쉽지 않은 주제와 관련시켜 보고자 한다.
현량과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먼저 1519년(중종 14) 12월 3일 있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날 영의정 정광필은 “천거 별시(薦擧別試)를 설치하는 일을 처음 의논할 때에 신은 선비를 뽑는 길이 넓지 않을 뿐 아니라 조종조(祖宗朝)에서 공평하게 뽑던 뜻에도 어그러져서 끝없는 폐단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번번이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뽑았고 시일도 오래 지나 여러 벼슬에 나뉘어 가 있는데, 이제 문득 혁파하는 것은 조정 정사의 체통에 어그러질 듯하며, 우선 현직에 서용하지 않는 것도 구별하는 것이 될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혁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렇게 구별하는 것도 온편치 못하니 예전처럼 대우하고 여전히 서용하여 사체(四體)를 펴서 세상에서 쓰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시기는 조광조가 귀양을 가서 아직은 사사되기 전이었다.
당초에 현량과 설치가 불가하다고 주장했던 정광필이 지금은 이미 현량과를 설치하여 합격증을 주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므로 파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이유는 과거를 설치하고 파하는 것은 국가의 정령(政令=법령)이므로 이처럼 쉽게 바꾸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있는 정치’와 ‘있어야 할 정치’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의 권력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정의 주역들이 사망하고 중종이 친정을 선언한 것은 중종 8년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중종의 지지기반은 여전히 취약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다. 그런데 조광조는 정치의 목적을 도덕의 실현에서 찾고 있었다.
조광조가 중종 12년(1517) 3월 25일 조강에서 임금에게 진언한 내용을 살펴보자.
“무릇 예문(禮文)대로 시행하는 것은 하루 사이에 다 잘할 수도 없는 것이요, 또한 거행하기 어렵다고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한갓 형식만 다루고 말 수도 없는 것으로 모름지기 먼저 배양(培養)하여 인심과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다워지게 한 후에야 마을에 선한 풍속이 생기는 법이니, 조정에서 먼저 예의와 겸양을 실행해야 합니다.”
1년 전부터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은 조광조의 이 말에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예의와 겸양은 백성을 교화(敎化)시켜 풍속을 이루어 가는 것이니, 조정으로 근본을 삼는다는 조광조의 말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세민(細民·가난하고 천한 백성)들은 굶주림과 추위의 근심이 있어서 거주하는 고장에 안정되지 못한다면 예의와 겸양을 실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조정안에서 날마다 논하는 것이 비록 임금의 도리이기는 하지만 외방 백성들이 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으니, 진념(軫念)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광조가 임금에게 말한 내용은 ‘있는 정치’보다는 ‘있어야 할 정치’에 그 초점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도덕의 함정’이라 부르고 싶다. 그런데 임금이 ‘있는 정치’보다는 ‘있어야 할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도덕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해 4월 24일 임금은 “풍속이 야박해져 백성은 겸양(謙讓)하는 풍습이 없고, 마을에는 향음주(鄕飮酒)와 향사(鄕射)의 예가 없어졌으니, 어찌하면 야박을 돌려 순후해지게 하겠는가? 나의 생각에는 순실한 사람을 쓰고 부박한 사람을 제거한다면 자연히 치도(治道)가 한결같이 바른 데로 돌아가 풍속이 순후해지리라 여긴다”며 정광필이 아닌 조광조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말하자면 민생의 문제를 도덕적 교화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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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3-1에 있는 정광필의 묘. |
賢良科와 薦擧制
현량과는 이런 분위기에서 제기되었다. 중종 13년 3월 11일 경연에서 조광조는 천거제를 주장했다. 즉 인재를 선발함에 사장이 아니라 학문과 덕행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방 수령과 홍문관 육경 대간의 추천을 받은 자들을 대상으로 대책(對策·시사문제를 제시하고 그 대책을 논의하게 한 과거시험 과목)으로 시험하자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선발된 사람들을 과거 급제자와 동등하게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날 3월 12일 영의정 정광필은 분명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는 천거할 때에도 역시 재주와 덕행이 있는 인재가 빠질 수 있으며, 대책으로 시험할 때에도 역시 뛰어난 사람이 뽑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천거로 인재를 뽑는) 일은 나라의 과거법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시행한다 해도 후에 올 폐단을 알 수가 없으므로, 나라의 과거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광필의 초점은 현량과가 초래할 수 있는 폐단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예상한 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공(公)’, 풀어 말하면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공정한 도리가 밝지 못하여, 뇌물이 폭주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포저(苞苴·예물, 선물)가 대문에 밀려도 혐의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정광필의 주장이었다. 또 하나, “과거 출신 아닌 사람이 비록 한 가지 착한 일이나 한 가지 덕행은 있다 하더라도 재지(才智)를 반드시 갖추지는 못하므로, 천거제를 따로 설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정광필의 주장은 현량과로 공적세계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과, 공적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착한 자’를 선출하기에 앞서서 ‘능력 있는 일꾼’을 뽑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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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광필 신도비. 신도비문에는 정광필의 관력(官歷)과 행적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
1519년 11월 15일 밤. 겨울 장마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동짓달 보름달은 볼 수 없었다.(이하의 내용은 중종실록을 바탕으로 정두희의 <조광조>를 참고하여 정리했다.) 승정원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승지 윤자임과 공서린, 주서 안정, 검열 이구 등은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간에 궁궐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급히 나가 보니 굳게 닫혀 있어야 할 경복궁의 서문인 연추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에는 군졸들이 좌우로 정렬해 있었고,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경연청의 합문 안에는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 등이 앉아 있었다.
윤자임이 그들에게 왜 이 곳에 와 있는지 힐문하자, 이장곤은 표신(標信·위급 시 발부되는 통행허가증)을 내어 불러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승정원도 모르게 표신이 나간 것이다. 이 사실을 직접 왕에게 확인하려는 윤자임을 만류하면서 승전색(承傳色·왕명 전달 책임 맡은 환관) 신순강은 병조참지 성운에게 ‘당신이 이 순간부터 승지가 되었으니 궐 안으로 들어가 전교를 들으라’ 하였다. 이에 성운은 사관도 없이 들어가서 의금부에 투옥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가지고 나왔다. 명단에는 조광조와 그날 숙직을 서던 윤자임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즉시 의금부는 이들을 투옥하였다.
새벽녘에 임금은 승정원, 홍문관, 대간, 한림을 다 교체하였다. 또한 새로 승지가 된 성운에게 ‘조정의 큰 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중간에서 지체해서 아이들 장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려라’고 분부하였지만 거듭된 왕명에도 불구하고 쉽게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왕은 의금부 당상관들을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인은 적극적으로 조광조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들이 서로 붕당을 맺고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였는데 이는 왕권을 무시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어느새 조광조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붕당을 결성한 죄인으로 몰리고 있었다. 당시 붕당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은 ‘그들이 과격하기는 하였으나, 왕을 속이고 붕당을 맺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날이 새자 정광필 등 의정부의 대신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조광조를 붕당죄로 다스릴 수는 없다고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조광조 등을 붕당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조정에서 청한 것’이라고 변명을 하였다. 정광필은 이에 조목조목 따졌다.
즉 임금은 조정에서 청했다고 했는데, 정광필 자신이 궁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먼저 와 있던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자신들에게 임금이 조광조에게 죄를 청하라고 말했다는 점을 들었으며, 또한 자신이 부름을 받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들의 죄를 다스리자는 단자가 만들어져 있었던 점을 들어 중종의 변명을 반박하였다. 승정원도 모르게 표신이 나갔으며, 영의정도 모르게 의정부에서 조광조의 죄를 물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나아가 정광필은 임금 자신이 앞장서서 조광조를 적극 옹호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였으므로 붕당죄가 성립되지 않으며, 만약 그런 죄를 준다면 그것은 결국 왕이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 임금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김전, 이장곤 등은 조광조의 행위를 붕당죄로 단정하고 이는 참형에 해당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중종은 ‘조광조가 처음부터 나랏일을 그르치고자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조정에서 이와 같이 처형하기를 청하므로 처형할 수밖에 없다’면서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차등 있게 처벌하라고 명했다. 조광조는 꼼짝없이 죽을 처지가 되었다. 임금의 명이 이미 내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임금의 명에도 불구하고 정광필은 그들에게 적용하려는 죄가 애매하다고 하면서, 조광조와 같은 중요 인물을 사형에 처함에 있어서 그 죄를 명시하여야 함에도 적당하게 붕당죄로 몰아 처리하려는 왕의 태도를 계속해 문제 삼았다. 한 번 내려진 임금의 명을 반박하는 행위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안이다. 목숨을 건 정광필의 요구에 임금은 최종적으로 조광조 등 4명은 사형을 면하고 고신을 몰수하며, 장 100에 처하며 먼 곳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린다. 목숨을 건 정광필의 구명으로 조광조의 목숨이 연장되는 순간이다. 왕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광조는 멀리 전라도 능성의 유배지로 이송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만 하루 만인 11월 16일 자정이 넘은 때였다.
하지만 이후의 조정 분위기는 조광조의 개혁을 모두 부정하는 쪽으로 변해 버렸다. 현량과 급제자를 모두 파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앞에서 미리 살펴본 바와 같이 정광필은 현량과가 불공정하게 시행되었으므로 파방해야 한다면 천거로 등용된 모든 사람도 다 파직해야 될 것이라며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사태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정광필 등 대신들이 제 할 일을 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거듭 정광필의 책임을 강조한다. 마침내 12월 16일 임금은 영의정 정광필을 체직하고, 남곤을 좌의정에 임명한다. 이날 조광조는 사사되고, 현량과는 파방하였다.
‘도덕의 함정’ 경계
정광필이 조광조를 반대한 것은 조광조의 현량과 주장이 공정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정광필은 조광조의 주장이 ‘도덕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광필의 화두는 ‘공(公)’이었다. 그는 임금에게 현량과의 문제점을 ‘공(公)’의 차원에서 지적한 것이다. 이미 중종 13년 5월 15일, 정광필은 “임금의 마음은 비록 멀리 당우(唐虞)의 정치를 기약하고 있으나, 법은 마땅히 선왕(先王)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일체 다 고쳐 버리면 뒤에 반드시 폐가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과거(科擧)라고 하는 것은 공심(公心)으로 사람을 뽑는 것이므로, 삼대(三代) 이후로 오직 이 법만이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미리부터 어떠어떠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하고 뽑으면 이는 공심으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니, 신은 실로 그것이 옳은 것인 줄 모르겠습니다”라며 정치의 세계에서 ‘공(公)’의 중요성을 역설했었다. 당우(唐虞)의 정치란 중국 고대의 태평성대로 인식되는 요순(堯舜)의 정치를 말한다. 중종 임금은 멀리 요순의 시대를 떠올렸는데 이러한 사고는 바로 조광조의 정치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조광조는 정치를 도덕으로 인식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도덕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그런데 얼마 후 중종은 조광조의 모습을 권력을 독점하려는 권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중종이 본 조광조는 권력을 독점하는 무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임금은 조광조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인식이 도덕에서 권력으로 널뛰기되면서 조광조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례가 단순히 옛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 역시 권력과 도덕 사이에서 널뛰기하는 모습으로 흔히 인식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필자는 ‘인사청문회’를 꼽고 싶다.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권 남용을 막고 고위 공직자들이 공직에 취임할 만한 도덕성과 정책수행 능력을 갖췄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2000년도에 처음 도입됐다. 하지만 현 인사청문회에 ‘도덕’과 ‘권력’만 있다는 것은 필자만의 견해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도덕과 권력이라는 잣대로 인식을 하게 되면 공정성이 담보될 수 없다. 정광필은 이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정광필이 임금의 명을 번복하면서 조광조를 살린 이유는 무엇보다도 임금과 자신이 모두 공인(公人)으로서 공인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그가 조광조를 신원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조광조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공적세계를 무너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광필이라면 오늘의 인사청문회 반대했을 것
조광조 등의 주장과 같이 정치를 도덕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출발이야 좋은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이념과 가치의 문제에만 과도하게 치우치게 되는 문제를 낳고 말게 된다. 이 점을 정광필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조급한 조광조에게 ‘있어야 할 정치’보다는 ‘있는 정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늘날 도덕의 함정은 ‘인사청문회’라는 새로 만든 제도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왜? 도덕적으로 낙인이 찍히는 일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니까. 정광필이었다면 인사청문회를 도입할 때 앞장서서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되었다면 문제점을 고쳐 가며 그대로 시행할 것을 주장했을 것이다. 인물을 찾는 자리에 도덕군자를 찾으면 곤란하다.
도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도덕을 우선시할 때, 즉 정치를 도덕적으로 할 때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를 뽑는 자리가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 등이 우리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분들에게 정치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광필은 전후 2차례에 걸쳐 11년간이나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정광필은 한 번도 실권을 갖지 않았다. 조광조가 실각한 후 실권은 남곤이 가지게 되었으며 이때 정광필은 실각한다. 중종 22년(1527) 남곤이 죽자, 정광필은 영의정에 복귀하여 7년이란 긴 기간을 복무하였다. 이후 권력은 감안로에게 옮아갔고, 이때 정광필은 김안로로부터 배척을 받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김안로의 몰락으로 조정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70을 넘긴 나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