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은미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

“여성 소외시킨 개발협력은 지속 불가능”

  • 글 : 손수원 기자  ad211004@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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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ODA의 강점은 규모가 아닌 ‘메시지와 경험’… 원조 받는 설움 겪어 본 나라”
⊙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30주년… “AI·기후위기·디지털 경제 속 새로운 성차별 대응 필요”
⊙ 코트디부아르 누공 치료, 베트남 해바라기센터 전수 등 ‘한국형 젠더 ODA 성과’
⊙ “젠더는 SDGs 전 분야를 관통하는 교차 이슈… 권력구조 바꾸는 ‘변혁적 접근’ 필요”
⊙ “성평등은 제로섬 아닌 윈윈… 남녀 모두 존엄하게 사는 길”

金恩美
1958년생.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美 브라운대학교 사회학 석·박사 / 美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 교수, 제5대 국제개발협력학회 학회장, 유엔 글로벌지속가능개발보고서 독립과학자그룹 위원,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 이화여대 17대 총장 역임. 現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 유엔여성기구 대한민국 초대 친선대사
사진=이경호
올해는 1995년 열린 베이징(北京) 세계여성대회 30주년을 맞는 해다. 30년 전, 전 세계는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기후위기,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AI) 확산 등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성평등은 여전히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유엔여성기구(UN Women) 대한민국 초대 친선대사인 김은미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前 이화여대 총장)는 “베이징 행동강령의 정신을 오늘에 맞게 재해석하고, 새로운 성차별에 대응하는 국제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회학자로서 개발도상국의 정치 경제를 연구해 온 김 교수는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여성을 배제한 개발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믿음은 그가 지난 수십 년간 학문과 현장을 오가며 쌓아 온 활동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여성 없는 개발은 지속 불가능”
 
2008년 이화여대와 코이카가 함께 진행한 학위연수 프로그램 리더십 워크샵에서 김은미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가 유학생들과 전통 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사회학자로서 개발도상국의 정치 경제 발전을 연구해 왔는데, 젠더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따고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1997년 귀국했습니다. 당시 ‘국제개발협력학’이라는 분야를 일구면서 정부의 중요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의에 나가 보면 ‘젠더’ 관점은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를 그 시각에서 바라보거나, 해결책을 젠더 관점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없었죠.
 
  그러다 2006년 국무총리실 산하 국제개발협력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결정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국제개발협력기본법 제3조 ‘기본정신과 목표’ 제1항에는 ‘국제개발협력은 개발도상국의 빈곤 감소, 여성·아동·장애인·청소년의 인권 향상, 성평등 실현, 지속 가능한 발전 및 인도주의(人道主義)를 실현하고 개발도상국과의 경제 협력 관계를 증진하며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본법에 여성의 인권 향상과 성평등 실현을 위한 원조를 해야 한다고 명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업과 예산 편성에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예산 배정이 왜 이렇게 적으냐’고 묻자 당시 정부 측 관계자가 ‘한국도 성평등에서 아직 갈 길이 먼데, 어떻게 우리가 개발협력 사업에서 본격적으로 젠더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더군요. 여성 관계자의 말이었기에 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성평등이 완벽해야만 다른 나라에 성평등을 지원할 수 있다’는 발상은 국제개발협력의 기본 취지와 맞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이때부터 학자로서 국제개발협력에서의 젠더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성이 경제 주체 될 때 변화 확산”
 
  ― 개발협력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이 왜 중요합니까?
 
  “처음에는 정치경제학과 젠더를 완전히 별개의 분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느낀 건, 여성을 소외시키면 그 어떤 개발 프로그램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식수 지원 사업을 해도, 물을 길어 오는 주체는 대부분 여성입니다. 위생 교육을 해도 가정에서 실천하고 아이들에게 전하는 역할 역시 여성 몫입니다. 여성이 빠진 개발은 효율과 성과 면에서 실패 확률이 높습니다.”
 

  김은미 교수는 여성이 주체가 된 사례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을 언급했다.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입니다.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가 1983년 빈곤 퇴치를 내세우며 설립했어요.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의 저소득층,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위한 소액 신용대출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남녀 모두에게 대출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성 대출자의 상환율과 사회적 파급효과가 훨씬 높았습니다. 왜일까요? 여성은 대출금을 가족을 위해 썼던 거죠. 그 돈으로 아이 교육을 시키고 가족의 건강을 돌봤어요. 마을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에도 투자를 했고요. 여성이 경제 주체가 될 때 가족, 공동체, 그리고 지역사회까지 긍정적인 변화가 확산된 거죠.”
 
  ― 올해는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가 열린 지 30주년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베이징 세계여성대회는 국제사회가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라는 명제를 보편규범으로 채택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유엔 공식 문서와 회의에서 ‘섹스(sex)’ 대신 ‘젠더(gender)’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섹스’가 생물학적 성별이라면, ‘젠더’는 사회·문화적 역할과 규범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성차별을 바라보는 시각을 구조적·제도적 차원으로 확장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21세기 여성 발전의 전략으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가 공식 채택됐다. 과거 여성정책이 주로 사회보장이나 복지의 일부로 한정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정치·경제·교육·평화·환경·개발협력 등 모든 정책 분야에서 젠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 국제기준이 되었다.
 
 
  “재난과 위기는 여성에게 더 가혹”
 

  이후 30년, 김 교수는 당시 행동강령의 정신을 변화된 환경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 기후위기, 디지털 경제 등 새로운 영역에서 젠더 격차가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 기술 접근성, 디지털 안전, 기후 변화 대응 과정 등에서 새로운 성차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30주년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젠더 정의(gender justice)’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와 국제사회가 다시 행동해야 할 시점임을 상기시킵니다.”
 
  ― 최근 기후 변화나 분쟁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젠더 이슈는 어떻게 드러납니까?
 
  “불행하게도 재난과 위기는 여성과 소녀들에게 더 가혹합니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이행보고서’를 보면 코로나 19 팬데믹 시기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을 가리지 않고 여성의 실직률과 돌봄노동 부담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 취업 여성의 약 40%가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은 산업, 즉 숙박·음식 서비스·도소매·제조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예로, 2014년 아프리카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는 소녀들의 임신율이 급등했습니다. 전염병과 소녀 임신율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유는 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못한 소녀들이, 특히 부모까지 잃은 경우에는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됐습니다. 학교는 배움의 장소일 뿐 아니라 보호막이자 울타리였던 겁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식수 문제나 농업노동 부담도 여성에게 집중됩니다. 재난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그 피해는 성별에 따라 달랐습니다.”
 
  이러한 국제 상황에서 한국은 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공적개발원조)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물었다. 김은미 교수는 “‘설움을 겪어 본 나라’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원조를 받던 수원국(受援國)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50여 년 만에 원조를 하는 공여국(供與國)으로 바뀐 유일한 나라이기에, 과거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나라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조 받던 나라 경험을 공유“
 
2024년 유엔여성기구 친선대사에 임명된 김은미 교수.
  ― 개도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모범 사례일 것 같습니다. 한국 ODA의 강점은 무엇일까요?
 
  “‘메시지와 경험’에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60여 년 전만 해도 1인당 GDP가 100달러도 안 되는 최빈국(最貧國)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과 안보위기 속에서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습니다. 개도국 입장에선 자원이 풍부한 영국이나 미국보다, 자기네보다 못살던 나라가 단기간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사례가 훨씬 현실적이고 와닿는 거죠. 우리는 수원국의 설움을 경험했기에 그들의 주인의식(ownership)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동지(同志)’와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죠.”
 
  ― 기억에 남는 한국형 젠더 ODA 사례가 있다면요.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가 2012년부터 작년까지 유엔인구기금(UNFPA)과 함께 추진했던 코트디부아르 여성 누공(瘻孔) 치료 및 예방 사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누공은 난산으로 인해 대소변이 새는,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조기 출산, 산파에 의한 전통적 출산 방식, 여성 할례, 열악한 모성보건 시스템 등이 주된 원인입니다. 수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평소 정결하지 않았다거나 저주를 받았다고 여기는 잘못된 시선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가정과 지역공동체에서 쫓겨나 빈곤에 빠지곤 했습니다. 다행히 코이카의 지원으로 수술받은 여성들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직업을 구하고 마을에서 리더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의료 지원을 넘어 사회적 낙인을 극복하고 존엄을 회복한 사례입니다.
 
  우리나라의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지원 모델인 ‘해바라기센터’ 운영 노하우를 베트남에 전수한 사례도 대표적인 한국형 젠더 ODA 사업으로 꼽힙니다. 의료·법률·심리·취업 지원을 한 공간에서 원스톱으로 제공함으로써 피해자의 회복과 사회 복귀를 효과적으로 지원해 202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우수성과사업으로도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김 교수는 이 두 사업을 통해 한국형 젠더 ODA는 ‘제도 전수’와 ‘현장 회복력’을 동시에 강화하는 이중 전략이 핵심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기회의 문은 많이 열렸지만…”
 
  전 세계는 2030년까지 유엔의 글로벌 목표인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SDGs)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빈곤과 기아 종식, 기후 변화 대응 등 총 17개 목표 중 5번째 목표가 바로 ‘성평등 달성’이다.
 
  ― 향후 SDGs와 연계한 젠더 ODA의 전략적 방향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젠더는 SDG 5(성평등 달성)라는 독립된 목표이면서 모든 분야를 관통하는 교차 이슈입니다. 기후, 교육, 기술, 평화 어디에도 젠더가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성 참여율을 높이는 것을 넘어 권력구조와 규범을 바꾸는 ‘젠더 변혁적(gender-transformative) 접근’이 필요합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한국의 젠더 이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김은미 교수는 “과거에 비해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는 기회의 문은 많이 열렸다”면서도 “그 결과가 고용과 임금, 고위직 진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아직은 많다”고 말했다. 여전히 구조적 임금 격차, 고위직 진출 제한, 경력 단절과 돌봄노동 부담 등에서 여성 차별이 심각하고, 사회는 이를 개인의 선택이나 책임으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평등은 불가능합니다. 여성 권한 강화는 남성 권한 약화가 아니라, 모두가 존엄하게 사는 길입니다.”
 
  김 교수는 “성평등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자들만 좋아지자고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소녀와 여성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고, 정의로운 결과를 함께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큰 오해가 여성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남성의 권한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거든요. 성평등은 제로섬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성평등은 갈등이나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남녀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전 그게 ‘더 나은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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