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쓰인 글씨는 힘이 있다.” 암석에 새긴 글씨나 비석을 찾아다니는 배승호라는 이가 올리는 글이었다. 그의 발길은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일본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 열정도 열정이지만,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보통이 아니었다. 관점도 균형 잡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의사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의사가 이렇게 역사를 잘 알고, 글을 잘 써도 되는 거야?’
알고 보니 《조선일보》에 〈땅의 역사〉를 연재하는 박종인 기자나 〈스시 한 조각〉을 연재하는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등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 사이에서 그는 이미 유명인이었다.
그 의사가 책을 냈다. 책 제목은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역사》. 저자는 서문에서 자기가 ‘바위 글씨’(바위에 새긴 글씨와 비석을 아우르는 말)에 빠져들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전문의 자격을 얻고 10년 넘게 수술하는 의사로 일해 왔다. 병원은 서울 종로구에 있었다.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매일 시험을 보고 채점을 받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이나 빈 시간에 머리를 식히려 병원 주변을 산책했다. 재미있는 사연이 깃든 역사적 장소들을 하나둘 구경했다. 이러다가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을 만났다. 바위에 쓰인 글씨는 힘이 있었다. 이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처음에는 단순 호기심이었으나 공부를 해보니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정말 재미있었다.”
책을 사서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여러 번 웃음을 지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문장동천(文章洞天)’에 있는 바위 글씨들을 찾아서 허리까지 잠기는 물을 거슬러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저자의 모습에서는 ‘벽혈비(碧血碑)’라는 비석을 찾겠다고 아내를 하코다테산 입구의 벤치에 앉혀놓고 수풀을 헤매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주유소를 찾다가 얼핏 익령군 이치라고 하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조선 시대 왕족의 묘를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에서는 마쓰야마의 거리에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 아키야마 형제의 생가가 있음을 알리는 간판을 보고 뜻밖의 횡재를 했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자는 일껏 구글 지도를 보며 목적지까지 갔지만 출입이 금지된 사유지(私有地)여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아쉬운 경험도 여러 차례 털어놓는데, 이 또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자취를 찾아서
저자의 답사는 일상에 찌든 괴짜 의사의 호고(好古) 취미에 그치지 않는다. 경승지(景勝地)의 바위에 새겨진 글씨의 기운이나 멋을 논하기도 하지만, 그 글씨나 비석의 주인들의 삶과 그에 얽힌 역사도 추적하면서 오늘날의 현실을 돌아본다.
예를 들어 서울 종로구 서촌 통인시장에서 수성동 계곡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박노수미술관이 있다. 이 집은 원래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했던 경술국적(庚戌國賊) 중 하나인 윤덕영이 자신의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었다. 그의 동생은 순종의 장인으로 망국 후 후작 작위를 받은 윤택영(尹澤榮)이다.
저자는 윤택영이 남겼다는 ‘바위 글씨’를 찾아서 경기도 파주 공릉산의 옛 미군기지(캠프 하우즈) 터 내 계곡을 헤매다가 기어코 수풀 속에서 ‘정승산 해풍 윤택영 근서(政丞山 海豐 尹澤榮 謹書)’라는 글씨를 찾아낸다. 그러고는 윤택영의 일생을 추적한다.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조선의 채무왕(債務王)’이라는 별명을 얻고 끝내는 중국으로 도망가 쓸쓸하게 죽은 그의 일생을…. 그의 삶을 보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속설(俗說)은 그야말로 속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캠프 하우즈에 미군이 주둔하기 전, 윤택영 바위 글씨가 있던 공릉산 계곡의 주인은 조병학이라는 사람이었다. 조병학은 1930년대에 조선 10대 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계곡에서 송암농장이라는 근대식 농장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여름 별장을 지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병원, 이재민, 한센병 환자, 야학, 북간도의 교민 학교, 빈민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기부했다.
특기(特記)할 만한 것은 그가 1942년 사망하면서 거의 전 재산인 60만원을 폐교(廢校) 위기에 처해 있던 아사히의학전문학교라는 학교에 기부했다는 사실이다. 이게 뭐가 중요하냐고? 아사히의학전문학교의 원래 이름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기 때문이다. 1940년을 전후해 서양 선교사들이 쫓겨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외국에서 들어오던 지원금이 끊기면서 심각한 운영난에 봉착했던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끝내 없애고 싶었던 것일까? 일제는 60만원을 학교에 기부하려면 육군과 해군에 각각 5만원을 기부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미 조병학은 사망한 후였지만 아들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아사히의전에 60만원을 기부,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었다. 아사히의학전문학교는 해방 후 원래 이름을 되찾았고, 연희전문학교와 합병하면서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됐다. 조병학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연세대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한 미국인 부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는 기억해도, 조병학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왜? 조병학이 친일단체에 이름을 얹고 국방헌금을 내고 비행기를 헌납했다는 이유로 소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립운동 엇비슷한 행위만 해도 모든 과오를 용서해 주고, 친일은 조금의 흔적만 있어도 나머지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라고 묻는다.
조병학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이외에도 여럿 있다. 자선사업가 김주흥·송수선 같은 이들은 그들의 선행(善行)을 기리는 비석들과 그들이 세운 학교들이 남아 있음에도 친일의 혐의를 벗지 못했다. 그들이 세운 학교는 이름과 개교 일자를 바꾸고, 설립자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저자는 “우리가 ‘친일파’라는, 그물코가 너무나도 좁은 파리채를 휘둘러대면 그 시대를 훌륭히 살아온 사람들도 다 걸려 죽을 확률이 생긴다”면서 “친일파란 낙인을 찍는 것에서 여러 파생되는 문제들이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역사의 단절”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일제하에서 전 재산을 쏟아 《훈민정음해례본》을 비롯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헌신했던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에 대해 뜻밖의 사실을 폭로한다. 그가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이 성은에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하는 뜻”으로 훈련소 입소자들을 위해 5000원을 희사했다는 것이다. 그가 낸 국방헌금은 총 1만5000원에 달한다고 한다. 조병학이 냈던 1만3500원보다 많은 돈이었다. 하지만 간송을 친일파로 모는 사람은 없다. 저자는 강화 석모도 보문사를 찾아 간송이 남긴 바위 글씨를 돌아보면서 그의 친일 행적을 드러낸 데 대해 미안함을 표시한다.
‘大明天地 永曆日月’
저자는 경기도 포천의 화봉산을 찾는다.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남긴 바위 글씨를 찾기 위해서다. 구한말부터 이미 ‘불굴의 항일(抗日)투사’로 추앙받았던 면암이 남긴 바위 글씨를 보자.
‘대명천지(大明天地) 영력일월(永曆日月) 조요학공(祖堯學孔) 경승백사(敬勝白邪)’, 즉 ‘세상은 위대한 명나라의 것 / 명나라의 해와 달이네 / 요 임금을 섬기고 공자를 배워서 / 삼가 온갖 사특함을 이기자’는 글을 보면서 저자는 ‘하아, 한숨만 나온다’고 진저리를 친다. “애초에 조선 왕조를 지키거나 자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성리학의 범주 안에서 지켜지는 화이질서 유지가 최익현의 최대 목표였다”면서 저자는 “그를 이 시대에 소환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반일 정신’”이라고 꼬집는다.
‘유명조선(有明朝鮮)’, 즉 ‘명나라의 제후국 조선’이라고 적힌 수많은 비석이나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의식을 같이했던 선비들이 남긴 ‘만동필절(萬東必折)’류의 바위 글씨들 역시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연산군의 측근이었으면서도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해 1등 공신(功臣)이 된 박원종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에 신도비(神道碑)를 남겼다.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추관(推官)으로 사림(士林)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연산군에게 충성 맹세를 했으면서도, 중종반정에 참여해 공신이 된 박건은 경기도 양주군 장룡면 일영리 절골에 묘지가 있다. 이들의 삶은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양지(陽地)만을 쫓아다니는 용한 인생들을 떠올리게 한다.
‘바위에 쓰인 글씨는 무섭다’
그렇다고 해서 정색을 하고 현실과 역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내용만 이 책에 가득한 것은 아니다. 연산군과 그의 채홍사(採紅使) 임사홍과 임승재 부자, 백성들을 거리낌 없이 살상했던 선조의 ‘사이코 패스’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 명종 때의 간신 윤원형의 첩실(妾室)이었던 정난정 같은 역사 속 인물들과 관련된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풀어놓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동학란을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을 비롯한 조선 말기 탐관오리들이 남긴 숱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들은 그들의 탐학과 위선, 조선 왕조의 부패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해준다. 물론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 이건창(李建昌)이나 병자호란 때 나라의 운명을 감당해 낸 최명길(崔鳴吉) 같은 이들을 기리는 ‘믿을 만한’ 비석들도 있다.
또 뭍으로 나가 돈을 벌어 고향으로 송금했던 제주 해녀들, 일본에 건너가 번 돈으로 고향을 도운 재일동포들, 제주 대정여고 자리에 있던 98육군병원에서 순직한 군의관들, 을축년 대홍수나 한강 수난 사고 희생자들, 용산구 보광동에서 불우한 이웃들을 돕고 노인회관을 지어준 무속인 부부 등 현대의 ‘보통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들에 얽힌 이야기들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는 남양주 영락교회 묘지에 있는 차지철(車智澈)과 파주 용미리에 일가가 잠든 이기붕(李起鵬)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순리를 거스르는 그 끝은, 매우 참혹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주문한다. 이 책에 소개된 경승지의 바위에, 혹은 이런저런 이름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을 것이다.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저자는 ‘바위에 쓰인 글씨는 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바위에 쓰인 글씨는 무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