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속으로

〈K팝 데몬 헌터스〉 흥행 계기로 다시 생각하는 이수만과 강제규

이수만·강제규, 한국 음악·영화의 차원 바꾸고 韓流 원조가 되다

  • 글 : 남정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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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 OST 1위곡 ‘유어 아이돌’ 등 4곡 빌보드 차트 10위 안에 들어
⊙ K컬처, 외국인 감독과 외국 자본이 인정하고 투자하는 대상으로 성장
⊙ 이수만, 클리프 리처드 내한 공연 보며 “한국 뮤지션에게 외국 관객들이 열광”하는 꿈꿔
⊙ 이수만, 현진영·H.O.T·보아 키우면서 음악을 산업화
⊙ 강제규, 제작비 2억~3억원 하던 시대에 30억원 들여 〈쉬리〉 제작

남정욱
1966년생.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영상물 등급위원회 심의위원, 방송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심사위원. 現 군사문제연구원 객원 연구위원 / 저서 《바다의 역사》 등 30여 권 출간
사진=조선DB
일본과 중국에 비상이 걸렸다. 동아시아 문화종주국을 자처하던 중국은 동아시아의 대표 문화주자가 한국으로 확정되는 것 같아 불안하고 한때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은 추월의 공포에 시달린다. 바로 이 작품 〈K팝 데몬 헌터스〉 때문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열풍의 이유와 파급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추적해 보았다. 아울러 일·중 양국을 긴장하게 만든 한류(韓流)의 원류(源流)에 대해서도.
 
  세계인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어는 무엇일까. 김치, 불고기, 김밥, 삼성, 김정은 등등이 떠오르겠지만 지난 6월 말 이런 단어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 ‘사자(lion)’다. 뜬금없이? 한국인데 호랑이도 아니고? 이 말이 바로 이해가 안 되신다면 시류에 둔감하거나 아예 눈과 귀를 닫고 사는 이다.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아하! 고개를 끄덕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기가 어마어마하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6월 20일 세계 93개국에서 톱 10에 들었고 33개국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K팝 데몬 헌터스〉의 OST는 더 엄청나다. 발매 첫 주에 빌보드 차트 8위에 이름을 올렸다. 빌보드 차트는 팬덤이 작동하기 때문에 100% 객관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대중적인 인기는 글로벌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를 봐야 한다. 7월 4일 데일리 송 차트에서 극중 보이그룹이 부르는 ‘유어 아이돌’이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보이그룹과 경쟁하는 주인공 걸그룹의 노래 ‘골든’이다. 8위와 10위도 OST 곡이다. 10위 안에만 무려 4곡! 이는 K팝의 대명사 방탄소년단이나, 데뷔할 때부터 한 번도 전성기가 아니었던 때가 없다는 블랙핑크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여기서 1위곡 ‘유어 아이돌’을 부른 보이그룹의 이름이 ‘사자 보이즈(SAJA Boys)’다.
 
 
  저승사자 → 사자 → 라이온(?)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에서 보이그룹 ‘사자보이즈’는 갓을 쓰고 검은 도포를 휘날리는 모습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사진=넷플릭스
  영화를 보면 이들은 저승사자 패션을 하고 나와 노래를 부른다. 까만 도포에 갓을 쓴 저승사자는 〈전설의 고향〉 덕분에 만들어진 이미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갑주를 입은 원래의 모습보다 우리에게 익숙하다. 저승사자를 영어로 하면 ‘The angel of death, beyond the veil Messenger’ 혹은 ‘Grim Reaper(생명을 거두어 가는 자)’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겠지만 명색이 아이돌 그룹인데 이런 칙칙한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그래서 과감하게 ‘저승’을 떼버리고 ‘사자(死者)’만 살려놓았는데 그 사자를 사자(獅子·라이언)로 표기한 것이라는 게 개인적인 뇌피셜이다.
 
  영화를 본 외국인들이 인공지능에 물을 것이다.
 
  “사자가 무슨 뜻이야?”
 
  “영어로 ‘lion’이라는 뜻입니다.”
 
  결과가 썩 바람직하지는 않다. 졸지에 한국에는 있지도 않은 사자가 사는 나라로 대한민국이 인식되게 생겼다. 〈K팝 데몬 헌터스〉 이야기로 돌아가자.
 
  총평부터 하자면 〈K팝 데몬 헌터스〉는 K컬처의 새로운 장을 연 작품이다. 잠깐, ‘이 애니메이션, 한국이 만든 거 아니잖아’ 할 수도 있겠다. 맞다.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인 매기 강과 크리스 아펠한스, 그리고 제작사는 소니와 컬럼비아 픽처스다.
 
  이런데도 왜 굳이 이런 무모한 ‘국뽕’을 시도하느냐고? 바로 이게 이유다. K팝이 이제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장이 아니라 전 세계가 멋지다고 공인한 최고의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K컬처는 각개 약진으로 명성을 쌓아왔다. 처음 드라마에서 시작했고 음악과 영화로 덩치를 불렸다. 이러다 이제 그 총합(總合)으로 나온 것이 〈K팝 데몬 헌터스〉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세계적인 박람회에서 주최 측이 자기 돈 들여 한국 부스를 가장 크고 멋지게 만들어준 셈이다.
 
  왜? 충분히 이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흥행에 도움이 되니까. 누구나 인정하는 거니까. 우리가 만들었으면 오히려 영광이 덜하다. 외국인 감독과 외국 자본으로 만들어졌기에 의미가 더욱 크고 깊다. 한류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겨우 아시아를 뒤뚱거리던 어린아이가 K컬처라는 듬직한 청년의 모습으로 우뚝 서기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25년 안팎이다. 그리고 그 시작에 이 두 사람이 있었다.
 
 
  이수만의 발칙하고 무모한 생각
 
  1969년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來韓) 공연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외국 가수에게 속옷을 던지는 한국 여성 관객들을 보면서 까까머리 고등학생 이수만은 이런 생각을 했다.
 
  “반대는 안 될까? 한국 뮤지션에게 외국 관객들이 열광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칙한 생각이었다. 이것은 전쟁 직후의 대한민국이, 폐허에 가까운 땡전 한 푼 없는 나라가 다른 나라에 원조(援助)하는 것을 꿈꾸는 것처럼 망상에 가까웠다. 문화적으로 말하자면 50년대의 대한민국이 무용단을 차려 10년 안에 볼쇼이 발레단을 따라잡겠다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었다. ‘0에서 1까지의 거리는 2에서 99까지의 거리보다 멀다’는 말이 있다. ‘무생물에서 아메바까지의 거리는 아메바에서 인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는 말도 있다.
 
  몽상과 망상 사이를 오가는 이수만의 오기와 열정은 0에서 출발했고 수많은 장벽을 격파하며 기어이 아메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아메바는 놀랍도록 빠르게 진화했다. 한국 가수의 노래가 빌보드 차트를 안방처럼 들락거리는, 꿈에서도 불가능했던 일이 더 이상 뉴스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거 한국 영화 맞아?”
 
강제규 감독의 〈쉬리〉는 한국 영화의 분기점이 되었다, 사진=조선DB
  1990년대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3억~5억원 수준이었다. 자기 자본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6개 권역(서울 개봉관 제외 서울 변두리, 부산·경남, 광주·호남, 대구·경북, 대전·충청, 경기도·강원도)의 배급업자들에게 얼마간의 선급금(先給金)을 받아 제작비로 사용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했다. 그 액수로 만들 수 있는 영화라는 게 빤했다. 남자 배우는 맨손으로 치고받았고 여자 배우는 의상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으로 때웠다. 당시 한국 영화의 이칭이 방화(邦畵)였다. ‘우리’ 영화가 아니라 국내에서도 변방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선급금은 예상수익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그 액수가 5000만원을 넘기 힘들었다. 예상수익에는 한국 영화를 보는 관객은 한정되어 있다는 굳건한 정서가 깔려 있었다.
 
  그 정서에 회의적인 영화감독이 있었다. 강제규는 영화의 질이 좋아지면, 즉 제작비가 올라가면 한국 영화를 찾는 관객도 늘어날 것이고 파이 자체가 커질 수 있다고 믿었다. 영화의 산업화가 이루어지면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한 영화 제작이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작비 문제를 잠시 잊은 뒤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줄이지 않고 시나리오에 썼다. 쓰고 나서 제작비를 뽑아보니 30억원이 나왔다. 제작비가 올라가면 한국 영화를 찾는 관객이 늘어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지만 당시 30억원은 불가능한 액수였다. 결론적으로 생각 자체가 무모했던 것이다.
 
  이럴 경우 보통은 접는다. 그러나 강제규는 투자자들에게 시나리오를 돌렸다. 그리고 삼성이 이걸 받아들였다. 개봉 전 영화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시사회를 했는데 반응이 하나같았다.
 
  “한국 영화 아닌 거 같아요.”
 
  한국 영화 같지 않았던 이 한국 영화가 바로 〈쉬리〉(19 99)였다. 이제 한국 영화는 〈쉬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관객의 눈이 높아졌고 기대치가 상승했다. 〈쉬리〉라는 아메바의 진화 속도 역시 엄청났다. 베니스, 칸, 오스카에 우리나라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에서 한국 감독에게 콜을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시작은 미약(微弱)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昌大)하리라” 성경 욥기 8장 7절인데 따지고 보면 미약하지 않은 시작이 어디 있을 것이며 끝이 창대할 거라는 보장 같은 것도 없다. 그래서 그저 다만 꿈을 잃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일 뿐이다.
 
  외국인들이 한국 가수의 공연에 열광할 수 있다는 생각, 영화 제작비를 키우면 판도 커질 거라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이 이수만과 강제규 말고는 아무도 없었을까. 그러나 중요한 건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다. 이리저리 재고 고민하는 대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이수만의 ‘미약’부터 살펴보자. 1971년 이수만은 서울대 농과대학에 진학한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학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의 둘째 형이 문제였다. 클래식을 전공한 어머니 덕분에 애초에 음악 DNA가 있던 이수만이다. 이런 이수만에게 둘째 형 이수영은 어렸을 때부터 대중음악 세례를 안겨주었다. 비틀스와 레드 제플린, 그리고 딥 퍼플에 익숙해졌고 이참에 기타까지 만지게 된다. 이수만은 부모의 기대와 음악적인 욕구 사이에서 방황하며 대학 시절을 보낸다.
 
  그의 음악적 여정은 명동의 청개구리 홀에서 시작되었다. 백순진과 함께 포크 그룹 ‘4월과 5월’을 결성해 무대에 올랐고 DJ 이종환의 도움으로 첫 앨범을 낸다.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 폴리오’가 번안곡 위주의 포크를 했다면 ‘4월과 5월’은 창작곡으로 인기를 얻은 최초의 그룹이자 우리말로 팀 이름을 지은 최초의 팀이었다.
 
  1974년 이수만은 방송에 진출한다. 〈비바 팝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고 그의 입담과 프로그램 진행 실력은 TV로 이어진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의 사회자가 바로 이수만이다. 1980년 이수만에게는 친정이나 다름없던 TBC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는다. 이수만은 미국 유학을 결심했고 플로리다주 멜버른에 위치한 FIT(플로리다 공대)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되었다.
 
 
  美 MTV가 준 충격
 
  취미와 버릇은 못 끊는다. 자의 반 타의 반 인생의 방향을 공학도로 재설정했지만 학창 시절 내내 음악과 살았고 연예계 생활을 10년이나 한 이수만이 다시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누르고 있던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에 불을 지른 건 1981년 8월 1일 개국한 미국 MTV였다. 하루 종일 음악만 틀어주는 방송, 그리고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변화라는 충격은 결국 이수만을 깨웠다.
 
  이수만은 MTV를 ‘공부’했다. 시청자들이 MTV를 보는 가장 큰 이유가 스타의 패션을 보기 위해서라는 설문 조사 결과는 이수만에게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근시일 내에 MTV가 한국에 상륙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수만은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로 받을 수 있는 초임 연봉 3만 달러를 포기하고 1985년 귀국한다. 학교에서 배운 컴퓨터 공학을 음악과 융합한다면 아날로그 방식과는 전혀 다른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음악 작업과 연예계 복귀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KBS FM 라디오의 〈젊은이의 노래〉 진행을 맡았고 같은 방송국 〈연예가 중계〉의 메인 MC로 대중과 만난다. 음악 작업의 결실은 홍종화, 곽영준과 만든 프로젝트 밴드 CPU였다. 대중의 반응은 신통찮았다. 대중은 언제나 반 발 앞서나간 것에만 열광한다. 유학 시절부터 이수만의 오랜 꿈이었던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은 아직 그 시기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H.O.T의 탄생
 
H.O.T.는 학교 폭력에 저항하는 힙합 전사의 이미지로 1990년대 말 10대들을 열광시켰다. 사진=조선DB
  1984년 9월 MTV 음악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마돈나의 공연이었다. 2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의 마돈나 김완선이 데뷔한다. 열일곱 김완선은 수준급의 춤 솜씨로 이문세의 발라드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한다.
 
  김완선을 키운 이는 그녀의 이모 한백희였다. 한백희는 김완선을 가둬놓고 3년이나 모질게 트레이닝했다. 숙식을 제공하며 도제식(徒弟式)으로 제자를 키우는 일본 바둑계의 스타일을 가수를 만드는 방식에 도입한 것이다. 이수만은 김완선의 데뷔 과정에 주목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게 현진영이다. 그러나 연이은 마약 사건으로 현진영은 자폭하고 이수만에게는 가수에 대한 불신감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
 
  뉴스라는 게 누구에게는 그저 세상 소식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정보’이자 사업의 ‘촉’을 건드리는 단서다. 1995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이수만은 영감을 얻는다. 부모의 동의 없이 구매결정권을 행사하는 미국 청소년들이 지불하는 비용이 한 해 무려 96조원이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이 이를 따라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수만은 한국 청소년들이 어떤 음악을 좋아할지, 어느 연령대의 가수가 노래를 불러야 호응이 높을지,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다가갈지 고민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H.O.T다.
 
  데뷔할 무렵 H.O.T 멤버들은 전부 고등학생이었다. 이수만은 이들이 수업을 마친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8개월간의 지옥 훈련을 마치고 1996년 9월 발표한 H.O.T의 앨범 타이틀은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였다. 표지는 양팔로 머리를 감싼 소년 한 명이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는 사진이었고 H.O.T는 학교 폭력에 저항하는 힙합 전사의 이미지로 청소년들을 열광시켰다.
 
 
  ‘독한 천재’ 보아
 
이수만은 보아를 철저하게 훈련시켰고, 보아는 독하게 노력해 그에 부응했다. 사진=연합뉴스
  1997년 6월 발매한 2집 앨범 〈늑대와 양〉은 열흘 만에 1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H.O.T의 팬클럽 1기 창단식이 열렸다. 10대 소녀 1만5000명이 H.O.T를 연호하는 가운데 팬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이수만의 마케팅 기법이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H.O.T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이수만의 다음 프로젝트는 걸그룹이었다. 미국의 3인조 걸그룹 TLC를 벤치마킹했고 이렇게 S.E.S가 만들어진다. H.O.T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은 프로젝트 시작부터 아시아 시장을 노렸다는 것이다. 한국어 담당 최성희, 영어 담당 김유진, 일본어 담당 유수영은 수천 명의 경쟁자들을 뚫고 선발됐다. 세 사람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연습을 반복했고 1997년 11월 대중에게 첫선을 보인다. 데뷔 앨범은 일주일 만에 16만 장이 판매되었는데 IMF 사태로 경제가 얼어 있던 시기이니 결코 적은 수량이 아니었다.
 
  1998년 2월, 이수만은 S.E.S와 함께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S.E.S의 일본 활동은 생각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포지셔닝에 문제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비로운 요정’의 이미지였지만 일본에서는 이걸 만들어내지 못했고 흔한 걸그룹 중 하나로 묻혀버린 것이다. 이수만에게는 좀 더 연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이 ‘보아’다. 이수만은 역순으로 계산을 했다. 15세에 데뷔한다고 가정했을 때 연습에만 3년이 필요하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일본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하려면 역시 최소한 3년이다. 초등학생 중에서 후보를 선발한 이유다.
 
  연습생으로 선발된 초등학교 5학년생 보아는 경기도 남양주 집에서 서울 방배동 연습실까지 시외버스, 전철, 택시를 갈아타며 왕복 5시간을 오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고 집에 돌아간 후에는 거울 앞에서 또 개인 연습에 몰두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 재능과 독기. 보통은 둘 중 하나이기 쉬운데 보아는 ‘독한 천재’였다.
 
 
  SM이 없었으면 JYP와 YG도 없었다
 
  현진영에서 시작해 H.O.T와 S.E.S, 그리고 보아까지 오는 동안 이수만은 제작자가 가수의 음악에서부터 패션, 라이프스타일까지 총체적으로 기획하는 것을 시스템화시켰다.
 
  2000년 베이징 공연에서 H.O.T는 1만2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일본에서는 보아가 상업적으로 탁월한 성과를 냈다. 한국인 가수가 노래하고 외국인 팬이 열광하는 이수만의 오랜 꿈은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흔히 이수만이 창립한 SM을 JYP, YG와 묶어 빅 3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 셋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다. 이수만을 1세대, 나머지 둘은 이수만을 보면서 배운 2세대로 보는 것이 맞다. ‘이수만이 없었다면 나머지 둘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위험하지만 일부 타당하다. 선발주자가 없었다면 둘은 이수만이 했던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수만의 성공에는 분명 그늘도 있다. 미워하면서 배운다고 자신이 음악을 했던 젊은 시절의 강압적이고 기획사 중심적 발상도 일부 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미개척지를 향해 홀로 달려야 했던 이수만에게 기준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시대를 넘어 잘할 수는 없다. 이수만은 그의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결국 한국 음악 산업을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쉬리〉 이전과 이후
 
  한국 영화는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개봉 당시 무엇보다 관객들을 놀라게 한 것은 실전(實戰)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이었다. 이전까지는 플라스틱 모델 총으로 시늉만 하는 장난이었다. 그런데 〈쉬리〉에서는 진짜 총이 사용되었다. 그것도 30정이나 되는 당대 최고 물량으로.
 
  첩보 기관 건물로 사용된 곳은 삼성 SDS다. 층고(層高)와 내부가 높고 넓어 시각적으로 화려했다. 이전에는 평범한 일반 사무실에서 촬영했다. 지금은 ‘1000만 영화’란 말이 너무나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30만 명만 들어도 대박이었다. 1999년 〈쉬리〉 개봉 이전의 한국 영화 관객 동원 기록은 〈서편제〉의 116만 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작사가 직영하던 극장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초장기(超長期) 상영을 한데다 동네 마을회관에까지 찾아가 틀어주고 얻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1998년 〈타이타닉〉이 개봉했을 때 난리가 났다. IMF 사태 시기인데도 극장은 미어터졌고 서울 관객 197만 명에 전국 관객 ‘추산’ 450만 명(당시에는 정확한 집계 시스템이 없을 때였다. 전산상의 공식적인 집계는 2004년부터 이루어졌다)을 동원하며 8년 전 〈사랑과 영혼〉이 썼던 흥행기록을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이 기록을 넘어선 게 〈쉬리〉다. 그것도 〈타이타닉〉 개봉 후 불과 1년 만에. 〈쉬리〉는 〈타이타닉〉의 서울 관객 197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243만 명을 동원했고 전국 스코어는 무려 582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 영화도 이럴 수 있구나’, 수치가 한 번 관객의 뇌리에 박히자 이때부터는 관객은 물론 제작사들의 눈도 높아졌다. 그때부터 한국 영화 제작사들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쉬리〉를 뛰어넘는 것. 실제로 〈쉬리〉 개봉 1년 후 〈공동경비구역 JSA〉가 서울 관객 251만 명을 동원하며 〈쉬리〉의 기록을 깬다. 그리고 또 1년 후인 2001년 〈친구〉가 서울 관객 259만 명으로 이 기록을 경신한다. 이제 서울 관객 100만 명은 명함도 못 내밀게 되었다. 경쟁은 이렇게 사람을 무섭게 성장시킨다.
 
 
  〈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물론 일본에 수출해서 150억 엔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사진=조선DB
  강제규 개인에게도 〈쉬리〉 이전과 〈쉬리〉 이후가 있다. 이전은 1996년의 〈은행나무 침대〉다. 마케팅 비용을 포함해 22억원이 들어간 이 영화는 당시까지 최고의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이었다. 동원 관객은 서울 68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투캅스 2〉에 이어 그해 흥행 2위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강제규는 제작비 측면에서 자기 기록을 〈쉬리〉로 깬 것이다.
 
  이때도 해외 수출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성과라고 부를 만한 것을 낸 영화는 거의 없었고 그냥 ‘해외 배급도 했음’이라는 마케팅 차원의 홍보용이었다. 〈쉬리〉도 해외에 팔기는 했다. 〈쉬리〉의 제작비가 우리에게나 엄청난 것이지 미국의 경우 3류 액션 영화에도 그 정도는 들어간다. 〈쉬리〉가 다른 나라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쉬리〉 이후 강제규는 다른 꿈을 꾼다. 제작비를 무려 148억원으로 올린 것이다. 여기에는 이전과는 다른 계산이 작용했다. 〈쉬리〉의 제작비는 한국 영화 관객의 파이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그 숫자가 증가하지는 않는다. 일단 제작비 148억원이면 180만 명이 손익분기점이다. 그러나 이 성공을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강제규는 다른 계산을 했다. 해외에 제대로 가격을 받고 팔면 제작비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기획하고 만들어진 게 〈태극기 휘날리며〉(2004)다.
 
  과정은 고달팠다. 영화 출발이 가능하려면 제작비의 40%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투자는 부진했고 회사 돈으로 시작했다. 60억원까지는 가까스로 맞출 수 있었다. 문제는 나머지 80억원인데 답이 안 나왔다. 게다가 당시는 2월이었다. 겨울 장면부터 촬영하면 중공군의 퇴각 장면까지 찍을 수 있는데 놓치면 1년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접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강제규는 투자자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전투 장면 묘사에 대한 불안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투자자들은 강제규가 말하는 한국형 전쟁 블록버스터의 수준을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제껏 없었으니 당연하다).
 
  그는 겨울 전투 장면을 제대로 찍어 리얼리티를 보여주면 상황이 바뀔 거라 확신했다. 촬영에 들어갔고 트레일러(짧은 예고편)를 만들어 칸에서 틀었다. 다음 촬영을 이어가야 하는데 돈은 없고 주변은 불안에 떨고 회사 분위기는 흉흉한 가운데 기적처럼 칸에서 반응이 왔다. 트레일러를 상영하는 부스에서 외국인이고 한국인이고 다 난리라는 소식이었다. 가능성을 타진한 쇼박스가 투자 제안을 해왔고 결국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결과는 전국 관객 1000만 명 돌파에 일본에서도 150억 엔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할리우드보다 더 할리우드답게 만들 수 있는 나라’
 
  강제규의 화양연화(華樣年華·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젊은 날의 빛나는 순간)는 그때까지였다. 〈태극기 휘날리며〉로 정점을 찍은 뒤 2011년 도전한 〈마이 웨이〉는 총제작비 120억원이 들어갔지만 흥행은커녕 손익분기점에도 한참 못 미치는 관객을 동원했다. 2023년 개봉한 〈1947 보스톤〉은 대형 자본이 투자된 강제규의 마지막 영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영화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어쩌면 강제규의 시대는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의 공(功)까지 다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평균 한국 영화 제작비의 10배를 들인 〈쉬리〉로 한국 영화는 플랫폼 자체가 달라졌다.
 

  강제규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본인에게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실마리는 있다. 〈쉬리〉의 시사회 때 나온, 한국 영화 같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한국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세련되고 보편적이며 관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 제작비 때문에 아이디어가 거세당하지 않는 그런 영화다. 그 꿈을 강제규는 이루었고 그로 인해 시작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현재 한국은 영화를 할리우드보다 더 할리우드답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고쳐 불러야 할 노래 가사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를 기반으로 어린이 도서까지 나왔다. 스타트는 단군왕검이다. 문무왕, 장보고, 최무선, 이순신 등을 거쳐 99번째와 100번째 인물이 시인 이상과 화가 이중섭이다. 정치인이나 군인이 아닌 문화·예술인이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과 비교해 볼 때 우연치고는 신기하고 놀랍다.
 
  그런데 대체 언제 적 이상이고 이중섭인가. 물론 노래가 나온 게 1991년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 누군가 개정판을 좀 내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좀 현대적인 인물들로. 이럴 경우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인물이 이수만과 강제규다.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봉준호나 유럽 영화제를 휩쓴 홍상수 등의 영화인과 BTS를 만든 방시혁 등의 이름도 유력하겠다. 그러나 장담컨대 이수만과 강제규가 없었다면 나머지 인물들도 없었다.
 
  유통자본, 상업자본으로 꾸려간 나라들의 영화 산업은 다 망했다. 프랑스, 일본, 대만 영화들이 그렇게 쪼그라들었다. 산업 자본으로 진화한 덕에 한국 영화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주먹구구에 도박에 가까웠던 음악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기업경영이론이 도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공은 운에 기댈 수밖에 없고 행운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수만과 강제규가 그때 달리지 못했다면…
 
  혹시 이런 분들이 계실 거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누군가는 했을 일’이라고. 일어날 일을 단지 빨리 했을 뿐이라고. 그러나 세상일에는 타이밍이란 게 있다. 대한민국 역사만 봐도 안다. 박정희(朴正熙) 시대에 우리는 전기, 전자, 조선, 화학, 방위 산업에서 다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탔다. 혹시 추가로 차량이 배정된다 하더라도 이미 놓친 차는 얼마나 멀리 갔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더 무서운 건 먼저 출발한 자들의 축적된 노하우와 암묵지(暗默知)가 진입장벽을 높이고 간극을 더욱 벌려놓는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뛰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이수만과 강제규가 그때 달리지 못했다면,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문화 강국 대한민국은 없다. 백범의 바람은 바람으로 끝났을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미국 영화와 일본 노래에 깔려 질 낮은 아류만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이수만과 강제규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고 K컬처의 도약 때마다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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