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구대·천전리 암각화, 전 세계 암각화 중 36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지금도 1년에 한 달여간 수몰… 사연댐 수문 완공되면 침수 막게 돼
⊙ 천전리 바위엔 총 네 차례 걸쳐 그림과 글 조각
李鐘鎬
1948년생. 고려대 건축공학과 대학원 졸업,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 공학박사 /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 과학기술처장관상·태양에너지학회상·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現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저서 《포스트 코로나 로드맵》 《침대에서 읽는 과학》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직업》 《로봇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등 100여 권
⊙ 지금도 1년에 한 달여간 수몰… 사연댐 수문 완공되면 침수 막게 돼
⊙ 천전리 바위엔 총 네 차례 걸쳐 그림과 글 조각
李鐘鎬
1948년생. 고려대 건축공학과 대학원 졸업,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 공학박사 /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 과학기술처장관상·태양에너지학회상·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現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저서 《포스트 코로나 로드맵》 《침대에서 읽는 과학》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직업》 《로봇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등 100여 권

- 2022년 9월 21일 오후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울산 울주군 언양읍에 위치한 너비 8m, 높이 5m의 국보 반구대 암각화가 1.5m가량 물에 잠겨 있다. 사진=조선DB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한 ‘반구천의 암각화’는 울산시 울주군 대곡천 일대, ‘울주 천전리 명문(銘文)과 암각화’(구 울주 천전리 각석)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로 이루어졌다. 한국은 이번 등재로 세계문화유산에 15개(자연유산 2개 포함 총 17개)나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유산 분야 강국이지만, 사실 유네스코의 깐깐한 등재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유네스코의 전문가 자문심사 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하 이코모스)는 10가지 등재 기준을 두고 그중 하나 이상을 충족할 경우 세계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하고 있지만, 신청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
선사인들의 걸작
‘살아 있거나 또는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 혹은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반구천의 암각화를 정밀조사한 이코모스는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 주고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의 주요 단계를 담은 희소한 주제를 선사인들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이며 ▲선사시대부터 약 6000년에 걸쳐 지속된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한반도 동남부 연안 지역 사람들의 문화의 발전을 집약해 보여 준다”는 설명이다.
울산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전투를 치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한국은 반구천 암각화의 등록을 부단히 추진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번 신청을 연기했다. 세계유산 도전이 깐깐하게 추진된 것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한번 거부되면 다시 신청할 수 없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반구천의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록이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 큰 이유 하나는, 그중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가 해마다 어김없이 물에 잠기는 악몽을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사연댐 상류에서 4.6km 떨어져 있다. 사연댐은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되기 6년 전인 1965년 대곡천 하류에 건설됐다. 사연댐의 수위가 해발 56.7m까지 올라가면 암각화는 완전히 물에 잠기는데, 사연댐에 물이 가득 차면 수위는 60m까지 올라간다. 사연댐 건설 이후 반구대 암각화는 1년 중 적어도 6개월 이상 ‘물고문’을 당했다. 이후 암각화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되어 ‘물고문’ 일수가 줄어들었지만 완전하게 막지 못하고 1년에 최소한 한 달 이상 물속에 잠긴다는 약점이 발목을 잡았다.
암각화가 그려진 암석은 점토가 굳어 생성된 셰일(shale)로 물과 바람에 취약하다. 물에 잠길 때마다 광물이 녹아 구멍이 나거나 그림이 그려진 일부 암석이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다. 또 물이 빠지면서 암면(巖面)도 함께 부스러지고 유속(流速)에 의해 충격을 받기도 한다. 한마디로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반구대 암각화’이지만, 유산에 대한 ‘물고문’이 원천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에는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울산시는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위해 그동안 수없는 대안을 제시했는데, 최적의 방안으로 ‘사연댐 여수로(餘水路·댐의 저수량이 일정량을 넘을 때 여분의 물을 빼내기 위한 물길) 47m 지점에 폭 15m, 높이 7.3m의 수문 3개 설치’를 최종 확정했다. 3개의 수문을 설치할 경우, 60m인 사연댐 여수로 수위가 52.2m로 낮아져, 53m 높이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의 침수를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방안에 의해 수문이 2030년 완공되면 반구대 암각화의 연평균 침수 시간은 0.8시간 이내로 단축된다. 이런 한국의 적극적인 대응 내용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영향을 미쳐 결국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했다는 설명이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에서 반구대 암각화의 세계유산 지정과 보호를 위한 수없는 연구와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결국 ‘세계유산 지정’과 ‘암각화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반구천의 암각화’ 발견 스토리
1970년 12월 25일 동국대 문명대 박사에 의해 울산 대곡천의 ‘천전리 암각화’가 발견되고, 공교롭게도 다음 해 1971년 역시 성탄절인 12월 25일에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반구대 암각화의 ‘반구대(盤龜臺)’라는 이름이 눈길을 끈다.
거북이가 앉은 모습을 한 바위에서 명칭이 유래하였다는 설명도 있지만, 이름 자체는 암각화가 위치한 대곡리 인근의 기존 유명 문화재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반구대는 원래 신라 때부터 알려졌던 비경(秘景)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정몽주, 정선 등 많은 역사적 인물이 여기서 시를 남겼다. 특히 겸재 정선이 〈공회첩(孔懷帖)〉에 산수화를 남기기도 해, 1970년대 초 암각화가 발견되기 전에도 천하의 명소로 유명했던 곳이다.
반구대가 언제부터 반구대라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포은 정몽주가 이곳에 유배 왔다 하여 붙은 ‘포은대(圃隱臺)’의 다른 이름이 반구서원(盤龜書院)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반구서원은 유배 당시의 정몽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고,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를 기리기 위해 울주군 언양 지역 유림들이 창건했다.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데 새삼 놀라는 이들이 있다. 한마디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답은 ‘그렇다’이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산이다.
처음 발견 당시엔 그림 300개 이상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 냇물과 닿아 있는 ‘건너각단’이라는 절벽의 높이 약 70m, 너비 약 20m 바위벽에서 물에 가까운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다. 바위벽의 위 끝부분이 챙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그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암석은 적갈색 셰일 계통, 경도(硬度)는 3.4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그림으로 가득 차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 동물들은 주로 새끼를 배고 있으며, 뱃속 새끼까지 그려진 고래도 있다. 암각화의 거대한 규모와 양식은 한반도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여 ‘고래 사냥꾼의 대서사시(大敍事詩)’로도 알려질 정도이다.
특히 화면 중에는 주된 제재(題材)인 고래 외에도 야생동물 수렵, 의미를 알기 힘든 문양과 기호 등도 많이 그려져 있다. 훼손 정도가 덜했던 발견 초기에는 300개 넘는 그림이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50년 동안 사연댐으로 인한 침수로 1970년대 초 처음 발견될 당시의 탁본과 비교하면 100여 곳 이상이 부서져 형체가 흐릿해졌다.
도대체 이곳에 왜 암각화를 그렸을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이곳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수렵시대의 신성한 지역이라는 해석이다. 바다에서 거의 20km나 떨어진 내륙에 고래와 바다거북 등 해양 동물이 새겨진 것이 물론 의문이지만, 지리학자들은 암벽 좌측에 그려진 고래들은 지금으로부터 5000~6000년 전, 바다가 내륙까지 들어왔던 시기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잡았던 것으로 추측한다. 선사시대 인간들이 ‘기록의 장소’로 이용한 곳은 그들의 성소(聖所)였다. 암각화를 통하여 자신들의 염원과 갈망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암각화 속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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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성기를 내민 남자 그림. 사진=조선DB |
반구대 절벽 아랫부분 높이 4m, 너비 8m의 바위를 캔버스 삼아 그려진 3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동물상이 65%를 넘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어 사람 모습 5%, 배와 그물 등 도구를 묘사한 것 4%, 그리고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것이 26%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 그림 중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성기(性器)를 내민 남자이다. 전체 화면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해 쉽게 눈에 띄는 사람은 성기가 달린 남자이고, 오른쪽의 여러 동물들을 바라보면서 두 팔을 얼굴까지 들고 입을 벌리고 있다.
《살아있는 신화 바위그림》(1996)을 출간한 정동찬 박사는 이 그림이 당시 중요한 식량자원인 고래 사냥을 나가기 전 고래들이 많이 잡혀 주기를 바라는 의식(儀式)을 묘사한 것이라 설명했다. 미술사학자 김원룡 박사도 ‘산신(山神)에게 사냥꾼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 또는 ‘수렵·어로의 신’ 즉 사냥꾼들이 신앙 대상으로 삼는 신상(神像)으로 보았다. 고래 사냥을 위한 의식 집행인, 즉 남성의 생산력을 상징하는 주술사(呪術師)이거나 고래 사냥꾼의 우두머리라는 얘기다. 《한국의 성 숭배문화》(2003)를 쓴 이종철 박사는 한국의 성기 숭배의 기원을 이 그림에서 찾았고, 3마리의 거북도 같은 뜻을 갖는 것으로 설명한다.
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도 보이는데,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사지를 벌린 괴물로 보기도 하지만, 머리 부분이 역삼각형인 점을 들어 ‘신의 팔을 가진 수렵신’을 묘사한 것으로 김원룡 박사는 설명했다. 반면에 불교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는 여자무당으로 보았다. 경희대 황용훈 명예교수는 팔과 다리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크게 부풀려 만든 것은 사냥꾼의 주술적인 힘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우두머리 부인이 고래 사냥 의식에서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동물들은 육상동물과 바다동물로 구별된다. 육상동물은 호랑이 25마리, 사슴과(科) 동물 20여 마리, 여기에 산양 멧돼지 늑대 담비 여우 토끼 등 대부분 쉽게 잡을 수 있는 동물들이다. 호랑이 그림이 매우 많은데, 호랑이를 우리에 가두거나 다리를 묶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올가미는 동물의 공간을 제한해 활동 영역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반구대인들이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이동을 하면서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온 것으로 설명한다. 즉 굵은 선묘(線描)에 의한 형태미 위주의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 그려진 호랑이 그림을 우리에 가두거나 묶는 등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식량원(源)이 되는 동물’과 ‘두려움과 용맹스러움’이라는 이중적 정신구조를 드러낸다고 한다.
고래잡이 大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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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고래 그림. 사진=울산시 |
특히 반구대 암각화는 현대인들도 갖고 있지 못한 고래에 대한 정보를 듬뿍 담고 있다. 그물과 함께 그려진 고래, 배에 이끌려가는 고래, 작살잡이의 표적이 된 고래, 고래잡이 배와 함께 크게 요동치는 고래도 보인다. 고래잡이에 문외한이라도 그림들이 고래잡이 어부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부가 고래와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던 고대 울산만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암각화에 ‘그림으로 번역’되어 있다. 고래의 종류와 특성은 물론 고래를 끌고가는 모습과 대형 고래를 잡을 때 필요한 부구(浮具·가죽을 이용해 물에 뜨게 만든 기구)와 같은 특수 장비도 상세하게 그렸다. 그야말로 탐색-사냥-인양-해체까지 고래 사냥의 전 과정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마치 선생님이 고래 사냥에 나서기 전에 학생들에게 고래 잡는 법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한 도판과도 같다. 실제로 학자들은 대곡리 암각화가 책이 없던 시대에 교과서 역할을 했다고 추정한다.
고래가 중심이 되는 전체 바위면 중 좌측면은 사전에 기획했을 개연성이 높다. 각 형상의 배치에 의도가 있다고 보는 이유는 정확한 고래 묘사는 물론 변화·통일·균형이 조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육상동물과 해양동물을 가능한 한 왜곡이 적으면서도 개성적으로 표현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고래가 무려 63마리, 거기에 거북 물개 상어, 온갖 물고기들이 한꺼번에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스킨스쿠버를 한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로 바닷속 장면을 현대인도 놀랄 만큼 생생하게 재현했다.
귀신고래 혹등고래 흑등고래 보리고래 수염고래…
반구대 암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고래 그림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어미고래와 새끼고래가 겹쳐진 그림이다. 이 고래는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 혹은 쇠고래라고 하며, 한자로는 ‘극경(克鯨)’이라 한다. 암초와 해초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가 갑자기 물위로 솟구쳐 오르는 등 행동이 마치 귀신같이 민첩하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귀신고래는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것이 특징이다. 새끼고래는 30초 이상 호흡을 멈추고 물속에서 지내기 어려우므로 어미가 수면 가까이서 위로 떠올라 호흡을 시키는 것이다. 귀신고래가 다른 고래보다 배주름이 짧고 등지느러미가 없는 것도 바로 새끼를 업기 편하도록 진화한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동해안에 가장 많이 나타나며, 귀신고래들이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동해안 일원이 아예 천연기념물 제126호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回游海面)’으로 지정됐을 정도이다.
반면 1시간에 겨우 6〜7번 물 위로 올라오는 혹등고래는 배에 줄무늬가 선명한데, 암각화에서도 혹등고래는 주름이 많은 모습으로 새겨져 있으며, 물위에서 점프했다가 바다로 입수하는 특유의 ‘브리칭(breaching)’ 동작을 하고 있다.
또한 몸통 길이의 3분의 1에 달하는 거대한 가슴지느러미를 갖고 있는 고래 3마리가 보이는데, 고래 가운데 가슴지느러미 비율이 이 정도인 것은 단 하나, 흑등고래뿐이다
작살이 그려진 고래 왼쪽에는 머리와 몸통을 각각 다른 지점에서 포착한 고래가 보이는데, 이것은 보리고래 또는 브라이드고래로 추정한다. 브라이드고래 쪽이 다소 크기가 작을 뿐 서로 비슷한데, 특이하게 머리 부분에 3개의 융기선이 있다. 브라이드고래는 한국의 동해나 황해에서도 관찰되며 전체 길이는 12m 정도이다.
바위면 왼쪽 중간 아랫부분에 다이나믹하게 그려진 3마리 고래는 아래턱이 큰 유선형으로, 수증기를 내뿜는 북방긴수염고래다. 수염고래는 먹이를 한입에 머금어 수염으로 걸러 먹는다. 물을 뿜는 세 마리 고래 중 우측에 있는 고래는 먹이를 한입 가득 물어 거르는 과정에서 물을 뿜고 있는 모습, 두 번째 고래는 먹이를 다 걸러 삼키고 있는 모습, 세 번째는 다시 그 과정을 되풀이하는 모습이다. 이 그림이 실제 그림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생생한 편이다.
또 평면의 그림들 사이에 뒤집힌 상태로 새겨진 고래의 배에도 밭고랑 같은 줄이 있는데, 이 고래는 바다 밑 150m까지 잠수할 수 있는 긴수염고래다.
그 밖에 가슴지느러미가 몸통 길이의 7분의 1에 이르는 대왕고래, 범고래 참고래 향고래 밍크고래 등도 보인다.
세계 最古 고래도감
고래가 물을 뿜는 그림같이 매우 현대적인 감각으로 고래의 움직임을 자세히 그린 것뿐만 아니라 거꾸로 뒤집힌 고래, 고래를 잡은 뒤에 분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다. 고래 등줄기를 따라 작살을 새겨 놓은 그림도 있다. 쪼아파기로 새긴 날카로운 작살 끝이 꽂힌 부분은 지느러미 바로 아래 심장부다. 오늘날 포경선의 작살이겨냥하는 부분도 바로 심장부다. 사냥한 고래를 잘라 나누는 그림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엑스선 기법’으로 그렸다.
이상은 이 암각화를 제작한 고대인이 예술감각이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고래를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말해 준다. 이처럼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래 사냥꾼의 대서사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도감(圖鑑)이자 박물지라 할 수 있다.
암각화에는 5척의 배 모습도 보인다. 어로 장면을 바로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형상들과 외따로 떨어져 그려진 것도 있다. 배에는 적게는 10명 미만부터 많게는 20여 명이 타고 있는데 특히 뱃머리에 우뚝 서있는 사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는 의식용이거나 주술 목적을 띤 배가 고래잡이의 풍요를 비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정확한 연대가 의문이다. 물론 암각화는 단시간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풍부해졌지만, 초점은 이것이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느냐,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느냐이다. 현재 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청동기시대라고 하고 있다. 김원룡 박사는 반구대 암각화의 조성 시기를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 즉 기원전 300~100년경으로 보았는데, 다수의 학자들이 이를 수용하여 교과서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암각화 속에 울타리(목책)가 있고 고삐에 매인 가축이 있는데 이는 정주(定住)생활 단계에 나타나는 주제로, 이로 미루어 그림 제작 시기를 청동기시대로 본 것이다. 그러나 반구대 암각화를 처음 발견한 문명대 박사는 암각화 중 과도기 양식은 신석기시대 말기~청동기시대 초기, 보다 늦은 그림은 청동기시대 이후로 보았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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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주 천전리 명문(銘文)과 암각화. 사진=국가유산청 |
천전리 각석에는 800여 개의 그림 및 명문(銘文)이 남아 있는데, 가장 큰 바위에 700여 개가 새겨져 있어 전체 그림과 명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명문이 253개로 가장 많고 그림은 동물상, 기하학적 무늬, 인물상, 도구, 그리고 형상을 식별할 수 없는 것도 상당수이다.
각석은 내용과 제작 기법에 따라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뉜다. 상단부는 선사시대의 암각화로, 점각기하학적(點刻幾何學的) 문양과 동물, 인물상 등이 새겨져 있으며 대부분 쪼기 기법을 사용하였다. 하단부는 긋기 기법으로 제작된 신라시대의 선각화와 명문이다.
천전리 각석의 특징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화랑의 행렬도와 사람, 용, 새 그림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영랑’ ‘금랑’ 같은 화랑의 이름 등 신라인들이 새긴 명문 중에는 왕과 왕비가 다녀갔다는 내용도 있다. 학자들은 신라 법흥왕 대에 두 차례에 걸쳐 글자를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천전리 암각화는 같은 강 유역에 있으면서도 반구대 암각화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 반구대 암각화가 고래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새겼다면, 천전리 암각화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추상적인 도형과 무늬가 많다.
사실적 묘사부터 추상적 도형까지
천전리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 윗부분은 앞으로 15도 정도 기울어 있다. 바위에 그림을 새기기 위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일부러 깎아서 지붕같이 경사를 만든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암질은 자색(紫色)셰일로, 암각화를 그리기에 매우 적합한 재질이다. 자색셰일은 백악기(약 1억4550만~6600만 년 전)의 퇴적암으로, 사암과 함께 외층을 이루며 발달하지만 입도가 낮을수록 박층으로 쉽게 부서진다. 풍화엔 다소 강하지만 열에 약하다.
천전리 암각화도 대곡리 암각화와 같이 평면그림과 선그림으로 나뉘는데, 평면그림엔 주로 사슴 등의 짐승이 나타나며 그 가운데 인면수신(人面獸身) 그림이 특징적이다. 사슴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이 그림은 동물을 가장한 사냥꾼으로 해석된다. 상어 같은 물고기 그림, 꽃 그림도 있다. 선그림은 굵은 선과 가는 선으로 나누어진다. 굵은선 그림은 여성 성기를 단순화한 듯한 타원형, 구름과 태양으로 짐작되는 연속된 마름모와 동심원, 물결무늬 등,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솜씨만은 어느 현대 추상화가 못지않다. 가는선 그림엔 귀족의 행렬, 말을 탄 행렬과 배 그림, 용 그림 등이 보인다.
생명의 근원 상징하는 도형들
문명대 박사는 암각화에 보이는 둥근무늬를 ‘홑둥근무늬’ ‘연속홑둥근무늬’ ‘포도송이꼴무늬’ ‘동심원’ ‘연속겹둥근무늬’ ‘타원형 무늬’ 등으로 분류했다. 더불어 점(·)이 파인 무늬도 보인다. 이 점은 어떤 정령(精靈)을 불어넣어 생명력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할리 콕스 박사는 일반적으로 점·원 등의 그림은 출생과 삶의 의미를 갖는 모든 생명과 힘의 중심지로, 전체성과 마음 등 모든 힘의 근원이라 설명한다.
동심원은 태양, 또는 물과 비가 만들어 내는 생명의 상징 즉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마름모꼴은 대지 또는 여성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정반대로 둥근무늬(여성)와 대비시켜 남성을 상징한다는 견해도 있다. 마름모와 사각무늬는 동서남북의 방향성과 땅, 하늘의 상반된 힘의 통합 그리고 연속을 통한 불멸의 상징일 수도 있다. 사주명리학 전문가인 정동찬 박사는 마름모꼴 무늬가 풍요로움과 생명력의 근원을 상징하며 개인이나 사회 전반에 획을 그을 만한 큰 통과의례 등을 나타내는 정신적 상징이라 보았다.
황수영 박사는 물결무늬에 ‘나선무늬’ ‘굽은무늬’ ‘가지무늬’ ‘평행무늬’ 등이 보인다고 적었다. 대체로 물결무늬는 물과 관련되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흔히 물과 강의 흐름은 지모신(地母神)의 살아 움직이는 재생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마링거 주니어 박사는 나선무늬가 신석기시대에 태양신을 상징했으며 특히 가장 초기에는 지속적인 비의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비는 증식을 가져오므로 번창과 풍요의 상징이다.
화랑들의 수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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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천전리 각석, 국보 제147호) 일부. 사진=조선DB |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대곡천은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역시 바위 아래편에 화랑들이 새겨 놓은 문장과 그림으로 증명된다. 머리칼이 뻗친 상태로 무기를 겨누고 당당하게 서있는 사내는 상반신은 뒷날 다른 화랑들이 새겨 놓은 한자 명문으로 훼손되었고 하반신은 바지에 각반을 찬 모습이다. 하체만 남아 있는 이 인물상 위로 이 암면의 중심 명문이 있는데, 중심 명문 가운데 먼저 새겨진 것을 원명(原銘), 뒤에 새겨진 것을 추명(追銘)이라 부른다. 중심 명문 주변에 신해명(辛亥銘)을 비롯한 간지명과 승려 및 화랑의 이름들,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다수의 명문이 흩어져 있다. 이들 명문들은 내용이나 서체 등으로 볼 때 5~6세기 무렵부터 통일신라 말기에 걸치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천전리 명문 중 특히 화랑 관련 기록은 2000년 전후에 한국 고대사 연구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명문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이름이,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바탕이 된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가 위작(僞作)이라는 증거 중 하나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등 다른 사서(史書)에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이름들이 다수 있는데, 천전리 명문 속 화랑 이름들 중에도 역시 《화랑세기》와 일치하는 이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공룡 흔적도 있어
구성과 내용으로 보아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늦어도 신석기시대부터 제작이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집단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사 암각화 연구가인 임세권 박사는 천전리 암각화와 명문이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가장 먼저 사슴, 물고기 등의 동물과 인물상이 쪼아파기로 새겨지고, 다시 이 그림 위에 동심원이나 마름모 등의 기하학적 그림을 새겼으며, 그 위에 아주 가는 선각으로 동물과 사람들을 새기고, 마지막으로 신라~통일신라 사람들에 의해 글자가 새겨졌다는 것이다.
짐승과 사람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주류를 이루는 신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의 형상암각화 제작 집단에 이어 기하학적 도형 위주로 암각화를 제작하는 집단이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집단은 기존의 암각화 위에 새로운 암각화를 새겨 넣었다. 특히 세 번째 집단이 앞선 첫 번째, 두 번째 제작 집단의 암각화를 훼손한 것은 이들 전후 집단 간에 아무런 사회적·문화적 연관관계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명문과 선각화 제작도 앞의 암각화 제작 전통과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울주 대곡천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명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성가(聲價)를 높였지만, 이들 암각화와 더불어 놓쳐서는 안 될 것이 곳곳에 있는 공룡 흔적이다.
울산 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는 모두 16곳인데, 그중 13곳이 대곡천에 집중돼 있다. 이 중 3곳(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 반구대 공룡발자국 화석산지, 유곡동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은 울산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6호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천전리 암각화·명문 앞쪽인데 여기에서만 200개 이상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