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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자전거 종주기 ②

희망 잃은 백인들, ‘마이클 잭슨’ 꿈꾸는 흑인 소년

  • 글 : 문종성 자유기고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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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어. 왜 내가 차별을 당해야 하는 거야?” (백인 빈민촌에서 만난 윌릭)
⊙ “내 꿈은 미국으로 가서 제2의 마이클 잭슨이 되는 것”(흑인 빈민촌의 소년 제이콥)
⊙ 남아공에서 자전거 여행의 동반자 이근용, 강병무와 합류

文鐘星
⊙ 1981년생.
⊙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6년 간 약 80여개국을 자전거로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2007년 5월 미국
    뉴욕에서부터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 북미와 중남미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 중.
⊙ 저서 : <비전청년의 세계일주 - 자전거 타고 쿠바여행> <라이딩 in 아메리카>
    <일생에 꼭 한 번 가 봐야 할 곳, 멕시코>
초등학교(Ikhwezilethemba Primary school)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한 뒤 찍어준 사진. 이들의 꿈은 한결같이 빅리그 축구선수다. 그러나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이들의 꿈은 무심한 세상에 맞서 곧 소멸될지 모른다.
서서히 정거장으로 들어온 차는 잠시 정차했다. 나이지리아 라고스, 케냐 나이로비와 함께 아프리카 3대 우범(虞犯)지역으로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조벅(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의 버스터미널. 목적지가 프리토리아였던 나는 인터케이프 버스의 2층 좌석에서 차분히 긴장을 풀고 좀 더 쉬기로 했다. 창밖으로 버스에 오르내리는 사람과 짐들이 시루 속 콩나물처럼 촘촘하게 보인다.
 
  10분쯤 흘렀을까. 웬일인지 뒷골이 뻣뻣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버스에서 나와 짐칸을 체크했다. 예감, 이 감각의 마지막 퍼즐이야말로 인간의 영역 안에 존재하면서도 스스로가 풀기 힘든 난제이리라.
 
  한 남자가 전혀 거리낌없이 내 짐을 밖으로 빼돌리고 있었다. 내가 오기 바로 몇 달 전에도 한국 청년이 터미널에서 떼강도 봉변을 당한 사고사례가 있어 익히 조벅의 악명(惡名)을 들은 터였다. 우스운 말로 강도 당할 확률이 150%라고 하지 않던가. 한 번 강도를 만난 그 거리에서 또 강도를 만난다는 의미다. 그만큼 조벅의 치안 부재는 여행자 사이에서 스트레스와 공포를 유발하며 이 도시의 유람을 기피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염려 때문에 나는 차장에게 출발하기 전에 박스 포장된 짐을 가장 안쪽 깊숙이 넣어달라고 부탁했고 확인까지 했다. 종착지에서 내리니 가장 늦게 짐을 뺄 것으로 예상해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 짐을 굳이 다른 짐들 사이에서 억지로 빼낸 것이다. 당황했지만 혹여 내게 유리할 게 없는 드잡이로 번질까 떨리는 말투에서조차 침착하려 애썼다.
 
  “당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건 내 짐인데요?”
 
  “그런가요?”
 
  감색 재킷에 때가 덕지덕지 낀 낡은 작업복 바지를 입은 중년의 남자다. 내 물건이 이미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던지 그도 흠칫하더니 멋쩍은 표정에 몰랐다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내가 버스에서 내려오지 않아 틈이 생겼음은 잘 알고 있었던 듯했다.
 
  누군가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에서 서성이는 버스 안내원(버스에 같이 동승하여 티켓과 짐 검사를 하는 직원)의 딴청에 의구심만 깊어간다. 남자는 건성으로 짐을 다시 짐칸에 밀어넣고는 사라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버스가 다시 출발할 때까지 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쨌든 조벅을 출발지로 선택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 사이 버스는 자카란다 나무가 늘어선 프리토리아로 들어갔다. 그러나 2월의 남반구에서 자카란다는 보랏빛 광채 없이 무성한 가지만 늘어뜨리고 있었다.
 
 
  프리토리아 라이딩
 
  자전거를 조립하고 시험 주행지를 프리토리아 근교로 정했다. 3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했다지만 아프리카는 전혀 다른 광야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1852년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였던 프리토리아는 지금은 남아공의 행정수도로 비교적 조용한 도시다. 지난 2005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차별정책)의 붕괴와 새로운 민주주의를 수립한 기념의 일환으로 전통적인 아프리카식 이름인 츠와니(Tshwane)로 개명(改名)됐다. 백인들이 지배하기 전 원주민 추장의 이름이란다.
 
  도심보다 비교적 안전한 이곳 교외에서 첫 라이딩을 시도했다. 단시간 동안 왼쪽 무릎 상태와 체력적인 문제가 파악됐다. 아프리카로 넘어오기 전 남미(南美)에서 당한 강도의 충격으로 근 3달 동안 패닉 상태에 빠졌었다(당시 핸들 가방을 제외한 자전거와 4개의 패니어 및 모든 짐을 빼앗겼다). 그때 운동을 등한시한 후유증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좀체 균형 잡기가 힘들었다. 자전거 세계일주를 3년이나 해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핸들링이 불안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길거리의 많은 흑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라이딩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 살갑게 대하기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지만 언제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프리카에 영국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의 세실 로즈는 거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이르는 아프리카 종단(縱斷) 철로 건설이 그것이다. 다이아몬드와 금광 사업 등으로 큰 부(富)를 이룬 그였지만 아프리카 종단 루트를 건설하려던 계획은 끝내 물거품이 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못 이룬 길을 겁도 없이 애송이가 도전한다니. 길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길을 모험하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과연 황야의 거칠었던 어제와 막막한 오늘은 내일을 꿈꾸는 내게 온화하게 길을 내어줄까?
 
 
  도태되는 백인들
 
백인 빈민촌에서 만난 한 남자. 집이 있고 부인이 일이 있으며 첼시 축구 경기를 본다는 그는 이곳에서 행복한 편이다. 의외로 그는 넬슨 만델라 지지자였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게 이유다. 맞은편에는 몇 대의 캠핑카 차량이 있었다.
  “어서 와, 여기 좀 앉게.”
 
  흔들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일흔하나의 윌릭은 낯선 방문자를 한껏 포용하며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는다.
 
  “10년 동안 내가 하나하나 공들인 작품들이야. 어때, 멋지지? 늘그막에 이제 내가 가꾼 정원에 앉아 이렇게 커피 한 잔 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라네.”
 
  슬레이트 주택에 잔디가 곱게 깎인 너른 정원이 상징인 백인의 보금자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정말이지 퇴행적 혁명이었다.
 
  그의 정원은 정문에서 단지 세 걸음이면 끝났고, 집은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공간만 있었다. 그가 가꿨다던 정원의 장식물들은 하나같이 어디에서 주워온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만의 재배치를 통해 10평이나 될까 한 공간에 허리춤 높이의 정식 정문을 세우고, 길을 내고, 흔들의자까지 놓았다.
 
  잠을 자고, 커피를 마시고, TV를 보는 것이 윌릭의 하루 주요 일과란다.
 
  “나쁘지 않아. 편안해. 인생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일도 없지. 내가 누릴 수 있는 게 이 공간 안에 다 있으니 말이야.”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른여섯의 엔크가 그늘 아래서 쉬고 있었다. 파리 떼가 달라붙는 누렇게 때가 낀 발목붕대를 보고서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그저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다.
 
  “오토바이 사고가 났었거든. 처음엔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나을 줄 알았는데 상처가 간지러워 긁었더니 급속도로 붓더라고.”
 
  그의 주위엔 가축의 배설물과 쓰레기 등 오물로 가득했다. 최악의 위생이다. 그런데도 자리를 피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 자기 구역이란다.
 
  케이프타운에서 일하던 엔크는 엘리베이터 기술자였는데 적대감과 인종차별 때문에 회사 기득권층인 무슬림과 싸웠단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둔 지 벌써 2년.
 
  “나도 일을 하고 싶어. 예전처럼 케이프타운에서 말이지. 집도 갖고, 마흔 즈음엔 결혼도 하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이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어. 왜 내가 차별을 당해야 하는 거야?”
 
  그는 다른 인종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신이 차별받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남아공은 이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매일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스카이라인이 변할 정도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고, 정치도, 문화도 흑인 중심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30대 젊은 백인은 생기를 잃고 도태되고 있었다.
 
 
  백인 빈민촌
 
백인 빈민촌에서 만난 아이들. 유럽 중산층의 풍모를 풍기는 아이들이 삶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댄다는 게 충격이었다.
  선스카이 후기(Sonskyw Hoekie)는 백인 빈민촌(貧民村)이다. 시가지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곳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운이 좋으면 허름한 집과 TV라도 있지만 사정이 좋지 않으면 버려진 캠핑카(RV)에서 생활한다. 그나마 터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내가 방문한 다른 백인 빈민촌의 경우 그 안에서마저 월세를 내면서 살아가야 했다.
 
  어느 한 지역 교회에서는 매일 아침 무료급식을 하는데 그 줄에 백인들이 끼어있는 걸 보고 적잖이 놀랐다. 지치고 파리한 몰골의 그들은 힘없이 받아든 하루에 단 한 번뿐일 끼니를 흑인들과 어울리지도 못한 채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먹고 있었다.
 
  우리나라 생활보호 제도처럼 형편이 어려운 이(여 55세, 남 60세)들은 월(月) 1000랜드(대략 우리 돈으로 17만원)의 정부보조금으로 살기도 하지만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은 타운 밖에서 잡일이나 기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또한 대부분 은행에 보증이 없어 이민이나 그 밖의 사회활동에 필요한 서비스에 대해 제약을 받는다.
 
  두 번째로 방문한 빈민촌에선 누가 봐도 유럽 중산층(中産層)의 풍모를 가진 백인 아이들이 캠핑카를 개조해 만든 학교에서 책을 읽고, 하릴없이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맨발에 옷은 꾀죄죄했으며 위생 관념 역시 희박했다. 이들이 사회 최하계층으로 살아간다는 게 상상이나 되는 일이던가?
 
  백인들만을 위한 성배(聖杯)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지부(終止符)를 찍은 건 남아공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다들 넬슨 만델라를 칭송하고, 흑인의 인권 보장에 대해 환호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권력을 쥔 흑인 지배계급은 어떤 부분에서는 대단히 서툰 행정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사회 빈곤계층으로 몰락한 일부 백인들은 재기의 날을 세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백인 빈곤계층에 대한 관심과 도움은 백인만이 줄 수 있습니다.”
 
  남아공 전역에는 백인 빈민촌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무료급식이나 자활센터, 심지어는 노상 구걸 행위 등에서 흑인 무리 틈에 섞여 있는 백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게다가 백인 빈민에 대한 인식 때문에 백인을 도와주는 개인이나 단체는 백인에 한정되어 있다. 그들의 자활(自活)을 돕는 한 봉사자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백인들 돕기가 까다롭단다. 같은 상황이라도 흑인의 삶의 질이 더 떨어져 보이는 것이다.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뿌리 깊다는 방증이다.
 
  충격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아프리카 하면 으레 이곳의 모든 난제가 ‘흑인’에게만 집중되어 있다고 믿어온 내게는 그랬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흙장난에 몰입하고 있었다. 반대편 테이블에선 그의 부모가 한 잔의 차를 앞에 두고 내일에 대한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딛는 내가 내놓을 수 있는 해결책은 당장은 없다. 무엇보다 이런 시스템과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일은 앞으로 많은 인종과 지역을 경험하면서 다양하고 깊은 속살을 보는 내가 이 땅을 있는 모습 그대로 포용해야 할 첫 관문인 셈이다. 해거름 무렵, 나는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을 던져주는 것, 인생에서 여행이 필요한 이유다.
 
 
  동지가 왔다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동지. 좌로부터 강병무, 필자(문종성), 이근용.
  당초 나는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을 혼자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미에서 사건이 터진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여행의 우선순위가 안전이 된 것이다. 출발 전 인터넷에 모집 공고를 올렸고, 관심 속에 수십 개의 메일이 도착했다. 학생부터 정년퇴직을 앞둔 공직자까지 연령과 직업은 다양했다. 게다가 여성도 제법 많이 문의해 왔다.
 
  단순 문의를 제외한 약 20명의 지원자 중에 같이 라이딩을 하기로 결정한 멤버는 두 명이었다. 이근용, 강병무. 안정된 직장에서 차근차근 스펙을 쌓아가고 있던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과감히 삶의 회로를 바꿔 보겠단다. 인생의 의미 있는 도전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겠다는 의사가 맘에 들었다. 나이도 나와 비슷했고, 무엇보다 도전정신 속에 타인을 배려하는 여행을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메일로 꾸준히 정보를 나눴고 드디어 수차례 일정을 조율한 끝에 2010년 2월의 마지막 주 프리토리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긴 여로에 동지가 생긴 셈이다. 든든하다. 하나 둘은 동부 아프리카까지만 동행하기로 했다.
 
  아프리카를 향한 그리움과 열정은 같지만 셋의 여행 목적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종단을 하는 나와 중간에 우간다로 빠질 이근용, 그리고 동아프리카에서 유럽행을 계획하는 강병무가 이제 한 팀이 됐다. 우리의 공통분모는 아프리카에서 같이 봉사를 하는 것이다. 같은 봉사 속에 셋에게 주어진 의미는 각기 다른 것이다.
 
  놓칠 수 없는 나의 꿈이 시작됐다. 동지를 만나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은 물론 나 역시 이들에게 현재 한국의 흐름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사회생활에 잔뼈가 굵은 이들은 한국을 오래 떠나 있는 내게 내 나라의 사회적 감각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 오랜 여행에서 얻은 노하우와 마인드를 전수해 줄 것이다.
 
 
  빈민가의 주일예배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이 이발소. 바리캉으로 몇 분 만에 이발을 끝낸다. 이들에게도 나름 헤어스타일이 있는데 원하는 대로 스타일을 만들어준다.
  프리토리아에서 북쪽으로 80km 지점. 비포장 길을 따라 마을 안쪽 깊숙이 위치한 초등학교(Ikhwezilethemba Primary school)를 방문했다. 일요일이라 현지 예배가 예정돼 있단다.
 
  나는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는 정말 신났다. 축제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회중(會衆)은 노래를 부를 땐 잠시라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절대자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노래가 되고, 또 춤이 됐다. 스와힐리어 메시지는 귀를 먹게 했지만 그들의 찬양은 마음의 눈을 열게 했다.
 
  완벽한 하모니다. 웬만한 합창단보다 더 깊은 여운이 남는다. 동정심에 춰주는 게 결코 아니다. 진정 영혼의 울림이 전해진다. 어떻게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들이 저토록 곱고 화려한 음색(音色)을 낼 수 있을까. 아프리카에 내려진 신(神)의 은총이라고 여길 수밖에.
 
  “저기에서 노래 부르는 아이 중 몇몇은 HIV 바이러스 보균자이고, 또 몇몇은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지낸답니다.”
 
  성가대에는 아이를 업은 아이, 가정이 깨지고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도 있다. 자신이 겪어야 할 고단한 세상사를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래서 환한 미소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예배가 끝나자 아이들이 금방 주위로 몰려들었다. 녀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내 머리를 만지는 일. 나는 기꺼이 그들의 손에 내 머리를 맡겼다. 이들에게 긴 생머리는 놀라운 발견이자 호기심의 대상이다. 수십 번의 쓰다듬음을 거치고 나서야 머리 만지는 손길이 잠잠해진다.
 
  아이들은 자신의 관심사를 낯선 이방인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여자아이들은 땅바닥에 원을 그리고 비슷한 크기의 돌들을 던졌다 잡았다 하며 원 안으로 돌들을 넣고 또 빼는 놀이를 했다. 우리의 공기놀이와 흡사한 것이 흥미롭다.
 
  남자아이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녀석들은 땅바닥을 짚지 않고 180° 텀블링을 줄기차게 해댔다. 계단이나 돌바위 어디든지 폴짝 뛰어올라 몸을 공중에서 정확히 한 바퀴를 돌린 후 착지한다. 위험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예전부터 해오던 거라 괜찮다는 쿨한 대답만 돌아온다. 딱히 놀거리가 없어 이것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문화가 된다.
 
 
  ‘리틀 마이클 잭슨’ 제이콥
 
멋진 마이클 잭슨 춤을 선보인 개구쟁이 제이콥(맨왼쪽)과 그의 친구들.
  “마이클 잭슨이 죽은 건 나에게도 엄청나게 슬픈 일이었어요. 내 꿈이 미국으로 가서 제2의 마이클 잭슨이 되는 거거든요. 어때요, 제 춤 한 번 보실래요?”
 
  열 살의 제이콥은 친구들 무리를 헤집고 내게 다가와 자신의 춤을 보여주겠다 한다. 나는 응한다는 제스처로 비디오카메라를 꺼냈고 녀석은 갈고 닦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녀석이 선택한 곡은 지금의 마이클 잭슨을 있게 한 대표곡 ‘빌리 진’.
 
  열정을 다한 무대는 훌륭했다. 허스키한 목소리며 절도 있는 댄스가 팝의 황제를 꼭 빼닮았다. 특히 놓칠 수도 있는 세밀한 부분까지 모사하는 걸 보고는 감탄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대가 된 교실은 물론 창밖에는 제이콥의 춤을 보려고 학생들이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고 있었다.
 
  “난 아직 인기가 없지만 이제 곧 생길 거예요. 난 미국에 가는 일만 생각해요.”
 
  제이콥의 가정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유복하진 못하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어머니와 누나 셋과 같이 사는데 형편이 어려워 모두 학교에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유일한 아들인 제이콥이 가족의 기대와 함께 혜택을 받고 있다.
 
  “우리는 제이콥을 좋아해요!”
 
  “왜?”
 
  “제이콥이 우리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참으로 아이들 같은 때 묻지 않은 발상이다. 제이콥보다 마이클 잭슨 춤을 더 잘 춘다며 촐랑댔다가 실력이 들통나 본전도 못 찾은 친구들이 일제히 손가락으로 제이콥을 가리키며 그를 연호한다.
 
  가난한 마을에도 아이들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을 이루는데 본인의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제반 시스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가슴을 활짝 펴던 당당한 제이콥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나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답했다.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말고 당당하게 너의 꿈을 펼치라는 의미다. 제이콥이 웃고, 나도 웃는다.
 
  녀석의 작은 몸짓은 많은 아이를 행복하게 해준다. 희망을 준다. 그러나 영속적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꿈을 이루기엔 현실 문턱이 상당히 높다. 오래도록 꿈을 꿀 수 있도록 그 문턱이 조금만 더 낮아지는 날은 언제나 올까. 꿈조차 가난해져 버리는 곳, 바로 아프리카 작은 빈민가의 오늘이다.
 
 
  자전거 여행은 정직하다
 
  헬리오스(Helios·그리스 신화 중의 태양신)가 단단히 뿔 난 모양이다. 어디 감히 애송이의 기개로 광대한 대자연에 맞서느냐는 투다. 난 정복이 아닌 조화를 위한 여행이라고 나직이 말해 본다. 그러건 말건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의 복사열에 자전거 타이어가 아스팔트 도로에 껌처럼 달라붙을 기세다.
 
  부시벨트(Bushveld)와 바테르베르흐 고원이 편재되어 있는 트란스발 지방은 제법 고도가 높다. 더위와 고지대, 초행의 세 가지 악재에 검은 아스팔트는 거친 숨을 빨아들이고 청춘의 열정은 오래지 않아 하얗게 타버린다. 모험본능을 일깨워 이 길을 달려간 수많은 바이시클 볼트레커(Voortrekker·아프리카어로 개척자라는 뜻) 선배들의 용기에 그만 경외감을 감출 수 없다.
 
  의욕 충만했던 근용과 병무는 벌써 저만치 뒤처진다. 아직 자전거 여행이 서툴기만 하다. 자전거 앞뒤로 걸쳐 놓은 4개의 패니어(자전거용 짐가방)로도 모자라 핸들 가방과 스포츠 가방, 배낭 등을 리어 랙에 올려놓으니 이것이 우리 삶의 무게가 된다. 헉헉대며 오르막을 오르는 두 친구는 힘들어도 웃어넘긴다. 선택에 대한 책임이 주어지고, 최선으로 당당히 꿈을 펼쳐보이는, 그래 그것이 젊음이다.
 
  자전거 여행은 정직하다. 속도와 방향을 정하고, 실행하는 모든 단계가 기계보다 더 정밀한 육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정신은 길 위에서 의미를 찾는다. 땀과 눈물과 거친 호흡으로 버무린 대장정의 감흥은 한 잔 콜라와 함께 이야기가 되어 내 것이 되고 또 네 것이 된다. 그러나 이제 시작한 길, 벌써 설레발을 떨 여유가 없다.
 
 
  루스텐버그의 白金鑛
 
  오래지 않아 루스텐버그(Rustenburg)가 나온다. 백인 개척자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잠시 쉬어갈 수 있었던 ‘휴식’(rust)에서 그 이름을 따온 곳이다.
 
  루스텐버그의 백미라면 역시 세계 최대의 백금광(白金鑛)을 꼽을 수 있다. 얼마나 함유량이 많은지 과장을 보태자면 민둥산이 모두 백금으로 빛나 보일 정도다. 이것이 정복자에겐 행운이었고 원주민에겐 잔인한 악몽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1886년 요하네스버그 근처에서 금이 발견된 이후 이 지역도 상당한 엘도라도 열풍이 불었다. ‘하얀 샘의 능선’이란 뜻의 비트바테르스란트(Witwatersrand)에서 시작된 금맥(金脈) 찾기 신드롬이 급속도로 번져 결국 다이아몬드 등 천혜의 자원이 매장된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어 전쟁(Boer War)이다.
 
  보어 전쟁의 주된 이유가 보어인들이 오이틀란더(uitlander·트란스발의 금광과 다이아몬드광에서 일하는 이주민으로 주로 영국인)의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빌미로 영국군이 공격했다고 하지만 실은 광물 자원에 대한 집착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변의 금잔치가 얼마나 화려한지 루스텐버그의 북쪽에 위치한 ‘아이들의 라스베이거스’라는 찬사가 쏟아지는 선시티(Sun city)에 가면 금빛을 머금은 사자상과 원숭이상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플랫웨어리스 여행
 
남아공 북서쪽에 위치한 지러스트를 넘어 보츠와나로 가는 길에서 라이딩 하는 필자.
  도로는 한적하고, 차량 이동도 뜸하다. 작은 마을인 그루프 마리코(Groof Marico)를 넘어 자전거 여행의 첫 점심 식탁을 맞았다. 원래는 플랫웨어리스(flatwareless) 여행을 각오하고 나온 길이다. 식사에 필요한 수저나 포크, 식기류 따위를 쓰지 않는 정말 내추럴한 여행을 하자는 의미였다. 물론 그 안에는 최소(最少)의 비용으로 버티자는 계산도 깔려 있다.
 
  다시 최소의 비용에는 두 가지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는 되도록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해서 아낀 비용을 다시 아프리카에 기부로 되돌려주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첫날이니만큼 점심식사는 성찬(盛饌)이었다. 성인(聖人)은 음식을 정(情)으로 먹고, 속인(俗人)은 음식을 허기로 먹는다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느낄 수 있었으니 퍽 감사한 일이다. 한 입 먹을거리에서 성인의 예(禮)와 속인의 낙(樂)을 함께 찾는 사치를 누려본다.
 
  장도(壯途)를 떠나기 전 프리토리아 한인교회 박훈 목사님이 김밥과 햄버거 등을 정성스레 싸줬다. 뿐만 아니라 행여 첫날부터 고생하진 않을까 프리토리아를 벗어나는 때에 차량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마음이 마냥 고마울 뿐이다.
 
  식사 후 이완된 근육을 더욱 바짝 조였다. 오후 내내 쉬지 않고 달려 우드바인(Woodbine)에 도착했다. 해는 홍조를 띠며 지평선 위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잘 것인가는 고민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자느냐만의 문제일 뿐이다. 텐트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고민할 무렵 한 트럭이 다가왔다. 보어인이다. 아프리카 시골에서 백인을 만난다는 건 드문 일이다.
 
  “그럼 게임 리저브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하세요. 물론 무료로 제공해 줄게요.”
 
  금렵구(禁獵區)에 자신이 운영할 게스트 하우스 공사가 한창인데 건물 앞 공터에 텐트를 치면 된단다. 마땅히 잠자리를 찾지 못했던 우린 물론 오케이로 응답했다. 그의 트럭에 자전거 세 대와 모든 짐을 다 올려놓고 숲 속으로 거친 비포장 길을 달린 지 20여 분. 그러나 주위가 어둠에 잠긴 후 도착했을 때 모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흑인 노동자 스무 명이 우리와 밤을 함께 보낸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의 첫날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부르르 떠는 몸 위로 한두 방울의 이슬이 맺히더니 어느새 온몸이 축축해졌다. 우리는 세렝게티 초원의 길 잃은 영양 새끼처럼 가냘픈 맨몸과 두려운 시선으로 어둠의 장막을 응시했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오고, 달이 뜨고, 별들이 명멸하는 순간에도 숲 속의 긴장은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텐트도 칠 수 없었고, 잠은 더더욱 잘 수 없었다. 행여 물건을 강탈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다. 허연 입김이 피어오르고, 자꾸 감기는 충혈된 눈을 비비며 이 밤의 신세를 무겁게 투덜댔다.
 
  역시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은 무리였던 것일까. 자전거로 행정수도 프리토리아를 출발해 도착한 첫 숙박지인 우드바인의 밤은 길고, 춥고, 무서웠다. 게임 리저브(금렵구)에서 우리를 훔쳐보는 도깨비 불 같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벌써 수차례. 야영할 곳을 찾아 통성명도 하지 않은 보어인을 따라 깊은 숲 속까지 왔다가 그가 떠난 후 우리는 스무 명이 넘는 흑인 무리를 마주한 채 그렇게 떨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던 나는 지배계급에 의해 고된 노동으로 삶이 거칠게 보이는 흑인 무리가 두려웠다.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이 자칫 첫날밤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운수가 나쁘다면 말이다.
 
  ‘각오하지 않았다면 시작하지 말고, 배움이 없다면 포기하지 마라.’
 
  내가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할 때 일기장 맨 첫 장에 기록한 구절이다.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은 내 인생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도전이다.
 
  혹자는 치열하게 살아야 할 젊은 시절에 웬 방랑벽으로 장기(長期) 여행이냐며 빈정댄다. 또 어떤 이는 내게 말한다. ‘현실도피’가 아니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현실보다 꿈에 대한 도피가 더 비겁한 것’ 아니냐고.
 
  젊음이란 단어와 함께 두어서는 안 될 단어는 편안함이란 것을 기억하기로 했다. 이 길 끝에서 분명 값지게 주어질 인생의 또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청춘의 가슴은 숨을 쉬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기 위해 있다는 것을!
 
 
  아침이 오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남아공의 대부분 학교에서는 인종장벽을 넘어 백인과 흑인이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백인이 주를 이루는 학교는 부유하고, 흑인이 많이 다니는 학교는 상대적으로 운영이 어려운 편이다.
  우리는 매트리스만 펼친 채 흙바닥에 누웠다. 찬 공기를 마시며 도란도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쏠쏠하다. 졸음을 쫓아내자 눈이 더욱 말똥거린다. 뺨 위를 훑고 가는 작게 이는 바람에도 몸을 잔뜩 웅크린다. 별들이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희다는 사실을 로키산맥 이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슝~’ 순식간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자니 별안간 가슴이 뜨거워진다.
 
  10분에 한 번씩 펼쳐지는 작은 우주쇼에 아이가 되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안정된 계획대로 움직이기보다 순간순간 기지와 용기가 필요한 이런 모험이 좋다. 불안한 확률을 움켜쥐는 짜릿함이 좋아 자전거 여행을 한다. 아늑한 실내 숙소에서 잤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 한 점 풍경이 되어 세상이 잠든 시간에 온몸을 맡기는 것, 도무지 격하게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새벽 5시. 무사히 하루를 넘겼다. 맨땅바닥에서 추위를 버티고 보낸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의 첫 밤이었다.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지런히 새벽을 준비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니 어젯밤에 마주한 것과 다르다. 처진 큰 눈에 손들어 인사하는 모습이 참 선해 보인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달라질까. 야생 상태에서의 인간 역시 두려움을 가진 한낱 피조물(被造物)에 지나지 않음을, 빛이 얼마나 안심과 기쁨을 가져다주는지를 체득한다. 미안한 마음에 헤어질 땐 손 인사에 화답했다. 다음번에 같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그땐 꼭 온몸으로 뜨겁게 안으리라. 이제 하나하나 배워가는 나는 허점투성이 자전거 여행자다.
 
  보츠와나를 향해 서진하는 며칠 동안 텐트 치고, 길 위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반복됐다. 생존에 필요한 이 생활에 점점 익숙해질수록 비로소 옆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진다. 우리는 북서쪽의 거점인 지러스트(Zeerust)에 당도했다. 남아공에서 보츠와나로 가는 길에 거치는 마지막 도시다.
 
  보츠와나로 넘어가기 전 아주 약간의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샤헤니(Sha-hennee) 게스트 하우스에서 1인당 40랜드를 주고 텐트를 쳤다. 물론 식사는 과일과 빵뿐이다. 무선(無線) 인터넷이 된다는 것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 것이다.
 
  각자 챙겨온 노트북으로 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지인(知人)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다들 메일과 미니홈피, 블로그, 인터넷 전화 등으로 유비쿼터스 세상과 소통하며 지인들을 안심시키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내게도 여러 메일이 들어왔다.
 
  ‘이것은 당신의 도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도전입니다’라는 글은 언제 봐도 격려와 위로가 된다.
 
  다음 날, 국경 근처의 초등학교(Renonofile Primary School)에 잠시 들렀다. 수백 명의 학생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무섭게 모여들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뜻밖의 손님을 반갑게 맞으면서 한낱 자전거 여행자에게 고충을 털어놓는다. 정원 460명 중 고아들이 제법 많단다. 학교 운영이 힘들 수밖에 없다. 학교 주변은 허허벌판이다. 집에서 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은 손꼽을 정도고, 대부분 한두 시간 거리를 걸어온단다. 이 얘기를 하는 동안 내 손을 잡았다 놓기를 반복한다.
 
  나탈리라고 본인을 소개한 한 선생님은 특별히 도서관과 책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당장에 끼니도 문제지만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에게 먼 미래의 길을 착실히 준비시키려는 선생님의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내가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프리카를 종단하면서 꺼지지 않을 고민이 될 것이다. 그 고민을 계속 품겠다는 의미로 선생님과 헤어짐의 포옹을 했다. 나 같은 일개 이방인 청년에게서조차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진심이 눈물겹다.
 
 
  남아공-보츠와나 국경에 서다
 
  드디어 국경에 도착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육로이동으로 나라를 바꾸는 날이다.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남아공 국경사무소에서 어렵지 않게 출국도장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보츠와나 국경사무소로 자리를 옮겼다. 보츠와나도 얼마 전에 무(無)비자국으로 바뀌어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여겼다. 총총걸음으로 들어간 내게 여직원은 산뜻한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내 여권을 보더니 무거운 표정과 함께 눈썹을 치켜세웠다.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네? 무슨 문제가…?”
 
  “세금을 내셔야 합니다.”
 
  국경사무소의 분위기가 갑자기 적막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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