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경제가 아니라 대남 공작·통일전선 담당자들이 통일교 상대
⊙ “대북사업은 단순한 경제협력이 아니라 신정(神政) 국가 구현으로 인식”
⊙ 북한, 대규모 자금 확보 위해 통일교를 협력 대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 있어
⊙ “종교 활동과 사업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구조가 통일교의 특징”(원로 언론인)
⊙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수천억 들인 北 평화자동차 운영권 ‘조건 없이 기증’”
⊙ “대북사업은 단순한 경제협력이 아니라 신정(神政) 국가 구현으로 인식”
⊙ 북한, 대규모 자금 확보 위해 통일교를 협력 대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 있어
⊙ “종교 활동과 사업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구조가 통일교의 특징”(원로 언론인)
⊙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수천억 들인 北 평화자동차 운영권 ‘조건 없이 기증’”

- 문선명 교주는 1991년 11월 30일부터 12월 초까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사진=뉴시스
통일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통일교에서는 종교적 사명과 정치적 현실을 분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크지 않았다”며 “이 같은 성향은 선언적 구호에 머물지 않고, 실제 대외 활동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통일교, 즉 가정연합은 대규모 대북(對北) 지원과 평양 방문 등을 통해 국가의 외교·안보 영역과 직접 맞닿는 활동을 전개했다. 1991년 11월 30일 교주(敎主) 문선명(文鮮明·1920~2012년)의 김일성 면담과 이후 이어진 대북 합작 사업은 단순한 종교 교류나 민간 경제 협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성격을 띠었다. 종교 조직이 외교적 접촉 통로와 경제적 기반을 동시에 확보한 사례로 기능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당시 북한도 내부적으로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해 소련의 해체로 북한이 의존하던 소련·동유럽과의 저가·외상 교역이 붕괴되면서, 외화 부족과 교역 급감이 발생했다. 북한 경제의 ‘외부 수혈선’이 사실상 끊기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시 정부 대북 업무를 관장해 온 국정원 출신 인사는 “그 무렵 통일교의 대북 접촉은 순수 민간 차원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며 “외교·안보 사안과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제도적 관리 틀 안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통일교의 대북사업과 지원 자금 역시 ‘남북 경제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충분한 공적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메시아주의와 신정 국가 구상
2005년 6월 2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지금은 하나님의 시간(Now is God’s Time)’ 집회에서 연설하는 통일교 문선명 총재. 사진=연합뉴스교리적 맥락에서 보면, 교주 문선명은 남북통일을 단순한 민족사적 과제만이 아니라 메시아 왕국을 실현하기 위한 필연적 단계로 인식했다. 메시아 사상과 천년왕국 대망 신앙을 결합해 지상천국의 구현을 지향했고, 그 종착점은 유토피아 사상, 메시아주의가 결합된 신정 국가였다.
통일교 내부 사정에 밝은 또 다른 관계자는 “남북통일을 현세적 목표라기보다 종교적 완성 단계로 이해했다”며 “북한과의 접촉 역시 그 연장선에서 해석됐다”고 전했다. 이런 인식 아래 통일교가 구상한 남북통일은 정치적 선택지라기보다 신정 국가 수립을 향한 필연적 경로였고, 통일교 지도부와 신도들이 북한 문제에 지속적으로 매달려온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자가 가정연합으로부터 받은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문선명 총재는) 1980년대는 종교 화해를 위한 초교파 운동과 남북통일을 향한 범국민 운동을 이끌어갔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평화를 증진시키는 운동도 펼쳤으며, 1990년대에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회동해 공산주의를 몰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91년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한 화해의 물꼬를 텄다. 2000년 이후에는 평화세계를 이루기 위해 유엔까지 활동의 폭을 넓혔으며, 190곳이 넘는 나라에 교회가 세워졌다. 2012년 9월, 문선명 총재가 성화(聖和·별세)한 이후에도 이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다.〉
문선명도 모른다는 통일교 재산
통일교는 현금을 기반으로 한 자금 축적을 출발점으로 삼아 거대 자본을 형성했고, 이후 다국적 복합체로 외연을 확장해 왔다. 건설, 리조트·관광, 교육, 언론, 출판, 유통 사업 등으로 알려진 사업 영역은 방대하다. 이 때문에 통일교를 단순한 종교단체라기보다, 신앙 공동체의 외피를 쓴 거대 기업집단 또는 기업 활동을 지탱하는 신앙 공동체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재계와 종교계를 두루 취재해 온 한 원로 언론인은 “종교 활동과 사업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구조가 통일교의 특징”이라며 “이 점이 외부에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에 통일교 관련 책을 낸 적이 있는 그의 말이다.
“통일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교회의 경제적 수입은 신도들의 헌금으로 충당됐다기보다 신도들이 번 돈으로 충당해 왔던 것 같고, 그 돈으로 통일교회는 급격한 외형적·경제적 성장을 했던 것 같아요.
미국 내에 있는 통일교회의 재산도 정확하게 평가돼 밝혀진 사실이 없어요. 언젠가 문 교주 자신도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잘 모른다’고 답변한 적이 있어요.
한국 교세(敎勢)를 능가한다는 일본 내 통일교 재산 역시 밝혀진 게 없습니다.”
문선명의 방북
통일교 내부에서는 30여 년간의 대북사업을 두고 남북 간 적대적 관계를 누그러뜨린 선구적 행보로 평가한다. 문선명은 회고록에서 1980년대 후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와 북한의 핵개발 움직임을 언급하며, 북한과의 직접 접촉을 선택한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남북 간 대화 채널이 없는 상황에서 충돌이 발생할 경우 한반도 위기가 세계적 위기로 확산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취지다.
1991년 11월 30일부터 12월 초까지 문선명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 《산케이신문》 보도를 인용한 국내 기사에는 ‘북한에 3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는 표현과 함께, 김일성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부시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대목도 등장한다.
〈지난 11월 30일부터 8일간 북한을 방문했던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북한에 30억 달러를 투자할 것에 합의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일본의 《산케이신문》이 20일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이날 동경의 한일 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이같이 밝히고, 문씨는 특히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했을 때 부시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김 주석의 친서를 부탁받고 이를 전달해 줄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매일경제》 1991년 12월 20일 자)
종교 지도자가 외국 정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구조 자체가 이례적이다. 어쩌면 이 시점부터 종교 활동과 외교 행위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1991년 방북 당시 논의된 일부 사안은 이후 남북 당국 간 정상화 회담의 의제로 이어졌다.
대북 자금과 사업의 실체
2009년 6월 삼성동 코엑스에서 문선명 교주가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를 마친 후 초청인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세계일보가정연합, 다시 말해 통일교의 대북 지원 규모를 둘러싼 수치는 자료마다 엇갈린다. 국내 언론에서는 통일교의 대북사업 자금과 일본 신자 헌금 사이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한 보도도 있었다. 통일교 내부에서는 “수천억~수조원대 이상의 거금을 대북사업에 투자했다”는 설도 나오지만 정확한 규모는 확인하기 어렵다.
통일교 계열 사업은 북한에서 실제로 운영됐다. 2000년 평안남도 남포에 북한 당국과 협력해 설립한 합영(合營)회사 ㈜평화자동차가 대표적인 경우다. 통일교가 발행하는 《세계일보》의 자매지로 알려진 《LOCAL세계》의 2023년 11월 27일 자 보도를 보면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수천억원을 들여 설립한 북한 남포 평화자동차 공장의 운영권을 수년 전 ‘조건 없이 북한에 기증했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언급돼 있다. 해당 보도는 종교 행사 형식의 ‘열린예배’ 강연 중 소개된 내용인데, 운영권 기증의 시점과 절차, 정부 승인 여부 등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평화자동차 사례는 종교 조직이 자본과 사업의 형태로 북한에 진입해 장기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종교·자본·정치가 서로의 지렛대가 되는 ‘영향력의 회로(回路)’를 형성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다.
통일교가 제기하는 헌법적 쟁점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이 충돌할 때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고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통일교는 대북사업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기존 접근 방식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애써왔다. 당시 통일교 내 2인자로 알려진 박보희(전 《세계일보》 사장)가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감수하고 조문(弔問)을 강행한 것은, 어렵게 열어놓은 대북사업의 물꼬가 끊어질 가능성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통일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대북사업은 단순한 경제협력이 아니라 교리적 사명과 직결된 문제로 인식됐다”며 “남북통일을 향한 ‘섭리’의 흐름이 중단되는 것을 내부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통일교가 남북통일 문제, 특히 대북사업에 집착한 배경에는 복귀섭리(復歸攝理) 사관(史觀) 등 메시아주의적 세계관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이 사관에 따르면 북한은 ‘싸워 이길 적’이 아니라 ‘섭리 속에서 되돌려야 할 형제’이고, 이 인식이 대북 접근·자금·사업·접촉을 가능하게 했다.
통일교가 북핵 개발 저지?
이렇게 30여 년 넘게 이어진 북한과 통일교의 관계 속에서, 통일교가 북한의 핵개발을 실질적으로 저지했음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은 반대로 제기된다. 북한의 핵개발이 중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교가 구상했던 남북통일은 과연 실현 가능한 목표였느냐는 것이다. 북한에 건넸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천억~수조원대 이상의 거금’이 핵개발에 전용되지 않았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전직 국정원 인사는 또 “북한 핵개발은 체제 생존 전략의 핵심”이라며 “민간 종교단체의 접촉이나 경제협력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냉정한 평가대로 통일교와 문선명이 그렸던 남북통일의 청사진 자체가 출발 단계부터 현실성과 거리가 있었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다음은 《조선일보》 1991년 12월 6일 자에 실린 연합통신발 〈북한(北韓), 1억5천만불(弗) 헌납 요구, 방북(訪北) 문선명(文鮮明)씨에〉 기사다.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은 최근 평양(平壤)에 머물고 있는 통일교 문선명 교주 일행에게 미화(美貨) 1억5천만 달러의 헌납을 요청한 것으로 5일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 소식통은 이날 문(文) 교주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가 먼저 중국(中國)으로 나온 한 일행의 말을 인용해 “북한의 김달현(金達鉉) 부총리가 2일 박보희(朴普熙) 《세계일보》 사장과의 경협(經協) 논의에서 느닷없이 ‘원유 수입대금이 필요하다’면서 미화 1억5천만 달러를 헌납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김달현은 주로 두만강 지역과 원산공업단지 건설 및 금강산 관광단지 개발에 통일교 측의 투자를 요청했으며, 이밖에 이 같은 거액의 헌금을 요청하고 나옴으로써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북, 대규모 자금 확보 노렸을 가능성
북한은 처음부터 대규모 자금 확보를 위해 당시 일본에서 교세를 확장하던 통일교를 이용 대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계산과 전략에 끌려다니는 구도가 고착됐고,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제어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오늘날 완성 단계에 이른 북핵 문제 역시, 이러한 통일교 대북사업의 실패 누적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또한 이들의 대북사업의 혜택이 북한 주민들에게 얼마나 돌아갔느냐도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통일교의 대북 독자 행보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부담으로 남았다. 정부의 제도적 관리나 통제 없이 진행된 문선명의 정치적·메시아주의적 행보가 결과적으로 안보 리스크를 키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놀랍게도 통일교가 내세운 북한과의 교류 협력은 주로 진보 정권,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실행된 측면이 있다.
통일교 내부를 오래 관찰해 온 한 인사는 “이 모든 책임을 문선명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면서도 “문 교주를 추종하는 이들의 대북 접근과 사업이 북한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핵 개발의 시간표를 늦추지 못한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의 고착화는 결국 대한민국의 안보와 미래를 위협하는 구조로 되돌아왔다는 점에서, 이는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함께 떠안게 된 부담이라는 평가다.
통일교 대북사업의 또 다른 그늘도 여기서 드러난다.
북한과의 경제적 접촉이 곧 체제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문선명과 통일교의 기대는 현실에서 입증되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 정권의 대남 공작과 통일전선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북 정보 파트에 관여해 온 전직 인사는 “민간 차원의 독자적 판단과 행동이 정부의 제도적 관리 밖에서 이뤄질 경우, 그 부담은 결국 국가 안보로 되돌아온다”고 말했다. 종교의 고유한 영역을 넘어선 정치적 행위와 대북 지원이 수십 년간 조직적으로 이어졌다면, 이는 종교의 자유로 보호되기보다 공적 검증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통일교 대북사업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신념에 기초한 독단적 접근은 북한을 바꾸지 못했고, 그 대가는 결국 안보와 현실의 영역에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는 점이다.
30년 전의 경고
이형래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이 《월간조선》 1995년 5월호에 기고한 기사 〈문선명의 방북을 주선했던 통일교 밀사의 충격적 고백〉의 첫 장이다.통일교의 대북사업을 관통하는 인물로 박보희, 박종근(금강산국제무역 사장, 정치보위부 소속), 박경윤(재미사업가)을 빼놓기 어렵다. 이들은 1990년대 통일교의 대북 접근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각각 전략, 사업, 접촉을 맡아 협상의 전면과 후면을 떠받친 인물들이다. 통일교의 대북 활동이 단순한 종교 교류를 넘어 하나의 지속적 ‘협상 구조’로 작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로 구성된 인적 축이 있었다.
이 구조의 위험성을 비교적 이른 시점에 경고한 인물이 있다. 이형래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은 《월간조선》 1995년 5월호 기고문 〈문선명의 방북을 주선했던 통일교 밀사의 충격적 고백〉에서, 자신이 문선명의 방북 협상을 위해 1989~91년 사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밝혔다. 이 전 위원은 통일교의 대북 진출이 애초부터 종교적 교류의 틀을 넘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형래의 《월간조선》 기고문에 따르면, 통일교가 북한과 처음 본격적으로 접촉할 당시 박보희의 공식 상대역은 김달현 당시 북한 경제 담당 부총리 겸 대외경제위원장이었다. 이는 북한이 통일교를 종교단체라기보다 경제적 파트너로 인식하고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형래는 “김달현의 등장이 아무런 의미 없이 이뤄질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북한이 통일교와의 관계에서 기대한 실익(實益)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이 만남이 단선적 구조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김달현이 전면에 등장하기 이전, 이미 박종근을 매개로 한 사전 조율과 공작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통일교의 대북사업이 경제협력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 내부는 북한의 정치·공작 체계와 맞물려 움직이고 있었다는 의미다.
“통일교는 대남사업의 동업자인가?”
박보희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이 1998년 8월 13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평양 방문에서 합의한 금강산 일일 관광계획을 발표하고 있다.이 전 위원이 가장 강한 경고를 던진 대목은 이후의 변화다. 통일교를 담당하던 북한 측 인사가 김달현에서 김용순(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 전금철(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로 바뀐 사실에 주목했다. 사업을 하겠다는 통일교의 상대가 경제 관료에서 대남 공작과 통일전선을 담당하는 핵심 부서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그는 “경제 사업이 아니라 정보 사업이 되는 순간”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통일교는 대남사업의 동업자인가”라는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질문은 과장이 아니라 예언처럼 읽힌다. 통일교는 박보희를 중심으로 한 전략 라인, 박종근이 관리한 사업 구조, 박경윤이 담당한 실무 접촉을 통해 북한과의 채널을 장기간 유지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다. 북한은 개방되지 않았고, 체제는 변하지 않았으며, 핵개발은 중단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이 기간 동안 핵 능력을 축적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직접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형래 전 위원이 1995년에 던진 경고의 핵심은 단순했다. 메시아주의에 기초한 종교 조직이 정치·외교 영역에 개입할 경우, 그 결과는 통제 불능의 위험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통일교가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대남 공작 구조에 흡수될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그 우려는 시간이 흐르며 북핵이라는 실체적 위협으로 현실화됐다.
결국 문제는 통일교의 대북 협상이 무엇을 얻었느냐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을 막지 못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체제가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한 측면이 있다면, 종교와 정치가 결합한 구조는 실패를 넘어 비극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정교일치의 실험은 북한을 바꾸지 못했고, 그 대가는 한국 사회가 떠안게 됐다.
금강산에 걸었던 신념의 베팅
통일교의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은 한때 남북통일의 마중물로 불렸다. 통일교는 이를 김일성의 ‘유훈(遺訓) 사업’이자 한민족 평화 교류의 상징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사업의 전개 과정과 결과를 되짚어 보면, 금강산 사업은 출발 단계부터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고, 결국 북한의 실리적 선택 앞에서 좌초될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 개발 구상이 외부로 처음 알려진 것은 재미동포 박경윤이 가진 1991년 12월 4일, 평양 중앙TV와의 기자회견을 통해서다. 이후 통일교 측은 1994년 1월 29일 북한 정무원으로부터 ‘금강산국제그룹에 금강산 관광지 개발의 총권한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50년 토지 이용권과 제3자 합영 권한 등이 명시돼 있었다고 한다.
이 문서는 계약이 아닌 ‘위임’이었다. 법적 구속력이 불명확한 정치적 문서에 가까웠고, 사업권의 안정성을 담보하기에는 근본적 한계를 지녔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통일교가 강조해 온 ‘금강산 50년 독점 개발권’ 주장 역시, 이후 전개 과정을 놓고 보면 과장됐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통일교의 금강산 사업이 시험대에 오른 계기는 1994년 7월 김일성 급서 이후다. 문선명의 최측근이던 박보희가 조문 방북을 강행하면서 김영삼 정부와 통일교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이로 인해 사업 추진에 필요한 제도적·정치적 환경도 악화됐다.
현대그룹의 등장
그사이 현대그룹이 전면에 등장했다. 정주영(鄭周永·1915~2001년) 명예회장과 김정일의 면담 이후, 현대는 1998년 6월 ‘금강산 관광 합의서’를 체결하며 사업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현대가 제시한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6년간 총 9억4000만 달러를 북한에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통일교는 다른 길을 택했다. 남과 북이 각각 자본·기술과 토지·인력을 출자해 수익을 나누는 ‘상호주의’ 모델을 표방했으나 통일교의 선(先)투자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통일교의 당시 현금 동원력에 빨간불이 켜졌다.
1997년 IMF 이후 한국 통일그룹의 경영 상태는 급격히 악화돼 법정관리 직전까지 몰렸다. 북한이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1억 달러 규모의 보증금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대기업인 현대는 현금 지급을 전제로 사업권을 따냈다.
금강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금강산국제그룹’의 지분 구조도 논란을 낳았다. 통일교는 자신들이 설립 자금의 대부분을 댔다고 주장했지만, 박경윤은 통일교 40%, 북한 아시아태평양위 40%, 자신 20%의 지분 구조를 제시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북한이 사실상 경영권을 쥔 구조였다.
박경윤 인터뷰
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1995년 3월호 〈남북 비밀접촉 선상의 미스터리 여인〉 기사에서, 금강산 개발을 실무적으로 담당했던 박경윤을 인터뷰했다.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1995년 3월호 〈남북 비밀접촉 선상의 미스터리 여인〉 기사에서, 금강산 개발을 실무적으로 담당했던 박경윤의 육성을 통해 금강산 개발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 금강산 개발에 문선명씨도 열심인 것 같은데 그쪽에다 어느 부분의 개발권을 준다고 약속했습니까.
“딱 정해진 것은 없고 협력 관계입니다. 여러 면에서 도와주겠다고 하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고 그분들과 끈끈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 금강산 개발에 기초 조사보고서는 북한 쪽의 동의를 받았습니까.
“김일성 주석에게 사인을 받았으니 허가가 난 것이라고 믿습니다. 1994년 1월 27일 김일성 주석에게 사인받고 1월 29일 정무원에서 위임받았습니다.”
(중략)
— 금강산 개발 투자는 일본의 통일교 측하고 박(경윤) 회장의 돈이 공동 투자 형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저는 미국 사람이고 미국 사람은 투자 못 하게 돼 있습니다.”
— 운영권은 통일교 측에서 가지고 있습니까.
“합작식이니까 관리는 그쪽에서 하는데, 통일교가 아니고 세계평화연합입니다. 종교와 사업은 구분됩니다.”
— 박 회장은 운영권에 개입하지 않습니까.
“일부는 참여합니다.”
— 일부 참여는 무슨 뜻입니까? 주식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박경윤, 구체적 언급 회피
박경윤은 금강산 개발과 문선명 측 관계를 묻는 질문에 “딱 정해진 것은 없고 끈끈한 협력 관계”라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1994년 1월 김일성 사인과 정무원 위임을 ‘허가’로 믿는다면서도 계약이 아닌 ‘위임’으로 한정해 사업의 불확실성을 드러냈다.
박경윤은 통일교 측이 “여러 면에서 도와주고 있다”고 했으나 투자·운영권 질문에는 자신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제약을 들어 “합작 관리, 일부 참여”로 얼버무렸다. “주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며 종교·사업의 구분을 강조하면서 실질 지분을 감췄다.
“누구든 참여할 수 있고, 민족공동개발이 바람직하다”며 투자 유치 창구를 자처했는데, 이는 북한의 토지·허가 독점 구조를 잘 모르는 듯한 발언이라 할 수 있다. “금강산은 한 회사가 개발할 수 없다”며 철도·항구를 언급했지만 최종 결정권이 북한에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이 인터뷰는 통일교 금강산 사업의 법적·경제적 기반이 미비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대북 정보 라인에 밝은 국정원 전직 인사는 “박경윤의 애매한 답변이 북한의 실리적 선택(현대 선호)을 불렀다”고 분석했다. 사업의 성패는 자금과 실행력에 달려 있었고, 통일교는 밀린 셈이었다.
이 인사는 덧붙여 “금강산국제그룹은 애초부터 북한이 필요로 하는 계산 속에서 움직이는 플랫폼에 가까웠다”며 “통일교는 우선 협력자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했다. 법적 안전장치가 부실한 상황에서 ‘독점권’을 주장하기는 어려웠다는 얘기다.
금강산 사업은 단순히 민간 투자 실패 사례로 보기 어렵다. 통일교는 남북통일을 메시아 왕국 실현을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인식했고, 금강산 개발을 그 사전 포석으로 여겼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접근은 경제 현실과 충돌했다.
북한은 유훈사업이라는 상징보다 자금력과 실행 능력을 택했다. 경제 논리가 종교적 서사를 압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통일교의 금강산 사업은 실패로 귀결됐다. 일부에서는 이를 ‘그나마 다행’으로 평가한다. 막대한 적자와 손실이 신자들에게 전가될 가능성을 피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일교가 사업을 독점했다면, 누적 손실을 감당하기 위한 추가 헌금과 내부 이탈이 불가피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통일교의 금강산 사업은 민간 차원의 대북 경제협력이 남북 관계의 만능 해법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정치적·종교적 신념에 기대어 추진된 사업은, 체제 변화나 군사적 위험 요소의 제거 없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평화자동차 좌초의 구조
통일교가 추진한 대북 합영사업 ㈜평화자동차는 남북 화해의 상징을 내걸고 출발했지만, 끝내 경제 논리와 제도 리스크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북한 남포에 세운 자동차 조립공장은 교류의 실험장으로 포장됐으나, 시장·결재·경영권의 현실 앞에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청산 절차로 향했다.
통일교는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한발 물러선 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평화자동차 설립 계획을 발표했고, 이후 통일부 승인을 받았다. 통일교는 이를 이윤 중심 사업이 아닌 ‘민족 동질성 회복’과 ‘경협 활성화’의 통로로 설명해 왔다. 당시 김대중 정부도 남북 경협 확대라는 정책 기조 속에서 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사업 구조는 취약했다.
대북사업에 참여했던 한 전직 대기업 관계자는 “합영회사 틀 안에서 남측 투자자가 실질 경영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익이 나도 회수는 승인과 결재 시스템에 매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실제로 평화자동차는 지분 구조와 무관하게 북한 측 행정 판단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판매량이 증가한 시기가 있었지만, 주민 소비 확대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구매 주체는 북한 당국의 특권층 중심으로 한정돼 있었고, 행정 조치 하나에 수요가 출렁일 수 있는 구조였다.
통일교 내부 사정에 밝은 전직 정보 담당자는 “내수 기반이 약한 상황에서 대외조건에 따라, 실적은 언제든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협은 결국 정치·외교 환경의 함수”
북한 남포에 설치된 평화자동차 광고판. 통일교 계열 평화자동차는 남포 공장에서 ‘휘파람’으로 불린 승용차를 생산·판매하며 북한 자동차 산업의 상징적 실험으로 주목받았다. 광고판에 ‘내 가슴 설레이게 하네!’라는 문구와 평화자동차 로고가 담겨 있다.여기에 북핵 문제는 치명적 변수였다. 핵·미사일 도발로 대북 제재가 강화되면서 평화자동차는 해외 수출 길을 사실상 닫았다. 내수에만 기대는 모델은 한계를 드러냈고, 사업 확장도 구조적으로 봉쇄됐다.
대북 정보 업무를 다뤄온 국정원 전직 인사는 “경제협력은 결국 정치·외교 환경의 함수”라며 “핵 문제와 제재가 풀리지 않는 한, 민간 기업 형태의 대북 투자가 안정적으로 굴러갈 조건을 찾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결론은 숫자였다.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평화자동차 공장 건설에 7500만 달러(2000년대 초 환율로 9000억원 안팎)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객관적 자료는 공개되지 않았다. 외부에서 확인 가능한 구체적 수치는 2013년 평화자동차 제15기 감사보고서에 기재된 대북사업 관련 자금 193억원이 거의 유일하다.
이 외부 감사보고서는 평화자동차가 계속기업으로 존속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단을 담았고, 회사는 해산·청산 수순을 밟았다. 통일교가 ‘평화통일의 경제적 실험’으로 자랑했던 상징 프로젝트가 재무제표 앞에서 설득력을 잃은 셈이다.
최근에는 평화자동차의 ‘마지막 처리 방식’이 다시 회자됐다. 《세계일보》 자매지로 알려진 《LOCAL세계》는 2023년 11월 27일, 부산의 한 가정연합 교회에서 열린 ‘열린예배’ 형식의 공개 강연 내용을 전하며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수천억원을 들여 설립한 평화자동차 공장 운영권을 수년 전 ‘조건 없이 북한에 기증했다’는 취지의 설명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 대목은 평화자동차 실패의 결론을 단지 ‘사업 중단’으로만 정리할 수 없게 만든다. 만약 운영권이 실제로 무상 이전됐다면, 이는 투자 실패의 마무리 방식인 동시에 ‘대북 접근권이 어떤 절차를 거쳐 정리되는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전직 국정원 인사는 “대북 합영사업은 시작보다 ‘정리 과정’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며 “운영권 이전이 사실이라면, 그 절차가 공적 통제 안에서 이루어졌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자동차는 남북 경협이 신념이나 상징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평화’라는 이름은 오래 남았지만, 북한 체제의 변화, 즉 핵 문제의 해소 없이 경제협력만으로 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는 여러 차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은 공백은 지금도 ‘정교일치’ 논란과 맞물려 되살아나고 있다.
통일교의 대북지원 자금은 어떻게 마련됐나
통일교의 대북사업은 오랫동안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을 기치로 추진돼 왔다. 그러나 그 사업을 떠받친 자금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련됐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명확한 설명이 제시된 적이 거의 없다. 통일교의 국내 헌금으로 조성된 자금이었을까.
30여 년간 이어진 통일교의 대북사업이 끝내 실패로 귀결되면서,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금의 출처로 옮아가고 있다. 만약 대북 지원 자금이 국내에서 조성된 자금의 일부라면, 형법이나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가정연합 산하에 수많은 국내 기업이 존재하지만, 이들 기업이 벌어들인 자금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통일교의 해외 신도 헌금이나 해외 사업체의 자금이 사실상 주된 재원이었을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다음은 JTBC의 2025년 9월 24일 자 보도 〈“일본서 걷는 헌금, 매년 한국으로”… 현지서 번지는 의혹〉의 일부다.
〈통일교가 일본 신도들로부터 2015년부터 2022년까지 거둬들인 돈은 3조원에 달합니다.
공식 확인된 것만 매년 평균 409억 엔, 우리 돈 3800억원이 넘습니다.
고액 헌금이 대부분이었고, 악령을 없애려면 특정 물건을 사야 한다는 영감상법도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결국 통일교를 탈퇴한 신도 200여 명은 600억원 규모의 소송을 냈고, 최근에는 신자 자녀들까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일본 통일교 헌금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로는 전국영감상법피해변호사회가 집계한 영감상법 피해 신고 금액이 사실상 유일하다. ‘영감상법(靈感商法)’은 조상의 인연이나 개인의 운세를 바꾸기 위해 영적 효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감, 항아리, 다보탑 등의 고가 상품을 판매하는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대북사업 자금의 상당 부분은 일본에서 들어왔다”
JTBC 보도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2년까지 거둬들인 돈은 3조원이다. 이 변호사회 소송 자료를 더 살펴보면, 30년간 통일교 신자들의 피해 신고 건수는 총 3만3948건, 피해 신고 금액은 1182억5893만5819엔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 100조원대다. 이 수치는 실제 일본인 신도들에게서 거둬들인 헌금 전체 규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통일교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대북사업 자금의 상당 부분 일본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며 “국가보안법상 국내 통일그룹의 재무 구조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법조계와 시민단체들 역시 이러한 자금이 해외, 특히 제재 대상 국가인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통일교가 북한에 제공한 현금이 김정일 정권의 통치 자금으로 전용됐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통일교 내부와 주변에서는 한때 “대북사업이 실패해도 한국 경제에는 영향이 없고, 성공하면 북한의 실험장이 된다”는 인식이 공유돼 왔다. 대북사업 자금의 대부분이 일본 등 제3국에서 조성됐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한국 경제에는 직접적 충격이 없다는 논리였다. 반대로 성공할 경우에는 북한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통일교의 대북사업 실패는 단순한 사업 판단 착오로 치부하기 어렵다. 자금 조성 방식의 불투명성,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 외부 검증과 평가의 부재가 수십 년간 누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친 대북 투자의 끝에서 남는 질문은 여전히 하나다.
그 막대한 헌금은 어디로 흘러갔으며, 무엇을 남겼는가?
통일교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대북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종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역사적 책임의 문제로 계속 확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