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자전거 종주기 ⑥

청춘의 열정을 시험한 완벽한 더위와 완벽한 허기

  • 글 : 문종성 자유기고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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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신념과 열정이 바꾼 奧地 중의 오지 말라위 호수 리코마 섬
⊙ “맙소사! 당신들이 넘어온 길에는 사자가 살고 있단 말이에요. 작년에도 한 여인네가 습격당해
    사망했답니다.”
⊙ 질리도록 반복되는 모잠비크 루트의 언덕은 열정의 불꽃을 단번에 사그라지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다.

文鐘星
⊙ 30세.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6년간 약 80여 개국을 자전거로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2007년 5월 미국 뉴욕에서부터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 북미와 중남미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 중.
⊙ 저서 : 《비전청년의 세계일주 - 자전거 타고 쿠바여행》 《라이딩 in 아메리카》
    《일생에 꼭 한 번 가 봐야 할 곳, 멕시코》.
니코마 조세가 세운 Madalitso E.C.D Centre 학교에서 수업받는 아이들. 이 학교 덕분에 마을이 활기를 찾고 긍정적으로 변했다.
“맙소사,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이 섬까지 들어왔단 말이에요?”
 
  온화한 표정으로 맞아 주던 벨기에 출신의 니코마 조세는 자전거 여행 얘기에 그만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이 섬에 10년째 있지만 자전거 타고 온 여행자는 처음 보는 것 같군요.”
 
  “그럴 만도 하죠. 정기선 한 번에 배 안으로 물이 차는 돛단배 두 번 타고 산을 넘어서 왔으니까요, 하하.”
 
   이동이 불편한 리코마 섬은 정말 오지(奧地) 중의 오지다. 배낭여행으로도 접근하기 쉽지 않지만 자전거 여행이라면 자전거가 짐짝 취급 되는 건 당연한 얘기다. 그런 여로를 이해해 주며 그녀는 일반 배낭여행객의 3분의 2 가격으로 저렴하게 제공하는 숙소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10년도 더 넘은 오래 전에 이 섬에 배낭여행을 왔었다. 호수 안에 있는 섬의 경치도 괜찮고 마을 사람들도 순박하며 무엇보다 외부인들의 출입이 없으니 그녀는 아늑한 분위기에 끌려 섬 여행을 했단다. 그런데 한 가지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섬 치고는 제법 많은 이가 살고 있었지만 단 하나의 학교도 없었던 것. 어른들도 그렇고 그런 삶을 살고 아이들 또한 꿈이 없이 평생 섬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다른 아프리카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리코마 섬 역시 에이즈와 말라리아, 장티푸스, 콜레라 등 각종 질병에 취약했어요. 마을에 제법 큰 교회가 있긴 하지만 당시만 해도 종교적인 역할만 담당할 뿐 교육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거든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동하더라고요. 교육만 받을 수 있어도 아이들이 더 큰 청사진을 그려 볼 수 있고, 마을에도 활력이 돌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들을 돕고자 아예 고국의 삶을 정리하고 와 버린 거죠. 지금은 보시다시피 매우 만족해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섬마을에 외국인 한 명이 들어와 산다는 건 큰 이슈였다. 게다가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그녀는 섬에 정착하자마자 학교 건립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현지인들은 그녀의 활동에 적극적인 지지와 힘을 보탰다.
 
 
  학교가 지역사회에 활기를 만들다
 
  “학교 건축에 필요한 재정과 교육 커리큘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아이들의 교육과 마을 발전을 위해 학교를 짓는 것이니 함께 동참해 주십시오!”
 
  “우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해야 할 일이니 마을 장정들과 아낙네들을 모아 학교 건축을 우리 힘으로 해 나가겠습니다.”
 
  일방적인 소통이 아닌 함께 협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리코마 섬 최초의 학교는 그렇게 세워질 수 있었다. 가뜩이나 가난한 데다가 자신들만큼이나 가난한 중앙정부에서조차 역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섬주민들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개교하자마자 학교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지금은 수백 명의 학생이 무상교육을 받고 있으며, 초기 몇 년 동안 아이들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무료 봉사를 실시했던 선생님들에게 이젠 매월 월급을 주고 있다. 고국 벨기에의 지인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서 후원을 받아 모든 운용경비를 충당하는 것이다.
 
  “모든 아이가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중에 영특한 학생들은 수도 릴롱궤로 가지요. 아이들이 그럽니다.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꼭 섬에 돌아와 마을을 발전시키겠다’고요.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행복하죠.”
 
  한 사람의 신념과 열정이 섬 하나를 바꾸어 버렸다. 지금 리코마 섬은 활기가 넘친다. 정기선도 오고 가고, 육지와 인적·물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생기가 돌고 있다.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 그들 가슴에 한 줄기 빛과 열망을 안겨 주는 일은 보통 쉬운 도전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부싯깃을 준비하고, 불쏘시개 역할로 헌신만한다면 다음부터 불을 피우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 된다.
 
  아이들은 오늘도 종종걸음으로 학교로 간다. 교실이 떠나갈 듯 외치는 노랫소리와 차분히 줄을 서서 물을 받아 마시는 모습에 행복한 기운이 구석구석에까지 퍼진다. 바오밥 나무로 둘러싸인 리코마 섬에도 꿈은 이루어지고 있다.
 
 
  야누스의 얼굴, 모잠비크 코브에
 
말라위 리코마 섬에 학교를 세운 벨기에 출신 조세(가운데)와 학교 행정을 돕는 현지 코디네이터(좌)와 자원봉사자 나탈리(우).
  “말도 안돼요, 이건!”
 
  여정(旅程)을 잘 따라와 주고 있는 기연이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풍경 앞에 어쩔 줄 몰라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사파이어가 호수를 물들인 느낌이다. 우리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 정신으로 떠난 모험에서 문명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곳, 지상의 파라다이스를 찾았다.
 
  리코마 섬에서 다시 다우선(dhow)을 타고, 항해(航海)하기를 한 시간 여. 여전히 낡은 배 안으로 호수 물은 차오르고 돛은 바람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뭍으로 향한다. 배 한 척에 손님은 채 10명도 되지 않고, 긴 항해 동안 가야 할 목적지는 여러 곳이니 수지가 맞을까 염려되지만 기름 값이 들지 않고, 여유롭고 낙천적인 생활을 하는 그들에겐 이런 일도 자부심을 준다.
 
  “이동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운행(運行)을 하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요. 그래도 난 이렇게 여객선(그러나 매우 남루하다)으로 푼돈이라도 벌지만 다른 어부들은 나룻배 수준으로 고기만 잡아야 하니 생활은 훨씬 힘들어요.”
 
  그런 배를 타고 도착한 모잠비크의 땅. 리코마 섬과 불과 한 시간 거리지만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낯선 곳에서의 긴장과 경계도 이들의 순수한 얼굴을 보고는 금방 마음이 풀어진다. 리코마보다 더욱 오지이니 요즘 흔한 말로 ‘오지의 종결지’ 정도 되는 셈이다.
 
  외부인이 1년에 채 얼마 오지 않는다는 코브에 국경의 분위기는 평화로운 가운데서도 힘겨움이 느껴졌다. 모잠비크는 유럽 열강의 지리멸렬한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 가까스로 1975년 독립을 이뤄 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공산정권이 등장하자 정부와 반군 간에 내전 상태에 돌입한다. 16년간 무려 100만명이 사망한 최악의 참사였다. 그 참혹한 역사는 이 깊고 깊은 오지마저도 비켜 나질 않았고 마을 중심에 건축된 성당은 구멍 난 총상이 여기저기에 있다.
 
  “그때 내 형을 잃었습니다. 끔찍했지요. 정부군인지 반란군인지 나도 몰라요. 그냥 자기네 편 아니면 죽이는 겁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산속으로 뿔뿔이 도망갔는데 아직도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 제법 됩니다.”
 
  태양열 발전기로 에너지를 모아 노트북을 충전시켜 준 마을 청년이 어두운 과거에 대해 털어놓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뜻밖의 외부인을 만났다. 이곳에서 몇 년째 홀로 구호 활동을 벌이는 영국인 페그를 만난 것이다. 딱딱한 스코틀랜드 억양을 섞어 말하는 중년의 그녀는 이곳을 찾은 이후 극심한 빈곤을 보고 자립시키기 위해 정착해 다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식량 자원의 부족 때문에 마을 사람 전체가 곤란한 지경입니다. 주식으로는 옥수수가 있지만 다른 영양분 공급을 기대할 처지가 못 되고, 호수가 바로 앞에 있지만 바로 마시기에는 수질이 좋지 않아 물과 관련된 질병에 시달리죠. 그뿐인가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전기도 없고, 우물도 없어요. 총체적 난국이에요.”
 
 
  코브에 국경에서도 모기장 설치해 줘
 
현지인들의 주식인 시마와 물고기 탕. 우리가 마을에 모기장을 쳐 주고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직접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참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비슷한 듯하지만 리코마 섬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말라리아 발병 상황은 어떤가요?”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호숫가에 위치해 모기가 극성인 데다 예방과 치료를 병행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조건에 있어요.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실제로 지역 주변에는 반경 100km에 비포장도로조차 연결되지 않은 수십 개 마을에 수천 명이 고립되어 살고 있다. 예방은 물론 위급한 상황 시 이들은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말라리아를 예방하려면 모기장이 필요하겠군요. 괜찮다면 제가 돕고 싶은데 말이죠. 직접 설치하겠습니다.”
 
  “오, 무척 반가운 말이로군요. 어디에다 설치하면 좋을지 정해서 알려줄게요. 마침 콘퍼런스가 있어서 각 마을 추장(대표)들이 모이니까요.”
 
오지에 사는 아이들은 다쳐도 딱히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가 요원한 상태다. 코브에 마을회관에 붕대로 얼굴을 감은 아이가 울고 있다.
  우리는 이동을 멈추고 바로 여장을 풀었다. 바로 앞에 말라위 호수가 펼쳐진 페그의 집 앞에 텐트를 쳤다. 그녀의 집은 협소한 숙소이지만 정말이지 영화처럼 아름다운 절경 앞에 지어져 있었다. 태양열로 전기를 얻어 쓰고, 식수를 제외한 모든 물은 호수로부터 공급받았다. 따로 환경에 치명적인 유해 물품을 쓰지 않고 완전한 에코 스타일로 살고 있었다.
 
  모기장을 구할 수 없기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다방면으로 수소문을 해야 했다. 마침 스웨덴의 또다른 자원봉사자가 휴가를 맞아 가족 여행을 오기로 했는데 그 편에 부탁한 것이다. 육로와 수로를 이용한 수송 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틀에 걸쳐 운반된 모기장을 받자마자 바로 산으로 올라가 모기장을 치기 시작했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코디네이터를 섭외해 산속의 외딴 가옥마다 직접 설치해 주고 그를 통해 말라리아 예방 취지와 모기장 세탁법 등을 설명하게끔 했다. 우리는 폭염이 쏟아지는 날씨에도 도움이 필요한 가정집을 찾아 여덟 시간 동안 걸어 다녔다. 마지막엔 진이 다 빠질 정도였다.
 
  아이들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우리를 보더니 낯가리는 것도 잠시, 재잘재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방인 구경에 푹 빠져 있다. 사람들은 뜻밖의 방문에 놀라워하면서도 연방 손을 잡으며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아니다. 우리가 더 감사하다.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을 단순 흥미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하기보다 이렇게 속살을 보고 마음을 나눌 수 있어 우리가 더 감사하다. 기연이와 나는 모기장 설치 봉사를 마치고 그날 밤 별을 보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어떡하면 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여정이 뭔가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전거 여행의 가장 험난한 코스
 
동행한 최기연이 현지인 가정에 모기장을 쳐 주고 사진을 찍었다. 어른과 아이 방이 대개 따로 있으므로 모기장 구호활동을 할 땐 각 가정에 라운드와 스퀘어 형식의 모기장을 보통 2개씩 쳐 준다.
  정적 속에 그는 얼어 있다. 지그시 다문 입술과 치켜든 눈썹에서 거대한 벽을 마주한 인간의 고뇌가 전해진다. 자못 철학적이기까지 한 남자의 심각한 표정에도 나는 되바라지게 무심하기만 하다. 그의 처지는 아랑곳 않고 텁텁한 비스킷을 한 입 베어 문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그저 허기를 때우는 일이 먼저다.
 
  ‘표범 꼬리를 잡지 마라, 잡았다면 절대 놓지 마라.’
 
  ‘케이프 투 카이로(Cape to Cairo)’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의 가장 험난한 코스가 된 모잠비크 북부에서 나는 원주민 속담을 떠올린다. 원래 모잠비크는 종단 루트에 없었다. 그러나 모험가의 심장을 가진 나는 이미 말라위 호수의 리코마 섬까지 내달린 상태였다. 여기서 멈춰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지도를 뚫어지게 보며 연구한 후 기어코 탄자니아로 가는 북모잠비크 첩로를 루트로 삼기로 했다.
 
  지도는 분명 얇고 빨간 줄(비포장 산길)로 험한 여정을 경고했지만 상냥하게 무시했다. 가령 야구팬이라면 상상해 보자. 9회 말 투아웃 풀카운트 만루 역전 위기에서 추신수에게 한복판 평범한 직구를 던지겠다는 충격과 공포로 점철된 고집에 비견될 수준이다. 무결집행의 원칙이 사라질 때 세렌디피티의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이 나의 개똥 여행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Great Rift Valley)로 불리는 동아프리카 대지구대가 통과하는 이곳은 완벽한 침묵이 지배한다. 또한 완벽한 더위와 완벽한 허기가 청춘의 열정을 시험한다. 머나먼 여로를 떠난 순례자일수록 오지에서의 코셔(Kosher·금기음식)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애먼 신념이 아닌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
 
  그 옛날 바다였을 산허리의 모랫길 위에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아 오렌지 껍질을 깐다. 아삭하고 상큼한 알갱이를 잔뜩 기대했더니 속에서 말랑말랑한 애벌레가 기어 나온다. 한동안 파브르처럼 꼬물꼬물한 녀석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유기농이군.”
 
  담담하게 그 부분만 떼어 버리고는 한입 베어 문다. 태양과 바람과 물을 담아 시큼시큼한 맛이 된 오렌지 하나로 배고픔과 갈증을 잠깐 미뤄 둔다. 7개의 가방을 매단 자전거를 모랫길에서 밀 때면 강제적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러기를 여러 시간.
 
 
  산속 평화를 깬 철없는 자전거 여행자
 
오지 마을에서 하룻밤 숙소와 식사를 대접해 준 마을 사람들. 어찌나 성정이 착한지 문명의 때를 덜 탄 인간의 순수함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드디어 아주 작고 정적인 마을을 만났다. 조건반사처럼 조악하게 진열된 간이 수퍼로 뛰어간다. 오래되어 눅눅해진 비스킷을 꺼내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남자에게 돈을 건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참을 기다려도 거스름돈을 내줄 생각을 않는다. 설마 뜯기는 건가. 그러기엔 그가 처음 시선을 마주했을 때 보였던 곰살궂은 표정을 의심할 수 없다. 궁금해 안을 들여다본다.
 
  당황스럽다. 그는 평화를 잃은 모습이다. 아뿔싸! 여태 계산을 못하고 있다.
 
  “저런, 교육이 필요하군요. 혹시나 협잡꾼을 만난다면 속수무책 속을 수도 있잖아요.”
 
  “이 문제의 발단이 당신 때문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나요? 우린 금전 부분에서 문제없이 아주 잘 지내 왔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별안간 당신이 나타나서 떡하니 계산이 어려운 큰돈을 주었네요. 보세요. 저 남자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고민에 휩싸였군요. 평화를 깨뜨린 원인이 있다면 바로 당신으로부터 찾아야겠지요.”
 
  마을의 총무 격인 카리아테는 전혀 뜻밖의 얘기를 한다. 내가 내민 큰돈이 큰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첩첩산중 소박하고 고요한 마을의 평화를 깨뜨렸단다. 악센트 강한 포르투갈 말투가 마치 신선놀음하듯 통투하다.
 
  그의 대답에 잠시 혼란을 느낀다. 사실 나는 그 장면이 애석했었다. 가끔씩 손가락으로도 셈을 하지 못해 당황하는 현지인들을 보면 늘 그랬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적확한 계산보다 더 고귀한 인간에 대한 진심 어린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간과한 속 좁은 동정심이었을까. 숫자 계산에 능한 지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이 난제가 된 고수들의 세상에 내가 들어와 있었다.
 
  데면데면해진 표정을 숨기고 주인 손에서 놀던 잔돈을 얼른 계산해 주었다. 행여 말 한마디 무람없이 굴었는지 조심해하며 그에게 고맙다는 말로 나의 부끄러움을 갈음한다.
 
  온 세상에 배움이 두루 있다. 그러니 철없는 여행자의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다행히 남자의 얼굴엔 처음처럼 흰 이를 드러낸 건강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오지에서 만난 한국 신부님
 
일하다 손을 다친 현지인을 치료하는 곽용섭 신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곳에 도움을 주러 온 그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사실 모잠비크는 예정에 없던 루트였다. 원래는 바로 탄자니아로 가려던 것을 말라위 호수를 여행하던 중 기연이가 구토를 하며 컨디션이 저하된 까닭에 모잠비크로 오게 되었다. 북부 모잠비크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에 속해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또 하나의 오지다. 인간의 활동영역과 겹치지 않은 곳에는 여전히 야생동물이 거주하고 있고 험준한 계곡과 산길이 있어 차량 통행이 막혀 있는 곳이 많다.
 
  우리는 약 2주 만에 도시다운 도시를 만났다. 리싱가는 북서부 모잠비크 지방의 최후의 보루 도시다. 수도에서 올라오는 물자가 여기에 한번 집결해 다시 곳곳으로 운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부 모잠비크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인데도 발전되지 않은 유통망 때문에 가격은 비싼 편이다.
 
  다음 도시인 마루빠까지 나흘을 달려야 했다. 중간에 마을다운 마을은 세 곳밖에 없었고 계속 현지인들이 제공해 주는 시마(Nsima·중부 아프리카에서는 우갈리라고 부름)와 콜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도로 상태도 썩 좋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이 질리도록 반복되는 언덕은 열정의 불꽃을 단번에 사그라지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다.
 
  체력이 고갈되어 갈 그 무렵 뜻밖의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왔다고요? 혹시 그분들을 만나러 오셨나요? 아니라고요? 그럼 우리가 한국인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개해 드리지요. 나를 따라오세요.”
 
  스페인어로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포르투갈어라 그들의 얘기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내용은 계속 의심했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국외방선교회 소속으로 마루빠에서 봉사하고 있는 한국인 신부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곽용섭 신부 외 두 명의 신부는 이곳에 들어와 현지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크게 반겨 주면서 며칠이라도 푹 쉬었다 가라고 한다.
 
  “험한 여정이셨군요. 한국 음식도 그립고, 몸도 많이 피곤할 텐데 다음 여정도 만만치 않거든요. 얼마든지 푹 쉬고 가세요.”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북부 모잠비크는 남한보다 더 큰 땅덩어리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곳에 유일한 선교사로 나와 있는 이들을 현지인들 소개로 영화처럼 만난 것이다. 숙소에 쌓여 있는 책들과 잡지들을 보자 그만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만에 활자로 된 한글을 읽는단 말인가. 게다가 식사 때마다 푸짐한 음식은 육체적인 원기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위로가 되는 훌륭한 보양식이 되었다.
 
  나누고 섬기는 일이 평생 업인 신부들과의 만남은 감사로 갈무리가 되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야 했다. 여행 중에 이런 인연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친 순간에 시원한 얼음물과 같은 휴식이 있으니 다시 힘을 내게 된다. 평생을 서원하신 분이니 몇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중에는 자전거 없이 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때쯤엔 마루빠로 가는 길이 지금보다 더 쉬워질 것을 기대해 본다.
 
 
  최악의 라이딩, 야생의 삶
 
주 식량인 옥수수를 들고 길을 가는 시골 아이.
  벌써 며칠째인지 모른다. 여행을 한 이래 이렇게 허기가 진 적은 처음이다. 육체의 모든 기운을 모래밭이 빨아들이고 있다. 사람 구경 하기가 너무 힘이 든다. 자연히 먹을 음식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여행하면서 의식주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을 제법 희석시키고 먹고 자는 것에 초연하며 와일드하게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한계에 부딪혔다. 게다가 근처에 니아사(Niassa) 국립공원이 있어 혹 있을지 모를 야생동물 습격에도 단단히 대비해야 했다. 최악의 라이딩 코스다.
 
  마루빠에서 은눙고, 발라마를 거쳐 몬테푸에즈까지는 가야 기본적인 문명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었다. 거리상으로는 단순히 200km지만 일단 도로가 없는 곳이 많았고, 산길이 죄다 모래밭인 경우도 허다했다. 자전거가 아예 가지를 못하니 힘겹게 밀고 나아가야 했는데 짐 무게까지 더해진 자전거를 모래밭에서 밀고 가기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한 시간에 1~2km 가기가 버거울 때면 그만 의욕이 꺾이고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아 떫은 입맛을 다시며 암담한 상황을 고뇌해야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식량이 점점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원체 식량이 넉넉하지 않은 아프리카였기에 하루치 정도만 음식물을 구입해 다니면서 계속 사서 충당할 생각이었는데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음식을 구입하거나 얻을 길이 없었다.
 
  ‘잘못하면 큰 사단이 날지 모르겠군.’
 
  나도 기연이도 말 수가 급격히 없어졌다. 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여기에서만큼은 애물단지가 된 자전거를 밀고 들고 나무가 빽빽한 터프한 곳을 피해 그나마 길 모양이라도 어설프게 갖춘 모래밭으로 다니며 산을 넘어야만 했다. 정말이지 배고픔과 목마름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콜라를 여러 캔 챙기긴 했지만 식수가 아닌 식량 대용으로 쓰다 보니 당분 때문에 그나마도 사흘째 되는 날엔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바람이 분다. 그러나 땀까지 씻어 주진 못하는 후텁지근한 바람이다. 미욱한 성정에 괜히 투덜댄다.
 
  낮 더위에 지쳐 간만에 찾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무렵, 드디어 원주민이 나타났다. 얼마 만에 보는 사람이던가? 그는 숲 속에서 나와 다시 모래밭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너무 지쳐 있기에 차마 말도 못 붙이고 그도 우리를 힐끔 보더니 이내 가던 길로 가 버린다. 하지만 그의 출현은 희망적이었다. 근처 어딘가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의지를 다잡았다. 그러나 마을이 쉬 나타나지는 않았다.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진심은 통한다
 
길이 없는 곳을 만날 때마다 현지인들에게 여러 도움을 받았다. 그때마다 필자 역시 콜라와 비스킷 등 작은 답례의 정성을 보였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아프리카 오지 마을이 가장 뜨거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람이 있으니 먹을 것이 있을 테고, 다음 목적지에 대한 정보가 분명 있을 터였다. 우리는 무작정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마당에서 바구니를 만들던 아낙네가 흠칫 놀라지만 남편이 나와 자초지종을 묻는다. 스페인어가 통하지 않는다. 비슷한 언어인 포르투갈어를 쓰는 모잠비크지만 산 속에선 토속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심은 통한다.
 
  그는 우리의 상태를 보고 또 이전에 브라질에서 배운 몇몇 포르투갈어를 남루하게 조합해 내니 그제야 의미를 파악한다. 훌리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나무에 달린 큼지막한 파파야를 두 개 따 준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뻔했다. 우리는 앉은자리에서 숨도 쉬지 않고 다 해치워 버렸다. 오랜만에 포만감이다.
 
  그 뒤 계속해서 야생 파파야와 바나나, 비둘기 알 등을 먹으며 버텨 나갔다. 때로는 깊숙한 산골의 원주민들이 챙겨 주는 시마와 옥수수를 먹기도 했다. 어떤 곳에서는 자신이 머무는 3평이나 될까 한 흙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기까지 한다. 이방인에 대한 진심 어린 배려에 그만 가슴이 뜨거워진다. 어딜 가나 마을의 어른이자 의사의 전권을 가진 추장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모두 자신의 일처럼 우리 문제에 대해 머리로 고민하고 가슴으로 안아 주었다.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그들은 문명의 유입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들만의 부족 사회를 이뤄 가며 그렇게 너무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들의 친절이 아니었다면 이 길에서 어떤 위험을 맞닥뜨렸을까 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한편으로 가장 중요한 물을 마셔야 했지만 입을 헹굴 최소한의 식수만 챙겼다. 행여 이질이나 물과 관련된 질병에 걸린다면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우리는 원주민 마을들을 거점으로 다녔다. 아침마다 매번 백여 명씩 나와 우리가 출발할 때 손을 흔들며 환송하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감동으로 콧등이 시큰해짐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만에 다시 콜라를 입에 털어 넣었을 땐 나는 천국이 이 땅에 도래한 줄 알았다. 평생 1만 병이 넘는 콜라를 마셨지만 이번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콜라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세계일주 전엔 보통 하루 1~3캔 이상 꼬박, 세계일주 시작하고 하루 3~5캔을 매일 마셨다. 실제로 콜라 중독이며 때문에 치과 단골 환자이기도 하다).
 
 
  모잠비크를 넘어 탄자니아로
 
동아프리카 지구대를 가로질러 모래밭을 이동하는 건 고역이다. 공포다.
  실로 오랜만에 만났던 아스팔트 길이 다시 사라졌다. 탄자니아 국경을 향해 북진하는 모심보아에서 팔마를 거쳐 키온가까지의 길 역시 험준하기 그지없는 비포장도로다. 또다시 지옥 같은 모래밭이 나오고 우리는 이틀에 걸쳐 달려야 했다. 중간에 경찰서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뚫린 모기장으로 들어온 모기들과 밤새도록 사투를 벌인 까닭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모기에 물린 자국보다 벼룩에 물린 자국이 더 많아 겪는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경 근처에 도착하니 한 청년이 묻는다.
 
  “아니 그래, 여기까지 진정 자전거로 왔단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물도 음식도 없고, 잠 잘 곳도 마땅찮아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맙소사! 그게 아니에요. 당신들이 넘어온 길에는 사자가 살고 있단 말이에요. 작년에도 한 여인네가 습격당해 사망했답니다.”
 
  탄자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루부마 강 근처에는 사자는 물론 코끼리와 하마, 악어가 서식하는 등 각종 야생동물 천국이다. 그 얘기에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 그런 정보를 전혀 몰랐기에 지나 온 길이다. 당연히 야생동물은 국립공원 안에만 서식하는 줄 알았던 무지다. 매일같이 밤만 되면 마을에서 불과 5분 거리에서 코끼리를 볼 수 있을 정도다.
 
  드디어 루부마 강에 도달했다. 바로 강 건너편이 탄자니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다. 강에는 손님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들이 몇 척 있었는데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다. 우리는 정공법보다 어르고 달래며 친해지고 나서 협상해 가이드북에 적혀 있는 본래 가격에 배를 탈 수 있었다. 현지에서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그들에게 친밀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는 유유히 물살을 갈랐다. 엔진은 물론 돛조차 없는 배는 뱃사공 손에 들려진 3~4m 짜리의 긴 봉으로 바닥을 밀쳐내며 나아간다. 루부마 강의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에 강 중간에 가도 2~3m 내외의 깊이밖에 되지 않는다. 가물어 물이 허리춤까지밖에 차오르지 않아 배가 모래톱에라도 걸리면 승객들이 내려 배를 밀어야 한단다. 하마와 악어가 출몰하는 지역에서 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구제불능 낙천주의가 모든 일을 가능하게도 또 불가능하게도 만든다.
 
  “함나 시다(No problem)! 아직까지 하마에게 공격당한 사례는 한 번도 없습니다.”
 
  배가 뭍에 이르자 사람들이 서로 자전거를 끌어올려 주겠단다. 팁을 바라는 것이다. 드디어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기분이다. 그러나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무척 지쳐 있었기에 어서 따뜻한 샤워와 시원한 콜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새로운 나라에서의 여행. 이제 다시 시작이다.
 
 
  학교에서 쫓겨나는 아이들
 
탄자니아 남부 오지 음트와라 지역에서 교육 봉사를 하고 있는 지성(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수업료를 내고 제법 성적도 괜찮은, 소위 상위 클래스 학생들과 함께 사진 촬영에 응했다.
  기연이와의 여정은 여지까지다. 케냐로 넘어가서 언어 연수를 받고 싶단다. 우리는 길 위에서 다시 볼 것을 기약하고 안녕을 고했다. 탄자니아부터 다시 홀로 되었다. 탄자니아 최남단 도시 음트와라까지는 트럭으로 이동해야 했다. 예전엔 잔지바르 섬으로도 배가 출항하던 군사, 무역의 도시였지만 이젠 한적한 어촌으로 바뀐 곳이다.
 
  음트와라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근 석 달 여 만에 제대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간 잠비아, 말라위, 모잠비크를 다니며 최악의 인터넷 상황을 겪어야 했는데 탄자니아에 오니 상전벽해 수준이다. 작은 도시인데도 한국 사이트가 제법 빨리 뜨고, 인내심을 가지면 동영상 재생까지도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나는 곧 지인들에게 소식을 보내고, 운 좋게도 지역 성당에서 신부님들의 호의로 숙박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틀간의 달콤한 휴식 후 음트와라를 떠나려는데 우연하게도 이런 오지에서 뜻밖에 한국인과 인연이 닿게 되었다. 코이카(KOICA) 소속으로 파견 나와 봉사하는 청년들을 만난 것이다. 청년 시절 의미 있는 꿈을 찾아 열악한 환경의 이곳에까지 와서 교육을 하고 있는 멋진 인생이다.
 
  김성수 단원을 포함한 세 명의 청년과 이틀 동안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떠나기 전에 지성은 단원이 봉사하는 학교를 방문했다. 평소 아프리카 학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개학이라 제대로 둘러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학교에 가 보니 하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나뭇가지들을 베어 나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거나 잘못한 게 있으면 체벌 대신 저렇게 노동으로 벌을 씌워요.”
 
  아프리카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그런데 자유분방하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울 아프리카 학생들은 불평하는 내색 없이 조용히 일에 몰두한다. 교장 선생님이 무섭단다. 어찌나 선한 얼굴들인지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일 정도다. 아이들도 외부 손님이 싫지 않았는지 흰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는다. 자기 잘못이 들통 나 이렇게 벌을 받으니 손님 앞에서 창피하다는 투다.
 
  수업 참관 허락이 떨어져 교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수업 전 교실 밖으로 모였는데 난데없이 집으로 돌아가란 소리를 들은 것이다. 약간의 동요가 있은 후 학생들은 원래 그렇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쉽게 발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수업이 취소되었다.
 
  “수업료를 가져오지 않은 학생들이에요. 그래서 집으로 돌려보낸답니다. 교장 선생님이 매우 엄격하세요. 어떻게든 수업료를 마련해야만 수업을 듣게 해 주거든요.”
 
  “학생들에게 수업료가 충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매우 가난해서 충분히 낼 만큼의 수업료는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라도 만들어 오더라고요.”
 
  결국 학교엔 소위 상위 클래스 학생들 8명 정도만이 남았다. 개학을 했음에도 수업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대신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나마 비교적 부유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들의 경험이 일천해 대화를 나누는 내내 마음이 아려 왔다.
 
 
  아프리카에 희망을 심는 한국인들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은 치킨도, 피자도 아닌 그저 쌀밥이란다. 사실 치킨(튀긴 닭), 피자를 접할 기회가 아예 없다. 장래 희망도 단순하다. 선생님, 군인, 간호사가 전부다.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수도 다르에스살람에 있는 대학으로 한 명 보내기도 벅찬 실정이란다. 이들의 꿈을 돕기 위해 코이카 단원들이 오늘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이 순수한 눈망울에 서린 희망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다행히 수업료를 내지 않은 학생들의 복귀율은 높은 편이란다. 나는 학생들과 만남을 끝내고 다시 북진을 시작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으므로. 그러나 탄자니아의 바닷바람은 어느 곳보다 시원했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벌컥벌컥 들이켜는 콜라 역시 그 어떤 음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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