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든 책 한 권

《목민심서》 | 정약용

공직자로 살아온 生의 동아줄이자 지렛대

  • 글 : 이상배 前 공직자윤리위원장·前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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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곤궁하면 자식을 낳아도 거두지 못하니, 가르치고 길러서 내 자식처럼 보호하라”

李相培
1939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울진군수, 안동시장, 경북도지사, 환경청장, 내무부 차관,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 총무처장관, 서울특별시장, 국회의원(3선),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 역임
대학교 3학년이던 해 4·19혁명이 일어났다. 동숭동 서울대 강의실을 뛰쳐나와 시위에 참여했고, 순수한 20대의 열정으로 남북 학생회담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젊음은 정직했고, 정의감으로 충만했다. 졸업반이던 해에는 5·16혁명이 터져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혔다. 나 역시 용공(容共)분자로 지명수배되어 숨어 지내야 했다. 불안과 긴장이 교차하던 시절이었지만, 젊은 날의 이상과 양심은 꺾이지 않았다. 현대사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름의 신념과 성실함으로 젊음을 보냈다.
 
  1962년 대학을 졸업하고 내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산과 들, 하천과 도로, 주택까지 국토를 개조하고 국민소득을 높이기 위한 사업들이 줄을 이었다. 그때의 공직 사회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거대한 의지로 움직였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지만, 이미 현장은 ‘우리 손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자’는 열기로 들끓었다. 나는 젊은 사무관으로서 현장을 누비며 국민과 함께 땀 흘리는 공직자의 보람을 처음 느꼈다. 공직자로서 ‘하면 된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희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 시절 우리는 ‘오천 년 가난’을 이겨 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세대였다. ‘일하는 해’ ‘더 일하는 해’를 외치며 밤낮없이 일했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도 감내했다.
 
  나는 공직 생활 내내 남의 눈 밖에 나는 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 조심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 일을 더 잘하려 노력했다. 공직은 내게 직업이 아니라 ‘삶의 형식’이었다.
 
 
  목민관의 길을 배우다
 
李相培
  경북도지사 시절, 시골 마을을 돌 때마다 운전기사에게는 흙먼지가 일지 않게 천천히 달리라 했고, 비 오는 날에는 빗물이 튀지 않게 주의하라 당부했다. 민생 현장을 찾아갈 때도 마중이나 안내를 부담스러워 했다. 때로는 군(郡) 경계까지 마중 나온 군수를 따돌리고, 시장 골목의 돼지국밥집에서 한 끼를 때우기도 했다. 서민의 삶과 애환을 직접 보고 들었으며, 작은 민원에도 귀를 기울였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린 시절 장터에서 뵙던 어머니의 얼굴 같았고, 나이든 아주머니들은 내 어머니 같았다.
 
  나는 군수·시장·도지사·서울특별시장을 두루 지냈다. 일생을 공직에 몸담으며 ‘목민관(牧民官)’의 자리를 모두 경험한 것은 드문 일일 것이다. 여러 보직 중에서도 가장 큰 보람도 목민관으로 일할 때 느꼈다. 목민관은 관할 구역의 주민은 물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까지도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타관(他官)은 가구(可求)나, 목민관은 불가구(不可求)”라 했다. 지도자는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싫어해야 한다. 그래서 백성의 부모라 부른다. 공직자로서 살아오는 동안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내 생의 동아줄이자 지렛대였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 책을 펼쳤고, 주민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올바른 길을 찾았다.
 
  1971년 안동시장 때였다. 시 재정이 넉넉지 않아, 어른들을 위한 공간은 있었지만 어린이 시설은 거의 없었다. 나는 시를 가로지르는 천리천 일부 구간을 복개해 그 위에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었다. 쇠줄로 매단 그네, 시소와 미끄럼틀을 마련하며 아이들의 웃음을 상상했다. 당시 일부 공무원들은 “예산도 빠듯한데 어린이 놀이터가 급한가”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도시가 곧 건강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목민심서》 ‘자유(慈幼)’ 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큰 정치이다. 백성이 곤궁하면 자식을 낳아도 기르지 못하니, 가르치고 길러서 내 자식처럼 보호하라.”
 

  이 정신으로 놀이터를 열었으나, 며칠 뒤 한 어린이 자매가 그네를 타다 다치는 사고가 났다. 급히 달려가 보니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나는 깊이 반성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세심함이 부족하면 위험이 따르는 법이었다. 이후 담당 공무원들에게 “내 자식들이 이용한다는 마음으로 일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1986년 경북도지사 시절에는 문경 가은읍 취로사업장에서 고구마만 한 혹을 목에 달고 일하는 여성을 보았다. 작업이 끝나자 읍장에게 그녀를 대구 동산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받게 하라 하고 선금 30만원을 건넸다. 그러나 며칠 뒤 그 여성이 돈을 수술비 대신 생활비로 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읍장을 엄히 꾸짖었다. 결국 수술은 성공했고, 부인은 건강을 되찾았다. 그 소식을 들으며 나는 사람의 정(情)을 베푸는 다산의 ‘인정 행정’을 떠올렸다. 목민관은 종이에 적힌 행정이 아니라,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자리임을 절감했다.
 
 
  일어설 수 없는 이를 일으키는 것이 목민의 본령
 
  청도 지역을 시찰하던 중 라면 한 봉지를 들고 가게를 나서는 한 중년 부인을 보았다. 얼굴빛이 누렇게 뜨고 황달기가 역력했다. 면장에게 물으니 혼자 어렵게 사는 분이라 했다. 나는 곧 보건소로 모시게 해 치료를 받도록 하고, 생활 지원도 병행했다.
 
  《목민심서》 ‘진궁(賑窮)’ 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목민관은 눈에 띄는 어려운 이들을 행정 절차를 넘어 돌보아야 하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목민관은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분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의미다.
 
  서울시장 시절에도 판잣집이 즐비하던 달동네를 자주 찾았다. 봉천동, 양동, 중림동…. 하루 한 끼로 버티는 이웃들이 있었다. 남은 판공비로 급한 불을 끄고, 부족하면 사비를 털어 치료비를 지원했다. 쌀과 연탄이 떨어지지 않게 챙겼다. 때로는 이름조차 모르는 이웃의 방에 들어가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었다. 목민은 ‘서류’가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다산의 말씀이 내 행정의 좌표였다.
 
  물론 모든 분을 다 같이, 똑같이 돌보는 것은 국가나 사회제도가 할 일이지만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현장의 어려운 분들을 돌보는 것은 목민관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공직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었다’고 생각한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공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이 장관’ ‘이 시장’이라 부른다. 그 이름에 걸맞은 품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남의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해 절제하며, “나다” 하기보다 ‘나답게’ 살고자 한다.
 
  《목민심서》가 가르쳐 준 것은 결국 하나다. 공직은 권력이 아니라 섬김이며, 목민관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 200여 년 전 다산이 유배지에서 남긴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다. 아니, 지금 이 시대야말로 그 가르침이 더욱 절실하다.
 
  권위보다 양심이, 권력보다 연민이 필요한 시대다. 진정한 공직자는 자리를 지키는 이가 아니라, 사람을 일으키는 이여야 한다. 다산의 정신은 먼 옛날의 도덕서가 아니라, 오늘의 지도자들이 마음속에 새겨야 할 ‘행동 교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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