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토 서리하다 ‘사흘 굶어도 도둑질은 하지 않는다’ 깨달음
⊙ 동자승, 책 노점상, 사진사, 한글운동가 거쳐 국회의원까지
⊙ 베트남 상이용사 거짓 행세하며 전국 웅변대회 나가… 가책 느껴 이후 웅변 상장 없애
⊙ “미쳐야 합니다. 하고자 하는 일에 미치지 않으면 성공은 없습니다”
元光鎬
1946년생. 미국 호놀룰루 채미네이드대 명예정치학박사, 세종대 명예문학박사 / 과학기술처 한글표준전문위원, 14대 국회의원, 헌정회 대변인 겸 감사 역임. 現 아산정주영기념사업회 회장, 한국바른말연구원 원장
⊙ 동자승, 책 노점상, 사진사, 한글운동가 거쳐 국회의원까지
⊙ 베트남 상이용사 거짓 행세하며 전국 웅변대회 나가… 가책 느껴 이후 웅변 상장 없애
⊙ “미쳐야 합니다. 하고자 하는 일에 미치지 않으면 성공은 없습니다”
元光鎬
1946년생. 미국 호놀룰루 채미네이드대 명예정치학박사, 세종대 명예문학박사 / 과학기술처 한글표준전문위원, 14대 국회의원, 헌정회 대변인 겸 감사 역임. 現 아산정주영기념사업회 회장, 한국바른말연구원 원장
‘시련 없는 성공, 시련 없는 영광은 없다.’
그는 1946년 음력 3월 13일, 보릿고개를 넘기던 농촌에서 태어났다. 배고픔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었고, 6·25전쟁은 그의 유년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지게 위에 실려 피난길을 전전하던 기억, 헐벗은 몸으로 병을 앓다 ‘이쯤에서 끝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의 절망을 겪었다.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그 시절엔 꿈이 없었습니다. 꿈을 꾼다는 건 사치였고, 오늘 밤을 넘기는 게 목표였습니다.”
과장이 아니다. 원광호의 어린 시절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과 싸우는 시간이었다.
깡통을 들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해 12월 1일 경기도 양평으로 갔다. 강과 산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한국바른말연구원’이란 나무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높은 뜻 푸른 꿈’이란 족자가 보였다. 왕방울 같은 눈을 한 그가 성큼 다가왔다. 그는 스토리텔러처럼 이야기를 풀어냈고,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서사처럼 기자를 끌어당겼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사건 하나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월사금(다달이 내던 수업료)을 열두 달이나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교무실로 불려 갔다. 담임선생님 손엔 대나무 잣대가 들려 있었고, 매는 손바닥이 아니라 얼굴로 날아왔다.
“한 달에 한 대씩이라더군요. 왼쪽 볼 여섯 대, 오른쪽 볼 여섯 대였습니다.”
교무실을 오가는 교사와 학생들 앞에서 맞는 매. 육체적 고통보다 수치심이 먼저였다.
“아프기도 했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그는 울면서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가난을 없애지 않으면, 사람대접은 끝내 못 받겠구나.’
울분에 가까운 이 감정은 차라리 깨달음에 가까웠다. 가난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너무 일찍 배웠다. 찾던 끝에 그의 발길은 절로 향했다. 열한 살. 혼자 산사(山寺)를 찾아가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동자승이 됐다.
새벽마다 얼음을 깨고 개울에서 걸레를 빨았다. 요강을 비우고, 공양을 머리에 이고 나르고, 호롱불 아래서 법당을 닦았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했다. 인내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누룽지 한 그릇
“어찌 아셨는지 아버지가 갑자기 찾아온 바람에 자의 반 타의 반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됐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낮에는 막노동, 밤에는 학생이었다. ‘아이스께끼’를 팔았고, 성당에서 나눠 주는 옥수수죽으로 연명했다. 밀가루를 사 수제비를 해 먹는 날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날이었다. 장마철이 오면 모든 것이 끊겼다. 결국 그는 깡통을 들었다.
“중학생 때는 그래도 동정을 받았습니다. 고등학생이 깡통을 드니 사람들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어떤 집에서는 쫓겨났다. “나가라”는 손짓 하나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러나 다른 집에서는 누룽지 한 그릇을 내주었다.
“그 누룽지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배를 채운 게 아니라, 사람에게 살 길이 있다는 걸 알려 준 밥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국회의원이 된 뒤 가장 먼저 그 마을을 찾았다.
“정치는 그 누룽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갈린다. 원광호는 그 사실을 중학교 2학년 여름에 깨달았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교항리 변전소 옆 문간방. 그날 따라 윙윙거리는 전선 소리와 천둥 번개가 대낮에도 방을 흔들었다.
그러나 공포보다 먼저 몸을 파고든 것은 굶주림이었다. 집에 먹을 것은 없었고, 사흘째 물로만 배를 채우고 있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이대로 있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을 나와 제방 둑길을 따라 걷다 개울 건너 원두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엔 뭐라도 있겠지.’
장마로 불어난 개울 앞에서 교복 바지를 벗어 두고 속옷 차림으로 물속에 들어갔다. 물살에 휘청이며 간신히 건넜다. 원두막 앞에는 아까시나무 가시 울타리가 있었다. 허벅지가 찔리고 온몸이 긁혀도 넘어가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토마토 밭에서의 선택
그곳은 참외밭이 아니라 토마토 밭이었다.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아 푸른 토마토를 허겁지겁 따 먹었다. 배가 조금 차고 나서야 빨갛게 익은 토마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러닝셔츠를 급히 벗어 자루를 만들어 익은 토마토를 골라 담았다.
다시 울타리 앞에 섰을 때, 손에 든 토마토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나는 도둑이다.’
망설이던 그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토마토 자루를 메고 원두막으로 향했다. 자루의 무게에 다리가 질질 끌렸다.
“계세요…?”
낮잠을 자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원광호는 올라가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다. 말없이 한참 그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야단 대신 살림집으로 데려가 며느리에게 소리쳤다.
“찬밥이라도 가져와라.”
잠시 후 나온 양푼에는 강조밥과 풋고추, 호박잎과 된장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소년은 울컥 목이 메었다. 도둑질을 고백한 청소년에게 돌아온 것은 꾸중이 아니라 밥과 온기였다. 장 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혀 돌아오자 주교는 자신이 준 것이라며 그를 감싸고, 은촛대까지 더 내어 준 장면과 묘하게 겹친다. 그날 그 밥은 그 소년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음식이었다.
원두막을 나서자 폭우가 쏟아졌다. 강물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는 밥과 토마토를 담은 자루를 머리 위로 들고 강을 건너다 거센 물살에 휩쓸렸다. 자루를 놓쳤고, 정신없이 떠내려가다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아 간신히 살아 나왔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그날 이후 원광호는 한 문장을 새로 마음에 새겼다.
‘사흘 굶어도 도둑질은 하지 않는다.’
그 결심은 이후 그의 삶을 지탱하는 기준이 되었다. 지금도 그는 그날을 떠올린다. 울타리를 넘은 소년보다, 도망치지 않고 무릎을 꿇었던 소년의 선택을. 그리고 그 순간의 결정이 한 사람의 운명을 얼마나 멀리 데려갈 수 있는지를. 그 다짐은 이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 문맹자 60명 퇴치
원광호는 1963년 2월 《강원일보》의 〈중학생의 어린 몸으로 문맹자 60명 퇴치〉란 미담 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다.그는 초등학생 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목소리가 우렁찼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기 무섭게 교단에 올라 “만장(滿場)하신 여러분!” 어쩌고저쩌고 소리를 지르다가 할 말이 없으면 내려오곤 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연사가 되겠다는 꿈은 한시도 버릴 수 없었다. 연설을 배우려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기도 했고 마을 노인들에게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며 웅변을 연습했다. 덕분에 1963년 2월 《강원일보》에 ‘중학생의 어린 몸으로 문맹자 60명 퇴치’란 미담 기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고교 시절엔 웅변반장으로 활동력을 쌓았고, 학창 시절 동안 웅변 상장이 100장도 넘었다. 군 시절에는 문화선전대원으로 연극배우이자 반공 강사로 활약했다.
1960년대 벌거벗은 산을 푸르게 만들자는 취지에서 정부가 전(全) 국토 산림녹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 역시 작업에 참여해 아까시나무에 올라 일을 하던 중, 오른손 손가락이 가시에 찔렸다. 아픈 손으로 웅변 원고를 쓸 수가 없었다. 문득 오른손을 못 쓰는 사람의 고통을 상상하다가, ‘곰배팔’의 고통과 불편을 주제로 웅변을 해서 1등을 했다. 곰배팔은 꼬부라져 붙어 펴지 못하는 팔 또는 팔뚝이 없는 팔을 말한다.
원광호는 이 경험을 살려 월남참전전우회 주최 전국 반공 웅변대회에 참여하게 됐다. 오른손 소매를 비틀어 손목을 꺾어 쥔 채, 흰 장갑을 끼고 20대의 ‘상이군인’ 원광호가 단상에 올랐다. 등단하자마자 외쳤다.
거짓 곰배팔의 부끄러운 교훈
학창 시절 원광호는 웅변대회에 나가 많은 상을 타며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연사를 꿈꾸었다.“바른손 못 쓰는 왼손잡이 사나이, 곰배팔 원광호입니다.”
청중의 시선이 단박에 쏠렸다. 성공이었다. 그는 곧장 베트남전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국 땅 월남, 말로만 듣던 전쟁터에 투입되자마자 맹호작전 실전에 배치됐습니다. 이동 중 어디선가 날아든 총탄과 포탄에 내 옆 전우가 팔과 다리가 날아간 채 쓰러졌습니다. 전우를 끌어안고 얼굴을 보니 우 상병이었습니다.”
곰배팔이 된 베트남전 용사의 모습을 재연하듯 쏟아 낸 웅변에 대회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TV 카메라와 사진기자의 플래시가 번쩍였고, 누군가는 귓속말로 “1등”이라 했다. 웅변이 끝나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월남은 언제 갔습니까?” “맹호부대 맞나요?” “계급은요?”
베트남에 간 적도 없던 그는 화장실이 급하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 안에서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영광의 상을 받기 전, 참전 전우들 앞에서 거짓이 탄로 나면 맞아 죽을 것 같았다. 문밖에서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셋을 세고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도망쳤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그는 도망자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양심을 속인 죄는 법 이전에 자신에게서 먼저 값을 치른다는 사실을. ‘곰배팔’은 그렇게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교훈으로 남았다. 그 후 원광호는 다짐했다. 웅변뿐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고. 선의의 거짓말도 습관이 되면 결국 사기와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는 그날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다시는 웅변을 하지 않았고, 웅변을 했다는 사실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웅변 상장과 트로피를 리어카에 한데 모아 외딴 밭으로 갔다. 도끼로 하나씩 부쉈다. 모두 없애고 나니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아 있으면 더 괴로웠을지 모른다.
원광호는 말한다. 거짓말의 대가는 크다고. 거짓말로 1등을 하는 것보다, 진실을 말하고 꼴찌를 하는 것이 진정한 웅사(雄辭)라고.
‘돈이 된다면 못 할 게 없다’
군 제대 후 원광호에게는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서울로 상경해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갖고 있던 돈도 바닥났다. 당시 밥 한 끼 값이 80원, 가장 싼 하숙집이 300원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나면 손에 남는 건 20원 남짓이었다. 잠자리를 구할 돈조차 없었다.
어느 날 힘없이 동대문 옆 호텔 모퉁이를 돌아 신설동 쪽으로 걷다가, 유리창에 붙은 글귀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명함 하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명함 빨리, 싸게 만들어 드립니다”라고 외쳤다. 그렇게 시작한 인쇄 주문 세일즈가 그의 오뚝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인쇄 주문을 따오고, 인쇄소 문지기가 되고, 어느새 사장이 됐다.
그는 늘 거리에서 생각했다. ‘돈이 된다면 못 할 게 없다.’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는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부딪치고 도전해 보았다.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장사가 있었다. 육교 위에서 책을 파는 일이었다. 그는 명동 육교 위에 책을 쌓아 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 신설동 만물집합소에서 화재·수해·유통 실패 등 사연을 달고 나온 물건들 가운데 책을 골랐다. 세계위인전집, 영어사전, 소설, 시집을 쌓아 놓고 소리를 질렀다.
“돈을 세어 보지 않고 책 파는 곳입니다. 마음대로 주머니에 넣고 가져가세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거 얼마예요?”
“얼마 줄 건데요?”
순식간에 완판이었다. 그는 서울역 지하도, 을지로, 신설동, 사대문 안 인파 많은 곳을 장악했다. 장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는 책 배분과 공급, 수금만 담당했다. 식구가 7~8명으로 늘어날 만큼 잘됐다.
엉터리 사진사
그러나 노점 단속으로 결국 장사를 접어야 했다. 이후 신발 장사를 하기도 했고 고물 사진기 한 대와 깡다구 하나로 경기도 파주에 사진관을 연 일도 있다.
막 문을 연 ‘으뜸칼라사진관’이 어느 고교의 졸업 앨범 지정 사진관이 된 사연은 이렇다. 정식 지정 사진관 사장이 술에 취해 나타나지 않자, 학교에서는 급히 대체 사진사를 찾다 허름한 사진관을 찾았다.
“운동장에 축구 선수들 모여 있어요. 빨리 와서 단체 사진 찍어 주세요.”
필름을 끼운 고물 사진기를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한여름 땡볕 아래 축구 선수들이 두 줄로 서 있었고, 체육 선생님은 초조한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쓴 채 뷰파인더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거꾸로만 보였다.
“뭘 해요? 빨리 찍어요!”
학생들과 체육 선생의 호통이 이어졌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보자기를 젖히고 솔직히 말했다.
“선생님… 사람이 거꾸로만 보여요.”
체육 선생은 한숨을 쉬더니 보자기를 낚아채 썼다.
“거꾸로 보이는 게 정상이에요. 당신 사진사 맞아요? 내가 찍을게요.”
그는 옆으로 밀려났고, 체육 선생은 능숙하게 사진을 찍어 냈다. 그날은 그의 사진 실력이 들통난 첫날이었다. 그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체육 선생은 앨범 지정 사진관과 오래 함께하며 수학여행 사진까지 대신 찍어 주던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원광호에게 잊지 못할 사진 스승이 됐다.
돌이켜 보면 ‘으뜸칼라’의 변천사는 무모함의 연속이었다. 기초도 없이 시작했지만 실전에서 부딪치며 배웠고, 나중에는 서울에서 정식 이론 교육까지 이수했다. 그렇게 그는 ‘사진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간들에는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원광호의 사회 초년은 늘 위태로웠지만, 넘어질 때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실패와 창피함은 훗날 그의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
국회의원의 꿈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오른쪽)과 국회의원 시절 원광호.사실 원광호는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경험했다. 글을 모르는 어른들이 많아 기호 대신 작대기 하나, 둘, 셋으로 찍던 시절이었다. 웅변과 연설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일찌감치 고교 시절 공식 국회의원 후보 찬조 연설자가 된 일도 있다.
그는 현실정치의 한복판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1980년대 최루탄 연기 자욱한 시위에 참여했다 연행되기까지 하면서 국회의원이라는 목표는 더 선명해졌다.
원광호가 정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정당을 창당하고 정치판에 뛰어든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과의 만남이었다.
원광호는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종필(金鍾泌)의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강원 원주에 출마해 2위로 낙선한 경험이 있다. 1992년 14대 총선을 앞두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후보를 물색하던 때였다. 원광호는 그 2년 전 3당 합당 때 따라가지 않고 ‘꼬마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상태였다.
강원 출신 정치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원주 후보로 공천 검토 중이니 내일 (서울) 계동으로 오라”는 말이었다. 약속한 대기 장소는 현대빌딩 맞은편 운현궁다방.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상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현대빌딩 복도부터 공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몇 시간씩 대기하다 면접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원광호는 물러서려 했다. 선배를 만나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선배가 그를 VIP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그렇게 홀로 면접실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정주영 총재가 앉아 있었다.
“원주에서 왔어?”
“네.”
“정치 해 볼텨?”
짧고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망설였다. 지역구도 불확실했고, 공천 여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얼버무렸고 “안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정 회장은 잠시 그를 보더니 말했다.
“그래? 그럼 나가 봐.”
대신 정 회장은 책 한 권을 건네며 덧붙였다.
“읽어 보고, 생각 바뀌면 다시 와.”
기차를 타고 원주로 내려가는 길, 정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펼쳤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 이야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밀어붙인 삶. 그는 그 책에다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원주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시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사람은 환경이 아니라 선택으로 완성된다”
14대 국회의원 원광호가 본회의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뒤는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다시 찾은 계동 현대빌딩. 이번에는 문전박대에 가까웠다. “회장님은 안 계신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회장님, 저 정치 하겠습니다.”
“왜 맘이 바뀌었어?”
“책을 읽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어.”
그것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면접이었다. 설명도, 약속도 없었다. 그 짧은 대화가 끝이었다.
며칠 뒤, 통일국민당 당사에서 조직책 임명장이 수여됐다. 사회자가 “강원 원주, 원광호”를 호명했다. 그는 임명장을 받는 순간에도 실감하지 못했다. 210원 하는 버스 토큰 하나로 상경했던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는 곧바로 원주로 내려갔다. 지구당 창당대회를 열고 선거에 돌입했다.
결과는 숫자로 남았다. 통일국민당 후보 원광호는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주에 출마해 3만4579표(42.61%)를 얻어 당선됐다. 3만2432표를 얻은 민주자유당 함종한 후보와 불과 2%p 남짓한 차였다.
원광호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그날 계동에서 시작됐다”고. “질문 하나, 책 한 권, 그리고 ‘해 볼텨?’라는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 방향을 바꿔 놓았다”고.
그렇게 국회의원이 되어 모교를 찾아 생활기록부를 열어 본 그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월사금을 못 내 정학·퇴학을 반복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그 기록을 보는데,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저 아이는 끝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그날 마음속에서 오래 묵은 원한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압니다. 저를 때린 매도, 저를 쫓아낸 말도 결국 저를 밀어 올린 힘이 되었다는 걸요.”
원광호의 인생은 이렇게 말한다.
“출발선이 불공정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까지 불공정하면, 인생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없었다. 다만 훔치지 않았고, 거짓말을 버렸고, 기준을 낮추지 않았다.
“저는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말은 가볍지 않다. 이 시대는 빠른 성공을 부추기지만, 그의 인생은 느리게 증명한다.
“버티는 것도 능력이고, 기준을 지키는 건 더 큰 용기입니다.”
깡통을 들었던 소년은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깡통을 들었던 자신을 끝내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은 환경이 아니라, 선택으로 완성됩니다.”
원광호는 14대 의원 임기중 통일국민당을 탈당하고 김영삼(金泳三)의 민주자유당으로 옮겼다가, 15대 총선에서 공천에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원주갑에 출마했다 낙선한 후 다시는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선택, 창의력, 불가능의 가능, 습관
원광호는 2003년 5월 ‘세계 최다 문자 기록’에 도전해 20시간56분에 걸쳐 1만2768자의 서로 다른 글자를 써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은 재산도 인맥도 아닌 ‘창의력’이라고 말한다. 그 사실을 비교적 늦게, 그러나 또렷하게 깨달았다.
2019년 9월 12일 아침,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이스라엘 민족교육 프로그램을 보던 순간이었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아이들, 정답보다 사고 과정을 중시하는 수업 방식. 그는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거구나.’
그는 오래전 이스라엘 히브리대에서 잠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삶 자체가 이미 그에게 창의력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난과 방황, 장사, 실패와 재기 속에서 그는 늘 질문해야 했고, 답을 찾기 위해 상상해야 했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창의력은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독서 이력도 남달랐다.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괴테의 《파우스트》,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을 탐독했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의 그레시아노 역을 맡아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연극은 그의 사고를 확장하는 또 하나의 학교였다.
훨씬 전인 1970년대 열차 이름 공모에서 그는 그저 응모했을 뿐이었는데 결과는 모두 당선이었다. ‘새마을호’ ‘무궁화호’,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 ‘통일호’가 모두 그의 제안이었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 이름들 대부분이 선로 위를 달린다.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창의력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의 ‘국민권익위원회’가 과거 ‘국민고충처리위원회’로 처음 생긴 것도 국회 행정분과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의 공헌이다. 1996년 3월 1일부터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뀐 것 역시 20여 년간 이어진 그의 한글운동이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였고 그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창의력은 번뜩이는 생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생각을 결과로 밀어붙이는 창조 정신이 있을 때 비로소 힘이 됩니다.”
“쉬운 일이 나한테 오겠어요?”
원광호가 훈민정음 진본(추정)을 감정하고 있다.사람들은 그에게 종종 말한다.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 좀 대충대충 살아라.”
그럴 때마다 그는 되묻는다. “쉬운 일이 나한테 오겠어요?”
남들이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 힘들다고 피하는 것, 더럽다고 외면하는 것. 그는 그런 것들, 소위 3D(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 속에 기회가 숨어 있다고 믿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그 길을 지나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불가능’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국어사전은 불가능을 ‘할 수 없음’이라 정의하지만, 그 판단을 누가 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결국 가능과 불가능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불가능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습관은 기록이다. 사람들은 그를 메모광이라 부른다. 강연 중에도, 대화 중에도 그는 종이쪽지와 연필을 꺼낸다. 언젠가 반드시 쓰일 날이 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몰입이다. 몰입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는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믿는다. 미치지 않고서는 남들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미쳐야 합니다. 하고자 하는 일에 미치지 않으면 성공은 없습니다.”
이것이 원광호가 삶으로 증명해 온 마지막 성공 비결이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쓴 시가 그의 한국바른말연구원 양평 창가에서 들리는 듯하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포도주든, 시든, 미덕이든–당신이 원하는 것으로.’
그는 취해서, 미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글운동가… 기네스북에 ‘가장 많은 글자 쓰는 사람’
훈민정음 진본 감정 중
원광호를 한글운동가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이 된 원광호는 국회 의원회관 출입문에 한자로 적힌 ‘元光鎬 議員’ 문패를 떼어 쓰레기통에 넣고, ‘國(국)’이라고 적힌 의원 배지도 한글로 만들어 달고 다녔다. 동료 의원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그는 한글 사랑을 실천했다. 오늘날 국회 마크와 의원 배지, 상임위원회 명패가 모두 한글로 바뀐 배경에는 그의 투쟁이 있다.
원광호는 이후 국내 공공기관과 단체는 물론, 외무부와 해외 공관들의 한자 간판까지 한글로 바꾸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가장 고집스럽던 한국은행을 끝으로 공공기관 총 837곳의 한자 간판을 한글로 바꾸는 데 일등공신이 바로 원광호다. 의원직 막바지인 1995년부터는 바른말연구원장으로 돌아와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한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세계에서 문자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으로 최고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2003년 5월 ‘세계 최다 문자 기록 도전대회’를 열어 자음 14자, 모음 10자, 겹모음 11자, 쌍자음 5자, 겹자음 12자 등 한글 52개 자모를 사용해 20시간 56분에 걸쳐 1만 2768자의 서로 다른 글자를 써 공인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
최근에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훈민정음 진본(추정)을 개인 소장자로부터 확인해 감정에 들어갔다. 1조원을 호가한다는 훈민정음 상주본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이 된 원광호는 국회 의원회관 출입문에 한자로 적힌 ‘元光鎬 議員’ 문패를 떼어 쓰레기통에 넣고, ‘國(국)’이라고 적힌 의원 배지도 한글로 만들어 달고 다녔다. 동료 의원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그는 한글 사랑을 실천했다. 오늘날 국회 마크와 의원 배지, 상임위원회 명패가 모두 한글로 바뀐 배경에는 그의 투쟁이 있다.
원광호는 이후 국내 공공기관과 단체는 물론, 외무부와 해외 공관들의 한자 간판까지 한글로 바꾸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가장 고집스럽던 한국은행을 끝으로 공공기관 총 837곳의 한자 간판을 한글로 바꾸는 데 일등공신이 바로 원광호다. 의원직 막바지인 1995년부터는 바른말연구원장으로 돌아와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한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세계에서 문자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으로 최고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2003년 5월 ‘세계 최다 문자 기록 도전대회’를 열어 자음 14자, 모음 10자, 겹모음 11자, 쌍자음 5자, 겹자음 12자 등 한글 52개 자모를 사용해 20시간 56분에 걸쳐 1만 2768자의 서로 다른 글자를 써 공인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
최근에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훈민정음 진본(추정)을 개인 소장자로부터 확인해 감정에 들어갔다. 1조원을 호가한다는 훈민정음 상주본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