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에 나무 심는 몽골족 노인, “내 고향을 예쁘게 만들려고… 내 고향이니까”
⊙ 오르도스에 거대한 칭기즈칸陵 조성, 교과서에는 ‘우리나라 북부의 위대한 민족인 몽골족이 낳은
세계적인 영웅’
⊙ 흉노왕에게 시집간 王昭君,‘비련의 여인’에서 ‘漢-몽골족 화합의 상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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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영웅’
⊙ 흉노왕에게 시집간 王昭君,‘비련의 여인’에서 ‘漢-몽골족 화합의 상징’으로

- ‘사라진 문명’이라고 불리는 카라 호토 전경.
하지만 몽골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어떤 유목민도 정주(定住)세계의 통일제국들을 완전히 소화하지는 못했다.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이 일으킨 폭풍은 단 한 세기 만에 남러시아 초원을 건너고, 힌두쿠시를 넘고, 장강(長江)을 건너 아시아·유럽·아프리카에 걸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제국을 낳았다. 그러나 제국은 성립과 함께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남긴 유산과 함께 몽골이 역사가들의 붓끝에 등장하는 횟수는 사라져 갔다.
하지만 한반도의 압록강을 떠나 흥안령(興安嶺)을 넘기만 하면 닿는 몽골이, 칭기즈칸이라는 판에 박힌 이름으로 박제화되어 버린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불과 100년 전에도 몽골은 우리와 거의 같은 역사를 걸어왔는데도 말이다. 중국의 예속과 간섭, 일제(日帝)의 침략, 제정(帝政)러시아의 남하, 독립운동과 그 좌절, 그리고 혁명이 20세기 전반기 몽골 땅을 휩쓸었다. 또 마지막으로, 한반도와 아주 흡사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내외(內外) 몽골의 분단(分斷)이다. 누천년을 끌어 온 농경과 유목의 갈등이 끝나자 마자, 유목민들은 순식간에 제국주의 열강(列强)의 손에 운명을 맡기고 말았다. 기관차 앞에 그들의 말은 무력(無力)했고, 기관총 앞에 그들의 조총(鳥銃)은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지금의 몽골인민공화국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들의 투쟁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이 글은 2011년 5월 전반기 약 2주 동안 북경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내몽골 지역을 종주하면서 느낀 것을 옮긴 것이다. 어렴풋하게나마 몽골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게 썼지만, 이 글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여행기다. 지금 우리가 ‘몽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벅차다. 그래서 필자는 몽골이란 세계를 확인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검은 도시 카라 호토(黑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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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을 향해 난 카라 호토 성벽의 구멍. 칭기즈칸의 공격을 받은 흑장군이 이 구멍으로 탈출했다는 전설이 있다. |
밤에 얼치나기에 도착하니 온몸이 모래 덩어리다. 오늘 우리에게 이 모래는 그저 약간 무섭고 심술궂은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모래가 때로는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모래가 움직이면 사람들도 움직인다.
얼치나기에는 카라 호토라는, 이제는 폐허가 된 거대한 성이 있다. 카라 호토는 몽골어로 ‘검은 성(城)’이라는 뜻이다. 조그마한 시가지를 떠나 물이 말라 죽은 호양목들을 헤치고 약 30분 사막으로 들어가면 야트막한 모래언덕 위에 일순간 숨을 멈추게 하는 옹골찬 흙벽이 서 있다. 정방형의 성벽 귀퉁이에 불탑이 서 있고, 좌우로 모래가 성벽을 덮고 있다. ‘사라진 문명’이라고 불리는 카라 호토다.
현지의 토구트 몽골인들에게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이 성을 지키는 사람은 흑장군(黑將軍)이라고 했다. 그는 용맹했으며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다 못한 칭기즈칸은 결국 대군을 이끌고 카라 호토로 왔다. 격렬한 전투 끝에 그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북으로 난 성의 구멍을 통해 달아났는데, 달아나면서 훗날을 기약하여 성안의 모든 보물을 우물에 묻었다.>
물론 칭기즈칸 시절에 몽골은 성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칭기즈칸과 싸운 흑장군이 칭기즈칸의 본령(本領)인 서북으로 달아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전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풍승의 카라 호토 공격
필자는 전설과 역사가 섞인 이 이야기를 이렇게 이해한다. 실제로 성을 공격한 사람은 신흥 명(明)나라의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풍승(馮勝)이었고, 공격을 받은 쪽은 몽골인이었다. 이미 화북을 잃은 원(元)은 동서에 하나씩 거점을 가지고 다시 중원(中原)을 도모하려고 했다. 하나는 원나라의 상도(上都)가 있던 내몽골의 동남부 일대, 또 하나는 서쪽의 약수(弱水) 일대로 바로 카라 호토가 있는 곳이다. 몽골 고원에서 서남으로 사막을 건너면 거연(居延)이라는 호수가 나온다. 이 호수에서 하서회랑을 지나 기련산(祁連山) 초원까지 연결된 물이 바로 약수다. 그리고 이 약수의 하류에서 몽골과 회랑을 연결하는 거점에 있는 도시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카라 호토다.
고대(古代) 모든 중국 제국들의 일관된 전략, 즉 서역(西域)과 북방이 연결되는 통로를 끊는다는 방책을 따라 풍승은 카라 호토를 공격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성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돌려서 성을 고사(枯死)시켰다고 한다. 몽골의 거점은 이렇게 고사당했다. 연이어 풍승은 가욕관에 성을 쌓았다.
위의 설화는 몽골이 대하(大夏·西夏)의 흑수성(黑水城·대하 시기 카라 호토의 명칭)을 공략할 당시의 일과도 얼마간 맞아떨어진다. 풍승에게 공격당할 당시의 몽골은 명나라에 쫓기는 신세였지만, 그로부터 불과 백수십 년 전에는 공격자였다. 그때 성을 지키는 이들이 바로 탕구트 사람들이었다. 탕구트의 대하는 중앙아시아 원정을 지원하라는 칭기즈칸의 요구를 거부했다. 대하의 재상 자사 감보는 칭기즈칸의 사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힘도 없으면서 칸은 무슨 칸이냐? 싸움을 원한다면 응해 주겠다.”
《몽골비사》는 탕구트인들이 예전에 칭기즈칸에게 한 항복의 약속을 어기고 몽골에 대들었기 때문에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때 그들이 한 약속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진흙으로 만든 방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군사는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낙타와 그 털로 칸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칭기즈칸의 학살
그들은 원정에는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천명했던 것이다. 누가 약속을 어겼는지는 차치하자. 몽골의 야심찬 칸이 이 껄끄러운 탕구트인의 나라를 가만둘 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때 카라 호토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원사》(元史)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대하의 수도를 공격하기 전에 카라 호토를 함락시켰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당시 대하의 수도인 지금의 은천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싸움을 수행할 때 대칸(칭기즈칸)은 이미 병을 앓고 있었다. 탕구트인들은 용맹했다. 그들도 송(宋), 금(金)이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독자적인 길을 가던 민족이었다. 쌍방은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고립된 사막 안에서, 끈질긴 공성(攻城)기술자들에게 둘러싸인 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서하의 마지막 황제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몽골의 대칸(大汗)을 찾아갔다.
“한 달의 시간을 주십시오. 성을 갈무리한 후 항복하겠습니다.”
이 의뭉스러운 칸은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 용맹한 민족을 말살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그의 생명도 함께 사그라지고 있었다. 칸의 유언은 이랬다.
“내가 죽었다는 것을 발설하지 말라. 우리 군사의 사기가 떨어진다. 저들이 항복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항복하면 모두 죽여라.”
성문이 열리고 약속대로 탕구트인들이 나왔다. 몽골인들은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늠름하고 용맹한 탕구트 사내들을 모두 도륙하고, 아내와 아이들은 나누어 가졌다.”
100년 후 몽골제국의 영광은 사라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몽골의 여러 부족들은 모진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대로 남는다.
사막의 수호신 호양(胡楊). 끊임없이 자신의 바깥 살을 벗는다. 사막의 모래바람에 지친 듯한 껍질은 모래 위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 껍질은 아직도 나무를 감싸고 있는 껍질 일부분이다. 잎이 떨어지면 그 위로 껍질이 떨어진다. 잎과 껍질이 모래에 묻히면, 모래는 바람에 내성(耐性)을 갖는다. 마치 모르타르 안에 골재가 들어가서 콘크리트가 되듯이, 이 껍질이 묻힌 모래는 커다란 흙덩어리 같은 응집력을 갖는다. 폭풍이 불어도 호양 아래의 모래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떨어진 껍질들 사이를 뿌리가 헤치고 들어간다. 어떤 삶들은 그 호양 같다. 그런 삶들 중에는 어떤 몽골인의 삶도 포함된다.
호양림이 아름답게 우거진 곳. 도르지 아저씨의 집이다. 여기는 몽골인들의 본향(本鄕)에도 없는 진귀한 부족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바로 토구트 몽골이다.
토구트, 그들은 원래 타르바가타이 일대에서 유목하던 서몽골(오이라트) 부족의 일파다. 한때 그들은 서몽골의 패자(覇者)였고, 자신들의 풍요로운 목장을 가지고 있었던 강대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동서 몽골의 알력, 그리고 서몽골 내부의 쟁란(爭亂)은 이들 부족을 탈진시켰다. 17세기 초 그들은 결국 칸을 따라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멀리 볼가강 일대 긴 풀이 자라고 싸움이 없는 곳으로 그들은 떠났다. 위대한 칸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새로운 낙원에서 그들은 잠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그곳에도 곧 제국주의의 시절이 왔다. 차르의 러시아는 끊임없이 확장 전쟁을 벌였고, 그 싸움에 토구트 기병을 이용했다. 싸움에 지쳐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또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들의 목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戰士)가 아니라 용병(傭兵)의 신분이었다. 그들이 동쪽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종교 성지인 티베트, 차르를 견제해 줄지도 모르는 만주의 칸(청의 황제), 한때는 싸웠지만 언제나 다시 형제가 될 수 있는 오이라트의 여러 부족들.
도르지 아저씨의 冷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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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구트 몽골인 도르지 아저씨의 가족과 함께. 맨 왼쪽이 필자, 그 오른쪽이 도르지 아저씨. |
급기야 1698년 사절로 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칸의 조카 아랍주르는 청에 귀부(歸附)했다. 그때 돌아가지 못한 토구트 사절 수백 명에게 청이 내린 땅은 하서회랑 일대였다. 그러나 준가르의 힘이 더욱 커지자 그들은 더 안전한 땅을 원했고, 결국 약수를 따라 내려와 이 일대에 정착한 것이다. 그리고 아랍주르가 귀부를 신청한 약 70년 후 토구트 부락은 자신들의 옛 땅을 찾아 동쪽으로 다시 고난의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청은 이들을 받아들였다.
―몇 대조 할아버지가 이곳에 들어왔는지 기억하나요.
“할아버지까지는 알겠지만 그 이상을 모르겠소.”
―최근에 물이 귀해서 가축을 키우기 힘들지요?
“근래에는 물이 좀 많아졌지. 그런데 가축 키우기는 더 힘들어. 밭이 계속 늘어나니까. 그리고 물가의 관목(灌木)들을 베지 못하게 하니까, 초지(草地)가 없어지지.”
―말도 키우나요.
“이제 말은 못 키워. 말은 부드러운 풀을 먹여야 되니까 경제성이 없어. 양은 거친 풀도 먹고, 낙타는 나무도 먹으니까 그런 걸 키우지.”
말을 타지 않는 몽골 부족들이 늘고 있다. 도르지 아저씨는 이렇게 더 보탰다.
“요즘은 다 경제로 판단하니까. 몽골을 알고 싶다고? 수박 겉핥기지. 한 가지 말도 두 귀가 따로 듣는데….”
냉소적(冷笑的)이었다. 오래된 삶의 방식들이 위협받을 때 사람들은 예민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원래 냉소적인 분은 아니었다. 몇 마디가 더 오가는 사이에, 자식들 이야기가 나오자 많이 누그러진다.
―지금 털 깎는 철이지요? 낙타 좀 보여주실래요.
“낙타를 잡아야 되는데….”
아들과 함께 나선다. 관목 숲 사이를 헤치고 아저씨와 아들, 그리고 종손자까지 낙타를 쫓아 뛰었다. 그러나 이방인을 본 낙타 떼는 껑충껑충 달아난다. 낙타를 잡으러 뛰어다닌 후 아저씨는 훨씬 다감해졌다. 그러나 나는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아저씨 말이 맞았다. 그냥 수박 겉핥기 식이다.
사막에 나무를 심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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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애국주의의 선전물인 토구트 몽골족 귀환 300주년 기념비. |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실인가? 그들에게 누가 형제였나, 준가르 몽골이었나, 아니면 중국인들이었나? 그들을 반겼던 그 ‘조국’에서 이제 토구트 몽골족을 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그들을 억압했던 짜르의 땅에서 그들은 여전히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다. 칼묵공화국이 그들의 나라다. 이 나라는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 그들의 보금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내몽골이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결정할 문제다. 아마도 그들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도 과거를 사실대로 말해도 될 시기가 왔다고 본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의 옷을 입힌다면, 미래의 자양분이 될 과거는 죽고 말 것이다.
얼치나기 시내에서 남쪽으로 조금 달리면 가비야투 할아버지의 농장이 나온다. 그도 토구트족이다. 그는 사막에 수어수어라는 관목을 심는다. 퇴역 군인이며 공무원인 그는 사막에서 일을 찾았다.
―언제부터 나무를 심었나요.
“퇴직한 후부터.”
―왜 그렇게 결정했나요.
“내 고향을 예쁘게 만들려고…. 내 고향이니까.”
사막의 모래바람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게르를 두드린다.
맞다. 이곳은 그들의 고향이다. 그들의 토구트로 살아가든, 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살아가든 지금 이곳은 그들의 고향이다. 사막에서 꿋꿋이 뿌리를 내리는 저 나무처럼 저 민족은 살아남을 것이다. 자연을 바꾸고, 또 생활방식을 바꾸면서 그들은 새 고향을 만들어 나간다.
사막 깊은 곳에 사는 아라산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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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에 나무를 심는 퇴역군인 가비야투 할아버지. |
그 사막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 거기에는 나인타이(那因太)의 집이 있다. 모래언덕을 넘는 지프차나 오토바이가 아니면 어떤 바퀴 달린 것도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거대한 모래언덕, 물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사막 가운데 거대한 호수가 있다. 그리고 그 호수 옆에 단 한 가족이 산다. 왜 그곳까지 갔을까?
―언제 이곳에 들어왔나요.
“7대조 할아버지 때 들어왔다고 해요. 그때는 아무도 없었지요.”
몽골인들에게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고 7대조를 계산해 보면 약 200년 전쯤에 그곳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때는 전체 몽골 부락들이 청제국에 항복한 지 약 50년이 지난 때다. 지프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생필품을 사러 낙타로 한 달 걸려 도시를 다녔다고 한다. 이곳에는 말도 살 수 없다. 오직 거친 풀을 먹는 양과 낙타만 살 수 있다.
당시 그곳은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고독하고 혹독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쟁과 약탈도 없었을 것이다. 7대조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잘 몰라도, 그는 그 나름대로의 독립과 안녕을 찾아 그곳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나인타이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3~4년만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낙타를 키울 것이라는 그.
나에게는 칭기즈칸이 아니라 사막에 나무를 심는 가비야투 할아버지와 200년 전 그만의 낙원을 찾아 사막으로 들어온 나인타이의 7대조 할아버지가 영웅이다.
중국과 몽골의 칭기즈칸 쟁탈전
몽골 유목민 게르 한쪽 면에는 어김없이 칭기즈칸의 초상이 걸려 있다. 때로는 판첸라마나 몽골의 쿠툭투(活佛)들의 초상이 그 옆을 차지한다. 칭기즈칸은 그들의 영웅이다. 사실 그는 몽골족만의 영웅은 아니다. 칭기즈칸의 손자들에게 모진 고통을 당한 고려인들의 후예인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도 칭기즈칸은 영웅이다. 얼마나 많은 문인(文人)들이, 얼마나 많은 정치가들이 그와 유목민의 진취성과 열린 세계관을 찬미했던가?
과거 사회주의자들과 칭기즈칸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종주국(宗主國)을 자처했던 소비에트 공화국이 붕괴하기 전까지 칭기즈칸은 그저 러시아의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와 그를 이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지로 독립을 쟁취한 몽골이 그 견해를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칭기즈칸은 영웅이라기보다는 가공할 만한 약탈자로 인식되었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대에게 가장 심하게 피해를 입은 이들은 아마도 러시아인들이 아니라 중국인(漢族)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국의 사회주의자에게도 칭기즈칸은 얼마간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가히 칭기즈칸 신드롬이라고 할 만하다. 몽골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칭기즈칸을 두고 전쟁을 하고 있다. 심지어 몽골인민공화국의 교과서에는 칭기즈칸을 “평화를 소중하게 여기는 대칸”이라고 적어 놓았다. 대부분의 중국어 교과서들에는 ‘우리나라 북부의 위대한 민족인 몽골족이 낳은 세계적인 영웅’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는 실제로 위대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21세기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맞는 인간은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의 인간들은 그를 극성스럽게 불러낸다. 그리고 그를 비틀어 놓는다.
오르도스(河套·섬서 북부와 내몽골 중부의 황하만곡부) 고원 깊숙한 곳, 그곳에 칭기즈칸의 능(陵)이 있다.
경제력에 따라 춤추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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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도스박물관에 있는 흉노왕관. 스키타이 양식이 뚜렷하다. |
고원의 거의 중심부, 풀과 수목이 좋은 곳에 칭기즈칸의 능이 있다. 이상하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칭기즈칸은 부르칸 칼둔이라고 불리는, 케룰렌과 오논 강의 상류에 있는 산에 묻히지 않았나. 능원은 우량카트족이 지킨다고 알려져 있지 않나? 그런데 어쩌다 이곳에 능이 있는 것일까?
알다시피 그는 대하를 공격하는 와중에 죽었다. 그의 운구행렬이 지나는 곳에 보이는 생명체들은 모두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시신이 어떤 길을 따라갔는지 자세한 기록도 물론 없다. 《집사》에도 부르칸 칼둔 산에는 이제 삼림이 우거져 그의 무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문제의 발단이 된 《원사》(元史)는 단 한마디로 “기연곡(起輦谷)에 묻혔다”고만 적어 놓았다.
이런 몇 가지 모호함들이 모여 오르도스에 그가 묻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만들어졌고, 또 오르도스의 몽골인들이 그의 위패(位牌)를 모셨기 때문에 설사 그의 무덤이 오르도스에 없다고 하더라도 능을 만들 역사적인 근거는 생긴 셈이었다.
그런 호재를 놓칠 중국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작은 천막에 모셔져 있던 칭기즈칸의 위패를 근거로 지금의 거대한 능원(陵園)을 조성했다.
그들도 이곳이 칭기즈칸의 무덤이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니라고 천명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대규모 자금을 들여 조성된 이 능원은 이미 몽골인민공화국의 칭기즈칸 기념물들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여기서 칭기즈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웅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능을 찾는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곳이 그의 능이라고 믿고 있다.
능을 설명하는 어떤 여행책자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오르도스란 오르드(궁정)를 지키는 위사(衛士)들을 가리킨다. 명대에 칭기즈칸의 능을 지키는 능지기 부족이 오르도스에 정착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여기에 능원을 세웠다.”
14세기 사서(史書)에 이미 그의 능의 위치를 아는 이들이 없다고 쓰여 있는데, 능지기 부족은 또 무엇인가? 원래 능지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우량카트 부족이라고 쓰여 있다. 그 부족이 여기에 왔단 말인가?
나로서는 그 논리의 간극을 메울 수가 없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능을 만들고, 연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그 능을 거대하게 확대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도 경제력에 따라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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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이 조성한 칭기즈칸의 능. |
王昭君, 비련의 여인에서 민족화합의 사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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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한족-몽골족의 화합의 상징’이 된 왕소군과 호한야 선우(單于)의 동상. |
장강이 평원으로 들어가는 어귀 호북성의 한 규수가 한(漢)나라 황궁(皇宮)의 궁녀(宮女)로 들어갔다. 아마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2세기 흉노와 한은 오르도스, 하서회랑, 투르키스탄 등을 놓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과 풀을 따라 움직이는 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정주국가의 가련한 노력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손실만 가져오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흉노도 내부분열과 한의 지속적인 원정으로 이미 기원전 2세기 무렵의 강성함을 잃고 있었다. 급기야 기원전 1세기 중반 흉노의 호한야(呼韓也) 선우(單于)는 한에 화친을 요구해 왔다. 한으로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요청이었고, 이 기회를 잘 살려 북방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때 왕소군이라는 여인이 호한야 선우에게 화친의 보답으로 보내지게 된다.
북방의 ‘오랑캐’라면 짐승처럼 생각하던 중국의 문사들에게 왕소군은 비련의 여인처럼 비쳤다. 그래서 왕소군이 변경을 나서 북방으로 떠나는 모습은 많은 문인·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그녀는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다시 현지의 풍속을 따라 호한야 아들의 연지(閼氏·비)가 되어 다시 자식을 낳았다. 흔히 공맹(孔孟)의 도(道)를 배웠다는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궁정에서 벌어진 패륜극들에 비하면 오히려 싱거운 일이었지만, 북방 민족들에게 시달릴 때마다 문사들의 손끝에서 왕소군은 더더욱 슬픈 여인으로 태어나곤 했다.
공원으로 들어가면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이 말을 타고 다정하게 나란히 서 있는 동상이 있다. 내몽골자치주 성립 40주년을 기념하여 근래에 세운 조형물이다. 물론 한족(漢族)과 몽골족의 우호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이 공원에서 왕소군은 더 이상 비련(悲戀)의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중화민족과 북방민족의 우호를 이끌어낸 외교사절이며, 평화의 수호자이며, 또 호방한 북방 영웅의 아리따운 부인이다. 그동안 소군을 비련의 여인으로 기록해 놓았던 수많은 문사들의 작품은 옹졸한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의 감정과잉으로 격하된다. 칭기즈칸이 약탈자에서 영웅으로 변신하듯이, 비련의 여인도 이제 당찬 외교사절로 변신한다.
長城의 진실
포부시 북부 고양(高陽). 초원을 벗어나 조금 북쪽으로 들어가면 진(秦)나라 장성(長城)터가 나온다. 현재의 만리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세워 놓은 이 성터는 많은 오해를 낳았다.
현재의 장성은 훨씬 남쪽에 있다. 그렇다면 유목민의 압력 때문에 성이 남쪽으로 후퇴할 것일까? 많은 사람이 장성은 유목민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성은 당연히 방어를 위한 것이다.
만리장성은 유목민을 몰아내고 세운 전진(前進)기지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좌전》에 나오는 융적(戎狄)이라는 부족은 오르도스는 물론 섬서와 산서의 중부, 태행산맥의 남부, 즉 중원의 지근거리에서 살았다. 그들은 호전적(好戰的)인 진(秦)과 진(晉·후대의 趙)에 의해 계속 북쪽으로 밀려 올라갔다. 그리고 성에 의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차단되었다. 후대(後代)에 흉노라는 강맹(强猛)한 부족이 초원지대를 장악함으로써 남북의 역학(力學)관계는 전환되지만 이미 진(秦)과 진(晉)은 충분히 북상한 뒤였다. 최초에 성은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북방 민족의 땅을 차지하고 세운 구조물이었다. 대중의 통념(通念)과 역사적인 사실들은 이렇게 충돌한다.
하지만 역사가들이 만드는 통념은 더 지독하다. 한 가지로 티베트 불교에 대한 그들의 통념을 살펴보자. 중국에서 서몽골의 역사를 간추린 《준가르사략》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티베트 불교는 오이라트 인민들을 빈곤에 안주하게 하고, 인민들의 투쟁의지를 마모시켜, 사회발전을 저해했다.”
실제로 16세기 이래 몽골은 티베트 불교의 낙원이 되었다. 후흐호트에 있는 거대한 사원의 수만 10개가 넘고, 작은 사원은 부지기수다. 대조사·소조사·오탑사 등등 이름난 사원들도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다.
19세기말 몽골 성인(成人) 남자의 거의 3분의 1이 승려였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일을 할 것인가? 분명히 불교의 융성은 지역 경제에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몽골인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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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성을 잃은 시린궈러의 몽골인 목동들. |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사람은 바로 일시적으로 몽골을 다시 통합한 오르도스의 알탄 칸이었다. 그는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몽골의 통합을 굳건히 하려고 했다. 그리고 몽골 최후의 대칸인 차하르(오늘날의 내몽골 중동부)의 릭덴 칸 역시 불교를 통해 몽골의 분열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그의 경쟁자 청태종은 몽골부족들이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뭉치는 것을 방해하는 전술을 썼다.
몽골의 지도자들은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를 내세웠다. 실제로 불교는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기술 앞에 불교는 무력(無力)했다. 차하르의 대칸에 맞서서 몽골의 여러 부족들은 만주족의 편에 섰다. 릭덴 칸은 자신들의 동족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가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만주의 대칸이 불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티베트 불교를 기반으로 몽골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근대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중국 본토에서 공화혁명이 일어나자 몽골은 젭종단바 쿠툭투(몽골 티베트 불교의 수장)를 황제로 추대해서 독립국임을 선포한다. 당시 그 ‘구(舊)시대적인’ 불교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포두 북쪽 동커얼(오당소·五當召) 사원에서 라마들에게 불교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시원스레 대답해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입장료는 받는 승려는 “내부에서 사진을 찍지 말라”는 말만 분명하게 한다. 정치가 아닌 불교 이야기도 대답할 수 없단다.
정부의 눈치를 보는 승려. 종교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본다. 무엇이 분열의 원인인가? 종교인가, 아니면 관변(官邊) 이데올로기인가?
몽골의 독립
신해혁명(辛亥革命)의 파고(波高)가 몽골인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들은 이 가라앉는 청이라는 배와 운명을 같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험난했다. 거의 200년간의 청나라 지배는 이미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갈라 놓았다.
1911년 12월 4일 후레(울란바토르)에 있던 청나라의 판사(辦事) 대신 산도를 추방함으로써 몽골은 독립국이 되었다. 그리고 신흥 독립국 안으로 내몽골을 통합하기 위해 내몽골 방위대를 파견하여 차하르 몽골을 신흥국가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의중과 몽골 신정부의 입장은 처음부터 달랐다. 당시 몽골을 둘러싼 열강들의 의도는 이렇게 요약된다.
● 러시아- 외몽골을 중국(중화민국)에서 분리하되, 종주권(宗主權)은 중국에 주고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동시에 내몽골의 이권(利權)은 일본에 넘기고 외몽골의 이권은 양보하지 않는다.
● 일본- 내몽골의 독립을 지지하여 중국의 분열을 촉진하고, 내몽골에 괴뢰정권을 세워 대륙침략의 기지로 만든다.
● 중국- 러시아와 일본에 이권을 내주더라도 종주권은 고수한다. 종주권을 잃으면 티베트와 신강(新疆)도 떨어져 나갈 것이므로 종주권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1915년 몽골 신정부, 중국, 제정 러시아의 대표가 만나서 협정이 이루어졌다. 역시 돈을 좋아하는 제정 러시아, 현 상태 유지를 바라는 중국, 통일 국가를 세우려는 몽골인들의 의견은 처음부터 대립했지만 러시아의 지지를 얻지 못한 몽골 신정부는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렇게 독립국가는 겨우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러시아에 기대고 있던 몽골인들은 비정(非情)한 열강의 계산놀음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절에 온정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함께 또다시 판세는 바뀌게 된다. 그 이후의 일은 이 원고의 범위가 아니다. 다만 내몽골에서 느낀 유감을 정리하며 글을 마친다.
흥안령을 넘으며 - 내몽골 독립운동의 기억
나 같은 얼치기 역사학도가 내몽골을 여행하면 온갖 상념이 다 든다. 말을 길들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씨름도 하고 말도 타고 놀았다. 그때 말을 길들이는 청년 단선(丹森)에게 물어보았다.
―몽골에서 사내라면 꼭 단련해야 할 세 가지를 들라면요?
활 쏘기, 씨름, 말 타기는 칭기즈칸 이래로 몽골의 사내들이라면 반드시 연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 타기, 씨름, …. 음 그리고, 말 길들이기(올가미로 잡기)지요.”
활 쏘기가 말 길들이기로 바뀌었다. 활은 이미 몽골인들의 일상을 파고들지 못한다.
몽골인들은 어쩌면 힘이 빠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활 쏘기가 말 길들이기로 바뀐 것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이것이 몽골인들의 유연함이다.
그들이 독립을 원할까? 원한다면 이룰 수 있을까? 과연 독립은 필요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대자연만이 아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거짓말을 듣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오.” 몽골인이 아니라 세상 어떤 사람들도 거짓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쪽에서 후룬베얼 초원으로 들어가면서, 차를 뒤흔드는 강풍 속에서 나는 푸렙도르지의 시(詩) <독립>에 나의 말을 얹어 본다.
<바단지린 사막의 호양목 등걸마다에,
시린궈러 초원의 풀 하나하나에,
흥안령 비탈의 바위언덕 언덕마다,
너의 이름을 외치며, 기억시킨다.
너, 진실(眞實)이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