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금도 해변에 들어설 ‘엘리멘털’ 작업 앞두고 열린 터굿에 곰리 부부 참석
⊙ 예술 통해 되살아난 일본 나오시마, 캐나다 포고섬
⊙ 예술섬 프로젝트로 신안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박우량 前 신안군수와 강형기 충북대 명예교수
⊙ “‘엘리멘털’은 신안이 가진 것을 더 넓은 세계와 나누는 방법… 풍경을 지배하는 기념비적 작품이 아니라, 풍경과 어울리는 몸체 되길”(앤터니 곰리)
⊙ 예술 통해 되살아난 일본 나오시마, 캐나다 포고섬
⊙ 예술섬 프로젝트로 신안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박우량 前 신안군수와 강형기 충북대 명예교수
⊙ “‘엘리멘털’은 신안이 가진 것을 더 넓은 세계와 나누는 방법… 풍경을 지배하는 기념비적 작품이 아니라, 풍경과 어울리는 몸체 되길”(앤터니 곰리)

- 8월 31일 전남 신안 비금도 원평해변에서 앤터니 곰리의 작품 설치 작업을 앞두고 ‘터굿’이 벌어졌다. 사진=하주희
지난 8월 31일 아침 9시가 넘은 시각, 전남 신안군 비금도 원평해변 바닷가. 천막 아래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염불을 외는 듯한 법사(法師·남자 무당)의 목소리와 방울 소리, 북소리가 들린다. 다가가니 사과며 멜론, 수박 같은 과일과 쌀포대, 촛대가 놓인 제상(祭床)이 보인다. 북을 앞에 두고 법사가 앉아 있고, 여성 무당이 무복(巫服)을 입고 서성이는 모습을 열댓 명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보고 있다. 그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당이 읊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 ‘터굿’이다. 터굿은 ‘지신(地神)굿’이라고도 한다. 그곳을 관장하는 지신을 달래거나 치성을 올리는 굿이다. 바닷가에서 터굿을 드리는 이유가 뭘까?
관객들 속에 외국인이 있다. 영국 작가 앤터니 곰리(Antony Gormley)와 아내 비켄 파슨스다. 가장 앞줄에 앉아 굿판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는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앤터니 곰리라는 이름이 익숙할 게다. 요즘 한국 미술계가 여러 각도에서 곰리를 조명하고 있다. 이례적일 정도다.
9월 현재 한국에서만 3곳에서 곰리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은 곰리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 ‘DRAWING ON SPACE’를 열고 있다. 11월 30일까지 조각 7점, 드로잉·판화 40점, 설치작품 1점 등 총 48점을 전시한다. 뮤지엄 산에는 곰리와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o)가 공동 설계한 ‘GROUND’도 들어섰다. 곰리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상설 전시 공간이다. 서울에 있는 ‘화이트큐브 서울’과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공동 기획으로 ‘불가분적 관계(Inextricable)’라는 전시를 10월 18일까지 열고 있다.
인도에서 명상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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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을 지켜보고 있는 앤터니 곰리 작가. |
인도에서 곰리는 불교 승려가 될지 예술가의 길을 계속 갈지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깨달음을 조각으로 만드는’ 예술가가 되기로 했다. 그 시절을 회고하며 그는 “서구식 교육을 통해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직접 체험을 통해 내면을 깨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인도 시절은 그의 예술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몸을 인식의 장(場)이자 ‘장소(place)’로 보는 관점이 그의 작품 주제로 자리잡았다. ‘몸은 단순한 형상이 아닌 감각과 의식의 장(field)’이라는 개념이다. 그의 첫 작품 ‘Sleeping Place(잠자리)’에는 인도 거리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 몸의 존재 방식, 그리고 ‘몸=첫 거주지’라는 그의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후로도 그는 자신의 몸을 본뜬 조각 시리즈를 선보이며 인간 존재와 공간에 대한 사유를 관람객과 공유해 왔다.
관광객 부르는 ‘북방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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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게이츠헤드에 있는 앤터니 곰리의 조각상 ‘북방의 천사’.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공미술 작품 중 하나다. 사진=위키피디아 |
이외에도 자신의 몸을 본뜬 주철 조각상 100점을 영국 크로스비 해안에 설치한 ‘어나더 플레이스(Another Place)’, 오스트리아 알프스 고산지대(해발 2039m)에 인간 형태의 주철 조각 100개를 배치한 설치작품 ‘허라이즌 필드(Horizon Field)’ 등이 유명하다. 그런 곰리가 비금도 해변에서 벌어진 터굿에 참석한 이유가 뭘까?
‘엘리멘털(Elemental)’ 때문이다. 바로 비금도 원평해변에 설치될 초대형 작품이다. 곰리는 ‘엘리멘털’을 구상하기 위해 지난 2022년 7월 비금도를 방문했다. 대동염전과 내촌마을, 갯벌 등 비금도 곳곳을 거닐며 그곳의 새소리, 파도 소리까지 녹음해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가 바로 ‘엘리멘털’이다.
‘엘리멘털’은 38개의 큐브가 빚어내는 거대한 인체 모양으로 완성될 예정이다. 하늘에서 봤을 때 세로 104m에 가로 25m, 땅에서부터 올라온 몸의 높이가 24m가량인 엄청난 크기의 인간이 해변에 누워 있는 모습이다. 만조선(밀물로 해수면이 가장 높을 때 땅과의 경계선)에서 70~80m 바다 쪽에 위치해 썰물 때면 관객이 작품 속을 걸어다닐 수도 있다. 곰리의 최근 작품 경향을 반영하면서도 그의 근본적인 철학이 담겨 있다. 올해 작업을 시작해 내년 7월경에 완성된다.
‘엘리멘털’ 내년 7월 완성
이번 굿은 신안군이 아닌 곰리 측에서 열었다. 신안군 압해도에 사는 무당을 비롯해 목포 도천암에서 온 법사, 천안 천지암에서 온 무당 등이 함께했다. 잠시 쉬는 시간, 압해도 무당에게 이 굿을 왜 하는지 물었다.
“한 평짜리 땅에도 지신이 있지. 이사를 해도 그 집과 터가 맞아야 되거든. 용왕전에 들어와서 공사를 하니 예쁘게 봐주세요, 하고 비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어지간하면 이 유명한 작가가 신안군에 작품을 세우겠어? 신안이 그만큼 명성이 있는 거지.”
유명한 작가가 신안에 찾아오고 자신이 터굿을 맡은 일련의 과정이 꽤나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신안군은 ‘예술섬 프로젝트’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구 3만 8000명으로 인구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되는 신안군은 지역 활성화를 고민하며 예술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 섬마다 세계적 거장들이 신안의 풍경을 녹여 낸 작품과 미술관을 설치한다는 내용이다. 세계적인 작가와 건축가들을 설득하기 위해 수년간 공을 들인 결과 앤터니 곰리 외에도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야나기 유키노리, 마리오 보타 등 말 그대로 세계적인 거장들이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됐다.
신안을 찾아오는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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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신안군 도초도에 설치된 올라퍼 엘리아슨의 ‘숨결의 지구의 구체’ 내부. 지름 약 8m 크기 구(球)형 구조물 안에 들어서면 기하학적 패턴으로 뚫려 있는 둥근 천장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붉은색, 녹색, 청록색 타일에 반사되며 다차원의 입체감을 만들어 낸다. 사진=신경섭 작가, PKM갤러리 |
2024년 11월 신안 도초도 수국공원 정상에 엘리아슨의 작품 ‘숨쉬는 지구의 구체’가 들어섰다. 약 8m 크기의 구(球) 형태 구조물이다. 작품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데, 들어가는 순간 별세상이 펼쳐진다. 녹색·붉은색·푸른색 등 형형색색의 용암석 타일에서 환상적인 색채가 반사돼 시야로 쏟아진다. 개관 당시 작가는 작품을 두고 “바닥도 벽도 지평선도 없는 공간”이라며 “지구의 자궁 안에 들어온 것처럼 지구의 숨결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에 들어와 명상하는 듯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지구의 안녕을 위해 제 할 일, 책임을 다했는지 물을 수 있길 바랐다. 지구에 발을 딛고 서있는 인류가 지구를 존중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작품의 의도를 설명했다.
고(故) 김환기 화백의 고향 안좌도에는 일본의 설치미술가 야나기 유키노리가 설계한 플로팅 뮤지엄이 들어선다. 내년 상반기에 완공된다. 이름 그대로 7개의 큐브 형태 건물이 저수지 위에 떠 있는 구조다. 큐브 형태는 신안의 특산물인 천일염의 결정 모양에서 영감을 얻었다. 야나기 유키노리는 버려지다시피 한 섬을 예술로 재생시킨 ‘이누지마 아트 프로젝트’를 이끌기도 했다.
신안 뮤지엄들, 내년에 잇따라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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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당의 권유에 깃발을 뽑는 앤터니 곰리. |
예술섬 프로젝트의 선두에는 박우량 전 신안군수와 강형기 충북대 행정학과 명예교수가 있다. 강 교수는 예술섬 프로젝트의 총괄기획과 예술총감독을 맡아 이끌어 왔다. 강 교수 역시 곰리가 연 터굿에 참석했다. 강 교수의 말이다.
“금세기 가장 유명한 거장 5명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곳은 미국에도 일본에도 없습니다. 7년 전부터 예술섬 프로젝트를 구상했어요. 도초도를 두고는 그곳에 어떤 작품이 들어서면 좋을까 상상하다 올라퍼 엘리아슨을 떠올렸지요. 엘리아슨의 작품은 전체 대지에서 꽃술 역할을 합니다. 작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340만 평의 대지에 경관농업을 하자는 것이 군수의 생각입니다. 주민들이 경관농업으로 미술관에 참여하는 거대한 ‘대지(大地)의 미술관’인 겁니다. 엘리아슨의 작품은 유지비가 하나도 안 들다시피 합니다. 지어 놓고 해마다 엄청난 유지비가 들어가면 지자체에서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 비금도 해변에 왜 곰리의 작품을 설치하기로 했나요?
“겨울 해변에 몰려오는 파도를 보며 생각했지요. ‘이곳에 곰리의 작품이 놓여 있으면 파도와 격투하고 조류와 타협하며 지구인에게 메시지를 줄 것이다. 영혼의 노숙자들아, 너희들의 지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외칠 거다.’ 아침 해가 뜰 때, 저녁 해 질 때, 비 올 때와 눈 올 때 작품의 풍경이 다 다르겠지요. 자연이 연출하는 예술을 받아들이는 작품이 될 겁니다.”
― 안좌도에 들어설 플로팅 뮤지엄은 야나기 유키노리가 맡았지요.
“플로팅 뮤지엄을 의뢰하며 유키노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에 전시될 예술품뿐 아니라 건물 자체가 예술품이어야 한다. 계절의 색깔과 시간의 빛깔이 느껴지는 미술관을 호수 위에 연출하자.’ 유키노리도 적극 동의했지요.”
예술로 지역 재생
예술을 통해 살아난 지역은 전 세계에 여러 곳이 있다. 일본의 나오시마가 대표적이다. 안도 다다오, 구사마 야요이, 야나기 유키노리 등 세계적 건축가 및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전 세계인이 찾는 ‘현대미술의 성지’로 재탄생했다. 그 뒤에는 베네세 그룹의 장기 투자가 있었다.
캐나다에는 포고(Fogo)섬이 있다. 뉴펀들랜드주, 대서양에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섬이다.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했는데 어획량 감소로 위기에 처했다. 섬 출신 인사가 만든 쇼어패스트 재단(Shorefast Foundation)이 ‘포고 아일랜드인과 예술인이 머무를 수 있는 레지던시(Fogo Island Arts)’를 10여 곳 건설했다. 이를 통해 문화 관광의 섬으로 부활했다.
일본과 캐나다 정부는 예술을 통한 관광 부흥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2023년 ‘관광선진국 추진 기본계획’을 새롭게 수립했다. 2025년까지의 목표와 전략을 설정했다. 그 연장선으로 ‘신시대 인바운드 증대 액션플랜’을 만들었다. 인바운드는 외국에서 일본으로 들어오는 여행(객)을 뜻한다. 당시 일본 외무성이 발표한 2025년 목표는 방문 외국인 3200만 명, 인바운드 소비 5조 엔, 국내 여행 소비 20조 엔 등이었다. 이 목표는 일찌감치 초과 달성되어 2024년 기준 벌써 약 3700만 명이 일본을 찾았다. 2030년까지는 인바운드 관광객 60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참고로 한국의 인바운드 여행객 수는 2024년 기준 약 1522만 명이다.
캐나다 정부도 포고섬 관광 활성화를 위해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올해는 국제적 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포고섬 마케팅 캠페인에 20만 달러가량을 지원했다.
接神하고 공수 하는 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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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을 지켜보는 곰리 부부와 라종일 전 주영 대사(가운데). |
“공사 따내려고 너희들이 애 많이 썼다.”
그러자 참석자들 사이에 웃음보가 터졌다. 무당은 이어 공사가 잘될 거라고 말해 줬다. 그러더니 무당은 곰리의 부인 비켄에게 다가갔다.
“성격이 웬만한 남자 못지않군. 남편 옆에 버티고 서서 남편이 잘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야.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자식 세 명 중 둘째가 형제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 해. 잘 챙겨 주고 도와줘라.”
곰리 부부 사이에 라종일 전 주한 영국 대사가 앉아 있었다. 라 전 대사 역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곰리는 라 전 대사의 해설을 들으며 굿을 지켜봤다.
무당에게 접신된 신이 바뀌었다. 이번엔 동자(童子)신이었다. “무당이 어린 소년이 됐다”고 말해 줬더니 곰리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무당이 나의 어린 시절을 재현하는 건가?” 아니라고 답해 줬다. 무당은 곰리에게 건강을 잘 챙길 것을 당부했다. 곰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닥 지쳐 보이지 않았다. 이틀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곰리 일생 최대 규모의 조각
이틀 전인 8월 29일 주한 영국 대사관 관저에서 곰리의 전시를 축하하는 리셉션이 열렸다. 콜린 크룩스 주한 영국 대사가 유창한 한국어로 전시 축하와 환영을 전했다. 기자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약간 지친 표정의 곰리는 진지한 어조로 리셉션에 참석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신안 프로젝트를 언급했다.
“올해는 제게 굉장히 특별한 한 해로 기록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뮤지엄 산과 서울에서 저의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신안의 비금도에서는 어쩌면 제 일생 최대 규모의 조각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게 됐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열린 마음, 문화적 성취를 이루겠다는 야심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국에는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나라를 재건해 나가겠다는 열망으로 정진해 온 한국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은 만든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감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자긍심, 자신들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노력에서 저는 영감과 감동을 받습니다. 그 좋은 예가 지금 추진되고 있는 신안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에야 이렇지만 곰리와 신안군이 서로 갈등한 시기도 있었다. 입지 때문이었다. 애초 ‘엘리멘털’은 원평해변이 아닌 명사십리해변에 들어서기로 되어 있었다. 원평보다 명사십리해변이 훨씬 규모가 크다. 그런데 그 규모가 문제가 되겠다고 강 교수는 판단했다.
“명사십리해변은 멋지지만 너무 광활했어요. 작품이 묻힐 수도 있겠다 싶었지요. 원평해변으로 설치 장소를 옮기기로 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품이 들어설 해변의 안쪽이 국유지였습니다. 이 문제는 군청의 담당 공무원이 잘 해결했어요. 그러자 이번엔 곰리 작가가 무척 화를 내는 겁니다. 왜 큰 해변에서 작은 해변으로 장소를 바꾸냐면서요. 편지를 썼지요. ‘장소와 환경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선 원평해변이 더 좋다.’ 그런 후 곰리가 현장 답사를 왔어요. 직접 현장을 보더니 그제야 멋지다면서 연신 싱글벙글하더군요.”
관광 명소 된 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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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당의 권유에 깃발을 고르는 박우량 전 신안군수. |
박 전 군수는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비금면의 상징은 붉은빛의 해당화(海棠花)다. 비금면 주민들 역시 단체로 붉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굿판에 왔다. 지난 6월 19일 원주 뮤지엄 산에서 열린 곰리 전시 개막 리셉션에도 박 전 군수는 평소에 즐겨 입는, 역시 신안의 상징인 보라색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라색은 신안 ‘퍼플섬’을 상징한다. 반월도와 박지도 전체를 보라색으로 꾸미고 2021년 ‘퍼플섬’이라고 이름 짓고 컬러 마케팅을 했다. 보라색 옷이나 스카프를 두르면 입장료가 무료다. 퍼플섬이 전국에 알려지며 연간 4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반월도와 박지도를 연결하는 퍼플교 입구에 있는 카페의 연간 매출이 1억원이 넘을 정도다.
‘염전 노예’라는 오명(汚名)으로 더 잘 알려져 있던 신안이 관광 명소로 변신한 데는 박 전 군수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는 신안 도초면 출신으로 공무원이 되어 내무부 등에서 근무하다 경기도 하남시 부시장(3급) 및 시장 권한대행을 끝으로 퇴임했다. 2006년 보궐선거에서 신안군수에 당선된 후 2010년과 2018년, 2022년에 거듭 당선됐다.
그의 신안군 부흥 정책은 2019년 천사대교가 개통되면서 전기를 맞았다.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긴 해상 교량인 천사대교는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한다. 천사대교 덕분에 신안 암태도·자은도·팔금도·안좌도가 육지와 이어졌다. 자동차로 신안의 섬들을 드나드는 시대가 열렸다. 목포에서 차로 1시간만 달리면 자은도에 닿는다. 박 전 군수가 주도해 온 정책들에 박차가 가해진 셈이다.
생활인구 250만 명
박우량 전 군수 재임 기간 신안으로 향하는 관광객은 급증했다. 2019년에서 2023년까지 150만 명 이상이 퍼플섬을 찾았다. 2024년 기준 신안의 생활인구는 250만 명. 생활인구란 주민등록상 주소지 인구와 다른 개념으로, 등록된 주소지와 상관없이 실제로 머물며 생활·소비·활동을 하는 인구를 의미한다.
박 전 군수는 지난 3월 기간제 공무원 채용에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로 집행유예 확정판결을 받아 군수직을 상실했다. 지난 8월 사면 복권됐다. 현재 전임 군수 신분이지만 그에 대한 지역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다. 강형기 교수는 “신안군 예술섬 프로젝트는 박 전 군수의 리더십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강 교수의 말이다.
“신안군은 전국 지자체 중 재정자립도 최하위권입니다. ‘이런 곳에 왜 예술작품이 필요하냐, 그 돈으로 농업보조금이나 지급하라’는 주장이 왜 없었겠습니까. 박 전 군수는 농민에게 한 푼이라도 더 지원을 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시금치와 양파만으로는 인구 소멸을 막을 수 없다’고 역설했어요. 농사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주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키울 수 없다면서, 힘들어도 예술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주민들과 의회를 설득했어요.”
여객선터미널 벽의 곰리 사진
비금도에서 사람들의 통행량이 가장 많은 곳은 아마 여객선터미널일 것이다. 이곳 대합실 벽에도 앤터니 곰리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다. 주민들에게 곰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군 공무원들도 경로당에서 곰리의 이름을 맞추는 퀴즈를 내고 정답자에게 소소한 선물을 주는 등 예술섬 홍보와 ‘곰리 알리기’에 매진했다. 그 결과 많은 주민들이 곰리를 친숙하게 생각한다.
중년 여성들은 오랫동안 알던 친구처럼 곰리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포토! 포토!”라며 사진 촬영을 요청하고 곰리 역시 불편하지 않은 기색이다. 장년의 식당 주인은 곰리의 아내에게 최대한 친근한 표정으로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영국에 관한 단어 전부(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거듭 말했다. 곰리 부부는 그들이 표현하려는 마음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 풍경은 무척 흥미로웠다. 아마 영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신안이 곰리를 아는 이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일 게다.
인구소멸 위험지역에서 곰리며 터렐이라니, 어떻게 보면 미친 발상이었다. 7년이 흐르자 이제는 현실이 됐다. 세계적인 거장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기자회견에서 ‘신안’을 자랑한다. 기자가 만나 본 신안 지역민들 상당수가 신안에 세계적인 거장 예술가들이 오가는 걸 자랑스러워 했다.
마을 이장들 초대한 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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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에 쓰인 천과 종이들을 갯벌에서 태우는 곰리. |
“이것이 세워지면 하늘과 땅을 이어 줄 거다. 바다는 연결되어 있는 법이니 전 세계 사람들이 신안으로 들어오게 도와주시고… 이런 작품이 또 하나가 이 땅에 들어오겠구나.”
마지막 공수였다. 무당들은 굿에 쓴 무명천과 색색가지 종이들을 곰리가 직접 태우도록 했다. 곰리는 그것들에 불을 붙인 후 한참을 바라봤다. 태우는 이유는 뭘까? 조성제 동방대 미래예측콘텐츠학과 교수는 “하늘에 청(請)을 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굿을 하며 천으로 매듭을 만든 다음, 굿이 끝나고 태워 버리지요. 매듭을 만들고 푸는 건 조상들의 맺힌 한을 모아서 풀어 주는 걸 뜻합니다. 태우는 걸 ‘소지(燒紙) 올린다’고 하는데, 신에게 청을 올리는 것이지요. 굿에는 심리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정성을 들였으니 바람이 많이 불어도 잘 버티겠지’,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지요.”
곰리는 타고 남은 재가 바다로 흘러갈 거라는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에게 물었다. “굿을 왜 했나요?” 답이 즉시 돌아왔다. “나는 작업 전에 굿을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자신의 작품이 들어설 곳의 자연과 사람들을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굿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굿을 직접 보니 어땠냐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의 둘째 아이가 형제들 때문에 속상해 하는 건 사실”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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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이 끝난 후 곰리가 비금도 주민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현장을 정리한 후 인근 식당으로 옮겼다. 식당 전체를 예약하다시피 했다. 알고 보니 곰리가 비금면의 이장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자리였다. 마주 앉아 있는 비켄에게 오전에 본 풍경이 어땠는지 물었다.
“한국은 이번이 처음인데, 와보니 왜 이 자리에 작품이 들어서는지 이해가 가요. 풍경과 작품이 잘 어우러질 것 같아요. 다만 어느 집이든 형제가 셋이면 둘째가 마음고생 하기 마련이지요.”
곰리는 비금면의 이장들 개개인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건지, 몇 대째 그 땅에 살아 왔는지, 농사는 어떤 식으로 짓는지 등이었다. 한 이장이 “10대째 넘게 같은 곳에 살고 있다”고 답하자 곰리는 감탄했다.
신안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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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터니 곰리는 비금도의 이장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곰리 부부와 박우량 전 신안군수. |
“이전에 한국에서 진행한 네 개의 프로젝트 모두 어떤 면에서는 신안 프로젝트를 위한 전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멘털’을 위한 개요와도 같았던 겁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 이 일에 함께해 주신 것에 너무나 큰 축복을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신안의 주민으로 이 프로젝트에 미소 지어 주신 분들이든, 제작 과정에 참여하러 와주신 분들이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참석자들 모두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미친 영국인이 어떤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데, 공장 안에서 만들어도 충분히 어려울 텐데 해변에서 만든다는 것은 도전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것이었죠. 그런데 지금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놀라운 능력, 여러분의 사유 문화 덕분입니다. 이곳에서 제가 이렇게 환영받고, 어떤 의미에선 이 문화의 일부가 된 것은 진정한 특권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안의 아름다움을 언급했다.
“신안은 제게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해변에서 수많은 섬들이 겹겹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며 수평선을 이루는 광경을 바라봤습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신안군에 있어 ‘엘리멘털’ 작업은 신안이 가진 것을 더 넓은 세계와 나누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제 작품이 풍경을 지배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니라, 풍경과 수평적으로 어울리는 몸체가 되길 바랍니다. 그것은 모든 종(種)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의 인사말이 끝나자 작은 케이크가 등장했다. 바로 전날이었던 그의 생일(8월 30일)을 기념해서였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곰리를 둘러싸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줬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만, 곰리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인류에게 주는 선물
기자는 곰리의 뮤지엄 산 전시 개막식에서도, 화이트큐브와 타데우스 로팍 전시를 기념한 영국 대사관 리셉션에서도 그를 만나고 관찰했다. 신안의 작은 식당에서 비금면 이장들에게 건넨 그의 인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전 세계 곳곳에 랜드마크로 기록되는 조각품을 설치한 75세의 거장에게서 이토록 겸손한 소감을 듣고 표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동안 신안의 예술섬 프로젝트를 지켜보며 경외감과 의구심을 동시에 느끼던 참이었다. 한 지자체가 수행하기엔 버거울 정도로 높은 예술적 성취를 계획하고 성과를 만들어 내는 데 놀랐고, 거장들의 작품들인 만큼 만만치 않은 예산이 소요되는데 그게 온당한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예산에는 우선순위라는게 있으니 말이다. 곰리의 작품에 들어가는 예산은 193억원이다(철을 사용하기 때문에 재료 값부터 상당하다). ‘대가들의 작품을 그저 가져다 놓는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이날 곰리가 평생에 걸쳐 걸어온 구도(求道)의 길, 비금의 자연, 신안군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쩌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돈으로 많은 걸 살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돈만으론 얻을 수 없다. 인공지능(AI)이 가져올 막대한 변화, 그로 인해 인류가 얻을 것과 잃어버릴 것들의 이중주가 한동안 세상엔 울려퍼질 것이다. 곰리의 ‘엘리멘털’은 인간과 자연이 담담하게 서로를 관조했던 기억을 오랫동안 비금도 해변에서 증명할 것이다. 훗날 우리 후손들은 잃어버린 감성을 발견하러 신안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인류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