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러시아 北 노동자 감시하던 보위대장 출신 김명철(가명)씨

“벌목공 80~90%가 軍 출신… 전투 동원됐을 가능성 많아”

  •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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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에 사망하면 사체보관실 대신 산에서 삶아 뼈만 추려”
⊙ “러시아어 공부하면 감시 대상… 탈북 시도자 왕왕 있어”
⊙ “벌목 ‘지구’당 매달 200명 이상 사망… 돼지머리 구해 고사 올리기도”
⊙ “김정은이 파병 전사자 애도? 진심이라면 벌써 통일됐을 것”
⊙ “죽어서도 제때 집으로 못 가고 머릿수 찰 때까지 기다려야”
5년간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벌목 노동자들을 감시했던 보위대장 출신 김씨. 사진=월간조선
지금 러시아에는 북한군의 시신이 넘쳐 난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 1년째.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1만 5000명이 파병됐다고 했지만, 복수(複數)의 대북(對北) 소식통들은 최대 7만 명까지도 추산한다. 이들은 “이 중 전사자 규모만 1만 3500명에 달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규모 전사자가 발생하면 시신 처리 문제가 뒤따른다. 북한으로 온전히 송환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다. 대부분 반(反)인륜적인 방식으로 처리된다. 현지 한 대북 소식통은 “특히 지금 같은 여름철엔 부패 직전 전사자를 삶아 뼈만 추려 내기도 한다”고 했다.
 
  김명철(가명)씨도 같은 말을 했다. 비단 북한군뿐만이 아니라, 벌목 노동자의 시신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김씨는 북한군 대위 출신으로, 10여 년 전 러시아에서 북한 벌목공의 사상 교양과 감시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노동자가 여름에 사망하면 사체(死體)보관실로 옮기지 않고 산속에서 삶았다”고 했다.
 
  그간 탈북 벌목공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을 전한 적은 있었지만 관리자급의 증언은 거의 없었다. 김씨는 “벌목공 개개인 차원에서는 볼 수 없는 야만적 행태를 직접 목격했다”면서 “파견 현장에서는 상상 이상의 참혹한 일이 자행된다”고 했다. 지난 8월 29일 그를 만나 러시아 파견 인원의 실태를 들어 봤다. 신원 보호를 위해 김씨의 구체적인 근무 시기와 탈북 시점은 밝히지 않는다.
 
  ― 어느 지역에서 어떤 업무를 했나?
 
  “재러 임업종합1지구에서 5년 동안 벌목공들을 감시했다. 1지구는 1958년부터 시베리아 동부에 있었고, 그 뒤 생긴 2지구는 시베리아 남동부 치타 지역에 있었다. 북한은 큰 기업에는 1급, 2급, 3급 이런 식으로 급수를 매긴다. 2급 이상이면 무장 병력이 따른다. 러시아 파견도 그런 차원이었다. 군(軍) 출신 청년 몇 명을 뽑아 보위대를 만들고, 간부 격인 대장마다 4~5명의 대원을 붙였다. 내 직책은 보위대장이었고, 파견 노동자들의 불법행위를 통제했다.”
 
  ― 불법행위라 함은 어떤 건가?
 
  “러시아 사람들과의 암거래, 밀주(密酒) 생산, 곰열(웅담) 혹은 사향 채취 등이다. 노동자가 근무지를 이탈하면 추격하기도 했다.”
 
 
  “1지구당 노동자 7000명가량”
 
러시아 하산 출입국관리소 앞의 북한 벌목공들. 사진=조선DB
  1지구에는 모두 10개 사업소가 있었다. 한 사업소당 노동자는 600명 이상이었다. 1지구만 해도 전체 인원이 약 7000명에 달한 셈이다. 사업소들은 기찻길을 따라 50~100km 간격으로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그중 3사업소에서 근무했다. 각 사업소는 다시 5~6개 중대로 편성됐다. 벌목을 담당하는 중대 외 송진 생산 전문 중대와 목재를 차량에 실어 운반하는 운재(運材)중대, 이를 기차에 상차(上車)하는 전담 중대도 있었다.
 
  “3사업소는 ‘홍콩시장’으로 불렸다. 다른 사업소는 러시아 사람 보기도 힘들었는데, 3사업소는 교류가 많았다. 그러니 온갖 암거래가 발생했고, 그런 별칭이 붙었다. 러시아는 정부 규제로 술을 정해진 시간에만 판다. 술을 못 산 러시아인들이 우리 사업소로 몰려왔다. 한국말로 ‘술, 술’ 하면서 돈을 꺼냈다. 알고 보니 우리 애들이 몰래 담근 술을 시장가의 5배에 팔고 있었다. 술은 산에서 몰래 증류했다. 러시아 산엔 사냥꾼들이 만들어 놓은 막(幕)이 많다. 이놈들이 쌀을 메고 들어가 그 안에서 누룩부터 잡아 술을 빚은 거였다. 도수는 40~50% 정도였고.”
 
  ― 곰쓸개와 사향도 러시아인에게 팔았나?
 
  “그건 북한 밀반입용이었다. 북한엔 약도 없고, 사향 같은 게 중풍이나 뇌출혈 환자에게 좋다고 소문났다. 북러 협정상 현지 사냥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지만 버젓이 자행됐다. 송진중대를 따라 들어가면 원시림(原始林)이 나온다. 그곳 개울가, 사향노루가 이끼 먹는 자리에 일본제 와이어로프 올가미를 수백 개 놔두는 방식이다. 하루는 갔더니 물 마시러 내려온 사향노루 수백 마리가 걸려 있었다. 사향 하나 값이 TV 한 대 값이었다. 곰쓸개도 마찬가지. 부르는 게 값이었고, 채취한 뒤 사업소 간부에게 뇌물을 먹이면 눈감아 줬다.”
 
 
  “러시아어만 공부해도 脫北 기도로 간주”
 
  ― 뇌물을 받아 본 적이 있나?
 
  “뇌물은 내 위 계급인 안전부장이나 사업소 초급 당(黨) 조직비서들이 챙겼다. 그렇게 입막음을 한 뒤 북한으로 들여갔다. 사향과 곰쓸개는 잘 말려 100개들이 러시아제 세탁비누 안에 숨겼다. 하나씩 파내어 넣으면 단속에도 걸리지 않았다. 개가 와서 냄새를 맡아도 몰랐다.”
 
  ― 불법행위로 적발되면 어떻게 되나?
 
  “술 장사나 암거래 했다고 감옥 가거나 그러진 않았다. 가장 죄질이 무거운 건 사업소 이탈이었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북한으로 송환됐다.”
 

  ― 탈북 시도하는 벌목공들이 많았나?
 
  “거기선 ‘탈북’이라는 말을 안 썼다. 노동자들 사이에 ‘여기서 탈북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지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방불명자’라 불렀다.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현지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면 곧바로 감시 대상이 됐다. 그 자체를 탈주 기도로 간주했다.”
 
  ― 북한에서 제1외국어가 러시아어 아닌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더라도, 현지에서 따로 공부하는 건 문제삼았다. 이미 러시아어를 잘해서 써먹는 건 괜찮았지만 추가로 공부하는 건 수상하다고 여겼다. 시키는 일이나 하면 되지, 여기 와서 왜 언어를 배우느냐는 식이었다. 기이한 사고방식이다.”
 
  ― 러시아에서는 자기네 땅에서 북한 사람들이 곰쓸개와 사향을 채취하는 걸 모르나?
 
  “단속에 걸리면 러시아 법으로 처벌한다고 했는데, 한 번도 그런 사례는 없었다. 그 넓은 땅을 일일이 수색하는 게 어려우니 엄두를 안 내는 것 같았다. 우리도 ‘어디서 술을 담근다더라’ 해서 가보면 기본이 100~200km 떨어진 곳이었다. 그 일대가 워낙 험준한 지역이기도 하다. 잘못 들어갔다가 길 잃으면 죽기 십상이다.”
 
 
  “인권이라는 말 자체를 몰라”
 
러시아 땅은 영구동결층이 있어 나무 뿌리가 옆으로 퍼진다. 그래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나무가 쓰러진다. 사진은 러시아의 벌목 현장. 사진=조선 DB
  ― 작업 환경이 워낙 험해 사망하는 노동자들도 많다고 들었다.
 
  “우리 사업소 4중대장이 ‘공훈(功勳)벌목공’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중대장 아래서도 한 달에 4명쯤씩 사망자가 나왔다. 사업소당 중대가 5~6개고 1지구에 10개 사업소가 있었으니, 어림잡아도 매달 2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 셈이다. 2지구까지 합하면 더 많겠지. 어떤 날은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중대장이 돼지머리를 구해 제(祭·고사를 말함)를 올리기도 했다.
 
  러시아 땅은 영구동결층이 있어 나무뿌리가 수직으로 뻗는 게 아니라 옆으로 퍼진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나무가 휘청거리는 이유다. 때문에 산림 규정에 따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임업이 금지되는데, 우리는 그런 거 없었다. 무조건 일을 시킨다. 그러니 나무에 깔려 죽을 수밖에.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다리가 부러진 벌목공이 동원되기도 했다. 운재중대에서는 내리막을 내려오다가 브레이크를 밟아 나무가 앞으로 다 쏟아지며 압사하는 사례가 많았다.”
 
  ― 인권이라는 게 없네요.
 
  “인권? 그들은 인권이라는 말 자체를 모른다. 애초에 그런 개념이 없으니까. 그건 탈북하고서야 선교사들에게 처음으로 듣는 단어다.”
 
  ― 사망자는 어떻게 처리했나?
 
  “규모가 있는 사업소에는 사체보관실과 관리자가 하나씩 있었다. 우리 사업소에서는 동혁(가명)이라는 친구가 사체를 관리했는데, 시체 사진을 찍어 주검 위에 올려 두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편 규모가 작은 사업소에는 사체보관실과 관리자가 따로 없었다. 겨울이면 시체를 차에 싣고 타 사업소 사체보관실에 옮기면 됐는데, 지금과 같은 여름이 문제였다. 그 지방은 여름철엔 차가 못 다닌다. 진벌인 표면층이 녹아 바퀴가 쑥쑥 빠져서다. 그 시기엔 사람들도 ‘사포기(cапоги·장화)’를 신고 다녀야 한다.”
 
 
  사체 처리법
 
  ― 사체보관실로 못 옮기는 시체는 어떻게 되나?
 
  “그 지역은 여름철에도 땅을 20cm만 파면 영구동결층이 나온다. 우선은 거기다 시체를 뉘어 놨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사업소 지배인에게 보고된다. 지배인은 아래 직원 2명을 불러 술 한 상자를 건네며 ‘시체 처리하고 오라’고 지시한다. 상자에는 40도짜리 술 12병이 들어 있다. 둘은 시체와 술, 도구를 챙겨 산으로 들어간다. 산에 가면 나무에 드럼통이 매달려 있다. 그 안에 물을 채우고 팔팔 끓인 뒤 도끼로 자른 시체를 넣고 푹 삶는다. 그렇게 뼈만 솎아 낸다. 맨정신으로는 못 하는 일이라 술 12병을 한자리에서 다 비운다. 결국 그 둘은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평소에도 술에 취해 있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멀쩡할 땐 말도 잘했는데, 어느 날 마주쳤더니 머저리가 돼버렸더라.”
 
  이 같은 시체 처리 방식은 관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부 사정이다. 현지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산더미처럼 쌓인 파병 전사자의 시신 또한 이런 식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는 게 북한 정권”이라면서 “같은 인간이지만 너무 부끄럽다”고 했다.
 
  ― 사체보관실에 있던 사체는 북한으로 가나?
 
  “두수(頭數·머릿수)가 채워져야 집에 갈 수 있다. 몇 구(具) 안 되는 상태에서 사체운반차를 편성하면 돈 낭비이기 때문이다. 삶아 추려 낸 뼈도 그때 함께 실린다. 어떤 관에는 시신이, 어떤 관에는 뼈만 있는 셈이다. 산 사람도 마찬가지로 집에 잘 못 갔다. 파견 이후 3년을 채워야 한 번 고향을 다녀올 수 있었다.
 
  9, 10사업소는 우라늄 매장지 인근이라 방사능 피해도 컸다. 내가 방문했을 때, 파견 1년 된 사업소 버스 기사의 정수리 부분이 흐물거렸다.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2년을 더 채워야 집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19~20살짜리도 꽤 있어… 징집됐을 가능성”
 
  ―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노동자들 처우가 개선되지 않았을까?
 
  “요즘 김정은 행태를 보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거라 본다. 북러 간 밀착이 공고해지면서 노동자 인원도 그때보다 대폭 늘었다고 들었다.”
 
  ― 이번 러시아 파병으로 사망한 북한군의 시신 중 25%가 소실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시신 들여오는 게 다 비용이니, 일부러 찾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 입장에서는 반입되는 시신이 적어야 유리하다. 러시아에 ‘우리가 100명을 보냈는데, 생존자건 시신이건 돌아온 건 20명밖에 안 된다’며 생색 낼 구실도 생긴다.”
 
  ― 김정은은 지난 8월 21일과 29일 두 차례 러시아 파병으로 숨진 장병들을 애도하는 대규모 보훈 행사를 열었는데.
 
  “시신 몇 구 데리고 한 보여 주기 식 행사다. 김정은이 진심으로 애도했다면 우린 벌써 통일이 되고도 남았다. 누구 죽었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 안 한다. 개 한 마리 죽은 셈 치고 말 뿐이다.”
 
  ― 이번 러우 전쟁에 벌목공이 동원됐을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쟁 직후 탈북한 한 벌목공은 올 초 BBC와의 인터뷰에서 파견 직전 ‘위급 상황시 전투 투입’이라는 조항을 안내받았다고 하기도 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벌목공은 80~90%가 군 출신이고, 오기 전 신체검사도 다 마친 이들이다. 군복과 총만 쥐여 주면 싸울 수 있는 인원이라 판단했을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나와 같은 40~50대였지만 19~20살짜리도 꽤 있었다. 그들이 우선징집(徵集)됐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 발발 후엔 벌목 노동자의 모집 기준 자체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러시아인들은 지불 확실… 북한놈들이 문제”
 
  그간 복수의 탈북 벌목공들은 언론에 “지급 보류는 일상이었으며, 나오더라도 월급의 70~80%는 당 자금 명목으로 걷어 갔다”고 증언했다. 김씨와 같은 간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 급여는 루블로 받았나?
 
  “급여의 5~10% 정도만 루블로 받았다. 월급날이 되면 금액이 적힌 장부에 사인을 하는데, 숫자로 보는 게 전부고 그중 10분의 1만큼만 받으니 그 돈이 금싸라기였다. 나머지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다고 했다. 그렇다고 가족들이 그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나온 장부의 돈을 쓸 수 있는 구매소가 따로 또 있다. 가보면 위엣놈들이 좋은 건 다 빼먹고 쓰레기 같은 물건만 남아 있다.”
 
  ― 러시아 측에서는 지불을 제때 하나?
 
  “러시아인들은 그런 부분에선 확실했다. 북한놈들이 문제지.”
 
  ― 식사는 잘 나왔나?
 
  “북한에서 보내온 식량으로 배급을 받았다. 해조류가 특히 많았다. 러시아 침엽수림 지역 사람들은 토질병으로 치주염이 흔했는데, 요오드가 예방에 효과가 있다. 그래서 북한이 미역, 파래, 다시마를 대량으로 실어 보냈다. 김장철이면 배추와 무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한 달치 분량이 전부였다. 고기는 식비 절약한다며 거의 구경도 못 했다. 그래도 백미가 나와서 좋았다. 북한에서는 늘 강냉이(옥수수)밥이었다. 그래서인지 북한 서민들은 당뇨에 안 걸린다. 그때의 식사가 한국 교도소보다 못하다는 건 한국 오고 나서야 알았다.”
 
 
  “24시간 나오는 러시아 TV에 놀라”
 
벌목 노동자들은 3등칸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이동한다. 두만강역을 지나면 사진의 하산역이 나온다. 사진=조선DB
  벌목공은 파병군과 달리 자발적으로 러시아 땅을 밟는다. 외화(外貨)를 벌 수 있는 자리라 인기가 높다. 김씨는 “러시아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 해도 북한에서 사는 것보단 훨씬 낫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는 평양 운수기계화부대 출신이다. 6년간 병사로 복무한 뒤 소위로 임관해 대위로 전역했다. 그는 “출신 성분이 안 좋아 장교 계급도 못 달 뻔했는데 운이 좋았다”며 “그렇지 않았으면 길가의 잡초처럼 살다 생을 마쳤을 것”이라고 했다.
 
  ― 전역 후 바로 러시아로 갔나?
 
  “군에서는 속옷부터 군복, 가족 식량까지 다 공급해 주지만, 전역하는 순간 지원이 뚝 끊겼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무렵 함께 제대한 동기가 도당(道黨) 간부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연줄로 자리 하나 소개해 달라고 하니 러시아 얘기를 꺼냈다. 군 출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북한에서 해외에 한번 나간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 러시아 가기 전 기대감이 있었겠다.
 
  “바깥세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컸다. 도착해서 가장 놀랐던 건 24시간 내내 방영되는 TV였다. 러시아어를 잘 모르니까 스포츠 채널만 주구장창 봤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더라.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었다.”
 
  ― 북한에서 러시아로 가는 여정은 어땠나?
 
  “노동자로 선발되면 살던 지역에서 신체검사를 받는다. 합격하면 각 시·군에서 도 단위로 모여 대열을 편성한다. 출발 때 입을 단체복도 지급된다. 함경남도라면 함흥, 평안북도라면 신의주에서 기차를 탄다. 짐 검사 후 출발해 한참을 달려 국경지대에 들어서면 배급받은 도시락을 먹는다. 이때 북한 국경수비대가 젓가락으로 노동자들의 도시락을 모조리 헤집는다. 자기들이 나눠 준 도시락인데도 뭘 숨겼을까 의심하는 것이다. 야만이나 다름없다. 두만강 철교를 넘어 러시아로 들어서면 러시아 무장 국경경비대가 객차를 포위한다. 셰퍼드 몇 마리가 열차 밑으로까지 들어가 냄새를 맡는다. 이어 빵, 가자미 통조림, 우유, 각설탕 같은 걸 지급한다. 빵을 1~2개 받으면 가까운 지역으로, 3~4개 받으면 먼 지역으로 배치된다는 뜻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자신이 어디에 배정될지 모른다. 기차는 나무 의자의 3등칸이다. 앉아서 온 밤을 지새워야 한다.”
 
 
  “120만여 군인 중 쓸 만한 병력 거의 없어”
 
김정은은 지난 8월 21일과 29일 두 차례 러시아 파병으로 숨진 장병들을 애도하는 대규모 보훈 행사를 열었다. 사진은 8월 21일 러시아 파병 군인들에 대한 국가표창 수여식에 참석한 김정은. 사진=조선중앙TV 캡처
  ― 외화 벌기 위해 나가는 건데 대우가….
 
  “귀국할 때는 더하다. 러시아인들은 ‘고생했다, 바이바이’ 하며 깔끔하게 보내 주지만, 북한 땅을 밟자마자 철모를 쓴 북한 경비대가 총창을 들고 귀환자들을 빙 둘러싼다. 하이에나가 고깃덩어리를 노리듯 가방을 뒤집고 난리를 친다. 뭐 하나 트집 잡아 뜯어먹으려는 거다. 외화 벌겠다고 몇 년을 고생해 돌아왔는데 고국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다. 결국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게 노동당의 수법이다. 그래야 통치가 쉽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나라가 얼마나 역겨운지, 귀국할 때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 러시아 생활을 경험한 입장에서 처음 북한의 파병 소식을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돈에 환장한 김정은이 그 추운 겨울에 싸울 줄도 모르는 어린애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만이 따로 없다. 한국 일각에서는 북한군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먼저 도발하면 큰일 날 것처럼 하지만, 120만여 명 군인 중 쓸 만한 병력은 거의 없다. 20만 명의 특수부대 중에서도 실제 전투력이 있는 건 4~5% 정도다. 나도 남한 와서 TV로 한국 특전사들 훈련하는 모습 보고 깜짝 놀랐다.”
 
  ― 앞으로 러북 관계는 어떻게 될 것 같나?
 
  “한동안 밀착할 거라는 분석이 많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고, 푸틴도 한국과 북한 중 누구와 손잡아야 나라를 살릴지 계산할 거다. 경제적으로는 한국 대기업과 교류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다. 무엇보다 현재 막혀 있는 석탄·가스·석유 같은 에너지 판로를 단계적으로라도 재개하려면 북한과 밀착을 강화하지 않는 편이 현실적이다. 푸틴 입장에서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김정은이 내심 탐탁해 보일 리도 없다.”
 
 
  “러시아 파견 전부터 탈북 생각 있어”
 
  ― 러시아에서 벌어진 참혹한 인권 유린의 현장을 보고 탈북을 결심한 건가?
 
  “파견 전부터 탈북 생각이 있었다. 운수기계화부대에 있을 때 북한 전역을 다녔는데, 어느 날은 강원도 고성 최남단을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오징어 잡는 걸 봤더니, 오징어 말고도 각종 주스병, 생수병 같은 물건들이 막 걸려 올라오더라. 죄다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 북한에는 그렇게 질 좋은 병이 없다. ‘남한에는 거지가 득실득실하고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한다고만 알았는데 속고 살았구나’ 싶었다.
 
  한번은 친구네 고모부 집에 갔는데, 그 고모부가 평강 5군단 사령부 보위부장이었다. 그 집 뒷마당을 봤더니 처음 본 한국 과자와 초콜릿이 막 쌓여 있었다. 남한에서 뿌린 건데 고모부가 집에 있는 개, 돼지 먹으라고 갖다 놨단다. 그래서 내가 친구한테 ‘이거 먹고도 돼지가 안 죽었으니까, 사람이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같이 까먹어 봤다. 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진짜 너무 맛있었다. 그때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동안 순 속아서 살았구나.”
 
  ― 그런 마음을 품고 벌목공들을 단속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이제야 말하지만, 이탈자를 잡으러 간다고 해놓고 나가서 놀다 들어온 적도 많았다. 덕분에 탈북 정보를 수집하기도 유리했다. 사업소 안에서 누가 어떤 일을 꾸미는지, 다른 사업소에서 무슨 사고가 났는지도 다 들을 수 있었으니까.”
 

  ― 현지에서 탈북 시도는 안 했나?
 
  “했는데 실패했다. 내가 단속 책임자였으니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고, 속으로만 품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사업소에서 누가 행방불명됐다. 평소 친했던 후배와 함께 행불자 탐문에 나섰다. 술도 가끔 마시며 마음을 터놓던 후배였다. 그러다 노보시비르스크 쪽으로 도망갔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동부 시베리아 주요 도시 이르쿠츠크에서도 1500km는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찾을 엄두가 안 났다. 그때 후배가 ‘형님, 이참에 우리 유럽 쪽으로 한번 가봅시다’라고 했다. 서로 직접 탈북 얘긴 못 꺼내고 빙 둘러서 의기투합하게 됐다. 그렇게 행불자 수색 명목으로 허가를 받아 기차에 올랐다.
 
  한 이틀 달렸나, 기차 안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탈북 경비가 없으니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차비도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 기차에서 내렸는데, 그곳에서 한 고려인을 만났다. 내 사정을 들은 그는 병원 일용직을 소개해 줬다. 고압 물총으로 시체를 닦는 일이었다. 몇 구의 시체를 닦고서야 간신히 돌아갈 차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마주친 러시아 노동자
 
  ― 사업소는 난리가 났었겠다.
 
  “우리가 며칠 동안 안 들어오니까 도망간 걸로 알았는데, 가방을 잃어버려서 시체를 닦고 왔다고 하니까 따로 의심은 안 했다. 그때 가방만 안 잃어버렸어도 더 일찍 한국에 올 수 있었을 텐데. 그때 한번 계획이 틀어지니 다시 준비하는 게 간단치 않았다.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돌아가 한동안 포기하고 살다가, 결국 중국을 거쳐 탈북하게 됐다.”
 
  ― 한국에 와서 느낌이 어땠나?
 
  “처음 부산을 가보고 깜짝 놀랐다. 웬 러시아 사람이 이렇게 많나? 부산 감천항에 러시아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한국에 어쩐 일로 왔냐고 물어봤다. 배 수리하러 왔다더라. 그러면서 ‘배 수리는 한국이 최고’라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가만히 보니까 그중에는 노동자도 있었다. 충격이었다. 나는 한때 러시아를 이상향처럼 생각했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노동을 하러 부산에 오다니.”
 
  ― 한국 생활은 어떤가?
 
  “내 동창 중에 철민(가명)이라고 있었다. 대남(對南)연락소에서 근무하던 친군데 한국을 드나들며 간첩 활동을 했다. 어느 날 나보고 ‘한국에는 지방 시골 도로도 다 포장이 돼있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거기에 ‘거짓말도 정도껏 하라’고 했었다, 허허.
 
  부산에선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꾸렸었다. 여기 오고 허리를 다쳐 더 이상 일을 하기 힘들어져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한 상태다. 그랬더니 겨울에는 난방비 지원해 주고, 여름에는 에어컨비가 나온단다. 세상에 이런 지상낙원이 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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