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갈량의 남만 원정로이자 中日전쟁 당시 연합국의 中원조물자 공급하던 루트(버마로드)
⊙ 일본군, 장개석의 버마 원정군 물리치고 운남 침공
⊙ “조선籍 위안부 20명, 중국군의 포로 됐다가 1946년 일본 송환” 기록 발견
⊙ 일본군, 장개석의 버마 원정군 물리치고 운남 침공
⊙ “조선籍 위안부 20명, 중국군의 포로 됐다가 1946년 일본 송환” 기록 발견
그 유래가 어쨌든 운남은 구름에 싸인 높은 산의 남쪽에 있는 곳이다. 과연 운남으로 들어가는 길은 험하기도 하다. 옛날에 사천성에서 운남으로 가자면 제갈량(諸葛亮)이 남만(南蠻) 정복 길에 지났다는 좁다란 오척도(五尺道)를 따라 계곡 길을 타고 내려가야 하고, 귀주성에서 들어가자면 운귀고원의 끝없는 구릉들을 넘어야 한다. 서쪽으로는 히말라야산맥이 연결되어 있으니 마방(馬幇)들이 다니는 이른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험로 빼고는 길이 없었다. 운남은 이렇게 내지(內地)에서 떨어진 구름 너머의 세계, 문인들에게는 몽환의 세계였다.
고래로 구름 너머의 이 땅은 이국적인 것이 넘치는, 즐기는 곳이다. 운남의 성도인 곤명(昆明)은 춘성(春城)으로 불린다. 사계절이 봄인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흐트러진다. 불야성을 이룬 네온사인도 여기서는 왠지 용납이 되는 것 같다. 이곳은 즐기는 곳, 바로 봄의 도시다.
옥룡설산 아래 려강 시가지에서 여름에 설산의 잔설을 보면서, 사천에서 온 주인이 운영하는 차(茶) 한잔을 들면 세상사는 나와는 관계가 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남을 찾고, 운남에서 쉬고 싶어한다. 그곳은 구름을 넘어서 가는 유토피아니까. 이런 곳에서 어쭙잖게 역사를 생각하는 것은 쑥스러운 일 같다.
국제전의 무대
그러나 이 땅도 1900년대 전반기의 격동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특히 1940년대 이 땅은 내지보다 더욱 격렬한 파고를 겪었다. 동쪽에서 쫓겨온 사람들(국민당 정부)에게 이 땅은 뒷마당이었다. 그러나 서쪽에서 중국을 옥죄려는 이들(일본의 버마 침략군)에게 이 땅은 신천지였다. 남의 땅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던 이(인도와 버마의 식민지 종주국 영국)에게 이 땅은 별장이었고, 자기 집 안에서 뺨을 맞은 이(진주만을 기습당한 미국)에게 이 땅은 보복의 적지(適地)였다. 그래서 1940년대 전후 이 땅은 격렬한 국제전(戰)의 무대가 된다.
닫힌 것처럼 보이는 이 땅이 국제전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남쪽으로는 열린 좁은 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고원에서 발원하여 열대의 숲을 지나는 동안 장대해지는 세 개의 강이 남쪽으로 흩어져 흐르며 만든 통로다. 가장 서쪽의 노강(怒江)은 버마로 들어가면서 살윈강으로 이름이 바뀌어 흐른다. 중간의 란창강(瀾滄江)은 국경을 나서면서 메콩강으로 이름이 바뀌어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통과하는 거대한 물줄기다. 그리고 가장 오른쪽의 홍하(紅河)는 바로 베트남에 들어가서 통킹만의 비옥한 삼각주를 만든다.
운남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을 당시 세 출입구들 중 메콩강 하구와 홍하 하구는 이미 일본의 수중으로 떨어졌고 남은 것은 가장 서쪽의 노강 하구였다.
‘뜨거운 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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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옥에 들어선 것처럼 열해 계곡에 들어서면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
사실 인도, 버마, 라오스, 태국, 베트남과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이 남방의 여름을 걸어 다니는 여행자가 보내기는 쉽지 않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열대의 찌는 열기가 훅훅 달려들었다. 한 달 동안의 여행을 보내고 귀국하자 황달에 영양실조라는 황당한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국적인 풍광들은 더위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끔 열대가 길러낸 거대한 나무들 발치에 서면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열대 중에 또 ‘뜨거운 바다(熱海)’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등충 열해에 들어서면 누군가의 표현처럼 연옥(煉獄)에 들어선 것 같다. 계곡을 들어서면 땅속에서 쉭쉭거리며 수증기들이 뿜어져 나오고,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땅 거죽 바로 아래 아직 용암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이 계곡을 흐르는 차가운 물과 합쳐질 때 땅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는 또 다른 작은 구름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개인지, 뜨거운 김인지, 작은 구름인지 모를 허연 물방울들이 떠 있고, 진주천(珍珠泉)이네 회태천(懷胎泉)이네 하는 분출구에서는 끓는 물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분출구 가까이에 가면 짚신을 신은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증기에서 익힌 달걀을 파는 아낙들, 열기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이국적이지만 극히 평화로운 전형적인 변경의 관광지였다.
‘열해의 펄펄 끓는 거대한 가마솥(熱海大滾鍋)’이라고 쓰여진 분출구 옆에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정자가 하나 딸려 있었다. 나도 거기서 다리를 쉬었다. 그 벽에는 좀 어쭙잖게도 국민당식 제복을 입고 있는 한 사나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를 조문(弔問)하는 시(詩)도 한 편 붙어 있었다. 무심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러나 그 이상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근대사를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잔인한 일이다.
仙境 속의 고뇌 - 그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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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당원이었던 장문광을 기념하는 조각. 담장에 새겨져 있다. |
아직 가슴도 덜 나온 소녀 둘의 나체 사진이었다. 동남아시아 소녀인 것 같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는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1944년 일본인들을 등충에서 몰아낼 때 등충 성곽의 구멍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을 몰아낸 후 유방(留芳)사진관의 주인이 호기심에서 이 독일제 아그파 필름을 현상해 보았더니 그것은 위안소(慰安所)에서 찍은 소녀들 나체 사진이었다. 그 책의 이름은 《변경 제1도시의 피의 기억― 등충 항일전쟁 견증록(極邊第一城的血色紀憶-騰沖抗戰見證錄)》이었다.
슬픔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몰려들어 왔다. ‘세상 어느 곳이 인간의 역사를 피할 수 있을까?’ 숙소로 돌아와서 1940년대 초반 버마(미얀마)를 통해 침입한 일본군과의 투쟁을 담을 자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정자 옆 자그마한 담장에 조각되어 있는 그 인물이 누군지도 찾아보았다. 그는 장문광(張文光)이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한 일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등월기의(騰越起義). 1911년 10월 27일, 무창기의에 호응하여 혁명당원이었던 장문광이 등충에서 봉기를 해 성을 장악했다. 그들은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곤명은 이미 채악이 장악하고 운남성도독부를 연 상태였다.
雲南에서 찾아낸 조선 종군위안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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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해를 여행하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 속의 나체 소녀들 사진. 〈변경 제1도시의 피의 기억- 등충 항일전쟁 견증록〉 이라는 책자였다. 동남아 소녀들로 짐작되는 이들은 ‘위안부’였던 것이다. |
<(1944년) 운남 서부 반격작전 중에 중국원정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위안부는 수십 명이다. 그중 조선적(籍) 위안부가 20명, 일본적이 5명, 중국적이 4~5명이었다. 포로가 된 조선적·일본적 위안부는 일단 보산으로 보내 1개월간 집중 보양한 후에 곤명으로 보냈고, 후에는 중경으로 이송했다. 1946년 4월 하순, 중국정부는 중경에 수용하던 전쟁 포로들을 송환했는데, 조선적 부녀자가 속해 있던 위안부들과 일본군 포로를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中共保山市委黨史地方志工作委員會 주편, 《-西抗日戰爭史》)
일본군은 버마를 통해 중국 운남을 침공했기 때문에, 그 조선적 여인들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갔다가 바다를 건너 버마에 상륙하고, 다시 운남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일본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결국 일본으로 돌아갔다. 아득한 옛날의 일도 아니요 고작 60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현대사에 이르면 세계는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슬픔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삼나무를 내리친 일본도
1930년 후반부터 중국과 일본이 전면전을 개시할 당시 우리는 이미 식민지 상태였고, 발을 딛고 적에 대항할 땅도 없었다. 우리는 결국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지 못하고 광복을 맞는다. 1945년 서안에서 훈련을 받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 기도도 결국 실행되지는 못했다. 본토에서 싸워 보지 못한 민족의 아쉬움, 부끄러움, 혹은 부러움 등이 뒤섞여, 항일전쟁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당당히 승전국의 일원이 된 중국이 마냥 부럽다. 비록 인민들의 시체로 땅을 뒤덮으며 얻은 승리였지만 승리는 승리였다.
항일전쟁은 광대한 중국 본토의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지금 우리는 서남 전선의 한 지역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지만, 전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동부전선의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7년 7월 7일 북경 근처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일본은 도발을 개시하고 전면전을 위한 구실을 만들었다. 그 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서북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중국대륙 전역이 전장으로 바뀌었다. 초기 일본의 기세는 실로 엄청나서 동부의 주요 도시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실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그러나 국민당군이든 공산군이든 나름대로의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양자의 전략은 동전의 양면처럼 극히 비슷하면서도, 또 극히 달랐다. 그러나 둘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은 똑같았다.
지금 독사 한 마리가 구렁이를 삼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구렁이를 한 번에 삼키려다가는 분명히 배가 터져 죽을 것이다. 독은 충분하나 소화액이 충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일본도로 내리친 나무는 대나무가 아니라 삼나무였다. 예리한 칼은 무른 나무의 살을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곧 깊숙이 박혀서 빼낼 수가 없는 지경이 된다.
장개석은 일본이 중국의 한 성을 점령하는 데 한 달이 걸린다고 해도 30개월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전황은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모택동은 일본군이 화북의 광대한 땅에서 산개하는 순간 전방에 고립되어 후방의 광대한 땅을 유격전 전사들의 목표물로 남겨두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모두 거대한 땅과 인구를 믿고 있었다.
“굴복해서 멸망하느니…”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이 서안을 방문한 장개석을 구금하고 항일전을 촉구한다. 마침내 이듬해 일제는 북경 남쪽에서 전면 도발을 개시했다. 국공합작은 미룰 수 없는 과제였고,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장개석의 작전이란 기본적으로 국제사회의 개입을 염두에 둔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전 그는 일기(1935년)에서 앞으로의 정국을 이렇게 예측했다.
“일본이 마침내 군대를 파견한다. 중국이 저항한다.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일본 내부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일본이 10년 안에 패망한다.”(레이 황, 《장제스의 일기를 읽다》에서 정리)
1937년 12월 13일 남경이 함락됐다. 겨우 전쟁이 시작된 지 넉 달 만에 수도가 함락되었던 것이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은 일단 전선을 정비하기로 하고,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은 만주국 승인, 전쟁 배상금, 일본 점령 지역에서의 무장행동 금지 따위를 들고 협상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일본은 너무 많이 나갔다. 독사 한 마리가 구렁이 꼬리를 물고 전체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장개석도 참을 수 없었다.
“굴복해서 멸망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벌이다 패배해서 멸망하는 편이 낫겠다.”(일기)
멸망이란 말은 지도자가 해서는 안 되는 감상적인 소리였지만, 그의 결기는 진심이었다. 연이어 동부 해안도시 거의 전역이 일본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당시 장개석은 다시 국제사회의 개입에 희망을 걸었지만, 소비에트도 미국도 미적거렸다. 장개석의 중국은 너무나 허약해 보였다. 그들을 끝없이 뒤로 밀렸다.
실패는 장개석을 단련시켰다. 그는 이제 기댈 곳이 없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 싸울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무모한(?) 싸움을 피하려 했지만, 싸우려는 마음을 버리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공산당의 전술을 채택했다. 중국은 넓고 인구는 많다! 사실 그것이 정답이었다.
아무리 그를 심하게 공격하는 사람도, 1937년에서 1940년까지 절망 상황에서 장개석이 보여주었던 놀랄 만한 낙관주의의 위력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1939~40년 겨울 장개석은 드디어 반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할 서남부 지역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작전을 수행한 이들도 공산군이 아니라 국민군이었다.
毛澤東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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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려에서는 미얀마풍 불탑을 만날 수 있다. |
“중국은 망할 것인가? 대답: 망할 수 없다. 최후의 승리는 중국의 것이다.
중국은 빠른 시일 내에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대답: 빨리 이길 수 없다. 항일전쟁은 지구전이다!(抗日戰爭是持久戰)”
“중국은 거대한 나라다. 설령 일본이 중국의 1억에서 2억 인구가 사는 지역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패배는 여전히 요원하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과 싸울 거대한 역량을 가지고 있고, 일본은 전쟁 내내 반드시 그 후방을 방어하는 데 급급하게 될 것이다. 일본이 설령 중국의 연해지대를 봉쇄하더라도 중국의 서북, 서남, 그리고 서부는 봉쇄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는 최후의 승자가 중국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그의 주장과 장개석의 일기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장개석은 후방작전의 개념이 없는 반면 모택동은 일본이 점령한 후방을 다시 공격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중일전쟁 당시 크게 남부, 동부, 서남부 전선의 항쟁은 국민당군이 주도하고, 화북 전선은 공산군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보산에서 등충으로 가면서 노강 대교를 건너다 보면 뜨겁고 습한 협곡 사이로 노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열대의 강은 방향을 짐작하기도 어렵게 심하게 몸을 비틀며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훨씬 남쪽 서려(瑞麗)에서 국경을 나서는 노강은 유유하고 그 품이 넓었다. 저 강물은 오늘 안에 국경을 넘어 버마에 도달할 것이다. 저 강이 만들어 놓는 통로를 따라 오늘날로 사람과 물자가 움직인다.
운남 서부의 큰 길은 곤명에서 대리를 거쳐 보산, 서려로 이어지고, 결국 국경을 나서 버마로 들어간다.
서려에 들어서면 중국 속의 동남아시아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하얀 얼굴, 인도풍, 버마풍의 각양 각색의 옷. 버마에서 옥석을 들여오는 상인들. 코코넛을 파는 사람들의 얼굴 또한 그 엄청나게 다양한 민족구성만큼 다채롭다. 뜨거운 탕과 차가운 음료, 헤아릴 수 없이 가짓수가 많은 면과 볶음밥. 비끄러매고, 안고, 업고, 들고, 지고. 아이를 업는 방법도 민족의 수만큼 다양하다. 육지로 외국과 통하지 못하는 우리네 입장에서 이런 다양함은 한없는 부러움과 겸손함을 자아낸다. 이렇게 중국은 동남아시아로 통해 있다.
다시 중일전쟁 시기로 돌아가 보자. 전쟁 초기보다 승리에 대한 기대는 높아졌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전시(戰時) 임시수도가 중경(重慶)이 되면서, 중경을 둘러싼 사천, 귀주, 운남, 광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후방이 되었고, 특히 서쪽으로 버마로 통하는 운남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항구들이 모두 봉쇄된 것이 뼈아팠다.
전쟁이 국제전으로 치닫고, 연합국이 중국을 지원하고자 해도 물자를 들여갈 통로가 없었다. 그래서 동부가 봉쇄되자 국민당 정권은 영국령 버마를 통해 운남으로 물자를 실어 나를 방안을 토의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탄생한 것이 바로 전설적인 길인 버마 로드(중국명 -緬公路)다. 지금은 번듯하게 포장된 국제 도로지만 당시는 거의 오솔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 길은 전시 중국의 생명줄이었다.
도로공사에 3000명 사망
하관, 보산, 용릉(龍陵), 망시(亡市), 완정(町)을 거쳐 버마의 라시오까지 이어진 이 길은 총 길이 1146km, 중국 국내 구간 959km에 달하는 장거리 국제교통로였다. 동북에서 동남까지 해안선이 완전히 봉쇄당한 국민당 정부가 이 서남의 길 하나에 거는 기대는 막대했다.
당시 길을 만들면서 운남성 정부가 채택한 전술은 “구간을 나누어서 한꺼번에 수많은 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드는 인해전술(分段施工,人海戰術)” 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총 인구 36만명의 보산현에서 매일 도로공정에 차출된 인원만 2만8000명이었고, 공정 기간 중 극렬한 노동으로 사망한 이들이 551명에 달했다고 한다(林超民 주편, 《雲南鄕土文化叢書.保山》). 그러나 이 기록은 일부 구간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설명하는 것 같다. 더 구체적인 기록에 보면 전체 공정의 사망자는 3000명, 100명 중에 1.5명이 공사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전서항일전쟁사》). 열대의 폭우와 폭염을 견뎌낸 살인적인 공정이었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생명줄을 지키는 대가 역시 막대했다.
비록 자주 승리하는 사령관은 아니었지만 장개석은 끈질기게 전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미국의 루스벨트는 장개석을 태국과 베트남을 포함한 중국전구(戰區)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물론 실질적인 권한은 참모장인 스틸웰이 나누어 가졌지만, 이 일은 중국이 이 국제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1942년 초 미(美) 의회는 장개석에게 5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장개석을 지원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또 1941년 11월 일본이 버마를 침공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은 중국의 운남을 거점으로 버마를 지켜낼 필요가 생겼다. 물론 중국은 생명줄인 버마 로드를 방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들 연합국이 생각해 낸 것은 버마 반격이었다. 그리고 장개석은 중국이 이 전쟁에서 맡은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42년 3월 10만에 달하는 원정군이 버마 로드를 따라 운남을 떠나 버마에 진입했다. 그러나 “인류 공적인 일본강도를 타도하고, 우방의 태평양 전구의 작전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당당하게 버마로 진군했던 이 군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절한 패배였다. 버마의 정글은 여러 지역에서 몰려든 중국 군대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뜨거웠고, 믿었던 영국군과 미국군도 악머구리 같은 일본군에게 연일 패배했다.
상호 책임을 미루는 비난 속에서 1942년 버마 전선에서 영국 미국 중국 연합군은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스틸웰은 중국군의 작전수행 능력 부족을 비난했고, 장개석은 스틸웰의 무능을 비난했다. 사실 중국군의 전투력으로 일본군 정예부대를 정면상대하기는 무리였다.
騰沖 攻防戰
패배의 후과는 영토의 상실이었다. 일본군은 퇴각하는 중국 원정군을 따라 중국영토 안으로 들어왔다. 5월 3일 완정에 들어온 일본군은 불과 일주일 만에 등충을 함락시켰다. 이미 시민들은 등충을 떠났고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천혜의 요새 등충은 총 한 발 쏴 보지 못하고 일본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로써 노강 서쪽은 일본군의 차지가 되었고, 버마 로드는 열린 지 겨우 몇 해 만에 적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연합군은 험한 히말라야를 넘어 비행기로 물자를 공수했지만, 그 양은 전쟁을 수행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다시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인도주둔 중국군, 버마와 인도의 영국군, 미군, 운남을 출발한 중국원정군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였다. 운남군은 후방의 안정을 위해 먼저 노강 서쪽의 일본군 점령지를 되찾아야 했다. 중국에서는 노강 서쪽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1944년 전서대반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해 9월 결국 등충을 다시 찾았다.
등충을 수비하던 일본군 56사단은 결국 전멸했다. 일본군은 한 사람도 투항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는 ‘충성심’을 보였다. 무려 중국군 12개 사단이 투입되고, 이어서 3개 사단이 보충되어 가까스로 얻은 승리였다. 미군의 공습협조와 일본군에 대비해 압도적인 사상자를 내면서도 끝까지 진군한 중국군의 투혼으로 달성한 승리였다.
1944년에 5월에서 1945년 1월 말까지 진행된 전서대반격 작전에서 희생된 중국 원정군 수는 2만6697명, 부상자 3만5541명, 실종자 4056명, 총 6만6294명이었으며, 보산 주민 중 항일전쟁 중에 사망한 사람은 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체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정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승리였다.
버마에서도 2차 원정은 기세가 달랐다. 이번에는 일본군이 몬순에 갇혔고, 영국 공군의 격렬한 저항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인도를 방어하고자 하는 영국의 의지가 남달랐기 때문일까? 미군과 중국군도 나름의 역할을 해냈다. 중국군과 미군의 혼성 부대도 만들어졌는데, 그들의 그 수많은 차이와 비효율을 극복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도 불가사의다.
여러 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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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의 극렬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화순도서관. 외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갹출해 세웠다. |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많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야만적인 전쟁 속에서 끝까지 강건함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우리 부형들은 반드시 더 큰 희생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여야만, 우리 전서(-西)의 과거 역사의 영광을 지켜내고, 운남 항전사의 가장 휘황한 한 대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1942년 6월 1일, 등충 사람 이근원·李根源이 인민들에게 호소한 항일 호소문, <告-西父老書>)는 강골들의 옹골찬 주장들도 있었다. 그러나 저항의 형태는 여러 가지였다.
등충 화순(和順)은 고색창연한 교향(僑鄕)이다. “토지는 온화하고, 백성은 순하다(地和民順)”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패루를 지나면 전형적인 시골마을 화순이다. 그러나 이곳은 외국으로 나가 거부가 된 사람들이 수두룩한 화교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작은 마을에는 커다란 도서관이 있다. 외지에 나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갹출해 세운 도서관이다. 류옥박(留玉璞)은 이렇게 회고했다.
“도서관의 책을 지키기 위해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등충주재 일본군 행정부장 다지마(田島)를 찾아가 도서관을 보존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董平 저, 《和順風雨六白年》)
그래서 그런지 도서관은 이렇게 여기에 의연히 남아 있다.
동네 저수지 언덕 위에는 저명한 공산주의자이며 철학자인 애사기(艾思奇. 본명 李生萱)의 옛집이 남아 있다. 애사기는 1937년 연안을 찾아가 모택동 이론의 기초를 놓는 데 기여한 사람이다. 그의 형 이생장(李生庄)은 남아서 극단을 만들어 군대를 따라다니며 대일항전 선전활동을 했다. 남은 사람은 남아서, 떠난 사람은 떠나서 싸웠다. 화교들은 돈을 대어 길을 만들고, 비행기를 구입하고, 양식을 댔다.
국경 여인의 미소
서려 국경 관문 옆에서 코코넛 물에 얼음을 타 2원에 파는 다이족(族) 자매를 만났다. 그녀들의 두어 평짜리 가게에서는 코코넛 열매 하나가 물보다 더 싸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갈증을 다스리는 데는 물보다 코코넛 즙이 훨씬 효과가 있다. 더위에 지친 사람을 위해 코코넛 즙을 빼내 컵에 담고, 거기에 얼음을 듬뿍 넣는다. 여인들의 정직한 돈벌이, 적의 없는 여인들의 순결한 미소가 가슴에 사무친다. 그 미소가 과거 그곳까지 끌려갔던 조선 여인들의 아픔까지 지워주길 바라 본다. 그리고 그녀들은 한평생 싸움을 모르고 살아가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