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상대로 국내 민형사 소송 제기
⊙ “김씨 3대 세습 체제에 반드시 책임 물어야”
⊙ ‘출신성분 좋은’ 강사에서 다섯 번 탈북한 생존자로
⊙ “中 경찰의 아이들 접견 금지로 아이들 쇠창살에 매달려 막연히 엄마, 엄마 외치기만…”
崔民京
1972년생. 함경북도 경원군 특권층 출신 / 2012년 1월 다섯 번째 탈북 후 같은 해 10월 대한민국 입국 / 現 북한 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
⊙ “김씨 3대 세습 체제에 반드시 책임 물어야”
⊙ ‘출신성분 좋은’ 강사에서 다섯 번 탈북한 생존자로
⊙ “中 경찰의 아이들 접견 금지로 아이들 쇠창살에 매달려 막연히 엄마, 엄마 외치기만…”
崔民京
1972년생. 함경북도 경원군 특권층 출신 / 2012년 1월 다섯 번째 탈북 후 같은 해 10월 대한민국 입국 / 現 북한 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

- 최민경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 사진=고기정
최 대표는 북한에서 흔히 말하는 출신성분(出身成分·북한에서 사용하는 공민 분류 체계)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네 차례 강제 송환을 겪고 다섯 번째 탈북 끝에 2012년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는 함경북도 온성시 보위부 등 북한의 구금 시설에서 약 5개월간 성적 가학, 물리적 폭력, 비인도적 고문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번 소송에 대해 최 대표는 “북한이 행하는 인권 침해를 알리고자 진행하는 것”이라며 “실익(實益)이 없더라도, 명예 회복, 권리 확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험난한 과정을 감수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의 탈북 이야기 등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 노원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고난의 행군’ 이후 탈북 결심
― 참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총 다섯 번이나 탈북했으니, 제가 생각해도 참 고생 많은 삶이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북한이 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라고 믿었어요. 저는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에 북한에서 강사 일을 맡는 등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 그럼에도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강사 일은 한국으로 치면 아나운서 같은 것이에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업적을 줄줄 외워서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이었죠. 사실 아쉬운 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원이었고, 가족의 출신성분도 좋았죠. 특히 삼촌이 평양에 계셔서 저도 몇 번 평양을 방문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6년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쳤습니다. 그때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어요.”
― 당시 상황이 많이 안 좋았겠군요.
“길거리에 시체가 나뒹굴었습니다. 외신 보도에서는 ‘고난의 행군’ 때 300만 명이 아사(餓死)했다고 하지만, 제가 실제로 겪은 상황과 비교해 보면 5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역전 근처에 시체가 널려 있는 게 일상이었어요. 썩은 내가 진동했고, 구더기가 들끓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각삽이나 거적때기를 들고 나와 시체를 수거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다음 해에는 전염병인 파라티푸스(Paratyphoid fever)가 돌기 시작했죠. 그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함께 첫 번째 탈북을 시도하게 됐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게 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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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강을 건너는 북한 주민들. 사진=뉴포커스 |
― 처음 탈북 과정은 어땠습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하류를 건넜습니다. 목적지는 중국 연변 훈춘에 계신 큰아버지 댁이었죠. 120리(약 32km)를 정신없이 걷다 지쳐 한 가정집 문을 두드렸는데, 하필 그곳이 중국 파출소였습니다. 깜짝 놀라 도망쳐 숨었고, 그때 삼륜차 한 대가 지나가더군요. ‘이게 마지막 기회다’ 싶어 운전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20분쯤 온몸으로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분이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 식사까지 챙겨주셨어요. 다음 날 그의 도움으로 큰아버지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귀인을 만났던 거죠.”
― 탈북 후 중국에서 결혼도 했다면서요.
“북송 위기를 피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친척들의 소개로 중국 연변에 사는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딸을 낳았고, 아이 덕분에 제 신분이 조금은 안정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요. 2000년 4월, 변방대대 군관이 집에 들이닥쳐 저를 끌고 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삼촌이 저를 밀고했더군요. 포상금에 눈이 멀어 가족을 고발한 겁니다. 결국 북한으로 강제 송환될 수밖에 없었고, 갓 돌 지난 딸아이를 보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내가 북한에서 태어난 게 죄구나’라고요.”
“몸무게, 57kg에서 27kg까지 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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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탈북자 가족이 2002년 5월 중국 선양 일본 총영사관 영내로 진입하다가 중국 공안의 제지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생이별도 그런 생이별은 없을 겁니다. 저는 아이 때문에라도 계속해서 탈북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8년 7월, 저녁 10시쯤이었어요.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남편이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도망가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집을 나섰지만, 결국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곤하게 자고 있던 딸아이가 ‘엄마, 엄마!’ 하며 울부짖었고, 경찰은 저에게 달라붙은 딸을 밀쳐낸 뒤 제 손목에 수갑을 채워 끌고 갔습니다. 이후 구치장에 수감된 저를 남편이 딸을 데리고 면회 왔는데, 미성년자라서 면회실에는 들어올 수 없었어요. 수감될 때 언뜻 보니 아이들이 공안국 정문 앞의 큰 철문 쇠창살을 타고 올라가 보이지도 않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던데 이런 상황이라 그랬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 마지막 북송 때 상황은 어땠습니까.
“끔찍했습니다.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전거리 12호 교화소로 이감됐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어요. 어떤 곳인지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반항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정당함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마냥 짓밟힌 거죠. 감방은 비좁고, 사람 냄새, 변기 냄새, 각종 악취가 뒤섞여 있었고, 이·벼룩·빈대가 득실댔습니다.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죠.
임신한 여성들은 강제로 낙태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스(SARS) 2차 유행 시기에 감염됐는데, 2009년 12월 담당 교도관이 저를 ‘죽었다’고 판단하고는 시체실로 보내라고 지시했어요. 그렇게 버려졌다가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당시 몸무게가 57kg에서 27kg까지 줄어, 숨만 붙은 상태로 석방됐습니다.”
― 후유증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
“네 번의 강제 북송을 당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대한민국에 정착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고문 피해 후유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PTSD)라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민등록증 발급된 날 밤새 잠 못 이뤄”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50년부터 2021년 9월까지 북한 내에서 처형·고문 등 인권 침해로 인한 사망 사건은 총 8245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비행장, 장마당, 체육관 등에서 주민을 대규모로 동원해 자행된 공개 처형은 4174건, 도 보안국 지하 처형장 등 외부의 눈을 피해 진행된 비공개 처형은 820건으로 집계된다. 국경 인근 비법 월경자, 구금 시설 탈출 시도자, 강제 낙태로 태어난 신생아 등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한 사례는 219건이며, 고문·영양실조·치료 미비 등 북한 당국의 직접적 조치에 의한 사망 사례도 2318건에 이른다. 그러나 교화소 내 비공개 처형과 시신 화장은 통계에 포함되지 않아 실제 사망자 수는 가늠조차 어렵다는 게 인권단체의 설명이다.
― 다섯 번째 시도만에 결국 탈북을 했습니다.
“제게는 딸이 있었으니까요. 당시 저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가 퉁퉁 부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다리를 절뚝이며 질질 끌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기어서라도 한국에 가야만 산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다행히도 중국과 라오스, 태국을 거치는 죽음의 문턱을 수차례 넘은 끝에 마침내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 그렇게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도착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요.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자 가슴이 터질 듯 벅찼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남과 북이 갈라져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중국에서 강제 북송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공항에 적힌 ‘한국에 잘 오셨습니다’라는 문구가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었어요.
주민등록증이 발급된 날은 꿈만 같아 밤새 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중국에 남겨두었던 딸 또한 2013년 비자를 발급받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에 고마운 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이바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요양보호사 국가 자격증도 땄고, 지금은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직을 맡아 유엔(UN) 등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권 실태를 알리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 갖는 계기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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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민경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왼쪽 두 번째)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검찰에 형사고소장을 제출했다. 사진=NKDB |
“중국 정부는 ‘현재 북한 내 고문이나 대규모 인권 침해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고문방지협약에 따른 강제 송환 금지 원칙이 탈북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매우 무책임한 태도죠. 중국이 자행하는 강제 북송으로 인해, 중국 내 탈북민들은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 탈북민의 경우, 중국 브로커들에 의해 강제 인신매매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중국의 강제 북송을 막기 위한 목소리를 더 강하게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소송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실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소송을 진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씨 3대 세습 체제가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소송이 단지 한 개인의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라,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로서, 그리고 중국에서 강제 북송돼 북한 감금 시설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로서 사명을 갖고 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참혹한 북한 인권의 실상을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 알리고, 생생한 증언을 통해 김씨 3대 세습 독재 정권을 끝장내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