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관점을 끝내 바꾸지 않았다
⊙ 모호한 입장을 펴며 객관적인 양하는 인사들을 전형적인 위선자로 취급
⊙ 실질을 버리고 허영을 쫓는 고질적인 중국병 비판
⊙ 모호한 입장을 펴며 객관적인 양하는 인사들을 전형적인 위선자로 취급
⊙ 실질을 버리고 허영을 쫓는 고질적인 중국병 비판

- 중국 항주시 서쪽에 있는 西湖의 풍경.
지금은 푼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이라고 한다.
추근이 살았다는 집의 입구에 서니 한창 회반죽을 손질하는 인부들만 바삐 움직이며 “고거는 수리 중”이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에 소흥 황주를 마시며 남방의 열기 속에서 하루를 보낸 기억만 난다. 날은 너무 뜨거워 추근이나 노신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한 해 전에 또 소흥을 들렀으니 아예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노신은 내 마음속의 부채와도 같은 존재다. 아마도 글을 팔아서 한 푼이라도 벌어 본 사람이라면 나와 비슷한 심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 노신은 누구? 중국 현대문학·사상의 거장 중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중국 현대문학과 현대사상의 거장으로 꼽힌다.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다. 1881년 9월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성내(城內)에서 태어났다. 《광인일기(狂人日記)》 《아큐정전(阿Q正傳)》 등의 소설을 통해 어두운 역사 속에서 노예화에 길들여진 중국 민중들의 의식을 비판했다. 시사평론, 문예비평, 사회비평 등의 글도 다수 남겼다. 1920년 이후에는 베이징(北京)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의 교단에 섰다. 그는 극좌적 경향과 대립하면서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론을 주장하였다. 1936년 10월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
여류 혁명가 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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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류혁명가 추근의 상. |
국내에는 노신의 작품들을 번역한 것으로는 《노신선집 1,2,3,4》(여강출판사, 2004)와 《루쉰전집 1,2,3》(그린비, 2010) 등이 있다. 《노신선집》에서 가져온 문장은 <선집>으로, 《루쉰전집》에서 가져온 것은 <전집>으로 표기하고, 따로 권은 표기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목숨 아까운 줄도 몰라! 그깟 놈 죽겠으면 죽으라지. 그런데 이번에 난 챙겨 먹을 게 없겠는걸…. 간신히 벗겨낸 옷도 옥문지기 눈빨갱이 아의(阿義) 놈이 가져갔단 말야! 제일 덕본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이 집 노전이고, 그다음은 하씨네 셋째 영감이야. 그 영감은 새하얀 은전 스물닷 냥을 받아 제 호주머니에 넣고 한 푼도 쓰지 않았어.”(<약·藥>, <선집>)
어떤 사람이 사형을 당한 모양이다. 제일 덕을 본 사람은 죽은 이의 목에서 나오는 피를 가지고 와서 아들에게 먹인 사람이고, 그다음은 고자질해서 현상금을 챙긴 사람이고, 그다음은 죽은 이에게서 벗긴 옷을 차지한 옥지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정말 ‘그깟 놈 죽겠으면 죽으라지’ 할 정도로 못난 사람이었던가?
그 “그깟 놈”이란 혁명당 사람이라고 한다. 혁명당이라면 물론 청조를 무너뜨리자는 공화혁명파를 말하는 것이리라. 소설에서는 남자로 나오지만 실제로 이 소설의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은 소흥의 여류 혁명가 추근이라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하늘이시여, 너무나 독하구나.
이런 강산을 보시고, 어찌 차마 호로들에게 맡겼는가?(天乎太毒, 看如此江山, 忍歸胡虜)”
물길이 거미줄처럼 달리고, 녹음이 우거진 강남의 작은 도시 소흥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옛날 문인들이 그랬듯이 강남의 수향에서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재자가인(才子佳人)의 사랑노래나 듣는 것이 어쩌면 제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은 이는 살벌하게도 “이 강산을 어찌 호로(만주족의 청)에게 맡겼느냐” 하고, “참을 수 없어 혁명당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목소리엔 핏발이 서 있다. 그리고 작가 노신은 묻는다. 그녀의 죽음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목에서 나는 피는 약이라도 되고, 입고 있던 옷은 추위라도 가리겠지. 그래도 몸값으로 스물닷 냥이면 적지는 않은 것인가?
강남의 강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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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소흥에 있는 노신의 故居 내부. 살아생전 노신이 쓰던 집기들이 전시돼 있다. |
구천은 적수인 오나라의 부차를 상대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쫓겨서 자기 땅 안에서 포로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기 위해 비굴하게 아부하며 훗날을 기약한다. 쓸개를 핥으며,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잊지는 않았겠지?” 하고 다짐하던 월왕 구천도 막상 적수인 오왕 부차를 잡았을 때는 마음이 동요했다. 그때 대부 범려는 후환을 없애라고 채근한다.
“하늘이 내린 선물을 받지 않는다면 뒷날 도리어 벌을 받을 것입니다. 회계에서의 치욕을 잊으셨습니까? 어찌 오왕을 용서하시려는 것입니까?”
당시 월나라의 왕과 신하는 모두 독한 인물들이다. 우리가 이야기할 노신도 독하다. 월인 구천과 월인 노신은 이렇게 상통한다. 그러나 노신은 구천과 다르다. 구천이 죽이려는 자는 그저 적수일 뿐이고 패배한 자일 뿐이며, 결국 자신을 물어뜯을 구천을 살려준 사람이다. 구천은 새 시대를 여는 사람이 아니요, 용케도 살아남아 강자가 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생존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시절에 구천은 살아나고 있으되, 노신은 저편으로 점점 물러나고 있다. 최근에 중건된 월왕대를 오르는 사람들은 구천처럼 살아남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으리라. 여하튼 구천이든 노신이든 강골임은 분명하다. 강남에도 강골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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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흥시내 와룡산 기슭에 자리한 월왕대. 월왕의 궁성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
물에 빠진 개는 몽둥이로 패라
군인들에 기댄 공화혁명은 곧장 거대한 반동을 겪었고, 혁명의 동조자인 척하던 그 군인들은 시류에 잘도 영합하여 공화혁명을 형해화(形骸化)시켰다. 알다시피 어떤 이는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과감함을 보였다. 문제는 무엇이었나?
“혁명당도 새 기풍- 전날 신사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던 새 기풍을 가지고 제법 ‘문명’해졌으며 ‘다 같이 유신하는’ 터라 우리는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니 제멋대로 내버려 두라고 했다. 이리하여 그놈들은 기어올라 와서 중화민국 2년 하반기까지 엎드려 있다가 2차 혁명 때 불시에 뛰어나와서 원세개(袁世凱)를 도와 혁명가들을 수없이 물어 죽였다.(중략) 추근 여사가 바로 밀고에 의해 죽었다. 혁명 후 한동안은 ‘여걸’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사람들 입에 그다지 오르지 않는다.”(<‘페어플레이’는 뒤로 미루어야 한다>, <선집>)
이른바 2차 혁명이란 원세개가 자신에게 비판의 날을 세우던 국민당의 송교인을 암살하자, 그가 전제정치를 부활시킬 것이 두려워 이열균(李烈鈞), 황흥 등이 강서, 강소 등에서 반(反) 원세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군사력의 열세에다 원세개의 우세를 점친 기회주의자들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손문과 황흥은 일본으로 도주하고 만다. 그것이 1913년의 일이다.
그래서 노신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물에 빠진 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그는 대답한다. 사람을 무는 개라면 물에 빠졌을 때 더더욱 두들겨 패야 한다. 나쁜 개들은 물에 빠졌을 때 때려야지, 뭍으로 나오면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아직은 페어플레이를 할 때가 아니라고 한다. 동정심은 개도 그르치고 나도 그르친다. 너무 표독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역사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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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신의 고거 외부 모습. 현대식으로 꾸며 놓고 관광객을 맞고 있다. |
원세개의 죽음과 軍閥의 시대
중국의 공화혁명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북양 군벌(軍閥)과 광동 공화파들의 정치적인 타협에 의한 연립정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군벌은 굳이 북양군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화를 내세우다가도 언제든지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지방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채비를 하고 있는 세력들이 동서남북에 널려 있었다.
이 혼란한 상황에서 난국을 중앙집권화로 수습하겠다는 기치를 걸고 1916년 제정(帝政)으로의 복귀를 시도하던 원세개는 죽고 말았다. 원세개에 반기를 든 이 역시 군인이었다. 공화혁명 당시 운남에서 기의(起義)했고 운남도독을 지낸 채악(蔡鍔)은 북경에서 초대 총통인 원세개를 지원하고 있다가 그의 제정복귀 선언을 들었다. 군인들 중 나름대로 충실한 공화파인 그는 제정복귀 움직임에 분노하여 북경을 탈출해 근거지 운남으로 들어가 다시 반 원세개 운동을 전개한다.
정치 9단 원세개도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비록 이름뿐인 공화였지만, 그 이름마저 지우기는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공화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는 지지자들을 모으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죽었다.
원세개의 죽음은 공화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온갖 군벌들이 곧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호랑이 없는 골에 늑대가 왕이라는 말도 있듯이, 원세개 휘하에 있던 북양군벌들을 비롯하여 전국에 포진한 군벌들이 할거하는 시대가 이어진다. 그래서 원세개의 제정복귀 실패에서 1928년 장개석(蔣介石)의 북벌성공 이전까지의 시기를 흔히 군벌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1928년 이후에도 군벌은 여전히 실재하고 있었다. 노신이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시기는 이 기나긴 군벌전쟁 시기와 겹친다. 군벌의 시대가 거의 끝나고 일본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투쟁도 내전 양상으로 들어가려 할 때 노신은 세상을 떠난다.
원세개의 제정복귀가 실패하자, 원세개 휘하에 있던 단기서(段祺瑞)가 그의 뒤를 이어서 북경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공화혁명으로 얻은 임시헌법인 <약법>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손문이 광동을 중심으로 남방군벌들을 규합하여 북경정부에 맞서 세운 것이 이른바 호법군정부(護法軍政府)다.
명목상으로는 남방 공화파와 북방 북양군벌의 대결로 보였지만 사실은 남북 군벌의 대결 성격이 강했다. 손문은 그 자신의 근거지도 장악하지 못해서 자신이 끌어들인 광서, 운남 군벌에 의해 쫓겨나기 때문이다. 1917~1918년 사이의 일이다.
이때부터 북방에서는 크게 직예군벌과 봉천군벌(동북군벌)이 세력을 다투고, 남방에서는 광동의 국민군이 존재했으나 광서 및 운남성의 군벌들이 여전히 서로 합종연횡하는 복잡한 국면이 전개된다. 이것을 종식시킨 이가 바로 손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장개석이다.
노신의 탄식은 이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제정을 종식시키자마자 다시 돌아가려는 이들이 생겼고(원세개, 장훈 등), 큰 적(청나라)을 무너뜨리자 작은 적(군벌)들이 생겨났으며, 작은 적을 없애면 그 후계자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만약 실제로 순수하게 혁명을 통해 중국을 개혁하려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의 눈에 비치는 중국의 상황은 절망 자체였을 것이다. 혁명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개혁해야 할 대상들은 마치 히드라의 머리털처럼 베면 더 무성하게 돋아났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중국인의 국민성을 완전히 바꾸어야 사회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련의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이른바 ‘신문화(新文化)’를 기치로 들고 나왔다. 그 시작점은 훗날 자유주의자로 문명을 떨치게 되는 호적(胡適)이고, 운동의 북소리를 전국으로 울린 이는 훗날 공산주의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 진독수(陳獨秀)다. 그는 1915년 당시 《신청년》을 발간함으로써 신문화 운동의 상징이 됐고 실질적인 리더가 됐다.
인간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뀐다
그러나 이 운동을 중국의 토양에 안착시키고, 죽을 때까지도 쉬지 않고 밀어붙인 사람은 노신이다. 군벌 시기가 가고 파시즘의 시대가 오고, 공산혁명의 파고가 높아지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할 때도 그는 일관되게 중국인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관점을 바꾸지 않았다. 호적의 물렁함, 진독수의 현실과 관념성 등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강단과 직선적이고 폐부를 찌르는 듯한 화법을 가지고 이 작업에 뛰어들었다.
상해 노신 공원. 우리는 윤봉길 의사가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상해 주둔 일본군의 우두머리들에게 폭탄을 던진 홍구공원으로 잘 알고 있다. 이곳에 노신의 묘가 있다.
노신기념관에 들르면, 1936년 노신이 죽을 당시 상해 인민들이 얼마나 비탄에 잠겼는지 알려주는 영상기록물이 있다. 끝없는 인파가 운구를 따르며, 학생들과 상해 시민들이 절규한다. 그중 많은 사람은 분명 노신이 휘두른 붓의 채찍에 맞았을 것이다. ‘사방이 막힌 철로 된 방에서 사람들이 서서히 죽어 갈 때 그때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되물었던 그의 문구들이 전시실마다 가득하다.
전시실 1층을 메운 판매용 가구들의 위용이 눈에 들어온다. 녹단으로 치장하고, 일일이 조각한 탁자. 그저 책을 놓는 책상, 앉아서 차를 마시는 의자 하나하나가 귀중품이다. 상해의 부유한 실업가에게는 어울릴지 모르지만 노신기념관에 어울리는 물건들인지는 모르겠다.
누군가가 사방 반 치 크기의 상아를 조각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행서로 새긴 ‘난정서(蘭亭序)’가 보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현미경을 만든 까닭은 극히 미세한 자연물들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미 사람을 써서 하는 일이라면, 사방 반 자의 상아판에다 새겨서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고, 현미경을 쓰는 수고를 더는 것이 낫지 않을까?(<수감록47>, <전집>)
노신은 이런 사람이다. 실질을 버리고 허영을 쫓는 것은 고질적인 중국병이라고 생각했다. 튼튼하면 그만일 의자에다 수백 마리의 용을 조각해서 약하게 만들 듯이, 두 사람이 마주서서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를 천년 전의 고전을 일부러 끌어와서 어렵게 만든다. 그런 행태는 그의 실용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백화(白話)는 비루하고 천박하므로 식자들이 아랑곳할 가치조차 없다.’(중략) 고문(古文)으로 신음할 때나 고고한 품격을 드러내 보일 뿐, 이야기를 할 때는 마찬가지로 ‘비루하고 천박한’ 백화를 사용한다. 4억 중국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모두가 ‘아랑곳할 가치조차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녕 가련하기 짝이 없다. (중략)
분명히 현대인이고 현재의 공기를 마시고 있으면서도, 하필이면 썩어 빠진 명교(名敎)와 사후강직된 언어를 강요하며 현재를 여지없이 모멸한다. 이들은 모두 ‘현재의 도살자’다. ‘현재’를 죽이고 ‘장래’도 죽인다. 그런데 장래는 후손들의 것이다.”(<현재의 도살자>, <전집>)
중국에 다시 부는 國粹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는 이렇게 중국적인 것의 정수, 즉 국수(國粹)에 대해 강렬한 반감을 드러낸다. 국수란 지방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군벌들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메뉴였고, 수많은 어용학자들이 거기에 바람을 넣었다. 오늘날 자신감을 얻은 중국에 다시 국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까? 하지만 노신은 부정한다. 고문(古文)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자랑스런’ 역사를 부정한다.
“겉치레를 좋아하는 학자들이 늘어놓으며 역사를 편찬할 때 ‘한족(漢族)이 흥기한 시대’, ‘한족이 발달한 시대’, ‘한족이 중흥을 이룬 시대’ 등의 보기 좋은 제목을 달아도 호의는 참으로 고맙지만, 말을 너무 에둘러서 사용했다. 더 직접적인 표현을 쓰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던 시대.
둘째, 잠시 안정적으로 노예가 된 시대.” (<등하만필(燈下漫筆)>, <전집>)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겉치레와 거짓에 물들어 있지만 그들은 배운 사람들이며, 통치하는 사람들이다. 더 심한 말을 쓰면 착취자들이다. 착취자의 허영과 가식은 비단 중국만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의 정신적인 상황은 좀 나을까?
노신은 묻는다.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 노복으로 부릴 사람이 없어서 힘들지 않을까?’ 그리고 대답한다. ‘천만에, 자기보다 더 비천한 아내가 있고, 더 약한 아들이 있다.’ 약한 인간들은 더 약한 인간을 희생양으로 찾는다. 노신이 본 중국의 현실, 중국 인민의 현주소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겁이 많고 나약한 인민이라면 아무리 고무한다 해도 강적과 맞서려는 결심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은 그래도 남아 있으므로 발산할 장소를 찾지 않을 수 없다.(중략)
나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원한과 분노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강자에게 유린을 당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강자에게는 반항하지 않고 도리어 약자 쪽에 (분노를) 발산한다. 군인과 비적은 서로 싸우지 않고 총이 없는 백성만이 군인과 비적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최근 쉽게 볼 수 있는 증거이다.”(<잡다한 추억>, <전집>)
왜 고통 받는 인간들이 더 잔인해지는가? 왜 주류 제국주의에 눌린 민족이 아류 제국주의로 흐르는가? 그것은 노신이 영원히 떠나보낼 수 없는 화두였다. 우리는 서구세력에 눌린 중국이 똑 같은 방식으로 조선은 물론 서북에서 더 작은 민족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아왔다.
“폭군 치하의 신민은 대개 폭군보다 더 포악하다. 폭군의 폭정은 종종 폭군 치하에 있는 신민의 욕망을 실컷 채워 주지 못한다. (중략)
폭군의 신민은 폭정이 타인의 머리에 떨어지기만을 바란다. 그는 즐겁게 구경하면서 ‘잔혹’을 오락으로 삼고 ‘타인의 고통’을 감상거리나 위안거리고 삼는다.
자신의 장기는 ‘운 좋게 피하는 것’뿐이다.”(<폭군의 신민>, <전집>)
불행이 남에게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남의 불행을 즐기면서, 또 자기 차례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신민들. 노신은 그들을 실제로 경멸했다.
방관자는 적이다
1924년에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교장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여자 교장 양음유(楊蔭鍮)가 이미 5·4반제(反帝) 운동의 세례를 받은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금한 것이다. 오늘날 중국 학생들의 정치활동 수준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지만 그 당시 여학생들은 이 조치에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미 신교육의 세례를 받은 여학생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마침 손문이 북경을 방문할 때 사범대학 학생들이 환영하려 했으나 교장이 강압적으로 반대했다. 급기야 1925년 1월 학생회 총간사인 허광평(許廣平)이 교육부에 교장의 사직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 투사는 나중에 노신의 아내가 된다.
학생들과 교장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결국 교장은 허광평 등 여섯 학생을 제적시킨다. 이때 노신 등 교원들은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고, 당시 북경대 교수로 있던 진원(陳源·진서형·陳西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등은 학생과 교장 측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당국이 일단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노신은 진서형을 공격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노신은 이런 모호한 입장을 펴며 객관적인 양하는 인사들을 전형적인 위선자로 보았다. 위선자는 민중과는 달리 지식의 외투를 쓰고 있으므로 교정하기도 어렵다고 보았다.
그 후 새로 취임한 교장에 의한 여자사범대학의 해체, 경찰병력 투입 등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교장배척운동은 군벌들을 위협하는 북경 신문화운동의 상징으로 성장했다. 노신이 본 것은 지식인들의 위선과 권력과의 대결을 피하려는 안일이었다. 그러나 젊은 여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노신이 젊은 세대에 거는 기대를 숨기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일 것이다. 방관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태도는 아래의 명문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들 둘은 알몸으로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광막한 들판에 마주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서로 끌어안지 않으며 서로 죽일 것이다.
행인들이 사방에서 몰려든다. (중략) 그들은 벌써 사후에 자기 혓바닥에 느껴질 땀내나 비릿한 피 냄새를 예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서 있다. 활기 있던 몸이 빼빼 말라 들건만 끌어안거나 죽일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중략)
마침내 구경꾼들은 서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느릿느릿 헤어져 갔다. 심지어 그들은 삶의 재미를 잃을 지경으로 말라 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광막한 들판만 남았다. 그 둘은 알몸으로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바싹 마른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것과 같은 눈길로 행인들이 말라 드는 꼴과 피도 흘리지 않고 무리로 죽어 가는 꼴을 구경하면서 생명이 극치에 승화하는 큰 기쁨 속에 영원히 잠겨 버린다.”(<복수>, <선집>)
방관자들의 운명은 피도 흘리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그는 군벌이나 어떤 악당들보다는 방관자들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들에게 날리는 이 칼 같은 붓날 때문에 노신의 적은 늘어만 갔다.
그는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강지처를 버렸고, 제자와 결혼한 일로 그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비난받았다. 그리고 스스로 매몰차게 적을 공격하지만, 고독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떼들이 아무리 전사의 상처를 찾아도 결국 전사를 초월 못할 것이라고 외친다. 선구자의 두려움과 반성 속에서 그는 불안하게 앞으로 간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원
“만일 다른 사람에게 길을 인도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조차도 어떻게 길을 가야 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중략) 비록 지금도 가끔 찾고 있지만 나는 정말 어느 길이 좋은지 알지 못하고 있다. 찾는 중에도 나는, 내 설익은 과실이 도리어 내 과실을 편애하는 사람들을 독살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를 증오하는 놈들, 이른바 성인군자들이 도리어 더 정정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무덤 뒤에 쓰다>, <전집>)
그리고 스스로는 시대의 산물이며, 언젠가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원했다.
“나는 시대의 폐단을 공격한 모든 글은 반드시 시대의 폐단과 더불어 사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혈구가 종기를 생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제목에 부쳐>, <전집>)
그는, 스스로는 혁명가가 되기에는 부족한 인간이며, 그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문학은 대체로 각종 사회적 상태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게 되므로 고통과 불평을 호소하게 됩니다. (중략)
대혁명 시대가 되면 문학은 없어지고 잠잠해집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혁명의 물결에 휩싸여 모두들 외침으로부터 행동에 들어가게 되며, 모두가 몰두하다 보니 문학을 운운할 여가가 없기 때문입니다.(중략)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자, 농민이 해방된 후에라야만 진정한 평민문학이 있을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실제로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며 혁명하는 전사들이므로 내 생각 같아서는 역시 문학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혁명시대의 문학>(황포군관학교에서의 강연), <선집>)
그러나 그는 예술을 무기로 든 혁명가이고 싶었다. 그래서 “샘에서 솟아 나오는 것은 모두 물이요, 혈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모두 피”라고 말한다.
약한 인간을 사랑하기에
노신의 글을 읽는 중국인들 중 다수는 모멸감을 느낀다. 자기 민족을 그토록 발기발기 해부하는 인간, 그 스스로는 얼마나 대단한가? 인간을 경멸하는 이가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묻다가도 대부분 물러나게 된다. 그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남을 해부하는 것보다 더 혹독하게 자신을 해부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중국의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성장한 예술가이며,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약한 자들에 대한 연민은 비록 글 속에 깊이 숨어 있지만 책장을 펴면 끊임없이 스며 나온다.
그는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허선이라는 사람이 뱀 두 마리, 흰 뱀 한 마리와 푸른 뱀 한 마리를 구해 주었더니 후에 흰 뱀이 여자로 변하여 은혜를 갚으려고 시집을 갔으며, 푸른 뱀도 하녀로 변하여 그들과 함께 살았다. 법해선사라고 하는 도를 닦는 중이 허선의 얼굴에 요사한 빛이 돌고 있는 것을 보고, 허선을 금산사 불상 뒤에 숨겨 놓고 있다가 흰 뱀 아가씨가 남편을 찾아오자 ‘금산사를 물바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략) 어쨌든 흰 뱀 아가씨는 법해의 계책에 걸려들어 자그마한 바라 속에 갇혔다. 바라를 땅속에 묻고 그 위에 그것을 눌러 놓기 위해 탑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뇌봉탑(雷峰塔)이다.(중략)
그때 나의 유일한 희망은 뇌봉탑이 무너져 버렸으면 하는 것이었다.” (<뇌봉탑이 무너진 것에 대하여>)
1924년 항주 서호 옆에 있는 뇌봉탑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듣고 쓴 글이다. 백사라는 마음씨 착한 뱀이 뇌봉탑 아래에 갇혔다. 소년은 그 탑이 무너져서 백사가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항주 인근의 모든 백성도 그런 마음을 가졌다. 백사가 불쌍하다는 것이다. 노신은 그런 사람들이 좋았고, 스스로도 백사가 나오기를 바랐다. 백사가 여자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서호 남쪽의 둥그스름한 봉우리에 있는 뇌봉탑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엘리베이터로 탑을 오를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바라만 보고 가지 않았다. 백사가 밑에 깔려 있다고 믿기야 하겠는가만, 왠지 엘리베이터에 내 몸뚱이의 무게까지 더하고 싶진 않았다. 괜히 심통이 나는 것이다. 그런 전설을 안다면 좀 덜 우악스럽게 복원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이들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약한 이는 여자뿐만이 아니다. <광인일기>에서 그는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의 피를 먹어 보지 않은 깨끗한 피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젊은 피와 상통하리라. 노신은 아이들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보였다.
“우리는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 꾀꼬리라면 꾀꼬리처럼 소리치고, 올빼미라면 올빼미처럼 소리치면 된다. 우리는 거들먹거리며 사창가를 빠져나오자마자 “중국의 도덕이 제일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소리를 배워서는 안 된다.(중략)
낡은 장부는 어떻게 깨끗이 지우는가? 나는 대답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철저히 해방하는 것이다.”(<수감록 40>, <전집>)
“셋째는 해방시키는 것이다. 자녀는 나이면서 또 나 아닌 사람이다. 그러나 이미 나에게서 갈라져 나온 이상 곧 인류 속의 한 사람이다. 나이기 때문에 더욱 교육의 의무를 다하여 그들에게 자립할 능력을 주어야 하며,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해방하여 모든 것을 그들 자신의 소유가 되게 함으로써 자립하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인가>, <선집>)
이번에 소흥을 들렀을 때는 노신의 고거도 들렀다. 그리고 전시관을 둘러보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녁에는 ‘여아홍(女兒紅)’이네, ‘공을기(孔乙己)’네 하는 쌉싸름한 소흥 황주도 몇 근 먹었다. 그리고 오는 길에 항주의 서호도 다시 들러 추근의 묘역도 보았다. 서호에 배도 띄워 보았다.
여덟 해 전인가, 젊은이의 가슴앓이 때문에 봄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 서호를 걸은 후, 잊힐 만하면 또 오게 된다. 언젠가 뇌봉탑 아래서 백사가 스르르 기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그때는 서호에서 며칠을 묵고 싶다. 나의 아이들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