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들은 우리 땅을 다 가져가고, 우리 종교를 없애려고 한다”
(사천 타르첸에서 만난 티베트 청년)
⊙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나요?” (운남 샹그릴라에서 만난 티베트인 토호)
⊙ 몽골, 청나라, 영국 등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 수백 년간 신음
(사천 타르첸에서 만난 티베트 청년)
⊙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나요?” (운남 샹그릴라에서 만난 티베트인 토호)
⊙ 몽골, 청나라, 영국 등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 수백 년간 신음

- 리캉초원의 티베트화한 몽골인들. 몽골과 티베트는 라마불교를 매개로 연결됐다.
그러나 이런 풍경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지나고 나면 배변을 참던 끔찍한 고통도 모두 아름다워 보인다. 모두 대충 염치없이 살았고, 여유가 생기면서 서서히 염치를 느낀다. 한겨울 고원(高原)에서 창문을 열고 연방 담배를 피우는 운전기사. ‘오, 제발!’ 그러다가도 담배 한 개피 건네면서 씩 웃을 때는 원시적인 숫기가 느껴진다. 그럼 나는 냄새 나는 고량주를 먹으면 되지 뭐. 고량주 냄새에 기가 질린 애연가가 얼굴을 찌푸리면, 나도 “형씨, 한잔하셔” 하고 넘긴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워지지 않는 추억들이 있다. 이런 기억들은 모두 권력과 관련된 것들이다.
고립된 티베트 고원
2008년 4월 청해(靑海) 서녕(西寧)에서 결국 티베트 고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북(北)으로 기련산(祁連山)을 넘어 사막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해 3월 티베트 라싸 봉기는 고원을 다시 고립시키고 말았다. 모든 길이 막혔다. 공안(公安: 경찰)이 버스 위로 올라온다.
“신분증을 내시오.”
모두 신분증을 꺼낸다. 나의 건너편 앞자리에 앉은 머리가 누런 서양사람 부부도 순순히 여권을 보여준다. 누구도 “왜요?”라고 묻지 않는다. 나의 뒷자리에 있던 한 어수룩한 사내는 신분증이 없었다. 신분증 번호를 불러주고, 어째서 못 가지고 왔는지 주저리주저리 설명한다. 그리고 내 차례.
“신분증.”
“배낭에.”
“봅시다.”
“좋을 대로.”
나와 뒷자리에 앉은 사나이, 그리고 공안 둘이 버스 짐칸으로 향한다. 느릿느릿 여권을 꺼내서 보여주고, 다시 짐을 챙긴다. 그리고 물어본다.
“왜 신분증 검사해요?”
“폭동이 일어났소.”
“여기도 일어났소?”
“아니, 라싸에서.”
그 귀찮다는 표정이 나를 더 짜증나게 한다. 그리고 신분증이 없는 사나이의 마대 자루도 검열한다. 우악스럽게 꺼내는데 사내가 갑자기 기겁을 한다. 마대 자루 안에는 피단(왕겨로 싸서 발효시킨 달걀이나 오리알)이 들어 있었다. 조심하지 않고 꺼내다 보니 이 피단들이 깨어져서 비린내가 진동한다. 그때 그 사내의 망연한 표정과, 어린 공안들의 당황한 표정과, 순식간에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순간적이고 암묵적인 합의, 그 모든 것이 머리를 짓눌렀다. 순순히 신분증을 내미는 저 서양인들이 괜스레 얄밉다. 달걀이 깨져도 화내지 않는 저 사내는 측은하기보다는 화를 돋운다.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는 저 공안들, 그 까칠한 목소리가 오히려 가엾다. 그리고 결국 나 자신에게 화를 낸다. ‘나약한 놈.’ 버스는 움직이고, 싫어도 들어야 하는 음악비디오 소리가 들린다.
<내 고향은 시가체, 거기에는 아름다운 강 한 줄기
엄마가 말했지. 산을 뒤덮은 소와 양. 그건 보살님이 보우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허리와 눈언저리가 동시에 시큰하다가 바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보살님은 왜 사람은 보우해 주지 않으실까? 나는 시가체에 가야 해, 꼭 가야 한다구.’
“중국인들은 우리 땅을 다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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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지역 동부티베트(캉바)를 같이 돌아다닌 오토바이 기사의 아내와 아들. 전형적인 캉바 미인이다. |
고산증 속에서 밤을 보내는 일은 상상 이상의 고역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고원의 바람은 거세진다. 통나무를 포개어 놓은 벽으로 바람이 사정없이 밀려오고 산소 부족으로 머리는 혼수상태다. 이 사람들에게 바람은 친구다. 그러나 낮은 곳에 살던 나에게 바람은 적(敵)이다. 뭍으로 튀어나온 물고기마냥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나를 보고 주인 아주머니와 딸은 분주히 움직인다. 아스피린, 티베트식 물약, 그리고 알 수 없는 처방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저씨가 술병을 들고 올라온다. 술이라는 소리에 기절해서 조금 잤던 것 같다.
강인하고 검은 피부에 여유로운 아주머니. 그리고 객(客)이 어떻게 될까 안절부절못하는 어린 딸.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객의 침대로 술을 들고 올라오는 아저씨. 나와 티베트 사람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고산증은 점점 심해지고 더는 견딜 수 없어 아침에 차를 불러 하산(下山)했다. 겨우 한 시간도 안되어 머리는 맑아진다. 오, 낮은 곳에 사는 신체의 한심함이여!
내려가는 길에 고향에서 방학을 보내고 성도(成都)로 돌아가는 타르첸의 청년을 태웠다. 떡 벌어진 어깨에 짙은 눈썹이 한눈에도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산을 넘을 때 타르초(불경을 적은 얇은 종이)를 날렸다. 그리고 강한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중국인들은 우리 땅을 다 가져가고, 우리 종교를 없애려고 해요.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에요.”
한족(漢族) 운전사는 무슨 말인지 모르니 열심히 차를 몬다. 얼마 후 짧은 영어를 버리고 그는 중국어로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은 거짓말쟁이예요. 믿을 수 없어요.”
그래도 운전기사는 대수롭지 않은지 그냥 유행가 가락에 심취해 있었다. 말싸움도, 대단한 대립도 없었다. 높은 곳에 보리가 노랗게 익고 있을 때, 울퉁불퉁한 산길은 낭만적이었다.
샹그릴라에서 만난 티베트 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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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그릴라의 티베트인 토호들. 맨 오른쪽이 제건화다. |
대리(大理)에서 북쪽 여강으로 출발하기 전날 싸구려 여관 옆 식당에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어렵사리 술친구 한 명을 사귀어 놓고 이제 밖으로 나가 술 한 잔 하려던 차에 건너편에 새까만 얼굴에 눈동자는 더욱 새까만 노인이 다가와 전화번호를 하나 건네준다.
그는 자기 이름을 단춘초칭(丹春楚稱)이라고 한자(漢字)로 써 주고는, 자기 동생의 전화번호를 함께 적어 놓았다. 샹그릴라(香格里拉)에 가면 연락을 하라고 한다. 동생은 사업을 하기 때문에 중국어를 잘한다고 한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고, 그냥 식당에서 눈이 마주친 사람이다. 왜 동생을 만나 보라고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겨울의 고원은 혹독하다. 샹그릴라에 도착해서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니 과연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6척이 넘는 장신(長身)에 얼굴은 형처럼 흑단으로 만든 듯하고 중국어는 유창하기 그지없다. 그는 대리석 광산을 가지고 있는 지방의 거부(巨富)였다. 그는 이미 제건화(齊建華)라는 중국식 이름을 쓰고 있었다. 야크 고기 요리를 시키고, 지방 세무공무원인 친구 둘을 불렀다. 롭쌍 돈둡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처음 한 말은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나요?”였다.
그들과 나눈 시사(時事) 대화는 모두가 충격이었다. 그들은 세계정세를 낱낱이 듣고 있는 지방의 토호(土豪)들이었다. 마치 성곽 같은 집에서 차를 마신 후 나를 여관으로 보내주면서 제건화가 해준 말은 그의 현대적인 시사상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여행 중에 장족(藏族·티베트족)만 믿고, 다른 사람들은 믿지 마세요.”
“왜요?”
그의 대답이 생뚱맞다.
“장족은 불교도(佛敎徒)니까요. 불교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의 말이 사실인 것도 같다. 그 후로 거짓말하는 티베트인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술 마시는 라마, 매 맞는 라마
거의 한 시간마다 물을 보충해야 하는 수랭식(水冷式) 차(車)를 타고 남쪽에서 올라와 동(東)티베트의 중심지인 참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쓰리다. 기사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따라 들어간다. 언제나 그렇듯이 맥주 몇 병을 사서 들고 버스 기사들 자리를 비집고 들어간다. 맞은편에서는 라마(티베트불교 승려) 한 명이 어떤 여인과 술 한 잔 기울이고 있다. 기사들이 하는 말을 듣는다.
“라마가 어떻게….”
나는 거든다.
“라마면 어때서요.”
다음날 저녁 한 식당에서 특이한 인간들을 만났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단출하게 주문했다. 그 형편없는 중국식 야채볶음을 먹는 차에 라마 한 명이 들어온다. 탁발을 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주인이란 작자가 갑자기 라마를 발로 마구 찬다. 돈이야 저한테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안 주면 그만인데 발로 마구 차다니. 안주인이란 여자도 표독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한다. 영업이 안되는 자기 식당에다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구잡이로 걷어차인 라마도 황당한 표정으로 물러난다. 도무지 이런 패악(悖惡)한 인간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 식당 주인은 그 부박(浮薄)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들고 나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한다.
“일을 하지 않고. 되겠어요?”
나는 말없이 숟가락을 놓고 그냥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란 고작 속으로 ‘그대 식당에 오늘 손님은 없으라’ 하고 기도하는 것뿐.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맞아야 한단 말인가? 명색이 장족(티베트족) 자치구라는 곳에서 맞고 돌아다니는 스님이 있다니.
몰래 티베트로 들어가다
지금은 청장철로(靑藏鐵路)라는 것이 깔려서 철도편으로 라싸까지 바로 들어가지만 거의 7~8년 전에 열차는 꺼얼무(格爾木)까지만 갔다.
꺼얼무에서 라싸로 들어가려면 입경(入境) 수속을 밟아야 한다고 한다. 수속 없이는 표를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금요일에 공안국 외무과에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동서부에서 마음대로 라싸를 드나드는 때였으니 거금(巨金)을 들이는 수속은 그저 형식에 불과했고, 대단한 긴장도 없었다. 그러나 꼬박 사흘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편법을 쓸 수밖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얼굴을 벌겋게 문지른 후 군중들 사이에 끼여 버스표를 사러 갔다. 앞만 보고 간다. 그러나 부처님의 신통을 타고났는지, 검표원 하나가 나를 부른다.
“어이, 거기 외국 사람.”
나는 모른 척한다. 그러자 아예 다가와서 보더니, “외국 사람은 입경허가서를 받아 오세요”라고 쌀쌀맞게 한마디 한다. 첫 번째 편법이 실패해도 나의 편법 목록은 아직 빼곡하다. 6인용 미니 무허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다. 기사와 나는 말을 맞추었다. 이제부터 나는 신분증을 잃은 광동성(廣東省) 불산(佛山) 사람이다.
사실 광동 불산 사람이 될 필요도 없었다. 한밤중 검문소를 지날 때 이미 나는 담요에 싸인 산송장이었다. ‘차라리 검문소에서 내려 치료를 받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이었다. 라싸로 들어가는 마지막 고개에서 기사는 산모(産母)처럼 나를 격려했다. “고도(高度)가 낮아져요.”
끔찍한 고산증으로 라싸에서 처음 사흘 동안 죽 한 끼 만두 다섯 개로 버텼다. 그러나 행복했다. 라싸는 고요했지만 자유의 분위기로 넘쳤다. 그때는 실로 낭만의 시기였다. 10년도 안되어 또다시 티베트에 봉기와 피바람이 불어닥칠 줄은 나도, 그들도 몰랐다.
티베트 불교와 몽골 칸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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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룡설산. 남쪽에서 북쪽으로 저 산을 넘으면 티베트 문화권이다. |
심지어 역사는 현대의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분쟁을 해결하는데 순수하게 역사가 도움을 주는 경우는 적다. 우리가 읽는 역사는 사실(事實) 자체가 아니라 해석을 거친 것이며, 분쟁에 집중하고 있는 당사자는 누구도 상대의 해석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티베트와 중국의 싸움에서 고대사가 등장하는 배경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난해한 주제를 다루면서 필자는 고대를 배제할 것이다.
티베트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달라이 라마. 이 명칭은 몽골어 달라이(바다)와 티베트어 라마(스승)의 합성으로, 티베트에서 온 이름이 갸쵸(바다)인 승려에게 몽골의 알탄 칸이 진상(進上)한 것이다. 그 후 달라이 라마는 몽골 군주의 지원을 받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首長)이 되었다. 달라이 라마도 알탄 칸에게 ‘전륜왕’(轉輪王·불교에서 올바른 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칭호를 보냈다. 칸과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공생(共生)관계를 맺었다. 1578년의 일이다.
속세(俗世)의 전륜왕과 승가(僧家)의 법왕(法王)의 이상적(理想的)인 만남은 불교도 국가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추구해 오던 현실정치의 수단이자 메타포였다. 쿠빌라이 칸과 티베트 불교 승려 파스파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무력(武力)과 이념의 만남은 모든 전근대(前近代) 국가들이 추구했던 것이며, 오늘날의 국가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중국 본토에서 몽골 고원으로 쫓겨난 원(元)나라의 후예들은 칭기즈칸의 영예를 다시 찾기는커녕 오히려 뿔뿔이 갈라져 서로 싸웠다. 그 싸움의 와중에서 몽골을 다시 통합한 사람이 알탄 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쿠빌라이 칸의 권위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쿠빌라이 칸의 파스파처럼 등장한 사람이 바로 소남 갸쵸, 제3대 달라이 라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법사(法師)로서 몽골 칸에게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는 권위를 주었다면, 칸은 최강의 무력과 재력을 지닌 시주자로서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 불교 수장의 자리를 주었다. 몽골 칸과의 결합으로 겔룩파(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종파)의 수장 달라이 라마는 이제 일개 종파의 수장이 아니라 티베트 불교의 수장이 되었다.
인구가 희박한 티베트 고원에서 사원(寺院) 중심으로 경제가 편성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드넓은 몽골 초원에서도 사원을 중심으로 시장(市場)이 서고, 정착지가 생기고, 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몽골 고원에서 알타이, 준가르 분지, 코코노르(청해·靑海)와 흑룡강까지 장악하고 있는 몽골 군주를 후원자로 둔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부에서 종파 간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칸을 불러 해결할 수 있었다.
몽골고원에서 비록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군주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약한 명(明)나라를 상대로 했기 때문에 초원은 몽골인들의 땅이었고, 티베트는 여전히 중국인들에게는 미지(未知)의 영역이었다.
만주족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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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쇼트부의 수장 라짱 칸을 앞세워 티베트를 평정한 강희제. |
티베트가 중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이 신흥 왕조 청(淸)의 지도부는 이미 몽골을 통해 만주까지 전파되어 있던 티베트 불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多數)가 이 교파의 신자였다.
그러나 만주족은 몽골족보다 더 철저한 현실주의자의 입장에서 티베트 불교의 양면성(兩面性)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흉노(匈奴) 이래 중원제국의 가장 큰 적수(敵手)인 초원 민족들이 티베트 불교 교단 아래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티베트 불교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티베트 불교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티베트 불교는 청 제국 아래 복속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티베트 불교와 몽골 세력이 결합하여 제국에 위협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국은 티베트에 대해 존중과 회유라는 두 가지 방편을 병용한다.
군사적으로는 이미 미약해진 티베트는 몽골과 청 제국 사이에 끼인 존재였다. 청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몽골 부족에게 티베트 불교 수호자의 권위를 줌으로써 몽골의 통합을 막고자 했고, 몽골의 각 부족들은 티베트 불교의 권위를 선취(先取)함으로써 몽골의 패권(覇權)을 쥐려고 했다.
청 제국이 한참 성장하고 있던 때, 몽골 초원에서도 세력판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동(東)몽골이 신흥 청나라에 점점 더 종속되어 가고 있을 때, 서(西)몽골을 하나로 묶어 알타이-천산-몽골고원까지 초원을 자신의 발 아래 통합하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티베트에서 불교를 공부한 갈단이다. 그는 불교에 대한 충성, 몽골 군주로서의 야망, 개인적인 능력 등에서 모두 선대(先代)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마찬가지로 야심 찬 동방 신흥 제국 청의 황제 강희(康熙)와 맞닥뜨리는 것은 운명이었다.
초원의 覇者 갈단
몽골의 칸들을 빼면 티베트의 근대사를 설명할 길이 없기에 갈단과 그 이후의 몇몇 칸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갈단은 오이라트(서몽골)의 한 부족인 준가르부(部) 군주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릴 때 티베트로 건너가 승려 수업을 받았다. 갈단이 티베트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던 시절 아버지 바아투르 홍타이지가 사망하고, 갈단의 형 셍게가 군주 지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군위(君位)를 둘러싼 암투의 와중에 배다른 형제인 세첸 칸에게 암살당했다.
이미 장년(壯年)이었던 갈단은 달라이 라마를 찾아가 준가르로 돌아가 복수하겠다고 전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를 허락했다. 이 정력적인 몽골의 왕자는 돌아오자마자 형제의 복수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몽골 여러 부족들을 거의 모두 그의 발아래 두었다. 천산(天山)의 골짜기를 따라 카자흐 초원으로 들어가 카자흐 유목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타림분지 일대의 오아시스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마치 차카타이 칸국이 티베트 불교의 깃발을 들고 다시 등장한 것 같은 형세였다.
달라이 라마의 입장에서는 초원에서 가장 강력하고 호전적(好戰的)인 부족의 수장을 시주로 둔 격이었으므로 라싸에서 그의 권위가 올라갔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준가르부의 수장을 후원인으로 두면서 티베트 불교는 끊임없는 외부 세력 개입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그 외부 세력 중에서 청이 단연 선두였다.
몸통(티베트)보다 꼬리(개입세력)가 커진 이 형국은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라는 매력적인 이데올로기의 보물을 선점(先占)하기 위한 외세(外勢)의 노력은 무려 수백 년간 계속된 이 몸통과 꼬리의 역전(逆轉)현상을 몇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세계로 잠깐 들어가 보자.
준가르부의 티베트 정복
갈단은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내부는 물론 몽골 고원 전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1686년 그는 동몽골 티베트 불교의 수장으로 역시 활불(活佛)로 숭상되던 젭종단바 쿠툭투가 달라이 라마에게 불경(不敬)했다는 구실을 들어 동몽골의 할하를 침공했다.
갈단이 진정 달라이 라마에 대한 경외감으로 할하를 공격했는지, 아니면 청나라에 대항하여 전체 몽골을 통합하기 위해 공격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아는 일이다. 그러나 할하 공격은 동몽골의 안정을 제1 전략목표로 삼고 있던 강희제의 개입을 불러왔고, 이는 곧 3차에 이은 청군의 대규모 원정으로 이어졌다.
명나라와는 달리 몽골인의 전술을 잘 이해하고 있는 만주인들이, 중국의 대규모 자원을 등에 업고 대포를 끌고 초원에 개입하자 갈단은 궁지에 몰렸다. 결국 1697년 쫓기던 갈단이 자결하고 사건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강희제는 제6대 달라이 라마와 그 섭정(攝政)이 갈단의 준가르부를 지원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확증은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강희제의 입장에서 그런 추측은 충분히 가능했다.
강희제는 자신이 티베트 불교의 후견인(後見人)이 되고 또 이 권위를 통해 몽골을 안정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호적수인 준가르부 대신 청해의 호쇼트부를 지지했다. 청나라의 지원을 얻은 청해 호쇼트부의 수장 라짱 칸은 신속히 라싸로 진군해서 6대 달라이 라마를 잡아 북경(北京)으로 압송하는 동시에, 강희제의 명(命)으로 새로운 6대 달라이 라마를 세웠다.
그러나 갈단의 조카로서 청조(淸朝)와 결탁해 갈단의 배후를 위협해서 그의 몰락을 재촉했던 준가르의 새 군주 체왕 랍단은 일단 군주가 되자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모두 재능이 있었고, 준가르부는 오이라트 여러 부에서 가장 권위가 높았다.
1717년 그는 자기 휘하의 최고의 군사전략가인 체링 돈둡을 불러 야르칸트와 카쉬가르에서 쿤룬산을 넘어 라싸로 진군하게 했다. 물론 라짱 칸이 세운 달라이 라마에게 불만을 품은 라싸의 일부 반대파들 요청도 한몫을 했다.
러시아 및 청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연전연승한 이 준가르 최정예병은 별도의 보급도 없이 행군로에서 개를 잡아먹으며 라싸로 접근했다. 혹독한 고원을 넘어온 이들을 맞아 라싸는 저항했으나 잔혹하게 응징당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모두 잡혔을 뿐만 아니라 사원들은 처절하게 약탈당했다. 청의 서녕(西寧) 주둔군이 엉겁결에 출동했지만 준가르 군대에게 포위당해 몰살당했다. 친구가 적이 되는 것은 이렇게 한순간이었다.
淸의 개입
그러나 이번에는 티베트 내부에서도 격렬한 게릴라 투쟁이 벌어졌다. 티베트 게릴라들이 준가르군의 후방을 괴롭혔고, 강희제는 호쇼트부 라짱 칸의 호소에 응해 서녕과 사천의 주둔군을 움직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1720년 강희의 14번째 아들 윤제(胤)가 서녕에서 압도적인 대군(일부 기록에는 30만이라 적혀 있다)을 모은 후, 옌신(延信)과 갈비(?爾弼)의 분견대를 먼저 출격시켰다. 이미 티베트 게릴라들에 의해 후방이 막히고, 동쪽과 북쪽에서 시위하고 있는 압도적인 대군의 위세에 눌려 준가르군은 퇴각했다. 이로써 청나라 황제의 군대가 티베트 본토에 발을 디디게 된다. 좀 더 적극적인 개입이었다.
이후 티베트 고원은 잠시 안정되는 듯했다. 대(對)준가르 투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칸체나스와 폴하나스가 귀족 대표들로 연립(聯立)정부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지도자로 등장한 칸체나스는 곧 귀족들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암살당했다. 폴하나스는 즉각 반격을 감행했고, 칸체나스 암살자로 지목된 귀족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이때도 청군이 개입했고 친청(親淸) 폴하나스 정권이 만들어졌다. 명목상으로 폴하나스와 청조 관리들이 위원회를 만들어서 함께 정권을 행사했지만, 사실상 티베트 내부의 일은 티베트인들이 관리했다.
1747년 폴하나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세속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다시 준가르부와 결탁하여 티베트에서 실권(實權)을 잡으려 했다. 그는 청조의 관리들에게 살해됐다. 그러자 그의 추종자들이 청조의 관리들과 가족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제7대 달라이 라마였다. 그 후 청조는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여 티베트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기울게 된다. 이리하여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 지주(支柱) 역할로 하는 티베트 특유의 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관리들이 티베트에 상주(常駐)하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티베트 정국(政局)의 안정을 가져왔고, 달라이 라마의 권위도 안정화되었다.
그 후 몽골은 중앙유라시아 최강자(最强者)가 된 청의 대포 앞에는 무력(無力)해졌다. 또한 상시적(常時的)인 원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호전적(好戰的)인 건륭제(乾隆帝)를 건드릴 사람도 없었다. 문제는 몽골 칸 대신 티베트의 후견인이 된 청이 더 무서운 상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외세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청의 네팔 원정
건륭제의 치세(治世) 동안 청나라의 티베트 지배는 거의 형식적인 수준이었던 것 같다. 건륭제 자신은 공식적으로 모든 종교를 수호하는 중국의 황제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사적(私的) 행동을 보면 아마도 상당한 신심(信心)을 가진 티베트 불교 신자였던 것 같다.
건륭 치세기에 그는 티베트의 요청이 있다면 언제나 군대를 파견할 의향이 있었고, 명목상으로 티베트에는 그가 파견한 대신(大臣)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청의 티베트 지배는 이익보다는 부담이었다. 우선 몽골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전략적(戰略的)으로 티베트의 중요성은 미미해졌다. 두번째로 티베트로 들어가는 막대한 선사품에 대비해서 티베트에서 얻을 것은 거의 없었다. 청이 원하는 것은 티베트의 안정이었다. 티베트에서 문제가 생길 때 군사적으로 개입할 때 드는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컸기 때문이다. 이런 차에 일어난 구르카 원정은 청의 개입노선에 회의(懷疑)를 불러일으켰다.
건륭제는 자신의 70세 생일에 판첸 라마를 초청했다. 이 이야기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판첸 라마는 홍모파(紅帽派)의 수장으로 황모파(黃帽派)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베트 불교의 양대(兩大) 축(軸)이었다.
판첸 라마가 북경에 머물다 객사(客死)하자, 건륭제는 판첸 라마의 타실훈포사원에 막대한 재물을 보시(普施)했다. 이 재물이 문제가 되었다. 판첸 라마가 죽자 그 동생이 유산(遺産)으로 이 재물을 분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네팔로 달아나 구르카 군대를 선동해서 티베트를 침공하게 했다. 구르카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고 이들은 티베트로 들어가 타실훈포사원을 약탈했다.
청은 이 전쟁에 개입해서 네팔원정(遠征)까지 감행했다. 결국 원정에는 승리했지만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고원을 건너 감행한 원정은 청나라 조정에 막대한 부담이 되었다. 그들은 티베트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가장 효율이 높다고 생각했다. 원정군 사령관 푸캉안(福康安)이 티베트에 요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외적(外敵)을 방어할 수 있는 상비군(常備軍)이었다. 물론 그의 의도는 그토록 비용이 많이 들고 소득이 미미한 원정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중국에서는 비용과 효용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티베트 내부가 그대로 안정되었더라면 청은 개입정책에서 발을 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는 격동의 시대였고,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시대였다. 청이나 몽골의 제국주의는 이데올로기와 안보상의 필요성이 뒤섞인 것이었지, 그다지 경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방에서 온 제국주의는 강도(强度)와 성격이 모두 달랐다. 그리고 이번에 티베트가 맞아야 할 상대는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들 중에도 단연 꼭대기에 있던 영국이었다.
근대국가를 향해 성장한 티베트
이런 강적의 개입에 대비해야 할 19세기 전반기의 달라이 라마들은 모두 소년이었다. 1806년에서 1875년까지 겨우 무려 네 명의 달라이 라마가 성년(成年)이 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이것은 티베트 성직자 및 귀족사회의 극렬한 암투(暗鬪)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티베트는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격화된 서구(西歐) 열강의 침략, 그리고 연이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대혼란으로 청나라 정부는 티베트에 개입할 여력(餘力)이 없었다. 이 시기에 티베트는 남쪽에서 들어오는 세력들을 자기 힘으로 막아냈다. 그들은 청조의 도움 없이 시킴인, 라다크인, 네팔인들과 전쟁을 수행했다. 당시 티베트는 어렵사리 자신의 영토를 지킬 수 있는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877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선출되자 티베트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독립적인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조짐을 보였다. 그는 건륭제가 정해 준 금항아리 추천방식이 아니라 티베트의 전통에 따라 달라이 라마의 환생(還生)으로 인정되었으며, 연이어 직접 관리들을 선발했다.
이런 일련의 발전은 영국의 등장으로 다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개입은 중국 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학습효과가 있었다. 중국 제국주의도 급격히 영국 제국주의를 따라 진화(進化)하기 시작한다. 서구 근대국가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영토지상주의가 중국의 통치자들에게도 스며들었던 것이다.
인도의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티베트로 들어가고자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러시아의 남하(南下)에 대한 과장된 염려, 티베트와의 교역을 통해 부(富)를 얻을 수 있다는 과도한 기대, 또한 티베트에서 중국의 서부 사천과 운남 지대를 내려보겠다는 야망도 있었을 것이다.
탐험대, 사절단, 군인들이 차례로 티베트로 들어왔다. 영국군은 우선 티베트 접경(接境)의 여러 나라들을 보호령으로 접수해 나가면서 청조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티베트와 직접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티베트 정부는 끝까지 청조를 핑계 대며 영국과 협상하려 하지 않았다. 인도를 넘어 히말라야로 넘어오려는 영국 제국주의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조는 이때 티베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방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종이호랑이는 서방에서 명목상의 보호국인 티베트를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한편 협상에 불응(不應)하는 티베트를 위협하기 위해 영국인 영허즈번드는 영국 및 인도식민지군(軍)을 이끌고 계속 북진(北進)했다.
간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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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인들이 영국 침략군을 물리친 간체 드종요새(뒤에 보이는 건물)와 승전기념비. |
간체의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싸움이었다.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정리한 자료(李國柱 편, 《서장간체 ; 1904년 항영투쟁의 역사기억》(西藏江孜:1904年抗英鬪爭的歷史記憶)에 의하면 당시 전체 3000명 정도였던 티베트 정규군 중 영국군의 북상(北上)을 저지하기 위해 전선에 투입된 인원은 2000명 정도였다. 이들이 계속 밀리면서 민병(民兵)들이 1500명 정도 보충되었다. 영국-인도군의 병력은 5000명 가량이었다. 그 때 간체 지구의 귀족들이나 사원, 정부 소속의 여러 백성들의 징병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웅변해 준다. 그중 대표적인 것 두어 개만 뽑아본다.
<펑더(彭德) 백성: 장정 91인, 총 7정, 칼 7자루, 창 3자루.
귀족 랑동(朗東): 장정 9인, 총 3정, 칼 3자루, 창 2자루.>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도대체 창칼로 어떻게 신식 총과 대포를 이긴단 말인가? 말 그대로 대학살이었다. 영국군의 대량학살 무기에 1000명 이상이 순식간에 죽었고, 그들은 간체종산(江孜宗山)의 요새에서 버텼다. 그러나 흙과 나무로 만든 요새는 쇠로 만든 대포알 앞에 무력했다. 요새가 점령당할 때 남아 있던 다수는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항복 대신 죽음을 택한 것이다.
간체의 항쟁은 필자가 아는 한 티베트 역사에서 가장 무결(無缺)한 반제국주의 투쟁이었고 아시아 근대사에서도 가장 뚜렷한 반외세 투쟁이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다 참가했다. 귀족과 평민이 함께 싸웠다. 그 싸움은 당연히 중국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존(自存)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달라이 라마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는 그때 몽골로 달아났고, 러시아의 짜르에게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기묘한 삼각관계
1904년 8월 3일. 라싸는 그야말로 정복당했다. 준가르와 청이 물러나자 영국이 들어왔다. 갈수록 더 버거운 상대들이었다.
막상 티베트에 들어온 영국인들은 티베트의 황량함을 그대로 느꼈다. 남쪽에서 올라와 히말라야를 정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티베트는 인도와 달리 가져갈 것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티베트를 직접 지배하는 일의 버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러시아의 위협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었다.
영국은 라싸를 점령한 후 티베트에 대한 청조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했다. 청조와 협상하는 것이 추후에 얻을 것이 더 많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이어 영국은 러시아와의 협약에서 다시 청조를 인정했다. 조약에 의하면 청조를 매개로 하지 않고 쌍방은 티베트와 협정을 맺지 않도록 되어 있다. 물론 이 기묘한 삼각(三角)관계에 티베트인 자신들은 끼지 못했다.
동쪽에서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계속 얻어맞고, 또 국내 혁명파들의 공세에 시달리며 거의 쓰러져 가던 청조는 영국군이 라싸로 진군하자 갑자기 눈을 번뜩 떴다. 티베트 자체는 청조에 위협이 되지 않지만, 고원에 영국 주둔군을 두는 것은 표범을 뜰 안에서 키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의 어려움을 극복하자마자 좌종당(左宗棠)이 가난해진 국고(國庫)를 다 써가며 신강(新疆)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청조는 티베트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영국 제국주의가 중국 제국주의를 깨운 것이다.
그들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영국의 일부 요구를 들어주면서 영국군에 즉각 철군(撤軍)할 것을 요구했다. 청이라는 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나라는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새로 배운 영토국가의 개념만은 버리지 않았다.
중국의 티베트 정복
몽골과 청해를 떠돌다 북경을 거쳐 1909년 라싸로 돌아간 달라이 라마가 다시 정권 내부를 추스를 틈도 없이, 1910년 명실상부한 중국 제국주의 군대가 사천을 출발했다. 이번의 목표는 매우 분명했다. 티베트를 복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정복전을 주도한 이가 좌종당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호전성을 습득한 한족 관료 조이풍(趙爾?)이었다. 1908년 사천, 운남, 티베트의 변경 군사업무를 총괄하게 된 그는 동티베트를 급속히 잠식해 들어갔다. 그리고 1910년 그의 신식 군대는 라싸를 점령했다. 달라이 라마는 이미 인도로 달아난 뒤였다. 1910년 이후의 일들은 한국 사람들도 상당히 알고 있다. 1911년 신해(辛亥)혁명이 터지자 청조의 통치기반은 무너졌다. 티베트의 청나라 주둔군은 물러날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 191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티베트로 돌아왔다. 이제 티베트는 독립적인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듯했다.
그러나 반(半)세기도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 국공(國共)내전이 끝나자 인민해방군이 또 라싸를 침공했고, 달라이 라마는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그러고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 이후의 반동(反動)과, 중국 제국주의의 야만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진 바다.
2008년 여름 티베트 게릴라들의 고향 리탕(理塘)에서 10대에 인도로 떠났던 롭쌍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거대한 가섭봉이 멀리 하얀 봉우리를 드리우고 있는 숙소의 찻집에서 그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중국의 티베트 정책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한때 훌륭한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를 다녀왔다. 이 약관의 사내의 누나는 공안이다. 그녀 역시 티베트인이지만 버릇처럼, ‘철없는 분리주의자’라는 말을 쓴다. 롭쌍과 그의 여자친구가 없는 돈을 다 긁어모아 산 싸구려 지프를 타고 몽골인 천막을 찾아가는 길에 그의 차가 퍼졌다. 그때 그는 맞은편 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기서 라마들이 처형당했어요. 문화대혁명 때.”
어느 남매
웅대한 동티베트, 그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웅장한 가섭봉 아래에 자리잡은 고원의 도시 리탕은 제7대 달라이 라마의 고향이자 반중(反中) 게릴라들의 안식처였다. 문화대혁명 때 승려들이 얼마나 처형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20대 젊은이의 마음에는 그날의 참상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리고 누나의 눈에는 그의 생각이 철없기만 하다.
오래 전 청해의 쿰붐 사원(탑이사)에서 나는 환상을 품었다. 그때 본 쿰붐 사원은 거대한 병원이었다.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인 티베트 의학(醫學)이 꽃을 피운 곳이다. 승려들의 정갈한 몸으로 그들은 의술을 연마하고 실험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나오는 싸구려 파스 따위에도 ‘티베트 비방(西藏秘方)’이라고 적는 것은 일종의 유행이다. 그렇게 의술은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행복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라싸에서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간 사원에서 느낀 감정은 무한한 슬픔이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사람들의 신성한 표정마저 슬프게 보였다.
바로 여기 쿰붐 사원 근처에서 청의 장군 연갱요(年羹堯)가 코코노르의 몽골 수장들을 패퇴시켰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곤룬사원(郭隆寺)에서 무려 6000명의 승려를 학살했던 일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18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지금 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역사는 계속 거꾸로 가고 있다.
역사에는 선악(善惡)으로 판단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역사의 가정은 못난이들의 한탄일 뿐이다. 그러나 무력한 이방인(異邦人)이 티베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한탄뿐이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고 정작 문제가 생기면 도망가는 행태, 귀족과 사원의 수장들은 그런 행동을 너무 자주 보여주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도움을 구하지만 도움을 가장하여 온 이들은 더 무서운 이들이었다. 그 사이 티베트 인민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들을 겪었다. 근대사가 그들에게 강요한 공포 때문에 그들과 공감을 하는 것조차 두렵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2008년 초에 나는 들떠 있었다. 야룽창포 대협곡을 건너는 아주 짜릿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닝트리의 숲에서도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야영장비를 잔뜩 준비하고, 또 옛날에는 너무나 부족했던 돈도 꽤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3월 티베트는 외국인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금단의 땅 티베트
물론 2011년 지금은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입경허가서를 받고, 또 여행사 직원을 대동하고, 정해진 곳으로만 갈 수 있다. 야룽창포 협곡도, 야생 당나귀가 사는 곳도, 파미르와 티베트가 만나는 곳도 이제는 갈 수 없다. 그저 야성(野性)을 잃은 라싸, 대화를 잃은 시가체의 일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겨우 10년 전만 해도 고원에는 낭만이 있었다. 기억하기 싫은 역사는 잊고 고원의 푸름에 취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다시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고원에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테러는 오히려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중국정부는 최근 히말라야의 얼음과 물에 테러를 가하고 있다. 중국이 서부 대개발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남수북조(南水北調)의 서선공정(西線工程)은 티베트의 물을 가두어 전기로 만들어 동쪽으로 보내거나, 그 물을 그대로 동쪽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티베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수억 인구가 이 공정의 피해를 입을 것이 뻔하다.
천안문, 호금도(胡錦濤), 류사오보(劉曉波), 봉기, 진압 따위의 명사들이 2008년 3월 티베트와 겹친다. 칼로 친구의 심장을 도려내고, 그러고는 다 친구를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티베트는 언어도단의 고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티베트를 유랑할 자유를 잃어버렸다. 묻고 싶다. 나를 왜 그곳에 가지 못하게 하는지. 나는 간체에 가고 싶었다. 그곳은 당신들도 반제국주의 투쟁의 성지(聖地)로 부르는 곳이다. 버스 안에서 들은 유행가의 가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파란 하늘에는 흰구름 조각들,
아름다운 강에는 파란 물결,
독수리는 여기서 날개를 펴고 날아가며, 마음 울리는 노래를 남겼네
‘옴 마니 마니 반메훔’>
나는 이 글을 1904년 간체의 16세의 이름 없는 소년 전사(戰士)에게 바친다.
옴마니반메훔.
[일러두기]
필자는 고의로 라싸에 대한 설명을 뺐다. 티베트의 세계는 지금 라싸 일대의 서장(西藏)보다 훨씬 넓다. 현재의 청해 전체, 사천 서부, 감숙 남부, 타림분지 주변 일대도 모두 티베트 세계다.
표기의 원칙은 어원이 한자가 아닌 것은 현지음으로 표기했고, 한자인 것은 한자 발음으로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