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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기행 ②

石達開의 太平天國

  • 글 : 공원국 중국전문 역사저술가ㆍ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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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을 주장했던 홍수전의 태평천국, 지도부의 부패와 내분으로 자멸
⊙ 석달개, 전공 세워 20대의 나이에 翼王에 올랐으나 태평천국의 내분 이후 사천으로 들어가려다가
    淸軍에게 잡혀 처형
⊙ “도적들의 마음을 얻고, 재능은 그 도적들의 꼭대기에 있었으며, 사람들의 인심을 모으고,
    인재를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석달개에 대한 좌종당의 평가)

공원국
⊙ 1974년생.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졸업, 서울대 국제대학원 중국지역학 석사.
⊙ 저서 : ≪춘추전국 이야기≫ 등.
대도하 강변에 세워져 있는 석달개의 석상.
중국의 근현대 혁명, 아니 근현대사 전체를 논할 때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는 주제를 뺀다면 역사서 분량이 3분의 1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많은 논란과 서술에도 불구하고 태평천국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다스리는 자들은 ‘태평’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고, ‘항산(恒産)이 없는 자들’은 언젠가 올 태평한 날을 품고 산다.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태평천국도 따라 춤을 췄다. 손문(孫文)을 위시한 국민혁명가들은 물론 공산혁명 1세대들은 태평천국을 봉건제의 심장을 강타한 ‘역사상 가장 발전한 형태의 농민전쟁’으로 치켜세웠다. 연이어 대약진(大躍進)과 문화대혁명은 이미 100년 전에 끝난 운동을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그리고 21세기 중국의 부상(浮上)과 함께 태평천국은 서서히 ‘폭도들의 모험’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광신자(狂信者)’ 홍수전(洪秀全) 대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정치가’ 증국번(曾國藩)이 돌아왔다. ‘불세출의 농민혁명가’는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고 ‘만주족의 노비’가 중국인의 우상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들어가면 못 나오는 땅 사천
 
  그러나 이 당황스러운 극단들 속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있을까? 외부의 관찰자로서, 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그런 널뛰기의 경망스러움에 동참하는 대신 필자는 제3의 인물을 한 명 불러올까 한다. 그는 당시에는 아마도 홍수전과 증국번의 중간에 있었으리라. 짧은 글이지만 필자는 그를 불러내어 그들 밖에 세우고 싶다. 그는 태평군의 또 한 명의 수장 석달개(石達開 : 1831~1863년)다.
 
  2000년, 연길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나는 우연히 빈(斌)형을 만났다. 100㎏이 넘는 거구에 웃통을 벗어젖힌 모습 자체가 장관인 사람이었다. 적적한 침대칸에서 멋쩍은 대화가 시작되고, 간이역에서 산 이과두주를 맥주캔에다 부어 마시면서 흥이 올랐다.
 
  “공형, 사천(四川)으로 가보시오. 사천의 자연은 다르오. 웅장하오.”
 
  우연인지 이듬해부터 사천을 다니기 시작하다 급기야 사천에 한동안 자리를 틀고 말았다. 중국 대륙의 심장부에 움푹 들어간 분지(盆地), 히말라야 동부의 물줄기들이 모두 모여 장강(長江)을 이루고 동쪽으로 가는 출발지가 사천이다. 휴식과 풍요, 그리고 동쪽으로 떨쳐 나올 기세가 자라는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태평천국군 무리가 서쪽에서 이 분지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사천 분지는 아늑한 곳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아늑한 곳은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들어온 대부분의 야심가가 다시 나갈 수 없었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이 분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 열을 감당하는 그 천재의 수완으로도 이 땅을 벗어나지 못했다.
 
 
  안순장 혹은 자타지
 
안순장. 홍군은 건너고, 태평군은 건너지 못했던 곳.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만약 석달개가 이끌던 태평천국군이 무사히 사천에 들어갔다면, 그들의 소망처럼 다시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물에는 상류의 기세가 있고 군대에는 선봉의 기세가 있듯이 혁명은 군중의 분노라는 기세가 있다. 이리저리 치이는 인고(忍苦)의 세월 동안 혁명의 예봉은 꺾이고, 혁명의 심장은 이미 팔다리에 피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지친 그들 앞에 대도하(大渡河)가 막아섰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석면(石棉), 검은 물이 흐르는 대도하변의 조그마한 도시. 정(情) 붙이기 어렵게 치달리는 물, 코밑까지 다가선 강퍅한 산이 이어지고, 산 아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이 보는 이를 끝없이 불안하게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대장정(大長征) 당시 중국공산당 홍군(紅軍)의 도하장인 안순장(安順場)이 있다. 석달개가 이곳을 건너고자 할 때는 자타지(紫打地)라고 불렀다. 누런 물가에 조각난 배들은 아직도 널려 있고 강가 자그마한 밭에는 옥수수가 드문드문 자라는 그저 그런 시골 마을이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중국 근대사의 비극이 벌어졌다.
 
  석면 대도하 강변에 석상이 하나 서 있다. 이마가 훤한 한 사나이가 강을 바라보고, 아낙 한 명은 아이를 안고 있다. 그 뒤에는 한참 어린 청년이 칼을 뽑아들고 있다. 강을 바라보는 이가 석달개다. 여인은 그의 아내다. 그의 적들이 “날랜 자, 도적들의 마음을 얻은 자”라고 불렀던 사나이는 강한 턱에 어떤 동요의 기색이 없는 콧수염을 기른 늠름한 중년의 얼굴이다. 거짓말이다. 그는 그때 겨우 슬픈 33세였으니까.
 
  주점에 들러 야채 요리를 네 개 시켰다. 주인은 좋은 사람이라 요리가 깨끗하고 푸짐하다. 이과두주 세 병에 밥도 한 그릇 준비했다. 이과두주는 내가 아는 가장 민중적인 술이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니 밤은 깊었다. 그의 석상 앞에서 술을 올린다. 한 잔 두 잔, 옛 사람은 없으니 나와 술만 남았다. 술이 오르니 석달개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태어나자마자 간 저 아이와, 아이를 낳자마자 간 저 여인 때문에 애달프다. 밤이 깊어질수록 물의 숨소리도 거칠어진다.
 
 
  《춘추좌전》과 《리바이어던》
 
  <“위나라 사람들이 그 군주를 내쫓은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 군주가 너무 심하였겠지요.”
 
  대저 군주란 신을 모시는 주인공이니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이입니다. 그러나 만일 백성의 삶을 곤궁하게 하고, 신명에 제사를 모시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면, 백성들은 절망하고 사직은 주인이 없게 될 것인데, 그런 군주를 어디에 쓰오리까? 그런 군주를 제거하지 않고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늘이 백성을 사랑함은 실로 지극합니다. 그런데 어찌 단 한 사람이 백성들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멋대로 행동하게 하여 그 하늘과 땅의 본성(백성들의 천성)을 버리게 할 것이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앞의 인용문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대화로, 기원전 559년 진(晉)나라 군주 도공(悼公)과 궁정악사 광(曠)의 대화를 옮긴 것이다. 좀 더 잘 알려진 것으로 이런 논설도 있다.
 
  <커먼웰스(commonwealth)란, 다수 사람이 상호 신의(信義) 계약을 체결하여 세운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들 각자가 그 인격이 한 행위의 본인이 됨으로써, 그들의 평화와 공동방위를 위해 모든 사람의 힘과 수단을 그가 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중략)
 
  다섯째,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이미 백성들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주권을 가진 사람은 백성에 의해서 처형되거나, 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처벌될 수 없다.(중략)
 
  또한 권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권자의 명예도 그 어떤 백성의 명예보다, 또한 백성 전체의 명예보다 당연히 더 위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상 홉스의 《리바이어던》, 진석용 옮김)
 
  커먼웰스란 간단히 말해서 국가다. 《좌전》은 중국에서 현대까지 살아 있는 치국(治國)의 교과서고, 홉스의 논설은 서구의 근대국가 이론의 주춧돌이자 기둥이다.
 
 
  혁명의 논리
 
  위의 논설 아래에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하나가 숨어 있다. 바로 국가는 유사 이래 쉬지 않고 강해져 왔다는 점이다. 과거 군주제 국가보다 오늘날 민주제 아래의 국가가 오히려 더 강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가 봉건제 사회의 국가보다 훨씬 크다. 홉스는 말한다. 어떤 통치체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라도 신민(臣民)은 국가에 권력을 양도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주권자(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제거할 수 없다. 주권자의 권력은 이미 위탁자의 의도를 벗어나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태평천국은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서 만들겠다는 운동이다. 태평천국의 ‘하느님’을 《춘추좌전》에 나오는 악사 광이 말한 ‘하늘’과 바꾸어도 문맥에 아무 모순이 없다.
 
  중국에도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하늘’이 있었다. 그 하늘의 아들이 바로 천자(天子)가 아닌가. 태평천국의 수장인 홍수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황제를 제거하고 하느님의 세상을 만든다고 할 때, 그 주장은 홉스의 근대국가 이론과 바로 충돌한다. 주권을 위탁한 이상 백성은 어떤 경우라도 주권자를 처벌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직 폭력 혁명만이 주권자를 바꿀 수 있다.
 
  이제 혁명은 어디서 시작할 수 있는가? 《좌전》의 맥락에 의하면 군주가 백성의 삶을 파탄 냈다면 혁명은 정당하다. 《리바이어던》의 맥락에서 보면, 주권자가 먼저 계약을 파기했다면 신민도 주권자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의 충분요건으로는 부족하다. 혁명을 일으키자면 애초에 계약이 없었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애초에 계약은 없었다. 우리는 권력을 위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주권자를 인정할 수 없다.’
 
  혁명가들은 국가의 유기체적(有機體的)인 속성을 강조한다. 머리가 팔다리를 억압한다면 그런 머리는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통치자들은 국가의 기계적인 속성을 강조한다.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적인 구조다. 신민 일부, 혹은 전부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스스로 굴러가는 거대한 기계이다.
 
  혁명가로서 홍수전의 출발점은 정확했다. 그는 말한다. ‘만주족 군주는 하늘의 뜻을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군주(주권자)와 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 그러니 혁명은 정당하다.
 
  혁명초기, 혁명집단의 유기체적인 역동성(力動性)은 통치체의 기계적인 정체성(停滯性)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또 도덕적으로 무장된 그들의 피는 뜨겁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거대한 기계는 무감각하고 느리며, 피가 통하지 않는다.
 
 
  태평천국의 발상지 광서성
 
  그 태평천국의 ‘도적’들은 왜, 또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광서성(廣西省)의 궁벽한 공간에서 장강을 온통 피로 물들이고, 마침내 청조(淸朝)의 기반까지 무너뜨리는 싸움이 시작되었을까?
 
  아편전쟁은 모리배와 허풍쟁이들의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아편을 팔겠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帝國)이 있는가 하면, 땅을 떼어주면서 수염을 쓰다듬는 고위 대신들이 있었다. 관리들이란 밖으로는 한없이 유약했고, 안으로는 한없이 강했다. 아편무역으로 은(銀)이 유출되면서 동전은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전을 얻기 위해 팔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의 몸값은 그렇게 올라가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남경조약의 배상금은 누가 낼 것인가. 모두 부세자(負稅者)들이 내야 한다. 개항장의 관세가 꼬박꼬박 황실로 들어갔지만 백성들의 세금은 늘어갔다.
 
  난리가 시작된 광서성은 지금도 지지리도 궁핍한 곳이다. 광동(廣東)으로 이어지는 뱃길에 생계를 걸고 있던 배꾼들은 상해(上海)의 개항장 덕에 실직했고, 은광의 노동자들은 캐어도 자기 것이 아닌 은 때문에 뼈가 휘었다. 먹을 것이 박해지면 토호들은 칼잡이를 고용했고, 없는 청년들은 토호들의 문지기가 되거나 반란 집단으로 들어간다. 소작료에, 세금에 시달리다 가뭄 한 번 비 한 번에 딸을 팔고, 아이를 죽였다.
 
  도대체 왜 이렇게 궁핍하단 말인가? 내지(內地)의 인구 압박에 떠밀린 떠돌이들이 몰려들어 광서성의 인구는 청조 개창 이래 무려 열 배나 늘었다고 한다. 18세기 초 100만명이 안되던 인구가 19세기 중반에는 거의 1000만명에 육박했다. 이동은 불안을 낳고, 토지는 늘어나지 않는데 인구가 늘어나면 토지를 둘러싼 원주민과 이주민의 투쟁이 생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지대(地代)는 상승한다.
 
  거의 절대적인 결핍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장 의지할 곳과 현실의 결핍을 설명해 줄 논리가 동시에 필요했다. 그 결핍을 파고든 사람이 바로 홍수전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의지할 곳은 상제(上帝)였고, 현실을 설명할 희생양(犧牲羊)은 만주족의 착취였다.
 
 
  홍수전의 등장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하느님의 적(敵)은 누구인가? 우상(偶像)이고 공자(孔子)다.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만주족이다. 과연 하늘의 명(命)을 받들어 사당의 신(神)들을 부숴도 그 ‘요괴(妖怪) 잡신’들은 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왜 하필 태평천군만 그렇게 커졌던가? 극도의 궁핍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지키려 하고, 없는 사람들은 무리를 지었다. 이미 태평천국의 기의(起義) 이전에 약탈하려는 집단과 지키려는 집단의 자구적인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모인 이 무장집단들은 하나같이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지 못했다.
 
  그때 홍수전은 하느님의 나라, 모두가 요족(饒足)하며 또 평등한 나라를 제시했다. 홍수전을 따르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는 이른바 홉스가 말한 ‘신의 계약’이 체결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홍수전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던 시골 글쟁이가 어느 날 꿈에 계시를 받고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 되었다. 유가(儒家)의 대동(大同)사상과 기독교의 메시아 교리를 조합한 조잡한 이론은 모순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땅이다. 사회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평등이다. 사회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기존 질서의 파괴다. 기존 질서의 우두머리의 고깔은 만주족에게 씌웠다.
 
  그 무렵 광서 귀현(貴縣)의 석(石)씨 집안은 이 운동에 큰돈을 냈다. 그리고 약관(弱冠)의 석달개가 운동에 참여한다. 석달개의 어머니는 소수(少數)민족이었고, 집안은 비록 외부에서 들어온 객가(客家)였지만 나름 편안한 삶이 보장된 지주(地主)였다. 그는 젊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였다. 그의 글에는 요순(堯舜)과 상제가 결합되어 있다.
 
 
  태평천국의 궐기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을 천왕(天王)으로 칭하고 무력투쟁을 선언한다. 그들의 구호는 벌폭구민(伐暴救民)이었다. 그들은 비록 보잘것없는 무기를 들었지만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남녀는 따로 거처하고, 약탈을 하지 않으며, 퇴각하지 않는다’는 규율을 가진 군대였다. 이들이 일어나자 이들은 보통 비적(匪賊)들과는 다르다는 보고들이 속속 조정으로 도착했다.
 
  <이들은 일단 가입하면 죽음도 태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잡아서 고문을 가해도 무서워하지도 않고 살려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두 미혹에 빠져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일로 생각합니다. 천지회(天地會) 따위의 모반자집단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후기 태평군의 군사적 지도자였던 이수성은 진술서에서 말했다.
 
  “사람들은 태평군에 가입하면 밥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가담했다.”
 
  처음 출발점은 생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가담하면 사람들은 달라졌다. 그들은 함께 천당으로 가자고 힘을 실으며, 전장에서는 노약자도 버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늘을 받들어 호로(胡奴)를 토멸(討滅)하자’는 격문에서 홍수전은 “만주족이 중국 백성이 굶어 죽고 떠돌아다니다 백골이 들판에 나뒹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중국인의 인구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며 민족감정에 호소했다.
 
  그들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달렸다. 1850년 말에 전투를 시작하여 불과 2년 만에 장강 중류 최대 도시인 무창(武昌)에 닿았다. 광서 계림(桂林)을 공격하고, 물길을 따라 연이어 호남 장사(長沙)를 공격한다. 악주(岳州)에서 수군(水軍)을 얻은 후 이들의 속도는 배가되었고, 무창을 함락시키자 이들의 세력은 지방군으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창에서는 북(北)으로 갈 수도 있고 남(南)으로 남경(南京)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 남경에서 강남의 곡창을 점령하고 힘을 기르자고 하는 이도 있고, 바로 북경(北京)으로 올라가자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남경으로 내려간다. 연이어 구강(九江), 남창(南昌), 안경(安慶), 남경까지 장강 연안의 거대 도시들은 이 거센 혁명의 물결 앞에 속절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남경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남경 공략의 선봉은 젊은 석달개였다. 당시 석달개는 싸움마다 승리했고, 이미 익왕(翼王)이라는 호(號)를 가진 태평군의 허리였다. 그는 수군 선봉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내려가며 남경을 압박했다. 두 달 만에 남경은 태평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지도부의 타락
 
  초기에 그들은 강건했다. 수많은 관찬(官撰) 서적들과 청조의 편에 선 목격자들은 초기 태평천국군의 기강을 찬탄한다.
 
  <장발적(長髮賊)들은 청군(淸軍)만 요괴로 간주하고 닥치는 대로 죽일 뿐, 다른 이들을 살해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다. 남녀를 엄격히 구분했고, 규율이 엄정해서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창에서 치명적인 타락의 징조들이 나타난다. 남녀(男女)평등과 금욕(禁慾)을 주장하던 태평천국군의 왕들(天ㆍ東ㆍ西ㆍ南ㆍ北ㆍ翼王)은 무창의 미녀(美女)들을 처(妻)로 취했다. 남경에 도착했을 때 천왕 홍수전은 100명에 달하는 비(妃)를 거느렸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동왕에게는 10대의 첩(妾)이 36명, 북왕에게는 14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글의 주인공인 익왕 석달개도 7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석달개는 첩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주위의 권유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 첩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권위의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 당시 태평군의 일반 장령(將領)들은 미래를 기다리며 부부가 따로 거처하고 있었다. 이렇게 같이 평등한 세상으로 가자던 그들은 이미 무창에서 평등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다.
 
  남경은 무창보다 더 풍요한 곳이었다. 그곳은 강남의 중심이며, 북경과 세를 나눌 수 있었다. 힘이 있으면 운하를 점령하고 북경을 압박할 수도 있었고, 화북평원을 건너 북경까지 밀고 올라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평천국군은 남경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예 남경을 하느님 나라의 수도, 즉 천경(天京)으로 정했다. 힘을 비축할 시간이 필요했을까? 물에 익숙한 사람들이라서 그랬을까? 북쪽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서? 혹은 화북(華北)에 있는 이민족(異民族) 적들이 두려웠을까?
 
  1853년부터 1855년까지 이어진 북경 공략은 완전한 실패였다. 만주족은 주력 봉천군(奉天軍)과 몽골군을 동원해 북진군(北進軍)을 막는다. 장기전에서 화북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또 지방주둔군과는 수준이 다른 군인들과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마음을 남경에 두고 겨우 군사 5만명으로 시작한 북진이 성공한다면 청은 진실로 문서만 남은 국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은 그만큼 부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천왕이 중요해질수록 백성이 비루해졌고, 남경이 중요해질수록 이상(理想)이 요원해졌다. 계약은 백성들을 배반했다!
 
 
  호적수 증국번의 출현
 
태평천국의 난을 토벌한 증국번은 오늘날 ‘경세치용의 정치가’로 추앙받고 있다.
  호남성(湖南省)의 지주 출신 관료 증국번을 위시한 신사(紳士), 지주들은 스스로의 이익과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 무장대를 조직했다. 애초에 그들은 청조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들의 재산과 이념을 지키려고 일어섰다. 1854년 지주계급의 의용대인 상군(湘軍)을 출정시키며 내붙인 ‘월비를 치자’(討越匪檄-‘월비’는 광서성 출신인 태평천국군을 비하한 말)는 격문에서 그는 의뭉스런 기만과 왜곡 속에서도 스스로의 의중을 숨기지 않았다. 지역감정, 계급감정을 충분히 이용하며 전개한 그의 논설의 요지는 대강 이렇다.
 
  <월비는 빈부(貧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재산을 약탈한다. 그들은 호남, 호북(湖北)을 위시한 장강 일대 사람들을 위협하고 학대한다. 아울러 그들은 상하존비(上下尊卑)의 가르침을 부정하며, 중국의 명교(名敎)를 버리고 서양의 신을 데리고 와 섬긴다. 또한 그들은 토지를 몰수하여 모두 천왕의 것이라 하고, 상인들의 자본도 모두 천왕의 것이라 한다.>
 
  한마디로 저들이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신념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었다. 증국번은 상군의 수군을 이끌고 남경 태평군의 후방 거점들을 차례로 접수해 들어왔다. 증국번의 상군은 높은 급여를 받는 지주계급의 용병(傭兵)으로서 당장 태평군의 최대 적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 태평군도 만만치 않았다. 1855년 겨울 드디어 태평천국의 군사지도자 석달개가 출정했다.
 
  석달개는 구강에서 상군의 수군을 유인하여 파양호로 몰아넣었다. 파양호와 장강의 연락을 두절시키고 호수 입구를 막은 석달개는 이 독 안에 든 쥐를 하나하나 파괴해 나갔다. 이 싸움에서 증국번의 지휘선도 나포되자 증국번은 자살하려 하다 간신히 구조되어 남창(南昌)으로 물러났다. 태평군은 다시 무창을 점령하고 공세로 전환했다.
 
  그러나 계속 남경을 압박하던 청군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천왕은 석달개의 서정군(西征軍)을 불러들였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증국번은 끝장났을 수도 있으리라. 석달개는 돌아와 청의 정규군인 강남과 강북대영을 파괴하는 선봉에 서서 양대 군영을 모두 격파했다. 서, 남, 북에서 모두 대첩(大捷)을 거둔 태평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석달개는 피아(彼我)가 모두 인정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투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天王과 東王
 
  봉기군이 남경에 도착하자마자 무서운 분열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당시 지주 장덕견(張德堅)이 쓴 ‘도적의 동태를 분석한 글’인 <적정휘찬>(賊情彙纂)은 날카롭게 상황을 갈파하는 내용을 실었다.
 
  <저들이 일어날 때 그들은 형제처럼 결속이 강하고, 한 방에 모여 의논하며, 결정하면 바로 실행했다. 그러나 남경에 도착한 후 저들은 화려한 생활에 혼미해져 정신을 못 차리고 서로 시기심이 나날이 깊어가고, 일을 문서 따위에 의지하니 명령이 아래 위로 통하지 않는다.>
 
  홍수전은 독실한 신앙인이자 수완 있는 선동가였다. 그러나 정치적 안목이나 시국(時局)을 판단하는 능력은 혁명가로서 그의 위상에 걸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남경에 도착한 후 거의 모든 일은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이 처리했다.
 
  양수청과 홍수전의 관계는 기이했다. 홍수전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다. 그래서 그는 천왕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작 동왕 양수청의 몸을 빌려 땅으로 내려온다. 이 기이한 푸닥거리를 그들은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온 것(天父下凡)’이라고 했다. 그때 양수청이 바로 하느님이 되고, 홍수전은 아들이 된다. 실제로 신이 씐 것인지, 아니면 양수청의 연극이었는지, 또는 홍수전과 양수청이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시작한 조작극이 고착화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양수청의 몸으로 내려온 순간에는 그 누구도 그를 거역할 수 없었고, 천왕도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 가짜 하느님의 정치적인 야심은 점점 더 커지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목적도 점점 더 잔인해졌다. ‘하늘의 계시’란 “동왕은 어찌 9천세인가? 동왕에게도 만세를 불러라”하는 따위의 속 보이는 것이었다. 무시로 내려오는 하느님에게 급기야 홍수전이 곤장을 맞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홍수전은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를 끌어들여 양수청을 죽였다. 혹은 위창휘가 죽이고 홍수전이 방조했다. 위창휘는 양수청 면전에서 열심히 아부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색이 왕인 그도 하느님의 탈을 쓴 양수청에게 매를 맞았다. 인간적으로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태평천국의 내분
 
  1856년 9월 2일 새벽. 위창휘는 양수청의 동왕부를 습격했다. 그는 바로 양수청을 죽여 머리를 매달았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 후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보복이 두려워진 위창휘는 동왕의 수하들을 모두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미 태평천국의 대의(大義)는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동왕 살해의 죗값을 치르겠다며 동왕의 수하들을 불러모았다. 비무장한 동왕의 사람들 앞에서 그는 매를 맞는 연기를 했다. 그의 부하들은 다음 날 새벽 의도적으로 한 곳으로 몰아두었던 동왕의 수하들을 기습해서 잔인하게 죽였다. 이때 죽은 사람은 수천 명이라고도 하고, 2만명 이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날이 밝자 동왕 측 사람이라면 여자에서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학살하기 시작했다. 신권(神權)정치의 광란(狂亂)이었다.
 
  그때 밖에서 전투 중이던 석달개는 대학살 소식을 듣고 급히 남경으로 돌아갔다. 아직 20대였던 이 장군은 분개했다. 그는 “어떻게 장정들까지 몰아서 죽일 수 있는가? 이는 적만 이롭게 하는 것임을 모르는가?”라고 위창휘에게 따졌다. 그러자 위창휘는 “너도 적이다”라고 응수했다.
 
  이수성의 진술에 의하면 원래 위창휘와 석달개는 의기투합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석달개는 아직 태평천국의 이상을 붙들고 있었지만, 위창휘는 아니었다. 위창휘는 석달개마저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낌새를 느낀 석달개는 밤에 담을 넘어 탈출했다. 그러나 익왕부에 남아 있던 젖먹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주요 부하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연이어 기만 명이 숙청되었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안은 전혀 태평하지 않았다.
 
  자신의 군중(軍中)으로 달아난 석달개는 ‘간신(奸臣) 위창휘를 치자’고 격문을 띄웠다. 다급해진 위창휘는 홍수전마저 없애고 태평천국군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양수청의 잔당(殘黨)들과 천왕의 세력에게 반격당해 오히려 자신이 죽고 만다. 태평천국은 동서남북의 왕을 모두 잃고 익왕만 남았다. 천왕은 익왕 석달개를 불렀다. 믿을 수 있는 이는 그뿐이었다.
 
  사람들은 남경으로 다시 들어오는 석달개를 ‘의로운 왕’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1856년 12월 그는 천경 보위(保衛)의 책임을 지고 당당하게 남경에 들어간다. 그러나 피바람이 분 후에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갈라져 있었다. 이미 정치적인 판단력을 잃은 천왕은 석달개마저 의심했고, 한 술 더 떠서 형들인 홍인발과 홍인달에게 왕작(王爵)을 줬다. 청조보다 더 봉건적인 작태였다.
 
 
  석달개, 서쪽으로 떠나다
 
  그는 결국 남경을 떠나기로 했다. 더 야심이 있었다면 남경을 쓸어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태평군의 주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25세의 젊은이는 그러지 못하고 1857년 초여름 10만 군중을 데리고 서쪽으로 떠났다.
 
  그 처음은 나름 기세가 있었다. 그러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자 무리는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일어설 때는 물을 타고 노도(怒濤)처럼 내려왔으나 이제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된 행군(行軍)이 시작된 것이다. 1857년 천경을 떠나며 쓴 《오언고시》(五言告示)는 그의 참담한 심경을 알려준다.
 
  <살을 에고 피를 듣는 심정으로, 여러 군민께 부탁드립니다. 스스로 재주와 지혜가 없음을 한탄하고, 천국이 베풀어준 은혜로 천국에 부끄럽습니다. 오로지 충정한 뜻을 다하고 구구한 일편심만 남았으나, 위로는 하느님을 대하고 아래로는 고인들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재난을 만났을 때 헐레벌떡 천경으로 돌아오며, 스스로 이는 어리석은 충성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군(聖君)의 밝으심을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하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어서, 조지(詔旨)는 빈번히 내려오고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더욱더 깊어가니, 이를 붓으로 다 써내려 갈 수 없습니다.
 
  이에 당부하고자 여러분께 고시를 올립니다. 의연히 본분을 지키며, 하던 대로 공명(功名)을 이루소서. 혹여 본주장(本主將)을 따를 사람이 있으면, 그분들 또한 족히 원훈을 이룰 수 있으리다. 태평일통(太平一統)의 그날이 오면, 모두 하늘의 은총을 맞읍시다.>
 
  그렇게 그는 떠났다. 광서에 이런 민요가 전한다.
 
  <유채꽃 피어 온 땅이 노랄 때, 천군은 요괴들을 죽이려 북방으로 떠났지.
  기러기 날려 편지를 보내니, 님은 어느 날이나 돌아오시려나.
  익왕께서 병사를 데리고 북방으로 갈 제, 백성들은 길가에 나와 눈물이 범벅
  기러기 날아가도 돌아올 줄 아는데, 우리 천군 언제 돌아올 줄 물어나보게.>
 
  광서에서 그를 보냈던 사람들의 염원처럼 과연 석달개는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아니라 외로운 떠돌이였다.
 
  석달개가 떠나자 적들은 환호했다. 이제 태평군이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성(城)도 없고 양식도 없는 군대는 서쪽으로 움직인다. 석달개 군대는 점점 승리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결국 출발지인 광서까지 쫓겨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그의 군대는 10만이 넘었다. 그러나 적은 북쪽에서 계속 밀려들었다. 광서에 들어온 지 한 해 만에 군사는 반의 반도 남지 않았고, 그는 이제 당당한 태평군의 수장이 아니라 토벌당하는 잔당의 처지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사천 분지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리라.
 
  1863년 3월 그는 사천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여름 뜨거운 날 나는 석달개가 올라오던 그 길을 다시 가보았다. 운남(雲南) 소통(昭通)에서 사천으로 올라오는 길, 오몽산(烏夢山)을 지나면 왼쪽에 대량산(大凉山), 그 산 사이 수레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길을 벗어나면 대도하가 보인다. 빨리 통과하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곡식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면 다 굶어 죽는다. 그러나 대도하는 그를 막고 있었다. 마침 폭우로 물이 불어나 있었다.
 
  석달개는 천호(千戶)를 다스리는 토사(土司) 왕응원(王應元)을 회유했다. 우리와 함께하면 차별받는 그대들을 해방시키겠다고. 한 세기 후 홍군은 그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지만 석달개는 실패했다. 왕응원은 거꾸로 청군에 매수되어 왼쪽에서 기다리고, 청군은 강 건너에서 기다리고, 후방은 추격군이 바투 쫓고 있었다. 식량도 다 떨어졌다. 이제 갇혀 있다가는 모두 죽는다. 그들은 결국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물살을 거슬러 저쪽 언덕에 닿지 못했다.
 
 
  처자를 죽이고 청군에 항복
 
  이제 선택의 기로(岐路)에 섰다. 그의 마지막 꿈은 부하들을 살리는 것이었다. ‘낙병장(駱秉章-청나라 장수 駱文忠을 말함)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는 그 마음을 밝힌다.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생각을 훔쳐(신념을 버려) 영달을 꾀하며,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충신(忠臣)으로서는 못할 일이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삼군(三軍)을 구하는 것은 지사(志士)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끝끝내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으니, 이는 시절 때문인지, 운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 청나라 군주에게 진주(進奏)하여, 크나큰 도량과 아량을 베풀게 할 수 있다면, 특별히 청하노니 우리 장령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이 살육을 면하도록 해주소서.(格外原情,宥我將士, 赦免殺戮)>
 
  그러고 나서 석달개는 익왕이 되어 얻은 여자 다섯과 아이 둘을 스스로 죽였다. 한 명은 갓난애였다. 그리고 다섯 살 난 아들 하나를 데리고 항복한다. 조건은 오직 하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남경에 남아 사태를 수습하다 포로가 된 이수성은 이렇게 진술했다.
 
  “다들 고만고만하지만 석달개만은 탄복할 만하다. 그 기략이 실로 깊다.”
 
  좌종당(左宗棠)은 그를 “도적들의 마음을 얻고, 재능은 그 도적들의 꼭대기에 있었으며, 사람들의 인심을 모으고, 인재를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으며, 사교(邪敎)의 저속한 설(說)에 그다지 넘어가지 않았으니, 그는 적들의 우두머리이며 내가 두려워하고 꺼리는 자다”고 했다.
 
  《촉해총담》(蜀海叢談)이라는 책의 저자는 아버지의 목격담을 가지고 석달개의 마지막을 이렇게 전한다.
 
  <형(刑)을 당하는 날, 성도(成都)장군 숭실(崇實)과 낙문충(駱文忠)이 같이 관청의 대당에 앉아 있었고, 사도(司徒) 이하 성의 문무(文武)관원들이 다 참석했다. 석달개와 두 명의 왕이 당(堂)을 오르는데, 당하에서 삼배를 올리게 했다. 모두 황색 두건을 썼는데, 석달개의 두건에는 오색 꽃을 수놓았다.
 
 
  석달개의 최후
 
대도하를 건너는 홍군(紅軍). 홍군은 국민당군의 저지를 뿌리치고 석달개가 건너지 못한 대도하를 건너 대장정(大長征)을 성공시킨다.
  청나라 제도에 장군이 총독의 위에 있었으므로, 낙문충이 숭실에게 심문을 양보했다. 숭실의 말소리가 작아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석달개가 머리를 쳐들고 노려보자 숭실은 기세가 꺾이고 말문이 막혔다. 낙문충이 심문을 시작했다.
 
  “석씨, 네가 오늘 형을 당하는데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도 값어치가 있는 일이다. 네가 일을 일으킨 이래 여러 성(省)을 짓밟았고, 우리 국가의 큰 관리로서 네 손에 죽은 이가 셋이다. 오늘 죽음으로써 끝장을 보게 되니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석달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이라는 것이구나. 지금 생(生)에 네가 나를 죽이지만, 다음 생에 내가 너를 죽이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
 
  마침내 석달개가 당을 내려가는데 발걸음이 크고도 완만했고, 두 왕은 여전히 좌우에서 그를 모셨다. 석달개가 말하길, “여전히 대장이 먼저 간다”고 했다. 그러고는 앞서나갔다. 이를 성도 보갑총국 전체의 관리들이 모두 목격했다.
 
  석달개가 형을 당한 곳은 성도 성내의 상련화가독표전도(上蓮花佳督標箭道)다. 세 사람은 스스로 포박하고 형장(刑場)으로 나갔는데, 모두 신기(神氣)가 의연하였고, 일호의 움츠러듦도 없었다. 극형이 이어지고 곧 죽음에 이르러서도 모두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정말로 대단한 남자다.”
 
  청조의 관리이자 뛰어난 문인으로 태평군 진압에도 참가했던 황팽년(黃彭年)은 개탄했다. “저런 이를 우리 청조의 신하로 등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如此人不爲朝臣用, 反使爲賊, 誰之過歟)
 
  그러나 석달개는 죽어서 다시 속았다. 사천총독과 낙문충, 성도장군은 항복한 그의 부하들을 성황당에 모아 몰살시켰다. 모택동은 석달개의 삶을 이렇게 아쉬워했다.
 
  <석달개는 진정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적의 말을 너무 쉽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큰 손실을 입었다. 모든 선량한 사람은 언제나 적들에게 환상을 품는데,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石達開畢竟是個英雄, 當時他對敵人的話太輕信了, 這使他吃虧, 一切善良的人終是容易對敵人抱幼幻想, 這是可悲的事)
 
  그리고 석달개는 전설이 되었다. 누구는 석달개가 죽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는 사형당한 후에도 석달개를 보았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모순
 
  원래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나? 직위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천왕이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고, 각 왕은 사병들을 거느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관료체제를 부수고자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심각한 독재로 나타났다. 때려부쉈지만 무엇을 세워야 할지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같이 잘살자고 했던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는 땅이 있으면 같이 부치고, 밥이 있으면 같이 먹고, 돈이 있으면 같이 쓰자는 것이다. 인민들은 각자의 소비분을 제하고는 국가에 잉여분으로 국가는 인민들의 잡사(雜事)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도 되기 전에 잉여분은 태평천국 고위직의 사금고(私金庫)가 되고 말았다.
 
  남녀평등을 주장했지만 왕들은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다. 노비제를 폐지했지만 군사들의 생활은 노비처럼 비참했다. 세금을 가볍게 한다고 했으나 군사적인 압박하에서 최선책은 그나마 청의 부세(負稅)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경에 고립된 후 싸움을 전개하면서 경제는 점점 더 통제체제로 바뀌었다. 이른바 공산주의적인 전시(戰時)통제경제였다.
 
  1853년 안경(安慶)에서 석달개는 종래의 토지제도를 그대로 둔 채 조세를 걷는 정책을 실행했다. 어쩌면 과거로 돌아간 것이고 어쩌면 제도를 현실에 맞춘 것이다. 관세, 영업세, 선초세(船?稅) 등을 가볍게 했지만 생산이 위축되면 이는 다 허사에 불과하다. 빼앗는 것은 쉽지만, 생산력을 장기적으로 살리지 못하면 역시 무너진다. 그들은 3년간 토지세를 면제해 준다고 했다. 그러나 토지세를 낼 토지도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청조의 폭정을 없애자는 운동이 어쩌면 더 청조보다 폭압적으로 바뀌고, 도덕주의는 위에서부터 붕괴했다. 멈칫하는 순간 오랜 인습(因習)이 순식간에 혁명을 잡아먹었다.
 
 
  ‘새 계약’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동 탄광촌. 산서 대동의 탄광촌 전주에 누군가 몰래 써 놓았다. “법륜대법은 좋은 것이다.” 병영과 같은 국영탄광. 한밤중에 누군가 가슴 졸이며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를 이내 전단이 덮었다.
  그 최후의 순간에 홍수전은 《성경》(聖經)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현실 때문에 신(神)을 찾았으나, 결국 현실은 놓고 신만 붙들었다. 같은 순간 그의 병사들은 장작개비 같은 몸뚱이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팔다리와 가슴으로 버티고 있었다. 수많은 첩도 없고, 금은 물론 먹을 한 끼 밥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 앞에 숭고했다.
 
  헐벗은 자들의 염원, 그리고 또 한 명의 석달개는 수십 년 후 조선 땅에서 동학(東學)을 기치로 혁명을 시작했다. 같은 주장이 살아났고, 봉기군의 수장 전봉준(全琫準)은 석달개를 빼닮았다.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앨 것, 토지를 고르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동학농민군의 요구. 폐정개혁안 12조)
 
  <그는 약자(弱者)의 동무가 되어 강적(强敵)에 대항한 자가 아닙니까? 그는 불평등 부자유의 세상을 고쳐 대평등 대자유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 자가 아닙니까? 죽을 때까지도 그의 뜻을 굽히지 않고 본심 그대로 태연한 자가 아닙니까?>(오지영, 《동학사》. 교수형 집행자의 말을 빌려)
 
  처음 태평군은 무엇을 깨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리고 혁명은 소외와 배반 속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오히려 진압자인 증국번이 ‘외세(外勢)로부터 중국인을 지킨다’는 ‘공동방위’를 들고 와서 새 계약을 추구했다. 석달개는 분명 다수 농민과 유민(流民)들의 동의에 의한 새 계약을 만들고 싶었겠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한 마지막 계약, 즉 부하들은 살려달라는 소박한 계약까지 배반당했다.
 
  그는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의 거리거리에서 새로운 계약을 원하는 유기체들의 움직임을 느끼는 이는 단지 나뿐일까?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탄광촌 전주에 누군가 몰래 써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법륜대법(法輪大法·중국의 리훙즈가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을 결합시켜 창시한 수련법)은 좋은 것이다.”
 
  병영(兵營)과 같은 국영(國營)탄광에서 한밤중에 누군가 가슴 졸이며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를 이내 전단이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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