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은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
⊙ “이 집에 모든 것이 담기기를… 다만 ‘나’만은 담겨 있지 않기를…”
⊙ 청소년기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시 쓰는 일을 더 좋아해
⊙ “하버드가 이 친구를 최고로 만들 자신이 없다면, 받지 말고 나에게 돌려보내라”
⊙ 가장 애착이 가는 설계는 노들섬 예술센터… 섬이 가진 풍경과 공간을 드러내
⊙ “늘 ‘융통성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말하곤 하는데, 필요할 때 꺼내 쓰죠”
朴承弘
1954년생. 한국외대 영어학과, 미네소타대 건축대학, 하버드대 건축대학원 졸업 / 아이엠 페이의 설계 사무소(I. M. Pei and Partners), 앤션앤앨런(Anshen and Allen), 정림건축 디자인설계총괄 대표이사 사장 역임. 現 디자인캠프 문박 디엠피 대표이사 / 주요 설계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새 서울시청사, 킨텍스, 롯데 콘서트홀, 한강예술섬 서울공연예술센터, 판교엔씨소프트 R&D 센터, 김대중컨벤션센터 증축
⊙ “이 집에 모든 것이 담기기를… 다만 ‘나’만은 담겨 있지 않기를…”
⊙ 청소년기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시 쓰는 일을 더 좋아해
⊙ “하버드가 이 친구를 최고로 만들 자신이 없다면, 받지 말고 나에게 돌려보내라”
⊙ 가장 애착이 가는 설계는 노들섬 예술센터… 섬이 가진 풍경과 공간을 드러내
⊙ “늘 ‘융통성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말하곤 하는데, 필요할 때 꺼내 쓰죠”
朴承弘
1954년생. 한국외대 영어학과, 미네소타대 건축대학, 하버드대 건축대학원 졸업 / 아이엠 페이의 설계 사무소(I. M. Pei and Partners), 앤션앤앨런(Anshen and Allen), 정림건축 디자인설계총괄 대표이사 사장 역임. 現 디자인캠프 문박 디엠피 대표이사 / 주요 설계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새 서울시청사, 킨텍스, 롯데 콘서트홀, 한강예술섬 서울공연예술센터, 판교엔씨소프트 R&D 센터, 김대중컨벤션센터 증축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몇 해 전, 그의 가족 모임에서였다. 그러고 다시 만난 것은 전화선을 통해서였다. 그는 해외에 있었고, 기자는 서울에 있었다. 바다를 건너온 그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그는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전화선 위로 시간의 두께가 함께 건너왔다.
해외 전화 인터뷰는 여러 차례 이어졌다. 그는 건축물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땅’을 말했다. 그 땅이 지나온 시간에 대해 말했다. 기자는 그의 음성을 받아 적었다.
그러고 2월 25일,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다시 만났다. 겨울이 물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 앉았고, 전화선 위에서 끝내지 못했던 문장들이 테이블 위에서 이어졌다. 그의 사무실은 스케치로 가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초기 드로잉이 그곳에 있었다. 벽과 노트에는 손으로 그린 선들이 겹겹이 걸려 있었다.
용산의 벽
박승홍 대표가 설계한 국립중앙박물관.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설계할 때 그의 가장 큰 고민은 한국성(韓國性)이었다. 많은 이가 기와지붕이나 전통 문양 같은 외형으로 한국성을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전통의 형식을 모방하는 대신, 전통이 만들어낸 태도와 정신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경북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를 찾았다.
— 부석사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사람들은 국보 무량수전을 보러 가잖아요. 제 눈을 사로잡은 건 건물이 아니었어요. 마당에 올라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소백산맥이 끝없이 겹겹이 펼쳐져 있는 거예요. 건물이 주인공이 아니었던 거죠. 건물은 그저 그 산을 바라보기 위한 자리였던 겁니다. 그 순간 깨달았어요. 한국성은 건축 양식이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재료의 질감에 있다는 걸.”
그 깨달음이 설계로 이어졌다. 건물을 서울 남산 자락 아래 길게 눕혀 배치하고, 중앙을 비워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부석사가 산을 품듯, 박물관 역시 자연을 품도록 했다. 건물의 형태는 거대한 성벽을 닮았다. 높다란 두 개의 직선 벽이 대지를 가로지른다.
— 성벽의 형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땅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몽골군, 일본군, 미군…. 오랫동안 외국 군대가 점유했던 땅이잖아요. 그래서 다짐했죠. 다시는 이 땅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우리 유물을 지켜낼 수 있는 단단한 벽을 세우고 싶었어요.”
설계가 시작된 1995년 봄, 그는 일지를 썼다. 짧은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 속에 긴 시간의 고민이 압축되어 있었다.
〈1995년 3월 13일. 잊힌 땅. 땅 주변의 그 무엇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땅은 무엇이어야 할까.
1995년 3월 17일. 한국인의 정서? 세계인에게 한국의 정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서. ‘한(恨)’이라는 심정은 이제 우리의 일부인가, 아닌가.
1995년 4월 16일. 어떻게 새로 지은 집이 예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
1995년 5월 14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자극적인 형태에 대한 유혹. 스스로에게 독해지라고 말한다.
1995년 7월 24일. 빛과 바람과 비와 낙엽으로 집을 짓는다.〉
스스로에게 ‘독해지라’고 한 문장이 여운을 준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본능과 그것이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그는 오랜 시간 혼자 싸웠다. 설계는 씨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수십, 수백 명이 그의 설계 도면을 평가하고 수정하려 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시청 앞 광장에 혼자 발가벗겨져 세워진 기분이었어요. 바다를 다시 건너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죠. 그런데 갈 수가 없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설 그 땅이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있었거든요. 살붙이처럼 되어버린 땅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어요.”
사람과 땅, 열린마당
길이 404m, 높이 43m의 화강암 벽이 직선으로 서 있다. 균일한 회색의 표면 위로 돌의 결이 수평으로 이어진다. 그 중앙에 가로 46m, 세로 28m의 직사각형 개구부(開口部)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열린마당’이라 불렀다. 개구부 너머로 건너편 남산의 능선이 풍경으로 들어온다.
— 국립중앙박물관의 열린마당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이 집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어요. 남과 북,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곳이죠. 지붕이 있지만 동시에 바깥이에요. 낙엽이 굴러다니고 바람이 드나드는 공간이거든요. 꽉 찬 공간에는 마음이 머물 수가 없어요. 비어 있는 곳에서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거죠. 그곳에 섰을 때 남산은 한국밖에 없는 우리다움이기를 바랐어요.”
그의 설계안은 1995년 10월, 전 세계 46개국에서 제출된 341개 작품 가운데 1등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봄, 당선작에 있던 열린마당을 없애라는 압력이 있었다. 그는 버텼다. 그러고 지금, 그 공간을 해마다 수백만 명이 지나간다. 당시 비망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96년 3월. 못과 열린마당을 없애야 한다고들 말한다. 왜 이렇게 분명하고 절실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까. 나는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의 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곳을 바라보는 게 견딜 수 없는 일이 됐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을 열 때까지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죠.”
—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집’은 어떤 집인가요.
“그 집은 낡은 도자기와 오래된 글씨, 잊힌 예술과 정지된 시간을 만나러 오는 곳이에요. ‘우리’를 만나는 곳이고, ‘나’를 만나는 곳이죠.
나는 이 집에 모든 것이 담기기를 바랐어요. 다만 ‘나’만은 담겨 있지 않기를 바랐죠.”
설계자가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는 건축가가 물러설 때 비로소 건축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었다.
— 건축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에요.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죠. 현재와 과거, 땅과 사람,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일이에요. 건물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지만 터는 남잖아요. 그래서 건축은 집을 짓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만드는 일이에요. 더불어 존재할 수 있는 빈자리를 만드는 일이죠.”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건축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잖아요. 근데 건축은 시(詩)와 같아요. 설명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거든요. 지식보다 지혜로 지어지고, 지혜보다 마음으로 지어지는 거예요. 완전하기보다 빈틈이 있어서 세월이 그걸 채워가는 것, 그게 집이에요.”
— 공공건축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건축은 그 건물이 들어섬으로써 우리가 몰랐던 땅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거예요. 건축가는 자기 자신보다 그 땅과 그곳을 사용할 사람을 더 존중해야 하죠. 그게 공공건축이죠.”
평면 위의 입체, 기하학을 좋아하던 소년
1988년 무렵 하버드대 건축대학원 졸업 당시 박승홍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세계적인 관람객 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람객 숫자만으로 세계적인 박물관이라고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루브르박물관은 관람객의 약 70%가 외국인이거든요. 반면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국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요.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의미잖아요.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치는 숫자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국민이 우리 문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있는 거죠.”
박승홍의 삶에서 건축은 처음부터 정해진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소년의 뜻밖의 재능에서 시작된 가능성이었지만, 한동안 누구도 그것을 건축으로 연결 짓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단순히 보이는 대상을 따라 그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평면 위에 입체를 세웠다. 종이 위의 사물은 깊이를 가졌고, 방향을 가졌으며, 공간을 품었다. 3차원 형태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기하학적 구조를 가진 입체를 실제처럼 그려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넌 검정고시를 봐서 바로 고등학교로 가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재능을 알아본 사람의 직감이었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기하학을 전공해야겠다고. 형태와 공간, 구조를 이해하는 학문. 돌이켜보면 그것이 건축이라는 세계를 향해 처음 눈을 뜬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청소년기는 전형적인 이과생의 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시 쓰는 일을 더 좋아했다. 숫자보다 언어에 끌렸고, 공식보다 감정에 민감했다. 문과생이었다. 하지만 점점 마음이 미술에 다가섰다. 그림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지던 열아홉 살이었다.
“그때 환쟁이를 꿈꿨어요. 그림이 인생의 전부 같던 열아홉 살이었죠. 근데 이루지 못했어요. 순탄한 삶, 번듯한 성공, 아들에게 거는 집안의 기대. 이 모든 걸 외면할 용기도, 고집도 제게는 없었거든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에도 그는 뚜렷한 방향을 찾지 못했다. 그의 삶은 다시 한 번 거대한 전환을 맞는다. 아버지가 사업을 정리하면서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이미 스물일곱 살이었다.
“주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
1980년대 초 독일 베를린에서. 젊은 시절 박승홍은 베를린자유대 교수인 삼촌 박성조 교수댁에 잠시 머물렀다.처음 정착한 도시는 필라델피아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곧바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영어 전공자였지만 생활로 부딪히는 삶과 언어의 결이 완전히 달라진 낯선 환경, 그리고 늦은 나이에 시작해야 하는 새로운 삶의 챕터를 마주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방황은 그를 다시 유럽으로 이끌었다. 베를린이었다. 그곳에는 그의 삼촌, 베를린자유대 종신교수 박성조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거리를 걸으며 건물을 바라보고 스케치를 했다. 고딕 성당의 첨탑, 고전주의 건축의 비례, 전쟁의 흔적이 남은 벽과 광장. 그것들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시간과 정신이 응축된 존재였다.
돌이 품고 있는 시간, 벽이 견뎌온 역사, 공간이 만들어내는 침묵. 이 시기 그의 스승은 학교가 아니라 도시였고 그곳을 에워싼 공기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삼촌에게는 곧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본격적인 건축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네소타대에서 건축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응축된 재능이 비로소 드러났다. 공간을 이해하는 속도가 남달랐고, 형태를 구성하는 감각이 뛰어났다. 그의 설계는 학생 과제를 넘어선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교수들과 동료들은 그의 작업에 주목했다. 훗날 그의 이야기는 미네소타 건축대학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다.
그의 재능을 가장 먼저 확신한 사람은 미네소타대 원로 교수 짐 스테이거버그(Jim Stagerburg)였다. 그는 박승홍에게 말했다. 하버드로 가야 한다고. 더 큰 세계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이것은 조언이 아니라 그의 앞날을 향한 선언이었다.
학생 시절 알에스피건축사사무소(RSP Architects)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단순한 보조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실제 설계 작업에 참여했다. 미국 전역에 퍼져 있던 ‘타깃(Target)’ 슈퍼마켓 디자인에도 관여했다. 그의 상사였던 마이클 플라우츠(Michael Plautz)는 학생 신분이던 그에게 디자인을 맡길 만큼 그의 능력을 신뢰했다. 플라우츠는 하버드 건축대학원 추천서에 이렇게 썼다.
“이 친구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삶의 즐거움, 주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를 보는 것 같다.”
그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버드가 이 친구를 최고로 만들 자신이 없다면, 받지 말고 나에게 돌려보내라.”
이 추천서는 한 학생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이미 건축가로 완성되어 가고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증언이었다. 결국 그는 하버드대 건축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의 방황, 베를린에서의 침묵, 미네소타에서의 각성, 그리고 하버드에서의 도약과 연마. 그의 건축은 학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길을 찾지 못한 채 떠돌던 젊은 시절의 긴 여정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巨匠 사무소를 거쳐 돌아온 이유
한강 노들섬 예술센터 조감도.하버드를 졸업한 뒤, 그는 현대 건축의 거장(巨匠)이 있는 아이엠 페이의 설계 사무소(I. M. Pei and Partners)에 들어갔다.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설계한 당대 최고의 건축사무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건축의 스케일과 질서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앤션앤앨런(Anshen and Allen)에서 디자인 프린시펄(Design Principal)로 활동하며 안정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이러다 1990년대 초, 그는 돌연 한국행을 결심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 아이들에게 한국인의 뿌리를 심어주고 싶었어요.”
그가 선택한 곳은 정림건축이었다. 공공건축과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국내 대표 건축사무소였다. 직책은 디자인 총괄 사장. 이후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정림건축 사장으로 회사를 이끌었고, 2007년 7월 ‘디자인캠프 문박 디엠피(dmp)’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딱 3년만 머물다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근데 이 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딸들에게 남겨줄 정신적 유산, 나의 뿌리와 정체성과 정면으로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이요. 돌아오자마자 새 국립중앙박물관 국제 설계 공모에 도전한 것도, 이런 이유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에요.”
3년의 계획은 30년이 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미국 영주권도 포기했다.
그러나 그 땀의 시간들이 현실의 건축으로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2008년 국제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서울 한강 노들섬 예술센터 설계가 그렇다. 한강에다 거대한 상징물을 세우기보다 섬의 수평성과 한강의 흐름을 연상케 했다. 건축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강과 도시, 사람의 동선을 연결하는 매개로 기능하도록 계획한 점이 심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세훈 서울시장이 물러나고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면서 기존 노들섬 예술센터 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이에 따라 박승홍의 설계도 실제 건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노들섬은 여러 차례 계획 변경과 중단을 거친 끝에 2019년 문화 공간 중심의 복합 공간으로 재개장했다. 2008년 박승홍의 설계 공모 당선은 이 섬이 단순한 유휴지를 넘어 공공 문화 공간으로 전환되는 상징적 출발점이었다. 2020년대 들어 서울시는 ‘노들 글로벌 예술섬’ 프로젝트를 통해 다시 대규모 재편에 나섰다. 현재 2028년 완공을 향해 진행 중이다.
— 노들섬 예술센터 설계 공모에 당선됐지만, 정치적 변화로 프로젝트가 무산됐습니다. 아쉬움이 크셨을 것 같아요.
“아쉬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건축은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작업이잖아요. 노들섬 프로젝트도 많은 고민과 애정을 담아 설계했는데, 정치적 변화로 사업 자체가 사라져 버렸어요. 건축가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죠.”
— 노들섬 설계가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했던 작업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설계 중 하나예요. 노들섬은 한강 한가운데 있는 섬이잖아요. 도시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도시와 떨어져 있는, 매우 독특한 장소죠. 저는 그 섬을 건축으로 채우기보다, 섬이 가진 풍경과 공간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접근했어요. 건축이 전면에 드러나기보다, 강과 하늘, 도시와 사람이 만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죠. 노들섬이 강 가운데 있으니 이미지에 집중했던 프로젝트였어요.”
“건축은 사회와 정치의 영향을 받아”
— 정치적 이유로 프로젝트가 중단된 경험은 건축가로서 어떤 의미로 남아 있습니까.
“건축은 창조적 작업이지만 동시에 사회와 정치의 영향을 받잖아요.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나요. 미국에서 병원을 설계한 적이 있는데, 세상에 없던 병원이 지어질 예정이어서 굉장히 흥분했죠. 근데 시장이 바뀌면서 프로그램이 전면 변경됐어요. 그 프로젝트 자체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사업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저한테는 첫 경험이었어요. 그때 깨달았죠. 건축은 역사적으로 정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온 영역이라는 걸….”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유럽에 있는 위대한 건축물들도 대부분 정치적 이유로 지어진 것들이잖아요. 로마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凱旋門·Arco di Trionfo)을 세웠고, 당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최고의 건축가를 동원해서 지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거예요. 건축은 개인의 창작이면서 동시에 시대와 권력, 그리고 정치의 영향을 받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건축은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설계 과정에서 고민했던 생각과 태도가 이후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노들섬 프로젝트도 이런 의미에서 저한테 중요한 경험으로 남아 있어요.”
— 롯데콘서트홀, 인천아트센터 콘서트홀 등 음악 공간을 설계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건축과 음악은 어디서 만난다고 보십니까. 도요타 야스히사와의 협업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통찰은 무엇이었나요.
“콘서트홀 설계를 통해 특별히 새로운 길을 찾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도 제 길을 완전히 알고 있는지 모르겠고요. 다만 그 이전부터 제가 믿는 방식대로 계속 작업해 왔고, 콘서트홀을 작업하면서 새롭게 태어났다거나 방향이 바뀌었다고는 보지 않아요.
도요타 야스히사는 진정한 전문가예요. 건축가는 아니지만 음향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거든요. 세계적인 건축가와도 많이 작업해서 굉장히 유연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에요. 저도 늘 ‘융통성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말하곤 하는데,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거죠. 이 점에서 저와 그가 비슷했어요.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도 각자 영역에서 최선을 찾으려 한 점에서 잘 맞았습니다.”
— ‘융통성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필요할 때 꺼내는 거죠. 건축에서는 타협이 필요한 순간이 있어요. 건축주가 요구하는 사항이 기능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설계 의도를 조금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명백히 잘못된 방향이라고 판단될 때는 끝까지 설득하려고 해요. 이게 건축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중요한 건 이 과정에서도 건축의 본질을 잃지 않는 거예요.”
— 건축과 음악의 관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frozen music)’이라고 표현한 말이 있잖아요. 저는 그 표현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건축은 음악보다 더 넓은 경험을 포함해요. 음악은 소리를 통해 전달되지만, 건축은 시각, 청각, 공간감각 등 다양한 감각을 동시에 담아요. 사람은 건축 공간 속을 움직이며 빛과 소리, 비례와 질감을 함께 경험하거든요. 이런 점에서 건축이 더 종합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철학적 사유를 마주한 순간, 괴테가 《Maximen und Reflexionen(격언과 성찰)》에서 언급한 ‘굳어버린 음악(erstarrte musik)’이 그의 공간 안에서 서서히 녹아 멜로디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건축은 장소와 인간의 관계를 만드는 작업”
박승홍이 2017년 설계해 2025년 완공한 부산콘서트홀. 현재 부산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음악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정말 좋아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백판’을 사서 들었죠.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요.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게 환경 때문인지,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이후로 음악은 제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됐죠.”
— 성장 과정에서 예술적 감수성에 영향을 준 환경이 있었습니까.
“누나 네 명과 형 한 명이 있는 집에서 막내로 자랐어요. 누나들 가운데 미술을 하는 분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예술적인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죠. 집 안 공간을 꾸미는 일을 제가 맡는 경우도 많았어요. 액자를 걸거나 가구를 배치하면서 공간에 대한 감각을 키운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이런 경험들이 지금의 저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줬죠.”
— 설계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땅이에요. 건축은 반드시 땅 위에 존재하니까, 모든 설계는 장소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죠. 햇빛의 방향, 도시 환경, 자연 조건, 그리고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요. 건축은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장소와 인간의 관계를 만드는 작업이거든요.”
— 어떤 스타일의 건축을 추구하십니까.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짓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해요. 아파트처럼 도장 찍듯이 만들 수는 없거든요. 햇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가족이 어떻게 소통하는지, 이런 조건에서 출발하죠. 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준을 가진 건축을 추구해요. 요즘은 효율성과 유연성을 강조하지만, 저는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벽, 절대적인 기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이게 건축의 중심이라고 믿어요.”
— 그 생각에 영향을 준 건축가가 있습니까.
“루이스 칸(Louis Kahn)이에요. 모두가 가볍고 변화 가능한 건축을 이야기할 때, 그는 무거운 벽을 세웠죠. 쉽게 변하지 않는 건축이었어요. 저는 그 태도를 존경해요. 건축은 유행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좋은 건축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좋은 건축은 땅에 대한 존경, 이웃에 대한 존경, 그 안에 사는 사람에 대한 존경에서 출발해요. 주변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기 존재를 잃지 않는 건축이죠. 이질적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그 장소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에요.”
그는 건축이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을 그 예로 든다. 하나의 건물이 도시의 이미지를 바꾼 사례다. 그러나 그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다.
— 하나의 건물이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죠. 그런 사례가 많잖아요. 좋은 건물 하나가 들어서면 동네 분위기가 달라져요. 도시를 변화시키는 이름 없는 건축들이 있거든요.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 같은 영웅적인 사례도 있지만, 일상 속에서 도시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건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수동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변화”
— 도시 변화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건축가는 건물만 짓는 사람이 아니에요. 도시의 계획 단계부터 참여해야 해요. 건물의 형태보다 중요한 건 장소와의 관계거든요. 아무리 좋은 건물이라도 위치가 적절하지 않으면 의미를 잃어요. 반대로 작은 건물이라도 올바른 장소에 있으면 많은 사람이 사용하게 되죠.”
이 생각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말, “집은 언덕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덕에 속해야 한다”는 통찰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 서울 성수동의 변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봐요. 공장과 소규모 제조업이 빠져나간 자리에 문화·디자인·패션·IT 기반의 젊은 기업이 들어오고, 낮은 임대료와 한강 접근성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맞물리면서 형성된 흐름이죠. 특정 개인의 정책 성과라기보다, 도시 구조 변화와 시장의 힘, 세대 교체가 결합된 결과라고 보는 게 타당해요.”
다만 이런 자연 발생적 변화는 일정 시점 이후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이 과정에서 임대료 상승과 공간의 상업화가 과도해질 위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지금 성수동이 그 전환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 성수동이 더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단계에서는 공공 공간 전략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녹지 조성이나 소규모 쉼터가 아니라,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도시적 마당’을 계획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구청이나 시 차원에서 요지의 자투리 땅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광장형 공공 공간으로 조성하는 겁니다. 그 공간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일상적 체류 기능이 필요해요. 벤치 몇 개 놓는 수준이 아니라, 그늘·가변형 가구·소규모 공연 인프라 등을 갖춰 시민이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버스킹, 플리마켓, 스타트업 쇼케이스, 디자인 전시 등 문화 프로그램의 수용이 가능한 유연한 구조여야 합니다.
셋째, 골목 상권과 단절되지 않고 흐름을 이어주는 동선 계획이 중요합니다.
넷째, 성수동을 대표하는 하나의 공적 중심점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상업 공간은 많지만 ‘모두의 공간’은 부족합니다.
성수동은 이미 브랜드화가 진행된 지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공공이 개입하지 않으면, 전부 사적 상업 공간으로만 채워질 가능성이 커요. 도시의 품격은 상업 시설의 밀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공공 공간의 질과 규모가 그 지역의 깊이를 만들어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건물 하나로 도시가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행정이 해야 할 일은 민간의 에너지를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가 지속될 수 있도록 공공적 틀을 마련하는 겁니다. 성수동은 아직 잠재력이 충분합니다. 다만 지금이 개입의 적기입니다.”
— 서울 구(舊)도심은 앞으로 어떤 철학과 원칙 아래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역사성과 현대성은 반드시 공존해야 해요. 지금의 제도와 규제, 원칙은 충분히 의미 있는 기준이거든요. 이걸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게 중요해요. 높이 제한이나 사선 규제 같은 건 선진국에서도 다 쓰는 방식이에요. 지나친 변화는 경계해야 하지만, 도시의 변화 자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죠. 원칙을 유지하면서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게 중요해요.”
한국 건축의 현실
2014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한 엔씨소프트 판교 R&D 센터. 박승홍 대표가 설계한 이 건물은 판교테크노밸리의 상징이다.— 한국 건축가의 국제 경쟁력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지금 국제 공모에 당선된 한국 건축가를 만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웃으며 말을 꺼냈다. 한국 건축가의 실력을 낮게 볼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다만 국제 공모에 도전하는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은 정보와 기회의 문제라고 짚었다. 무보수 공개 공모가 많고, 지명 공모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건축가에게만 기회가 돌아가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제가 미국에서 일하다 돌아왔을 때, 외국 건축가와 협업을 많이 했어요. 겉으로는 해외 건축가 이름이 앞에 서 있지만, 실제 설계의 상당 부분은 한국 건축가들이 맡는 경우도 많았죠. 이 경험을 통해 느낀 건,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구조와 신뢰라는 겁니다.”
— 결국 실력보다 구조의 문제라는 뜻입니까.
“그렇죠. 건축주와 공공기관이 국내 건축가를 충분히 신뢰하지 않는 구조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해외 건축가가 중심이 되고, 우리는 보조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반복되죠.”
그는 특히 대형 프로젝트의 발주 방식에 주목했다. 공공과 대기업 프로젝트가 회사 규모와 실적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설계자의 역량보다는 조직의 외형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건축은 회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그의 말은, 설계의 본질을 환기한다. 능력 있는 소규모 사무소나 젊은 건축가에게 큰 기회가 쉽게 돌아가지 않는 구조 속에서는 국제적 도약도 어렵다는 진단이다.
— 한국 건축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건축을 단순히 직업으로만 보는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먹고살기 위한 건축이 아니라 좋은 건축을 위해 건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빠르게 짓고, 비용 줄이고, 수익 남기는 게 우선이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런 환경에서는 깊이 있는 건축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의 지적은 산업 중심의 건설 구조로 이어진다. 대형 건설사가 사업을 주도하고, 설계는 그 과정의 일부로 편입되는 환경에서는 실험과 도전에 충분한 시간과 자원이 주어지기 어렵다. 여기에 ‘세계적’이라는 이름에 대한 집착이 더해진다. 국내 건축가를 신뢰하기보다 유명 해외 건축가를 먼저 찾는 풍토가 반복되면서, 정작 국내 건축가가 성장할 기회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건축가들의 역량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라고 본다. “건축가는 업체가 아니라 창의적인 전문 직업인입니다. 이걸 인정해 주는 문화가 필요해요.”
그의 말은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구조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 건축을 산업의 하위 영역이 아니라 문화적 행위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이뤄질 때, 한국 건축도 국제무대에서 다른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진단이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도 건축 선택할 것”
제공=파카(PARKER) 만년필“그런 영향이 분명히 존재했어요. 특히 과거에는 건설사가 주도하는 구조 속에서 건축가는 설계의 주체라기보다 종속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죠. 심사 과정에서도 비공식적인 관계나 관행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직접 보기도 했고요. 지금은 개선됐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죠.”
— 젊은 건축가들에게 기회는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부족해요. 능력 있는 젊은 건축가들이 많지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젝트 기회는 제한적이에요. 규모 있는 프로젝트가 젊은 건축가들한테도 열려야 새로운 건축이 나올 수 있거든요.”
— 해외 진출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실적으로 말하면 쉽지 않습니다.”
그는 조심스레 선을 그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건축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발주 구조, 면허 체계, 설계·엔지니어링 협업 방식까지 촘촘하게 짜여 있어 외부에서 들어가 자리 잡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그 시장은 이미 자기들끼리의 생태계가 완성돼 있어요. 실력만으로 뚫기에는 장벽이 높습니다.”
다만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두지는 않았다. 그는 동남아시아를 비교적 현실적인 대안으로 언급했다.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고, 대규모 개발 수요가 이어지는 지역에서는 새로운 디자인 감각과 기획 역량을 가진 건축가에게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점이다.
“동남아는 아직 도시 구조가 유동적이고, 성장 단계에 있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한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덧붙였다. 해외 진출이 만능 해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국내에서 건축가의 역할과 위상이 먼저 확립돼야 합니다. 자기 나라에서 신뢰받지 못하는데, 해외에서 신뢰받기는 더 어렵죠.”
그의 생각은 분명하다. 선진 건축 시장은 구조적으로 진입 장벽이 높고, 신흥 시장은 가능성이 있지만 단기간 성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창의적 설계가 존중받는 환경이 마련돼야 해외에서도 경쟁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해외 진출은 목표, 출발점은 국내 구조의 개선이라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 한국 건축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시간이 필요해요. 제도가 개선되고, 젊은 건축가들한테 기회가 주어지고, 좋은 건축이 하나씩 만들어지면서 변화가 시작될 거예요. 건축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아요. 그래도 변화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건축가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도 저는 건축을 선택할 겁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다른 길을 택할 것 같지는 않아요. 건축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공간과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이잖아요. 이 과정 자체가 굉장히 창조적이고 매력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