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이승만 재조명’ 계기 만들고, ‘기파랑’ 출판사 통해 양서 출판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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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안병훈(安秉勳) 전 《조선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이 10월 31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1965년 《조선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한 고인은 정치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상무이사, 전무이사, 편집인 등을 거쳐 2003년 부사장 겸 대표이사로 회사를 떠날 때까지 38년여 동안 근무하며 《조선일보》의 전성기를 이끈 언론인으로 기억된다. 특히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전(展)을 개최해, 그때까지만 해도 ‘4·19로 쫓겨난 독재자’로만 인식되던 이승만 대통령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든 것은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특집 기사를 담당했던 이한우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안 부사장은 이승만 재발견을 꿈꾸셨고 1995년 난 그분의 꿈마차를 끄는 말이 되었다. 오래 가까이에서 모시지는 못했지만 이승만 프로젝트를 하면서 본 그분은 참으로 거인이셨다. 호쾌한 너털웃음으로 모든 갈등을 녹여 내시는. 이후 나의 학문 진로도 이승만 영향 하에서 점차 조선사와 중국사로 확대되었지만 그 모든 출발은 안 부사장 덕이었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전뿐이 아니었다. 그 시절 《조선일보》는 ‘쓰레기를 줄입시다’ (1992년), ‘배기가스를 줄입시다’(1993년), ‘샛강을 살립시다’(1994년) 등의 캠페인을 활발하게 벌였다. 특히 1996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캠페인은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자극을 주었다. 여기에는 고인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고인은 회고록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막상 경험해 보니 글을 쓰는 것만이 신문사 일의 전부는 아니었다. 신문의 노선을 정하고 사회적·국가적 어젠다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한 언론의 기능이자 사명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중략) 글쓰기와 멀어져 서운한 때가 있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나는 미친 듯이 일을 했다.”
 
 
  “내 이력은 단 한 줄로 정리 가능”
 
광복 50주년과 창간 75주년을 맞아 1995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전은 ’이승만 재조명’의 시발점이 됐다. 사진=조선DB
  또 고인은 회고록 《그래도 나는 또 꿈을 꾼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입사할 무렵, 《조선일보》는 ‘4등 신문’이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내가 재직하는 동안 당당히 1등 신문이 되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신문사로 성장했다. 나는 《조선일보》의 황금기에 편집국장을 지냈고, 임원으로서 여러 사업이나 캠페인을 추진했다.”
 
  “《조선일보》에서 기자, 차장, 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대표이사를 지냈지만 내 이력은 단 한 줄로 정리가 가능하다. 그것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조선일보》 기자로 퇴직하다’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찰 정도로 뿌듯한데 더욱이 ‘방우영(方又榮) 시대의 기자’였다는 점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조선일보》 동료와 선후배들은 고인을 ‘덕장(德將)’ ‘인화(人和)의 보스’ ‘타협과 조정의 명수’라고 기억한다. 고인의 이런 면모는 사내(社內)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부인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는 고인의 장례를 치른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은 근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다. 누구도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지난 여름 한 사람이 찾아와 병원 근처 일식집에서 휠체어에 탄 남편과 나에게 점심을 샀다. 30여 년 전 신문사를 출입하던 전직 정보요원이었다. 그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왔노라고 했다. 서울시내 거리에 하루도 학생 데모 없는 날 없던 그 당시, 신문사에도 노조가 생겨 중국의 문화혁명 같은 분위기의 나날이었다. 각 신문사의 노조들은 당연히 정보요원 몰아내자는 것을 구호로 내걸었다. 그때 신문사 간부였던 남편은 노조원들을 만나 ‘나름 애국적 기관인 정보부(그 당시 명칭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소속 요원이 나름 자기 직책에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무슨 권한으로 그를 쫓아낸다 어쩐다 하는 것이냐’라고 노조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조선일보》만이 ‘기관원 몰아내기’ 항목이 노조 요구 사항에서 빠졌고, 그 정보요원은 별다른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 오래전 고마움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는 늙고 병들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과거의 노장을 찾아온 것이다.”
 
  고인의 딸인 안혜리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장례식 후 조문객들에게 보낸 인사 편지에서, 고인이 지난 2022년 손자가 찍은 동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사람은 남보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을 강조하면서 자기만 잘났다고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하면 인간관계가 좋아지지 않을뿐더러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못 받아.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고 겸손하게 사는 게 으뜸이 아닌가 생각하지.”
 
 
  퇴직 후에는 출판사 설립
 
  《조선일보》에서 퇴직하고도 고인의 활약은 계속됐다. 출판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고인은 출판 시장이 진작부터 좌경화(左傾化)되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좌경화되었다고 생각, 퇴직금을 털어서 2005년 ‘도서출판 기파랑’을 세웠다. 출판사 이름은 신라의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향가(鄕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서 찬양한 화랑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어두운 구름을 헤치고 나와 세상을 비추는 달의 강인함,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간 시냇물의 영원함, 그리고 겨울 찬 서리 이겨 내고 늘 푸른 빛 잃지 않는 잣나무의 불변함’을 출판사의 정신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기자가 고인을 각별히 존경했던 것도 그런 점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 총장, 검찰총장, 참모총장, 대법관 등 각 분야에서 정상까지 올라간 이들 중에는 물러난 후에도 또 다른 ‘자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언론계 출신 인사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고인은 《조선일보》 재직 당시 이런저런 자리 제안들을 물리쳤던 것은 물론이고, 퇴직한 후에는 좌경화된 출판 시장을 조금이라도 바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출판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들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 기자였다는 인연 때문에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이 대선(大選)에 처음 출마했을 때 캠프 좌장(座長) 역할을 맡았고, 때문에 세간에서는 ‘7인회’니 하는 말이 회자(膾炙)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선 이후에는 다시 ‘기파랑 사장’으로 돌아왔다. 부인 박 교수의 말처럼 고인은 ‘순수한 꿈을 좇던 영원한 소년’이었다.
 
  기파랑에서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 대한민국의 역사, 보수의 이념 등에 관한 수많은 양서들을 펴냈다. 《건국과 부국》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박정희》 《박정희 전집》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보수와 진보들도 몰랐던 건국 대통령의 삶과 죽음》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대한민국 이야기》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박정희가 옳았다》 《역사의 오른편, 옳은 편》 《권위주의적 순간》 《미국은 어떻게 망가지는가》 《3층 서기실의 암호》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등등 기파랑의 도서목록은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이념전쟁의 무기고(武器庫)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하고 밥 많이 먹어”
 
  고인은 《월간조선》도 무척 아껴 주었다. 편집장이 바뀌면 신임 편집장을 비롯한 기자들에게 저녁을 샀다. 호주가(好酒家)였던 고인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아 마시기에 급급한 자리였지만, 기자에게는 그 자리가 “자네들, 《월간조선》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잡지, 보수(保守)의 정통을 이어 가는 잡지라는 걸 잊으면 안 돼!”라고 무언(無言)의 교훈을 주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아쉽게도 기자가 편집장이 됐을 때에는 이미 고인의 건강이 많이 나빠진 후여서 그런 자리를 갖지 못했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인지’ 묻는 아들(안승환 삼성전자 상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한 삶이었던 것 같아. 사람들하고 밥 많이 먹어.”
 
  고인은 언론계의 큰 별이었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애국자였다. 건강 때문에 요양원에 들어가 계시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이 어려운 시절에, 이 땅 어딘가에 그분이 아직 계시다’는 생각만으로도 의지가 되던 분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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