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인간탐험

인보길의 기자 60년

60년 活字 세월 “심장이 활활 타올랐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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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60년, “지도자를 잘 만났다” “경제 자립 없이 언론 자유 없다” “신문은 국가를 가르치는 도구였다”
⊙ 1965년 조선일보 수습 7~9기 입사한 ‘젊은 사자들’… 4등 신문이 10년 만에 1등으로
⊙ “신문은 편집이야. 네가 짠 편집이 신문을 팔리게 만들면 그게 더 중요한 거야”(방우영)
⊙ 신년 주제 첫 도입… 1970~80년대 신문이 국가의 머리(어젠다 세팅)를 세우던 시절
⊙ 日 언론 편집·인쇄·배달 자동화 과정 보고 〈디지털 조선일보〉 창간
⊙ ‘자유의 파수꾼’ 기치로 인터넷 매체 〈뉴데일리〉 창간
⊙ ‘건국대통령 복원’ 앞장… “이승만기념관은 한갓 ‘기념’이 아니라 ‘체제 방어 기지’”

印輔吉
1940년생. 서울대 독문과·신문대학원 졸업, 美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 수료 / 《조선일보》 편집부장·문화부장·편집국장·종합미디어본부장·상무, 디지틀조선일보 창간 대표이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자유보도위원장 역임. 現 인터넷 미디어그룹 〈뉴데일리〉 〈뉴데일리TV〉 회장, 건국이념보급회장,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기념관건립위원 / 서울시문화상, 인터넷신문상, 우남애국상 등 수상. 저서 《이승만 다시보기》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 《이승만 건국여행 100장면》 등
사진=조준우
신문은 사람의 손으로 쌓아올리는 성벽 같았다. 매일매일의 활자가 벽돌이었고, 제목이 문패, 사진은 날선 시선이 되거나 여백이 되었다. 신문은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었다. 인보길(印輔吉·85) 〈뉴데일리〉 회장은 그 성을 60년이나 쌓아올린 사람이다.
 
  1965년 2월, 대학 졸업식도 하지 않은 스물다섯 살 청년이 서울 중구 태평로의 오래된 건물 계단을 올라가 ‘편집국’이라고 써붙인 문을 열었을 때, 젊은 대표가 그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신문은 편집이야.”
 
 
  “신문은 편집이야”
 
60년 전 1965년 입사 무렵 《조선일보》 편집국 얼굴들. 아래 오른쪽부터 시계방향: 안병훈(뒷날 조선일보 부사장), 이상우(한림대 총장), 인보길(뉴데일리 회장), 조병철(스포츠조선 전무), 황옥률, 배우성, 조화유(조화유영어 대표), 조영서 편집차장, 최병렬(한나라당 대표), 최일영, 이우세 편집부장.
  당시 《조선일보》는 4등 신문이었고 나라는 아직 최빈국(最貧國) 수준이었다. 박정희(朴正熙) 시대의 초입으로 아직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전, ‘독재’와 ‘근대화’가 한 몸으로 묶여 나아가던 시절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30대 젊은 대표이사(전무) 방우영(方又榮·1928~2016년)은 “신문을 갈아엎겠다”고 선언했고, 그 현장에 편집기자 인보길이 있었다.
 
  “‘신문은 편집이야’,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묶어 버렸습니다.”
 
  인보길은 그날 이후 기사보다 편집을, 현장보다 지면을 보게 되었다. 기자가 어딜 뛰어다니느냐보다, 그가 쓴 글이 다음 날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1965년 그해 《조선일보》는 취재기자만 세 번 공개채용했다. 수습(당시 견습) 7~9기다. 게다가 우리나라 언론사 최초로 사진기자, 교열기자, 업무직까지 무려 여섯 번이나 공채를 했다. 편집국의 낡은 피를 빼내고 젊은 피를 넣은 해였다. ‘기자의 꽃’이라는 편집국장이 한 기수에서 한 명 나오기도 어려운데 그 세 기수에서만 다섯이 나왔다. 회사가 한 해에 명운을 걸고 세대를 통째로 바꾼 결과다.
 
  방우영은 4·19를 거쳐 5·16을 본 세대, 독재도 민주도 다 본 젊은 사람들을 신문으로 밀어넣었다. 시대는 그들을 ‘젊은 사자들’이라 불렀다.
 
  기자는 2025년 11월 3일, 서울 중구 단암빌딩에서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의 육성을 들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김세중 홍익대 교수가 자리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보탰다. 1965년 당시 편집국의 뜨겁던 열기와 몸부림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1970년대 ‘내셔널 어젠다’의 도입, 1980년대 말~90년대 초 두 차례 지낸 편집국장의 결단, 1990년대 디지털 저널리스트로의 전환, 그리고 은퇴 후 인터넷 매체와의 만남과 이승만 탐사로 이어졌다. 한 사람의 60년이 곧 한국 근대화 60년이었다.
 
  인터뷰는 ‘천생 편집자’의 음성답게 단문(短文)으로 흘렀다. “지도자를 잘 만났다” “경제 자립 없이 언론 자유 없다” “신문은 국가를 가르치는 도구였다.” 이런 말들은 복잡한 오늘날엔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지만, 그가 몸으로 통과해 온 세대를 놓고 보면 차라리 완벽한 진술에 가깝다. 그의 말처럼 “단순 명료한 게 오래간다.”
 
 
  세 사람, 한 신문
 
  이날 인보길은 그 사흘 전 별세한 안병훈(安秉勳·1938~2025년)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前 조선일보 부사장)의 발인에 다녀온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 작고한 안병훈 대표와 아주 각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각별했지요. 제가 1965년 2월 《조선일보》 수습 7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때가 방우영 체제 첫해였습니다. 6개월 뒤에 안병훈 선배가 8기로 들어왔습니다. 학교는 그가 2년 선배인데 입사는 제가 한 기수 앞선 겁니다. 그분은 대학 졸업 후 해병대 장교로 3년을 채웠고, 저희 기수는 4·19 세대라 장면(張勉) 정부 때 군 복무가 반으로 줄어 18개월만 하고 나왔으니 먼저 입사한 거죠.”
 
  조간(朝刊)인 《조선일보》는 야근이 기본이고 새벽 퇴근이 일상이었다. 그 시간에 같이 움직이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인보길, 그보다 1년 먼저 들어온 6기 허문도(許文道·1940~2016년), 6개월 뒤 들어온 8기 안병훈, 이렇게 셋이 뭉쳐 다녔다. 선배들이 “너희 셋이 너무 붙어 다니니까 오해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 셋이 뭐 그렇게 할 얘기가 많았습니까?
 
  “신문 얘기, 나라 얘기, 먹고사는 얘기였습니다.(웃음) 그때는 그 셋이 인생의 전부였어요.”
 
  새벽 2시에 ‘시내판’이 막 찍혀 나오면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갔다. 따끈한 국물을 앞에 두고 갓 나온 《조선일보》를 펼쳤다. “오늘 사회면은 우리가 이겼다” “아니야, 사진으로 잡았어.” 이런 걸 새벽에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시각에 역시 조간인 《한국일보》 기자들도 다른 한쪽에서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해장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문을 들고 남산으로 올라갔다. 새벽 동녘이 훤해질 때까지 소주잔을 돌렸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신문이 그 길을 보여 줄 수 있지 않느냐….”
 
  말이 우국충정이지 사실은 통음(痛飮)에 가까웠다.
 
 
  입사 전쟁과 ‘토요일의 배신’
 
  ― 1960년대 중반은 문과생들의 취직이 어렵던 시절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렵다 못해 길이 없었어요. 대기업으론 은행 몇 군데, 한전,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갓 설립한(1963년) 국민은행 정도가 공채를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에 수천 명이 몰렸어요. 나도 대한일보, 경향, 서울신문, 동아, 조선, 심지어 막 생긴(1963년) 동아방송까지 다 봤습니다. 연습 삼아 보는 시험이란 건 없었어요. 다 진심이었죠.”
 
  당시 1등 신문은 동아였다. 목표는 다 동아였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 하나 있었다. 《조선일보》 면접이 토요일이고 《동아일보》 면접이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토요일에 《조선일보》 면접을 갔더니 “군대 갔다 왔어?” 한마디 묻고는 “너 남아” 하는 것이었다. 인보길, 김학준(金學俊·후에 서울대 교수, 국회의원), 송진혁(후에 《중앙일보》 편집국장) 이렇게 셋이 남았다. 사장실로 올라가 보니 방일영(方一榮·1923~2003년) 사장, 방우영 대표이사, 김경환(金庚煥·1918~1986년) 편집국장, 최석채(崔錫采·1917~1991년) 주필이 앉아 있었다. 방우영이 그 자리에서 말했다.
 
  “당신들은 합격이야. 그런데 내일 《동아일보》 면접 가면 동아도 떨어지고 우리도 떨어져. 양쪽이 신사협정을 했어. 그러니까 내일 출근해.”
 
  ―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죠. 그런데 그게 그 시대였습니다.”
 
  고민 끝에 《동아일보》에 먼저 들어가 있는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는 “《조선일보》로 가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동아는 들어가면 숨을 못 쉰다. 영남, 호남 지역패가 나눠져 젊은 기자를 조직원으로 삼으려 하지 신문기자로 키우지 않는다. 지금 시절에는 조선이 낫다. 조선 방우영이 ‘신문 혁명’을 하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는 뒤에서 헉헉대는 4등 신문이었다. 1등 동아, 2등 경향, 3등 한국. 조선은 꼴찌였다. 그런데 37살짜리 대표이사가 나타나서 “편집국을 통째로 젊게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1965년 한 해에만 수습 7·8·9기를 연달아 뽑았습니다. 그중 8기에서만 안병훈, 김대중(金大中·86), 최청림(崔靑林·1941~2016년) 셋이 편집국장을 했고, 7기에서 제가 두 번, 9기에서 주돈식(朱燉植·1937~2022년)이 나왔어요. 한 해 입사자에서 국장이 다섯이 나왔다는 건 그해 뽑은 사람들로 20~30년을 굴렸다는 뜻입니다.”
 
 
  편집의 길로 들어서다
 
1988년 10월 8일 퇴임하는 안병훈 편집국장에게 기념패를 증정하기 전에 인보길 신임 편집국장이 기념패를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취재기자를 꿈꾸며 입사한 인보길은 뜻밖에 편집기자가 됐다. 시작은 그가 택한 것이 아니었다.
 
  “제 의사가 아니었죠. 수습 때 각 부서를 2주씩 도는데, 외신부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외신부 차장이 리영희(李泳禧·1929~2010년)씨였는데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어 봐라’고 주기도 했죠. 어느 날 김경환 편집국장이 부르더니 ‘너는 편집부다’ 합니다. ‘저는 취재…’ 했더니 ‘대표 지시다’로 끝났어요.”
 
  얼마 안 지나 방우영 대표가 점심에 불렀다. 편집국장, 편집부장을 같이 앉혀 놓고 이렇게 말했다.
 
  “신문은 편집이야. 기사만 잘 써서는 안 돼. 네가 짠 편집이 신문을 팔리게 만들면 그게 더 중요한 거야. 일본 신문 봐라. 일본말 공부해라. 편집론도 봐라.”
 
  그때 알았다. 이 사람은 신문을 ‘기사 모아 놓은 종이’로 보는 게 아니라 ‘설계된 구조물’로 본다는 것을. 그 뒤로 인보길의 눈엔 현장보다 지면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피가 수혈되고 새 바람이 불면서 《조선일보》의 장기 발전의 초석이 놓였다. 유가지(有價紙) 발행 부수도 크게 늘어 1965년 11월 1일 20만2077부를 기록했다. 1920년 창간한 지 45년 만에 발행 부수 20만 부를 돌파한 것이었다.
 
  “그때 기자 월급이 3000원이었어요. 한 달 점심값이 안 됐습니다. 중국집에서 외상 먹으면 월급날 며칠 전부터 주인이 편집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시절이었죠. 입사하고 몇 해 뒤 안병훈 선배 주도로 ‘젊은 사자들’이 편집국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요구 사항은 간단했습니다. 첫째, 월급을 올려라. 둘째, 기사에 정부 눈치 보며 손 좀 대지 마라.”
 
  그때 방우영이 편집국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뭣들 하는 거야! 신문 만들어!”
 
  그러고는 일장 연설을 했다.
 
  “너희가 신문을 잘 만들어서 신문이 팔리면 돈이 들어올 거 아니야. 그러면 내가 월급 올려 줄게. 언론 자유? 언론 자유는 돈이 있어야 돼. 회사 재정이 자립하지 못하면 자유도 없어. 은행 돈 꾸고 사채 얻어다가 신문용지 대는 회사가 무슨 소리를 하겠냐.”
 
  다들 조용해졌다. 그 말이 너무 현실이었으니까. 인보길은 그때 크게 하나를 배웠다.
 
  “회사가 부자가 돼야 언론 자유도 부자가 된다-이건 지금도 제 언론관(觀)의 뿌리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나라 전체도 그렇습니다. 나라 재정이 튼튼해야 국민의 자유도 풀어 줄 수 있는 거예요. 신문도 똑같습니다.”
 
  그 이후로 《조선일보》는 실제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입사한 지 10년 만에 1등 신문이 됐다. 1973년 발행 부수 56만 부, 1974년 급여와 상여금 대폭 인상, 1979년 100만 부 달성. “내 집 팔아서 댄다 해도 몇 달 못 버틴다”며 “신문 팔리면 월급 올려 줄게” 한 사장도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게 ‘방우영 방식’이었어요. 감성으로 가르쳐 놓고 숫자로 확인시키는.”
 
  이 무렵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00만 부 돌파를 앞당기기 위한 조치로 편집기자들을 일본에 연수 보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편집 기술 정보를 얻도록 했다. 1974년 5월부터 3주씩 3차에 걸쳐 《마이니치신문》 등에서 연수가 이뤄졌다. 기자들은 일본의 편집 기술을 한국과 비교 연구하고 신문 제작 공정과 다른 업무와의 관련성을 조사했다.
 
 
  ‘내셔널 어젠다’ 세팅, 신문이 나라의 머리를 정하던 시절
 
1974년 《조선일보》 신년호 특집 1면에 실린 첫 신년주제 ‘갈등은 해소돼야 한다’.
  인보길은 1969년 서울대 신문대학원에 입학해 ‘내셔널 어젠다 세팅(National Agenda Setting)’ 같은 개념을 처음 접했다. 그런데 그걸 실제로 구현한 사람은 방우영 대표였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전국이 ‘독재 타도’ 투쟁으로 들끓기 시작했죠. 그전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유신 반대’ 분위기로 번졌습니다. 언론 입장에서는 난감한 시기였어요. 신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모두가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사장이 된 방우영이 편집국 간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말했다.
 
  “우리 신문도 방향을 정하자. 1년 동안 테마를 정해서 그 주제를 중심으로 신문을 만들어 가자. 국민 계몽에도 도움이 되고, 혼란스러운 민심을 다독이는 데도 필요하다. 정부와 군(軍)의 경직된 사고를 조금은 풀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조선일보》는 20여 년간 새해마다 ‘신년 주제’를 정해 1년 내내 그 테마를 중심으로 신문을 꾸려 나갔다. 신년 주제 초안을 짜내는 일은 편집부 차장 인보길의 몫이었다.
 
  인보길은 “그 시절 신년 주제들이 뭐였는지 조사해 보고, 그 내용을 메모해 두었다”면서 메모를 건넸다.
 
  〈1974년: 갈등은 해소돼야 한다
  1975년: 단절은 이어져야 한다
  1976년: 나와 우리는 재발견되어야 한다
  1977년: 한국인으로서의 말과 한국인으로서의 행동
  1978년: 역사의 뿌리 위에 새 민족상을 세우자
  1979년: 분수는 지켜져야 한다
  1980년: 역사는 순리로 흘러가야 한다
  1981년: 참여와 반대는 공존해야 한다
  1982년: 부정적 역사의식을 벗어나야 한다
  1983년: 극일(克日)의 길-일본을 알자
  1984년: 정성을 다해 정해진 대로 최선을!
  1985년: 한민족의 동질성은 회복돼야 한다
  1986년: 깨어야 아침을 본다
  1987년: 중간층이 이끄는 사회를 만들자
  1988년: 민주 시민이 이끄는 사회
  1989년: 더불어 사는 사회
  1990년: 경제도 민주화도 다시 뛰자〉

 
  “대개 주제가 ‘~해야 한다’로 끝났죠. 이게 우연이 아니고 의도입니다. 여기에는 유신에 반발하는 국민, 할 말은 없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관료, 그리고 기업, 이 세 층을 신문이 한 문장으로 다 부르는 겁니다. 제가 초안으로 만들면 방 사장이 ‘이건 너무 세’ ‘이건 너무 좁아’ ‘이건 더 부드럽게’ 하면서 고치라고 하고, 그걸 또 선우휘(鮮于煇·1922~1986년) 주필이 만져서 내보내는 식이었어요.”
 
  사장, 주필, 30대 편집기자가 한 문장 쓰려고 밤을 새우던 시절이었다.
 
  “그게 1970~90년대 《조선일보》의 각종 캠페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두 번째 편집국장을 할 무렵 ‘쓰레기를 줄입시다’ ‘샛강을 살립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나중에는 ‘이승만과 나라세우기’까지, 《조선일보》가 먼저 던지면 사회가 따라오는 구조였죠. 그걸 저는 ‘신문 리더십’이라고 지금도 부릅니다. 신문이 톤을 정하면 정부 회의 자료가 그 톤을 따라오던 시절이 실제로 있었어요.”
 
 
  名제목 ‘與小野大’
 
  ― 직접 단 제목 중에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게 뭡니까?
 
  “‘여소야대(與小野大)’죠. 1988년 총선 때입니다. 6·29 선언 이후로 야당 바람이 세게 불었고 실제로 개표가 그렇게 나왔어요. 저는 편집국 부국장이었고 안병훈 당시 편집국장이 ‘빨리 제목 붙여!’ 하는데, 한밤에 무슨 미사여구 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숫자가 여당이 적고 야당이 많았으니 그냥 ‘여소야대’라고 쓴 겁니다. 다음 날 신문들 보니까 ‘야강여약(野强與弱)’ ‘야다여소(野多與少)’ 이런 것도 있었어요. 그런데 남은 건 ‘여소야대’였습니다.”
 
  ― 왜 그게 남았을까요?
 
  “단순하니까. 평이한 게 오래 갑니다. 신문 제목은 장식이 아니고 이름 붙이기니까요.”
 
  역시나 단문들로 답이 돌아왔다.
 
  1988년 10월 4일, 서울올림픽이 끝나던 날 그는 편집국장 발령을 받았다. 그 직전에 벤 존슨 약물 사건이 있었는데, 보도하느냐 마느냐로 밤새 싸우다가 안병훈 당시 국장이 “특종이다, 보도해라” 해서 1면 톱으로 나갔다.
 
  “그게 편집국장 안병훈의 마지막 큰 결단이었어요. 왜 ‘마지막’이냐. 그 보도로 88올림픽 열기를 우리 스스로 꺾을 수 있었으니까요.”
 
  인보길은 1989년 5월 24일까지, 그리고 다시 1992년 1월 15일부터 1995년 3월 9일까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두 차례나 편집국장을 맡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국장이 되고 보니 진짜 ‘전쟁’이 시작됐어요. 5공 청문회, 언론노조 결성, 제작 거부 사태… 편집국이 매일 대치장이었습니다. 올림픽으로 눌려 있던 것들이 올림픽 끝나니까 폭발한 거죠요. 게다가 여소야대 상황이라 5공 청문회에다가, 언론사 노조 설립 붐까지 일었습니다. 그걸 노무현·이해찬 당시 국회의원들이 부추겼습니다. ‘노조를 설립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당이 언론을 잡을 수 있다’고 했죠. 여기저기 언론사 노조가 설립되는 와중에 주요 언론사 사주(社主)들이 국회 청문회에 나가 증언을 해야 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예상되는 질문을 뽑아 답변 리허설까지 하고 난리를 쳤습니다. 노조가 제작 거부를 하니, 제가 그만둘 때까지 완전히 노사(勞使) 투쟁이었습니다.”
 
 
  ‘《조선일보》는 촌지를 받지 않습니다’
 
  신문이란 건 잉크가 마르기 전에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잉크는 종이신문의 피[血]다. 1980년대 후반, 인보길은 그 피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와중에 신문 1면에 이상한 사고(社告)를 하나 냈다.
 
  ‘《조선일보》 기자는 촌지를 받지 않습니다.’
 
  출입처 나가는 기자들 양복 안주머니에 ‘봉투’ 들어오는 게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말로만 “받지 마라” 하면 안 믿는다. 그래서 신문으로 박아 버린 것이다.
 
  “그랬더니 저보고 ‘돈 안 받는 국장’이라고 했어요. 안팎으로 반발도 컸지만, 신문이 독자에게 신뢰를 팔아야 먹고사는 직업인데 그걸 안 하면 우리가 기자가 아니죠. ‘신문이 신뢰받으려면 피를 한번 흘려야 한다.’ 그때 제가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지 7개월여 만에 그는 물러났다.
 
  “인책(引責) 의미였죠.”
 
  그는 담담히 말했다. 노조 설립 압박이 거셌고, 신문사는 격랑 속에 있었다. 편집국장은 그 격랑을 최일선에서 맞는 얼굴이었다.
 
  “저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회사가 노조를 상대해야 하는데, 저 같은 물러 터진 사람으로는 안 된다고 저도 회사도 판단했어요.”
 
  그의 퇴진은 조직의 열을 식히기 위한 국면 전환용이었다. 김대중이 새 편집국장으로 취임하고 그는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필은 공석이고 이규태(李圭泰·1933~2006년) 선배가 논설주간(主幹)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집에 머물며 쉼을 얻었다. “몸도 마음도 지쳤죠.”
 
 
  “이제 신문을 컴퓨터로 만들어야 합니다”
 
  논설위원으로 있던 어느 날, 방상훈(方相勳) 부사장(現 회장)이 말했다.
 
  “이제 신문을 컴퓨터로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노트북은커녕 사무실에 데스크톱조차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CTS(Computerized Type Setting System)’, 즉 컴퓨터 기반 신문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볼펜의 딸깍거림이 편집국의 리듬이던 시절이지만 시대는 이미 다른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방우영 사장이 “같이 일본에 가자”며 인보길의 손을 끌었다. 위로의 여행인 줄 알았다. 총무부장 정규만과 셋이서 떠났다. 비행기 안에서도 방 사장은 신문을 접어 읽고 있었다. 호텔 예약, 식당, 열차표까지 모두 일본어에 능한 방 사장이 손수 해결했다. 방 사장이 말했다.
 
  “일본은 이제 신문을 컴퓨터로 만든다. 우리도 배워야 한다.”
 
  그 한마디가 《조선일보》의 체질은 물론 인보길 기자 60년의 후반기를 통째로 바꿨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인보길은 일본 신문사 33곳을 돌았다.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최남단 규슈의 가고시마까지, 기차를 타고 일본을 종단했다.
 
  “신문사마다 우리가 미리 보낸 질문에 대한 답변서, 인쇄 견본, CTS 매뉴얼이 정돈돼 있었어요. 일본 특유의 ‘질서와 예의’가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느낌이었죠.”
 
 
  “서울올림픽 때문입니다”
 
  그가 일본 신문사들에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왜 CTS를 도입했습니까?”
 
  대답은 거의 같았다. “서울올림픽 때문입니다.”
 
  1982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를 정하던 날, 예상을 깨고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제쳤다.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서울이 이겼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했다. 그때부터 일본 언론은 스스로를 갈아엎었다. 송고(送稿)부터 편집, 인쇄, 배달까지 전 과정을 자동화했다. 주요 신문사의 도쿄 본사와 나고야, 오사카, 규슈, 홋카이도의 인쇄소가 하나의 신경망으로 묶였다. 밤새 데이터가 이동했고, 새벽이면 동일한 신문이 일본 열도에 뿌려졌다. 열차 대신 전선(電線)이 신문을 운반했다. 신문의 언어가 ‘컴퓨터 언어’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인보길은 정신이 번쩍 들어 돌아와서 말했다. “이제 우리도 해야 합니다.”
 
  방우영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맡아라.”
 

  사내에 CTS본부가 만들어져 인보길이 본부장이 됐다. 그는 일본의 시스템부터 한글화했다.
 
  “일본어는 한자가 많아 키보드 입력이 불편했지만, 한글은 다르죠. ‘입력 효율’ 면에서는 우리가 훨씬 앞섭니다. 《조선일보》는 일본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한국적 환경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했습니다. 한글은 세종대왕 덕분에 세계 최고의 전산 언어입니다.”
 
  그는 믿었다. 한글의 자모(子母)는 전자 신호처럼 조합되고 분해된다. 그 단순함이 디지털의 언어였다.
 
  1992년, 《조선일보》의 CTS화가 완성됐다. 그는 갓 나온 신문을 손에 쥐었다. 컴퓨터 모니터에서부터 잉크의 냄새가 났다.
 
 
  “신문은 바뀌어야 합니다”
 
1994년 12월 16일 《조선일보》 평촌사옥 준공식을 마치고 방우영(앞줄 오른쪽부터) 회장과 방상훈 사장, 이인제 의원 등 참석자들이 새로 설비한 최신식 윤전기에서 인쇄되어 나오는 신문을 펼쳐 보고 있다. 앞줄 왼쪽 끝이 인보길 편집국장.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CTS본부는 곧 종합미디어본부로 바뀌었다. 신문은 종이에서 벗어나 전파와 영상, 그리고 빛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이후 그는 일본을 수십 번 더 드나들며 언론의 미래를 보았다. 기술의 시대를 사람의 언어로 배우며 CTS를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활판(活版)의 쇳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그는 ‘문명의 심장 박동’이라 불렀다. 《조선일보》는 이제 그 박동과 함께 숨을 쉬었다. 그 숨결은 한국 언론의 미래가 되었다.
 
  CTS가 본격 가동되자 회사는 조용히 흔들렸다. 공무국(工務局)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조판(組版)을 하던 사람들은 기초적인 컴퓨터 교육을 받아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납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제자(製字), 원고지를 보며 활자를 뽑는 문선(文選)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많이 미움 받았습니다. 나를 염라대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는 담담히 말했다. 기술의 진보는 늘 희생을 요구했다. 그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활자(活字)가 전자(電子)로, 사람의 노동이 전기로 대체되는 그 과정에서 그는 죄책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다. 신문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내보내야 했다. 그것이 냉정한 현실이었다.
 
 
  신문의 두 번째 숨결-환경, 정보화, 그리고 인간의 책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정보화 캠페인을 한창 벌일 때인 1994년 12월 《조선일보》 초청으로 방한한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 오른쪽부터 방상훈 사장, 게이츠, 안병훈 전무, 인보길 편집국장.
  《조선일보》의 CTS가 완성된 1992년, 인보길은 다시 편집국장 자리에 앉았다. 신문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변해 있었다. 활자가 사라진 자리에 전자가 들어섰다. 그러나 기계는 인간의 손끝을 대신했지만 인간의 마음까지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을 해야 했다.
 
  그 시절 방우영 회장(당시 사장 방상훈)은 매주 화요일마다 편집회의를 열었다. 회의라기보다 일종의 정신훈련이었다. 방 회장은 일주일 동안 세상을 관찰하며 생각을 쌓았고, 화요일마다 그것을 꺼내놓았다. 그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영감’이었다.
 
《조선일보》 1992년 8월 17일 자 환경 상징 마크 제정을 알리는 사고.
  어느 날 수원 근교 저수지에 낚시를 갔다가 돌아온 방 회장이 회의 자리에서 “낚싯대보다 쓰레기가 더 많더라”며 한마디 던졌다.
 
  “이건 자연의 죽음이야. 우리가 치워야 해.”
 
  ‘쓰레기를 줄입시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조선일보》 1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문장은 간결했으나 강렬했다. 《조선일보》는 그 문장을 사회적 캠페인으로 바꾸었다. 환경운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만든 것이다. 지금의 쓰레기 분리수거는 그 결과다.
 
  ‘신문은 세상을 깨우는 도구다.’
 
  인보길은 그렇게 믿었다. 방우영이 아이디어를 던졌고, 안병훈(당시 전무)과 인보길이 그것을 기사와 행동으로 옮겼다. 둘은 야구의 배터리처럼 움직였다. 한 명이 던지면 한 명이 받았다. 신문사는 운동장이 되었고 기자들은 사회의 근육이 되었다.
 
  1994년 《조선일보》는 다시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1면 박스의 그 헤드라인은 이진광 기자(훗날 〈뉴데일리〉 사장)의 작품이었다. 한 줄의 문장이 시대의 선언문이 됐다. 그 문장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 언어가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하고 행정의 전산화를 추진했다.
 
  “언론이 던진 문장이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신문은 더 이상 종이 위의 기록이 아니었다. 전선 위를 흐르는 전류였다. 그 전류가 사회를 바꾸었다. 그는 그것을 ‘언론의 두 번째 숨결’이라 불렀다.
 
 
  디지털 신문, 그리고 편집의 정신
 
1995년 10월 당시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오른쪽)이 두 차례나 편집국장을 시킨 인보길에게 한국 최초 인터넷 신문사 ‘디지틀조선일보’ 대표를 맡기면서 공로패를 주고 격려했다.
  ― 기자의 왕도(王道)는 무엇입니까?
 
  “진심(眞心)이 왕도라고 할까요. 기자로서 진실 보도, 사실 보도가 언론의 정도(正道)임은 상식입니다만, 취재·편집 과정뿐 아니라 사내(社內) 운영이나 취재원과의 소통까지 최대의 무기는 소박한 단어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이면 안 통하는 데가 없이 사통팔달이죠. ‘나라를 위한 진심’, 애국심, 상호 신뢰 그 자체가 기자의 길입니다. 나중에 보니 이승만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했더군요.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관철하고서 ‘정의와 진리는 항상 승리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정보화라는 큰 물결 속에서 《조선일보》는 누구보다 앞장서 그 견인차 역할을 했다. 소장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를 선도적으로 수행했고, 정보화 강국 대한민국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1995년에 《조선일보》가 또 한 번 ‘무모한’ 일을 했다. ‘디지털 조선일보’를 만든 것이다. 국내에 ‘인터넷 신문’이라는 말 자체가 없을 때였다. “종이만으로는 안 된다. 새 매체까지 우리가 하겠다”고 해서 회사를 하나 더 만들었다. 디지틀조선일보. 초대 사장이 인보길이었다. 종이신문 만들기 30년에 이어 인터넷 신문 만들기 30년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지도자를 잘 만났다!”
 
1995년 3월 10일 인보길 편집국장의 이임식과 최청림 국장의 취임식. 방상훈 사장(왼쪽)이 최 신임 국장과 악수하고 있다.
  1995년 11월 16일, ‘조선닷컴’이 문을 열었다. 첫날 접속자 8000명. 신문은 종이를 떠나 전기로 옮겨갔지만, 그가 배운 ‘편집의 정신’은 그대로였다.
 
  “그때도 제 생각은 같았습니다. ‘종이든 인터넷이든 신문은 편집이다.’ 위에 뭘 올리고, 어떤 순서로 보여 주고, 어디에 굵은 제목을 달고, 어디서부터 사람을 아래로 끌고 내려가느냐, 그게 신문입니다. 기술이 모양을 바꿨을 뿐 구조는 같습니다. 1965년에 방우영 대표가 제 머리에 넣어 준 걸 30년 지나 1995년에 인터넷으로 옮긴 셈이죠.”
 
  인보길이 디지틀조선일보 사장 퇴임 후 잠깐 《조선일보》 편집부에 돌아가 새까만 후배들 틈에서 손수 사회1면을 컴퓨터로 편집한 일은 유명하다. 그는 2005년 인터넷 매체 〈뉴데일리〉, 이어 〈뉴데일리TV〉를 잇달아 만들고, 다시 이승만으로 돌아갔다.
 
  ― 기자 60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신다면요?
 
  인보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도자를 잘 만났다! 이 말이 먼저 나옵니다. 저한테는 두 사람이 지도자였습니다. 언론에서는 방우영, 국가에서는 박정희. 이 둘은 우리 현대사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우영은 발행인이면서 선생이었어요. 취재부 가겠다는 저를 억지로 편집부에 박아 놓고 편집·보도의 특훈을 시켰습니다. 특히 ‘내셔널 어젠다 세팅’ 이걸 가르쳐 줬습니다. ‘신문 편집이 사회 문제는 물론 국가 진로까지 조종하는 키워드 창조 작업이다’ 그걸 깨닫게 해준 거예요.
 
  그 길로 박정희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폭군’으로만 보이던 사람이 ‘고속으로 달리게 만든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이 깔아 놓은 근대국가의 철길 위로 박정희의 열차가 달렸고, 우리는 신문으로 그 옆에서 국민을 끌어올린 셈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정치만의 역사가 아니고, 언론도 네이션 빌딩에 참여한 역사라는 겁니다.”
 
 
  ‘자유의 파수꾼’ 깃발을 흔들며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는 2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전을 개최했다. 당시 편집국장으로 특집 지면을 만든 인보길에게 이승만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기자 60년, 그는 운명론을 믿을까?
 
  “나는 운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조선일보》에 들어온 것은 복이었습니다.”
 
  복이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의 총량이기도 하다. 그는 덧붙였다.
 
  “신문은 내게 세상을 견디게 해준 방편이었습니다.”
 
  ― 〈뉴데일리〉의 사시(社是)와 편집 방향에서 ‘팩트’와 ‘논평’의 경계는 어떻습니까?
 
  “미국과 유럽 언론에서 기사의 ‘경계’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팩트 따로, 논평 따로가 아니고 리포팅(reporting)과 해설(interpretation)을 버무려 경쟁력을 극대화하고 있잖습니까. 우리 〈뉴데일리〉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유민주, 시장경제, 자유통일이라는 사시의 편집 원칙이 반드시 적용되지 않으면 〈뉴데일리〉의 존재 이유가 없어집니다. 특히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만 그럴수록 〈뉴데일리〉는 ‘자유의 파수꾼’ 깃발을 흔들며 정도·정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 정치적 리스크를 뚫는 데스킹 비법이 있습니까?
 
  “있지요. 기업 기밀입니다.(웃음) 제일 좋은 건 정면돌파입니다. 대통령이 ‘박정희처럼 AI 고속도로 깔겠다’고 연설했는데 예산은 민생 쿠폰보다 적게 잡혀 있으면 그걸 1면에 그대로 써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데 포장을 같이 해주면 그게 공범(共犯) 보도죠.”
 
  인보길은 최근 몇 년 사이 《이승만 다시보기》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 《이승만 건국여행 100장면》 등을 펴냈고,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미국의 이승만 독립투쟁〉 등을 제작하는 한편, 〈뉴데일리〉 인터넷판에 2년 3개월 동안 114회에 걸쳐 〈이승만 건국사〉를 연재했다.
 
  ― 왜 기자 60년에 다시 이승만입니까?
 
  “은퇴한 다음에 내가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이승만 역사 복원입니다. 15년째 ‘이승만 포럼’을 하고 있어요. 건국 77주년이 지나도록 건국대통령 기념관 하나 없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뺀 겁니다. 4·19 이후 여러 세력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다’는 프레임을 퍼뜨렸고, 그게 지금도 통합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기념관은 선진 대한민국의 5천만 국민의 마음을 모아 쌓는 국민통합의 상징물입니다.”
 
인보길이 깨달은 이승만의 ‘자유’
 
  어떤 이들은 인보길을 ‘언론 자유 선언’을 읽은 인물로 기억한다.
 
  1970년대 초, 언론계에 자유 선언의 바람이 불었다. 《조선일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사회부 차장 이도형(李度珩·1933~2020년)이 말했다.
 
  “인보길, 네가 읽어라.”
 
  연단에 선 그는 무엇을 읽는지도 모른 채 ‘자유’를 외쳤다. 그때의 자유는 막연했다. 감옥의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20여 년 뒤 이승만을 공부하고 나서야 그는 그 단어의 무게를 이해했다.
 
  “이승만은 자유를 두 번 체험한 사람입니다. 한 번은 미국을 알고, 또 한 번은 한성감옥에서 루터를 알고.”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미국의 자유를 만났고, 한성감옥에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가 깨달은 자유를 읽었다. 이승만에게 자유는 하늘의 선물이 아니라 의식이 깨어 쟁취하는 리버티(Liberty)였다. 그는 그 자유를 국민에게 나누려 했다.
 
  ‘백성의 의식을 깨워 국민으로 만들자.’
 
  그것이 이승만의 신념이었다고 인보길은 말한다.
 
  “자유와 진실은 항상 이긴다!”
 
제공=파카(PARKER) 만년필
  ― 60년 기자 외길을 버티게 한 체력, 루틴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디서든 눈 감으면 잡니다. 운동은 지하철 계단 오르내리는 게 전부고요. 젊을 땐 야근이 많으니까 아내가 인삼꿀차, 마늘꿀범벅 이런 걸 해줬어요. 그게 영양제 다였습니다. 새벽에 깨면 지금도 종이신문 《조선일보》부터 봅니다. 그리고 기도. 중2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쉰 넘어서 이승만의 한성감옥 회심(回心)을 읽으면서 ‘나도 성령 받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게 지금도 저를 움직입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 입사한 수습기자에게 한 줄만 주신다면요.
 
  그가 천천히 말했다.
 
  “일과 사랑에 정성을 아끼지 말라! 자유와 진실은 항상 이긴다!”
 
  늙지 않는 기자 인보길, 인터넷 매체의 회장인 그에게선 여전히 신문 잉크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 속에는 청진동 해장국의 모락모락 김과 남산 새벽 바람, 안병훈과 허문도, 처음 그를 향해 “신문은 편집이야”라고 말했던 젊은 발행인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말을 지키고 있다. 신문은 편집이라고. 그리고, 편집은 결국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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