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기행 ④

淸末의 실력자 李鴻章의 발자취를 따라서

  • 글 : 공원국 중국전문 역사저술가ㆍ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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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장이 세운 군수회사 강남제조총국 자리에는 ‘중국선박관’ 들어서
⊙ 태평천국의 난 진압하면서 입신, 25년간 북양대신으로 중국 정치·외교 주물러
⊙ “이홍장은 수십 년을 중신(重臣)으로 있으면서도 ‘국민들을 화합시켜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그저 자기를 위해서 이용했다” (양계초)
안휘성 합비에 있는 이홍장의 고거.
상해(上海)는 올 때마다 충격을 준다. 2000년대 초까지는 마치 잭의 콩나무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는 마천루(摩天樓)들이 사람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그래도 그 뒤에는 1980년대, 1990년대가 숨을 쉬고 있었다. 주인 얼굴만 보이는 구멍가게, 두 평짜리 미용실, 길에 앉아서 먹어야 하는 만두가게. 그리고 먹을 것은 상상 이상으로 저렴했다. 그때 먹을거리 때문에 중국이라는 나라에 정을 붙인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200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는 치솟는 자산 가격이 또 사람을 놀라게 한다. ‘90㎡ 450만원(한화 8억원), 호화장식’ 이라고 쓰인 부동산 점포 앞의 광고는 ‘작은 나라’ 한국의 소시민인 필자를 위압한다. 누가 거기에 사는지, 혹은 살게 될지는 궁금하지 않다. 다만 저 가격이 중국이라는 공동체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인가 하는 생각만 든다. 부동산 가격의 진실은 점쟁이도 모른다지 않은가? 상해는 특수한 곳이라서 그런가?
 
  황포(黃浦)강변을 따라 동북쪽으로 슬슬 움직이면서 오른쪽을 보면 상해의 엑스포 공원을 거의 구경할 수 있다. 엑스포가 끝난 지 얼마 안되는 지금, 전시장들 옆을 지나 멀리 보이는 다리들을 보면서 감회에 잠긴다. 바로 작년에 상해에 왔을 때는 숙소를 잡을 수 없었다. 엑스포 때문에 숙소가 없단다. 여인숙이라도 잡으려면 꽤 큰돈을 줘야 했고, 아예 외국인이라면 받지를 않았다.
 
  항상 유행에 뒤떨어진 인간들은 버스가 지나간 후에 손을 들 듯이, 가난한 과객(過客)을 괴롭히던 엑스포가 끝나고서야 나는 그 주변을 맴돌았다. 문이 잠긴 전시장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마치 언제 엑스포가 벌어졌나 하는 신산한 느낌마저 든다. 꼭대기에 전기 감전선까지 덧댄 철망을 넘어서는 고양이도 들어가기 힘들겠다. 전시장 중간쯤 좋은 위치에 커다란 건물이 단연 눈에 띈다. ‘중국선박관(中國船舶館)’.
 
 
  강남제조총국의 파산
 
이홍장.
  역사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중국 당국은 바로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이 있던 자리에 이 전시관을 세웠다. 강남제조총국이란 어떤 것인가? 1865년 양무(洋務)운동의 총아 이홍장(李鴻章)이 청(淸)나라를 서구(西歐) 열강과 같은 대열에 올려 보겠다고 만든 군수(軍需)무기 공장이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책임과 권리가 일치하지 않는 관독상판(管督商辦)식 경영, 즉 정부의 관리하에 민간인이 경영하게 되어 있는 이 공장은 비용에 비해 효율은 높지 않았다. 비록 이 공장은 돈 먹는 하마였지만 당시 청나라 정부의 희망이었다.
 
  ‘이제 우리도 열강(列强)처럼 강해져 보자.’
 
  거대한 포함(砲艦)과 대포를 만들어서 열강의 침탈을 막자는 구호 속에 양무운동이 시작되었고, 강남제조총국은 양무운동의 상징이었다. 그 당시 이 공장은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그리고 이 공장은 19세기 말, 청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이홍장이라는 개인의 자존심이 걸린 곳이었다.
 
  하지만 1894년 조선을 두고 벌인 청일전쟁에서 북양해군이 궤멸당했을 때 양무운동은 명(命)을 다하고 말았다. 그리고 강남제조국도 파산(破産)의 길을 걸었다. 청일전쟁의 전황은 처참했다. 북양(北洋)해군의 상징이었으며 동양에서 가장 큰 전함(戰艦)이었던 배수량 7000톤급 독일제 함정 ‘정원(定遠)호’는 일본군의 소형 전함들에 둘러싸여 계속 얻어맞고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났을 때 북양해군의 함정 5대가 보이지 않았고 북양함대 수병(水兵) 거의 1000명이 사라졌다. 일본군이 증원군을 두려워하여 물러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많은 배들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이홍장이 설립한 강남제조총국 자리에 들어선 엑스포 중국선박관.
  전시회가 끝난 지금 불 꺼진 건물들 사이에서, 침몰당하는 북양함대와 파산당한 양무운동, 그리고 결국 덩치 큰 고철만 만들어 내고 만 강남제조국의 운명이 생각나는 것은 지나치게 우울한 과객의 신경증일까?
 
  사람이 살 만한 크기의 집을 얻기 위해 평생 일해도 절대로 얻지 못하는 자금을 지불해야 한다면 콘크리트가 사람을 먹은 것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콘크리트 이상의 따뜻한 마음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양무운동이 파산할 때 절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비웃었다. 비록 고위층이 주동했다고 하나 그 운동은 분명히 나라를 살리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은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운동은 아니었다.
 
  이번에 이야기할 사람은 그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 이홍장이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이였나, 그리고 왜 19세기 말 중국, 아니 동아시아 전체를 조감하면서 그 사람을 불러야 할까?
 
 
  합비 가는 길에 《조선책략》을 읽다
 
  지금은 동부의 도시들 중에는 이름도 못 내밀 지경이 되었지만 청대(淸代)의 합비(合肥)는 큰 도시였다. 합비는 이번 편의 주인공 이홍장의 고향이다. 이제는 시속 300km를 달릴 수 있는 고속열차가 수시로 드나들어 상해와 합비의 거리를 어림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합비에서 바다까지는 거의 직선으로 천리나 떨어져 있다.
 
  날렵한 열차의 몸통은 21세기 중국의 지향점을 상징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오직 속도만을 위해 만들어 놓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앉은 자리가 고장 나서 삐걱거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열차의 현대미(現代美)는 거의 완벽했다.
 
  열차 안에 앉으면 철로변의 작은 집들이 쉭쉭 지나가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철로변에는 온통 새로 들어서는 건물들이다. 오직 커다란 건물들만 제대로 어림할 수 있다. 철로변 빌딩숲을 달리자면 마치 탄산칼슘으로 만든 거대한 거인들 사이를 장난감 차를 타고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 우악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인공미는 이제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은 이제 세계의 콘크리트 소비지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어울리지 않게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줄 그으며 읽는다. 이미 100년도 훨씬 더 된 책이다. 하지만 1880년 조선의 조야(朝野)를 격론의 장(場)으로 이끌었던 그 책은 지금 읽어도 새롭다. 알다시피 이 책은 일본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일개 참찬이었던 황준헌(黃遵憲)이 조선의 개방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그래서 원제목도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즉 ‘개인적으로 조선을 위한 계책을 한 번 내어 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개인이 황준헌 자신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 속에는 ‘이홍장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조선을 병탄할 뜻을 품자 위협과 권유로 막았다’는 꽤 직접적인 내용도 들어 있다. 이 책략이란 이홍장의 책략과 하등 다르지 않다. 황준헌은 이홍장의 복심(腹心)이었고, 이홍장은 계속 황준헌을 신임했다. 책은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구 위에 제일 큰 나라가 있으니 아라사(러시아)라 부른다.(地球之上, 莫大之國焉, 曰俄羅斯))”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 러시아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크며 또 세계에서 가장 탐욕스러운데, 추운 지방에 치우쳐 있어서 동, 서, 남으로 뻗어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유럽 각국들은 동맹을 맺어 대항하고, 중국은 여전히 크기 때문에 조선을 노릴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조선이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살 길을 요약하면, ‘첫째 중국과 친하며(親中國), 일본과 맺으며(結日本), 미국과 연계함으로써(聯美國), 자강을 도모하면 된다(以圖自强而已).’>
 
 
  “‘약한 나라에게 외교란 소용이 없다”
 
  책 원문의 어투를 살리면, ‘조선이 살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필자는 역설한다. 이런 어투 속에서 은연중에 필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 그리고 앞으로의 전도(前途)에 대해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 필자를 황준헌이 아니라 이홍장으로 바꾸어 읽어도 좋다. 그리고 저 대책을 조선의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것이라고 바꾸어 읽어도 좋다. ‘친중국’을 ‘친조선(親朝鮮)’으로 바꾼들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최소한 1880년까지 이홍장은 러시아를 막는 것을 외교의 우선지침으로 삼았고, 또 조선과 중국의 전도를 그렇게 비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게 되었는가? 불과 10여 년 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홍장 자신의 군대였던 북양군은 일본함정에 의해 부서졌고, 또 10년 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과 중국 땅에서 마음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 전쟁터에서 죽은 러시아와 일본 군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희생당한 중국의 민간인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다.
 
  상황은 더 나빠져 1910년 조선은 일본에 병탄당했고, 연이어 청나라 왕족이 흥기한 성지(聖地)인 만주는 조선이라는 발판을 디디고 있는 일본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었다. 러일전쟁 때 그는 이미 지하에 있었기에 그 참상을 보지 못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 자신이 말했듯이 ‘약한 나라에 외교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弱國無外交)’.
 
  다행히 가져간 책에는 당시 영남의 유생들이 주축이 되어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매국(賣國)의 독서(毒書)’로 규정하고 통렬하게 비난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도 붙어 있었다. 말끝마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끌어들이고, 대책도 없이 성현(聖賢)의 도(道)만 붙잡고 문을 걸어 잠그자는 주장은 《조선책략》의 명료함과 치밀함에 비하자면 고루함 그 자체다.
 
  하지만 <영남만인소>에는 있지만 이홍장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시대에 뒤처지고, 또 방향을 잘못 읽었지만 유생(儒生)들의 결기에도 상당한 진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과연 일본과 러시아를 우리가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한다면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
 
 
  태평천국군에게 처자식과 아버지 잃어
 
  안휘성 합비 이홍장 생가(生家)는 시(市) 중심지 회하로(淮河路) 널찍한 거리 중간에 있다. 이홍장 생전 이씨 가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커다란 거리의 반쪽은 모두 이씨가 차지하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이홍장 생가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높다란 지붕과 두꺼운 벽에 여섯 개의 마당을 거느린 당당한 사합원(四合院·성과 같이 사방이 빙 둘러쳐진 전통적인 중국의 가옥 형태)이다. 이홍장 이후 지금까지도 합비에서는 그만한 거물이 나오지 못했다. 이홍장의 가문은 합비에서 중상류의 일반적인 향신(鄕紳) 집안이었지만 이홍장 대에 와서는 합비 최고의 명문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출세의 출발점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봉기였다. ‘난세(亂世)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태평천국은 남방(南方)에 거점을 둔 향신 계급이 만주인 귀족들을 대신하여 정국(政局)을 주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원래 이홍장은 증국번(曾國藩)의 제자였다. 삶에 대한 통찰은 스승을 따를 수 없었을지 몰라도 재능 면에서는 단연 스승을 능가했다. 특히 그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출구(出口)를 제시하는 데 대단히 뛰어났다. 특유의 능글능글한 성격에다 전체 대국(大局)을 보는 안목이 있어서 어떤 일에도 좀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협상의 달인이었다. 아마도 그의 협상력이 바로 19세기 말 세계의 열강들이 중국의 외교와 이홍장을 동일시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재기발랄한 이 인사는 약관 24세에 이미 회시(會試·과거제하에서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2차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고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진사시험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우수한 성적을 올린 사람을 선발하여 한림원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하게 하는 관직)가 되었다. 한림원이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머리를 쓰는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능을 기반으로 곧 한림원 편수(編修)가 되었고 관직자로서 평탄한 승진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그의 삶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남쪽에서 시작한 기의(起義)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곧장 이홍장의 고향으로까지 옮겨갔다. 그는 지방으로 내려가서 민간인 군대를 조직하라는 명(命)을 받게 된다. 스승 증국번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그는 향신계급의 수호자였다.
 
  안휘순무(安徽巡撫) 휘하로 들어간 그는 곧장 자신의 군사적인 재능을 드러냈지만 그에게 지휘권은 없었다. 그러던 중 태평군의 반격으로 그는 처자식과 아버지를 잃고 말았다. 그때가 1854년이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는 난리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 것 같다. 태생이 유생 관리이며 난리의 와중에 가족까지 잃었으니 하층민들이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생각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그는 하층민들에 대한 분노 대신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하층민들의 봉기를 사전에 제압한다는 전통적인 대책에 몰입했다. 이로 보아 그는 바탕이 천박한 이는 아니었다.
 
 
  회군 창설
 
중국선박관에 전시된 19세기말 청나라 해군의 모습.
  이홍장은 매우 특이한 장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원래 남의 것이라고 해도 막상 이홍장의 손에 들어가면 그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술책(術策)의 대가였다. 원래 유가(儒家)에서는 술책을 하급으로 치지만 난세에서는 술책을 인정한다. 특히, ‘개화된 중국(中華)’이 아닌 ‘미개한 외국(外夷)’을 다룰 때는 술책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 술책이 이름하여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이 술책은 춘추(春秋)시대 진(晉)나라가 정교하게 발전시킨 후 거의 3000년 동안 무리 없이 작동해 왔다. 그리고 이홍장이 태평군을 진압하고 실력자로 성장할 때까지도 잘 작동했다.
 
  스승 증국번은 이홍장을 크게 보고 상군(湘軍·태평천국군을 진압하기 위해 증국번이 창설한 군대)의 주력을 떼어 줌으로써 그가 회군(淮軍)을 창설하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이홍장이 고향에서 회군을 창설했을 때 마침 태평군의 군사 실력자인 충왕 이수성(忠王 李秀成)이 대군을 이끌고 상해를 공략하고 있었다. 태평군의 엄청난 병력을 감안하면 상해가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그러나 당시 상해에는 태평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가 고용한 외국인 용병대인 상승군(常勝軍)이 버티고 있었다. 이홍장은 해로(海路)를 통해 회군을 이끌고 상해로 들어가서 상승군과 합류했다.
 
  서양식 총포를 가진 상승군은 태평군을 진압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청나라의 지휘체계 밖에 있었고 청나라 지휘관들을 우습게 보았다. 청군의 지휘관 입장에서는 열강을 등에 업고 있는 이 다국적(多國籍) 혼성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과 부대끼면서 전장(戰場)을 누빈 경험은 향후 이홍장 외교의 모태가 된다.
 
 
  북양대신이 되다
 
  이홍장은 ‘상대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는지를 알면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이이제이 전략의 연장이다. 상승군과 연합작전으로 회군은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화력(火力)이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용병의 의식수준은 용병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상승군의 미국인 대장 버지빈이 군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해의 중국인 은점(銀店)에서 행패를 부리고 사람을 때리자 그는 곧바로 버지빈을 직위해제했다. 미국인이 아니어도 영국인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바로 영국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국인으로 대장을 바꾸었다. 결국 용병이 원하는 것은 돈이고, 열강이 원하는 것은 이권(利權)이 아닌가?
 
  동부 각지에서 서서히 태평천국의 봉기가 진압되고 있을 즈음, 그는 이제 상승군을 완전히 해체시킬 계책을 세웠다. 태평군은 이미 이름만 남았으니 상승군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고, 또 오랜 전쟁에서 지친 이들이니 돈으로 회유하면 넘어올 것이다. 또한 상해 조차지(租借地)의 외국인들은 이 부랑아 같은 용병집단이 행패를 부릴까 내심 걱정이었다. 조건은 무르익은 것이다. 이홍장은 기꺼이 돈을 썼고 상승군을 해체시켰다. 중국생활에 질려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던 영국인 대장 고든도 이 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상승군을 해체하면서 핵심 병력 일부를 회군으로 흡수시켰다. 상군의 주요 병력을 받아들여 회군을 창설하고, 상승군의 핵심 병력을 받아들여 회군을 강하게 했다. 그래서 19세기 말 회군은 신식군대의 표본이 되었다. 이렇게 이홍장의 손에 들어가면 이홍장의 것이 된다. 향후 회군이라는 이 거대한 군대는 이홍장의 입에 무게를 실어 주는 배경이 된다.
 
  이후 이홍장은 자신의 회군을 기반으로 산동을 중심으로 일어난 염군(念軍)까지 격퇴하면서 조야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청조(淸朝)는 그에게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이라는 직함으로 화답했다.
 
  직예총독이란 수도 북경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들로 오늘날의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하북(河北), 하남(河南), 산동(山東), 산서(山西)의 일부 지역들을 다스리는 강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또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한 바다를 장악하고 통상업무 전체를 관장하는 외교부의 수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로 따지면 수도방위사령관, 경기도지사, 외교통상부장관을 겸직하는 것이다.
 
  이홍장은 무려 25년 동안 이 직위를 지키며 중국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니 그가 마음만 먹으면 사단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만주족 고위층들은 이홍장이 계속 청조에 충성하도록 공을 들였다. 또 수완이라면 이홍장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며 의뭉스럽기는 그를 능가하는 서태후가 이홍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두기 위해 애썼음은 당연하다.
 
  그는 향후 조선의 역사를 움직일 커다란 변수였다.
 
 
  淸, “조선은 베트남·대만과는 다르다”
 
  양반이라는 존재가 평민들 뜯어먹는 기이한 체제였지만 왜란·호란 후 18세기 말까지 조선 사회는 최소한 내부적으로는 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특이한 배들, 즉 이양선(異樣船)들의 출몰이 늘어난다. 이 배들은 19세기 중반에 심심치 않게 나타나더니 갑자기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왜놈에 오랑캐에 치인 지가 겨우 200년 남짓 지났는데, 알지도 못하는 오랑캐와의 통상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860년 북경조약으로 한반도와 접경하게 된 러시아도 통상요구에 합류했다. 통상이 목적인지 조선을 집어삼키는 것이 목적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기존에 아는 방법을 쓰는 것이 좋다. 조선은 통상요구를 막기 위해 이런 구호를 내걸었다.
 
  ‘우리는 중국의 번방이므로 외교란 없다(藩臣無外交).’
 
  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무턱대고 조약을 할 것인가? 그리하여 조선은 서양 열국의 통상요구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조공(朝貢)관계에 입각하여 이를 청국에 통보했다. 나름대로 실리도 있었고 명분도 있었다. 우리는 조공국이므로 중국의 허락 없이 외교관계를 틀 수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오랑캐’인 청국을 얼마나 존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와 왕은 최소한 필요한 때 청국에 공을 넘기는 정도의 재치는 있었다.
 
  그러면 청의 황제는 열강들에 ‘경고’했다. ‘우리의 번방(藩邦)을 건드리지 마라.’ 이런 행태는 중국이 티베트나 베트남 문제를 처리할 때 보였던 행태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홍장이라는 사람은 조선만은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홍장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청나라 대신들은 북경과 성경(盛京·심양) 보위를 전략의 제1 목표로 했다. 조선은 청나라의 발흥지인 만주와 접하고 있고, 인천에서 배를 타면 하루 만에 북경의 콧등인 천진까지 닿는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조선은 베트남·대만과는 다르다. 조선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면 중국이 위험하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아편전쟁 후 계속 열강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청나라의 대(對)조선 정책 기조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막상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날 조짐이 보일 때 청 정부는 한 발짝 물러났다. 서구(西歐) 열강의 함포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 박해를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열겠다고 결심한 프랑스는 청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압력을 넣어 달라고 부탁하고, 청은 일단 거부한다. ‘조선은 명분상의 조공국으로 구체적인 내정에는 간섭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실은 조선을 지원하고 싶지만 프랑스와의 싸움에 말려들기는 싫었던 것이다.
 
  당시 청은 조선을 저버릴 수도 없고, ‘종주국’으로 의무를 다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입장이었다. 양요 이전에 청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조불(朝佛) 양국의 화의(和議)를 주선하고 선교사 박해에 관해서 진상조사를 먼저 해 볼 것을 요청하는 것이 전부였다.
 
  프랑스인들은 그 관계를 간파했다. 그리고 병인양요는 발생했다. 조선은 이 약한 ‘형님’이 미덥거나, 또 그들을 실제로 존경해서가 아니라 실리적인 측면에서 붙잡고 싶었지만 형님은 생각보다 더 약했다. 조선도 미궁(迷宮)으로 빠져들었다. 방패가 되어 주지 못하는 ‘종주국’(宗主國)과의 관계를 끝낼 것인가, 그대로 가져갈 것인가?
 
  그러나 비록 화력은 형편없었지만 정신 무장은 중국의 해안을 지키던 수비병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조선군은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축출하고 말았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터졌다. 이번에는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군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미군 아시아 함대였다. 싸움은 예상대로 일방적이었다. 90문의 함포와 조선의 재래식 대포가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조선은 굴복하지 않고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킬 자신이 없던 미군은 조선이 버티자 함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朝美수호조약 주선
 
  이때는 이미 이홍장이 청의 외교라인을 장악한 때였다. 조선은 다시 청에 미국공사에게 직접 통상요구를 못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거부당했다. 그럴 실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홍장은 전쟁 상황을 정부에 그대로 보고하면서 예의주시할 뿐 직접 개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미국의 국력이 유럽 열강들을 넘어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가장 공을 들이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 의지가 《조선책략》에서는 ‘미국과 연계한다(聯美)’로 나타나 있다.
 
  이때부터 이홍장은 조선 정부의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섭하면서 조선의 외교정책에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 이홍장은 병인양요 시절의 청나라 정부보다는 훨씬 예리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조선정부에 일관되게 조언한 방안은 ‘서양 각국과 적극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자면 동시에 일본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중국의 최서쪽 변경 신강(新疆) 이리(伊梨)에는 러시아군이 진주하고 있었다.
 
  이홍장은 ‘서양 각국이 원하는 것은 오직 통상이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때는 그도 약간 순진했던 듯하다. 그는 조선조정과의 사적(私的)인 관계를 계속 진전시켜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종(高宗)과 직접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1880년대 초반 서쪽 변경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881년 이리조약으로 서쪽에서 러시아의 위협은 줄어들었고, 티베트나 베트남 등의 문제가 중국 본토로 옮겨올 것 같지는 않았다.
 
  드디어 1882년 이홍장은 대조선 외교의 꼭지점을 찍는다. 그는 일관되게 조선을 미국과 연계시키려 했다. 그리고 미국을 통해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1882년 그는 조선과 미국의 통상조약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미국 측에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임을 명문화(明文化)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앞으로 조선과의 관계에 걸림돌이 될 조항들을 조약 안에 넣기를 거부했다. 이홍장은 이 조항을 계속 고집했고, 결국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의 별도 조회문(照會文)에다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라는 문구를 기어이 집어넣었다. 그는 일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청의 내정간섭
 
이홍장의 수족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던 원세개.
  이후 동쪽에서 자신감을 찾을 일들이 속속 벌어지고 있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자 조선조정은 청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대체로 작은 나라들은 자국(自國)의 난리에 타국(他國)을 끌어들임으로써 망한다. 그때 조선으로 들어온 인물이 바로 원세개(袁世凱)다. 그는 곧바로 군란의 배후로 대원군을 지목하고 그를 감금해서 청으로 압송해 버렸다. 화력도 우세했지만 배경이 든든한 이 청나라 개입군은 군란의 책임자들을 재빨리 처형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이홍장은 원세개라는 인물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술수에서는 이홍장에 버금갔으나 속이 검기로는 몇 배나 더한 인물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청에 또 한번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원세개는 왕궁을 포위하고 김옥균(金玉均) 등 급진 개화파를 실력으로 눌렀다. 개화파가 극심한 타격을 입고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이 일은 일단락되었다.
 
  청은 이제는 완연히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이 더 위협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홍장은 일본을 제어하기 위해 원세개를 신임했다. 이 원세개라는 야심가는 조선을 기반으로 본국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조선의 조정을 완전히 장악할 계획을 착착 수행해 나간다.
 
  이 개입정책은 청일(淸日)전쟁까지 쭉 이어진다. 그 기조가 이어진 것은 1880년대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시 개입에 성공하면서 얻은 자신감과 무관하지 않다. 청불(淸佛) 전쟁에서 베트남 전선에서 이룬 몇몇의 승리, 동남해안의 포대에서 프랑스군을 저지하고 조약을 맺은 것, 북양해군의 창설 등도 그 자신감의 기반이 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외국을 불러들이는 일에 길들여진 조선의 대신들은 다시 청나라를 찾았다. 이홍장의 촉수이면서도 조선에서만은 이홍장보다 더 큰소리를 내고 있던 원세개는 개입을 촉구했다. 이홍장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일본은 상업지구의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태는 청일전쟁으로 치닫는다. 결과는 북양해군의 대패(大敗)였다.
 
  청일전쟁으로 이홍장의 위세는 한풀 꺾였고, 조선은 이제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길로 한 발짝씩 가게 된다.
 
 
  이홍장 외교의 파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기습으로 침몰하는 고승호. 청일전쟁에서의 패전은 이홍장이 추진했던 양무운동의 파산을 이미한다.
  청일전쟁으로 북양해군이 몰락하기 이전까지, 아니 그가 죽기 전까지 이홍장은 청나라 외교의 대명사였다. 열강들은 청나라 황제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홍장은 알았다. 조선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홍장의 뛰어난 식견들은 모두 경험으로 얻은 것이다. 경험으로 순탄히 굴러가는 나라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격동기 역사를 이끌 수는 없다.
 
  우선 그는 태평천국 기의의 와중에서 서양인들의 화력을 이용한 후 서양인들을 이이제이의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이 없는 나라에 이이제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계속 영토를 떼어 주는 조건으로 열강들을 무마했다.
 
  러시아가 신강으로 들어오자 그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일본까지 이용하려 했고, 그러나 막상 일본의 실체가 밝혀지자 그는 러시아의 간섭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몇 해도 안되어 일본과 러시아는 중국의 어떤 권고도 무시하고 중국 땅에서 중국인들을 죽이며 싸웠다. 물론 조선인의 처지는 더 비참했다.
 
  처음에 조선이 서양인에게 강경하게 버틸 정도의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또 조선에서 원세개가 몇 가지 내정간섭을 통해 조선을 주무르자 조선을 완전히 속방으로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간섭들은 일본에 구실을 주었다.
 
  이론은 경험 이상이어야 한다. 1910년대가 되면 중국이나 조선이나 국제사회에서의 처지는 마찬가지가 된다. 중국이 조선에 훈수를 둘 여지는 완전히 없어졌다. 그리고 조선을 기반으로 일본은 중국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때는 그야말로 피압박 민족이 된 것이다.
 
  대국이 나쁘게 돌아갈 때 작은 성취는 언제나 독이다. 속방정책은 분명 중국과 조선 모두에 독이었다. 중국은 속방을 지킬 힘이 없었고, 조선은 속방이 되어 중국의 지원을 받는 허황된 꿈을 꾸게 되었다. 이홍장은 미국에서는 스스로 국제주의자라고 떠벌리면서 조선에서는 아류(亞流) 제국주의자 행세를 한 것이다.
 
 
  내부의 힘을 모으지 못하다
 
  그리고 이제 정치로 돌아가 보자.
 
  《좌전》(左傳)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진(陳)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한 대목이 있다.
 
  “진나라는 망할 것이니, 그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벼를 거두어 쌓아 두고, 성곽을 잘 정비해 놓고는 이 두 가지를 믿고 그 백성들을 살피지 않고 있습니다. 10년을 못 넘길 것입니다.”
 
  그리고 《순자》(荀子) <국부>(國富)편에 작은 나라가 살아갈 방도에 대해 폐부를 찌르는 글들이 있다.
 
  <그러니 전야(田野)가 황폐한데도 국가의 곡식 창고가 실하고, 백성이 허한데도 부고가 가득 차 있다면, 이를 두고 국가가 위태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 근본을 자르고 그 원천을 말리고서 말단에다 합치면서도 군주와 재상이 그 해악을 모른다면 이는 뒤집혀 멸망하기를 서서 기다리는 것과 같다.>
  (下貧則上貧,下富則上富. 故田野縣鄙者,財之本也. 故田野荒而倉廩實,百姓虛而府庫滿,夫是之謂國蹶. 伐其本,竭其源,而並之其末,然而主相不知惡也,則其傾覆滅亡可立而待也.)
 
  이어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강폭한 나라를 재화와 보화로 섬긴다면 재화와 보물이 다 닳아도 친교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맹서로서 섬기려 한다면 하루도 안되어 맹서를 배반할 것이다. 나라를 떼어 바치는 것으로 섬기려 한다면, 땅은 한정이 있어도 욕심은 끝이 없을 것이다.>
  (事之以貨寶,則貨寶單,而交不結. 約信盟誓,則約定而畔無日. 割國之錙銖以賂之,則割定而欲無厭. 事之彌煩,其侵人愈甚,必至於資單國擧然後已.)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내부 상하의 힘을 이끌어 내야 강폭한 나라에 대항할 수 있다. 이홍장은 그렇지 못했다. 명백한 내정(內政)의 실패였다. 그가 서태후(西太后)의 50세 생일을 기념하는 이화원(和園) 만수산(萬壽山) 조성공사에 기부한 돈이 200만냥이었다. 그 돈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합비에 있는 이홍장의 향당(享堂)은 지금 남은 규모가 4000평이나 된다. 망해 가는 나라 대신의 묘역(墓域)이 그렇게 클 필요가 있는가? 무기공장들이 파산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관(官)의 착취와 부정축재였다. 그 돈은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비록 그가 자강(自彊)을 이야기했으나 스스로 모범이 되지 못했음은 명백하다.
 
  양계초(梁啓超)는 이홍장을 제갈량(諸葛亮)과 비교하며 “충신이다”라고 높이 산다. 그러나 그는 이홍장과 제갈량의 다른 점을 이렇게 꼬집는다.
 
  “제갈량은 궁벽한 촉(蜀) 땅을 다스리면서도 선비들을 하나로 모아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했고, 백성들을 스스로 힘쓰게 했다. 그러나 이홍장은 수십 년을 중신(重臣)으로 있으면서도 ‘국민들을 화합시켜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不能輯和國民), 그저 자기를 위해서 이용했다(使爲己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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