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 개방한 광동인들, 손문의 혁명정권 후원
⊙ 삼원리 抗英기념비, 대원수부, 중산기념당, 광주기의열사능원, 황포군관학교 등 중국혁명
관련 유적들 산재
⊙ “‘전쟁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태평의 시대’라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投槍을
치켜드는, 결국 극한까지 달려 ‘태평의 가면’을 향해 창을 던지는 이가 바로 전사다”(魯迅)
⊙ 삼원리 抗英기념비, 대원수부, 중산기념당, 광주기의열사능원, 황포군관학교 등 중국혁명
관련 유적들 산재
⊙ “‘전쟁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태평의 시대’라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投槍을
치켜드는, 결국 극한까지 달려 ‘태평의 가면’을 향해 창을 던지는 이가 바로 전사다”(魯迅)

- 1927년 장개석에게 희생된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기리는 광주기의열사능원.
다 맞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땅이 넓은지 알려면 신강(新疆)에 가 보고, 중국이 얼마나 부유한지 알려면 광동에 가 보라”는 말이 있다. 광동 이외의 지역을 여행할 때, “광동 사람들은 돈을 쓸 줄 안다”, “광동 사람들은 예의가 있다” 등등의 말을 종종 듣는다. 하다못해 옷이라도 좀 깨끗하게 입은 사람, 혹은 유행을 따른 머리 모양을 한 사람은 “광동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필자도 광동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점이 몇 가지 있다. 광동성의 성도(省都)인 광주에 갈 때마다 거대한 잡탕 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거리에 넘치는 다양한 인종들, 특히 흑인들이 눈에 띈다. 택시 기사는 “광동에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많이 와요. 여기서 사업을 벌이는 거죠. 한 번 들어오면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은 대단히 많이 정비되었지만 광주역에 들어서면 또 다른 신천지를 만나게 된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모이게 되었을까? 역사와 광장을 빼곡히 메운 거대한 민중의 물결. 못 알아듣는 남방 방언에서, 그런대로 익숙한 하남(河南)·사천(四川) 방언, 북방계 사람들, 심지어 서쪽 끝의 위구르인들까지 모여들어 마치 언어의 전시장을 보는 느낌이다.
전국 어디에서든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면 광동으로 간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모두들 자기 나름의 꿈을 안고 남쪽으로 떠난다. 한반도 전체보다 약간 작은 땅에 상주(常住)인구 1억이 모여 있는 곳. 사실 상주인구 통계는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처럼 인구통계에 잡히지 않고 광동의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구는 또 얼마나 되겠나. 광동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가?
개혁·개방의 시험장
1979년 등소평(鄧小平) 주도의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흔히 당중앙이라 불린다)는 심천(深?)·주해(珠海)·산두(汕頭)·하문(廈門)을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최초의 경제특구 중 하문을 제외한 세 도시가 광동성에 위치하고 있다. 항구, 배후 인구, 화교(華僑)자본 등 경제성장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개혁개방 정책에서 광동은 개방의 실질적인 시작점이 되었다. 그후 중국은 오늘날까지 달려왔고 이제는 세계경제에서 무시 못할 실력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광동이 개방구로 선정된 데는 경제적인 이유만 작용했을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 20세기 초부터 장강(長江)삼각주의 중심지역(상해, 소주·蘇州, 항주·杭州)은 줄곧 주강(珠江)삼각주의 광동지역을 경제적으로 능가했다. 중국이 단지 더 큰 성장잠재력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면 경제중심지인 상해에서 개방을 시작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정도로 극도로 신중한 등소평은 그런 모험을 할 사람이 아니다. 문화대혁명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 장강 하구의 경제중심지들을 기반으로 과감한 실험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먼저 실험해 보고, 성공하면 확대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였다.
왜 광동에서 먼저 시작하는가? 광동은 이미 개방에 물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개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압박감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바로 바다 건너 홍콩을 바라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광동은 여전히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변방에서는 실험이 가능하지만 중심에서의 실험은 위험하다.
18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까지 개방과 혁명의 역사를 이끌어 갔던 곳은 바로 광동이다. 대외(對外) 무역을 담당하던 광동의 상인(買辦)들은 열강(列强)에 기대어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혁명 열기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열강들, 특히 영국은 광주에서 내지로 연결되는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을 따라 중국의 차를 모아 가고 그 길로 아편을 퍼뜨렸지만, 또 그 길로 반(反)제국주의 열풍도 퍼져 나갔다.
혁명의 고향
청조(淸朝) 말기 내지(內地)의 인구압박은 엄청난 사람들을 세계 각지로 ‘수출’했다.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에서 신흥 아메리카의 철도건설 현장까지 중국의 노동자들은 18~19세기까지 신흥자본들에게는 극도로 안정된 노동력 예비군이었다. 인력 수출구(輸出口)가 바로 광주와 복건 등지의 남부 해안 항구들이었다. 물론 그 중심은 광주(廣州)였다.
미국의 서부개척 시절 ‘노새처럼 짐을 지는 중국인들만 있다면 지옥까지라도 철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모리배(謀利輩)들도 있었다. 하지만 짐승처럼 짐을 졌던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야말로 노새처럼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남방 혁명가들에게 열정적으로 자금을 제공하던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다. 실로 해외 화교들은 혁명에 열정적이었다. 좌충우돌에, 손 대는 일마다 실패하던 혁명의 총아(寵兒) 손문(孫文)이 그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해외 화교들의 지지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해외 물을 먹은 사람들’, 특히 공화정(共和政)의 세례를 받을 사람들이다. 가난과 전쟁을 피해 광동의 항구를 통해 바다로 나선 사람들이 가난과 전쟁을 극복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필자가 느끼는 광동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다. 광동에 가면 항상 북방과는 다른 공기를 느낀다. 그것은 중국에서 가장 개방적이었던, 그리고 가장 혁명적인 인간들이 만들어 갔던 공화혁명의 장(場), 흔히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알려진 그 혁명의 장에서 광동인들이 보여준 새로운 지향에서 항상 북방의 경직성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일 것이다.
아편전쟁 후 광주항이 개방되었고, 산두를 비롯한 광동의 주요 항(港)들이 1858년 천진조약(天津條約)으로 추가로 열렸다. 물론 광동지역은 조약으로 승인받기 이전에 이미 외국인들이 드나들며 열심히 아편과 공장에서 만든 제품들을 팔던 창구였다. 이제는 그 창구들을 통해 중국이 주동적으로 세계로 나서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공화혁명을 추구하던 당시의 활력, 그 혁명적인 정신도 뿜어져 나오고 있을까?
三元里 抗英기념비- 혁명의 萌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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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에 맞선 주민들을 기리는 삼원리 항영기념비. |
“삼원리 항영기념비가 어디에 있나요?”
할아버지는 손수 필자를 데려다 주었다. 필자를 중국의 ‘애국청년’으로 여겼던 것 같다. 기념비는 대로변에 있어서 찾기 쉬웠다. 단순한 기념비지만 적힌 문구는 사뭇 비장하다.
“1841년, 광동인민이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일으킨 투쟁에서 희생된 열사들은 영원불후하다!”(一八四一年, 廣東人民在三元里反對英帝國主義侵略鬪爭中犧牲的烈士們垂不朽)
삼원리 싸움은 1차 아편전쟁 중 광주북부의 포대(砲臺)가 이미 다 함락되고, 관군(官軍)은 패배를 인정하여 화약(和約)을 준비하는 중에 영국군이 삼원리 일대의 민간인들에게 위해를 가하여 발생한 항영투쟁이다. 이 싸움에서 당시 논이었던 이곳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영국군 및 인도인 용병 수십 명이 죽었고 또 수십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과장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것 같지 않은 사건이지만, 그 파장은 대단했다. 이 사건으로 광동 인민들은 일단 관군의 무능을 간파했다. 청조의 군대란 수만 많았지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일단 전투를 끝내고 화약을 맺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이들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또 하나는 인민들이 직접 제국주의에 대항했다는 점이다. 당시 그들이 내걸었다는 <영국 오랑캐들을 깨치는 격문>(申諭英夷告示)은 이렇게 시작한다.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우리 광동 의민(義民)이 너희 견마(犬馬) 같은 영국 역도(逆徒)들에게 알린다.”
흔히 격문의 서두에 쓰는 말이다. 그러나 격문에는 “작금 우리가 관병(官兵)을 이용하지 않고, 오직 향촌(鄕村) 사람들만의 힘으로 너희를 친 것은”, “관병을 쓰지 않고, 국가의 비용을 쓰지 않고, 너희 개돼지들을 모두 죽이겠다” 등, ‘관병을 쓰지 않고’ 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
행간에서 ‘앞으로 무능한 관군에 의지하고 않고 직접 투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읽은 것은 필자뿐일까? 얼마 안 있어 격론이 벌어질 것이고, 실제로 관병의 필요성에 대해 거의 전 인민이 회의(懷疑)하는 시절이 곧 도래하게 된다.
孫文과 袁世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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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수 복장을 한 손문. |
이제 더 남쪽으로 내려가 본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빠른 걸음으로 걸어다니면 일단 광주시 북부의 혁명유적지는 그런대로 구경할 수 있다. 봄에 광주에는 비가 많이 온다. 그러나 그렇게 차갑지는 않으니 우산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광주시에서 가로수로 쓰고 있는 용수(榕樹)는 ‘한 나무가 수풀을 이룬다(獨木成林)’는 영예를 안고 있는 엄청나게 거대해지는 열대 교목(喬木)이다. 공기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여 줄기에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기이한 모양을 보면, 마치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던 20세기 초의 수많은 혁명가들의 강인한 근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제일 먼저 찾아갈 곳은 해주구(海珠區)에 있는 대원수부(大元帥府)다. 지하철역 시이궁(市二宮)에서 내려서 한참 걸어가면 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군사정권의 중앙관서다.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갓 태어난 공화정이 겪은 우여곡절은 중국 근현대사의 굴절과 그대로 겹친다. 손문은 분명히 끈질긴 혁명가였지만 현실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이나 안목은 턱없이 부족했다.
일단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은 진정한 의미의 혁명정권은 아니었다. 북양신군(北洋新軍)의 실질적인 수장(首長)이며 청조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원세개(袁世凱)와 결합하여 탄생한 일종의 연립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즉, 손문이 명목상의 영도(領導)인 남쪽의 공화혁명세력 연합과 북경(北京)에 근거지를 둔 실력자 원세개의 군부(軍部)가 밀약(密約)하여 황제체제를 무너뜨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칼자루를 쥐었던 원세개가 초대 총통(대통령)이 되었다. 임시총통이었던 손문은 원세개에게 총통의 자리를 양보했다.
‘애국주의 교육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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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대원수부. 손문은 이곳을 근거로 북벌을 도모했다. |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이라고 북방정치의 거두 원세개 휘하의 군인들은 급속히 군벌(軍閥)로 이행한다. 남방 각 성(省)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변혁의 와중에서 눈치를 보다 혁명군 쪽으로 끼어든 청조의 관리 출신, 신(新)문물을 받아들여 혁명을 열렬히 주장했지만 순식간에 권력에 맛을 들인 기반이 박약한 젊은 군인들, 열심히 혁명에 종사하였으나 혁명의 지지부진함에 진저리가 나게 된 초기의 열성파들, 이들이 모두 중국의 구습(舊習)을 벗어나지 못하고 군벌로 이행하게 된다. 군벌을 끝장내기 위한 혁명은 다시 한참의 시간을 끌어야 했다.
광주에 있는 대원수부란 손문이 다시 광동의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남방의 여러 군벌들과 연합하여 공화정의 약속, 즉 중화민국임시약법(中華民國臨時約法)과 그로 인해 탄생한 국회를 지켜 내자고 결성한 광동의 군사정권이다. 그 대원수가 바로 손문이었다.
잠시 감상에 잠긴다. 비오는 날 보는 근대적 서양식 건물 대원수부는 참으로 운치가 있다. 유적지마다 매표소를 만들어 열심히 돈을 거두는 것으로 악명(惡名) 높은 중국 당국이 근래에 ‘애국주의 교육단위’라는 것들을 많이 지정해 놓았다. 관람도 무료(無料)지만 그 내부의 진열수준은 가히 세계적이다.
대원수부 안으로 들어가면 회랑(回廊)에 대원수부 주요 인물들의 사진과 이력을 걸어 두었다. 천천히 회랑을 돌면서 오래된 사진 속 인물들의 이력을 하나하나 읽는 것은 이 유적지를 찾은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회랑 밖으로 빗물이 듣는데, 한 이국(異國)의 젊은이가 회랑에 진열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모습이 유적을 찾은 여러 어르신들에게도 신기한가 보다. 필자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 분씩 양보해 준다.
혁명의 주역, 廣東人
사실 필자는 대원수부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광동성 사람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것은 두 가지를 말해 준다. 현실적으로 공화혁명 세력이 광동성 일대로 쪼그라들었다는 점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골수들은 다 광동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복림(李福林), 대원수부 경위, 광동 번옹 사람. 등연달(鄧演達), 월군영장(?軍營長), 광동 혜양(惠陽) 사람. 호한민(胡漢民), 탕정광(湯廷光), 장발규(張發奎), 공산당의 전설이기도 한 엽정(葉挺) 등의 사진이 쭉 걸려 있다. 그 지위나 중요성은 차치하고 절대 다수가 광동인이다.
좀 더 핵심 인물로 들어가서 군사연락 및 중요문서 관리를 맡은 주집신(朱執信), 재정을 담당했던 요중개(廖仲愷)가 모두 광동인들이다. 비서장을 지낸 장병린(章炳麟)을 비롯한 일부 절강, 강서, 호남 등지의 남방인들을 제외하면 대원수부는 광동의 군사정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신해혁명은 광동성 하나의 것이 아니었고, 마치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나 이 대원수부의 인물들은 대부분 광동 출신이었던 것이다.
1917년 당시 손문은 얼마나 성공을 확신했을까? 이 특이한 혁명가는 남방에서 이 군벌 저 군벌들과 손을 잡으면서도 중국의 공화혁명군이 북벌에 성공하여 다시 국회를 중심으로 한 공화정을 열 수 있다고 믿었다.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주덕(朱德)은 원래 운남성의 공화주의자이자 원세개 황제체제 복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채악(蔡鍔) 아래서 중국 공화혁명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채악은 곧 반격을 받고 불우하게 짧은 생애를 마쳤기에, 주덕은 직접 손문을 찾아갔다. 그는 “손문이 이 군벌 저 군벌에게 마음대로 손을 벌리며 그저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질려 버렸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손문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 그런 사람만이 그런 난마 같은 상황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魯迅 故居’를 찾아서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북쪽으로 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강만대교·江灣大橋)를 건너면 주강의 북쪽 기슭에 이른다. 다리 위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광주라는 도시의 면모를 조금 이해할 수 있다.
다리를 지나면 복잡한 고가(高架)가 나온다. 지도에 의하면 고가 아래 노신(魯迅) 고거(故居·옛날 살던 집)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다. 젊은 시절 노신을 접한 후 그의 이름이 들어간 곳이라면 무조건 다 찾아본다. 고가 아래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의 고거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다.
주강으로 들어가는 물길, 하수구와도 같은 고가 아래의 물길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다. 속으로 ‘저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저 시커먼 물에서도 사는 물고기라면 분명 강인한 족속이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강한 자의 간을 먹으면 그처럼 강해진다’는 중국인들의 민간신앙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기어이 마작을 하는 사람들을 불러내 물어봤다.
“노신의 고거가 여기 있다던데요?”
“있지. 근데 노신이 여기서 겨우 세 달 있었어. 그냥 한 번 들른 곳이야. 노신이 들른 곳이 한두 곳이야? 고거는 무슨. 지도 만드는 녀석들이 제멋대로 집어넣은 거야.”
역시 광주다. ‘대문호(大文豪) 노신과 내가 뭔 상관이람’, 이런 식이다. 그리고 과거 인사라면 무조건 추켜올리는 작금의 중국 풍조에 비추어 보아도 광동은 뭔가 좀 다르다. 나도 깔끔하게 포기했다. 거리에는 비오는 날임에도 비옷을 거부하고 화사함을 뽐내는 젊은 여인들이 넘친다.
國父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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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기념당. |
중산기념당은 별 볼 것이 없지만 기념당 뒤쪽의 월수(越秀)공원은 이른 봄임에도 이미 아열대 초록의 향연이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중산기념비가 있다. 중화민국 18년, 그러니까 1929년, 손문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뒤에 만든 것이다. 37m 높이로 웅장한 건물이지만 쓸모 없는 장식은 배제했다.
이 기념비는 건축사 여언직(呂彦直)이 설계한 것으로 공화혁명의 이상(理想)을 충실히 담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안정감 있는 양식이다. 삼민주의(三民主義)에서 손문은 국가의 기초가 국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기초를 넓고 안정감 있게, 건축은 이렇게 철학을 명징(明徵)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시간이 된다면 구(舊) 박물관 터에 있는 제1차 국민당전국대표대회의 표지석을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다. 이 시기 이미 중국은 공산주의의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때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지 이미 몇 해가 지난 터이니 공산주의가 광주에 안착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때 중국공산당의 시조 격인 이대조(李大釗), 진독수(陳獨秀)는 물론이고, 19세기 중반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던 혁명의 줄기를 공산주의혁명으로 마무리지은 모택동도 이 대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국민당의 일원으로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 혁명은 또 다시 내부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고 있었다.
烈士陵園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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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기념비. |
맞은편 식탁에는 러시아 상인들이 역시 술을 곁들이며 식사를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한 후 당시까지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던 해외파들의 지형에도 변화가 생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킨 일본이 역할모델에서 물러나고, 손문이 말한 민생혁명(民生革命)이자, 모택동을 위시한 급진파들이 말한 ‘착취를 종결시키는 최후의 혁명’, 즉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나라가 새로운 역할모델로 등장한 것이다. 황포군관학교라는 공화주의자들이 만든 군사학교는 바로 러시아를 이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건설된다.
저 러시아인들은 광주의 공산품(工産品)을 가지러 왔을 것이다. 중국인 안내인이 중국산 공산품을 러시아 말과 중국 말을 섞어서 설명하는 낯설지 않은 풍광은 세월의 변화를 절감하게 한다.
다시 하루가 흘렀다. 이제 광주 여행의 핵심만 남았다. 핵심은 황포군관학교다. 그러니 군관학교로 가기 전에 먼저 들를 곳이 있다. 바로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이다. 부지런히 둘러보지 않으면 넓은 광주시내의 유적을 훑어보기 어렵다.
숙소에서 나와서 무허가 택시를 탔는데, 어투가 자못 다른데 역시 외지(外地)에서 온 신참이다. 이 사람, 광주 사람이라면 유치원생도 알 열사능원을 못 찾아간다. 지도를 들고 이틀을 다닌 지라 오히려 나는 광주 중심지 지리에 훤하다. “우회전”, “좌회전”을 열심히 외치며 열사능원에 도착했다. 다들 외지에서 ‘광주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차 운전하는 사람이 열사능원도 모르면 어떡하셔?”
“나는 광동 사람이지 광주 사람은 아니거든.”
넉살도 좋은 친구다. 그러고는 내릴 때 약속한 돈에서 5원 깎아 준다. 비록 5원이라도 길을 잘 몰랐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표시다. 그런 풍경도 광주 아닌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다. 오히려 길 찾느라 고생했으니 5원 더 내라는 곳이 더 많았다. 비록 무허가 차를 운전하지만, 괜스레 정감이 가는 친구였다.
나는 烈士가 싫다
열사능원. 열사(烈士). 도대체 이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한비자(韓非子)란 사람은 열사들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이름과 명예를 좋아해서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이를 세상 사람들은 열사라고 부른다(好名義不仕進者,世謂之烈士)”고 정의한 후, 열심히 이들을 비꼬았다. 그에 의하면 이들은 군주를 섬기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으며, 죽음을 불사하며,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다. 법가(法家)의 입장에서 그런 사람들의 주장이란 ‘천하를 미혹하게 하는 사술(天下之惑術)’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는 한비자와는 다른 입장에서 열사라는 말을 싫어한다. 열사란 반드시 죽은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얼마나 큰 불만을 품었으면, 세상이 그에게 얼마나 큰 불만을 품게 했으면 그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까? 반드시 목숨으로 바꾸어야 할 세상이라면 얼마나 형편없는 세상일까?
노신이 원했던 ‘이런 전사(這樣的戰士)’, 즉 ‘전쟁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태평의 시대’라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투창(投槍)을 치켜드는, 결국 극한까지 달려 ‘태평의 가면’을 향해 창을 던지는 이가 바로 전사, 그가 바로 열사가 아닌가? 그러나 노신 스스로, 그렇게 비장한 투쟁이 필요한 시대는 자신들의 세대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열사들이 넘치는 세대, 그들의 사상 시비를 떠나, 그 시대는 슬픈 시대다. 열사가 천하를 미혹하는지, 천하가 열사를 미혹하는지 그것은 심장이 오른쪽에 붙어 있는지 왼쪽에 붙어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열사능원에서 金山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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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廣州起義에 대한 증언을 남긴 김산. 공산혁명에 투신했던 그는 누명을 쓰고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됐다. 사진은 처형 직전 김산의 모습. |
<4월 18일 나는 하나의 사건을 목격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세 명의 중국공산당청년동맹원이 공중 앞에서 처형된 것이다. 열여섯 살 먹은 소녀와 스물한 살, 스물두 살 먹은 청년이었다. (중략) 거리를 끌려 다니면서도 그들은 공산청년 인터내셔널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으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을 쫙 펴고 있었다.(중략)
수백 명의 군중이 형장까지 따라갔지만 울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들을 쫓아 거리를 뛰어가는 동안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경찰이 나를 동조자로 보아 체포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흥밋거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잔혹한 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어. 절대로, 절대로 못 살아. 이들은 사람도 아니야”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수백 명의 호기심에 찬 군중 속에서 조선인 혁명가 한 명이 혼자 울고 있었다. 그는 처형당한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눈에 맺힌 눈물까지 보았다. 그가 바로 김산, 본명이 장지락(張志樂)인 공산주의 혁명가였다. 그가 보기에 당시 중국은 절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광동코뮌 운동, 즉 광동을 해방구로 만들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이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5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있었다. 이 열사능원에는 조선인 열사를 기리는 비각도 있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필자는 가끔씩 김산을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때로는 눈물이고, 그 눈물은 동감(同感)에서 나온다.
노신의 소설 《약》(藥)에 나오는 작은 술집의 주인에게는 폐병 걸린 아들이 있다. 그는 ‘사형수의 피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미신을 따라 어느 사형수의 피를 몰래 얻어 와서 아들에게 먹인다. 그러나 피가 약이 될 리가 있을까? 그 사형수는 바로 혁명가였다.
그 작품은 ‘아마도 절강성 노신 고향의 여류혁명가 추근(秋瑾)을 묘사한 것’이라고들 한다. 노신은 울지 않는 군중에게 진저리를 쳤다. 김산의 진저리와 노신의 진저리는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겨우 10년 후 김산이 자신의 조직, 그가 목숨을 바친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일은 또 무슨 진저리 나는 일이란 말인가? 한없이 울적해진다.
지금 능원은 그저 조용하다. 맨발로 비석 주위를 뛰는 중년 아저씨의 표정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어느 ‘가짜 부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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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근대사박물관에 있는 주문옹과 진철군의 사진. |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어떤 사진 한 장 앞에서 결국 눈물이 나오더니, 전시장을 도는 꽤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눈물이 나왔다. 1927년 4월 김산 혼자서 울었듯이, 오늘 이 전시장에서 우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전시장에는 주문옹(周文雍)과 진철군(陳鐵軍)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24살의 사내, 25살의 여인. 가냘픈 몸매지만 앙다문 입은 결기가 느껴진다. 그들은 ‘부부’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부부가 아니다.
1927년 12월 광동코뮌 운동 실패 후 주문옹은 홍콩으로 피신했고 얼마 후 다시 광동으로 잠입했다. 홍콩에서 돌아올 때 그를 맞은 이는 역시 공산주의 혁명가인 한 살 연상의 진철군이었다. 이들 가짜 부부는 불행히도 금세 검거되고 말았고, 엄혹한 시절은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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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珠江의 水上가옥. 주문옹과 진철군도 이런 수상가옥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
박물관에는 수상(水上)가옥 실물이 하나 진열되어 있다. 말이 수상가옥이지 사실은 두 사람도 나란히 눕기 힘든 새장 같은 배다. 그리고 그 옆으로 20세기 초반, 주강을 가득 메웠던 그 수상가옥들을 찍은 사진이 있다. 혼자서 생각해 본다.
‘저 배 안에 사는 부부는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이다. 서로 미워한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살벌하게 싸운 날도 어쩔 수 없이 껴안고 자야 할 터인데.’
주문옹과 진철군의 사진과 수상가옥을 보면서, 왠지 그들이 정말 사랑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다.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간에 말이다.
황포군관학교 - 권력은 총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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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은 물론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을 배출한 황포군관학교. |
주강을 건너 항구에서 불과 1분만 걸어가면 황포군관학교 옛터와 손 총리(손문)기념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광주에서 손문이 관계된 곳이면 거대한 용수가 없는 곳이 없다. 그중 손 총리 기념비 옆의 용수는 단연 압권이어서, 거의 경외감마저 느끼게 한다. 역사적인 유적이 아니었더라도 남방의 풍격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황포군관학교. 일단 교장 장개석(蔣介石)이 떠오른다. 그는 이 학교 출신의 군관세력을 기반으로 국민당 1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인으로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이 떠오른다. 이 학교가 중요한 것은 향후 중국현대사를 휘두르는 인물들은 물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흥 소비에트 공화국의 원조를 받아 만들어진 이 학교의 교관 출신 조선인들은 일부는 중국혁명에 투신하여 간접적인 항일투쟁으로, 일부는 조선독립운동에 직접 투신하면서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열었다.
손문. 그는 열정이 있었지만 항상 자신의 기반이 없어서 번번이 좌절을 당한 비운의 혁명가였다. 그는 전국 각지의 군벌들을 평정하여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뒷받침할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신해혁명 후 원세개와의 화의(和議)를 통해 공화국을 세웠으나 원세개는 다른 마음을 품었고, 그 후 군벌할거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광동과 남방의 군벌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설 수는 없는 운명이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유명한 말도 사실은 국민혁명의 굴절을 관찰하면서 나온 말일 터이다.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혁명을 변질시킨다
그러나 권력이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장개석이다. 그는 황포군관학교를 기반으로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또 이를 기반으로 북벌(北伐)을 성공시켰다. 그가 공화혁명의 계승자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방 공화파 무인(武人)들의 오래된 숙원인 북벌을 성공시킨 장개석이 다시 원세개를 닮아 가는 것은 무슨 역사의 장난인지 모르겠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혁명을 변질시키는 모양이다. 이후 공산혁명은 더욱 격화된다.
장개석은 손문보다 훨씬 유능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힘과 구호를 결합시킬 능력이 있었고, 사람들을 자기 아래 두는 방법도 알았다. 그러나 ‘제1차 국민당 전국대표대회’에 의해 공산당 인사들과의 합작(合作)을 이루고, 북벌에 성공한 장개석이 공개적으로 합작을 깨고 폭력적 방법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의 여정은 이미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한 혁명가 김산이 광주에서 이를 갈았던 대상이 바로 장개석이었다.
광주는 한 번 들를 만한 곳이다. 그곳은 혁명가들의 고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