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중국 근현대사기행 ①

‘잃어버린 혁명’의 땅 新疆

  • 글 : 공원국 중국전문 역사저술가ㆍ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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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리 계곡의 주인은 위구르족이 아니었다. 몽골인들이었다. 그러나 위구르족은 전체 신강이 조상들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겨우 백 몇십 년 전만 해도 나라티의 좋은 목장들은 카자흐족들의 것이 아니었다. 역시 몽골족이 알타이 너머로 쫓겨가고 나서야 카자흐족이 대거 이주해 왔다. 그리고 그런 일을 기획한 사람들은 지금 주인 행세 하는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었다.

⊙ 몽골족, 카자흐족, 위구르족, 한족의 각축지, 17세기 청나라 강희제가 중국 영토로 편입
⊙ 태평천국의 난 이후 回族 봉기, 야쿱 벡의 독립정권 수립, 좌종당이 진압

공원국
⊙ 1974년 생.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졸업, 서울대 국제대학원 중국지역학 석사.
⊙ 저서 : <춘추전국 이야기> 등.
파미르 고원의 석두성. 코칸트칸국의 군관 출신인 야쿱 벡은 파미르고원을 넘어 신강으로 들어와 혁명의 성과물을 가로챘다.
1 리바이어던들이 나타났다
 
  2008년 5월 15일. 허름한 복장의 남자 두 명이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 소소(昭蘇)현 초원 위의 조그만 언덕 위에서 수상한 짓을 하고 있다. 이 두 명은 손수레만한 구형 택시에서 내리더니 슬금슬금 언덕을 기어 올라간다. 5월이지만 천산(天山) 기슭의 혹독한 추위로 풀은 아직 누렇다. 양떼는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풀을 끊어대고 있었다. 5부 능선을 넘자 한 사람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한 사람은 걸음을 늦춘다. 살금살금 천천히 움츠리고 가는 품이 마치 바람을 맞으며 영양 떼에 접근하는 사자들 같다. 어라? 7부 능선을 넘자 아예 앞서가던 이는 무릎으로 기어간다. 양 도둑인가? 뒤에 가는 사람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쭈그려 앉았다. 아마도 망을 보는 듯하다. 드디어 8부 능선. 8부 능선에서는 완전히 포복이다. 포복으로 몇 미터를 가더니 가슴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꺼낸다. 그러고는 서쪽을 향해 정조준. 차칵, 차칵. 소음기를 단 권총 소리가 저런 것일까? 표적은 서쪽 100미터 전방의 조그만 비각(碑閣)이다. 정적 속에서 저들의 임무는 서서히 마무리되는 듯했다. 다행히 겨울이라 서풍이 불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6부 능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냅다 등을 돌려 뛴다. 발각된 것일까? 그러자 8부 능선에 있던 인간도 재빨리 방향을 돌려 내려온다. 포복, 앉은 걸음, 마지막으로 구보까지.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이가 틀림없다. 단지 앞에서 먼저 뛰어내려가는 인간은 뛰는 모양이 왠지 신참 같다. 드디어 그들은 ‘도주용’ 차량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상 도주는 하지 않는다. 잠깐 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야, 이 친구야 거기서 뛰면 어떡해? 초병(哨兵)이 총이라도 쏘면 어떡하냐구?”
 
  “친구. 자네야 발각돼도 돌아가면 되지만 나는 여기서 일해야 된다구. 여기는 내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냐. 주둔지를 몇 개나 지났잖아. 발각되면 큰일나 . 빨리 돌아가자.”
 
  더 무슨 말을 하랴. 고참이 순순히 백기를 든다. 망원렌즈 달린 카메라 하나만 있어도 신참을 고생시키지는 않았을 텐데. 이 두 무뢰한은 현성(縣城)으로 돌아오면서 열심히 무공(武功)을 떠벌렸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보통사람의 중국읽기

 
   우리가 종횡(縱橫)으로 여행할 중국이라는 나라는 불가해(不可解)한 존재다. 기원전(紀元前)부터 쌓여온 너무 많은 기록의 ‘구정물’ 바다에 한 번 빠지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고 만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하다. 좀더 거칠고 강하던, 혹은 좀더 솔직하거나 단순했던 문명들은 일단 이 중국 문명과 마주치면 반투막을 통해 물이 빠져나가듯이 정체성(正體性)을 잃곤 했다.
 
  오염의 바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역사가들이 객관성을 더 강조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역사가들은 오염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염을 피할 수는 없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객관성은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한 넋두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필자는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중국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때는 ‘혁명(革命)의 시대’였다. 그러나 북경(北京)이나 상해(上海)에서, 그리고 북경과 상해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먼 서부의 사막과 초원에서 시작해서 히말라야로 들어가고, 또 장강(長江)의 상류로 나가고, 남방의 열대림으로 여행할 것이다. 그런 후 다시 북방의 타이가와 설원으로 올라갔다가 마지막에 동방과 중원(中原)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대 중국이 만든 울타리를 수시로 넘어설 것이다. 사막에서는 낙타를 타고, 초원에서는 말을 타고, 히말라야에서는 야크를 타고, 열대림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강에서는 배를 타고, 타이가에서는 개 썰매를 탄다. 어린아이처럼 낙타, 말, 야크, 코끼리, 배, 그리고 개와 하나가 되어 세상을 보고, 그러고 나서 다시 오염된 어른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낙타와 코끼리 같은 수많은 존재들의 희망과 좌절 속을 헤집고 다닌 후에 우리들 가슴속에는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넘어서는, 어른과 아이를 아우르는 제3의 존재가 자리잡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초로에 집으로 돌아와 녹슨 칼을 녹여 호미를 만드는 강호(江湖)의 검객(劍客)처럼 이제는, ‘더 죽이지 않으리라.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 없는 자비심을 발하리라’ 하고 다짐할지도 모른다.
 
  건륭제의 격등비를 찾아서
 
  그날 ‘거사’에 참가한 고참은 바로 나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리고 신참은 택시 운전사다. 그날 나는 중국 여행허가증을 가진 외국인으로서, 다와치라는 서(西)몽골 왕공(王公)이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가 보낸 군대에게 패함으로써 건륭제에게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는 어울리지 않은 별명을 안겨준 장소와 기념물을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거기에는 실제로 이곳에 와 보지도 않은 책상머리 사령관이 마치 풍경을 보면서 묘사한 듯이 자화자찬을 풀어놓은 글을 새겨 넣은 격등비(格登碑)라는 비석이 있다. 그러나 때마침 티베트에서 일어난 봉기 때문에 국경의 상황은 냉랭해졌다. 또 며칠 전 사천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후라 더욱 어수선했다.
 
  소소현에 도착하여 택시기사를 찾으니 군사주둔지들마다 검문을 하기 때문에 국경 지대까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검문소에서 돌아오면 된다고 설득한 후 검문소가 있는 곳은 모두 우회해서 격등비 아래에 도착했다. 그러나 격등비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군인들은 나를 보자 막무가내로 돌아가라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격등비를 보고 애국정신이 충만해서 돌아갈 사람 같지 않았나 보다.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그의 군인정신을 극복하고자 잔꾀를 부려보았다.
 
  “나는 외국에서 온 학자인데 논문에 좀 쓰려고 해요. 사진 한 장 찍으면 돼요.”
 
  “외국인에게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난 데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그래서 격등비 바로 아래서 돌아서야 했다.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달려온 곳에서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석이 어렴풋이 보이는 맞은편 언덕에 올라가 사진을 찍기로 한 것이다. 택시 기사는 망을 보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간 작은 친구가 그만 중간에서 줄행랑을 쳤고, 나도 돌아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망보기를 담당한 사람이 줄행랑을 치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일순 긴장했다. ‘군사지역에서 뛰다니. 이제 잡히면 꼼짝없이 의심을 받겠구나.’ 다행히 우리는 무사히 돌아왔다.
 
격등비. “웅준한 격등산, 다와치의 반란군은 산 위에서 견고한 영채를 지었지. 당당한 나의 군대, 적의 영채는 자멸할 운명이었지.” 건륭제는 마치 현장에 가 있듯이 특유의 허풍을 섞어서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사진 찍기에 실패했고, 선배 박철현이 훗날 이 사진을 찍었다.
 
  淸나라가 만들어 놓은 유산
 
  초원에 널려 있는, 무심하게 서 있는 고대(古代)의 석인(石人)들. 광풍을 맞으며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왔다. 만약 지금처럼 천산 계곡에 금을 그어놓고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면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양은 풀을 찾아, 말은 물을 찾아 움직이는데 어떻게 금을 긋는단 말인가? 여름에는 산허리에서, 겨울에는 계곡을 따라 내려가 이쉬쿨호(湖)에서 쉬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나무 울타리가 아니라 철조망이 초원을 가로지르고, 셰퍼드가 아니라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다. 18세기 인클로저 운동은 동서를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고, 그때 굳어진 경계는 다시 풀리지 않았다.
 
  서구(西歐)에서 민족국가, 혹은 영토국가라는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이 생길 때 아시아에서도 괴물은 자라고 있었다. 이 괴물은 자신 아래 모든 것을 종속시켰다. 누구도 국가의 명령을 어길 수 없게 되었다. 한때 어떤 국가들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움직이던 유목민들은 모두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야 했고, 국제 조약을 통해 국경선이 그어졌다. 또 국가의 방침을 거부하는 이들은 반란자의 낙인이 찍혀서 죽거나, 쫓겨나거나, 감금당하거나, 교화되었다.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행해지면서 이 국가라는 괴물이 자라고 있을 때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에서 똑같은 과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국제적인 조류를 충실히 따르고 있던 이들이 바로 청(淸)이었다. 그 괴물의 두뇌 역할을 맡은 만주족 지배층들은 중국을 전무후무한 범위로 확장시켰다. 현재의 중국인들은 17~18세기 청이 만들어놓은 재산을 절대로 남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다. 지금 괴물 숭배의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2 아편전쟁과 지는 달, 그리고 혁명의 시대
 
  영토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주인들이 보여준 유능함은 모스크바의 차르(제정러시아의 황제)가 보여준 무자비함에 버금간다. 흔히 학자들은 청이, 앞서 명(明)이 남겨준 판도를 두 배로 늘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두 배가 훨씬 넘는다.
 
  앞으로 우리들이 주목하게 될 지역들도 청이 새로 얻은 땅들이다. 흑룡강과 길림의 넓은 토지와 내몽골의 동부 초원, 오늘날 동북으로 불리던 이 땅들은 동몽골 여러 부(部)와 여진인들의 무대였다. 또한 황하 만곡부(彎曲部) 오르도스도 몽골인들의 땅이었고, 하서회랑 (河西回廊) 북쪽의 사막-초원과 남쪽의 청해도 몽골 유목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티베트 전체는 물론이고, 운남(雲南) 북부와 사천(四川) 서부의 고(高)지대도 모두 유목민들의 땅이었다. 명목상으로 명의 판도에 들어 있던 티베트계 주민들 땅은 토사(土司)라는 현지의 호족들이 다스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신강위구르자치구라고 불리는 땅, 즉 천산 북부의 준가르 분지와 천산 남부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 타림분지 일대의 투르크 민족들의 땅은 아주 먼 옛날 한당(漢唐) 시절 몇 개의 군사기지를 만들었다가 퇴각한 후 중국인들과는 별 관계가 없는 땅이었다.
 
 
  신강(新疆)의 탄생
 
초원의 돌궐 석인(石人)은 대부분 동쪽을 보고 있다. 혹독한 초원에서 겨울을 나던 고대의 유목민들은 태양이 빨리 뜨기만을 기렸으리라.
  그러나 17세기 중반 강희(康熙)라는 정력적인 군주가 등장하면서 청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동부를 제외한 서남북 전역으로 급격히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1681년 중국 남부를 뒤흔든 삼번(三番)의 난을 진압한 후 자신감을 얻은 강희는 역대 중국의 어떤 왕조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하겠다고 공언했다. 바로 북쪽 몽골 세력의 위협을 뿌리째 뽑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1697년 준가르의 수령 갈단을 죽음으로 몰아감으로써 그의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의 손자 건륭은 할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잔혹함 면에서는 몇 배를 뛰어넘었다. 1755~58년까지 이어진 서몽골 원정에서 건륭제는 그야말로 준가르부를 ‘멸종’시키고 말았다. 북경에서 손가락만 까닥거리는 이 잔인한 책상머리 지휘관이 내린 명령은 칭기즈칸 이래 보기 드물었던 대량학살이었다.
 
  “모조리 죽여라(剿滅)”, “젊은이들을 골라서 죽여라” 등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명령들이 내려졌고, 어떤 기록에 의하면 60만 준가르 인민들 중 ‘4할은 천연두로 죽고, 2할은 달아나고, 3할은 학살을 당했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고 썼다. (위원·魏源, <성무기>(聖武記))
 
  이리하여 천산 북부에서 알타이까지 서몽골 유목민들의 천막은 모조리 사라졌다. 준가르 땅은 이렇게 황무지가 되었고, 그 땅에는 카자흐와 위구르 등의 다른 민족들로 채워졌다. 연이어서 타림분지 일대의 투르크 민족들이 공격을 당했고 오아시스에 고립된 도시들은 차례차례로 넘어갔다. 청군(淸軍)은 파미르 고원에 부딪히고야 진격을 멈추었다. 이리하여 ‘새로 얻은 땅’, 이른바 신강(新疆)이 탄생했다.
 
  그 후 1760년대의 버마 침공, 1791년의 네팔 원정까지 건륭제 치세기 서방에서 이룬 군사적인 성공들은 청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帝國)으로 만들었다.
 

 
  아편전쟁
 
  그러나 이 제국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793년 영국의 사절단 매카트니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다. 광주(廣州)에만 제한된 무역항을 풀어주고 자유무역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건륭제가 한 대답은 이렇다.
 
  “천조는 물산이 넘쳐서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애초에 외방 오랑캐와 물품을 교역할 필요가 없다. (天朝物産豊盈, 無所不有, 原不籍外夷貨物, 以通有無)”
 
  지금 보면 노인네의 가소로운 자만심으로 보일지 몰라도, 건륭제는 방금 열대와 히말라야와 파미르, 열대우림과 타이가까지 세력을 뻗친 제국의 군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시절은 이미 다 간 후였다. 이미 건륭 말기에 아편 수입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은(銀)은 슬금슬금 제국의 국경 밖으로 나갔다. 1830년대에 이르면 연간 수만 상자의 아편이 중국으로 들어오고 세계적인 상품수출 대국이던 중국은 무역 적자국(赤字國)으로 바뀌었다.
 
  제국의 지배자들부터 아편을 피워대자, 아편 흡입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초기에 아편 흡입은 대유행이었고, 일종의 고급문화였다. 그러나 은(銀)이 빠져나가 제국의 화폐질서가 동요하고, 하층민들도 ‘쾌락’의 대열에 합류하자 청 조정은 아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향후 중국 현대사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인 아편전쟁이 연이어 터진다. 1839년 황제의 명을 받은 흠차대신(欽差大臣) 임칙서(林則徐)는 광주에서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워버렸는데, 무려 2만 상자에 달했다고 한다.
 
  그 후 1940년 1차 아편전쟁과 비참한 패배, 그리고 1842년의 남경(南京)조약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남경조약 당시 영국에 배상하기로 한 약 2100만 스페인 은화는 은의 무게로 환산하면 500톤이 훨씬 넘는 엄청난 양이었다. 오늘날 은 가격으로 따지면 약 6억 달러, 6000억원에 이른다. 아편전쟁은 상징과 실제 양면에서 제국의 기반을 흔든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연이어서 혁명의 시대가 불타올랐다.
 
 
  혁명과 전쟁의 중국현대사
 
  1851년 중국의 남부에서 태평천국(太平天國) 혁명이 시작되었다. 역시 아편전쟁의 충격파로 광주에서 상해로 물류(物流)의 중심이 이동한 것이 봉기의 한 이유가 되었다. 무려 15년간 지속된 이 봉기는 청조의 남방행정을 무력화시키고 말았다.
 
  그 뒤 혁명은 도미노처럼 확산되어 태평천국은 1862년 섬감회족기의(陝甘回族起義)의 불씨가 되었다. 회족들의 기의의 불길은 제국으로 편입된 지 갓 100년이 지난 신강의 오아시스들과 청해의 고원까지 옮겨갔다. 처절한 진압, 자강(自彊), 변법(變法) 등의 방법들이 다 동원되어 혁명의 불길을 끄고 나니, 이번에는 청조(淸朝)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국민혁명의 불길이 올랐다.
 
  그리고 1912년, 드디어 국민혁명 세력은 단독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내정과 민생이 와해된 상황에서 외세(外勢)는 계속 밀려오고, 국민혁명은 전진과 정체를 반복한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공산혁명과 반(反)제국주의 전쟁은 1945년 일본의 패망, 1949년 국민당의 대만 도주로 일단락되었다. 연이은 혁명의 시대였다. 이 이야기는 아편 전쟁에서 시작해서 1949년에서 끝난다. 이제 우리의 출발점인 신강으로 들어가 보자.
 
 
  3 천산비가(天山悲歌)
 
  지도를 보면 파미르 고원에서 남동쪽으로는 히말라야, 서쪽으로는 힌두쿠시,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천산이 뻗어 있다. 그리고 히말라야와 천산 가운데 쿤룬산맥이 놓여 있다. 쿠얼러에서 천산을 넘어 이리(伊犁) 계곡으로 들어가려면 공나스 계곡을 거치게 된다. 봄에 천산을 넘는 일은 쉽지 않다. 곳곳에 버려진 차들이 보인다. 얇은 흙으로 덮여 있는 얼음들이 녹으면 길 중간에서 커다란 구멍들이 무시로 생기곤 한다.
 
  바인부르커 초원에서 나라티로 가는 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인지, 부녀간인지 모를 위구르족 노인과 젊은 여인이 함께 탔다. 네 바퀴가 달렸다는 것을 빼고는 차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여기저기 구덩이에 빠져 있는 차들을 뒤로하고 공나스 계곡을 바라보는 곳까지 엄금엉금 기어서 간다.
 
  좁은 뒷좌석에 세 명. 위구르족 할아버지는 체격이 좋다. 꽉 짜인 공간에서 체격이 좋은 할아버지는 팔꿈치로 툭툭 치기 시작한다. 그러다 꽤 아프게 때린다. 순간 화가 확 치밀어 올랐다. 이 좁은 공간에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중국말로 대들자니 좀 뜨끔하고, 한국말로 하자니 한 마디도 못 알아들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말을 하는 대신 노인의 팔꿈치를 꽉 잡았다. 젊은 녀석의 도발에 노인은 이내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을 해댄다.
 
  그때 갓 자리에 앉은 젊은 여인이 할아버지를 말렸다. 그리고 중국말로 미안하다고 한다. 그녀가 미안할 게 뭔가. 그러고는 자기가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장거리를 달리는 고물차 뒷좌석의 가운데란 여간 고단한 자리가 아니다. 좁은 자리를 두고 적개심을 보이던 한 늙은이와 청년 때문에 가장 약한 여자가 한참을 고생했다. 덜컹거리는 차창 밖의 침엽수림은 키마저 똑같아 너무나 단조롭다. 그렇게 계곡에 들어서니 나라티까지 가는 조금 큰 차들이 다시 대기하고 있다. 산을 넘을 때는 지프차로 가고, 계곡에 들어서면 사람을 좀 더 많이 실을 수 있는 차로 바꾸어 탈 수 있도록 분업(分業)이 되어 있었다.
 
 
  나라티로 가는 길
 
나라티에 있는 카자흐인들의 천막.
  공나스에서 나라티로 가는 첫 번째 다리는 끊어져서 차로 여울을 건너야 한다. 경험 많은 운전사는 이리저리 핸들을 틀며 첫 여울을 무사히 건넜다. 나라티로 가는 봄 길은 부산했다. 카자흐족 천막들이 계곡마다 빼곡히 들어와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온 산을 하얀 양들이 덮고 있다.
 
  나라티를 10㎞ 남겨두고 저녁 무렵 차에서 내렸다. 걷고 싶었다. 천막에다 침낭도 있기 때문에 오늘 저녁은 밖에서 자도 좋다. 그러나 2~3㎞를 걸으면서 오늘 낮에 보았던 사람들이 길가 허름한 여관 옆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물이 불어서 차가 건널 수 없단다. 500m 앞 계곡의 급류가 으르렁대는데 보기에도 아찔하다. 천산 계곡에서는 흔한 일이다. 밤에는 얼음이 녹지 않을 것이고, 내일 아침이면 쉽게 건널 수 있으리라. 이럴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을 자야 한다.
 
  나라티 계곡 길목 유원지에는 여관들이 꽤 있었다. 좋은 자리들은 이미 누군가 차지하고 어렵사리 산을 넘어온 사람들은 그래도 쌍을 지어서 방값을 절약한다. 그때 한족 운전기사들은 그들끼리 모이고, 위구르족은 또 그들끼리 모인다. 길옆에 있는 나무 침대만 예닐곱 개 있는, 카자흐족 친구가 운영하는 여인숙이 제일 싸다. 20원이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거기서 자려 하는데 한족(漢族) 기사 한 명이 와서 몰래 귀띔한다.
 
  “위구르족하고 같이 자지 말아요. 위험해요.”
 
  “같이 자 봤어요?”
 
  “아니요.”
 
  이내 손사래를 친다.
 
  “같이 자 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요.”
 
 
  무슬림들의 술시합
 
나라티계곡 입구의 여관에서 만난 카자흐인들과 술시합을 하는 필자(왼쪽).
  일단 맥주와 백주를 잔뜩 샀다. 운전기사들은 주워들은 게 많다. 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하룻밤은 금방 갈 것이다. 카자흐족 여관주인에게 물어본다.
 
  “왜 몽골 텐트가 하나도 없지요?”
 
  “몽골 텐트는 카자흐 텐트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어요. 그까지 가려면 하루 걸려요.”
 
  “요즘도 몽골족들과 카자흐족들의 사이가 안 좋나요?”
 
  “우리 조상들은 몽골족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안 싸워요.”
 
  위구르족 기사 모두에게 술을 한 잔씩 돌린다. 대부분 안 마신다. 사실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 하나를 괴이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호기를 부리는 털보는 나보다 오히려 나이가 적었다. 술이 들어가면 농담이 시작된다.
 
  “무슬림이 어떻게 술을 먹나? 지옥에 가겠구려.”
 
  “이봐. 무슬림에게 술을 주는 사람이 지옥에 가는 거라고. 내가 위구르족을 대표해서 자네를 대접하는 거라고.”
 
  남자들의 세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 이내 술 많이 먹기 시합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많은 기사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위구르 민족대표는 이내 항복하고 말았다. 밤이 되자 민공(民工·노동자)들이 밀려든다. 그들도 자신들의 잠자리로 흩어진다.
 
  술이 끝나고 긴 밤이 찾아온다. 살며시 물소리도 잦아든다. 선선한 산 공기가 그대로 들어온다. ‘이 밤 그 많은 한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땅에서 한때 가장 큰소리를 치던 차카타이 칸국의 후예들, 준가르 칸국의 몽골족 후예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을 만나려면 산속으로 하루를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알타이 산 깊은 곳으로 그들을 찾아갔지만, 그들을 찾지는 못했다. 그들이 남긴 거대한 쿠르칸(적석총·積石塚)만이 나그네를 맞이할 뿐이었다.
 
 
  4 “도살부(屠父)”가 온다
 
알타이 삼도해자. 저 산을 넘으면 몽골 땅이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타고 준가르의 후손을 찾아 알타이를 올랐지만, 그들의 천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음같이 찬 물에 뼈가 시리다.
  1875년 4월 청나라 조정에 한 장의 호소력 짙은 상주문이 들어왔다. 상주문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아조(我朝)는 연(燕)나라의 옛 수도에 자리를 잡았으나, 몽골부(蒙古部)가 북방을 감싸고 있어서, 백 수십 년 동안 봉화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신강을 중시하는 것은 몽골을 보호하자는 것이고, 몽골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 수도를 보위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신강이 견고하지 못하면, 몽골이 불안해지고, 몽골이 불안해지면 섬서, 감숙, 산서의 각처가 수시로 침탈의 위협을 걱정해도 어찌 막을 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도 바로 북쪽에 전쟁의 북소리가 울려서 편안히 눈을 감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어제오늘의 사태가 심히 우중하고, 러시아인들은 나날이 영토를 넓히고 있어서 서쪽에서 동쪽까지 만리에 이르고, 우리와는 바로 북쪽 국경을 접할 판인데, 간신히 중간에 몽골부가 있어서 이들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섶은 마땅히 먼 곳에 두고, 굽은 굴뚝을 먼저 고쳐야 불이 나지 않는 법이니, 미리 단단히 묶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주문을 올린 사람은 누구이고, 또 당시 신강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물론 신강은 당시 무슬림들이 주도한 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우선 그 상주문을 올린 사람을 이야기해 보자. 신강의 무슬림 혁명군은 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섬서와 감숙에서 쫓겨 온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알려 줬기 때문이다. 그는 상군(湘軍)의 두목격인 좌종당(左宗棠)이라고 했다. 그는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또 섬서와 감숙의 무슬림들은 그를 “도살부 좌가(左屠父)”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청 조정에서 그는 서태후(자희·慈禧)의 오른팔이 되어 양무(洋務)운동을 지휘하던 실권자라고 했다.
 
 
  滿漢 이종결합형 인간 좌종당
 
신강을 재정복한 좌종당.
  태평천국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자 만주족 지휘관들의 무능함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때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증국번(曾國藩)을 위시한 호남성(湖南省)의 한인(漢人) 향신(鄕紳)들이었다.
 
  그리고 태평천국군 진압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이는 좌종당이었다. 그는 증국번이나 이홍장(李鴻章)과는 다른 강경파였다. 그는 장강 (長江)상류 깊숙한 동네의 유학자에 불과했지만 세계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국주의 열강들의 힘의 균형이 어떻게 짜이고 있는지를 꽤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열강(列强)의 힘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중국은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자학자 특유의 끈기의 바탕에다 만주족들에게 배운 전방(前方)방어의 개념을 체득한 이종(異種)결합형 인간이었다. 말하자면 한족과 만주족 사이에서 난 꽤 강건한 혼혈아였고, <성무기>의 열렬한 독자인 동시에 강희제와 건륭제의 숭배자였다.
 
  1875년 당시 증국번은 이미 사망한 상황이었고, 양무운동을 끌고 가는 사람은 이홍장이었다. 이홍장은 신강의 혁명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서구(西歐)와 일본에 대비해서 바다를 방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은 신강과 같은 먼 이방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동부 지방 향신층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은 방금 섬서, 감숙의 회민기의를 진압한 공신(功臣)이다. 그는 조정의 실권자들과 결탁해 결국 신강수복책을 관철시켰다.
 
 
  5 잃어버린 혁명- 코칸트의 군관이 신강을 차지하다
 
  원인이 무엇이든 운동이 발생할 때는 도화선(導火線)이라는 것이 있다. 불이 붙으면 마치 도미노처럼 응집된 모순들이 차례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태평천국이 동쪽을 흔들고, 그 불길이 내지의 서북(감숙, 섬서)으로 몰려가고, 또 서북의 난리를 피해 신강으로 몰려간 사람들이 신강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西北으로 튄 戰亂의 불똥
 
  1856년 운남 곤명(昆明)에서는 한족과 회족이 무시로 충돌했다. 만주족 관리들은 이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세력이 강한 쪽을 지원해서 한쪽을 무너뜨리는 것이 그들의 계략이었다.
 
  그들은 비교적 수가 적은 회족을 억누르고 한족들에게 면죄부(免罪符)를 주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관리할 능력이 없는 관리자의 비열한 술책이었다. 그해 5월 운남 순무(巡撫) 아밀령(阿密令)은 성안의 회족들을 도살하고 말았다.
 
  회족 두문수(杜文秀)는 이 학살에 대항하여 곤명을 공격하고 대리(大理)에서 회족이 중심이 된 독자적인 정권을 만들었다. 1872년 대리가 함락당했을 때 그들은 몰살당했다. 기의를 일으킨 두문수는 태평천국에 호응하겠다고 주장했으니, 당시 패잔병 신세가 되어 서북으로 몰려가던 태평천국군이 이 소식을 서북으로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1862년 섬서와 감숙의 회민(回民)들이 단결하여 한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민족간의 갈등은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19세기 초반 이미 4억을 넘어선 중국은 인구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획기적인 생산성의 발전은 없으면서도 크고 작은 전란(戰亂)은 격화되고 있었다. 특히 인구 밀집지대에서 기근, 전란 등이 발생하면 대규모 유민들이 서북(西北)으로 움직였다. 신강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움직이는 군대를 부양하는 의무도 서북이 지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남부는 물론 중동부의 생산기반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토착민들이 보기에 동쪽에서 몰려오는 대규모 한인들의 물결은 가히 재난이었을 것이다. 밀려오는 이민들은 가뜩이나 불안한 서북의 농업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서북의 토착민들은 정확한 실상을 모르는 상황에서 이유 없는 적개심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청조(淸朝)는 이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동서남북에서 열강들의 시달림을 받는 동시에, 내부에서는 태평천국군의 혈흔도 닦을 힘이 없었다. 회민들은 종교의 깃발아래 모였다. 그리고 동란은 신강으로 옮겨갔다. 이제 우리는 현장을 기록한 한 위구르 역사가의 눈을 통해 그때 일어났던 일들을 살펴보자. 1864년 6월 4일 밤 쿠처. 위구르족 무슬림 역사가 사이라미는 그날 봉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신강의 봉기
 
  <갑자기 하늘의 재앙이나 신(神)의 정벌이 내리듯, 어느 날 밤 몇몇 퉁간(한족 무슬림)들이 술렁거리다가 쿠처성 바깥에 있는 바자르에 불을 지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이교도(異敎徒)들을 죽였다. 이때 양기히사르의 하킴의 아들인 알라야르 한 벡이 몇몇 무슬림들을 이끌고 퉁간들과 연합하여, 퉁간과 무슬림들이 한뜻으로 협력하여 아문(衙門ㆍ관청)들에 불을 질렀다. 동이 틀 때까지 많은 이교도들을 죽였다.>
 
  이렇게 봉기는 시작되었다. 사이라미는 또 이렇게 썼다.
 
  <결국 (섬감회족기의를 일으킨) 퉁간들이 금적보(金積堡)에 머물지 못하여 인근 지방을 장악하기로 결정하고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대칸(청의 황제)이 듣고 이쪽 지방에 있는 수령들에게 칙령을 내렸다. “일부 퉁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충고도 하고 약속도 했지만, 자신들이 행한 잘못에 겁을 먹고 걱정하다가 서쪽으로 향했다. 만약 그리로 가면 그쪽에 있는 퉁간들이 이들을 도와 합심하고 일반 백성들을 동요케 할지 모른다. 이 칙령을 보는 즉시 각 도시의 퉁간들을 없애고 그 결과를 나 대칸에게 보고하라”는 명령을 이리장군(伊犁將軍)에게 내렸다.>
 
  두려움이 행동을 낳는다. 그리고 신강 회민들의 두려움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이웃한 감숙성에서는 무슬림들이 청군에게 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도 죽일 것이다!
 
  청조는 신강을 정복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뱀이 큰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킨 후 소화액이 먹이를 녹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비슷했다. 그들은 토착민 수령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통치하는 이중지배를 선택했다. 또한 북방 몽골족에 대한 두려움으로 3만~5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단(兵團)을 주둔시켰다. 지금도 투르판에 폐허로 남아 있는 고대(古代)의 군사주둔지들, 그리고 타림 분지 주변에 모래로 묻힌 옛 도시들은 오아시스 경제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상황에서 군인들이 들어오고, 그 몇 배가 되는 가족들, 그리고 또 그 몇 배가 되는 이주민들이 들어오자 오아시스 경제에는 과부하(過負荷)가 걸렸다. 때문에 신강지배는 내지(內地)에서 막대한 보조금이 들어와야만 유지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편전쟁으로 중앙정부의 보조금이 뚝 끊겼다. 보조금이 들어오지 못하자 부세(賦稅)가 증가했다. 사이라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야쿱 벡의 신강 장악
 
코칸트칸국의 군관 출신으로 신강에 독립정권을 세웠던 야쿱 벡.
  <(국고에서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황제의 서신이 오자) 각 도시의 관리들은 산이면 산마다 들판이면 들판마다 광맥(鑛脈)을 찾기 위해 백성들을 소집하여 내몰아서, 산기슭을 마치 쥐구멍처럼 만들어 놓았지만 광맥을 찾지 못했다. 또한 몇 가지 세금을 신설하여 백성들의 돈을 빼앗았고, 매달 사람들의 머리에 돈을 부과하여 빼앗았다.>
 
  필요한 돈을 땅에서 쥐어짜 낼 수 없다면, 당연히 사람에게서 얻어야 했다. 청의 신강 지배의 한 축이었던 현지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이 부담금을 내지 못하면 뒤꿈치를 잘라 버리는 등의 참혹한 신체형을 가하기도 했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무서운 것은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혁명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도 더 좋아지지 않았다. 마치 태평천국이 행복한 하늘나라를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학정(虐政)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사회의 구성과 생산성이 바뀌지 않았다. 사이라미는 쿠차의 라시딘 정권을 이끌던 라시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하천에 다리를 놓거나 황야에 연못이나 객사를 세워 보시(布施)를 하겠다거나, 혹은 사원이나 학교를 짓고 기진(寄進)을 내거나 자신들이 묵을 여관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는 군주다운 규범과 법도, 그리고 지식과 실천의 세세한 것들을 알려고도 행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행했을 뿐이다. 빈자(貧者)들과 백성들에게도 평안이 없었다.>
 
  혁명은 이름뿐이었고 그들이 한 일은 청조가 한 일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 때 이웃한 코칸트칸국의 일개 군인이 혁명을 순식간에 먹어 들어갔다. 혁명의 와중에서 카쉬가르를 손에 넣고자 했던 시딕 벡이 파미르 고원 너머 코칸트칸국에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때 들어온 사람이 바로 야쿱 벡이었다. 코칸트의 전사(戰士)들로 친위대를 구성한 그에게 천산남부와 타림분지 일대의 봉기군들은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했다. 그 지역의 고만고만하던 무슬림 정권들은 차례로 그의 손에 들어갔다.
 
 
  변질된 혁명
 
  그러나 그의 정권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거두절미하고 다시 사이라미의 말을 빌려보자. 당시 최하급 세금 징수자의 역할, 즉 이른바 마름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인 디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관리들은 1년이 될 때까지 자카트, 우쉬르, 하라지 등의 세금을 율법(律法)에 따라 백성들로부터 거두라고 디반에게 맡긴 뒤, 잔혹한 관리와 포악한 미르자를 보내 (그의 성과를) 조사했다. 하나를 열, 열을 백이라고 기록하여 2만 혹은 3만 탱개의 돈을 정확한 액수라고 하여 디반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그들은 토지, 가축, 카펫, 집기, 심지어 솥과 숟가락까지 팔아서 돈을 만들어 사르카르에게 바치곤 했다.>
 
  디반이 살려면 디반 아래의 부락민들이 죽을 것이고, 부락민들이 잠시라도 살려면 디반이 죽어야 했다. 나아질 것이 없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듯, 도덕성을 거론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혁명기에는 악독한 행동이 선량한 행동을 구축하는 일이 빈번하다. 더 악독한 사람이 정권을 차지하고, 더 악독한 진압자가 명성을 얻었다. 원래 그들의 의도가 착했든 악했든, 그들의 행동은 순식간에 변질되었다.
 
 
  6 무자비한 진압과 오래된 전략: 좌종당과 악종기
 
  1867년 섬감회족기의군을 진압하고자 섬서성으로 들어온 좌종당 군대는 서서히 회민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태평천국군과 싸우며 단련된 전문적인 싸움꾼인 상군(湘軍)이 개입하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야쿱 벡이 소수의 직업군인들로 타림분지의 오아시스들을 먹어들어갔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섬서와 감숙의 인구밀집지대는 고립된 오아시스들보다 움직일 공간이 많았기 때문에 항쟁은 오랫동안 지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금적보에 갇혀 있던 회족 지도자 마화룡(馬化龍)은 최후의 순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여 나머지 회민들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투항했고 청군은 그를 죽였다.
 
  투항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청나라군의 주특기였다. 태평천국군의 수장(首長) 석달개(石達開)에게, 투항하면 부하들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한 후, 석달개가 투항하자마자 그들을 학살했다.
 
  <중국인구사>의 통계에 의하면 섬감회족기의로 2000만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회족과 한족이 서로 대치하며 상호 살륙한 결과였다. 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다. 그리고 거의 200만명에 달하던 섬서성의 회족 중 90%가 희생되었다.
 
 
  우루무치 공략
 
  회족 기의를 제압하자마자 좌종당은 ‘신강수복’의 기치를 올리고 서쪽으로 진격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군사전략가로서 좌종당의 능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사실 그의 전략이란 선배들의 길을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했다. 그는 이미 <방략>들에 나오는 선배들의 행동을 통해 보급이 관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아시스 도시들 중 특히 우루무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또 군량 보급을 위해서는 장사치들과 결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쪽에서 그의 친구 호설암은 대규모 차관(借款)을 들여 군량미를 댔고 조정은 없는 돈을 짜냈다.
 
  놀라운 것은 이 수완 있는 장수가 러시아 상인들에게도 싼 값에 수천만 근의 양식을 구했다는 점이다. 신강에 괴뢰정권을 세우는 데 열심이었던 러시아 정부의 의지와 난리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상인들의 의지가 충돌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시베리아로 모피를 찾아 진출할 때부터 보여준 장사꾼 국가 러시아의 속성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좌종당은 이렇게 군량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이어서 그는 제1전략목표지로 우루무치를 정했다.
 
  옹정제(擁正帝)가 신강을 건설할 때 쓴 기지는 하미 북쪽의 바르콜과 서쪽의 작은 오아시스 투르판이었다. 투르판에 버려진 당(唐)나라 시절 주둔지들의 유적들이 보여주듯이 투르판은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땅이었다. 그래서 좌종당의 100년 전 선배 악종기(岳鍾琪)는 우루무치 공략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투르판에는 최소한의 주둔군만 두고 우루무치로 전면 진군한다. 2만명이 투르판에서, 1만명은 바르콜에서 진격하는데, 말 6만 마리에 낙타 3만여 마리, 그리고 양 20만 마리를 동원한다.’
 
  결국 우루무치가 관건이라는 악종기의 주장은 먹혀들었고 청군이 우루무치를 넘어가자 천산 남북이 모두 청의 판도로 들어갔다.
 
투르판의 고창 고성(高昌 古城). 한당(漢唐) 이래 실크로드의 중심도시였다.
 
  좌종당의 신강 탈환
 
  좌종당은 일단 우루무치까지 들어가면 장기전(長期戰)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전과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 악종기는 준가르 몽골이 목표였기 때문에 투르판에서 밀고 올라가고 바르콜에서 지원하는 작전을 구상했고, 지금은 천산 남부가 목표였기 때문에 바르콜에서 우루무치로 들어가고 급습을 받을 수 있는 투르판은 일단 비워두었던 것이다.
 
  전략적으로 우루무치에서 결전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야쿱 벡 정권은 이미 갑옷을 벗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쿠를라에 주둔하면서도 우루무치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공을 들인 영국, 오스만 제국, 혹은 러시아를 믿고 있었을까? 아니면 동쪽을 강타당하고 있던 청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혹은 청의 지방장관 자리를 노리고 있었을까?
 
  하지만 야쿱 벡이 기대했던 열강의 개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1876년 겨울 우루무치가 함락되었다. 이듬해 봄, 투르판도 넘어갔다. 그때까지도 야쿱 벡은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이제 야쿱 벡은 달아나든지 일전(一戰)을 감수하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는 급사(急死)하고 말았다. 1877년 5월이었다. 그리고 신강 전역은 다시 중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현재 중국의 역사가들은 좌종당을 떠받든다. 제국주의 침략자들로부터 신강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구 제국주의의 대표자들은 중국 제국주의자들이 신강을 침탈하여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청을 부정하여 성립한 것이 신(新)중국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다. “청나라의 압제를 대체해서 신중국을 만들었다면 청나라가 강제로 얻은 땅들을 왜 자기 것이라고 하는가? 쓴 것은 뱉고 단 것은 삼키는가?”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핑계거리를 찾을 것이다.
 
  “신강을 처음 얻은 이들은 만주족이었지만, 다시 찾은 이는 좌종당이 아니냐?”
 
  좌종당 스스로도 항상 “강희, 건륭 때의 구토(舊土)를 되찾는다”는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때 벼랑까지 떠밀려 봉기를 일으켰던 사람들의 말은 이제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다. 2009년 7월 신강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사람들이 다쳤을 때도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좌종당의 진군로.
 
  호탄에서 만난 노인
 
호탄에서 만난 위구르인 농부.
  햇살 좋은 초여름 호탄. 전형적인 오아시스도시인 이곳에서 수많은 인종과 종교가 번성했고, 마지막으로 이슬람과 위구르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신강혁명의 와중에 수립됐던 호탄 정권은 야쿱 벡의 속임수에 넘어가 일거에 무너졌다.
 
  그곳 시골길에서 길을 잃은 나는 맨발에 수염이 아름다운 늙은 농부 한 명을 만났다. 꼿꼿한 허리에 깊은 주름, 그러나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위구르 인들이 이쪽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살았던 페르시아 계통의 혈통, 그리고 티베트 고원의 피도 섞여 있으리라. 그런 아름다운 얼굴을 갖기는 힘들다. 맨발이 아니라면, 오랫동안 이 오아시스의 땅을 지키지 않았다면 얻기 힘든 얼굴이다.
 
  “앗살람 알라이쿰.”
 
  “앗살람 알라이쿰.”
 
  “아라러바거 불교 유적으로 가는 길을 아시나요?”
 
  나는 한국말도 위구르 말도, 고대에 그들이 썼던 호탄 말도 아닌 중국말로 물었다. 중국 말을 들을 수는 있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그는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그리고 꾸불꾸불 밭둑을 지나 흙무덤을 발견했다. 노인은 거기를 가리킨다.
 
  “고맙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한 손을 배에 대고 깊이 허리를 숙인다. 오늘날 중국이라는 땅에서 그런 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날, 사진은 사양한다는 그 어른의 말씀을 어기고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타박타박, 노인의 발바닥과 오아시스의 대지는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문득 지금도 밭에 계실 나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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