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 목 아프다는 핑계로 이토와 담판 거절하며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책임 미뤄
⊙ 고종, 러일전쟁 후 한일의정서 체결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30만 엔 받아
⊙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방한 전 ‘대사 접대비’ 명의로 2만원을 고종에게 줘
⊙ 고종, 을사조약 규탄 상소에 “당장 엎어질 물그릇도 아니고 물 새는 배도 아닌데 호들갑인가”
⊙ 고종, 조약 체결 후 이토에게 “대한제국 대신들보다 경을 신뢰… 짐을 보필해 달라”
⊙ 을사오적, “우리 다섯에게 사실무근 죄명 씌워… 체결 경위는 폐하가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 고종, 러일전쟁 후 한일의정서 체결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30만 엔 받아
⊙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방한 전 ‘대사 접대비’ 명의로 2만원을 고종에게 줘
⊙ 고종, 을사조약 규탄 상소에 “당장 엎어질 물그릇도 아니고 물 새는 배도 아닌데 호들갑인가”
⊙ 고종, 조약 체결 후 이토에게 “대한제국 대신들보다 경을 신뢰… 짐을 보필해 달라”
⊙ 을사오적, “우리 다섯에게 사실무근 죄명 씌워… 체결 경위는 폐하가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 고종과 을사오적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종,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이날 일본 측 대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상대로 조약 협상을 했던 대신들이 있다. 그 가운데 적극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체결에 찬성했던 대신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한다. 을사년에 나라를 팔아먹은 다섯 도둑놈이라는 말이다. 이완용(李完用), 이근택(李根澤), 이지용(李址鎔), 박제순(朴齊純), 권중현(權重顯) 다섯 사람이다. “광무제 고종이 끝까지 반대했지만 간악하고 이기적인 오적에 의해 나라가 팔려 나갔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조선(대한제국)이 망국(亡國)을 맞은 과정은 한순간이 아니다. 과정이다. 그 과정을 살펴봐야 누가 나라를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을사조약 120주년을 맞은 지금, 그 과정을 정리해 본다. 미리 말하자면, 1904년 2월부터 1905년 11월까지는 ‘고종의 매국(賣國) 시대’였다.
매국 스테이지 #1
러일전쟁과 뇌물 30만 엔
한일의정서, 쥐떼들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이 청(淸)나라 여순(뤼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함대에 어뢰를 발사했다. 2월 9일 일본 함대 14척이 제물포에 입항한 러시아 바랴크호와 코리에츠호를 공격했다. 2월 10일 일본 측 선전포고와 함께 러일전쟁이 터졌다.
이미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保護國)화하기로 결정한 터였고, 조선과 그를 승계한 대한제국 정부도 이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한일의정서’ 체결 과정에서 대한제국에서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먼저 관료들이 보인 행동이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11일 오후 외부(外部)대신 이지용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사전에 요구했던 ‘황제를 회유하는 데 필요한 활동비 1만원’ 전액을 받아 갔다. 하야시는 “미리 주지 않으면 행동을 망설일 듯하여 전액을 전달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이하 〈기록〉) 18, 12-(16)‘한일밀약 체결예상 및 한정(韓廷) 회유상황 등 보고 건’, 1904년 1월 11일)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러일전쟁을 위한 군용지(軍用地) 불하(拂下)를 요구하던 중이었다. 긴 협상이 필요한 이 안건을, 대한제국 외부대신 이지용은 ‘활동비 1만원’을 주면 로비를 벌여서 해결해 주겠다며 제 발로 걸어서 일본 공사관으로 들어갔다.
8일 뒤 이지용은 궁내부 특진관 이근택, 군부대신 민영철(閔泳喆)과 함께 하야시에게 황제 위임장을 들고 왔다. 이들은 하야시에게 “생명을 걸고 본건 성립에 온 힘을 다할 작정이니 (일본)제국 정부에서도 충분한 신뢰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위험이 신상에 발생하게 될 경우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줄 것’도 요구했다.(〈기록〉 18, 12-(20)‘한일밀약 체결안 협의진행과정 보고 건’, 1904년 1월 11일)
2월 21일 이지용은 한성판윤 김규희에게 “북진 일본군 군수품 수송을 위해 매일 인부 600명을 지체 없이 모집하라”고 지시했다.(〈각사등록 근대편〉, 한성부래거안 1, ‘내문’, 훈령 제1호, 1904년 2월 21일)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제국 정부와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제국 영토 어디든 임의로 일본군이 군사용지로 수용할 수 있게 된 협정이다. 대한제국은 일본제국 병참기지로 변했다.
천황의 뇌물 30만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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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 1904년 3월 고종 가족에게 천황 하사금 30만엔을 지급했다는 일본 외교문서 기록. 사진=일본 외무성 |
한일의정서 조인 전인 2월 8일 고종은 이지용을 통해 ‘궁성과 정부는 범접 금지 보증’을 요구했다.(〈기록〉 23. 2.1~3-(104)‘심상훈을 통한 황제 위안 노력에 관한 건’, (105)‘한국황실과 국토보전을 보장하겠다는 하야시 공사의 상주문’ 등)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조인됐다. 의정서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과 안녕을 성실 보장” 조항이 삽입됐다.
닷새 뒤인 2월 28일 고종은 본인과 황태자(순종), 영친왕 이름으로 백동화 18만원을 일본군 군자금으로 기부했다.(〈일본외교문서〉 37-1,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3월 18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했다. 이토는 ‘군자금 기증에 대한 천황의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종이 이토에게 말했다. “국정에 대해 경으로부터 들을 이야기가 많다. 그러니 짐의 최고 고문이 되어서 평상복을 입고 언제든지 짐의 자문에 답해 주기를 희망한다.”(앞 책, p.293, ‘3월 18일 이토 특파대사 알현 시말’)
두 번째 알현이 있고 다음 날인 3월 22일 이토가 궁내부(宮內府) 대신 민병석(閔丙奭)을 숙소인 손탁여관으로 불렀다. 자기 옆방에서 이토가 은밀하게 제안했다. “군자금을 받은 답례로 일본돈 30만 엔을 황제에게 바치려 한다.”
뜻을 전해 들은 고종은 “거절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이를 수락했다. 이토는 30만 엔이 입금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예금 통장을 민병석을 통해 고종에게 헌납했다. 이틀 뒤 이토는 궁내부 철도원 감독 현운영의 아내를 통해 엄비에게 1만 엔, 황태자에게 5000엔, 황태자비에게 5000엔을 각각 상납했다.(앞 책, pp.297~298, ‘황실 금원 기증 시말’)
영국 외무부 문서에 따르면 고종이 받은 금품은 30만 엔 외에 철도 지분도 있었다. 접견식에 배석했던 영접위원장 민영환(閔泳煥)은 3월 31일 영국 공사관을 방문해 공사 조던에게 이토 방문에 대해 설명했다.
“대사는 황제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줬다.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 후작은 같은 방식으로 50만 엔을 궁중 참석자에게 나눠 주고, 이번 방문 관계자들에게도 귀중품을 선물했다.”(영국 외무부, Jordan to Lansdowne, 1904.3.31, FO/17/1659)
3월 24일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수여했다. 3월 20일부터 25일까지 주한 일본 공사관 직원 전원과 대사 수행원 전원,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까지 훈장을 받았다.(《고종실록》 1904년 3월 20~25일) 여기까지가 기록으로 확인된 1904년 러일전쟁 전후 고종과 예하 관료들의 첫 번째 매국 스테이지다.
매국 스테이지 #2
국가 매각 미수사건 ‘일한동지조합’
고종의 측근 정치와 이세직의 서류 뭉치
1905년 3월 14일 이세직(일명 이일직)이라는 사내가 대한제국 경성시내에서 치안 방해 혐의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소지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서류들이 튀어나왔다. 고종 칙명 도장이 찍힌 ‘차관 도입 칙명서’ 7건, ‘일본에 망명 중인 을미사변 범인들 일망타진’ 칙명서, 그리고 ‘국가 이권사업 특허계약서’ 23건. 계약 당사자는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이재극(李載克)과 ‘일한동지조합(日韓同志組合)’이라는 일본인 투자집단. 토지조사사업부터 산업단지와 항만 개발, 가스회사 설립에서 염전(鹽田) 개발까지 국책사업 일체를 일본인에게 넘기고 고종은 그 대가로 상납금 총 490만원과 매년 수익의 일정 비율을 받는 계약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예산이 1496만원이었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태학사, 2004, p.159)
이세직은 1894년 일본에서 홍종우(洪鍾宇)를 사주(使嗾)해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한 고종 측근이다. 일본에서 추방된 이세직은 ‘주상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임금 거소를 들락날락할 정도로’ 고종 총애를 받았다.(‘대한제국 관보’ 1898년 1월 18일)
아래는 1905년 1월 15일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이 ‘일한동지조합’이라는 일본인 단체와 계약을 맺은 특허권 목록이다. 이 조합은 많게는 100만원, 적게는 5만원까지 상납금을 황제에게 납입하고, 15년 동안 각 사업 수익을 황실과 나눠 갖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황실-조합 이익 배분은 2 대 8에서 6 대 4까지다. 계약 주체는 고종 8촌인 궁내부대신 이재극과 일한동지조합 대표들이다. 칙명과 계약서는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에 영인(影印)돼 있고, 누구나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모든 사업은 ‘특허권’, 그러니까 독점사업권이다.
이권(利權) 23개, 국익의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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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월 15일 고종 칙령으로 대한제국 궁내부와 ‘일한동지조합’이 맺은 ‘토지조사사업’ 특허권 계약서. 대한제국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토지[隱結·은결]를 찾아내고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양여한다는 계약서다. 고종은 현금 100만원을 받고 이 사업을 조합에 넘기고, 조합은 매년 징수하는 세금의 40%를 수익으로 갖기로 계약을 맺었다. 대한제국이 ‘일한동지조합’에게 넘기기로 계약한 국가 이권사업은 모두 23건이었다. |
2. 연강·연해 매립사업권
3. 연강·연해 제방 수축 및 전답 관리권
4. 연해·연강 요지 권업장 설립 및 운반권
5. 기타 연해·연강 매립에 관한 사업 일체
6. 각 도시 및 항구 가스회사 설립권
7. 수력을 이용한 공업 행사권
8. 적지(適地) 양어권(養魚權)
9. 각 지방 표고버섯 재배 및 판매권
10. 담배 증식권
11. 염전 증식권
12. 구 목장 재흥권(再興權)
13. 습지 전답 조성권
2주일 뒤인 1월 29일 대한제국과 일한동지조합은 추가로 10개 이권에 대해 계약을 맺었다. 조건은 동일했다.
1. 황실 소유 석유 전매권
2. 제주도 관유(官有) 목장 확장권
3. 전 항구 지역 항만[船渠·선거] 확장설치권
4. 설탕 전매권
5. 온천 및 냉천 개발사업권
6. 모범농장 적지 설립 및 종자 개량, 비료 제조, 농기구 개량권
7. 제주도 장뇌 제조 전매권
8. 탁지부 장부에 빠진 토지[隱結] 일반 역둔토 조사정리사업권
9. 소금 전매권
10. 담배 전매권
같은 날 고종은 각 특허권에 대한 상납금을 완납하면 그 10%를, 매년 황실에 납입하는 수익금의 10%를 조합 대표에게 준다는 칙명을 내렸다.(〈기록〉 25, 6-(5)‘이익금의 100분의 10을 일한동지조합 대표에게 지불한다는 칙명’)
토지 개발 및 징세, 항구 개발, 산업단지 개발, 농산물과 양식, 각종 전매사업이 총망라돼 있다. 23건 계약으로 고종이 받기로 약정한 상납금 총액은 490만원이었다. 특히 수익이 큰 토지조사사업 상납금은 50만~100만원으로 최대였다.
일한동지조합 대표인 모리베 도라주(毛利部寅壽)는 주한 일본 영사에게 이렇게 서면 진술했다. “다 합쳐 보니 한국 13도(道) 중 대략 10분의 7은 일본국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기록〉 26, 1-잡(雜)1~3-(2)‘일한동지조합 대표 모리베 도라주의 국내 사업 특허 전말과 경위 해명’) 사업을 위해 이들이 투입한 경비는 2만 엔으로, 이 돈은 ‘이퀴터블(Equitable)’이라는 미국 보험회사에서 투자했다.(〈기록〉 25, 10-(17)‘모리베 등이 받은 특허의 건’)
국가예산 2배의 차관 밀칙
이권계약보다 한 달 전인 1904년 12월 13일 고종은 이세직에게 두 가지 칙명을 내렸다.
첫째, 일본으로 망명한 을미사변 주범들을 일망타진하고 역모의 간담이 싹트기 전에 파멸시키라.(〈기록〉 25, 6-(1)‘도일 망명자 처리에 대한 대한제국 황제의 밀칙’) 이를 위해 일본 정부 및 경성 주차(駐箚) 일본군 사령부 내 비밀을 탐지할 각국 인사 10명을 포섭하고 이들에게 선수금 5만원, 상금 50만원을 지급하라.(〈기록〉 25, 6-(13)(14))
1884년 갑신정변 이래 고종은 일본에 망명한 국사범(國事犯) 처단에 몰두했다. 지운영(池雲英)을 보내 김옥균 암살을 시도했고, 이세직과 홍종우를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고 박영효(朴泳孝) 암살을 시도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에는 또 다른 측근 고영근(高永根)이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을 암살했다. 그리고 고종은 이세직에게 잔당 처리 밀명을 또 내렸다. 이를 위해 경성과 도쿄 두 군데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각 5명을 포섭해 일을 처리하라는 추가 지시도 함께 하달했다.
둘째, 같은 날부터 1905년 2월 6일 사이 고종은 이세직에게 50만원에서 2만원까지 7건에 이르는 차관 도입 밀칙도 내렸다.(〈기록〉 25, 6-(6)~(12)) 당시 대한제국 황실 재정은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1차 한일협약’에 의해 탁지부 고문으로 임명된 일본 대장성(大藏省·재무부) 소속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황제가 영수증 없이 쓰던 황실 내탕금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차관 밀칙은 이같은 상황에서 하달됐다. 압수된 칙명을 포함해 고종이 이세직에게 명한 차관 총액은 2642만원으로 그해 예산 두 배에 가까웠다.(김선주, 〈이세직의 활동을 통해 본 대한제국기 정치와 외교〉, 《역사와 현실》 99호, 한국역사연구회, 2016)
일본 정계 원로들에게 로비
일본 공사관이 일한동지조합 대표인 모리베 도라주를 조사했다. 모리베는 “도쿄에서 제현(諸賢)과 상의해 동의를 얻었다”며 “망명자 처분 서류 따위는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기록〉 26, 10-잡1~3-(2)) 모리베가 언급한 ‘제현’은 이토 히로부미, 전 내각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전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역시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등이다.
로비는 유효했다. 이세직 체포 한 달 뒤인 4월 14일 가토 다카아키가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선처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다. 같은 날 오쿠마 시게노부도 “시정방침에 어긋나지 않는 한 부디 편의를 주시기 바란다”고 편지를 보냈다. 현직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의 이름도 편지에 언급돼 있었다.(〈기록〉 26, 10-잡1~3-(3)‘모리베의 방한 설명에 선처 요청’, (5)‘伊藤博文·桂太郞·小村壽太郞의 동감과 동사업 승인 요망’)
대한제국 접수를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 정부가 허용할 리가 없었다. 로비를 받았던 외무대신 고무라는 6월 27일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공문을 보냈다. “한국 경영에 관해서는 정부에서 일정한 방침을 가지고 실행을 기하고 있음. 이 사업을 허용하게 되면 대한(對韓) 경영은 근저부터 파괴돼 유명무실로 돌아갈 것임.”(〈기록〉 25, 10-(15)‘모리베 등이 획득한 양여에 관한 선후처분의 건’)
7월 11일 일본은 대한제국 외무대신에게 사건 해명과 ‘조약 이행 각서’를 요구했다. ‘조약’이란 앞서 1904년 8월 체결된 1차 한일협약으로, 이렇게 규정돼 있다.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일본 정부와 토의할 것.”
늘 그러했듯, 고종은 일체를 부인했다. 7월 17일 고종은 “이세직이 외국인과 사통해 나라 간 관계를 손상시켰다”며 “협약을 마땅히 준수해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관보에 실었다.(《고종실록》 1905년 7월 17일, ‘관보’ 7월 19일)
주한 공사 하야시가 본국에 보고했다. “이리하여 일한협약서의 효력은 실제적으로 강화됐음.”(〈기록〉 26, 1-1~4-(181)‘이세직의 이권문제와 일한협약서 효력강화 건’)
고종의 매국 행각 두 번째 스테이지는 여기까지다. “실질적으로 강화됐다”는 하야시 언급대로, 4개월 뒤인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매국 스테이지 #3
성공한 매국, 을사조약
황제의 수중에 2만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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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11월 11일 고종에게 무기명채권 2만원을 포함한 기밀비 10만원을 집행했음을 보고한 12월 11일자 하야시 곤스케 보고서. |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 체결을 위해 비용을 필요로 하겠기에 기밀비 10만원[공사관 문서에 ‘원(圓)’으로 표기돼 있어서 대한제국 원화인지 일본 엔화인지 명확하지 않다]을 송부하여 위 목적에 지출하라는 훈시 취지를 삼가 받았습니다. 이에 지난 11월 11일 대사 접대비 명의로 금 2만 원을 경리원경 심상훈을 거쳐 무기명예금증서로 황제 수중에 납입시켰습니다. 공사 하야시 곤스케.”(〈기록〉 24, 11-1~3-(195)‘임시기밀비 지불잔액 반납의 건’, 1905년 12월 11일)
대한제국 황제가, 지금 돈 25억원에 해당하는 돈을, 요즘도 뇌물로 즐겨 쓰는, 현금과 동일한 무기명예금증서로 받았다. 이 문서에는 조약 체결 전후로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 응접관을 지낸 구완희(具完喜)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3000원, 내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이근택 5000원, 학부대신 이완용 1만원,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다른 세 대신이 1만 5000원을 하야시로부터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액수로는 고종-이완용-이지용과 이근택 순이다. 황제가 받은 돈이 액수가 가장 컸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에 이어 두 번째 수뢰(受賂)였다.
《황성신문》, 행간의 비밀
1904년 2월에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30만 엔, 1905년 1월에 일본 민간 자본가와 맺은 국익 판매 대가에 비하면 2만원은 사소하다.
그런데 조약 체결 전후 고종이 보여 준 행각을 보면 을사조약 체결에 고종이 한 역할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당시 조약을 둘러싼 민간 기록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있다. 두 신문 모두 소속 기자를 조약 협상장에 들여보낼 수 없었으니, 이들 신문 기사나 칼럼은 사후 취재나 외곽 관찰에 의해 집필됐다. 이 두 신문에 기록된 당시 풍경을 보자.
《황성신문》은 조약 체결 직후 조약에 관한 스트레이트 기사와 해설 기사를 실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은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특정해서 매국노라고 지적했다. 정확하게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대황제폐하의 강경하신 성의로 거절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셨으나 (중략) 저 돼지와 개만도 못한 대신들이란 자들이 영화와 이익을 바라보고 바들바들 떨며 나라를 파는 도적 되기를 달게 여겨(賣國의 賊을 甘作) (하략)〉(《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 2면)
고종은 강경하게 반대했고, 개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이 달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됐다고 《황성신문》은 주장했다. 이 ‘나라 파는 도적(賣國의 賊)’이 훗날 ‘을사오적’이라는 네 글자가 보통명사처럼 통용되게 만든 근원이다. 이후 숱하게 고종에게 올라간 상소문에는 어김없이 오적 처단 요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사설 아래 ‘잡보(雜報)’로 분류돼 붙어 있는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정확한 당시 상황이 묘사돼 있다.
〈이토가 궁내대신 이재극을 불러 알현을 청하였으나, 마침 폐하께서 인후(咽喉)의 병환으로 고통하시어 알현을 사양하셨다. 이토가 천제 지척에서 알현을 청하였으나, 폐하께서 거절하시며 “볼 필요가 없다. 나가서 정부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유하셨다. 이토가 물러나 또다시 간청하니, “협의하라, 다시 회의를 열라” 하시고 (하략)〉
또 있다.
〈조칙을 내리어 “(조약 체결을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은 궁금(宮禁) 지척에서 거동을 실당(失當)하였으니, 먼저 본관을 면하고, 유(流) 3년 정배하라” 하셨다.〉
조약 반대한 한규설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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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대신 한규설. |
그런데 사람들은 저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만 읽는다. 격정적 필체로 개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을 나라를 판 도적으로 몰았고, 이 스트레이트 기사마저 큰 활자체로 “우리 대황제폐하께서는 강경히 거절하시고 재가하지 않으셨으니, 아무리 아래에서 체약(締約)하였다 한들 필경 무효일 것”이라고 끝을 맺었다. 취재되지 못한 팩트를 이 신문은 지극히 봉건적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고, 대한제국 백성들은 이를 믿었다.
11월 20일 하루를 휴간했던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1일 자에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 상소문을 실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신문 기사로 실려(始以新聞記載) 길에서 퍼져 그간 오래 들려왔던 소식”이라며 조약 관련자들 처벌을 요구했다.
〈황상께서도 ‘불가(不可)’라 하시고, 정부 주무의 참정대신도 ‘불가’라 하시며, 국민도 모두 ‘불가’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틈에서 ‘가(可)’라 하여 조인한 대신을 어찌 옳다 하겠습니까. (중략) 우리나라를 판 도적에 대해 말하자면(至於我國之賣國賊), ‘가’라 쓰느냐 ‘부(否)’라 쓰느냐 하던 그 자리에서 이미 형적이 드러났습니다. 뻔뻔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대한매일신보》 1905년 10월 21일)
〈시일야방성대곡〉이 전달한 ‘거부하는 황제 대(對) 나라를 판 도둑들’ 구도가 그대로 민심으로 흡수돼 있다. 고종의 무책임함과 한규설의 유배형은 잊히거나 무시됐다.
을사오적의 항변
수많은 지사(志士)들이 자결(自決)로 의지를 보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매국노를 죽이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훗날 헤이그 밀사로 활동한 이상설(李相卨)은 아예 “어찌 사직(社稷)을 위해 황제는 죽으려 들지 않는가”라고 고종을 비난했다.(《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3일) 숱한 상소에 고종이 내린 답은 대개 이랬다. “번거롭게 굴지 말라” “당장 엎어질 물그릇도 아니고 물 새는 배도 아닌데 호들갑인가” “모두 법부에서 잡아 징계 처분하게 하라.”(1905년 11월 27일, 12월 20일 등등)
그래서 원로 대신 조병세(趙秉世)가 자살했다. 민영환이 자살했다. 민영환이 죽자 이상설은 종로에서 “전 국민이 멸망한 날”이라고 연설한 뒤 바위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일조각, 1998, pp.45~46; 김구, 《백범일지》 영인본, 한국교과서주식회사, 2016, pp.181~182)
한 달이 지난 12월 16일, 그 을사오적이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하나 없이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모든 개가 따라 짖듯 소란을 피워 대니 한심하다.”(《고종실록》 1905년 12월 16일)
항의가 이어진다.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대한 조항이 없다고 하니까 폐하가 ‘그거 좋다’며 넣으라고 하지 않았는가.”(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우리 모두가 ‘폐하 뜻은 그러하나 우리는 기필코 불가(不可)라는 두 글자로 물리치겠다’고 하니까 뭐라 그랬나. ‘방금 전 짐의 뜻을 말했으니 모양 좋게 조처하라’고 하지 않았나.”(권중현)
“이토 대사가 알현을 청했더니 인후통을 앓고 있어서 못 만난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각 대신에게 협상해 잘 처리하라고 했다’고 답하지 않았는가.”(학부대신 이완용)
“두 나라 사이 협상된 초안을 폐하가 모두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나.”(이완용)
상소는 이렇게 끝났다. “무슨 이유로 걸핏하면 우리 다섯에게 사실무근한 죄명을 씌워서 천지에 몸 둘 곳이 없게 한다는 말인가. 체결 경위는 폐하가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고종 비답은 “각자 한층 노력을 기울여 타개책을 도모하라”였다.
이토 붙잡은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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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조약 체결 후 “남아 있는 검은 수염으로 힘써 짐을 보필해 달라”는 고종의 부탁이 기록된 이토 히로부미 복명서. /국사편찬위원회 |
〈황제: “경은 지금 수염이 반백이고 생각하면 그게 이에 이르게 된 것도 오직 국사에 매진한 결과가 아닌가. 바라건대 남은 검은 수염으로써 짐을 보필해 달라. 그 수염이 서리처럼 희게 되면 우리나라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이 비록 늙었으나 짐은 대한제국 정부 대신 그 누구보다 경을 신뢰한다.”
이토: “이 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모든 일이 예정 시간에 따라 털끝도 지체를 허가치 않습니다. 유감입니다.”〉
을사조약은 저 ‘매국 시대’ 세 스테이지 가운데 마지막에 불과했다. 제국 영토를 일본군 손에 맡기고 30만 엔을 받고, 온 나라를 일본 헤지캐피털에 팔아넘기려다 들통이 난 뒤 조무래기 대신들과 함께 푼돈을 받고서 “황실 우대 조항은 넣자”며 협상을 대신들에게 떠넘겼다. 조약 후 숱한 선비가 올린 상소를 “크게 벌일 일이 아니다”라고 대응했다. 오적이 올린 거친 상소에 단 한마디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타개책을 마련하라”고 답했다. 나라를 누가 팔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