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 거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北 ‘슈퍼노트’ 추적하다 피살
⊙ 냉장시설 없이 방치된 시신… “부패 막기 위해 시내 모든 얼음 구했다”
⊙ “최 영사 사건은 脫냉전기의 체계 미비와 판단 오류가 겹친 비극”
⊙ “김씨 정권 살인적 본질 드러낸 사건… 그 본질 잊는 순간 우리 경계도 함께 무너져”
⊙ 냉장시설 없이 방치된 시신… “부패 막기 위해 시내 모든 얼음 구했다”
⊙ “최 영사 사건은 脫냉전기의 체계 미비와 판단 오류가 겹친 비극”
⊙ “김씨 정권 살인적 본질 드러낸 사건… 그 본질 잊는 순간 우리 경계도 함께 무너져”

- 1996년 10월 8일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엄수된 고 최덕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의 영결식 모습. 사진=조선DB
그가 안장된 대전국립현충원 묘비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블라디보스토크’만 적혀 있다. 처음엔 일반 묘역이었지만 소방관 묘역으로 바뀐 자리다. 거길 지나던 한 초등학생이 말했다.
“아버지, 우리나라 소방관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불을 껐어요?”
김주성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공동대표(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는 “대북(對北) 특수임무팀의 원혼(寃魂)을 대표하는 최 영사가 이렇게 비치는 현실이 부끄럽다”고 했다. 구국혼선양회는 음지 영웅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결성한 민간단체다. 김 대표는 “우리 기억에는 식민시대 항일(抗日) 투사들의 이름만 가득하지,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들의 이름은 없다”면서 “대한민국의 건국 영웅들과 호국 영웅들을 제대로 기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국가에 목숨을 바칠 애국 청년들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北에 피살된 현직 해외 공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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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30일 국정원 보국탑에서 최덕근 영사의 29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그동안 민간 차원에서 하던 추모행사를 올해부터 양지회가 주도하게 됐다. 이하 사진=월간조선 |
29년 전의 일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근무하던 최덕근 영사(국정원 파견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변을 당했다. 1996년 10월 1일 오후 8시 45분경. 둔기에 머리를 여덟 차례 맞았고, 주사바늘로 추정되는 흉기에 옆구리를 찔렸다. 최 영사는 두개골 골절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그가 임대해 살던 아파트 계단에서 발견됐다. 그날따라 전기가 나가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평소 그 앞을 지키던 러시아 할머니의 모습도 없었다. 모든 정황이 계획적인 범행을 가리켰다. 용의자는 30대 전후의 동양인 세 명. 현장에는 ‘금수강산’이라는 북한산(産) 담배꽁초 9개가 흩어져 있었다. 가죽장갑과 비닐장갑도 함께 발견됐다. 모두 동양인 손 크기에 맞는 작은 사이즈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수사는 미온적(微溫的)이었다.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탓이었다. 국정원 출신으로 최 영사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근무했던 홍윤근 신한대 특임교수는 “당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수사를 진행 중이라 했지만 진전은 없었고, 북한과의 관계를 이유로 사건 언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러시아 정부는 1996년 11월, 1997년 1월, 2001년 5월 세 차례에 걸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 한동안 부검 결과도 함구(緘口)했다. 우리 정부의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사건 발생 3년 뒤, 남북 평화회담에 명운(命運)을 걸었던 김대중 정부는 진상 규명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수사는 표류했다. 2011년 10월 1일 공소시효(公訴時效)가 만료됐다가 우리 측 요청으로 공소시효를 무기한 연장했지만, 사건은 결국 미결 상태로 세월 속에 묻혔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
그러나 주모자(主謀者)는 분명했다. 공식 수사 결론은 미(未)규명이었지만, 국정원은 내부적으로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 내부 첩보망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된 정보 역시 북한 정찰총국 산하 작전부 암살조의 소행이었다. 황윤덕 양지회 부회장의 말이다.
“1996년은 북한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해였습니다. 한총련을 조종해 폭력사태를 일으켰고, 동해안에는 잠수함을 침투시켰죠. 그 잠수함이 한 달 뒤인 9월 17일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됐습니다. 타고 있던 북한 공작원 26명 중 13명은 사살, 11명은 권총으로 집단자살, 1명은 도주, 1명은 생포됐습니다. 북한은 직후 ‘백 배, 천 배로 보복하겠다’며 위협했습니다.”
최 영사가 북한의 표적(標的)이 됐다는 의미다. 황 부회장은 “더군다나 당시 최 영사의 소지품에서는 북한의 마약 밀매 동정과 미화 100달러 위조지폐, 이른바 ‘슈퍼노트’ 유통 실태와 관련된 메모가 발견됐다”고 했다.
최 영사가 피살되던 날 오전 함께 있었던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장은 “최 영사는 연해주 일대에서 북한의 위조 슈퍼노트 유통 경로를 추적하는 데 밤낮이 없었다”고 했다. 이 원장은 러시아 연방정부의 극동러시아 농업경제자문관을 지낸 인물이다.
“한번은 식당에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미국이 감당할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 영사관도 가만히 있는데 왜 그렇게 애쓰십니까.’ 그러자 최 영사는 웃으며 말하더군요. ‘우리 돈이 아니어도, 북한이 만든 슈퍼노트는 김정일 정권의 숨줄이 됩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가 바로 그걸 막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여기는 북한 벌목공(伐木工)도 많고, 보위부 사람들도 드나드니 조심하십시오’라고 했고, 그는 ‘알겠습니다’라며 조용히 미소 지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피의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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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국탑 추모행사 뒤 대전현충원 참배가 이어졌다. 사진 맨 앞줄 왼쪽부터 장종한 양지회장, 김주성·석희태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공동대표가 최 영사의 묘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
홍윤근 교수는 “블라디보스토크는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서 말 그대로 ‘블러드 거점, 피의 거점’으로 불린다”고 했다. 그만큼 버티기 힘든 지역이라는 의미다.
“2010년 이후엔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근무 중엔 항상 미행과 감시가 뒤따랐습니다. 현지 교민이나 기업인과 접촉하면 그들도 나중에 피해를 보곤 했어요. 단지 국정원 직원과 만났다는 이유로 함께 추방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FSB는 우리 정보요원(IO)들을 상대로 역용(逆用)공작도 자주 걸었습니다. 자료를 주겠다며 유인해 체포하거나 협박하는 식이었죠. 러시아 정보기관은 체포 후 ‘네가 한 일을 모두 자백하라, 그러지 않으면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했고요. 이 때문에 본부에서 사과문을 보내고 사건을 수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근무 자체가 늘 긴장 상태일 수밖에 없었죠.”
주 러시아 대사관 정무공사를 지낸 윤창용 한반도안보전략연구원장은 “최 영사는 초임 시절 내게 업무를 가르쳐 준 인생의 멘토이자 큰형님 같은 분이었다”며 “그는 김일성 사망과 경제난으로 독기 오른 북한 정보요원들이 득실거려 누구도 가길 꺼리던 그 험지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했다.
영사관까지 도청한 러시아
최덕근 영사의 유해는 1996년 10월 5일 항공편으로 국내에 운구됐다. 재부검 결과 시신에서 ‘네오스티그민 브로마이드(neostigmine bromide)’가 검출됐다. 북한 공작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독극물이었다. 청산가리의 다섯 배에 달하는 독성으로, 10mg만 투여돼도 즉사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부검 발표에서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시신 수송 임무를 맡았던 최욱환 전 감찰팀장은 “당시 현장은 참담했다”고 했다. 그는 사건 다음 날인 10월 2일, 본부의 긴급 지시를 받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급파됐다.
“파견 인원은 네 명이었고, 저는 부단장으로 참여했습니다. 본부는 이미 북한 요원에 의한 독살(毒殺)로 판단하고 있었죠. 가장 먼저 영안실로 향했는데, 냉동시설이 전혀 없었습니다. 시신이 그대로 평상 위에 놓여 있었어요. 하루이틀만 지나도 부패가 시작될 상태였습니다. 국내에서 재부검을 하려면 손상이 없어야 해 조속히 이송해야 했지만, 항공편으로 옮기려면 15가지 서류가 필요했습니다. 그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어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는 행정 시스템이 매우 낙후돼 있었습니다. 결국 시신은 사건 나흘 만인 10월 5일에야 후송됐습니다. 그사이 부패를 막는 게 급선무였죠. 시내 얼음은 우리가 모두 사들였습니다. 얼음을 비닐 두세 겹으로 싸서 관 안과 시신 옆에 가득 채웠어요. 국내로 돌아올 때까지 시신이 조금이라도 덜 부패하게 하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야간에는 사건이 벌어진 아파트에도 직접 가봤습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는 전력(電力)이 너무 약해 밤이면 계단에 불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요. 손전등 없이는 한 층도 오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혹시 북한 공작원이 숨어 있을까 봐 전기충격기도 들고 다녔습니다. 식당에 가면 마피아 조직 같은 사람들이 총을 들고 문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런 험한 환경 속에서 수사 독촉과 시신 후송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최 영사가 혼자 얼마나 외롭고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새삼 느껴집니다.”
파견 직원들은 수사 매일 진행 상황도 확인했다.
“아침이면 러시아 FSB에 가서 왜 이렇게 수사가 더디냐고 항의하고 독촉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수사 중’이었죠. 목격자가 있다기에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것도 불허했습니다. 러시아 측은 우리를 상시 도청하고 있었어요. 수사 상황을 파악하던 중 영사관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다음 날 러시아 경찰서에 가보니 우리가 전날 나눈 이야기가 이미 다 전달돼 있더군요. 심지어 영사관까지 도청한 겁니다. 이후 직원들에게 내부에서 민감한 얘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부득이 회의를 해야 할 땐 도청 교란을 위해 라디오 두 대를 양쪽에 틀어 놓자고 했고요. 그렇게 보름 동안 철저히 방어하며 움직였습니다.”
체계 미비가 부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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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30일 보국탑에서 분향 중인 장종한 양지회장, 석희태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공동대표, 신언 국가정보연구회장(왼쪽부터). |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신언 국가정보연구회장은 “최덕근 영사 사건은 탈(脫)냉전 이후 급변하던 한반도 정세 속에서 준비 부족과 판단 오류가 겹친 비극이었다”고 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미국 중심의 단극(單極) 체제가 굳어지고, 한국은 북방정책으로 러시아·중국과의 관계를 확대하며 대북 고립정책을 강화했어요. 안기부는 공세적 대북공작에 치중한 나머지, 실적 위주의 해외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최 영사는 기관 내 대표적 러시아 전문가였지만, 치안이 불안한 블라디보스토크에 단독 파견돼 보호 없이 활동하다 희생됐죠.
당시 기관에는 실적주의가 팽배했고, 러시아·중국 정보기관의 역용공작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중앙정부 통제가 약하고 범죄조직과 구 공산당 세력이 결탁한 지역이었는데, 이런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게 문제였어요. 파견 전 보안과 위험 관리, 언어 훈련 등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사건 이후 위험 지역에는 반드시 숙련된 인력을 팀 단위로 보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죠.”
신 회장은 미국 CIA 요원 로버트 에임스의 사례를 언급했다.
“최덕근 영사와 로버트 에임스는 모두 탁월한 어학 능력으로 현지에서 활동하다 적대(敵對) 세력의 공격으로 희생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출발점은 달랐어요. 최 영사는 대부분의 경력을 본부 분석관으로 보냈고 50대에 들어 첫 해외 파견을 나갔죠. 반면 에임스는 젊은 시절부터 현장 근무를 거치며 중동 전문가로 성장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베이루트, 이란 등지에서 다양한 위장 신분으로 활동하며 폭넓은 네트워크를 쌓았어요. 에임스의 사례는 정보요원의 생존력은 실적보다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걸 보여 줍니다.”
해외정보 파트 개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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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국탑에 새겨진 21개의 별. 정보 전선에서 스러져 간 무명의 헌신을 형상화했다. |
“그 무렵은 소련 붕괴와 한소 수교가 이어지던 격변기로, 사실상 대러 외교의 중심이 국정원이었습니다. 수교 전 코트라가 현지에 들어갈 때도 우리 요원들이 함께 움직였고, 옐친 정부 출범 이후에는 크렘린 궁 핵심까지 네트워크가 닿아 있었죠. 그만큼 국정원이 러시아 외교의 큰 지분을 쥐고 있었는데, 조직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인력이 급하게 차출됐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비극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임성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전문위원은 “해외 요원은 단순한 순환 인사가 아니라 전문직으로 관리해야 하며, 체계적인 교육과 장기적 경력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단독 파견 체제 또한 최소 2명 이상 팀 단위로 바꿔 운영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발생한 피해나 체포, 손실에 대해 명확한 면책·보상제도 등 법적 보호 장치도 마련해야 하죠. 무엇보다 전문 인력을 젊은 나이에 조기 퇴직시키는 현행 계급정년제를 개선해야 합니다. 다년간 축적된 노하우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홍윤근 교수는 “지금 국정원은 위험 지역엔 초임자를 내보내고 미국·프랑스 같은 안전한 나라엔 실력자를 보낸다”면서 “그런 인사 구조를 바꿔야 정보력이 살아난다”고 했다.
| 이병호 전 국정원장 “최덕근 영사의 희생, 북한 정권의 본질 일깨우는 상징”
“언젠가는 우리가 평양에 들어갈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북한의 정보 파일을 뒤져 최덕근 살해의 배후를 밝히는 일이다. 여러분이 그 추적을 계속해 달라.” 그로부터 18년 뒤인 2015년, 그는 국정원장으로 복귀했다. 그때 이 전 원장은 퇴직 때 당부대로 최 영사 사건 추적이 지속적으로 이뤄졌고, 그 결과 3명의 범인을 모두 밝혀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 국정원이 파악한 ‘3명의 실행자’는 누구입니까. “퇴직 당시 ‘우리 가족이 당한 일인 만큼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말한 대로 국정원에서는 꾸준히 추적을 했고, 원장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신원이 특정돼 있었습니다. 다만 구체적 내용은 밝히기 어렵습니다. 국정원이 그 정체를 밝혀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범인이 밝혀졌다면 어떤 방식의 심판이 옳다고 봅니까. “이 사건을 흔히 ‘테러’라 부르지만, 본질은 명백한 살인행위입니다. 북한 김씨 정권은 본질적으로 살인을 통치 수단으로 삼는 정권입니다. 최덕근 영사 사건은 그런 ‘살인 정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김정남 암살도 그 연장선상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복수로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김정은 정권이 아니니까요. 대신 우리가 할 일은 그 본질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매년 추모행사를 여는 데엔 여러 함의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 위협의 실체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 기억에 남는 최 영사의 모습이 있습니까.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러시아어 공부에도 진심이었고, 업무에도 철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잘 알던 직원인데, 현장에서 누구보다 책임감 강한 요원으로 기억합니다.” — 올해부터 양지회에서 추모 행사를 주도하게 됐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국정원 역사에는 이름 없이 헌신한 이들이 많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난 희생의 상징은 최덕근 영사뿐입니다. 그만큼 대표적인 인물이기에 추모가 이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양지회가 나서 준 것을 참 반갑게 생각합니다.” —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이 최 영사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사건 당시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북한의 위협 인식이 희미해지고, 안보의식도 약해지면서 함께 잊혔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북한 정권의 본질에 대한 경계심이 흐려진 것도 이유입니다. 지금처럼 언론이 그를 다시 조명하는 건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국정원 안에서도 젊은 직원들은 점차 그 사건을 모르게 됐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최덕근 영사의 희생은 김씨 정권의 살인적 본질을 드러낸 사건이며, 그 본질을 잊는 순간 우리의 경계도 함께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
올해부터 양지회가 추모제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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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와 ‘최덕근영사를그리워하는사람들’ 등 민간단체는 학술행사도 꾸준히 이어왔다. 사진은 지난 9월 16일 개최한 최덕근 영사 순국 29주기 추념 학술 세미나의 참석자들. |
장석광 최덕근영사를그리워하는사람들 대표(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 엘리 코헨은 알아도 최덕근은 모른다”고 했다.
“엘리 코헨은 사업가로 위장해 시리아 군부에 침투했지만 1965년 체포돼 다마스쿠스 광장에서 처형됐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죠. 국방장관 모세 다얀은 ‘코헨의 정보가 없었다면 골란고원 점령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했습니다. 코헨은 중령으로 추서(追敍)됐고, 국립묘지에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그의 삶은 영화와 소설, 드라마로 제작돼 지금도 세계 여러 언어로 전해져요. 이스라엘 국방부와 정보기관은 매년 공식 추모식을 열죠. 시신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텔아비브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 공원이 있습니다.
반면 최덕근 영사는 사후 이사관(2급)으로 추서되고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았을 뿐, 그것으로 끝이었죠.”
“그 희생이 잊혀선 안 돼”
최덕근 영사는 국정원 보국탑에 하나의 별로 새겨져 있다. 지난 9월 30일, 검은 정장을 입은 몇몇 추모객들의 발길이 보국탑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추모제를 맡아 온 민간단체와 양지회 관계자가 함께 모여 헌화하며 그의 넋을 기렸다. 참배를 마친 이들은 단체 버스를 타고 대전현충원으로 향했다.
장종한 양지회장은 “최덕근 영사는 현직에서 순직했기에 형식상 양지회원 가입 절차는 없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 양지회원”이라면서 “앞으로 이 추모행사는 양지회 이름으로 치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2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은 결코 옅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이름은 언론에서도, 우리 기억 속에서도 조금씩 지워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던 정보요원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이름 없는 별’을 위한 시간입니다. 그의 이름이 교과서에도, 영웅의 기념비에도 없더라도 우리 기억 속에서는 꺼지지 않는 별로 남아야 합니다. 지난 4년간 행사를 주관해 온 구국혼선양회 관계자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의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이런 추모와 기념의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계속되길 바랍니다.”
이어 석희태 구국혼선양회 공동대표(정교모 공동대표)는 “최덕근 영사를 비롯한 21인의 정보기관 열사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가능했다”며 “직분의 특수성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그 희생이 역사 속에서 잊혀선 안 되며 이들의 명예를 지키고 유족이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정보원 유공자 예우 및 보상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했다.
우리는 왜 최덕근 영사를 기억해야 할까? 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의 말이다.
“현직을 떠나더라도 대한민국 공직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남아야 나라가 유지됩니다. 외교·안보는 하나의 몸통인데, 지금은 부처마다 따로 움직이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최덕근 영사를 기려야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순직했습니다. 대한민국은 하나의 가치입니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사람을 기억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996년 10월, 싸늘하게 돌아온 최 영사의 유품에서 발견된 메모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나이가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는다! 그것은 여한이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