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기자 거쳐 1976년 최규하 총리 공보 비서관으로 공직 입문
⊙ 전두환 대통령 시절, 두세 차례 공보 비서관 직에서 물러날 뜻 밝혔지만…
⊙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
⊙ “5·18 단체나 유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공수부대 투입 지시’와 ‘발포명령’ 사실을 밝히고 사죄하라는 것인데, 있지도 않았던 일을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어”
⊙ 전두환 대통령 시절, 두세 차례 공보 비서관 직에서 물러날 뜻 밝혔지만…
⊙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
⊙ “5·18 단체나 유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공수부대 투입 지시’와 ‘발포명령’ 사실을 밝히고 사죄하라는 것인데, 있지도 않았던 일을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어”

- 민정기 전 비서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2021년 11월 23일에도 고인의 ‘공보 비서관’ 임무를 수행했다. 사진=조선DB
대통령 취임 이전인 1978년 연희동으로 이주했고, 퇴임 후에도 돌아가 살았다. 비자금 사건으로 확정된 미납 추징금 문제로 여러 차례 압류·공매 대상이 되며 사회적 논란의 중심이 된 공간이다. 1988년 국회에서 열린 5공 비리 청문회에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문제가 불거지자 “국민에게 사죄한다”는 입장문을 내고 자발적 은둔을 택한 백담사(설악산)도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2021년 11월 23일 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유골함은 연희동 집에 머무르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보 비서관으로 ‘살았던’ 민정기(閔正基·83)씨가 최근 《연희동 40년 민 비서관》이란 책을 냈다. 판권(版權)이 있는 정식 출판이 아니라 자료집 형식의 제본 책이다. 300쪽이 안 되는 분량이지만 제법 묵직하다. 과거 증언이나 인터뷰 모음집 성격이다. 전 전 대통령을 향한 세상의 질책 속에서도 곁을 떠나지 않은 한 인간의 일생이 담겨 있다.
“‘결국’ 더 수고해 주셔야겠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공보수석비서관 시절의 서기원씨.민정기 전 공보 비서관은 1967년 《대한일보》 기자로 언론사와 인연을 맺었다. 군 복무 기간 3년 중 2년을 《전우신문》(현 《국방일보》) 편집실에서 보냈으니 신문은 그의 운명이다.
1973년 《대한일보》가 ‘윤필용 사건’의 유탄을 맞아 폐간된 뒤에도 《중앙일보》를 거쳐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그의 말이다.
“대통령 공보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1970년대 중반 정치부 기자의 취재 환경은 최악이었어요. 유신체제 아래 비상 계엄령까지 내려져 있어 기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기자실과 대변인실, 그리고 화장실뿐이었습니다.”
이 무렵 최규하(崔圭夏) 외무부 장관이 총리로 취임하면서 서기원(徐基源) 경제기획원 대변인을 공보 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서기원 대변인은 언론사 주일특파원,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지만 그보다는 ‘동인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더 알려져 있었다.
“서기원 대변인과 안면은 있지만 특별한 인연은 없었는데, 서 대변인이 교분이 두터운 친지의 추천을 받았다면서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더군요. 5년째로 접어든 유신체제하에서 취재기자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환경에 있던 저는 별다른 고민 없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1976년 국무총리 공보 비서관이 되었다. 최규하 총리가 10·26과 12·12를 거치며 대통령 권한대행에서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최 대통령은 오랜 관료 생활 속에서도 인맥을 형성하지 않기로 정평이 난 분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 총리실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의 ‘희망’을 외면한 채 4명만 청와대로 데려갔다.
최 대통령이 외교관으로서 해외에서 근무하던 때부터 줄곧 측근에 있었던 의전비서관 2명과 공보비서실의 서기원 대변인, 그리고 민 비서관이었다.
이듬해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그는 외부 전출자로 결정되어 대전의 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일주일 만에 돌아와 새 정부의 공보수석으로 임명된 이웅희(李雄熙) 대변인(《동아일보》 편집국장 역임)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민 비서관님은 결국 청와대에 남아서 더 수고해 주셔야겠다’고 하더군요. ‘결국’이란 말을 앞세운 것으로 보아 저를 남겨둔다는 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던 듯싶었죠.”
全 대통령 임기 내내 공보 비서관 근무
전두환 대통령의 공보 비서관으로서 그의 업무는 최규하 대통령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1983년 무렵 다른 자리로 옮기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공보 수석인 황선필(黃善必·MBC 사장 역임), 정구호(鄭九鎬·KBS 사장 역임), 이종율(李鍾律·국회 사무총장 역임) 등에게 거듭 자리를 옮겨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 말이 가까워오는 1987년이 되자 취임 초부터 모셔온 분을 끝까지 모시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 더 이상 자리 이동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제 개인의 성격도 그렇지만 어느 특정한 자리에 가기를 원하거나, 또 그를 위해 애를 쓰거나 할 만한 여건이나 환경이 아니었어요. 주어진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나름대로 성실히 수행했지요. 대통령 공보수석이 몇 번 바뀌었고, 그 일과 관계없이 10년을 헤아리는 ‘공보 비서관’ 일에 지쳐 두세 차례 자리를 옮겨달라고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전 전 대통령의 임기(11대 대통령 임기 6개월, 12대 대통령 임기 7년) 내내 대통령 공보 비서관으로서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은 이유
전 전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임기를 마친 뒤 퇴임하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취임했다. 취임식 바로 다음 날, 그는 이수정(李秀正·문공부 장관 역임) 신임 공보수석에게 청와대를 떠날 생각이 확고하다는 점을 밝혔다. 새로 온 수석 비서관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기회에 기필코 ‘공보 비서관’의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고 작심했던 것이다. 아울러 아무 자리건 마련해 주면 그리로 옮겨 갈 것이고, 안 되면 3개월까지는 대기 발령 상태로 있을 수 있으니 기다리겠다고 했다. 3개월이 지난 1988년 6월 초 그는 드디어 청와대에서 짐을 쌌다. 8년 반 만에 푸른 기와지붕에서 나온 것이다.
퇴임 후 전 전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미국 방문길에 나섰지만, 온 나라에 이른바 ‘5공 청산’의 회오리가 몰아치면서 결국 예정했던 일정마저 뒤로한 채 중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전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100일쯤 지난 시점이었다. 대통령을 수행했던 안현태(安賢泰) 전 경호실장이 그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예상했지만’ 공석으로 있던 ‘전직 대통령 비서관’으로 올 의향은 없는지 생각해 보라는 얘기였다.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오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고 결심하기 전에 가족, 특히 부인과 반드시 상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라는 전 전 대통령의 말씀이 있었다”고 했다. 그즈음, 전 전 대통령 재임 중 비서관을 지내며 신임을 받았던 몇 사람에게 제의했지만 모두 사양(?)하는 바람에 몇 달째 비어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었다.
“저는 잠시의 뜸도 들이지 않고 ‘제가 비서관으로서 대통령으로 모시던 분이 날 찾으신다는데 생각해 보고 뭐고 할 일이 있습니까. 가족회의는 또 뭐고…’라고 말했어요.
그 뒤 5공 청산, 백담사 유폐, 국회 5공 청문회, 5·18 특별법과 그에 따른 투옥, 재산 몰수, 광주법정 출두 등 모진 핍박과 공격, 박해, 모멸조차도 그분은 다 감내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언론 매체가 찾는 사람은 저였어요.”
‘운명이란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
1989년 3월 26일 천혼백일기도 중 49일 천도재를 올리는 전두환 전 대통령. 그는 백담사 시절 5·18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사진=조선DB― 그런 상황에서 왜 떠나지 않으셨나요.
“저는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마주치는 상황과 그에 대응해야 하는 일을 제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시인 유치환은 ‘너에게’라는 시에서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관, 나의 운명입니다.”
《연희동 40년 민 비서관》을 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임 후인 10년(1988~98년)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5공 청산’ ‘백담사 유폐’ ‘해외 망명 공작’ ‘폭탄 선언’ ‘국회 청문회 증언’ ‘백담사 하산’ ‘5·18 특별법 입법과 그에 따른 검찰 수사-재판-사면’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의 거처와 관련된 논란이 정치권과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만큼 나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생활을 이어와야 했다. 중앙 언론사의 신문은 물론 주간신문과 월간잡지까지 모두 구독했다. 이 시절 나는 조간신문 가판을 집으로 배달시켜 보았다. 백담사는 1~2주 간격으로 찾아갔기 때문에 일일보고(日日報告)할 일이 없었지만,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리기 위해서는 언론 보도 상황을 그때그때 파악해야 했던 것이다. 최 전 대통령은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차례나 전화를 하셨다. 검찰의 수사, 국회의 청문회 출석 요구, 5·18 재판부의 증인 출석 요구에 끝내 불응한(5·18 재판 항소심 때에는 구인되어 출석했지만 심문에는 불응) 최 전 대통령은 그러한 일들과 관련한 전 전 대통령의 입장에 관해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새벽이라고 해야 할 이른 아침에 전화하셔서 “신문 보셨수?” “당 원내총무가 뭐라고 그랬더군. 잘 살펴보슈” 잠시 후 다시 “방송 들었수? 검찰이 너무하는 거 아냐? 에이 고약한 사람들” 이런 식이었다. 워낙 세심하고 신중한 분이라고 정평이 난 그 어른은 한때 비서관으로 데리고 있던 내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인지 수시로 전화를 하셨을 뿐 아니라 자주 부르시기도 했다. 백담사, 그리고 옥중에 계신 전 전 대통령보다 최 전 대통령의 부르심 때문에 더욱 신문을 비롯한 언론의 보도 내용에 신경을 써야 했던 시기였다.〉
“옥중에서도 매일 한 시간씩 〈천수경〉 독송”
―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년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사회, 우리 국민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비판과 박해와 모멸을 받으면서도, 대통령이 되신 일, 재임 중 하신 일들, 단임 약속을 지켜 청와대를 나온 일들에 대해 후회스러운 소회를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잘못한 일, 잘못한 사람에 대해 비판적인 말씀을 할 때는 있었지만 누구를 비난하는 말씀은 들은 바 없어요. 국민에 대해 서운해하는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재임 중 전 대통령한테 신임과 총애를 받고 퇴임 후 등 돌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오늘 남대문에 장이 서면 남대문으로 가고, 내일 동대문에 장이 열리면 동대문으로 가서 장을 보기 마련이니까 그런 일에 괘념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훗날 그 사람들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셨죠.”
―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하던데요.
“전두환 대통령 내외는 백담사 시절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후 기회가 되면 전국의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백담사로 유폐되어 첫 번째 맞이한 새해 음력 정월 초하루 내외분은 ‘국태민안과 영가천도(靈駕薦度)를 위한 백일기도’를 드렸어요. 소급입법인 5·18 특별법으로 전 대통령이 또다시 투옥되자 1996년 이순자(李順子) 여사는 ‘5·18 희생자의 영가천도를 위한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옥중의 전 대통령도 매일 한 시간씩 〈천수경〉을 치며(독송하며) 백일기도에 동참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초 불교계가 범종단 차원에서 개최한 ‘국난극복(國難克服) 대법회’에 모두 참석하셨습니다.”
― 구인장이 발부돼 광주지방법원에 출석해야 했던 당시 전 전 대통령의 육체적·정신적 상태는 어땠나요.
“고령이신 데다가 코로나19를 앓고 나신 뒤여서 심신이 모두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피고인의 거주지 법원에서 재판한다는 원칙과 관례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광주법원으로 끌고 가는 형편이었습니다. 부축 없이는 보행도 어려웠고 광주로 가는 차 안에서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거긴 왜 가나’는 물음을 수십 번씩 되물어 동승한 이순자 여사를 힘들게 했어요.”
“‘발포명령’ 사실을 밝히고 사죄하라는 것인데…”
2021년 8월 9일 고(故)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항소심 재판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사진=조선DB― 전 전 대통령이 5·18 유족들에게 공식적인 사죄의 말씀을 끝내 남기지 못한 사연이나 이유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광주사태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던 입장에서 여러 차례 사과와 유감의 뜻을 밝힌 바 있지만, 5·18 단체나 유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공수부대 투입 지시’와 ‘발포명령’ 사실을 밝히고 사죄하라는 것인데, 있지도 않았던 일을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왜곡하고, 국군 장병들이 작전지휘 계통에 있지 않은 사람의 지휘에 따라 발포했다는 엉뚱한 누명을 쓰는 일입니다.”
― 전 전 대통령을 어디에 모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유언처럼 ‘북녘땅이 바라보이는 전방 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국립묘지에 자리를 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는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언론 보도에 신경을 쓴다. 한동안 모든 조간 가판을 집으로 배달시켜 봤었는데, 지금은 《조선》·《동아》·《중앙일보》만 구독하고 있다. 《조선》과 《동아》는 195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끊지 않았다.
“기자들의 접근 피해 본 적 없다”
“몸이 하나라 방송을 모두 챙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신문만은 가능한 한 꼼꼼히 보려고 노력합니다. 기자들의 접근을 피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제 휴대전화에는 언론인 번호만 따로 저장해 둔 연락처가 수백 개에 이르죠. 10년, 20년간 통화한 적이 없는 분들의 번호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시작된 그의 신문 읽기는 기자 시절은 물론 공직에 있던 때,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일과로 이어져 왔다. 말 그대로 ‘신문과 함께한 일생’이다.
《연희동 40년 민 비서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다시 염라대왕 앞에 선 장면-
“그래 그렇게 신문을 열심히 읽다 왔다는데 오늘 신문에는 무슨 기사가 실렸는고?”
“네, ○○신문은 북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상대로 통일된 대한민국의 법제와 생활 관습에 대한 설명회가 지역별로 열리고 있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실었고, ××일보는 김일성 왕조 체제하에서 지배 계층에 있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김정은과 핵심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민족의 화해를 위해 관용을 베풀자는 요지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