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⑨ 鄭昇和 vs 全斗煥, 10·26에서 12·12까지 설레던 시기의 幕前幕後

  •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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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자마자 모든 정보·수사기관을 장악, 대통령·국방장관·계엄사령관을 무력화시키는 힘을 축적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79년 11월 6일 10·26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사진=조선DB
1979년 10월 26일부터 그해 12월 12일까지 47일간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상상으로 설레는 시기였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에 대한 충격과 분노는 서서히 희망과 기대로 바뀌고 있었다. 18년의 박정희 시대는 눈부신 발전의 시기였지만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로선 너무 길기도 했다. 장기 집권의 말기(末期) 증세와 궁정동의 참극은 미련 없이 박정희 시대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국민들의 거의 일치된 희망은 ‘민주화’ ‘직선제’로 요약할 수 있었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도 조속한 개헌을 약속했다. 이 시기의 분위기를 요약하는 말은 자중자애(自重自愛)와 은인자중(隱忍自重)이었다. 사람들이 길모퉁이에서 고스톱판을 벌였다가도 “야, 이럴 때 이러면 안 되지” 하고 거두어들이는 심정은 국민 통합으로 수렴되었다. 군부(軍部)도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과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이 중심을 잡고 최규하 정부에 충성하며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10·26 사태의 본질은 쿠데타나 반란이 아니라 살인 사건이었으므로 질서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
 
1979년 10월 28일 군 수뇌부는 ‘국군의 전 장병은 일치단결하여 국가보위의 대임을 완수할 것’을 다짐했다. 가운데가 노재현 국방부 장관, 오른쪽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 사진=조선DB

  이때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군(軍)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국군은 정권 편이 아니라 국민 편이란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해보면 일말의 불안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부마사태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개 패듯이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취재하였던 경험에서 국군 안에 특별한 군인들이 있는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이 47일간은 나로서도 들뜬 상태였다. 10·26 사건으로 부마사태의 역사적 의미가 커졌고 이를 실록(實錄)으로 남기기로 작심, 취재에 들어가면서 기자로서 무심했던 분야를 공부하게 되었다.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어떻게 대학생들과 연결되어 부마사태로 폭발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추리소설을 쓰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붙잡혀갔던 운동권 인사들과 학생들도 풀려나 개선장군처럼 신나게 증언하였다. 박정희 정권을 끝내는 데 자신들의 역할이 있었다는 자부심, 드디어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란 희망이 사람들을 신나게, 너그럽게 만들던 기간이었다. 기자 생활 9년 차인 나도 드디어 역사적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흥분했다.
 
  다만 10·26 사건 직후 수사 중간 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全斗煥) 소장의 얼굴을 보고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흑백텔레비전 화면을 꽉 채운 그의 얼굴은 나이보다 들어 보였는데 살벌했으며 ‘뭔가 일을 저지를 사람’이란 인상을 주었다. 나의 삶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전두환’이란 이름이 일반인들에게도 처음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전두환, 박 대통령에게 직보 날짜 잡아
 
  1979년 10월 26일 저녁,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屍身)을 국군서울지구병원 응급실에 모셔놓고는 청와대로 돌아와 헐레벌떡 본관 2층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따라온 4~5명의 경호원에게 “최 총리와 장관들에게 연락해서 청와대로 들어오도록 전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한 건장한 경호원이 김 실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저는 전두환 사령관의 동생인 전경환(全敬煥)입니다.”
 
  김 실장은 “아, 그런가”라고 인사를 받고는 “자네 권총에서 실탄을 좀 꺼내 줘”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자신의 권총을 가지고 나오면서 보니까 실탄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실탄 여섯 발을 빌려 자신의 권총에 장전하였다. 운명의 그날 밤 본관 당직 근무조로서 이 역사적 현장에 서 있었던 전경환 경호계장이 맨 처음 한 일은 국군보안사령부 비서실로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날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사령부를 떠나지 않았다. 며칠 뒤 일정이 잡힌 박 대통령 앞 단독 보고에 대비하여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부마사태로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되자 헬리콥터 편으로 부산에 내려왔었다. 부마사태의 현장 감각을 얻은 직후 허화평(許和平) 비서실장을 실무책임자로 하여 시국 수습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허 대령은 사무실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부하들을 지휘하여 며칠 밤샘을 한 끝에 ‘중요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는 보안을 위해 필경으로 작성되었다. 보안사는 이런 중요 보고를 대통령께 할 수 있는 일정을 잡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10·26 사건 직전에 보안사는 권력 면에서는 역사상 가장 약한 상태였다. 정보부와 경호실의 견제를 동시에 받아 그 기능이 위축돼 있었다. 정보부는 보안사의 민간 활동을 금지시켜 놓은 데다가 보안사에 대한 감사까지 하고 있었다.
 
  보안사에선 또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안사의 모든 정보 보고는 일단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의 눈을 거쳐간다고 믿고 있었다. 정보기관의 힘은 대통령을 그 기관장이 얼마나 자주 만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1979년 3월에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대통령에 대한 단독 보고 기회를 한 번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 10·26 직전 전두환의 처지였다. 그는 대통령 측근에게 부탁하여 며칠 뒤로 직보(直報) 날짜를 잡았다. 차지철 경호실장의 전횡과 인사 문제에 대한 건의도 포함되었다.
 
 
  전경환의 전갈
 
1975년 10월 14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건설부 장관(박 대통령 오른쪽)과 박근혜 사이에 있는 사람이 전경환 경호계장이다. 사진=조선DB

  전두환은 10월 26일 저녁 7시30분쯤 연희동 집을 나섰다. 저녁 식사를 막 끝내고 나서였다. 사복 차림의 그는 피아트 승용차의 뒷자리에 부인 이순자(李順子)씨와 함께 탔다. 앞자리에는 전속부관 손삼수(孫杉秀) 중위가 타고 있었다. 보안사 서빙고 수사 분실 직원들에게 갖다 줄 사과 두 궤짝도 실려 있었다. 피아트 132는 육군본부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일절 말이 없던 전두환 소장이 불쑥 입을 열었다.
 
  “손 중위, 권총 차고 왔나?”
 
  “네, 차고 왔습니다.”
 
  피아트는 육군본부 정문 앞을 지나 크라운호텔 건너편에 이르렀다. 우회전으로 들어가는데 무전기에서 육성이 나왔다. 보안사령관 비서실 당번이었다.
 
  “사령부로 전화하라.”
 
  조심하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손삼수 중위는 차를 타이어 부품상 앞에 멈추게 하였다. 급히 뛰어내려 전화를 좀 쓰자고 했더니 주인은 “안 된다”고 했다. 호주머니를 뒤져 2000원을 던져주듯 하고 수화기를 잡았다. 비서실의 당직자는 “청와대의 전경환씨가 사령관님을 찾아서 급히 전화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라고 말했다. 손 중위는 청와대경호실 경호과 경호계장 앞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본인과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몹시 허둥대는 느낌이었다. 손 중위는 피아트 차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그는 “빨리 서빙고로 가자!”고 했다.
 
  저녁 8시를 조금 넘어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도착한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상황실로 연락해서 전방 상황을 물어보라”고 지시했다. 마침 그때 사령관 비서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보안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어 “전(全) 사령관을 찾아 육군본부 지하벙커로 출두하도록 하라”고 했다는 전갈이었다. 그 연락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군의 정보 책임자로서 상황을 파악한 뒤 상관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흰 반점
 
  10월 26일 오후 5시쯤 서울지구 국군통합병원장 김병수(金秉洙) 준장(공군)은 대통령이 삽교천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정시에 퇴근하였다. 동부 이촌동 현대아파트 자택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직후 당직 군의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비서실장이 환자를 데리고 왔는데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당직 군의관이 마중 나와 “환자가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김 원장은 “야, 이 친구야, 죽었는데 뭣 한다고 연락을 해”라고 짜증을 부렸다. 현관에 이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청와대 경호실 직원인 듯한(실제는 중앙정보부 직원) 두 사람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군의관들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사망했다는 환자가 있는 응급실로 들어가려 하니 그 두 사람이 가로막았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가운을 걸쳤다. 그러고 나서 응급실로 들어가니 막지 않았다. 환자는 병상에 누인 채였고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얼굴도 흰 타월로 덮여 있었다. “누구냐” “어떻게 된 거냐”고 해도 두 사람은 무조건 모른다고 했다. “사망진단서를 끊으려면 내가 알아야 한다”라고 해도 안 통했다.
 

  이런 상황에 김계원 실장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김병수 원장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대통령 입원실에 정중하게 모셔라”고 했다. 김 원장이 화가 나서 “실장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했더니 김 실장은 우물쭈물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김 실장이 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도 응급실에 있다”는 얘기를 듣더니 “그러면 청와대 내 병실로 모실까”라고 했다. 김 원장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감시자들은 그림자처럼 김 원장을 따라다녔다. 김 원장이 “누구인지 알아야겠다”고 조르니까 한 사람이 환자의 얼굴을 덮은 타월을 반쯤 들어 보였다. 김 원장은 “가슴에 총상이라니 자세히 보자”면서 시트를 젖히고 와이셔츠를 헤쳐 배를 드러내 보았다. 배에 흰 반점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눈에 익은 반점들이었다.
 
  김 원장은 이전에 청와대 의무관으로 있었다. 대통령을 수행하여 진해 별장으로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대통령은 김씨를 보더니 “야, 이 친구야. 이것 좀 고쳐주지 않을래?”라고 하면서 배를 가리켰다. 희끗희끗한 반점이 곰팡이 피듯 퍼져 있었다. 이 반점은 어떤 곰팡이의 감염에 따른 것인데,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통령의 배에 약을 발라주기도 했다.
 
 
  “코드 원입니까?”
 
우국일 전 보안사 참모장. 1996년 7월 1일 12·12-5·18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때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죽어 있는 환자가 대통령이란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무아지경이 돼버렸다”고 했다. 한 2분간 정신 나간 상태로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다. 우선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외부로의 통로는 인접한 보안사뿐이었다. 감시자 두 사람은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외부로 전화를 못 하게 했다.
 
  그는 집무실 내 응접실로 가 앉았다. 탁자에는 세 대의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일반전화, 청와대 직통전화, 그리고 보안사 경비전화. 누가 전화를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보안사 경비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禹國一) 준장이었다. 우 준장은 김 원장 집무실에 자주 놀러 가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예스, 노만 하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운디드(Wounded)?”
 
  “노.”
 
  “데드(Dead)?”
 
  “예스.”
 
  “차 실장입니까?”
 
  “노.”
 
  “코드 원입니까?”
 
  “예스.”
 
  전화가 끊겼다. 옆에서 지켜 서 있던 한 감시자(나중에 중앙정보부 궁정동 사무실 운전원 유성옥으로 밝혀짐)가 “어디서 온 전화냐”고 물었으나 적당히 얼버무렸다. 우국일씨(나중에 국일자문서비스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전에 보안사 직원을 병원으로 보냈는데 시신이나 원장에게 접근이 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비서실장이 데려온 환자라고 해서 나는 대통령이라는 직감을 갖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것이다. 대통령 시신이 다른 병원으로 갔으면 신원 확인이 어려웠을 것이고 그 뒤 사태가 다른 방향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전두환 사령관의 보안사가 정부 내 정보기관 중 대통령의 죽음을 최초로 확인한 것은 그가 혼돈 속의 그 뒤 상황을 주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정승화와 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1979년 3월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의 사진. 사진=이재천(정승화 부관)

  나의 부마사태 취재는 자연스럽게 10·26으로 이어지고, 또 저절로 12·12 사건, 5·17 계엄확대, 5·18 광주(光州)사태로 흘러갔다. 한 정권의 종말과 새 정권의 탄생 비화를 추적하는 일은 각 사건당 한 권씩 다섯 권의 책을 쓴 후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부산에서 시작한 취재는 서울로 직장을 옮기면서 박정희 측,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측,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측, 정승화 측, 시민군 측, 공수부대 측으로 확대되면서 입체감을 갖게 되었다.
 
  역사를 만든 핵심 인물들을 많이 알게 된 것은 기자로서뿐 아니라 인생의 축복이었다. 역사는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만들어지듯이, 한국 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무대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사라져 간 이들은 나를 만나 남긴 기록으로 기억되는 면도 있다. 한 정권이 어떻게 무너지고 새 정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정치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논문을 쓸 경우 내가 정리한 사실관계는 약간의 도움이 될 것이다. 기자만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자 특권은 역사적 인물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친해지면서 결정적 순간의 흥분을 공유하는 일이다.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감전(感電)이라고 할까?
 
  10·26에서 12·12에 이르는 시기의 두 주인공은 경북 김천 출신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경남 합천 출신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었다. 정승화가 두 살 위였고, 육사 기수로는 6기 선배였다. 전두환은 4년제 정규 육사 1기(11기)로서 당시 육군 장교단의 중추 세력을 대표했고 이것이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두 사람 다 실전 경험이 있었는데, 특히 정승화는 한국전에서 잘 싸운 지휘관으로 유명했다. 정승화는 2002년 73세로, 전두환은 2021년 90세로 사망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운명의 날 12월 12일 오후였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살면서도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역사를 같이 만든 셈이다. 전두환의 권력 쟁취, 그 발판을 만들어준 이는 정승화였다.
 
 
  “범인은 중앙정보부입니다”
 
  1979년 10월 27일 오전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발표, 합동수사본부의 발족을 알리면서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즉 중앙정보부의 모든 기능을 합동수사본부로 이전하도록 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을 지탱해 온 핵심 기관이 무력화(無力化)되는 순간이었고, 합동수사본부의 강력한 등장을 알리는 조치였다. 이날 오전 합동수사본부는 정보부 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수사기관의 장(長)들을 불러 첫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전두환 장군은 상좌에 앉았다. 그는 국내의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할 수 있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자격으로서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간밤에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범인은 중앙정보부입니다.”
 
  한 참모에게는 이 말을 하는 전두환이 갑자기 크게 보였다. 그 뒤의 수사로 범인은 중앙정보부란 조직이 아니라 김재규(金載圭)와 그 측근으로 밝혀졌지만, “범인은 중앙정보부입니다”란 말에서 이미 정보부가 이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없게 됐음이 결정된 셈이었다.
 
  헌법의 규정에 따라 박 대통령이 가졌던 막강한 권한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승계됐다. 승계된 것은 ‘권한’이었지 ‘권력’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법이 보장하는 권한이 반드시 권력이란 물리력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권한에 권력이 따라오지만, 비민주국가에선 권력에 권한이 따라간다.
 
 
  최규하·정승화의 약점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그해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진=조선DB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측근 참모였던 언론인 출신 한 인사는 1979년 11월 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4·19 뒤보다도 상황이 더욱 모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4·19 때는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지만 민주당이란 대체 세력이 있었고, 따라서 허정(許政) 과도내각의 임무는 민주당으로서의 정권 중계라는 분명하고 제한된 성격을 갖게 됐습니다. 10·26 뒤는 어정쩡한 상황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시해 사건으로 퇴장한 것이지 민중봉기로 몰락한 것도 아니었고 공화당, 유정회, 행정부, 군 등 정권의 핵심 구조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 그분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에 그분이 사라진 무대에서 유신체제라는 그분의 유산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무리로 보였습니다.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같은 의견이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최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끄는 행정부는 공화당과 유정회를 여당(與黨)으로만 설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야당인 신민당과 손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최 대행은 뚜렷한 권력 기반이 없었습니다. 워낙 비정치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가 가장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전환기에 대통령직을 맡게 됐습니다. 권한은 물리력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권위를 발휘할 수 있는데, 박 대통령은 이게 가능했지만 최 대행은 불가능했습니다.
 
  힘의 질서가 붕괴된 혼돈기에서는 가장 확실한 것, 즉 가장 현실적인 힘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물리력은 권력의 원천인 것입니다. 저는 평화시에는 명(名)재상이 될 수 있었을 최규하 대행이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에 서게 됐다고 생각했고, 전망은 밝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법률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이는 최규하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이었는데 두 사람은 10·26 밤의 일로 약점이 잡힌 상태였다. 최 대행은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탄으로 사망한 사실을 보고받고도 이를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체포 지시도 내리지 않으면서 혼란 상태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정승화 장군은 그날 밤 김재규에 의하여 범행 현장에서 가까운 식당에 초대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의심을 샀다. 합수부의 수사로 김재규와 공모한 사실이 없음은 밝혀졌으나 전두환 그룹은 이 약점을 파고들어 권력을 잡는 데 활용한다.
 
 
  선비 같은 군인
 
  정 사령관의 인품은 우선 주어진 권력을 전폭적으로 행사하려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온건한 원칙주의자였고 군 본연의 임무를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비정치적 야전(野戰) 군인이었다. 10·26 사건이 반란이었다면 그는 과단성 있게 사태를 제압하여 자연스럽게 강자로 떠올랐을 것이다.
 
  10·26은 살인 사건이었고 그 수사 업무를 맡은 합동수사본부가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지휘하면서 계엄 업무의 핵심 부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정승화와는 전혀 반대인 권력 지향적 인간이었다.
 
  계엄사령관은 야심만만한 전두환의 합수본부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했다. 합수본부장이 계엄사령관 직속으로 돼 있어 헌병감실이나 군검찰 등 다른 기관이나 참모를 이용하여 견제할 수도 없었다. 견제기구로 쓸 만한 헌병·군검찰·정보부는 일찌감치 합수본부 지휘하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계엄사에 쏠린 권력의 대부분을 실제로 행사하게 된 것이 합수본부였다.
 
  우국일 합수본부 참모장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행정부 쪽에는 국방차관이 주재하는 차관회의가 있었고 합수본부에는 내가 주재하는 국·처장급 회의(행정부의 국장 및 합수본부의 처장급이 참여)가 있었습니다. 국·처장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차관회의의 결정을 뒤엎고 실행되는 판이라 나중에는 차관회의는 왜 하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정 사령관은 자기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고 간혹 핀잔을 듣기도 하는 전두환 본부장을 보고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고 안심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엄사의 하부 실무조직과 행정기관은 합수본부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 계엄사령관은 겉돌고 있었다.
 
 
  괴물의 탄생!
 
  합수본부의 조직에 관한 규정은 계엄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육군본부의 비상사태 조치계획인 충무계획의 “합수본부를 둘 수 있다”는 단 한 줄의 규정에 근거를 두었다. 10·26 이후 이 간단한 규정을 근거로 삼아 전두환은 합수본부를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감독·조정하는 강력한 괴물로 변모시킨 것이었다.
 
  합동수사본부의 조직과 권한을 제도화한 이는 10월 26일 밤에 비상소집돼 나온 보안사 법무참모(소령)였다. 그는 1979년 여름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지시로 합동수사본부의 조직을 기안해 본 경험자였다. 부마사태가 터지자 전두환은 그 조직안을 갖고 부산에 내려가 부산지구 계엄사령부 내에 합동수사단(단장 권정달 부산보안부대장)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실험을 해본 셈이었다.
 
  그날 밤 법무참모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아무런 자료도 참고하지 않고 육군본부 보안부대에서 즉석 기안을 하였다. 합동수사본부의 위치를 계엄사령관 직속으로 하고 정보부·경찰·보안사는 물론이고 헌병과 군검찰까지 감독하에 두도록 해버렸다. 계엄사의 치안처장은 육군 헌병감이 맡도록 돼 있었는데 그의 부하들이 합동수사본부의 지휘하에 들어가 버림으로써 치안처가 실질적으로는 합수본부의 영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12·12 사태 때 헌병감의 두 직속 부하인 성환옥(成煥玉) 기획처장과 이종민(李鍾民) 육군본부 헌병대장은 합수본부 측에 가담, 정승화 연행을 도왔다.
 
  전두환 소장은 법무참모가 기안한 조직안을 그날 밤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들고 가 결재를 받아왔다.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합수본부의 기안과 탄생은 몇 달 되지 않아 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계엄사령부가 혁명사령부인 것처럼 착각”
 
전두환과 보안사 참모들. 왼쪽부터 이학봉(수사국장), 허화평(비서실장), 정도영(보안처장), 전두환, 권정달(정보처장), 허삼수(인사처장). 사진=조선DB

  합수본부는 10·26 사건 이후 강화된 정보처의 기능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치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0% 이상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도록 우리 요원들을 시켜 공작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다.
 
  10·26 사건 뒤 국민들 사이에는 “군은 이제 그만”이라는 공감대와 민주화는 역사의 대세라는 확신이 퍼져 있었고 수준 높은 질서 의식을 보여 겉으로는 안정 그 자체였다. 이런 압도적 사회 분위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의가 소수 정치 장교들에 의해 추진되고, 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이 흥밋거리다. 한 합수본부 간부는 1979년 10월 26일에서 1980년 5월 사이에 이루어진 정권 탄생의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권이란 것이 몇 사람에 의해서 이렇게도 만들어질 수 있구나” 하는 허무감을 느꼈다고 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권한을 남용하기까지 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 정승화 사령관은 자신의 권한을 오히려 축소하는 데 애썼다.
 
  “단지 박 대통령이 어떤 사고로 해서 돌아가신 데 불과한 것이지 헌정(憲政)이 중단된 것이 아닌데 말이야, 계엄사령부가 마치 혁명이나 일으킨 혁명사령부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했으니 큰일이었지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 다가오자 최규하씨가 단독 출마하였는데도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득표율을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사전에 대의원들을 설득하여 득표율이 90% 이상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냥 두면 당선되더라도 과반수나 겨우 넘긴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강력한 통치도 어려울 것이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는 중앙정보부에서 공작하였는데 지금은 중앙정보부가 이러한 일을 담당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니 보안사령부 요원을 시켜 제가 이 일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90% 이상 압도적으로 당선될 수 있습니다.”
 
  정 사령관은 “당선만 되면 되는 것이지 꼭 90% 이상 지지를 얻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소. 그냥 두어도 대의원들의 양식으로 낙선시키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그러고 “압력을 넣어 부정선거라도 했다는 인상을 주면 오히려 떳떳하지 못하고 특히 군이 선거에 관여했다는 결과가 되면 앞으로의 정치 발전에도 이롭지 못할 것이니 오해받을 짓은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김대중 자료철’을 읽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김대중씨에 대하여 이전부터 약간의 의심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 이희성(李熺性) 중장이 정보부에서 조사 작성한 김대중씨의 신상기록철을 읽어보라고 갖다 주었다. 김대중씨에 대해 궁금하던 것이 많던 참이었다. 정 사령관은 그것을 두 번, 세 번 읽어보았다. 그가 읽은 기록에 따르면 김대중은 6·25 전에 좌익 활동을 하다가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6·25 때는 예비검속되어 총살 대상으로 분류되었었는데 실무자의 착오로 총살을 면했으며, 이후 북괴군이 그의 고향인 목포를 점령하자 6·25 전에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은 사람들의 고발로 내무서에 구금됐었으나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는 바람에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후 부산으로 옮겨가 사업을 하다 다시 1954년경 강원도 인제로 갔다고 적혀 있었다. 인제는 당시 행정력이 가장 취약한 최일선 수복지구였다. 그는 그 특유의 조직과 선전술을 이용하여 1961년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5·16으로 의원 선서도 못 했다. 정승화는 생전에 이런 구술(口述)을 남겼다.
 
  〈내가 특히 놀란 것은 1960년대에는 불순인물과 ‘은밀히’ 만난 사실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건대 북쪽의 공산집단과 대결하고 있는 우리의 형편에서는 그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한다는 것은 문제 발생의 여지도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내가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군 수뇌들에게 이와 같은 나의 의견을 얘기하였더니 모두가 나의 의견에 공감하고 찬동하였다.
 
  김대중씨에 대한 나의 생각을 국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서 국민 모두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현 상황에서 당연한 나의 의무라 생각하게 됐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이 같은 나의 생각을 말했더니 노 장관은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현직 군인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시기를 보아 국방장관이지만 민간인인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을 성싶다고 말했다. 나도 그 의견이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정치적 중립’이라는 문제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는 나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군복을 입은 내가 국군통수권자의 사상에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민간인 장관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국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결과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얘기를 공식적으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간접적인 방법과 경로를 통해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계엄사령부에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불안을 느끼고 있던’ 언론계 대표들을 만나 계엄사령관으로서 계엄의 기본방침을 알리고 언론계의 협조에 감사도 표할 겸 이 같은 사실을 알리기로 작정했다.〉

 
 
  정승화, 김대중의 이념 성향에 대해 경고
 
1979년 1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는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군 지휘관들. 사진=이재천(정승화 부관)

  11월 26일 언론사 사장들을 초청한 점심 자리에서 정 사령관은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에 의해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될 때도 국가 원수는 용공(容共)의 혐의가 있거나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은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 국민은 입후보자의 숨은 과거를 잘 모르므로 여러분이 국민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잘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석자 중 누군가가 “대통령에 입후보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 중 구체적으로 누가 용공의 과거가 있는 사람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정 계엄사령관은 “김대중씨다. 전향(轉向)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육군참모총장 개인의 의견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랐다. 그는 “내 개인의 의견이지만 국군 장성들 대개가 나의 의견에 찬동하고 있어 국군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편집국장과 국방부 출입기자들 초청 오찬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김종필(金鍾泌)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생전에 그는 나에게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 김대중씨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정 계엄사령관의 발언은 보도되지 않고 언론 내부에서 정보 보고 형식으로 돌았지만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군부의 본격적인 정치 개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부산에서 정승화 발언을 전해 들은 나의 생각도 비슷했다.
 
 
  마지막 평온
 
  12월 12일을 며칠 앞둔 이 시점은 가장 평온한 기간이었다. 국민들은 최 대통령의 민주화 약속을 믿고 있었다. 혼란이나 시위는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압도적 다수 표로 최규하씨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국민들은 그가 마지막 ‘체육관 선출 대통령’이 될 것으로 믿고 대체로 그 결과에 승복하는 태도였다.
 
  그다음 날 유신헌법 반대를 누르기 위한 구(舊)정권의 응급 수단으로 내려졌던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4년 7개월 만에 종언을 고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7일 오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8일 0시를 기해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했다. 이에 따라 전국 교도소에서 복역 또는 수감 중이던 문익환(당시 60세) 목사, 함세웅(당시 38세) 신부, 가톨릭농민회 사건의 오원춘(당시 30세)씨 등 일반인 35명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4년 고세현(당시 24세)군을 비롯한 학생 33명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명이 전원 석방되었다.
 
  최 대통령은 7일 오후 긴급조치 해제에 즈음한 담화를 발표하여 “합헌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고 사회질서의 확립과 국가 발전을 위한 제반 태세가 착실히 정비돼 가고 있는 현시점을 택해서 긴급조치 9호 해제와 구속자 석방 조치를 취하게 됐다”라고 설명하고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국가의 안전 보장을 튼튼히 하고 확고한 안정 기반 위에서 국가 발전을 계속해 나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재원 신민당 임시대변인은 7일 긴급조치 9호 해제에 따른 성명을 발표하고 “이 해제 조치는 새로운 시대의 정치 질서 확립을 위한 민족적 화해 분위기 조성에 일차적 기여가 될 줄로 믿는다”고 말했다.
 

  정승화 총장은 훗날 12월 8일에 있었던 긴급조치 9호의 해제와 정치범들의 대규모 석방은 전적으로 김치열(金致烈) 법무부 장관을 중심으로 한 관계부서에서 협의하여 결정한 것이며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태우 민정당 총재는 1985년 민정당원 교육장에서 특강을 통하여 “긴급조치 9호를 너무 빨리 해제하여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말하며 이 해제 조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혼란이 가중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긴급조치 9호 해제 이후 일어났던 최초의 국가 혼란은 노태우씨 등이 일으킨 12·12 사건이었다.
 
  당시 군내의 분위기에 대해서 육군 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는 군이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운이 전군(全軍)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이 우리 군을 깨끗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5·16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주류였어요. 우리는 이 대세를 너무 믿었습니다. 아무도 이 대세를 돌려놓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했던 거지요. 정치 장교들의 움직임이 신경 쓰이긴 했습니다. 정승화 총장에게 이 동향을 보고했으나, 총장은 애써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합디다. 이런 보고가 여러 번 올라오니까 정 총장의 태도도 달라지는 것 같았는데 그때는 너무 늦었지요.”
 
  정승화씨는 “정규 육사 출신들이 내가 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그럴 수가 있나’ 하고 화를 낸 적은 있습니다. 당시의 군내 분위기로 보아서 쿠데타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라고 했다.
 
 
  “정승화 걔”
 
‘12·12 사건 장군들의 현장 육성 녹음테이프’와 함께 발매된 《월간조선》 1995년 9월호는 40만 부가 팔렸다. 사진=조선DB

  12·12 군사변란이 전두환 세력의 승리로 끝난 다음 날 아침 군 장성의 인사이동을 놓고 두 영관급 장교(이 중 한 명은 3군사령부 소속)가 녹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잡담을 나눈 게 추후 공개됐다(《월간조선》이 1995년 9월호를 통해 공개한 보안사 녹음테이프).
 
  -저기 저 정보부.
 
  -정보부는 지금 차규헌(車圭憲)씨가 얘기가 있어요.
 
  -응, 차.
 
  -우리 여기는?
 
  -여기는 유학성(兪學聖)씨가 물망에 오른다는 얘기가 있는데.
 
  -아직 결정 안 됐다면서…
 
  -G3는 어때요.
 
  -하소곤(河小坤)이…
 
  -응.
 
  -하소곤이 총 맞았지.
 
  -글쎄 맞았다는데.
 
  -복부 관통돼가지고.
 
  -경비사 내에서 그랬다면서.
 
  -그렇게 하고… 그거지 뭐.
 
  -합참의장도 바꿨다는 얘기가 있던데.
 
  -응, 합참의장도 바뀔 것 같아. 그리고 이번 이동이 많을 것 같아. 육사 교장이다 뭐해가지고 아마 오늘내일 간에.
 
  -원로들 싹 바뀌더군. 그렇지요. 엘리트들로.
 
  -그렇게 하고 범수단장은 좀 어때요. 척추 수술이라며…
 
  -척추 수술보다 총알이 백여가지고 척추 근처에서 맹관이 됐다고.
 
  -우리 박형 어디 한자리 없는가.
 
  -이번에 바로 장군으로 해가지고 어디 한자리 얻을까 싶은데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장군은 그만두고 그 옆자리나 옆방이나 밀지 뭐.
 
  -요샌 월급 타 먹고 애들하고 편히 사는 게 좋지, 감투 많이 써봐야 맨날 청결이나 하고 말이지.
 
  -그 옆방이나 밀고 들어가요.
 
  -하하하 참…
 
  -참 불행한 일이야. 정승화 참 걔, 그 3군사령관도 그렇고, 참, 높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그저 편하게…
 
  -심부름이나 열심히 하고.
 
  -은하식당에서 만두에다 소주 한 잔 하는 팔자가 제일 좋지. 대략 그런 상황이에요.
 
  -변동이 있으면 좀 알려줘요. 요즘 말이야 귀가 멀어서.
 
  -알았습니다.
 
  -OK, 고맙습니다.

 
 
  물고문당한 계엄사령관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되고 있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어제까지는 계엄사령관이었던 육군 대장을, 하루아침에 표변, “정승화 걔”라고 부르던 그 시각 정승화 사령관은 물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1987년 여름, 나와 인터뷰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녹음한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보안사령부 분실에 끌려오게 된 다음 날인 12월 13일 아침 7시30분쯤, 병사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청년이 오그라진 알미늄 식기(食器) 둘에 각각 담은 국과 밥을 알미늄 쟁반에 받쳐 가져와서는 내가 조사받던 책상 위에 놓고 갔다. 조사반 중 한 반원이 나더러 아침 식사니 먹으라고 했다. 나는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수저를 들어 조금 먹곤 쟁반을 물렸다.
 
  오전 8시경이나 되었을 무렵에 건장한 두 사내가 들어오더니 “빨리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쪽에서 나의 손목을 각각 잡고 꼼짝 못 하게 하여 데리고 나갔다.
 
  내가 갇혀 있던 건물 옆에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다. 2층으로 끌고 가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는데 그 방이 보기에 고문하는 방인가 싶었다. 그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긴 철제(鐵製) 의자에 앉히더니 거기에다가 비끄러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놈들이 나를 고문하려는구나 직감하면서 주위에 있는 5~6명에게 말했다.
 
  “너희가 날 고문을 할 모양인데 내가 육군 대장으로서 너희에게 고문당할 수는 없다. 고문을 당하기 전에 내 예비역 편입원을 써놓고 당해도 당해야겠다.”
 
  그중 한 명이 “그런 것 안 써도 이미 예편되었으며 참모총장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두 명이 나를 의자에 비끄러매어 머리를 뒤로 잡아 젖히고 여러 명이 소리를 꽥꽥 지르고 위협을 하며 분위기부터 살벌하게 만들더니 곡괭이 자루인 듯한 몽둥이로 내 허벅지 위를 치고, 정강이를 치고, 목 뒤를 치기도 하며, 마치 미쳐 날뛰는 것처럼, 서로가 격려라도 하는 것처럼, 신명이 난 듯 교대로 치며 무조건 나더러 “바른대로 말해, 이 자식, 김재규하고 공모했지. 다 알고 있는데 이 자식 거짓말해야 소용없어” 하며 마구 날뛰었다.
 
  이러한 고문은 견딜 수 있었으나 머리를 젖히고 얼굴에 물수건을 씌운 다음 주전자 물을 계속 얼굴 위에다가 들이붓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숨을 코로 쉴 수 없어 입으로 쉬니 물이 목구멍을 막아 물을 먹는 순간 그때마다 약간씩 숨을 쉬게 되는데 한참 당하니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내가 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때도 건강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라 이들의 무지(無知)한 고문은 결국 나의 생명을 끊게 되겠구나 하고 체념했던 것이다.
 
  그들은 얼마 동안 물고문을 하더니 중지하였다. 나는 그래도 의식이 남아 있어서 고문을 그만두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나를 고문 의자에서 풀더니 발가벗기고 알몸에 낡은 전투복을 입힌 뒤 끌어다가 처음 신문받던 받침대에 눕혀놓았다. 나는 다시 얼마동안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가 한숨 자고 깨어났다. 온몸이 쑤시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꾹 참고 견디었다.
 
  아마 밤이 다시 돌아와 깊은 암흑 속 같은데 누군가가 다시 잠이 든 나를 깨운 뒤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신문 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나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한참 동안 어지러워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나의 이런 상태를 살핀 그들은 나를 다시 침대에다가 데려다 두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새우고 나니 다음 날은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어쩔 수 없어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앉으니 어지럽고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것은 여전하였지만 그래도 온몸이 쑤시는 것은 좀 덜하였다. 몸에는 시퍼렇게 멍든 곳이 곳곳에 있었다. 얼굴도 눈두덩을 포함하여 군데군데 멍이 든 것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앉아 한참 동안 마음을 다잡아 진정을 하고 나니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앉을 수가 있게 되었다. 어지러워 균형을 잡기 힘든 것은 약 일주일간 계속되어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무엇이든지 붙잡고 진정을 한 다음에야 일어설 수가 있었다.
 
  조사관들은 또다시 10월 26일 저녁 김재규와의 공모 관계를 실토하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나는 10월 26일 오후 5시경 전혀 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채 김재규가 오라는 곳으로 간 사실부터 자세히 다시 설명했다. 어쩔 수 없었던지 그들은 일단 나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 조서를 작성하였다.(중략)
 
  이 며칠 동안 내가 태어나고 내가 평생을 바쳐 봉사한 내 나라가, 특히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정열을 쏟아왔으며 믿고 사랑하던 우리 육군이 나에게 이러한 못된 짓을 가하고 터무니없는 거짓을 조작하여 뒤집어씌우는가 생각하니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육군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오욕이었다.〉

 
 
  “전두환 세력이 대가를 치르겠구나”
 
  이 녹음테이프를 듣고 있을 때는 1노 3김(노태우,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나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라가 뜨거워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물고문당한 대장의 절규를 들으면서 “언젠가는 전두환 세력이 정승화 장군을 고문한 대가를 치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승화 장군 인터뷰는 그해 9월 《월간조선》에 실렸고 40만 부가 팔렸다. 직후 정 장군은 김영삼의 설득으로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되어 12·12 사건을 폭로, 대선의 가장 큰 주제로 만들었다. 11월 하순에는 김영삼 지지율이 1위를 달리기도 했으나 전두환 정권의 적극적인 공작으로 노태우 후보가 36.6%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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