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아프리카 자전거 종주기

영국 가서 가난 탈출하고 싶어요” (케이프타운 빈민촌 출신 축구소년들)

  • 글 : 문종성 자유기고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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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부터 자전거로 세계여행 시작, 케이프타운(남아공)에서 카이로(이집트)에 이르는
    아프리카 종단 루트에 도전
⊙ 본격적인 아프리카 여행에 앞서 남아공에서 몸 풀기 시작
⊙ 한국인 김현태 선교사의 감화 받아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는 케이프타운 소년들

文鐘星
⊙ 1981년 생.
⊙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7년 5월 미국 뉴욕에서부터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
    북미와 중남미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 중.
⊙ 저서 : <비전청년의 세계일주 - 자전거 타고 쿠바여행> <라이딩 in 아메리카>
    <일생에 꼭 한 번 가 봐야 할 곳, 멕시코>.
1000km가 넘은 남미 사막을 종단하는 길에서.
햇수로 벌써 5년째다. 여행의 목적이었던 ‘광야(曠野)’에서 깊은 묵상(默想)을 하고 싶은 마음에 무모하게 자전거 세계 일주에 도전한 지 말이다. 설익은 꿈을 피워 보겠다고, 본유적(本有的) 빈곤과 빈약한 영적(靈的) 자원의 짐을 어깨에 둘러멘 채 젊은 혈기만을 가지고 나왔다.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긴 여로(旅路)다.
 
  상아탑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던 20대 때는 다소 염세적(厭世的)이었다. 남들처럼 살아간다면 결국 남들이 이뤄놓은 한계의 굴레에 속박될 거란 회의(懷疑)만 거듭했다. 흐린 가을, 교정(校庭)을 훑고 가는 작은 바람에 감정을 이입시키면서도 정작 젊은 감각으로 문화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세류(世流)에는 무관심했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의 청춘들도 마땅히 누려야 할 덕목인 학업도, 연애도, 내겐 다만 관념적인 것들로 치부되었다. 어느 순간 그런 문제적 자아(自我)에 위기감을 느꼈고 돌파구가 필요했다.
 
  야망으로 똘똘 뭉쳐 사회에 먼저 발을 내디딘 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들 사는 만큼만 살아가고자 하는 소박한 꿈을 가진 동료들과 후배들은 미로(迷路)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실험용 쥐가 되어 갔다. 나는 결코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理想)과 현실 앞에서 고뇌하고 있을 때 나를 일깨운 건 역시 책이었다. 나는 방황하는 순간에도 섬광 같은 예지를 얻고자 독서하는 데 온 에너지를 쏟았다. 닥치는 대로 집고서 한 번 손에 잡으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전혀 생경스런 무대가 펼쳐졌을 때 나는 격한 감동을 받았다.
 
  노먼 베쑨, 체 게바라, 어니스트 섀클턴, 리빙스턴, 콜린 웰, 테레사 수녀와 같은 평전들과 함께 세계 일주기와 극지방, 사막 모험기는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대지(大地)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만들었다. 인격적·영적 성장을 위해 성경을 비롯한 에이든 토저, C.S 루이스, 이재철, 한홍, 김남준, 김동호, 이해인, 법정 스님 등의 책 역시 마음의 키가 자라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을 했다.
 
  ‘누구나 뛰어난 인생을 살 순 없지만 모두가 특별한 인생을 살 수는 있다. 젊음과 열정만으로 성공할 순 없지만 젊음과 열정이 있기에 포기할 수는 없다. 나의 20대가 부끄러운 까닭은 진실로 뜨거운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 언젠가 삶을 뒤돌아봤을 때 내 인생은 아름다웠었노라고, 후회 없었노라고, 자녀들에게, 벗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길을 걷자.’
 
 
  자전거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다
 
  굳은 결의를 하고 도전한 지난 자전거 순례(巡禮) 여정은 그야말로 대서사시(大敍事詩)라 할 만하다. 북미(北美) 인디애나 주(州)에서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공동체를 이룬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17세기 유럽 기독교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3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멈춘 듯한 환경 친화적 생활을 하는 암만파라, 즉 아미시(Amish·기독교 공동체)였다.
 
  콜로라도,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주가 만나는 포코너스 주변 윈도록(Window Rock)에서 침략자인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변방으로 밀려난 원주민 나바호 인디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의 전통 가옥인 키바(Kiva)에 초대받아 함께 잠을 자고 교제하면서 그들의 슬픈 역사와 대지를 닮아 살아가는 아나사지 문화(Anasazi culture)의 인디언 삶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후 마리아치와 마야 문명이 인상적인 멕시코, 일제(日帝)시대 반(半)노예로 끌려가 유카탄에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건넌 한인(韓人) 후예들이 있는 쿠바, 영화 ‘미션(Mission)’의 배경이 된 과라니(Guarani)족을 만난 파라과이, 전설적인 레게 가수 밥 말리(Bob Marley)에 열광하던 자메이카, 살아있는 화산의 경이로움을 눈앞에서 목격한 과테말라, 진흙쿠키를 먹는 아이들의 슬픈 눈동자가 그려지는 아이티,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 요리인 아사도(Asado)의 감격이 있는 아르헨티나,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지대에서 만난 초로(Cholo)족 인디오들과 교회 예배를 드린 볼리비아, 늘 환대를 아끼지 않던 콜롬비아 경찰들과 베네수엘라 소방관들, 백두산 쌍둥이처럼 분화구와 호수가 꼭 닮은 휴화산 킬로토아(Quilotoa)에 오른 에콰도르, 남미의 랜드마크인 페루 마추픽추와 브라질 이과수 폭포, 아마존 부족의 생경함이 뇌리에 각인된 수리남,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즐거움이 있는 가이아나 등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광야를 다니며 만난 친구들과 최고의 장면들은 내 마음속 찬란한 보석 같은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지만은 않았다. 야밤에 폭우 쏟아지는 어느 산길에 고립되어 죽을 뻔한 파나마에서의 경험, 수리남과 코스타리카·멕시코에서는 물과 음식 문제로 혈변을 봐야만 했고, 급기야 볼리비아에서는 쓰러졌었다. 베네수엘라에서 당한 뺑소니로 컴퓨터가 박살나고, 에콰도르·멕시코·니카라과 등에서 도둑을 만나 또다시 컴퓨터를 비롯해 카메라, 캠코더, 외장하드 등까지 도난당했으며 브라질에서는 일곱 살 아이를 안고 그만 실수로 깊은 물에 빠져 물귀신이 될 뻔한 적도 있다.
 
  공항에서 불법입국자로 몰려 밀폐된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은 푸에르토리코, 해발 5000m에서 객사의 두려움에 떨다 기적적으로 차를 얻어 탄 아찔한 기억이 있는 볼리비아, 돈 한 푼 없어 하루 종일 빵 한 조각으로 버티다 섧게 울었던 페루, 아르헨티나 북부에서는 칼을 든 세 명의 강도를 만나 자전거와 거기에 실린 8개의 가방 등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절망적인 여로도 아픔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힘겨운 고난을 마주하며 분노도 원망도 많이 했었다. 그럴 때마다 감사로 덮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음은 길에서 만난 많은 이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은 내게 사랑으로 안아 버리라고 위로해 주었다. 용서의 용기를 낼 수 있게끔 모난 나를 다듬고 있었다. 동시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을 가슴속에 키워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다. 이것이 여행이 나에게 가져다 준 마음의 소리다.
 
  이제 아프리카로 떠난다. 여러 매체를 통해 익히 보고 들은 대로 많이 위험하다. 두렵다. 그런데 설렌다. 사모함이 크다. 묘하다. 막연히 아프리카를 그리다 결국 진한 그리움에 빠져 버렸다. 그곳의 아이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연이 이미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다리고 우리는 기대하며 나는 기도한다. 여행을 다니며 온 몸으로 아프리카를 격하게 사랑하련다. 그리고 마음껏 축복하리라.
 
 
  아프리카 陸路 탐험의 역사
 
리빙스턴(오른쪽)과 스탠리의 만남.
  아프리카 육로(陸路) 모험의 역사는 다른 대륙만큼 오래되지는 않았다. 고대(古代)에는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이 북아프리카의 해안선에 카르타고(Carthago·지금의 튀니지 지역)를 비롯한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접촉하였으며 18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 등이 주로 항해를 통해 아프리카를 무역항로로 이용했다. 특히 네덜란드인은 1652년 케이프타운에 정착하여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초를 쌓았다.
 
  그 후 수면병을 유발하는 체체파리와 말라리아, 황열병 때문에 주요 이동 수단인 말을 사용할 수 없어 머뭇거리던 탐험의 역사는 1768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탐험가이자 외교관인 브루스가 에티오피아를 여행 중 청(靑)나일의 수원(水源)지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스피크가 1858년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빅토리아호(湖)를 발견하여 나일강의 수원을 밝혀낸 것은 아프리카 탐험 역사의 일대 발견으로 손꼽힌다.
 
  이 분야의 굵직한 획을 그은 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겸 의사,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이었다. 그가 아프리카 내륙에 첫걸음을 내디딘 이후 세 차례나 긴 여정을 떠나며 이루어 낸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칼라하리사막 횡단과 잠베지(Zambezi)강 탐험에 이은 빅토리아 폭포 발견, 나일강 탐험, 특히 1872년 리빙스턴의 병환 소식에 다급히 파견된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 특파원 헨리 M. 스탠리와 탕가니카 호수 작은 마을 우지지(Ujiji)에서 조우(遭遇)한 사건은 모든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리빙스턴은 그가 선교를 위해 발 들인 아프리카 땅에서 당시 기독교인들 간에 문제시되지 않았던 노예제를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
 
  그의 모험은 단순히 개인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프리카를 향한 애정과 끝없는 열정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열정을 끌어내는 케이프~카이로 종단 루트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아프리카 종단(縱斷) 여행은 미국의 횡단(橫斷)처럼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랜드로버로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여행은 유럽인들 사이에 일대 열풍이 되었고, 열정으로 똘똘 뭉친 각국의 여행자들이 오토바이와 자전거 등으로 때론 목숨을 걸고 이 루트를 넘나들었다.
 
  전(全) 세계 모험가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루트 중 단연 압권은 역시 ‘케이프 투 카이로(Cape to Cairo)’다. ‘모험의 바이블’이라 일컫는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 카이로로 이어지는 종단 루트는 클래식하면서도 새로운 여행 경로로 각광받고 있다.
 
  기착지는 달라도 종착지가 같은 이 루트는 원시적인 모험 본능을 자극시킨다. 현실의 틀을 과감히 깨며 그 감정에 충실했던 수많은 여행자들의 꿈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곳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땅의 끝에서 시작해 밀림과 사막을 건너며 인도양과 지중해의 냄새를 맡을 때 이 길 위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감격이 된다.
 
  혈맥이 뛰놀고 심장이 요동치는 도전에 나는 기꺼이 응하며 모험의 선배들 발자취를 더듬어 나갈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가 아닌 ‘우리’의 여행을 할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무동력으로 이 땅을 순례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어머니 대지에 대한 예의이리라.
 
  나는 자전거를 선택했다. 두 바퀴가 다른 문화를 보는 눈이 되어 줄 것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귀가 되어 줄 것이며, 이 땅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이미 그들이 먼저 그래 줄 것이다. 자전거는 가장 느린 교통수단인 동시에 가장 빨리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의미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드디어 아프리카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도 가만히 아프리카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2010년 2월의 어느 날, 비행기는 아프리카 속의 작은 유럽이라 불리는 케이프타운에 사뿐히 안착했다.
 
 
  케이프타운의 랜드마크, 테이블 마운틴
 
케이프타운에서 유일하게 밤까지 불이 켜져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워터프론트의 한 레스토랑.
  케이프타운의 랜드 마크인 테이블 마운틴(1073m)에서 내려다본 대양은 거친 포말을 만들어 내며 진한 남성성(男性性)을 띠고 있다. 북동쪽과 북서쪽으로 펼쳐진 악마의 봉우리(Devil's peak)와 라이온스 헤드(Lion's head), 월드컵 경기가 개최된 그린 포인트 스타디움(Green Point Stadium),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인권운동가인 넬슨 만델라가 정치범으로 18년 동안 수감되었고 지금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로벤(Robben) 섬, 도시의 로맨틱한 밤을 밝히는 유흥지 워터 프론트 등 케이프타운의 명물들이 저마다의 개성이 담겨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천방불(水天彷佛·바다의 수면과 하늘이 맞닿아 보여 그 한계를 분간할 수 없음)의 눈부신 풍경은 곧 구름으로 가려지는데 그 기기묘묘한 자연의 섭리에 깊고 낮은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신선(神仙) 같은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면 테이블 마운틴이라는 이름 그대로 평평한 대지 위에 온갖 야생 식물들이 고지대의 거친 바람을 이겨 내고 생명의 향기를 내뿜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상에는 거대한 야생 식물원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희귀식물이 있다. 열매가 불에 타야만 종자를 퍼트릴 수 있기 때문에 번식을 산불에 의존하게 된 남아공 국화 킹 프로테아(King protea)를 비롯해 이곳에서만 특별히 볼 수 있는 식물군(群)은 테이블 마운틴의 또 하나의 보배다.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기 위해서는 보통 케이블카를 이용하는데 못 말리는 하이커들 중엔 기어이 300가지가 넘는 루트 가운데 하나의 트레일을 따라 올라가는 이들도 있다. 1503년 안토니오 데 살다냐(Antonio de Saldanha)가 처음 등정한 이래 여러 루트가 개척되었다. 웬만한 등산로보다 더 가파른 트레일을 오르는 데다 세찬 바람과 급강하하는 기온이 더해지는 변덕스런 날씨가 겹쳐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케이블카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성취감이란 희열에 매료되어 사람들은 점점이 열을 지어 오른다.
 
  “자전거 세계 일주를 한다니 어디 자네도 한번 도전해 보지 그랬나. 그 튼튼한 두 다리로 말이야.”
 
  “고향이 바닷가 마을이라 산은 내키지가 않아서요.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인데 이런 데서라도 문명의 이기(利器)를 마음껏 누려야죠.”
 
  독일에서 여행 온 노부부와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는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바라본 절경.
 
  남아공에서의 몸 풀기
 
  사실 나는 관광에 익숙지가 않다. 하릴없이 서성이며 박물관에서 박제된 문화를 보거나 여행지까지 와서 세계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먹으러 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것, 그리고 남들 다 가는 유명한 곳에 가서 인증 사진 찍어 블로그에 자랑 삼아 올리는 식의 영양가 없는 자기현시주의(exhibitionism)가 싫다.
 
  서양 여행자들처럼 휴양지 리조트에서 느긋하게 독서를 하며 시간의 흐름을 세어 보고, 바비큐 파티를 하는 중에 다른 여행자들과 와인 잔을 부딪치며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 역시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나에겐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이역만리(異域萬里)까지 와서 허무하게 마냥 주변인으로 있을 수만은 없다. 나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전거 여행은 그 방식을 반드시 찾아내 줄 것이다.
 
  지금은 일단 적응할 때다. 케이프타운은 완충작용을 한다. 언어와 통화(通貨), 음식 등의 문화충격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며칠간의 말미가 필요하다. 아무런 사전 정보나 현지 적응도 없이 무턱대고 장기 레이스를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고생스럽고 위험한 것이 없다. 그것은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패키지 투어의 지리멸렬함 이상 가는 최악의 여행이다. 일단 적응만 끝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때를 기약하며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케이프타운에서의 시간들은 프로야구의 시범경기라고 보면 된다. 페넌트레이스를 위한 몸 풀기다. 나는 오랜 여행의 경험으로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다.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괴테의 조언이 장기 여행에 멋지게 적용된다.
 
 
  펭귄은 남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볼더스 비치에서 볼 수 있는 자카스 펭귄.
  케이프타운에서 남쪽으로 차로 40분. 남아공 해군기지가 있는 사이먼스 타운(Simon’s town)으로 향한다. 세인트 조지 스트리트에 펼쳐진 영국과 네덜란드식 건축물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곳 볼더스 비치(Boulders beach)에는 당나귀처럼 시끄럽게 운다고 해서 불리는 자카스(Jackass) 펭귄이 서식하고 있다. 흔히 남극에서만 관찰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펭귄은 이곳에서 아주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많은 여행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음모양과 세상 편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녀석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를 실감하는 곳이다. 하지만 나의 발걸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케이프 시내에서 차량으로 20여 분 정도 떨어진 후트 베이(hout bay)를 찾았다. 트롤(trawl) 어부들이 참치 등 원양(遠洋) 어종 거래를 위해 정박하는 곳이다. 1607년 체스만 촌스로 불리던 이곳은 네덜란드 정착민인 얀 혼 리백에 의해 ‘작은 나무 항’이라는 뜻의 투타이티엔으로 개명된 것이 지금의 후트 베이가 되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331m 높이의 채프만 봉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갈색의 표범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63년 남아공 조각가 이반 밀포드 바버튼이 과거 이 산을 호령했던 표범들을 기억하며 후트 베이 주민들에게 선사한 것이다. 또한 식민지 영향 탓인지 영국의 대중음식인 ‘피시 앤 칩스(fish n chips)’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따로 있다.
 
  ‘다이커 섬(Duiker Island)’.
 
  다이커(Duiker)는 원래 작고 겁이 많으며 놀랐을 때 날쌔게 움직이거나 몸을 피하는 다이커 영양류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네덜란드어로 ‘diver’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다이버의 섬이다. 이 다이버는 다시 다이빙의 귀재라는 물개를 지칭하고 있는데 후트 베이항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극적으로 물개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내 생애 가장 혼비백산한 항해
 
거친 파도로 몸살을 앓는 물개 섬.
  물개 구경을 위해 후트 베이에서는 보통 하루 세 차례 출항하며 한 시간 정도 물개 섬 주변을 돈다. 마침 2월은 남반구의 여름으로 물개들이 털갈이 중이라 개체수가 제법 많았다. 먹이 사냥보다는 축적해 놓은 지방으로 버티는 시기인데 특히 파도가 심해 새끼들이 휩쓸려 갈 수 있기 때문에 어미들이 곁에서 각별히 신경을 쓴다. 그런데 그 심한 파도가 문제였다.
 
  ‘젠장! 이러다 침몰하는 거 아냐?’
 
  출발할 때부터 거친 바람이 심상찮았지만 워낙 대양의 기운을 머금은 남성성을 띤 곳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갈수록 뱃머리가 수면 깊숙이 부딪쳤다. 조벅(Johannesburg)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기겁하며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심각해 보였다. 뉴스에서 보던 폭풍주의보 그대로다. 그런데도 선장과 직원들의 표정은 여유만만이다.
 
  “파도가 무척 심하군요!”
 
  “예전에 배가 한 번 침몰한 적도 있죠. 저기 보세요.”
 
  맙소사! 정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배가 처참하게 침몰해 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도 비교적 소형이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거대한 파도가 집어삼킬 듯 달려들 때마다 배는 심하게 요동쳤다. 천만다행으로 뒤쪽에서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를 물개 섬이 어느 정도 막아 주었기에 배는 제자리에서 힘겹게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뱃머리를 돌리는 것은 여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서른 명이 넘는 승객에 비해 구명조끼는 열 개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물개 구경 왔다 저승 구경 갈 참이다. 여유 있는 승무원들과 달리 승객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그중 객기 부리는 10대들은 바이킹 타듯 환호를 지르지만 불안함을 불식시킬 수는 없었다. “참호 속에 무신론자(無神論者) 없다”고 급하게 신앙심이 거룩해진 나는 경건한 크리스천으로 돌아와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하늘이 귀 기울인 걸까.
 
  험한 풍랑 속에서도 꿋꿋이 보금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많은 물개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뱃길. 바닷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위태한 순간순간을 숨넘어가듯 넘겨 겨우 항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이지 다시는 두 번 타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린 내 생에 가장 혼비백산한 항해다.
 
  문득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그때도 시끄러운 물개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믿음을 주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잘못을 반성해 본다. 배에서 내리고 보니 성난 사자의 포효 같던 파도가 갓난아이의 투레질처럼 작게 여겨졌다. 그 작게 여겨지는 파도 소리에 물개 소리 또한 묻혔다.
 
 
  안드레, “여자는 도무지 자유를 주지 않아”
 
호트 베이 항에서 자신의 친구 조니 보이에게 먹이를 주며 일상을 보내는 안드레.
  “이봐, 내 친구 좀 만나고 가지 그래?”
 
  한가한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던 마흔 살의 안드레(Andre)는 별안간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는 배시시 웃더니 자신의 자랑스런 친구를 소개해 주고 싶단다. 물개 투어의 후들거림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진정하기에 좋은 타이밍이다.
 
  “외로움을 덜어 주는 내 유일한 친구가 있거든. 조니 보이(Jonny Boy)라고 말일세. 말이 통하는 정말 멋진 친구야. 세상 어디에도 내 말을 들어 주는 이가 없는데 이 친구는 내 마음을 받아 줘. 삶의 희망을 주지.”
 
  그는 가족도 집도 없었다.
 
  “저 위에 언덕이 보이나? 저기에 나무 움막으로 된 방갈로가 하나 있는데 더 이상 사용하지 않더라고. 그래서 그냥 내 집 삼았지.”
 
  아득한 언덕 위에 다 허물어진 몇 채의 집이 보인다.
 
  안드레는 부둣가에서 물개에게 먹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휘파람으로 물개를 불러 부시리(Yellowtail Kingfish)를 던져 준다. 그 장면을 보여 주고 관광객들에게 팁을 받는다.
 
  “하루 5달러 정도 수입이 나와.”
 
  멋쩍어하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문득 꿈을 묻고 싶어졌다.
 
  “꿈? 나의 꿈? 그야 배 한 척 사서 낚시하는 것이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지내는 것도 가끔은 지치긴 해. 자네, 인생에 3가지 낙이 있다면 무엇을 꼽겠나? 나라면 술, 담배, 그리고 잠! 하하하. 다들 마지막엔 여자를 두더군. 하지만 여자란 원래 요물이지. 내게 있어 인생 최고의 가치는 자유라네. 그런데 여자는 도무지 자유를 주지 않지. 그냥 피곤할 뿐이야. 난 잠을 택하겠어. 배 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가롭게 낮잠을 청할 거야.”
 
  “지금도 자유로워 보이는데요?”
 
  “자유롭지, 하지만 외롭다네. 외로움이 동반된 자유는….”
 
  안드레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휘파람을 불어 다시 물개에게 생선을 던져 주었다. 물개는 물속에서 유영하다가도 그 소리에 얼굴을 빼꼼 내밀어 한입에 잘도 받아먹는다. 녀석은 오후 내내 그렇게 부둣가를 계속 맴돌았다.
 
  안드레는 배 주변에서 버려진 생선을 줍거나 상한 생선을 어부들로부터 싸게 구입해 물개에게 먹이로 주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간 자신의 배에서 잡은 물고기를 물개에게 주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하는 일을 말없이 감상했다. 소개시켜 준다던 친구는 도통 올 생각을 모르고 그늘 한 점 없는 콘크리트 바닥에서 되풀이되는 행동에 조금씩 따분해질 무렵이었다. 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아까 당신이 얘기한 그 조니 보이라는 친구는 언제 오는 겁니까?”
 
  “아, 내 친구?”
 
  그가 엷은 미소를 띤다. 그러더니 바다를 바라보며 한 손엔 부시리를 집고 다른 손으로 입술을 모은다. 곧 맑고 시원하게 바람을 타는 휘파람 소리가 항구에 가득 퍼진다.
 
  “조니 보이!”
 
  안드레가 손으로 가리킨 조니 보이는 다름 아닌, 그가 먹이를 주던 단 한 마리의 물개였다. 그가 말한 단 하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내 외로움을 받아 주는 유일한 친구야. 내가 부르면 언제나 내게로 오거든.”
 
  그는 나와 대화하는 중에 아무에게도 안부 인사 한 번 받지 못했다. 고립된 자아가 만나 하루 종일 마음을 나누는 것은 조니 보이뿐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그러니까 내가 자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 판단했을 무렵, 그는 나와 조니 보이를 번갈아 보며 넌지시 속내를 비쳤다.
 
  “기부 좀 해 주겠나? 내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네.”
 
  그는 경박하지 않게 자신의 진심과 삶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나는 기지개를 편 뒤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에겐 남아공 랜드가 없다. 하지만 운명은 그의 축복을 빌어 주고 있었다. 외로움과 궁핍함으로 고단한 그의 얼굴엔 봄볕이 내려앉았다. 내 마음엔 산들바람이 불었다. 그가 거꾸로 내민 모자에 링컨의 푸른 초상화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거렸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빈민소년들을 축구로 이끈 한국인 선교사
 
빈민촌 출신의 축구선수를 꿈꾸는 시비웨, 논도다, 필자, 불렐라니(왼쪽부터).
  17세의 불렐라니(Bulelani), 16세의 시비웨(Siviwe), 15세의 논도다(Nondoda). 흐느적거리는 스텝과 아이를 안아 흔드는 동작의 춤을 추고 있다. 일명 만델라 춤이란다.
 
  “친구를 가까이하라, 그러나 적은 더 가까이하라.”
 
  정치인과 인권운동가이기 이전에 유명한 연설가인 넬슨 만델라가 강연을 마치고 공식 석상에서 재미있고 쉬운 동작으로 추던 것이 유행이 되었단다. 사실 만델라가 창작한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춤이다. 그러나 이전까지 춤 이름이 없다가 마침 만델라를 핑계로 그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
 
  이들은 케이프타운 빈민촌(貧民村) 출신들이다. 빈민촌은 어디나 그렇듯 교육은 둘째 치고 치안이 부재하다. 그러니 비행을 저지르기에 이토록 안성맞춤인 환경도 없다.
 
  동네 다른 친구들은 약물 중독에 구걸, 강도, 도둑질을 일삼고 어린 나이에 임신해 미혼모(未婚母)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녀석들도 한때는 하늘을 봐도 꿈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암담함을 떨쳐내고자 술, 담배를 하며 혼탁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런 이들이 학교를 가고 꿈을 가지게 된 건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다.
 
  “그라운드가 곧 내 세상입니다. 멋진 축구선수가 될 거예요. 꼭 영국에 가서 가난을 탈출하고 싶어요.”
 
  하나같이 축구 선수가 꿈이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꿈 대부분이 축구 선수란다. 축구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배우기에 비교적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이다. 또 부(富)와 명예를 누리는 유명한 축구선수에 대한 동경(憧憬)도 그 이유다. 그러나 꿈을 꾼다고 해서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다. 수백만 명의 아이들 중 자신의 꿈을 멋지게 펼칠 확률은 선동열에게서 연타석 홈런을 뽑아낼 확률에 수렴한다.
 
도시 빈민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밤이 되면 치안은 급격히 악화된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어느 순간 자신의 적성과 열정을 찾아냈을 때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발전 가능성 중 많은 부분이 교육 부재로 지체되는 것을 목도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모의 땅에서 교육은 일손을 도와야 하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사치스러운 것이었지만 이제 의식주만큼이나 생존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빈민촌에서 만난 눈동자들은 하나같이 굶주림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더욱 심각한 건 씨줄과 날줄을 견고하게 짠 피륙을 몸에 두른 것처럼 순응주의나 운명론 따위에 자신의 삶을 꽁꽁 싸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와중에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으며 도와주는 이를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셋은 빈민촌에서 봉사를 하던 한국인 김현태 선교사를 만나 꿈 같은 기회를 제공받은 것이다.
 
  세 녀석은 학교에 다니면서 여기저기 품을 팔아 용돈을 번다. 쉬는 시간이면 여느 아이들처럼 공터에서 낡은 공을 차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 간다. 이들에겐 언젠가 자신들의 꿈이 높은 벽에 가로막혔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더 의미 있는 인생으로 방향을 틀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소중한 꿈 또한 격려해 주고 싶다. 어느 책제목처럼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하란 법은 없으니까.
 
  “축구에 살어리랏다.”
 
  황혼 무렵 공터에서 공 하나에 무리지어 뛰노는 아이들의 붉은 실루엣에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라운드 위 거친 호흡에 섞여 까르르 웃는 소리는 모두 꿈꾸는 아이들의 것이었다.
 
 
  아프리카 자전거 종단의 시작점으로
 
  나의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은 남아공의 행정 수도 프리토리아에서부터 연극의 시작처럼 다크 오픈(DO)이 된다. 빕더서던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처럼 이 여행 역시 끝날 때 즈음엔 가슴 먹먹한 진한 여운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평생을 사랑하고 또 살아갈 지혜와 용기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것도. 버스는 이제 적응 무대인 케이프타운을 떠나 프리토리아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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